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8] 신체통제: 나를 상실한 몸뚱아리

네모 [Ep. 28] 신체통제: 나를 상실한 몸뚱아리

1: 오프닝

00:00:00-00:09:53

[Music: Eternity Clock – Shahead Mostafafar]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시즌 3, 공포 주제의 시즌입니다. 슈퍼내추럴하거나, 디스토피아적인 것, 기타 섬뜩한 것들, 이상한 것들, 잘 생각해 보면 괴이한 것들. 그런데 아마도 잠이 못 들 정도로 무서운 내용은 아닌 것만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공포 장르에서 등장하는 신체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신체는 저에게 최근 들어, 그러니까 최근이라 함은, 근 1, 2년간 상당히 많은 생각하는 시간을 쓰게끔 하는 주제입니다. 이 기간 동안 바다 건너 친구들과 여러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두 개의 언어에 따른 두 개의 필명을 좀 더 본격적으로 나누게 되면서, 몸에 들어 있다는 게 대체 뭔가에 대해 평소보다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제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저는 항상 전부 다 알지 못한단 말이죠. 저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자기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부 다 알지 못합니다. 전문가라는 의사도 진단이 쉽지 않아서, 근미래에는 이 진단 파트만이라도 AI가 방대한 통계 작업을 통해 진행하게끔 할 수도 있다고 하던데. 심지어 통계가 아니라, 인간 개개인을 분석함으로써 진단의 어떤 정답? 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아무튼,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몸은 신비롭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르면서도, 동시에 막연하지만 확고하게 ‘나의 몸은 내 것’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이 생각은 종교가 무너지고, 종교로서의 국가관도 많은 부분 무너지면서 더 심화된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에 종교를 위해 네 몸을 제물로 바치라 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겠죠.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라 하는 것도, 20세기에 피크를 찍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지역별로 아주 문화의 일부가 된 뿌리 깊은 관습이 아니면,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에 대한 반발도 예전보다 심합니다. 이건 전 세계적인 경향으로, 어느 나라에 가도 비스무리할 것 같아요.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2022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연결된 시대인데,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나’라는 울타리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나라면, 또한 나는 모두라면, 첫눈에는 그게 유니콘이 뛰어다니는 아름다운 무지개 세상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봐도 ‘나’가 소멸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경계는 소중하고, 암만 열린 사회, 평등 사회를 부르짖는다 하더라도 나와 남은 같을 수 없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나’가 사라진 존재로서 인간이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많습니다.

음. 그 가능성에 대한 역사학적 썰들이 있습니다. 호모사피엔스 이전에는 좀 더 우주와 닿아 있는 종이 있었다더라는 썰도 있고. 꿈을 통해 우주 혹은 서로와 연결되는 종이 있었다는 썰도 있고. 그런데 더는 증명을 못 한다나 봐요. 과거에 존재했던 그러한 종들은 이제 죽었으니까.

그리고 의학적, 사회학적, 문학적으로는 싸이키델릭 약물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LSD라든지. 여러 가지 버섯이라든지. 올더스 헉슬리가 쓴 The Doors of Perception 류의 책들이 이런… 벽을 허무는 약물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우리는 오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방대한 세상을 소화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뇌가 세상을 쪼개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들이 이런 저술물들에서 나옵니다. 특정 약물을 쓰면 그 경계를 허물고,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내 몸뚱아리에 들어 있는 게 더는 아닐 수 있게 된다고.

저는 이런 약물 사용이 상용화되거나 어마어마한 종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인간이 ‘나’라는 개념 없이, 혹은 그러한 개념이 옅은 상태로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체’라는 주제는, 그것이 만질 수 있는 것인지라 현실과 닿아 있지만, 얼마든지 형체 없는 개념들과 연관 지어질 수 있고 그 형체 없는 개념들의 물질적 발현이라, 공포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갈래가 무섭게 여겨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알 수 없음’이라는 특징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내 몸 밖으로 나가거나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게 될 때의 그 통제 불가능함, 결과를 알 수 없음, 아무도 책임지지 못함에 대한 거부 반응이 이성이 신봉되기 시작하던 계몽 시대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도 상당히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신체. 너무나 흥미롭다. 여기서 뻗어나갈 수 있는 주제가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오늘은 호러에 집중할 거니까. 통제 불가능함, 결과를 알 수 없음, 아무도 책임지지 못함. 그리고 이로 인해, 내가 더는 내가 아니게 되는 두려움을 다뤄보겠습니다.

