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6] 히히덕성: 편의적 선악 구도

[Ep. 26] 히히덕성: 편의적 선악 구도 - 네모

1: 오프닝

00:00:00-00:07:03

[Music: Eternity Clock – Shahead Mostafafar]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이번 시즌에 약간 공포스러운 주제들을 다뤄볼 거라고 했었습니다. 슈퍼내추럴하거나, 디스토피아적인 것, 기타 섬뜩한 것들, 이상한 것들, 잘 생각해 보면 괴이한 것들. 그런데 아마도 잠이 못 들 정도로 무서운 내용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잠이 못 들 정도로 무서운’ 그것이 무엇인지는 다르잖아요? 제 경우에는 귀신 얘기 때문에 잠 못 든 건 아주 어렸을 때 빼고는 거의 없습니다.

단, 정말 큰 예외가 있는데, 바로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 1, 그리고 기담에 나오는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기담에 어… 엄마 귀신이 하나 나오는데, 그 장면은 정말 섬뜩했고요.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는 거의 모든 시즌을 좋아하는데, 시즌 1이 특히나 좀 그… 기분 나쁜, 아주 기묘한, 그런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그 무섭다고 생각했던 것조차도 처음에 봤을 땐 되게 기분이 이상했는데, 몇 년 후에 다시 봤더니 또 괜찮더라고요.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는 시즌이 지금 열 개인가 되는데, 그 내용이 다 연결되는 게 아니라 시즌별로 다른 공포 테마가 있습니다. 귀신 나오는 집, 정신병원, 아포칼립스, 이런 식으로. 그런데 배우들이 시즌마다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그래서, 시즌 2, 3, 4, 등등을 본 다음에 다시 시즌 1을 봤더니, 그 배우들이 친근하게 느껴져서 덜 기묘하고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저인데, 제가 제일로 무서워하는 건 귀신이 아닙니다. 여러분? 귀신은 뭐… 뭔가 아무나 되는 건 아니잖아요. 사정이 좀 깊게 있겠죠? 귀신이 진짜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다 귀신이 되고, 모두가 귀신으로서 이승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만큼 강력한 기를 가졌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승 자체가 많이 달랐을 겁니다.

그런데 반면, 사람. 사람은 뭐야 대체. 사람이 무섭습니다.

그것도, 저는 사이코패스며 살인마며 이런 특이 케이스를 무서워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자들과 엮인 상황에 놓이면 무섭겠지만, 그런 가상의 상황을 상상하며 무서워하진 않는단 뜻입니다.

진짜로 제가 무서워하는 건, 일상. 맨날 만나는 인간들. 그중에서도 무능한 자들. 그중에서도 더 심각한, 선악의 탈을 쓰고 히히덕성을 뽐내는 자들입니다.

네. 딱히 부를 말이 없어서, 히히덕성이라고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히히덕대는 특성을 가졌다는 얘깁니다. 그것도, 위대하고도 대단하신 선악의 탈을 쓰고.

이, 한아임이 생각하는 진정한 현실 공포에 대한 예시 몇 개를 오늘 들어볼 텐데, 참고 픽션으로는 드라마 ‘소년심판,’ 그리고 영화 ‘살인마 잭의 집‘이 나옵니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팟캐스트는 리뷰 팟캐스트가 아닙니다. 이게 뭐 사실, 분석이라고 볼 수도 없어요. 그런 건 논문을 읽어야 나올 테고요. 이 팟캐스트는 그냥 한아임의 주절주절 생각입니다.

그럼 오늘의 수다, 시작할게요.

[Music ends.]


2: 편의의 개념, 거대 선악

00:07:03-00:12:25

저는 여러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거대 선악이라는 개념이 편의주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의 선악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거대 선악을 말하는 겁니다.

거대 선악은 프로파간다에 따라, 시대에 따라, 너무 자주 변합니다. 종교가 그렇고, 정치가 그렇고, 그 종교와 정치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그렇습니다.

가장 간단하게, 우리는 정치인들이 선을 부르짖으면서, 그들이 대표하는 수천, 수만, 수억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수천 년을 봐왔습니다. 또한 우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학살이 자행되는 것도 너무 익숙해서 이제 놀랍지도 않을 지경입니다.

