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0] 집착범죄: 절대성의 맹신지옥

[Ep. 30] 집착범죄: 절대성의 맹신지옥 - 네모

1: 오프닝

00:00:00-00:04:40

[Music: Eternity Clock – Shahead Mostafafar]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시즌 3, 공포 주제의 시즌입니다. 시즌을 시작할 때 이 팟캐스트에서 다룰 공포가 픽션일지 논픽션일지에 대해 정한 바는 없었습니다. 슈퍼내추럴 한 것에 대해 얘기할 수도 있다고 했고, 그것은 아무래도 픽션의 영역에 속할 것 같으나, “이상한 것들, 잘 생각해 보면 괴이한 것들”에 대해 얘기하겠다고도 했었죠.

음…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대해 제가 갖고 있는 생각 때문입니다. 픽션과 논픽션은 책방에서, 혹은 온라인 책 판매 사이트에서 그러듯 명확한 분계선이 있는 게 아닙니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흐릿함을 안 상태에서 그것들을 이용하고 남용하지 않으려는 것과, 경계가 흐릿하다는 것조차 몰라서 자기 머릿속의 스토리가 현실 세계의 타인에게 적용된다고 착각하는 건 천지 차이입니다. 그래서 제가 현실도 픽션임을 알아야 한다고, 논픽션도 크게 보면 픽션의 일부라고 누누이 말하는 겁니다.

더 자세한 사항을 오늘 다뤄보겠습니다. 공포의 갈래 중에서도 매우 현실적이며,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한, 집착 범죄를 다룰 겁니다. 더 자세하게는, 그 집착의 픽션 말입니다. 범죄자의 머릿속에 있는, 그자가 논픽션 현실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픽션인 그 집착.

오늘 언급될 픽션은 스티븐 킹 님의 책, 미저리입니다. 이 책도 참. 주인공이 작가예요. 이 내용 중 얼만큼이 픽션일까요? 저는 상당 부분 논픽션인 점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또 그 구분이 애매하며, 심지어 불필요할지도 모르는 이유가 뭐다? 논픽션도 픽션이니까. 지금 스티븐 킹 님이 작중 주인공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고요. 픽션이 현실과 닿아 있지 않을 수 없으며, 현실은 픽션이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말하는 겁니다.

아무튼, 스포일러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다 저번에 잠깐 얘기했던 클락테크, 그걸 잠시 엮을 겁니다.

그럼 오늘의 수다, 시작할게요.

[Music ends.]


2: 허구적 집착

00:04:40-00:12:58

아까 말한 두 그룹의 인간이 있습니다.

첫째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흐릿함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며, 남용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픽션과 논픽션의 관계에 대한 이 인지를 통해 뭘 할 수 있는지, 간단한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런 겁니다.

타인이 자신한테 ‘넌 못났어. 넌 안 될 거야. 해봤자 뭐 해?’라고 태클을 걸 때 ‘그건 그냥 저 사람이 스스로에게 하는 스토리텔링이다.’ 혹은, ‘저 사람은 나한테 저런 스토리텔링을 주입시킴으로써 나를 자기가 처한 상황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같은 걸 알 수 있습니다. ‘같은 현실’이라고 불리는 그 물리적 시공간에서 나와 나에게 태클 거는 그 사람이 ‘함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순간에조차, 그 공간에서조차 나는 저 사람과 분리된 현실을 살 수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고요. ‘함께’라는 단어 자체가 얼마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허구인지를 안다는 겁니다. 또한, 저 사람이 자신의 현실을 ‘현실’이라 부르고, ‘현실은 원래 이래, 다들 이렇게 살아, 원래 인생이 이런 거지 뭐’라고 말하는 걸 게으름 내지는 뭐, 자기 위안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더 크게 나아가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편이 패배자들을 아주 죽어도 싼 놈들로 치부하는 스토리텔링을 팔려고 해도, 그것이 다만 스토리임을 알 수 있겠죠. 혹은 그 스토리텔링을 믿더라도, 그것이 스토리임을 알고 믿든가요.

또한, 통계 역시 상당 부분 해석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숫자 자체는 ‘진짜 논픽션’ 내지는 불변의 것일지 몰라도, 논픽션이라고 레이블된 과학적, 수학적 해석은, 그것이 인간을 통해 필터링된 해석인 이상, 절대 완전히 객관적인 것일 수가 없다는 점을 아는 겁니다.

그런데 두 번째 그룹의 인간이 있습니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것조차 몰라서 자기 머릿속의 스토리가 현실 세계의 남들에게 적용된다고 착각하는 자들. 그중 하나가 이번에 벌어진 스토킹 및 살인 사건의 범죄자처럼 행동하게 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자는 현실과 상상의 차이가 분명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발생하는 문제가 뭐냐면, 상상을 현실로 옮겨오기만 하면 그게 현실이 된다고 착각해요. 즉, 자기가 어떤 사람을 좋아해서 그 관계가 반드시 잘 돼야 한다는 상상을 한다면, 그걸 상대의 삶의 이야기에 스며들도록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그냥 그 사람을 죽여서라도 자기 마음대로 하면 자기가 승리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자기 상상을 현실화했다고 생각할 거예요. 이 세상이 전부 다 개개인의 이야기로 얽혀 있는 거라면 상상을 현실화하는 게 엄밀히는 불가능하고, 나의 상상이 타인의 상상과 보다 깊게 얽힘으로써 그것이 다만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통용되는 것인데, 그걸 모르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사건을 볼 때 이렇게 해석을 하는 반면, 대부분의 뉴스에서는 정반대로 해석을 합니다. 이자에게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흐릿해서, 상상과 현실을 분간을 못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

저는 반대라고 보는 겁니다. 오히려 상상과 현실을 너무 구분지어서 자기가 뭔가를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그것이 현실 세계의 진짜가 된다고 믿는 겁니다. 허구의 실재성을 모르니까.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원래도 불분명하다는 걸 모르니까.