오늘 논의되는 픽션은 만화 데스노트, 그리고 여러 매체로 나온 Rosemary’s baby 혹은 한국 제목으로는 ‘악마의 씨’가 있습니다.

스포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의 수다, 좀비로 시작할게요.

[Music ends.]


2: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힘

00:09:53-00:16:17

여러분은 좀비물을 좋아하십니까?

제 경우에는 아주 좋아하는 공포의 갈래는 아닙니다. 그러나 좀비 그 자체가 아닌 좀비 세계가 대개 펼쳐지는 디스토피아적 환경에는 관심이 있습니다.

일단 좀비의 정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위키피디아에 나와 있는 간단한 정의로는 ‘살아 있는 시체’입니다. 죽어서 더는 움직일 수 없어야 했는데, 정신이 들어있지 않은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면 ‘좀비가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니 좀비는 그야말로 몸뚱아리만 ‘나’이고, 정신으로서의 나는 완전하게 상실된 상태를 표현하는 현대 픽션에서의 정석 중 정석 같습니다.

그런데 20세기, 21세기의 좀비물에서 ‘살아 움직이는 시체’라는 점보다 어쩌면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부분은 전염병적 측면입니다. 좀비성이란 옮는 질병인 겁니다. 저는 좀비 그 자체보다 이로 인한 사회의 붕괴 측면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좀비 자체는… 그냥… 살아 있는 시체니까… 얘가 약간… 빌런이 못 됩니다. 제가 자연 재앙 장르에도 별로 관심이 없는데, 비슷한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자연이나 좀비는, 얘네가 무슨 악의가 있어서 인간을 공격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얘네가 빌런, 악당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나에게 해를 끼칠 확률이 엄청나게 높지만, 그런다고 해서 자연을 증오하진 않잖아요? 증오의 감정이 오래가진 않을 것 같아요. 너무 거대한 힘이라서 그걸 증오할 자신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거대하냐면, 내가 증오하든 말든 하등 관심이 없을 정도로 나를 능가하는 힘이 자연이니까.

불이 났다, 하면, 불을 무서워할 순 있겠지만 불을 적으로 생각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건 ‘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의 정의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는데, 저는 ‘대적’이 되어야 적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식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대적. 나와 뭔가 비등비등해야 적이지. 개미와 제가 서로 적이 아닌 것처럼, 불과 저는, 불에 비하면 제가 너무 개미라서, 불이란 도저히 적이라기보다는 거의 뭐… 신? 불의 신처럼, 이길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힘이라고 여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이 난다면 불에 대적하려 할 것 같지 않습니다. 불을 끌려고는 하겠지만 불이랑 싸우려고 할 것 같진 않아요. 불로 하여금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다시 안 찾아오게 불을 설득할 것 같지 않아요. 그보다는 불을 낸 사람이라든지, 실수로 불이 나게끔 했던 상황이라든지, 또는 소방차가 오는 길을 막았던 차들의 운전자들을 저주할 것 같습니다.

좀비도 제 생각엔 비슷한 겁니다. 만약 좀비성이 전염된다면, 이런 전염병을 시작한 자들을 증오할 것 같습니다. 픽션 내에서 등장하는 전염병의 근원이 다양하죠? 대개는 의학적 이유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슈퍼내추럴한 이유보다는. 즉, 좀비 사태에 대한 설명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저의 추측으로는, 만약 의학적 원인이라든지 정치적 원인이라든지, 하여간에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지 않으면, 극이 너무나… 걷잡을 수 없이 공허해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좀비 이야기의 극은 대개 좀비성의 원인을 찾아서 제거하는 방향으로 풀리거나, 원인을 찾아서 제거하더라도 이미 소용이 없는 지점까지 갔으니 좀비가 된 자들을 쿼런틴하고 사회를 아주 협소하게 재건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공포성 드라마에 중점을 두는 식으로 풀리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요 후자의 경우. 좀 좀비 사태로 인한 거대 사회의 디스토피아화에 관심이 있습니다.


