![아임 드리밍 [Ep. 15] 통증미화: 죽음과 다른](https://aimdreaming.imaginariumkim.com/wp-content/uploads/2022/05/15_아임-드리밍-커버-1568x1568.jpg)
1: 오프닝
00:00:00-00:03:05
[Music: Sarah Kang – Make You Mine – Instrumental]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여러분? 날씨가 따뜻합니다. 그리고 날이 맑습니다. 저는 이렇게 믿을 만하게 날이 장기간 맑으면, 슬픈 노래를 듣습니다. 왜냐하면 날이 어두운데 노래까지 슬프면 위험한 반면, 날이 맑으면 슬픔이 운치 있어지는 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팟캐스트는 음악은 아니지만, 저번 주보다 더 슬픈 주제를 가져와 봤습니다. 바로, 통증입니다. 그리고 그에 얽힌 더한 얘기들도 나와요. 죽음. 고문. 자결.
또한 이 모든 것들을 평소와는 달리, 예외적으로, 제가 업으로 여기는 이야기하기라는 행위와 직접적으로 엮어서 다뤄보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잠시 제가 킹받는 구간이 나옵니다. 쇼노츠에 이 구간에 대한 타임코드가 안내되어 있습니다.
이 점들을 염두에 두시고, 취향에 맞을 경우에만 계속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수다, 시작할게요.
[Music FADES OUT.]
2: 독립운동
00:03:05-00:09:04
제가 예전에 독립운동에 관한 어떤 드라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드라마인지 기억이 안 나서 제목을 말씀을 못 드립니다. 이게 하…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고,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씬은 너무나 짧은 1, 2초짜리 씬인 데다가, 거기 나오는 인물이 서사상으로 사이드 캐릭터라서 다시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네이버와 구글 검색에 한두 시간을 썼는데, 못 찾겠어요.
그러나 제가 이 씬을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통증이라는 주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제게 너무 인상 깊었던 이 씬에 나오는 사람은 사이드 캐릭터였고, 독립운동가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인물은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을 돕긴 돕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이렇습니다.
그는 걱정합니다. 자신의 안위를. 독립운동가들은 열정을 불태우며, 이 한 몸 바쳐, 죽는다 하더라도, 고문을 당한다 하더라도, 국경을 넘고, 강추위를 견디고, 가난과 배고픔을 견디고 독립운동을 하는데, 이 인물은 자기 가게를 비교적 평화로이 운영합니다. 그러면서 소심하게, 티 안 나게, 안전하게 도왔던 거죠.
이런 사람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세상에서. 이 인물이 그 가게를 함으로써, 그리고 동시에 숨어 지내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물자나 안전한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이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거니까요.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야 과거를 보며 왜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을 안 했냐고,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못 합니다.
만약 제가 이 드라마에 등장했다면, 저는 딱 이 가게 주인 캐릭터였을 테니까요.
저는 절대로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못 했을 거고, 더 중요하게는, 안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죽는 것보다 무섭거든요, 고문당하는 게.
드라마 후반에 가서는 독립운동가들의 정체가 하나씩 탄로 나고, 이 인물의 가게에도 순사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 인물이 지금 잡히면 이제 끌려가서 고문당할지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자 이 인물이, 그때까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독립운동가들한테 조심하라고 하고, 일제의 눈치를 봐 가면서 가게를 꾸려나가던 것과는 정반대로—그러나, 어쩌면 정반대가 아니라 딱 일맥상통하게—자신의 총으로 자살을 합니다.
정말 순식간이었어요. 1초, 2초. 이 인물은 준비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순간을. 이 순간이 올지도 모를 걸 알고 있었던 거라고요. 내가 고문을 받을지도 모르게 된다면 차라리 스스로 죽겠다고 매일 생각했을 거예요, 이렇게 빨리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으려면.
전 이 상상까지 했습니다. 이건 드라마에 안 나온 부분인데, 저는 이 인물이 총을 빨리 꺼내는 연습을 하는 모습을 나중에 상상했어요.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저놈이 날 잡아서 고문할 수 있기 전에 내가 가장 확실하고 신속하게 죽는 게 중요하니까.
제가 이 시대에 살았다면, 이게 저의 최선이었을 겁니다.