그들은 거대 선악, 나아가 절대 선악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1차적으로 그게 없다는 게 이러한 현상들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쪽, 상대편에서는 그들이 하는 짓이 선이라고 생각 안 할 게 확실하잖아요?

또한 2차적으로, 절대 선악을 부르짖을수록, 거대 선악이 존재한다고 주장할수록, 심지어 상대 선악, 개인의 선악조차 지키지 않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이런 겁니다. 일반적으로 정치나 종교에서는 생명이 소중하네 마네를 습관처럼 되뇌이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많이 생명을 앗아갑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살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그냥 아무 정치나 종교 집단에 속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세상에 더 이롭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러면 얘네는 제가 틀렸다고 할 겁니다. 여기서 이들이 말하는 거대 선악의 진짜 정체가 드러납니다. 사실은 선과 악이 아니라, 옳고 그름인 겁니다. 그래서 오류가 생깁니다.

선이 옮음과 같고 악이 그름과 같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고 봅니다.

예를 들자면, 완전히 틀린 사람이 있다고 쳐봅시다. 그냥 완전히 멍충구리야. 하는 말마다 다 틀려.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우기고. 심지어 동쪽이 서쪽이랑 같다고 우기고. 막 그런다고 쳐봅시다. 이자는 그냥 틀린 사람인 겁니다. 그른 말만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꼭 악하진 않다고 봅니다.

반면, 완전히 다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이 있다고 쳐봅시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선하진 않다고 봅니다.

이 후자의 경우는 많이들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옳은 말을 한다고 해서 선한 건 아니라는 점. 그런데 전자의 경우에 잠깐 짚고 넘어갈 만한 것은, 멍청하다고 해서 악이 되는 건 아니지만, 저절로 선이 되는 것 또한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선악과 아주 다양한 종류의 옳고 그름은 전부 다 겹치는 개념인 게 아닙니다. 겹치는 부분도 있겠지만, 안 겹치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고 저는 생각해요. 선이 옳음의 동의어고 악이 그름의 동의어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유의어 정도는 될 수 있겠지만.

그런데도 선이 옳음이고 악이 그름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선의 이름으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게 됩니다. 단 하나의 정답인 거예요, 자신의 선이. 그리고 그르다고 생각되는 자들을 악으로 치부해서 그들에게 어떤 짓이든 가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착각이 수많은 종교와 정치 폐해의 가장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3: 아이러니의 크기

00:12:25-00:19:56

[Sound effect]

거대 선악을 부르짖는 자들이 그것대로 살기라도 한다면야 뭐, 저 같으면 거의 변태적인 존경심이 들 것 같아요. 이거 정말 힘든 거지 않습니까? 정말로 자기가 믿는 대로 사는 거.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선이 옳음이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단 하나의 선만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은 생각대로 산다고 착각할 수 있으나, 반드시 충돌이 발생한다. 내 선의 이름으로 뭔가를 해할 테니까, 반드시.

그런데 이 아이러니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은둔자예요. 은둔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쳐봅시다. 사색하며 조용한 삶을 사는 게 이자한테는 최고의 선이라고 쳐봅시다. 그러면 이자의 아이러니는 이겁니다. 이 세상에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이자가 고요함을 즐기려면 다른 사람들이 다 더 작은 공간에 밀집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자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 선은 지속이 불가합니다.

그러나 이자의 아이러니가 그렇게 큰 아이러니가 아닌 이유는, 이자는 이자대로 살고, 모여 살고 싶은 사람들은 모여 살아도 하나도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아이러니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좀 더 이론적인 겁니다. 실제 세계에서는 대도시에서 시끌벅적하게 모여 살고 싶은 사람들이 충분히 있으니까, 이자, 혹은 이자와 비슷한 사람 몇몇이 자리를 좀 많이 차지하면서 동떨어진 시골에 산다고 하더라도, 충돌이 벌어진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아이러니가 작을 수 있는 이유는, 이자의 선, 옳음 자체가 홀로의 특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 그러나. 떼. 떼로 몰려다니면서 아이러니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납니다.

바로, 히히덕성. 이것 때문입니다.

