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9] 시간편집: 협소한 나눔 속 허락된 유일한 ㅁr약…☆

[Ep. 19] 시간편집: 협소한 나눔 속 허락된 유일한 ㅁr약…☆

1: 오프닝

00:00:00-00:03:08

[Music: Sarah Kang – Make You Mine – Instrumental]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여러분? 틀이란 역시, 남이 가하면 분노가 치밀지만, 내가 정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를 더 많이 만들어내는 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상의 6층 빌딩이라는 틀이 있으니까 오히려 연결시킬 주제가 더 많이 떠오르더라고요. 빌딩이라는 것은 의식주 중에 주, 대개 가장 돈이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쓰게 되는 부분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안에서만 돌아다닌다고 해도 상당히 자유롭더라고요. 게다가 상상은 한계가 없으니까요. 좋은 것 같습니다.

이리 하여, 제가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지점을 이 빌딩 내부에서 찾았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뭔가를 하며 보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 하는 일. 제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가 연결되는 경우에 하는 일. 그것과 이 빌딩이 연결되기도 하더라고요.

음악. 그로테스크. 이 두 가지가 그 연결의 테마입니다.

 이것들에 대한 오늘의 수다, 시작할게요.

[Music FADES OUT.]


2: 멜로디의 희소성

00:03:08-00:07:48

여러분. 저는 음악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특히 어렸을 때, 글을 쓰겠다고 생각조차 안 했을 때는 대부분의 시간을 음악으로 채웠습니다. 제가 행하는 음악이 아니라 듣는 음악으로 채웠고, 때마침 휴대용 음악 기기—MP3라든지, 나중에는 아이팟이라든지, 더 나중에는 아이팟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용량이 크고 비교적 가벼운 스마트폰이라든지—이런 것들이 발달해서, 돌아다니면서 음악을 듣기 딱 좋아지기 시작하던 시대에 자랐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게 굉장히 최근 일이란 말이죠, ‘내가 휴대할 수 있는 음악’이라는 개념이. 옛날 옛적의 사람들은 음악회장에 가지 않으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을 수 없었을 거고, TV나 컴퓨터도 없었으니 내가 직접 소리를 내지 않으면 정적이 유지되는 때가 꽤 많았을 것 같습니다.

비트는 있었을 것 같아요. 박자가 있는 무언가. 그러나 멜로디는 잘 생각해 보면 귀합니다. 흔치 않고. 어디 공기 중에 돌아다니는 걸 잡아 끌어와서 내뱉어야 생기는 게 멜로디인 것 같습니다. 새 지저귀는 소리에 멜로디가 약간 있긴 하지만…

여러분 동네의 새는 어떻습니까? 저희 동네에서는 똑같은 새들이 맨날 똑같게 울어요. 인간이라면, 새를 특별히 좋아하시는 분들이 아닌 한 새의 말뜻을 잘 못 알아들으니까 그게 멜로디처럼 들리지만, 새들은 의사소통으로서 우는 거라면서요. 그러니까 얘네가 아침마다 하는 말이 맨날 똑같은 겁니다. 아마 그런 건가 봐요. 맨날 같은 시간에 새벽같이, 꼭 해 뜨기 직전부터 아주 그냥 똑같게. 따라하기도 힘들게 웁니다. 한… 2에서 3초나 되는 꽤 긴 길이의 울음으로 우는 어떤 새가 저희 동네에 살아요. 그런데 이 울음이 너무나 중복적이라서 멜로디라는 생각조차 안 드는, 그런 울음입니다.

심지어 그냥 종류만 한 종류의 새가 아니라, 같은 개체가 우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얘가 이렇게 2에서 3초를 울잖아요? 그러면 저어어어어기 멀리에서 답신이 들려 옵니다. 얘 주변에 얘랑 같은 언어를 쓰는 애가 별로 없는 것 같단 말이죠. 즉, 저희 집 바로 근처에서 우는 개체는 혹시 늘 같은 개체인 게 아닌가. 이런 추측을 합니다. 뭔가… 단위면적당 특정 수의 새만 사는, 그런 종의 새인 것 같은데.