3: 깨어나고 잠드는 것
00:09:04-00:16:38
[Music: Goodbye – Flint]
이 팟캐스트의 거대 테마는 불면증입니다. 잠이란 것, 혹은 잠의 부재는 죽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잠이 죽음처럼 느껴져서 두려울 수도 있고, 아니면 반대로 자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데 못 자서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저는 둘 다 아닙니다. 자는 게 두려워서 못 자는 건 아니고, 자지 않아서 죽을 것 같을 정도로 불면증도 아니에요. 그렇지만 제가 잠에 관련해 죽음을 생각할 때는 언제냐면요, 깰 때입니다.
안 죽고 오늘도 깼네.
이게 뭐. 좋거나 나쁜 게 아니고, 그냥 사실입니다.
그런데 가끔 동시에 또 이런 생각을 합니다. 죽고 싶을 때 죽지 못하는 것이 가장 끔찍할 것이다. 죽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깼기에 망정이지. 죽고 싶은데 깼으면 어떨까?
[Music ends.]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산다고 좋은 건지. 살아 있다고 좋은 건지. 살아 있는 것, 혹은 존재가 선이라고 믿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만약 누가 저한테 와서 죽고 싶다고 한다면,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것 같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래도 살아야지’라고 말하는 게 맞는 건데, 저는 그게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죽고 싶을 정도면, 사는 데에 제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죽고 싶다고 할 정도의 사람한테 제가 간단하게 ‘그래도 살지 그래?’라고 하면 그 사람은 뭐가 됩니까?
게다가 또 하나의 의문이 있죠. 대체적으로 사회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걸 선하다고 보는데, 누가 죽는 걸 도와달라고 하면 어떡하나요? 도와줍니까?
제가 이 의문들 때문에, 이런 상황에 얽힌 인물들이 나오는 소설을 현재 쓰고 있습니다. 이건 논픽션으로 해결이 안 되니까요. 이거에 대한 정답이 나왔으면 법으로 제정되든지, 사회에서 주는 수많은 눈치 리스트에 포함되든지 했겠죠. 그런데 아닙니다.
어… 네, 저는 죽음을 자주 생각합니다.
그런 제가 지금 살아 있는 이유들은 여럿이 있는데, 그중 가장 큰 건 관성입니다. 태어난 상태에서 스스로 죽는 건 죽어지는 것보다 더 큰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아까 말했듯이, 통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는, 살아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습니다. 아직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긴 하는지에 대한 확인 가능한 시나리오가 없기 때문에, 일단 살아 있을 때 할 수 있는 걸 다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러 이유들은 제가 어떤 특정한 길을 뚫지 않았더라면 상관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길은, 다 괜찮지도 않고 다 안 괜찮지도 않은 이 세상에서, 세상이야 어떻든 상관없는 상태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무의 상태로 들어가는 길. 그리고 무의 상태에서 저는 죽음에 대해서도,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가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도 생각 안 합니다. 딱 하나만 생각합니다. 지금 만든 다른 세상. 픽션.
4: 무의 상태
00:16:38-00:26:03
[Music: The Dark Place – GHST MDRN]
픽션에는 처음과 중간, 그리고 끝만 있으면 될 일이지, 답이 없어도 됩니다. ‘답’이란 것과 ‘결말’이나 ‘끝’이란 개념들은 별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개인적으로. 실제 세상에서 해답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논픽션이 아니라 픽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답이 없는 것에 정답을 갖다 붙이면 틀릴 확률이 너무 높으니, 정답이 아닌 해답을 찾는 거죠.
정답과 해답의 표준국어대사전 정의는 서로 다릅니다.
정답: 옳은 답.
해답: 질문이나 의문을 풀이함.
통계. 연구. 실화. 실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애시당초에 정답을 구하기보다는 해답을 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정답을 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저와는 다른 직업을 갖고 계시겠죠? 저는 해답을 구하는 게 낫고, 심지어, 어… 해답을 안 구해야 해답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얘기한, 독립운동 드라마가 그런 케이스입니다. 제가 해답을 구하려고 그 드라마를 본 게 아닙니다. 처음에 보기 시작할 때는 뭐가 궁금한지도 몰라요. 궁금한 게 있는지도 모르고요. 그냥 재밌길래 봤습니다.
그 가게 주인도, 그렇게 인상 깊었으면서 동시에 이렇게 흐릿한 기억인 이유가, 당시 드라마의 거대 서사에서는 이 인물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 2초짜리 씬이라고 했잖아요. 후딱 지나갔습니다. 다시 언급도 안 됐던 것 같고. 저 스스로도 드라마를 보는 와중에는 그냥 넘어갔습니다.