홀로 은둔하고 싶은 자와 떼의 가장 큰 차이는 아이러니의 크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정치, 종교, 기타 등등 떼를 지어 나타나는 사상들에서 가장 무섭게 여기는 부분이 이겁니다.

한 개인이 어떤 종교를 세웠다고 가정해 봅시다. 신을 봤다고 주장한다고 쳐보자고요. 그래서 그 신을 믿지 않는 자는 다 죽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이렇게 극단적인 광기의 경우에조차, 사실 이자의 영향력은 상당히 희박합니다. 총기를 사용한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총기 사건에 휘말린 개개인과 그 지인 및 가족들에게는 어마어마한 비극이겠으나, 세상 전체로 보면 그 영향력이 아주 아주 아주 미미합니다. 어떤 미친 사이코패스가 갑자기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수십 죽여도, 수십에 그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건 히히덕성이 발현됐을 경우입니다. 그들이, 그 광인들이 몰려다닐 때. 조직을 이룰 때.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몰려다님으로 해서, 세상의 어떤 작은 일부에서나마 다수가 될 때. 그리고 거기서 먹고 자기도 할 때. 즉, 히히덕거릴 기회가 많아질 때. 모여서 조잘대고. 시답지 않은 얘기도 하고.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그렇게 점점 더 쌓여가면서, 그것이 갑자기 문화라는 꼬리표를 달게 될 때. 그것이 정상이 될 때.

그게 저는 가장 무섭다고 보는 겁니다.

히히덕성. 떼.

한 놈이 뭐라뭐라 혼자서 인종 사살을 주장하면 그냥 미친놈일 뿐입니다. 그자가 실제로 몇 명을 죽일 수도 있겠고 그것은 큰 비극이지만, 거기서 그칠 일이라고요.

그러나 만약 그 미친놈이 정당을 만들고, 온 국가가 휩쓸린다면? 민란이 일어날 거고, 전쟁도 날 수 있습니다. 이런 예시는 역사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들에게는, 당사자들에게는, 그들이 한 일이 선입니다. 그것을 넘어서, 옳음입니다. 정답인 거예요.

이런 현상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서는 분간하기가 애매한 경우가 많습니다. 제아무리 혼자이려는 사람조차 그 어떤 무리에도 속하지 않기에는 힘들거든요. 자신은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더라도 누가 알아서 속하게끔 합니다. 대표적으로, 국가라는 개념이 그렇습니다. 현대에 피하고 싶다고 해도 피할 수가 없는 게 국가입니다.

그런데 과거를 보면 히히덕성을 좀 더 쉽게 알 수 있어요. 혹은, 다른 나라의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즉, 나와 무리 지어질 확률이 매우 적은 어떤 다른 집단을 보면.

더 간단하게는, 픽션을 보면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좀 떨어져서 보면, 저들이 떼라는 게 확실히 보인다고요. 나는 그 특정 떼의 경우에는 바깥에 있으니까.


4: 벌할 수도 없는 악

00:19:56-00:26:11

[Music: Good Morning Love – Eldad Zitrin]

그러니, 픽션의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드라마 ‘소년심판’입니다. 전체적인 얘기는 소년법에 대한 겁니다. 어린이들이 죄를 저질렀을 시 성인이 같은 죄를 저질렀을 때보다 덜한 벌을 받거나, 심지어 벌을 받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거대 난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초점도 충분히 흥미로우나, 제가 정말 공포스러워한 건 그 초점과 그에 얽힌 사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이런 거였습니다. 드라마 초반에 [3화]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김혜수 님이 맡으신 젊은 검사 역할인 심은석이라는 사람이 어느 회의에서 선배 검사들이 발표한 프레젠테이션이 얼마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지를 지적하는 장면입니다. 정확한 대사는 기억이 안 나는데, 한마디로 ‘선배님들, 이것을 뭐에 써먹으실 겁니까?’가 주된 포인트였습니다.

그러고서 다음 장면에서 회의가 끝납니다. 이때 이 선배 판사라는 자들이 회의실을 나오면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심은석이 ‘싸가지가 없다’고 합니다.