3: 개인적 공포, 사회적 공포

00:16:17-00:26:43

[Sound effect]

만약 좀비라는 존재가 전염을 시키지 못하고, 극소수의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상태라면, 다수 공포적 성향보다는 소수 공포적 성향의 드라마 장르로 풀어지는 게 더 수월할 것 같습니다. 즉, 사회 공포, 디스토피아 공포가 아닌, 개개인의 공포에 대한 드라마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좀비가 전염성이 없다면, 일단 좀비가 된 당사자는 다른 좀비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고, 스스로 좀비가 됐음을 슬퍼할 수도 없을 것이고. 좀비의 주변인들에게만 유독 고통스러운 경험일 테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별로… 좀비성이라는 점이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보다는 병이라는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질 것 같아요.

현실 세계에서도 정신이 떠나가면 괴롭지 않습니까? 신체가 시체로 변하지 않아도 괴롭습니다. 치매에 걸린다든지, 사고로 기억을 일부 잃는다든지 하면 말이죠. 이때도 좀비 상태와 마찬가지로 당사자는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기던 그 정신을 너무 많은 부분 잃어버려서 괴로워할 기회조차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주변인들은 사회 전반의 지원을 얻지 못한 채, 비교적 홀로 고립되어 고통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전염되지 않는 좀비성과 현실 세계에서 정신을 앗아가는 병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꼭 좀비성 이야기를 써야겠다면… 음…

더 드라마틱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좀비성이 치매보다 더 흔치 않은 설정이라면. 거기다가 몸이 썩어가는 시체니까 병원에서 좀비 치료를 거부한다든지. 전염성이 없는데도.

슬프긴 엄청 슬플 겁니다. 전염되지 않는 좀비성이라는 질병이. 여러분이 사랑했던 사람의 몸이 썩어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의 정신은 완전히 다 소멸했고, 그 사람의 그 썩어가는 몸만 있다고. 게다가 그 좀비성이 전염되는 건 아니라서, 여러분이 함께 좀비가 될 수도 없다고. 또한 누가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좀비를 공격하려고 해서 방어를 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낼 수조차 없이, 그냥 저 사람을 알던 내 기억만 허공에 떠다녀서 아무 정착지도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고.

공포… 공포가 아니게 될까요? 너무너무 슬픈… 멜로가 될 수도 있고. 가족 드라마가 될 수도 있고. 하여간에 슬플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공포 위주로 풀리는 좀비 이야기에는 항상 전염성이 포함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소비했던 좀비 이야기들에는 전염성이 없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비유적 좀비인 경우에도 전염성이 두드러집니다. 우리가 어… ‘좀비 같다’는 말을 쓰잖아요? 그것이 직접적으로 썩은 시체 같다는 표현으로만 쓰이는 게 아니라, 한마디로 정신이 나가고 몸만 움직인다는 뜻으로도 쓰인단 말이죠. 특히나 남이 시키는 대로 할 때. 엄밀히 말하면,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정도의 정신은 남아 있는 거지만.

아무튼 이때도 전염병이라는 특성 때문에 그런지, 디스토피아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것 같습니다. 아주 효율적이죠? 모두가 당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좀비가 됐다든지. 어떤 회사에서 파는 물건을 아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들 소비한다든지. 유행이 왔다 하면 다 똑같은 옷을 입고, 다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가라는 학교 가고 하라는 결혼을 한다든지.

그런데 심지어 여기에 전염되지 않은, 좀비가 아닌 자를 비정상이라고 손가락질한다든지.