아무튼. 새. 그 지저귐에 멜로디가 있긴 하지만. 완전히 음악적이라기에는 멜로디가 너무 짧고 반복적이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3: 오막, 아임의 음악 프로젝트

00:07:48-00:15:52

[Music: Friends – INOSSI]

아무튼 그래서. 제가 음악을 좋아해서. 그리고 저는 이야기하는 자이니까. 이 모든 것들을 ‘음악 편지’라는 틀로 엮어서, 올해 한여름부터 오막 친구와 프로젝트를 하기로 했습니다. 뉴스레터라는 매체를 통해서요. 7월쯤, 이 팟캐스트의 이번 시즌이 끝날 때쯤에 이 프로젝트를 세상에 내놓기 시작할 준비가 끝날 것 같습니다.

세상에 내놓기 시작한다 함은, 이것이 ‘짠’ 하고 내놓고 며칠 후에 끝나는 형태의 프로젝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놓는 그 순간은 시작에 불과한, 그런 종류의 일입니다.

전반적으로 저는 뭔가를 잔잔하게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몇 번의 거대 이벤트가 있고 끝나는 형태보다, 잔잔하게, 지속적으로, 영원히! 죽을 때까지! 하는 걸 좋아합니다.

물론. 과연 정말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전반적인 취향은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아무튼, 오막 친구.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한아임이라는 필명과 그 필명을 만든 사람 사이의 연결 고리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인, 오막이.

오막이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고요. 심지어 이름이 음악이라는 단어와 라임이 됩니다. 오막. 음악. 그리고 한아임. 참… 이응과 미음이 많네요.

아무튼, 시즌 1의 에피소드 2에서 잠시 말씀드렸듯이… 사실 저도 이 오막 친구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음악 편지’라는 것을 저희가 교환하면서도 뭔가… 저희끼리 논다는 느낌보다는, 어차피 저희도 서로 잘 모르고 살짝만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편지를 받아보시는 분들이 좀 내부자의 느낌을 가지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처음 듣는 얘기는 저도 처음 듣는 얘기일 확률이 매우 높거든요.

이것이 재밌는 형식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요, 시점 차이 때문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시점이 여럿인 경우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있더라도, 다른 인물들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기도 하는 경우. 심지어 어떤 때는 같은 씬을 여러 인물이 각자의 시선에서 표현하는 게 이야기 전체의 핵심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진짜, 현실, 사실이라는 개념들이 얼마나 유동적인가에 대하여. 인간은 원래가 자기 세상에서만 삽니다. 그 세상을 확장하거나 축소할 순 있지만, 자기 세상을 벗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일반적으로 미쳤다고 표현하죠. 자기가 누군지 모르고 다른 사람인 줄 안다든가.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든가.

이런 무서운 일을 직접 겪지 않고 여러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점이 여러 개인 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입니다. 책일 수도 있고, 유튜브도 좋고. 상대방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는 건 오히려 이 목적에는 부적합하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대화에서는 혼잣말보다 더 객관적이지 않게 됩니다.

누군가 지켜보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서술하는 것이 더 진짜…? 진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면 인물 A의 진짜가 있고 인물 B의 진짜가 있으며, 또한 A가 보는 B가 있고 B가 보는 A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 바깥의 세상은 없는. 그것이 이 프로젝트의 컨셉입니다.

이 뉴스레터의 구독자님들이 저희의 글을 보시고, 저희가 아마 인스타그램을 할 것 같아요. 국제적으로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구 중 하나가 인스타그램입니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으로 외부 세계와 얘기도 하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편지를 쓸 때는, 저는 오막에게 쓰는 거고 오막은 아임에게. 그것이 아름다울 것이다. 이 뉴스레터의 이름과 상세 사항은 7월쯤에 나올 것이다.

[Music ends.]