무능한 그들이 떼로 회의실에서 몰려 나오면서, 가장 먼저 하는 행위가, 심은석을 자신들과 분리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분리한다? ‘게으른 나와는 달리 심은석은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마음에 안 들어’라고 할까요? 절대 아니죠. 그러면 자신이 선악 구도에서, 그것도 절대 선, 옳음을 담당해야 할 순간에 그걸 담당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한다? 심은석 성격을 나무란다. 그것도 ‘너무 꼼꼼해’라든지 ‘과하게 열정적이야’ 이렇게 나무랄까요? 절대 아니죠. 두루뭉술하게, ‘싸가지’라는 단어를 씁니다. 인격적으로 그르다, 틀렸다는 걸 무기로 삼는 겁니다.

[Music ends.]

판사씩이나 되는 자들이 겨우 고작 자기방어로서 한다는 말이, ‘싸가지가 없다’라고요. 그 교육 많이 받으신 대단하신 판사님들께서. 겨우 고작 한다는 말짓거리가. 떼로. 몰려다니며.

이 표현. 이것이 저는 완전한 악보다 더 무서운 악, 바로 선인 척하는 악, 자신이 옳기에 선이니까 너는 글렀고 악이라고 말하는 게으름의 원형 같은 거라고 봅니다.

실질적으로 심은석이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이 선배 판사들한테 물으면, 이자들은 대답을 못 합니다. 생각이나 해봤겠습니까? 이들은 그냥 심은석이 지들 비위 안 맞춰줘서 싫은 겁니다. 이 떼에서 받아들여지는 히히덕성이 있는데, 심은석이 거기에 맞춰서 실실 웃어주질 않으니까 마음에 안 드는 거라고요.

즉,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만든 법이라고 하더라도, 떼가 유지되는 과정에서 윤활유처럼 사용되는 히히덕성이 있는데, 그걸 심은석이 안 했다, 이겁니다.

자, 그런데, 이 윤활유는, 뭐 어느 정도는 정말로 집단의 존속을 위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히히덕성이라고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히히덕성은, 집단이 어떤 선을 표방하든가와 관계없이, 다만 집단의 존속을 위해 존재하는 윤활유입니다. 집단의 선, 옳음은 다 옛날 옛적의 일이고, 이제는 오로지 그 선 혹은 옳음의 흐릿한 기억을 존속시키기 위해 계속 발리고 또 발리는 더러운 윤활유.

바로 이런 게으름이 사이코패스 킬러보다 실질적으로 삶에서 훨씬 더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종류의 악입니다. 이 게으름은 법적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인데, 이것이 쌓이고 쌓여서 관례가 되고, 거기에 맞추지 않는 사람은 ‘인성이 덜 됐다’는 취급을 받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인성이란 뭐에까지 연결되죠? 선에까지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덜 되면, 악하다, 이거죠.


5: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야 하는 픽션

00:26:11-00:31:05

[Music: Feel – ANBR]

그러면 현실에선 이런 일이 없을까요?

그럴 리가요. 여러분? 픽션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 이런 문구를 픽션 이야기를 시작하며 쓰는 경우가 있는데,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그런 문구가 실제로 소용이 있던가요? 다만 그 문구의 존재로 인해 그 이후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믿기던가요? 아닐 겁니다.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라고 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걸 믿게 해야 하는 게 픽션입니다.

즉, 만약 이 세상 판사들이 이렇게 게으르다는 걸 사람들이 상상조차 못 했다면, 겨우 딱 이 몇 개의 짧은 씬으로 ‘소년심판’에서 등장한 이 떼성의 발현이 마무리되지 못했을 겁니다. 갖가지 설명이 요구됐을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도저히 믿질 못할 테니까. “세상에 저러는 판사가 어딨어?” 이런 말이 나왔을 테니까.

그런데 현실은 어떻다? 그런 말이 안 나옵니다. 판사든. 경찰이든. 교사든. 정치인이든. 일반 회사의 상사든. 이렇게 떼로 몰려다니면서 자기들의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만드는 게 뭐 하루 이틀입니까? 아무도 안 놀라고, 아무도 여기에 이의를 달지 않을 걸 제작진도 안 겁니다.

그런데 이들이 판사다. 이들은 돈도 받고. 뭐 연금도 받는지. 또 뭐 밖에 나가면 누가 판사님 판사님 해주겠죠? 그리고 그에 따라 또 떼의 히히덕성이 견고해질 겁니다.