비유적 좀비. 이것도 무서운 장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좀비물의 공통점은 뭐다?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섭다. 좀비라는 단어의 어원은 슈퍼내추럴한 부두 문화에서 왔지만, 20세기와 21세기의 픽션에서는 사회적, 정치적, 의학적 이유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어… 충분히. 의학적으로 전염성 있는 좀비, 가능할 것 같지 않나요, 현실 세계에서도? 전염병은 당연히 가능하고. 사람들의 뇌를 갉아먹는, 좀비성이 유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Carl Zimmer 님의 Parasite Rex라는 책이 기생충에 관한 책인데요. 거기에 개미 안에 사는 기생충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Lancet fluke?라는 기생충인데, 걔가 개미를 좀비로 만든다는 겁니다. 좀비 개미. 기생충에 감염된 개미는 풀의 맨 꼭대기에 매달려 있게 된다고 해요, 한밤중에. 너무 무섭죠? 자기도 모르게 그런다고 해야 하나. 개미한테 자아라는 게 있는 건지. 하여간에 개미가 평소에는 풀에 매달려 있는 행동을 하지 않는데 감염된 개미만 이러니까 이상하다고 하는 거겠죠?

얘가 감염되면 한밤중에 풀에 매달려 있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소가 와서 풀이랑 개미를 같이 먹는대요. 이때 이 fluke가 터져 나와서 소의 간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성체가 된대요.

만약 개미가 풀에 매달려 있었는데 소가 안 먹는다? 그러면 해가 뜰 때쯤 개미가 풀을 더는 붙잡고 있지 않게 된대요. 그래서 풀 아래로 내려간다는 겁니다. 그러고는 평범한 곤충처럼 행동한대요. 이게 그 기생충한테는 좋은 거라고 합니다. 그냥 풀에 매달린 상태로 있으면 뙤약볕에 개미가 죽어버리니까, 기생충한테 좋을 게 없잖아요.

그래서 낮에는 개미가 평범하게 행동하게끔 하고, 다음 날 밤에 다시 풀을 타고 오르게끔 한다고 합니다.

킹무섭죠, 여러분? 진짜 완전. 이 책 정말 재밌어요. Parasite Rex. 한국어로는 “기생충 제국”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습니다. 진짜 무서워요. 좀비, 현실 세계에서 저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개미 좀비가 일단 가능하니까. 개미가 몸이 썩어가는 건 아니지만, 개미의 정신이 더는 개미의 것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말이죠. 그러니, 비슷한 인간 좀비, 가능할 것 같다. 심지어 인간이 자기 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도 모르고 특정 행동을 하게끔 하는 좀비성, 가능할 것 같다.


4: 규칙적인 악

00:26:43-00:35:15

[Music: To the Max – Dono]

그런데 이번 에피소드는 좀비에 관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신체에 대한 에피소드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한아임이 좀 더 재밌어하는 픽션의 갈래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저는 확실히 슈퍼내추럴한 요소가 들어간 걸 좋아합니다. 그리고 SF더라도 완전히 먼 미래거나 완전히 우주적인 거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걸 좋아해요. 우주여행을 통해 옆 행성 가는 거 말고요, 그건 이제 곧 현실이 될 거니까. 그보다는 거대 우주에 존재하는,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외계 존재라든지. 아니면 과학적으로 이래저래 저래저래할 줄 알았는데 설명할 수 없는 난해한 수수께끼가 등장한다든지, 이런 걸 좋아합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픽션에 ‘논리’라는 명목으로 현실이 끼어드는 걸 싫어합니다. 현실이 궁금하면 다큐멘터리를 봅니다. 픽션적으로 너무나 재밌는 이야기에 ‘논리’ 명목으로 현실이 끼어드는 것은 현실의 심장 수술실에 주술사가 들어가서 의사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소설 작가는 소설 작가의 할 일이 있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곧이곧대로 반영하는 건 그 할 일 중 하나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 어떻게 보면 21세기는 너무나 많은 신비함이 전부 다 과학으로 설명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이거에 대해서도 이번 시즌에 얘기를 하고 싶은데.

[Music ends.]

음. 일단 잠깐만 얘기하자면, 클락테크. 마법과 분간할 수 없는 기술. 이런 게 예전에는 정말정말 많았지만, 점점 더 줄어들고 있지 않습니까?

즉, 21세기 사람들이 쓰는 기술이 19세기에는 전부 마법 같았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22세기가 되면 21세기에 마법 같았던 게 상당수 기술의 영역으로 들어가겠죠. 23세기가 되면 더할 것이고. 24세기가 되면 더욱더. 그렇다면 조만간에는 우리가 마법이라고 여기던, 그리고 여기는 모든 게 기술이 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막연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일단, 신체 공포.