[Music ends.]
그런데 픽션이 자주 그렇듯, 그 세상 안에 있었을 때 가장 주의를 끌었던 것과 그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남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았던 거죠, 이 경우에도.
제 머릿속에 흐릿하지만 선명하게 박힌 이 장면은 정답이 당연히 아니고, 해답도 사실은 아닌데, 저는 픽션 외적인 뭔가를 이 장면 때문에 이해를 한 겁니다.
어… 그 측면에서 해답이라고 봐야 할지. 왜냐하면, 이해란, 꼭 질문에 대한 답이 나와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질문이 없어도 이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픽션을 소비하는 것도 카타르시스지만, 특히나 쓸 때는 압도적으로 무의 상태에 도달하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픽션은 제가 써도 제 얘기가 아닙니다.
이게 궤변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아예 거짓말처럼 들릴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제가 아까, ‘이러이러한 소설을 쓰고 있다’고 했잖아요. 죽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도와야 하는지 마는지에 대한 소설.
그런데 제가 그 사실을 알고 있어도, 그 소설이 제 얘기가 되진 않습니다. 소설 외적의 제가 가진 의문은 소설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별개예요. 다른 작가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소설의 결말도 저와는 별개입니다. 소설의 결말은 그 지점까지 벌어진 모든 일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제가 갑자기 제 생각대로 해피엔딩을 만든다든지 누굴 죽인다든지 하면 슈방구가 돼요.
시즌 1에서 탈중앙화에 관해 얘기하다 잠깐 언급했었죠. [섹션 8: 21세기 금서주의자 활동 예시] 어떤 단편 소설을 읽고 어떤 사람이 이런 평을 했습니다. ‘이 글은 젠더 이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백인 남성이 쓴 글 같다.’ 근데, 알고 봤더니 작가가 트랜스 여성이었습니다.
이런 겁니다. 픽션을 보고 그것을 만든 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독심술사가 아니면 추측하기 매우 힘듭니다. 심지어, 저 같은 경우에는, 당사자, 작가인 저도 제가 뭔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모르니까 쓰는 겁니다.
저는 제가 알거나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픽션을 쓰지 않습니다. 제가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으면 픽션 작가가 안 됐을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여러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겁니다. 뭔가… 단 하나의 절대 소설을, 절대 반지처럼 쓰려고 했겠죠? 그건 오히려 제가 갖고 있는 이야기론과 완전 반대의 길입니다.
그래서 ‘무의 상태’가 가능하고, 그걸 좋아하는 겁니다. 이게 취향이에요.
이 캐릭터들이 막 돌아다닙니다. 저는 그걸 구경합니다. 그러면 머리가 엄청 시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없거든요. 죽음? 삶? 생각 안 합니다. 극중 얘네가 그거에 대해 얼마나 많이 얘기하든, 제 얘기가 아니에요.
얘네가 막 얘기를 하면 저는 쏟아지는 걸 받아적습니다. 하늘에서 막 돌이 떨어지는 것 같단 말이죠. 돌이 우두두두 떨어지는데, 그것들을 거대하고 가벼운 바구니에 담으려고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는 난쟁이가 저입니다. 그러고 그걸 잽싸게 하늘에 있던 모양 그대로 똑같이 땅에 늘어놓는 작업을 합니다.
5: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상태
00:26:03-00:33:51
[Music: In Viaggio Verso l’Alba – Andrea Musci]
저는 이 무의 상태로 가는 데에 성공하거나, 성공은 못 해도 가려고 노력하는 데에 대략 10년을 썼습니다. 이 과정에서 논픽션도 쓰고 있는 겁니다. 궁극의 무의 상태, 픽션의 세계로 가는 것을 계속하기에 스태미나가… 좀 부족해요. 픽션을 쓰면 배가. 배가 너무. 너무. 정말 너무 고파요.
아무튼 이렇게, 10년 동안, 저는 어제 안 쓰고 오늘도 안 썼으면 내일은 썼습니다. 즉, 3일에 한 번은 썼단 얘깁니다. 시나리오. 소설. 팟캐스트 대본. 뉴스레터. 픽션. 논픽션.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야기하기’라는 행위를 ‘통증’과 묶어서 한 에피소드에서 다루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3일에 한 번이라도’라는 이 최소치를 너무 간당간당하게 지키면, 즉, 말은 3일에 한 번인데, 그 한 번에 뭐… 겨우 100자를 썼어. 그렇게 되면…
제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상태가 됩니다.