4: 시간의 재구성

00:15:52-00:21:29

제가 어렸을 때, 특히나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음악을 많이 들었던 이유는, 음악이 시간을 담고… 어… 그 흐름을 표시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라고 최근에 들어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시간은 그냥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흐르는지 흐르지 않는지 모릅니다. 아니, 그보다는, 흐르기는 하죠. 실질적으로 흐르기는 하는데, 그 흐름이 너무나, 평소 생각보다 너무나 느려서, 그 느림이 숨막히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왜 그… 눈으로 보이는 세상도, 갑자기 슬로우모션 효과를 씌우면 이게… ‘움직이긴 하는데 움직이는 거야 아니야?’ 하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평소에 뇌가 인지하던 것과 템포가 너무 달라서 어지러운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시간의 경우에도 그런 느낌이 드는 겁니다. 시간의 그 어마어마한 범위, 방대함, 무한한 가능성이 파도처럼 사람을 덮친다고요. 시간의 성질은 그대로이고 그저 내가 가만히 있음으로 해서요. 이것이 존재의 리얼리티 중 하나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갑자기 시간의 거대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편집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어떤 일에 몰두를 하면, 그 몰두의 안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사라질 정도로 무아지경에 빠지지만, 그 밖으로 나오면 시간이 흘렀음을 갑자기, 한꺼번에 깨닫게 되잖아요.

아침부터 게임을 하다가 도저히 배고파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길래 정신을 차려보니 밤이 됐다든지.

저녁 때 책을 집었는데 하도 재밌어서 계속 읽다가 시계를 봤더니 새벽 3시가 됐다든지.

이런 게 제가 말하는 시간 편집입니다. Flow state. 거기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머리가 아주 청명하게 시원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시간의 그 무게가… 너무 무거운 겁니다. 무편집의 그 방대함이. 명상을 5분만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이유가 이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요히 흐르는 시간을 마주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이 무게의 괴로움을 자각해서 도피를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무게의 괴로움을 자각할 새도 없이 살아남느라 바쁠 수도 있는데, 이러나저러나 인간은 웬만해서는 잘… 시간을 온전히 느끼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1초만 쉬는 시간이 생겨도 스마트폰 액정을 켜봅니다. 별로 확인할 것도 없으면서. 그냥 습관적으로, 이 남는 시간을, 시간의 공백을, 뭘로 채우지 않으면 바라봐야 하는 부담을 아는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음을 견디는 그 부담을.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무의 상태를 두려워하는 건가, 싶습니다. 역사적으로 존재와 팽창이 선이라고 여기는 각종 종교와 정치와 사상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 더 목소리가 커왔던 이유 중 하나가 이 때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무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해준다고 주장하는 쪽은, 그것이 아무리 거짓일지라도, ‘그것은 해결이 불가하다’고 말하는 쪽보다 머릿수 싸움에서 이기기 쉽습니다.


5: 이즘과 무관심

00:21:29-00:38:35

[Music: Kinderszenen, Op. 15 No. 1, Von fremden Ländern und Menschen – 1st Mvt – Bishara Haroni]

이렇듯 무편집본의 시간은 압박이 심하기 때문에, 제 경우에는 어렸을 때 음악을 가장 많이 들었던 겁니다. 가장 벗어날 수 없는 닭장에 있었을 때. 감옥에. 학교에.

이 안에 들어 있는 시간을 제가 없앨 수가 없어서 음악을 들었습니다. 도피성으로. 이 환경에서 제가 시간을 편집할 수 있는, 가장 티 안 나는 방법이 머리카락으로 이어폰을 가리고 교복 안에 이어폰 줄을 집어넣어서 아이리버로 음악을 듣는 것이었었어요. 그 외에는 티 안 나게 몰두할 거리가 없었습니다.

학교 수업은…  교과서 보면 웬만하게 시험 보는 거에 몰두하기란 불가합니다. 게다가 그냥 수업이 지루하기만 한 정도면 다행인데, 당시에 가르치던 걸 생각하면, 현기증이 납니다. 당시에 대한민국은 하나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쳤었거든요. 그리고 저는 그 단일민족에 완전하게 포함될 자격 요건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그때 이미 그랬어요.

기사를 찾았습니다, 2006년 기사. 여기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현행 역사. 도덕 교과서가 ‘단일민족’의 전통을 강조한다.”