그중에서도 한아임은 슈퍼내추럴한 신체 공포를 현실적인 신체 공포보다 더 좋아한다. 그리고 그 가장 극명한 예시는 엑소시즘 장르입니다.

저는 엑소시즘 장르를 좋아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엑소시즘이 아니더라도 악마. 오컬트. 이런 걸 왕짱킹 좋아해요. 현실 세계의 규칙과는 충돌하지만, 그 세계 내부에서는 다 말이 된다고 일컬어지는 규칙이 있다는 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뭐… 여러분? 이거 아십니까? 저주를 걸 때는 검은 양초를 써야 합니다. 그래야 저주가 여러분에게 튕겨 돌아오는 걸 막을 수 있어요.

검은색 말고도 양초 색에 따라 어떤 주술을 거는지. 어떤 오일을 쓰는지. 즉 그… 양초를 켤 때 불꽃이 닿는 곳에 고이도록 뿌리는 오일을 뭘 쓰는지. 혹은 양초 주변에 어떤 물체들을 놓는지. 몇 시에 양초를 켜는지. 며칠 동안 켜야 하는지. 이런 거요.

아, 여러분, 이것도 아십니까? 주술 양초는 불어서 끄는 거 아닙니다. 생일 양초만 불어서 끄시기를 바랍니다. 그건 어… 해마다 폐활량 측정을 해야 하니까 그런 거고, 주술 양초는 항상 그… 종 같이 생긴 기구 있지 않습니까? 그걸 불꽃에 씌우면 불꽃에 산소가 닿지 않으니까 불꽃이 사그라듭니다. 그걸로 끄셔야 주술이 효과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걸 좋아해요.

규칙. 법칙. 세계관.

엑소시즘에 이런 게 많습니다. 악마가 들어오면 읊어야 하는 기도문이라든지. 사제복은 어떻게 입어야 하며. 누가 퇴마 사제가 되며.

그리고 퇴마 장르의 서브 장르로서, 경험 많은 사제와 젊은 사제 간의 브로맨스라든지. 이것도 그러니까, 경험 많은 사제가 젊은 사제에게 가르쳐줄 규율이 있으니까 이런 식의 브로맨스가 가능한 겁니다. 안 그랬으면 뭐, 젊은 사제 둘이서 실리콘밸리 창업자들처럼 기똥차게 창의적인 방식으로 새 퇴마 사업을 차렸겠죠? 뭐, 그런 얘기도 재밌긴 하겠다.

아무튼 그리고 제가 엑소시즘 및 주술을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제가 슈퍼내추럴한 요소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픽션이 픽션으로서 살 수 있게끔 하기에, 신비로움을 신비로움으로서 두기에’라고 설명을 했지만서도, 동시에 그 픽션이 그냥 혼자 동떨어져 있는 픽션이 아니라, 현실을 비춰줍니다. 이게 진짜 기똥찬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픽션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슈퍼내추럴 장르가 장르가 될 정도로 정립된 이야기의 초기 조건들이 너무나 흥미로운 겁니다.

악마가 사람 몸에 들어온다는 그 자체가 납득이 되는 이유.

악마가 사람 몸에서 퇴마되는 방식이 납득이 되는 이유.

누구는 악마를 퇴마할 수 있고 누구는 악마를 퇴마하지 못하는 게 납득이 되는 이유.

이런 데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것과 현실이 연결되는 지점에 대해 제가 옛날에 썼던 짧은 글을 읽어드릴게요.


5: 얼굴, 이름

00:35:15-00:44:06

[Music: Safran Piano – Hanjo Gabler]

제목: 얼굴, 이름

얼마 전에 친구랑 얘기하다가 ‘데스노트’가 언급됐다.

만화 데스노트. 하도 오래전에 봐서 내용이 많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전제는 이랬던 것 같다. ‘누군가의 얼굴과 본명을 알고, 그 본명과 사망 원인을 데스노트에 적으면, 그 사람은 그 사망 원인대로 죽게 된다.’