어… 걸어는 다녀요. 잘 걷고요. 사람도 만나고. 운동도 잘 합니다. 그런데 식욕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잠을 어마어마하게 잡니다. 너무 이상하죠? 평소에는 잠을 못 자는데, 이야기를 너무 쪼끔 하면 잠을 엄청 잡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도 좋은 종류의 잠이 아닌, 우울감의 잠입니다. 제가 태어나서 가장 무용했던 때가 2019년 10월이었는데, 이때 한국에 한 달 정도 있었거든요?
장소를 이동해서인지, 오랜만에 한국에 가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글을 못 쓰는 거예요, 제가. 이때 진짜. 책상 앞에 아무리 앉아도 뭐… 막 하루에 100자, 이렇게 썼습니다. 하루에 100자면요.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이게 27자입니다. 이거를 4번 반복하면 100자가 넘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고만큼 쓴 거예요.
킹 심각하죠?
그런데 그래도 앉았어요, 책상 앞에. 적어도 하루에 30분이라도. 왜냐하면. 그때는 그래도 글을 쓰기 시작한 지 8년 정도 됐을 때라서, 안 써져도 쓰려고라도 해야지 나중에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이야기하는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단 걸 알았어서, 오기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네. 이게 제 유일한 기준입니다. 글을 실제로 쓰느냐 마느냐. 다른 건 아무것도 관심없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외적 요소들, 관심없습니다.
글을 썼냐고. 실제로 썼냐고.
[Music ends.]
그래, 아플 때도 있고, 비행기 탈 때도 있고. 누가 죽을 수도 있고. 태어날 수도 있으니까. 백번 양보해서, 어제 안 쓰고 오늘도 안 썼으면 그래도 내일은 반드시 써야지.
아파도 출근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 그러지 않나요?
부상을 입고도 운동선수는 경기에 나갑니까, 안 나갑니까? 정말 심각한 게 아니면 웬만하면 나가지 않나요?
없는 시간 쪼개서 퇴근하고 장 보고 애 키우고 뭐 하고 뭐 하고 다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칭 ‘이야기하는 자’가 3일에 한 번도 글을 안 써?
이것은. 이렇게 되면 첫째로, 창피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둘째로, 어차피 안 쓰면, 이렇게 됩니다. 2019년 10월, 제가 가장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달처럼 된다고요.
즉, 제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고통스럽더라도 노력하라는 의미에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글이 안 써져도 쓰려고 하는 게 가장 안 고통스러운 길이었단 얘기를 하는 겁니다.
6: path of least resistance
00:33:51-00:46:38
[Music: The Path – Patrick Ussher]
Path of least resistance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저항이 적은 길. 픽션 이야기를 플로팅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인데, 왜 자주 등장하느냐 하면요, 바로 이 ‘가장 안 힘든 길’로 가야 픽션이 믿을 만해져서 그렇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인간이 덜 어려운 길을 두고 더 어려운 길로 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리고 픽션은 그 실제와 흡사하다는 믿음을 줘야 합니다. 실제보다도 더 실제 같아야 픽션이 통해요.
외부에서 보기에는 어떤 인물이 가는 길이 매우 어려운 길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외부의 시각인 겁니다. 만약 그 인물 본인이 보기에도 그 길이 가장 어려운 길이면, 절대 그 길로 가지 않습니다. 인물 본인, 즉 내부의 시각에서 보기에도 어려운 길을 택하는 걸로 이야기를 풀면, 관객 혹은 독자는 더는 픽션 이야기를 믿지 않게 됩니다.
[Music ends.]
자. 아까 말한 가게 주인은 고문당하기 싫으니까 일본 순사들이 오면 즉시 자결할 총을 준비해두었지만, 그는 또 독립운동가들을 아예 안 돕진 않았습니다. 왜냐? 제 추측으로는, 아예 안 도왔으면 살 수가 없었을걸요? 저는 이해가 갑니다. 이 사람이. 제가 딱 이 사람이니까요. 아예 아무것도 안 돕고는 창피해서 못 살았을 겁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다는 것에 스트레스받아서, 위험하더라도 소심하게나마 돕는 게 속 편하니까 도왔을 거예요.