이게 저는 소년심판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제가 분명히 하겠습니다.

극 중 등장하는 범죄자들보다 이 판사 선배들이 악하다는 게 아닙니다. 지금 비교하는 게 아니에요. 누가 더 악하고 누가 더 선하고가 아니라고요. 이것도 흔히 빠지는 오류인데, 이자들이 게으르다고 지적한다고 해서 이자들이 누구보다 더 나쁘다고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냥 자기들 할 일을 안 하고 있단 얘기만 하는 겁니다. 이들이 살인마가 아니라고 해서 더 선해지진 않잖아요. 아, 자기들의 히히덕적 떼의 선의 기준에서는 더 선해질 수도 있겠네요. 그냥 하하호호 어울리면 다 통하는 게 떼의 선이니까.

[Music ends.]

그런데 이들이 스스로 부르짖는 법적 선의 기준에조차 이들은 미달입니다. 이게 아이러니입니다. 이들이 선을 수호한다고 여기는 그 집단을 존속시키려고 떼성을 발휘하면 발휘할수록, 히히덕거리면 거릴수록, 그 선에서 더욱 멀어집니다.

사이코패스 킬러가 아닌 자라면, 심지어 사이코패스 킬러를 단죄하라고 그 자리에 앉혀 놓은 자라면, 더 뉘앙스 있는 선악 프레임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 바로 그 단죄 집단 내부에서 사용하는 선악 프레임이 겨우 고작 후배 판사의 ‘싸가지’를 지적하는 저급한 수준임이 한탄스러운 겁니다.

이들이 벌을 주는 자리에 앉은 자들일 때, 이들을 벌할 자는 누구인가. 이것이 픽션이라면, 그것도 씬 한두 개로 쉬이 믿기는 픽션이라면, 현실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건가.


6: 직무 유기

00:31:05-00:36:05

[Sound effect]

다음 픽션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한국에서 ‘살인마 잭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영화입니다. 한마디로, 살인마 잭이, 살인하고 다니는 얘기입니다. 정말로 잔인한 영화이고요, 피, 시체가 엄청나게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제가 가장 충격적으로 기억하는 건 그런 대놓고 존재하는 악들이 아닙니다. 그런 악들은 수많은 국가 시스템에서 처벌받습니다. 안 잡혀서 문제인 거지, 잡히면 사형이든, 적어도 무기 징역이든, 그렇게 됩니다. 이런 악은 너무 랜덤하고 너무 소수라서, 만약 이런 악을 정말로 진심으로 두려워한다면 지하철도 못 타고, 출근도 못 할 겁니다. 거기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살인마 잭이면 어떡해?

그런데 실질적으로 이러한 사이코패스 킬러를 그렇게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다만 먹고 살아야 해서 무서운 세상으로 박차고 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무서운 요소들이 있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내가 그 요소들을 맞닥뜨릴 확률은 낮은 그 세상으로 나아가 살지 않으면 오히려 정신적으로 고통받을 사람들이 대부분이란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픽션에서 살인마 잭을 보며 실컷 무서워하고, 그 존재를 상기한 다음, 어두운 밤길을 잘도 걸어 다니는 겁니다.

아무튼 이런 이유에서,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건 살인마 잭이 아니었다. 제 경우는, 가장 무서운 자가 경찰 캐릭터였습니다.

살인마 잭이 조만간 피해자가 될 사람을 데리고 집으로 향합니다. 이 미래의 피해자는 수상함을 느끼고, 근처에 있던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 경찰이. 살인마 잭과 이 피해자를 스윽 보더니. 안 도와줍니다. 안 도와줘요. 그냥 대놓고 안 도와줘요.

살인마 잭이 자기가 살인자라고 해도, 이 경찰이 술 취한 거 같으니 술 그만 마시라고 하고서는 경찰차를 타고 가버립니다.

즉, 차가 있었다고요. 경찰이 이 여자를 차에 태워주기만 했어도 해결될 일을. 그 일 하라고 고용된 자가. 그냥 갔어요.