그러니 지금 정치에서 다민족주의를 밀 때 그게 일부 사람들에게 반발을 사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상태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상태입니다. 단일이든 다이든 민족이라는 것이 단일이 좋다고 해서 단일스러워지고 다가 좋다고 해서 다스러워집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단일이 좋다고 주입식으로 가르쳤었고, 이제 다가 좋다고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제가 양쪽 중 어느 하나가 더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좋다고 가르치는 게 머저리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래야 한다’고 가르쳐 놓고서 수년 후에는 ‘저래야 한다’고 하면, ‘이래야’가 무엇이든, ‘저래야’가 무엇이든, ‘이래야’에서 ‘저래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반발이 생기는 건 당연합니다.

[Music ends.]

저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당시 국적이 한국인이었는데,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단일민족스러움이 부족하다더라고요. 한국성이 부족하다고.

이에 대해 그들이 그때는 틀렸으나 지금은 맞다. 지금은 제가 무척 다행스럽게도 학교에 다니지 않지만, 지금도 어쩌다 약간 그때 생각이 나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 한번은 Youtube을 Youtube이라고 했다가 왜 유튜브라고 안 하냐는 말도 들었습니다. 영어 단어를 영어로 말했다고 한국성이 부족하다고. 지금도 제가 팟캐스트할 때 유튜브, 이런 단어가 나오면 잠깐 멈칫하는 이유가 이겁니다.

아무튼. 제가 다른 나라에서 살다가 처음에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학교와 교육부에서 보인 태도는 ‘네가 충분히 한국적일 리가 없다’였습니다. 제가 아무리 한국어를 잘해도 소용없었습니다. 따로 교육이 필요하다더라고요.

제가 독일이나 미국에서 그 어떤 타인종한테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얘기를 한국에서 저랑 똑같은 피부와 똑같은 머리색을 가진 자들한테서 들었습니다. 다른 어떤 국가에서도 겪어본 적 없는 상황을 한국에서 겪었습니다.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저는 초등학교 때, 독일에 살 때, 주말마다 한국 학교에 다니면서 당연히 그러는 건 줄 알았습니다. 별로 그렇게 싫지도 않았어요. ‘내가 한국인이니까 한국어를 잘하는 게 당연하지. 나의 부모가 얼마나 많은 한국 드라마 비디오를 빌려다 가져와서 보여줬는데.’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집에는 한국어 책이 수백 권 있었습니다.

이랬는데도 한국에 가면 한국 사람들이 절더러 대뜸 한국적이지 않다고 할 거란 걸 몰랐습니다. 즉, 제가 누군지에 상관없이, 이미 미리 결정된 사안으로서 제가 비한국적이라고 결론이 나 있을 줄 몰랐어요.

한국인은 물론이고 동양인도 손에 꼽을 만큼 적은 독일의 동네에서 열 살도 안 된 애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게 뭘 뜻하는지 꿈도 못 꾸는 어른이라는 자들이, 자신들은 다만 한 장소에서 저절로 몇십 년 살아졌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한국성이 제 한국성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요.

참고로. 한국이라서 이랬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른 나라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본디 이런 식으로, 시스템적으로 그룹을 나누는 데에는 그 기준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겁니다.

인종으로 나눌 수 있으면 인종으로 나누는 거고.

그게 안 되면 출신지로, 쓰는 언어로 나누는 거고.

그조차 안 되면 더 자잘한 걸로, 더 협소한 걸로, 더 촘촘하게 얼마든지 나눌 수 있습니다. 같은 길에 사는, 같은 국적의 같은 인종이어도, 저 집에 창문이 하나 더 많이 달렸나 안 달렸나, 이런 걸로 나누려면 나눌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 일을 겪은 게 제 경우에 특히 쇼크인 이유는 다만, 앞서 말했듯이, 제가 이런 상황을 상상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한국인인 줄 알았어요. 서류에 그렇게 써 있었고. 그런데 당시의 저를 보고, 아니, 보기도 전부터, 한국성이 부족하다고 했단 거죠.

독일… 얘기를 잠깐 하자면. 제가 거기 살 때는 운이 좋았습니다. 독일에서는 한 번도 독일성에 대해 들은 적이 없거든요. 당시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고, 전쟁의 여파를 계속해서 인식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 독일 국기를 그리지도 않았고, 독일 국가도 안 불렀습니다. 독일적이라는 거에 대해 말한다는 거 자체가 좀… 위험? 하다고 생각되었던 거 같고, 동네 사람들이 그거에 대해 굉장히 조심했습니다. 나치처럼 보일까 봐.