그리고 이 드라마에 나오는, 좀 더 직접적으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도 ‘가장 저항이 적은 길’로 간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요, 이 인물들은 내 나라를 빼앗기곤 살 수가 없으니까, 타인이 보기엔 불가능에 가까운 길인데도 그들 본인에게는 가장 저항이 적은 그 길로 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운동의 가치가 덜해진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덜 멋있어지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이 사람들이 스스로 ‘나는 남들이 멋있다고 하는 킹 어려운 길로 가야지’라고 결정한 게 아닐 거란 뜻입니다. 그렇게 결정하는 순간 픽션에서는 관객에게 그게 어차피 탄로 나고 캐릭터가 무너집니다. 더는 이 캐릭터가 하는 행동을 믿을 수가 없어지는 것이죠. 상상을 해보세요. 독립운동가 캐릭터가, 남들이 자길 어떻게 보나 신경 쓰느라 독립운동을 한다고.
물론. 그런 경우에조차, 그 사람이 하는 독립운동이라는 일 자체가 덜 멋있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완전 다른 이야기가 될 거란 뜻입니다.
특히나 픽션에서는 마지막에 인물의 진짜 결이 드러나는 순간이 옵니다, 대개는. 그걸 관객을 위해 풀어주지 않으면 픽션은 카타르시스를 놓칩니다. 당사자에게 정말로 진정으로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이 무엇이느냐에 따라서, 마지막 피날레에 갔을 때의 도전 과제? 최종 보스?가 결정 됩니다. 이때 캐릭터의 진짜 동기가 탄로 난단 말이죠.
논픽션, 실제 생활에서는 인물이 자신의 진짜 속내를 타인에게 비밀로 할 수야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겠는데, 속사정이야 어찌 됐든 겉으로 드러난 독립운동이 덜 중요하고 덜 멋있어진다는 게 전혀 아니에요. 하지만 그 사람 스스로는 계속해서 외부 요소의 영향을 받게 될 겁니다. 외부에서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 그리고 실제 삶이라고 해서 과연 그 마지막 순간, 카타르시스의 순간이 안 올까요?
요지는 이겁니다. 겉보기에는 같은 길을 가도, 사실은 완전히 다른 길인 경우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다 각자의 사정이 있어서, 외부에서 봤을 때는 내부에게 그 길이 힘든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경험해온 것. 미디어를 통해 소비한 것. 혹은 소비하지 않은 것. 모르는 것. 내가 동경하는 것. 내가 경멸하는 것. 기타 등등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나’라는 개인에게 있어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이란 게 뭔지를 결정합니다.
추측해보자면, 독립운동가로 나오는 인물들은 자부심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기는 겁니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국가에 대한 자부심. 혹은 자신의 부모. 자신이 자란 땅. 자신이 먹으며 자라온 음식. 부르며 자라온 노래. 맡으며 자라온 식물들의 냄새.
이 모든 요소들이 다 합쳐져서, 이들에게는 독립운동을 안 한다는 게 말이 안 되게 되는 겁니다. 외부에서 보기에 이들이 어려운 길을 가는 것과는 아무 관계 없이, 아침에 일어나서 ‘독립운동을 안 하는 나’로 산다는 것이 지옥 같은 거라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에 나오는 독립운동이랑 최대한 거리를 두려는 인물들도 이해가 갑니다. 너무 무서우니까. 독립운동이랑 아무 상관도 없는 게 가장 덜 힘든 길처럼 보이니까.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와 소설들에, 일제에 독립운동가를 고발하는 인물들이 나옵니다. 실제 세상에서도 있었을 겁니다. 외부에서 볼 때는 ‘뭘 저렇게까지 하나? 그냥 가만히나 있지?’ 싶을 정도로 진짜 너무 열심히 고발하는 인물들도 있는데.
그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 않나요? 무서우니까 그랬겠죠. 당사자는 자기가 봤을 때 가장 저항이 적은 길로 간 겁니다.
아무튼. 이 ‘저항이 가장 적은 길’ 얘기를 왜 하느냐면요. 아까 말한 저의, 스스로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한 달 동안 그렇게 굳이 책상 앞에 앉은 게 ‘가장 저항이 적은 길’이었단 점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당시에 겉보기에는 아무도 몰랐을걸요? 왜냐하면 식욕이 없는 와중에 햇빛은 많이 받고 운동도 자주 해서, 살이 적당히 빠졌었습니다. 건강해 보였고요. 잠도 많이 자니까 피부도 좋아지고. 뭐, 만날 사람 만나고. 돌아다니고.