저는 이 장면에서 소름이 너무 끼쳐서. 너무너무너무 끼쳐서. 제가 다 억울하고. 저 경찰은. 살인마 잭과 달리 그자는 사형 안 당합니다. 무기 징역도 안 받을걸요? 이 사건이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겨우 고작 잘리겠죠? 연금도 그대로 받을지도 모릅니다.

왜냐? 히히덕성. 떼성. 집단이 집단 안의 것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하는 성질이 어느 정도 없다면, 그건 집단이 아닙니다. 그러한 보호는 그 보호받은 구성원 개개인만을 위한 게 아니라, 집단 자체의 존속을 위한 거니까. 선을 표방하는 그 집단. 그 집단을 옳게 하려면, 그 사이사이의 그른 것들은 덮어야 한다고 주장하니까. 선을 부르짖을수록, 차악 따위밖에 되지 않는 것.

이게 저는 이 영화의 진정한 호러라고 생각합니다.


7: 부산물로서의 선

00:36:05-00:41:37

[Music: Collecting Memories – Aija Alsina]

이러한 이유로, 저는 제 밖에 존재하는 선악이 맞는지 틀린지에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옳고 그름과 겹치는 선악의 개념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저도 편의상 그런 개념을 쓸 때도 있지만, 떼의 선은 개인의 선보다 더 큰 아이러니를 안고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믿지 않으려 합니다.

또한, 저는 선악의 착각, 나아가 선악의 픽션에 관심이 있습니다. 선악 자체가 논픽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똑같은 행위가 서사를 쓰는 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혹은 서사를 소비할 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이 되고 악이 되는 과정이 선악 그 자체보다 오히려 더 절대성이 있다고 봅니다.

나아가, 선악보다 더 효과적으로 쓰이는 도구들. 이를테면, 선악을 유지하기 위해 윤활유로 쓰이는 히히덕성 자체도 흥미롭습니다.

 ‘소년심판’을 다시 예로 들자면, 심은석 판사가 무용한 선배 판사들을 일하게 하려면, 그들의 무능이 얼마나 악한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지적하는 것보다는 그들에게 통하는 걸 찾는 게 훨씬 더 이득입니다. 구슬려야 하는 겁니다.

즉, 계속 굳이 선악 프레임을 가져가고 싶다면, 이러한 이야기의 극 중 캐릭터는 아이러니하게도 선을 위해 선을 어느 정도 무시해야 합니다. 범죄자를 잡기 위해 게을러터지고 무능한 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 거짓말을 하는 것. 세금 낭비인 일에 참여하는 것.

선악 구도가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자주 다뤄지는 부분입니다. 악. 차악. 선. 차선.

아무튼, 제 생각에, 만약 진정한 선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선임을 별로 어필하지 않을 겁니다. 난 착해. 난 긍정적이야. 난 엄청 사람들을 잘 도와. 이런 걸 안 할 겁니다.

개인이라면 자기 할 일이나 잘할 것이고, 집단이라면 떼의 특성을 띠지 않기 위해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중립을 유지하는 겁니다.

그래서 좋은 법은 중립을 지키는 과정에서 선을 대변하게 됩니다. 선이 중립의 부산물 같은 겁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렇습니다. 선이 목적이 되는 순간, 그냥 명분 싸움이 되고, 명분 싸움은 양쪽 다 상대의 눈에는 필패합니다.

그래서 좋은 법에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습니다.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싸잡으면 안 되니까. 뉴스를 지켜보는 개개인들은 망나니 범죄자가 감옥에서 나온다는 소리를 들으면, 누가 저자를 죽여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국가에서는 그렇다고 해서 전부 죽일 수가 없단 말이죠.

법치 국가라면. 그리고 국가가 범죄자가 되지 않으려면.

의학과 비스무리합니다. First, do no harm.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그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거대한 무리를 대표할 때는 더욱더.

 새로운 문제를 만드는 것을 무릅쓰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개개인이 아닌, 큰 무리가? 떼로? 그게 악입니다. 심지어는 히히덕성 뒤에 감춰두는 최악 중의 악.


8: 역사의 무선, 무악

00:41:37-00:53:12

[Music: Ask Me Anything – Yestalgia]

실제 세계에서는 간단한 선도 악도 잘 없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선 때문에 일어나고 악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역사적으로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선 때문에 어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고 학교에서 주입받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가 없다고요.