저는 독일말을 거의 못 하는 상태에서 독일에 갔는데, 초등학교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쥐 캐릭터들이 나오는 연극을 준비하는데 제가 대사를 잘 못했었나? 그랬나 봐요. 그랬더니 어떤 애가 “무슨 쥐가 독일어도 못 해!” 이랬어요. 그랬더니 걔네 엄마가 걔를 잡아다가 저쪽 구석에 끌고 가서는 엄청 혼내더라고요.

그때 저는 별로… 충격도 아니었고, 상처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독일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독일인이 아닌 게 사실이었고, 독일말을 잘 못 하는 게 사실이었고, 뭐, 쥐긴 했는데 독일 쥐가 아니었나 보죠. 당시에는 한국 쥐였었나 보죠? 그래서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딱히 생각나는 스트레스 상황이 없을 정도로 운이 좋았습니다. 뭐… 그냥 길 가던 꼬마들이 ‘칭챙총’ 이러면 ‘꺼져’ 이러는 정도? 제도적 인종 차별은 더더욱 없었고요.

그런데 요즘에는 독일 분위기도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온 세계가 아주 그냥 다. ‘주의.’ ‘이즘’ 때문에. 떼에 이리저리 떠밀리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미국성이 운운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미국성 운운하지 말라고 하는 쪽은 이즘이 없냐? 있습니다. 이즘의 지옥이에요.

지금 저는 이 팟캐스트를 한국어로 하고 있습니다. 그걸 스웨덴 회사인 스포티파이가 소유한 앵커에프엠에다가 올립니다. 이 팟캐스트는 그런 식으로 스웨덴 회사 스포티파이, 미국 회사 애플, 미국 회사 구글, 등등에 올라갑니다.

이 팟캐스트를 듣는 데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플랫폼은 애플입니다. 가장 많이 쓰이는 기기는 아이폰입니다.

그리고 총 23개 국가에서 청취자님들이 듣고 계십니다. 로마니아와 터키가 합류했고, 중국 국기도 이제 앵커에 떴더라고요. 아임 드리밍 취향자님들은 잔잔하고 작은 그룹이지만 다양성만큼은 엄청납니다. 가짜로, 일부러, 없는 다양성을 만들어내서 다양한 게 아니라, 그냥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거라고요. 특이 취향 불면자. 이 가뜩이나 협소한 그룹의 사람들을 찾는 데에 다양성을 일부러 추구하게 생겼습니까? 일부러 다스럽고 단일스럽지 않아도 잘, 알아서, 국경을 넘어서, 시간을 넘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상황이, 2022년에, 인터넷이라는 비교적 국경이 없는 매체를 썼을 때, 신기하긴 하지만 엄청나게 특이할 정도로 불가능에 가까운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치 이런 것이 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지 않듯이, 오히려 요즘에 다음과 같은 말들을 더 많이 쓰는 자들이 있습니다. 한국성. 혹은 미국성. 단일민족주의. 다문화주의.

저는 무언가가 ‘주의’화 되는 게 싫습니다. 현실에 실존하는 것이더라도 ‘주의’가 되는 순간 필패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가 디지털 인터랙션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블록. 뮤트. 킹좋아요. 이 팟캐스트도, 상대에게 그 옵션들을 줄 수 있어서 하는 겁니다. 인터넷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물질 세계에서와는 달리, 웬만하면 피해집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이 기능이 서로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무관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또한, 무관심을 유지할 권리를 사회적으로 지켜주는 것.

개인적으로는, 미국에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데 그나마 이 정도의 평화가 유지되는 아주 큰 이유 중 하나는 관심, 설득, 각종 이즘이 아니라, 건강한 무관심이라고 봅니다. 만약 미국에서 각종 그룹들이, 그 그룹들을 어떻게 나누든지 간에, 진짜로다가 서로 참견하기 시작하잖아요? 죽습니다. 다 같이 죽어요.