그러고서 집에 와서 글을 못 썼습니다. 뉴스에 누가 죽었다고, 자살했다고 나오면 울었어요.
나는 이런 상태가 장시간 지속되면 죽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점 전에도 그랬지만 이후에 더욱더, 제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이 기준점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결정이 내가 오래 많이 자주 글을 쓰는 데에 도움이 되는가.’
그게 저한테는 ‘가장 저항이 적은 길’입니다. 외부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7: 킹받는 구간 – 프로의 세계
00:46:38-00:57:39
[Music: Coffee Break – Flint]
자, 설정이 길었습니다. 처음이 길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처음, 중간, 끝 중에서 이제 중간으로 갑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는 거죠. Top-heavy한, 머리가 크고 몸뚱아리와 발이 작고 홀쭉한 이야기.
저는 이렇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 죽는 것보다 고문당하는 게 무섭고요. 아프고 힘들려고, 고뇌하고 괴로우려고 글을 많이 자주 오래 쓰는 게 아닙니다.
자. 그런데. 이런 제가 대략 칠 개월 전부터 골프를 시작했습니다.
골프를 칠 때 저한테 가장 중요한 건, 글을 처음 시작했을 때 제가 직접 했거나 목격한 실수들을 반복하거나 따라 하지 않는 겁니다. 골프와 글 사이에 비슷한 점이 꽤 있어요.
혼자 할 수 있다는 것. 잘 관리하면 평생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두 분야 모두에서 빨리 타버리는 패턴이 있다는 것. 즉, 온갖 힘 줄 걸 다 줘서 부상 입고는 다시는 평생토록 골프를 못 치거나 글을 못 쓰는 경우가 있다는 것.
[Music FADES OUT.]
자. 여기서부터 지금 이 섹션이 끝나는 지점까지 킹받고 갈게요.
어느 날.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정도 전. 즉, 제가 골프를 친 지 5개월 정도 된 시점에. 골프 연습장에서. 어떤 자가 저한테 이런 말을 했습니다.
[Music: Wandering Caterpillar – Scene 1 – Maya Belsitzman & Matan Ephrat]
자기가 저를 계속 봐왔는데, 너무 못한다고. 자기가 보고 있기가 답답하다고. 자기는 골프를 40년 쳤다고. 자기는 사실 골프 선생이라고.
그러면서 이자가 저한테 별별 훈수를 두는데, 그중 이 에피소드와 연결 지어야 하는 부분은 이거였습니다. 절더러 손이 아프도록 골프를 쳐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손이 아프도록 골프채를 세게 꽉 쥐어야지만 제가 이렇게 못 치는 걸 해결할 수 있다는 거예요. 심지어, 손이 안 아파서 못 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일단 어… 이자는 아주 여러 가지 차원에서 머저리인데. 이 에피소드와 관련이 없는 머저리성은 딱 하나만 말할게요.
골프장에서 지가 남을 왜 5개월을 봐와. 개소름 변태 새끼.
[Music ends.]
아무튼 이 에피소드에서 중요한 머저리성 중 하나는 이거입니다. 이자가 프로가 아니라는 점. 자기가 선생이라는데, 프로일 리가 없습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이 회사에 다닌다고 가정해봅시다. 여러분 같으면 회사에서 하는 일만으로도 피곤한데, 그거 관련된 업종의 일을 공짜로 하고 다니시겠어요? 말도 안 되죠. 내놔라, 내 돈을. 열정페이 꺼져라. 이러시겠죠?
프로는 자기 분야에서 아무한테나 아무렇게나 훈수를 두고 다니지 않습니다. 정말 프로면 지금 당장 시간당 돈을 받든. 지적 재산이나 물리적 재산을 만들어서 부를 쌓든. 물물 교환을 하든. 마케팅 목적으로 무료 서비스를 해서 포트폴리오를 쌓고 지지층을 늘리든. 자원봉사를 해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든. 그러겠죠.
이자는 프로가 아닌 거예요.
그런데 한아임은 프로입니다. 골프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자. 이런 통계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현대인의 엄지손가락은 스마트폰 액정을 스크롤하는 과정에서 1년에 마라톤 2개에 버금가는 거리를 달린다고 합니다.
표현이 재밌죠? 엄지손가락으로 스크롤만 평균적으로 해도, 그 엄지손가락이 마라톤 2개에 버금가는 거리를 1년 안에 달린다고요.