예를 들어, 학교 그 자체의 탄생이 그렇습니다.

일단 저는 뭔가를 배우면 좋다고 생각은 합니다. 특히나 배움의 토대로서 글을 배울 수 있다면 좋을 겁니다. 글은 1차 무기입니다. 글을 읽고 쓸 줄 알면 어딜 가든 새로운 걸 배울 확률이 높아지니까. 지금 현재 나와 시공간이 겹치는 자들한테서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자들에게서도.

그러니 학교가 선이라고 보는 건 맞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온 세계 사람들이 학교를 선으로 보고 학교를 짓는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에는 학교가 없거나, 학교에 아주 극소수만 다녀서 학교라고 부르기에도 난감하고 개인 지도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국가, 지역들이 있습니다. 또한, 성별에 따라 교육이 갈리기도 하고, 피부색에 따라 교육이 갈리기도 합니다. 만약 학교 내지는 배움이라는 게 그 자체로서 정말로 선이라면, 왜 세상은 이런가요?

선에 대한 정의가 각 집단마다 달라서, 라는 게 첫째 이유일 겁니다. 즉, 절대 선악이 없다는 결론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죠. 둘째 이유는 절대 선악이라는 게 있다고 한들, 선으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교라는 기관이 지어진 곳에서조차, 학교가 선해서 지어졌을까요?

아닙니다. 현대의 학교란 주입을 하려고 생긴 구조입니다. 선택받은 귀족들, 양반들만 받던 교육을 왜 갑자기 일반 시민들이 대거 받게 됐을까. 그전에, 이들은 언제부터 노예, 노비, 농노, 기타 등등, 전 세계에서 쓰이는 각종 하층 계급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아닌, ‘일반 시민’이라는 취급을 받게 됐을까.

어느 날 갑자기 귀족들이 ‘아, 우리 이제 좀 착해지자,’ 이랬을까요? 아니죠. ‘우리 이제 수백 년 동안 부려 먹던 사람들과 그 미래의 자식까지도 풀어주자,’ 이랬겠냐고요. 자발적으로. 착해서. 선해서.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노비들이 봉기를 일으켜서 세상이 바뀐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봉기를 일으킬 기회는 얼마든지 많았어요. 온 세계가. 그런데 그런 일이 성공하지 못하다가, 왜 근대에 들어와서야 성공했는가.

[Music ends.]

거대한 역사의 흐름 때문입니다. 흐름이 맞아 들었을 때, 학교는 그 어떤 거대 집단의 선과 악을 논할 기회도 없고 필요도 없이 지어졌습니다. 개개인은 선악으로 움직일지라도, 거대 집단의 아이러니를 이겨내려면 선악보다 더 큰 흐름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일단 ‘시’의 ‘민’이려면 ‘시’가 생겨야겠죠. 도시가 생겨야 한단 뜻입니다. 사람이 모여야 한다. 즉, 농경처럼 드넓은 땅을 필요로 하는 일 그 외의 먹고살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러 학생을 가르칠 여유, 즉, 말하자면 시스템의 본전을 뽑을 수 있을 만큼 사람이 많아야 한다. 그것도 같은 나이대 내지는 같은 교육 수준의 사람들이. 그들을 가르쳐서 뭔가를 돌려받을 만큼의 사업 계획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즉, 산업 혁명. 이런 거대한 흐름이 필요한 겁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기본 지식을 주입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았더라면, 과연 학교가 생겼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계가 없는 농경 사회에서는 학교가 필요 없습니다. 글도 산수도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을 것이기에 시차를 계산하고, 시계를 볼 이유도 없습니다.

필요하니까 이런 것들을 가르치는 거고, 이런 것들을 가르치는 데 필요하니까 학교가 생긴 겁니다.

저는 수많은 다른 역사의 흐름이 이런 식으로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면 승리한 쪽이야 자기네가 선했다고 우겨대겠지만, 그건 그냥 그들이 하는 이야기이고, 어차피 패배자 쪽에서는 승리자가 악하다고 할 것이며, 당연히 승리자가 선해서 이긴 게 아니라고요.