정말로 관심이 있다면 무관심을 보여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인 겁니다.


6: 공간 템포

00:38:35-00:46:14

[Music: Looseleaf – warmkeys.]

음악에는 이즘이 없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일단 음악이 좋고 나서야 보이는 거지, 이즘을 앞세워 음악을 만든다? 아니면 다른 예술을 한다? 오로지 이즘만을 위하여? 얼마나 우스운 세금 낭비가 되는지, 어느 나라에 살든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좋다는 기준이 무엇이든 간에, 아무리 생각해도 좋지 않은 음악을 틀어놓고 이즘을 추구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좋은 게 먼저고, 그다음이 이즘이에요. 제 생각에 지는 게 세상에 이로운 이즘이 진다고요. 그게 저는 좋습니다.

그래서 음악은, 이때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관료주의에서의 도피처에 대한 선택권이 매우 적었을 때.

그리고 갑자기 6층 빌딩으로 돌아가자면. 이런 여러 이유들로. 음악이란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1층의 음료 제공처,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지하 공간과 2층에 항시 흐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실내 공간에 음악을 깔면 그 공간이 덜 부담스러워집니다. 특히, 내가 직접적으로 소유하는 실내 공간이 아닌, 내가 어떤 템포, 어떤 크기로 움직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 낯선 곳에 음악을 깔아주면 친절하다고도 저는 생각해요.

그래서 명품 매장에 가면 느린 클래식 음악이 흘러서 방문객들의 걸음걸이 속도와 대화 소리를 제한하고, 패스트푸드점에 가면 빠른 유행 음악이 흘러서 방문객들의 회전율과 즐거움에 기여하지 않습니까?

아지트에서도 이런 걸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하부터 2층에 걸쳐서 음악이 들렸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 모든 각 층에, 지하부터 6층까지, 아무래도 엘리베이터를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무거운 걸 옮기기도 어렵고, 몸이 불편하시거나 당일 컨디션이 안 좋으신 분들이 돌아다니기가 너무 힘들어요. 엘리베이터. 꼭 넣어야 한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하면 또 엘리베이터 뮤직 아닙니까? 엘리베이터 뮤직도 엄선해서 넣으면 좋겠다.

그리고 계단도 있어야 합니다. 또한 여러 곳에 의자가 많으면 좋겠어요. 뭐냐 하면, 움직이고 싶을 때 움직이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는 각종 기구들이 서로 방해되지 않게 배치되어 있으면 좋겠단 겁니다.

아무리 음악으로 배경 템포를 깔더라도, 그 안에서는 좀 사람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아무래도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환경의 핵심 같습니다. 틀 안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이 팟캐스트도 그렇고, 6층 빌딩도 그렇고. 틀이 없으면 모든 게 무너집니다.

저는 무정부주의자는 아니거든요. 무정부주의자면 팟캐스트를 안 해야 합니다. 그 우스갯소리가 있지 않습니까? 무정부주의자란 둘만 모여도 이미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아무튼, 저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고, 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멍청한 틀 말고. 관료주의 말고. 효율적인 틀을 좋아합니다.

음악이란 친절한 안내문처럼, ‘여기선 이 정도 템포가 적당하다’라고 말해주되, 그렇다고 해서 박자에 맞춰서 걷지 않았다고 나무라는 건 아니니까 적절하다고 봅니다.

의자도요. 우리가 길을 걷다가 멈추고 싶은데 의자가 없어서 계속 걸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아주 그냥 하염없이 걷는데 의자가 단 한 개도 안 나와. 미국은 자주 그렇습니다. 남캘리포니아의 많은 길들이 걸으라고 만든 길이 아닌 것처럼 생겼습니다. 무슨. 차 타고 가다가 차가 고장나면 잠깐 서 있으라고 길을 만든 건지. 하여간에.

필요하면 앉을 수 있어야 한다. 간이 의자를 막 갖고 와서 사람들 길을 막는 건 안 되지만, 아예 의자를 빌딩 안에 좀 여기저기 배치해 놔서, 간이 의자를 갖고 올 필요가 없도록 하면 좋겠다.

[Music ends.]