그런데 한아임의 업이 뭐게요? 이야기하기. 여기에는 오리지널도 포함하고, 번역도 포함합니다.
그러면 이쪽 업계에서 프로로 일하는 사람들의 손가락들은 1년에 마라톤 몇 개를 달릴까요? 최소 10개, 아마 2, 30개에 더 가까울 것으로 추측합니다.
제 경우에는 잘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이거나 심한 통증은 없습니다. 그런데 통증이 언제나 없진 않고, 통증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어요.
근데 거기다가 일부러 통증을 얹으라고? 심지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골프 치려고?
일단 어… 불필요하죠. 제가 골프치면서 손이 하나도 아플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골프를 치면 얼마나 치겠습니까? 골프 프로가 아닌데.
만약 조금 치는 걸로 그렇게 금방금방 손이 아픈 운동이라면, 나이 드신 분들은 어떻게 치시며, 쪼그만 애기들은 어떻게 칩니까?
나이 드신 분들이나 어리신 분들 중 진짜 뻥뻥 치시는 분들 엄청 많습니다. 걷는 게 불편해 보이시는데도. 그분들은 도인 같으세요. 아무 쓸데 없는 힘이나 통증 부심 없이 휙, 쳐서 공을 휙 보내십니다.
하여튼. 골프는 뭐, 솔직히 저한테 별로 안 중요해요. 그런데 만약 제가 이자 말을 듣다가 제 손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아파졌다면, 이자는 제가 그것 때문에 쓰지 못했을 이야기들의 값, 번역하지 못했을 이야기들의 값, 거기다 제가 반드시 겪었을 우울증의 약값, 그리고 결국엔 제 목숨값까지 갚아야 했을 겁니다.
이자가 이 모든 것을 뭘로 갚죠? 못 갚습니다. 이자가 가진 것 중, 이자의 돈과 목숨을 포함해, 저한테 유용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이렇게 밥줄과 목숨줄에 해가 되는 자가 할 수 있는 기능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통증에 대한 팟캐스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겁니다.
참고로, 뉴스레터 받아보시는 분들을 위해 추가 설명을 드리자면, 지금 언급한 이자는 전에 뉴스레터에 등장한 골프장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닙니다. 네. 골프장에 이상한 사람이 한 명이 아니더라고요.
아무튼, 드디어, 통증 미화 얘기를 본격적으로 하겠습니다.
8: 통증미화
00:57:39-01:08:11
[Music: Reside – Ben Potter]
저와 다른 업종이어도 이런 상황이신 분들 꽤 계실 겁니다. 손이 중요한 상황이신 분들.
요리하시는 분들. 그 무거운 후라이팬을 들고, 활활 타오르는 불 옆에서 칼질을 반복하시죠.
또는 여러 사람을 위한 살림을 혼자 도맡아 하시는 분들. 사람 한 명이 자신 외의 사람들을 위한 빨래, 요리, 장보기, 청소, 기타 등등을 다 하는 건 엄청나게 몸을 혹사시키는 일입니다. 게다가 은퇴도 없어요. 승진도 없어요. 휴가도 없어요.
자. 어떤 분야에서든, 프로라는 단어는 반복을 내포하고, 따라서 통증을 유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아프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다 보니 아파지는 겁니다.
아픈 것은 성취가 아닙니다. 어딘가가 아픈 것과, 그 아픈 것을 기준점으로 삼는 것은 별개예요. 아픔은, 아프니까 그만 아파야겠다는 것 빼고는 그 어떤 기준도 아닙니다.
그것을 알아도 아플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분야에서든 그 분야가 업이라면, 아픔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할 순 있습니다. 생계 때문일 수도 있고, 좋아서 하는 일일 수도 있는데, 이러나 저러나, 하던 일을 안 하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금전적, 심리적, 신체적 통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갑자기 멈출 수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아픔이 그 자체로서 목적인 게 말이 됩니까? 아프려고 노력하는 것이?
[Music ends.]
번역계와 글계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파요. 일을 너무 많이 해서요. 그런데 이 사람이 이걸 고칠 생각을 안 합니다. 대개는, 자신의 이런 고통을 알아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병원에서 링거 맞을 정도로 힘들게 일한다.
나는 이렇게나 통증이 심한데 다른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일하니까 그들은 필시 대충 하는 것일 것이다.
내가 힘드니까 돈을 더 받아야 한다.