이것이 왠지 말이 되는 듯(?)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얼굴과 본명에 부여하는 힘이 크기 때문일 거다. 순 판타지인데도 왠지… ‘누군가의 키와 몸무게를 알면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보다야, ‘본명과 얼굴을 알면 죽일 수 있다’는 게 훨씬 말이 되는 것 같지 않은가?

퇴마 장르에서는 꼭 나오는 장면이 있다. 악마더러 ‘네 이름을 말해라!!!’ 하는 것이다. 이름을 알면 무찌를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꼭 별명이 아니라 본명이다. 보통은 본명을 대라는 이 장면 전에 악마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려는 시도가 있다. 즉, 엔터테인먼트성 퇴마도 똑같다. 얼굴 + 본명을 아는 것이 무기다.

인터넷 세상을 유영하는 사람 중 많은 이는 퇴마나 데스노트를 걱정하는 자처럼 자신의 얼굴과 본명을 숨긴다. 내가 그중 하나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오히려 퇴마나 데스노트를 가까이에서 경험해 볼 일이 생긴다면 환호성을 지를 자다. (킹 익사이팅. 귀신 환영. 궁금.)

그러니 그게 무서워서 본명과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게 아니다. 또한 ‘정체’를 들킬까 봐서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정체 아닌 것에 낙인찍힐까 봐서고, 그들 착각 속에서는 그대로 살까 봐서다.

나도 모르는 나를 누가 단지 본명과 얼굴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안다’고 주장할 때 그자 머릿속에 생길 내 거짓된 ‘정체’가 싫어서.

만약 내 ‘정체’에 대해 아는 것을 어디 한번 읊어 보라 한다면, 너는 단 하나도 옳게 읊지 못할 게 확실하다.

왜냐하면 너는 꽃의 얼굴을 들이대면 그 이름을 읊어주는 앱보다도 내 본질을 모를 확률이 높으니까.

나한테 물을 얼마나 줘야 하는지, 해를 얼마나 비춰야 하는지, 토양은 어때야 하는지, 나도 몰라서 매일 틀리고, 알다가도 바뀌어서 또 헤매는 바람에 내 이 두 다리로 그 물, 해, 토양을 찾아가지를 못하는데, 네가 정답을 알 리가 없으니까.

혹은 만에 하나, 정말 말 그대로 1만 중 하나의 경우에는 이렇겠지:

너는 정답을 안다. 그런데 내게 그것들을 줄 수가 없다.

네 정원에 사는 꽃에게조차 그것이 요하는 요소들을 줄 수가 없는데, 나한테 줄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여 본명과 얼굴은 내 본질 중 가장 껍데기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보호해야 하는 껍데기다.

다행히 글 쓰는 일(특히 픽션)에는 얼굴이 필요하지 않다. 아무도 글 쓰는 사람더러 무대 위에 올라가라고 시키지 않는다. 게다가 필명을 쓰는 경우가 많다 보니까 활동명이 본명이 아니라고 해서 사기라느니, 필명이 여러 개라서 사기라느니, 그런 식으로 따지는 사람도 없다.

어쩌면 이 세상 여러 일 중 특히나 글 쓰는 자에게 이런 관례가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란 뜻일지도 모른다.

퇴마도 데스노트도.

퇴마사나 데스노트도 아니면서 마치 본질에 다가가기라도 한 것처럼 구는 자들도.

이렇게나 두려운 게 없으니, 누가 퇴마하고 싶을 만한 글을 쓰란 얘긴가.

‘그래, 내 본명을 데스노트에 적으려고 궁금해해봐라! 하지만 얼굴을 모르니까 어차피 용용 죽겠지!’ 이런 태도를 가지란 뜻인가.

어디선가 주워들었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악마의 책이라며 그걸 여러 권 모아서 불태운 종교 집단이 있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상당히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글처럼 무형인 것을 굳이 유형 상징화해서 불태우는 노력을 들이다니!

그래서 내 글을 엄청 싫어하는 미친 컬트가 생기는 건 ‘미래에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겨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일 중 하나다.