7: 공연, 전시

00:46:14-00:53:06

이렇게 지하부터 2층까지 음악이 흐를 것인데, 이 세 개의 층들은 특별 이벤트를 열 때 외부인에게도 개방하면 좋을 것 같은 층들입니다. 지상과 연결해서 위아래로 돌아다니기가 쉬워서요.

옥상층도 가끔은 개방을 했으면 싶은데. 이러려면 1층에서 옥상으로 단박에 가는 에스컬레이터 같은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외부인이, 즉, 멤버가 아닌 방문객이, 특별 이벤트 때 다른 층들을 거치치 않고 옥상으로 향할 수 있도록.

그런데 옥상은 태양에 닿아 있기 때문에 중요한 층이라, 할 말이 많은 관계로,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일단, 지하부터 2층. 여기에 그러면 음악만 흐를 것이냐? 아닙니다. 멤버 프로필에 멤버들의 관심사가 잘 정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음악이 템포를 친절하게 안내하듯, 공간에 무언가가 채워져 있으므로 해서 대화의 방향 역시 친절하게 안내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결국 바로 그때 거기에 있는 게 가장 중요성을 띠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오막 친구는 음악을 합니다. 그리고 한아임의 또 다른 친구, 이혜원 친구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혜원이 친구는 전시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혜원이 친구와 저는 모던 그로테스크 타임스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음악과 그로테스크, 혹은 더 나아가서는 전시. 이러면 할 수 있는 게 엄청 많습니다.

음악 면에서는 뮤지션들을 초대해도 좋을 것이고, 오픈 마이크 콘서트를 해도 좋을 것이고, 혹은, 음악에서 약간 비껴 가서, 같은 무대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해도 좋겠습니다. 연극도 좋고요.

미술 측면에서는 전시도 좋고, 아티스트를 초청해서 특정한 날에는 미술품을 사갈 수 있는 이벤트를 구성해도 좋고, 참여형 예술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화. 특정 영화의 상영권을 가져 와서 다 같이 영화를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만약 세 개의 층에 걸쳐서 다 같이 영화를 보면 신기할 것 같지 않나요? 영화를 볼 때는 보통 양옆과 앞뒤로만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위아래로도 있으면, 그래서 리액션에 대한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리면 신기할 것 같은데. 특히나 공포 영화를 보면 쫄깃할 것 같네요.

왜냐하면, 아까 시간 편집 얘기를 했지 않습니까? 극장에서 보는 공포 영화만큼 시간 편집이 중요한 장르가 잘 없는 것 같습니다. 일단 글로 읽는 경우에는 아무리 작가가 시간 편집을 염두에 두고 썼더라도, 독자가 언제 어디로 책장을 넘길지, 그만 읽을지 알 수 없거든요?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보는 영화는 책이나 드라마나 유튜브나 만화나, 그런 다른 장르들이 갖고 있지 않은 전제를 기반으로 합니다.

영화를 한 번 틀었으면 끝까지 볼 거라는 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빨리감기나 되감기를 하지 않을 거라는 거.

네. 영화는 만든 사람이 끌고 가는 대로 같이 그냥 가는 겁니다, 끝까지.

그게 매력 중 하나인데, 특히나 공포 영화면은, 언제 뭐가 어떻게 나오느냐가 중요합니다.

제가 가장 최근에 본 공포적 장면은, 공포 영화라고 나온 영화는 아닌 데에서 봤습니다. ‘기생충’에서요. 혹시 안 보신 분들을 위해 두루뭉실하게 말씀드리자면,기생충에서 어떤 사람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장면에서 저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냥 흠칫 놀란 게 아니라, 육성으로.

제가 공포 영화를 잘 보면서도 동시에 잘 놀라는 편이거든요? 평소에도 흠칫거립니다. 뭐에 집중하고 있는데 다른 게 다가오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냥 반사적으로 흠칫, 한다고요. 그런데 기생충의 이 장면에서는 그런 반사적 흠칫이 아니라, 정말 공포의 비명을 질렀습니다. 최고로 무서운 장면이었어요.