만약 승리자가 선해서 이긴 거라면 수많은 곳들의 원주민들은 다 악하고 멍청해서 죽어도 싼 게 될 텐데, 아니지 않습니까?

선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여기는 사상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걸 믿기 시작하면, 현존하는 건 선해서 존재하기에 좋고, 옳고, 가치가 있는 것이고, 사라진 것들은 무가치하며 없어져도 싼 것들이 되는 겁니다. 나아가, 내가 존재를 멈추는 그 필연적 순간이 올 때, 나도 무가치해집니다. 나 또한 언젠간 죽은 조상이 될 테니까요.

역사가 선의 방향으로 흐른다면, 현재의 ‘좋은 것들’을 갖지 못한 과거인들은 나쁘고 멍청하겠죠? 우리는 저절로 어떤 막연한 천국, 너바나 상태로 향해갈 테고요.

저는 말이 안 된다고 봅니다.

선악은 역사의 흐름과 관련이 없습니다.

그 순간순간에 개개인이 선악을 믿으며 뭔가를 행했을 수는 있으나, 세상이 거대하게 돌아감에는 겉으로 드러난 선악 외에 다른 게 있습니다.

필요. 필요성. 그게 가장 큰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러다이트들은 기계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니, 기계를 악하다고 하며 그것을 부수었지만, 세계의 필요는 결국 기계를 들이는 거였습니다. 러다이트들이 선을 주장해도 소용없었습니다.

만약 러다이트들이 승리했다면 어땠을까요? 기계로부터 그들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믿고 있을 수도 있긴 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필요에 의해 쓰이니까. 그러나, 러다이트들이 자신의 숭고함을 부각하려면 기계의 존재를 숨길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기계라는 게 존재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을 거고, 누군가는 또 기계를 발명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터에서의 수많은 기계와의 싸움 끝에, 한 번만 기계가 승리해도, 기계 문명이 발달했을 겁니다. 혹 승리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불만이 엄청났을 거라 봅니다. 생각해 봅시다. 러다이트 조상들이 기계를 다 부숴줘서 우리가 세탁기, 전자레인지, 식기 세척기, 냉장고, 자동차, 각종 공장 없이 살아야 한다면, 고맙겠습니까?

겨울에 손발이 얼어떨어질 지경에 냇가에서 빨래를 해야 하는데?

냉장고가 없어서 매일 장을 봐야 하는데?

자동차가 없어서 태어난 곳에서 평생 살다가 죽어야 하는데?

의학도 발달 안 했겠죠. 우주도 안 갔겠죠. 넷플릭스 볼 시간은 당연히 없고, 영화라는 것 자체가 없었을 겁니다.

자연은 보존이 됐겠네요.

그렇다 하더라도 러다이트가 선인가? 아닙니다.

그러나 또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악이라서 졌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거대한 흐름. 거대 선악이 아닌 거대 필요.

그리고 그 안에서 개개인들에게 당장의 순간순간에 좋고 나쁘다고 여겨지는 요소들. 개개인들의 작은 선악들. 그것들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9: 마무리

00:53:12-00:57:31

[Music: So This Is It – Ty Simon]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거대한 선악을 믿으면 믿을수록, 아이러니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특히나, 떼의 존속을 위한 히히덕성에 익숙해지면, 떼의 선은 선이 아니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선악대로 세상이 흘러가지도 않습니다.

특정 시대, 특정 장소, 그들이 믿었던 이야기를 벗어나면, 그땐 당연했던 그 선악, 옳고 그름은 흩어집니다. 또한 떼의 선악에서 나오는 아이러니를 넘어서는 거대한 흐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개개인의 선악도 있습니다.

네, 개개인의 선악은 저는 없앨 수 없다고 봅니다. 자기가 그렇게 믿느다는데 뭐… 없앨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겁니다.

따라서 이번 에피소드는 아예 선악 없이 살자는 주장은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 절대주의자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제 선을 따라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진 않고요, 그래서 미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네. 미치지 않고 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세상이 선악을 따라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도 뭐, 괜찮아요. 왜냐? 세상을 거대 선에 맞추려고 하면 나도 아이러니의 일부가 될 테니까. 그러지 않으려면, 음. 내 할 일이나 해야겠다. 그렇습니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Music 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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