나보다 빨리 일하는 자는 나보다 일을 잘할 리가 없다.
괴롭지 않고 얻은 열매는 금방 썩는다.
이 말들을 실제로 합니다. 누가 속으로 생각한 걸 제가 상상하는 게 아닙니다.
이 당사자에게는 ‘저항이 가장 적은 길’과 고통이 너무나 연관 지어져 있는 겁니다. 이 사람의 삶에서, 어떤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고통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있는 게 없다고 믿게 된 겁니다.
이 상황에서 타인이 ‘왜 나한테 아픈 걸 자랑합니까?’라고 대놓고 물어봐도 이들은 질문을 이해를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아픈 게 자랑이 아니었던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요. 이런 질문을 하는 자를 바로 게으르다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근데 괴로운 거랑 뭔가를 얻는 건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별개예요.
만약 괴로운 것과 뭔가를 얻는 것이 정비례하거나 대강이라도 비례했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신체적 심리적으로 힘든 사람이 가장 뭐, 돈도 많고, 건강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그래야 했을 텐데, 아니잖아요.
저는 아까 언급한 그 골프장 망상 훈수꾼을 마주치기 전에는 통증 미화가 글계과 번역계에서 좀 나타나는 현상인가 싶었습니다. 육신의 소중함을 모르는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인 줄 알았어요. 머리가 물리적 도구라는 걸 망각하고, 정신으로만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한다고 여기는 경우에.
그런데 골프장에서 이자를 보아 하니, 그게 아닌 거더라고요. 더 뿌리 깊은 ‘가장 저항이 적은 길’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한테는 통증이 너무 거대한 저항인데, 오히려 그걸 원해서 그리로 가는 경우가 실제로 있는 것 같아요. 통증이 부산물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인 경우, 혹은 목적과 동일시되는 경우.
통증 미화는 사회 곳곳에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있는데, 아픈 건 스웩이 아닙니다.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아야 하는 겁니다.
거기다가, 학창 시절에 ‘노력 점수’라는 게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뭐, ‘태도 점수’ 이런 식으로 프레임될 때도 있는데.
어… 이것이 아주 나쁘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여기에 대한 연구 결과도 많으니까요. ‘결과만 생각하는 것보다는 노력도 칭찬해줘야 한다. 그래야 너무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과정에서 배워나갈 수 있게 된다.’
네. 이게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청춘이 아픈 것이 죄라는 건 아니고, 부끄러워할 일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자랑할 일은 아니라는 거죠. 목적 삼을 일은 아니라고요. 통증의 존재가 아니라 미화가 문제입니다.
아픔을 아픔으로서 받아들이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힘들고 아프고 괴롭고 서럽고 눈물 나고 억울할 순 있지만, 그 힘듦, 아픔, 괴로움, 서러움, 눈물, 억울함을 그로테스크한 긍정주의로 승화시킴으로써 그것들을 좋다고 여기며, 그것들을 향해 가고, 그것들을 기준점 삼는 것보다야 백번 낫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의 상태’ 때문에 삽니다. 괴로움, 아픔, 통증 없이도 잘만 살아요. 제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로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의 고통은 결과와 별로 관계가 없더라고요.
9: 마무리
01:08:11-01:11:28
[Music: To the Moon and Back – Ty Simon]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여러분. 통증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 않습니다. 안 아프다고 아름다운 게 안 아름다워지지도 않고, 아프다고 안 아름다운 게 아름다워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에피소드를 끝까지 들으셨으니까 여러분은 아무래도 통증 미화주의자일 확률이 적을 것 같으니, 하시려는 일을 되도록 안 아프고 하실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무슨 일이든. 벌고자 하는 것이 돈이든, 다른 좋은 것이든.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제가 글 쓰는 것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홈페이지에서 Raw Depiction 뉴스레터를 구독하시면 됩니다. 영어랑 한국어가 같이 있는 뉴스레터입니다. 제가 영어랑 한국어로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Music ends.]
모든 링크
- 00:22:54 — 탈중앙화 에피소드에서 언급했던 작가에 관한 외부인의 착각 이야기 (섹션 8: 21세기 금서주의자 활동 예시)
- 00:34:49 — Path of least resistance
- 00:53:02 — 일반적인 현대인의 엄지손가락은 스마트폰 액정을 스크롤하는 과정에서 1년에 마라톤 2개에 버금가는 거리를 달린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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