다만 나는 조앤 씨와는 세대 차이도 있고 취향 차이도 있어서, 내 글을 태우려면 불만 지펴야 하는 게 아니라 일단 종이를 구해서 프린트한 다음에 태워야 할 거다.

아, ‘희생’이란 개념을 제대로 유형화하고 싶다면 내 글을 담은 아이패드를 여럿 태우는 방법도 있겠다. 그거야말로 진정한 희생일 것이다. 사과를 여럿 태우면 너희의 성스러움을 내 인정해 주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도 본명도 없는 나는 악령처럼 계속 너희가 죽여 없애려는 그 목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니.

나의 본질은 껍데기에는 없다.

[Music ends.]


6: 오컬트 기생충

00:44:06-00:48:26.000

[Sound effect]

네. 뭐 이런 생각을 저는 하면서 삽니다.

그리하여. 좀비와 오컬트에 대해 얘기했는데. 그것을 합친 듯한 얘기가 있으니, 바로 오컬트 기생충이 내 몸에 들어와서 내가 좀비처럼 아무것도 마음대로 못 하는 케이스입니다.

이것에 대한 픽션이 있습니다. 바로, Rosemary’s baby. 한국에서 ‘악마의 씨’로 나왔나 본데, 너무 제목이… 스포일러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영화와 책으로 봤는데, 영화가 더 좋았고요. 두 경우에 다 로즈메리가 뭔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르는 데에 시간을 많이 씁니다. 처음부터 악마라 하면 어떡해. 완전. 스포일러를 다른 경로를 통해 다 알고도 이야기를 재밌게 소비할 수 있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측에서 이렇게 대놓고 스포일하는 건 정말 드문 케이스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제목이 하도 스포일이라서 더는 스포일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스포일러가 싫으시면, 듣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괜찮으시다면 계속 들으시면 되는데, 영어 제목 한국어 제목 합치면 얘기 끝났어요. 로즈메리한테 아기가 있는데 얘가 악마의 씨입니다. 끝. 이거예요. 이게 다예요. 여기까지 가는 과정이 이 이야기고요, 플롯이 단순하다고 해서 이야기가 단순한 건 아니기에, 재밌습니다. 플롯은 ‘로즈메리랑 남편이 새 건물로 이사 가는데, 거기서 이상한 오컬트 집단이랑 엮이고, 로즈메리의 몸에서 악마의 씨인 아기가 자라게 된다.’ 이거고, 내용은 로즈메리와 남편 사이의 불신. 젊은 여자라서 로즈메리가 겪게 되는 아주 그… 비하적인데 특별히 의도한 것도 아니라서 더 기분 더러운 대우. 주변 친구들의 의문의 죽음. 이런 것들입니다. 아주 그냥 분위기가 음산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좀비 장르라고 나와 있진 않지만, 오프닝에서 얘기했듯이, 신체가 얽힌 공포 장르는 그 신체에 대한 통제를 잃는 것이 공포의 기반이라서 그런지, 비슷한 점이 있는 것이죠. 차이가 있다면 로즈메리는 이상한 낌새를 결국엔 눈치챈다는 점. 그러나 또… 그러나 또 끝에 가서 결국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합니다. 오컬트 집단이 원하는 대로. 그것이 로즈메리 본인이 원해서 한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과연 그런가? 어디서부터가 로즈메리고 어디서부터가 이 오컬트 집단의 큰 그림인가? 로즈메리는 이제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좀비가 된 건가, 이 오컬트 기생충 때문에?

이런 의문이 들게 합니다.


7: 마무리

00:48:26-00:58:15

[Music: So This Is It – Ty Simon]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네. 신체 공포 장르. 할 얘기가 너무 많아요. 더 넓게 보면 각종 납치 공포 장르도 신체 공포고. 슬래셔도 신체 공포고. 가위눌리는 것도 신체 공포인데. 아… 아무튼 이번 시즌에 어떻게 이 거대 갈래들을 나눌지, 계획을 잘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에 적용 가능한 얘기 하나를 해보겠습니다.