아무튼. 이렇게 대형 특별 이벤트가 있을 때는 오픈하우스 형식을 취해서 멤버가 게스트를 한 명씩 데려올 수 있으면 킹왕짱 좋겠습니다. 그러면 비멤버도 다음에는 멤버가 되고 싶을 수도 있고, 아지트 사람들은 아지트 외부에서도 같이 어울릴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고.


8: 로쿠스 솔루스 – 수건과 화환

00:53:06-00:57:20

[Music: Memoir of Solitude – Borrtex]

전시 얘기가 나온 김에, 우리 혜원이 친구의 소식을 하나 전달하겠습니다.

혜원이 친구가 수건과 화환에서 두 명의 다른 기획자들과 함께 전시를 합니다. 오상은, 이우솔, 그리고 이혜원 기획자가 수건과 화환에서 하는 전시입니다. 제목은 <로쿠스 솔루스: 구현되지 못한 기획서의 고독한 장소>이고요. 2022년 5월 30일부터 6월 29일까지 진행되고, 예약제로 운영됩니다.

수건과 화환 인스타그램에 상세 사항이 있을 것인데, 그 계정에 포스팅된 전시 설명을 일부 읽어볼게요.

“이번 전시는 3명의 기획자들과 함께 준비한 텍스트 기반의 전시로 ‘구현되지 못한 전시 기획서’를 다각적으로 접근하며, 기존 기획서의 관료주의적, 실질적이지 못한 형식에서 벗어난 시도를 보여줍니다. 또한 작품이 전시되기 위한 초석으로 깔렸던 기획서의 실험적이며 예술적인 실천을 이해하고 교감하는 전시입니다.”

[Music ends.]

관료주의에서 벗어난 시도. 캬. 아름답다. 이, 그 자체로 제가 너무 좋아하는 접근입니다. 취향이에요.

혹시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가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수건과 화환의 <로쿠스 솔루스> 전시에 가셔서 이혜원 기획자를 만나시면, 한아임의 팟캐스트를 듣고 왔다고 시공간을 넘어서 전해주세요.


9: 마무리

00:57:20-01:02:46

[Music: To the Moon and Back – Ty Simon]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여러분? 시간과 공간은 유동적입니다.

음악을 들으면 음악이 없을 때보다 시간에 획을 그을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악보를 보면 마디마디가 있듯, 구획이 생기고, 시간이 소화 가능한 범위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공간도, 계단,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단절되어 있는 듯하다도 닿을 수 있는 것이 되고, 의자의 배치를 통해 템포를 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혹시 이 팟캐스트를 들으시는 여러분의 정체성이 애초에 이렇게나 유동적인 시공간을 관료주의의 틀, 즉, 틀 안에서 자유롭지도 못한, 진짜로다가 딱딱한 틀에 넣으려는 시도와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면, 그것이 헛짓임을 아는 사람들도 있음이… 위안은 별로 안 될 것 같지만, 그냥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도를 알면, 어… 그냥 그러한 상태라는 점.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은, 관료들이 아무리 떼주의자들의 떼를 써도 그들의 헛짓에는 끝이 있다는 점입니다. 교육되는 사상은 바뀌고, 국경을 넘으면 기준이 달라지고, 국경도 변합니다. 특정 관료사회를 나오면 그 바깥의 것들 중 하나도 그들 말대로 되는 게 없음을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서류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거기에 박제됨으로써 유한하고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습니다. 시나리오를 써도 실제 영화는 그것과 같지 않고, 소설을 써도 그것은 독자 개개인이 소화하게 됩니다. 그것도 시공간을 넘어서. 절대로 이 영화를 보지 않고, 이 소설을 읽지 않고, 이 음악을 듣지 않을 거라고 의식적으로 생각되었거나 무의식중에 무시되었던 사람들도 언젠가는 바로 그 영화, 그 소설, 그 음악을 소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유 의지란 것이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여러분 안에서 나오는 대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자유 무의지의 떼에 묻히는 것보다야 그편이 여러분에게도, 세상 전반에도 더 유용하며 유가치한 선택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과 이번 에피소드의 녹취록은 제 웹사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링크 및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에 관한 링크들을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Music ends.]


모든 링크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 2022 한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