Bessel Van der Kolk님? 네. 발음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Bessel Van der Kolk님이라는 네덜란드의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 연구자인 분이 쓰신 The Body Keeps the Score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분 연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분노를 마구 표출하는 부모 아래서 자란 사람들은 스스로의 분노를 억압하고, 자신들을 해하는 자들에게 맞서려는 욕망을 가라앉히려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머릿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몸에 드러난다고 해요. 몸이 마치 얼어 있듯 경직되어 있다든지, 신체가 건강하고 정신이 게으르지 않은데도 달리기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든지, 이런 특징이 나타난대요.

이때 이 작가분의 치료법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말로만 상담하는 정신 치료를 하기보다는, 킥복싱, 수영 등등, 환자분들이 평소에는 하지 않았던 과격한 운동을 해보게끔 하는 겁니다.

그러면 몸의 트라우마가 풀림으로써 마음까지 치료되는 경우가 있대요.

언뜻 들어도 그럴 것 같지 않나요? 제가 사는 2022년이 이미 이런 이론을 많이 받아들인 시대라서 제가 이렇게 쉽게 이 치료법을 받아들이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암만 심리 치료를 시도하면 뭐 합니까? 치료를 못 합니다. 몸이 기억하는데.

이 몸의 기억. 이게 이 책 제목의 이유인 겁니다. 몸은 다 하나씩 기억한다고. 아무리 정신적으로 극복했다고 여겨도, 어느 날 갑자기 본능적으로 반응이 나오는 겁니다. 맞고 자라서, 누가 손을 들기만 해도 나를 때릴 줄 알고 몸이 움츠러든다든지, 이런 식으로.

마음으로 몸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경우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심한 경우들. 그런데 이 상황이 복잡한 이유는, 마음의 상처 때문에 몸에도 트라우마성 기억이 남은 거지만, 동시에 어쩌면 그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해 몸과 마음이 단절되기도 했다는 점 때문일 겁니다. 마음으로는 게으르지 않으니까 뛸 수 있는 게 맞는데, 그래도 뛰지 못하고, 뛰기 싫은 마음이 역으로 드는 거잖아요. 이렇게 마음대로 몸을 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단절이 있지만, 동시에 마음 때문에 몸이 기억을 하게 된 것이기에, 단절이 없는 측면도 있다. 아주 복잡한 것 같아요.

아무튼 이분이 말하기를, 서서히 몸과 마음을 다시 연결시키되, 예전의 기억으로부터 단절하는 방법은 몸에 새로운 기억을 심어주는 거라고 합니다. 맞고 자란 사람이라면, 안 때리고 쓰다듬어주는 기억을 심어주는 거죠.

그렇다고 합니다. 신체 공포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몸이란 우리가 ‘공포’라고 명명하지 않는 장르나 현실 세계에서도 얼마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인지. 마음도 마음대로 안 되고, 몸도 마음대로 안 돼요. 참 나 원.

그래서, 모르겠어요. 마음대로 한다기보다는 어쩌면 그러면 눈에 보이는 걸 따라 하는 게 나은가? 왜냐하면 이분도 그러거든요. 스스로 숨 쉬는 방식, 포옹하는 방식 등등을 관찰하면 좋다. 내가 숨을 얕고 빠르게 쉬는지, 깊고 충분하게 쉬는지. 포옹을 안 하려고 하는지. 그러고서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면 뭔가… 왜 그렇게 됐는지를 깊게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몸부터 따라 하기 식으로 움직이는 게 좋은가? 그런 겁니다. 정신을 너무나 가늠하기 힘들고, 정신과 연결된 몸도 가늠하기가 너무 힘드니까, 일단 몸만.

몸은 기억한다고 하니까. 그러면 정신도 따라오는 건지.

네. 이상, 답이 없는 마무리 주절거림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적절한 운동을 합시다. 밥을 잘 먹고, 잘 먹고 잘 살자. 좀비가 되지 말면 좋지만, 그리고 오컬트 혼령이 들지 않으면 좋지만, 정신이 너무 가늠이 안 될 때는 몸이라도 원하는 쪽으로 움직인다면 그 자체가 정신 컨트롤을 하는 게 아닌가?

아… 말할수록 궤변이 되니까, 그만하겠습니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Music 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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