네. 여러분. 허구는 실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삶이 있고 타인이 생각하는 삶이 있으면, 그 여러 삶을 융합시키려고 시도하죠. 융합 시도란, 내가 상상한 것을 저쪽, 상대방에게 전달함으로써 저 사람의 이야기에도 포함되게끔 하는 겁니다. 나의 비전을 저쪽에 전달하고 그 사람이 그걸 이해하면, 그리고 우리가 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면, 그것이 ‘현실’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논픽션’이라는 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세상이 바뀌는 겁니다.

혹은,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런 융합 시도를 하기 싫다면, 이사를 가든, 이민을 가든, 외딴 오두막에 들어가서 살든, 돈을 엄청 벌어서 큰 집을 사서 타인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든, 합니다. 즉, 나랑 말이 안 통하는 저 사람이 ‘현실’이라는 것에서 나와 함께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물리적, 정신적 거리를 둠으로써 함께하지 않는 것과 다름 없는 이야기를 각자 살 수 있다는 걸 우리는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어요. 어디서부터 현실이 끝나고 어디서 상상이 시작하는지, 상상은 언제 끝나고 현실은 언제 시작하는지 불분명하니까요.

인간은 상상의 동물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억하고, 끊임없이 꿈을 꾸고, 그 꿈과 기억은 발생했던 그대로 박제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추가되는 해석을 통해 필터링 되고 엷어지거나 짙어집니다.

그런데 이자는 자신의 허구적 인생 스토리와 현실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여긴 겁니다. 애초에 현실이 상상과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자기 상상이라는 조각을 현실에 욱여넣기만 하면 그게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여긴 거죠. 저쪽, 피해자 쪽에서 자기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든, 나의 현실을 저쪽의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내가 현실로 만들기만 하면, 그게 너무 객관적이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현실이라서 저쪽에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착각한 거예요.


3: 논픽션이 근본적으로 픽션인 이유

00:12:58-00:22:36

[Sound effect]

논픽션도 픽션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겠습니다.

저는 이런 걸 말하는 겁니다. 국가처럼 거대한 것에도 다양한 해석의 역사적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거. 심지어 인류 자체의 역사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새로운 스토리가 쓰인다는 거.

네. 그렇습니다. 역사는 스토리텔링입니다. 요즘에 뉴스에 나오는 또 다른 사건이 있는데, 하버드 교재에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라고 나와 있다는 보도였습니다. 지금 이 팟캐스트를 듣는 분들의 대다수는 하버드 측의 이런 입장이 완전 미친 픽션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하버드 측에서, 그리고 중국 측에서는 이게 논픽션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증거를 들이대도 소용없어요. 뭐 증거가 없어서 지금까지 교과서에 이렇게 나왔겠습니까? 역사는 워낙에 해석이 판을 치는 분야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증거, 혹은 증거의 부재만 추려서 충분히 이런 이야기를 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것을 현실에 박제하기 위해, 절대 현실의 연장선으로 여겨지는 논픽션에 속하는 역사 분야의 책을 쓰는 겁니다. 절대 자기네들 입장이 픽션이라는 걸 인정 안 하죠.

하버드가 명문대라는 것 역시 픽션입니다. 그걸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현실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의 일부인 거지, 하버드가 정말로 명문대입니까? 이건… 이건 어떡할 건데?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라는 거?

과학도 많은 부분 스토리텔링입니다. 수치는 불변일 수 있어도, 그 해석부터는 스토리텔링이 아닌 게 없습니다. 기후 변화에 대해서도 많이 그러죠? ‘이 세상의 온도가 몇 도 올랐다,’는 수치가 변치 않을 수는 있지만, 그 해석은 천차만별입니다. 고작 몇 도 정도로 웬 난리냐, 하는 해석도 있는 거고, 고작 몇 도라니, 세상이 멸망할 거다, 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이걸 불변의 진리라고 주장하고 실제로 착각하는 순간부터 과학은 걷잡을 수 없는 사상싸움이 됩니다. 실제로 사상싸움이 아닌 게 거의 없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기후변화보다 덜 논쟁적인 과학 주제로도.

수치로 뭘 하느냐는 결국 정치랑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무슨 진공 상태에서 연구하겠습니까? 어떤 과학이 더 중요한지, 무엇이 펀딩을 받는지, 누가 노벨상을 타는지, 그게 과학적 불변의 법칙에 의해 진행되겠냐고요. 세상에 그런 건 없습니다.

저널리즘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기사가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냐만 따질 게 아니라, 무엇이 기사로 쓰여지고 무엇이 쓰여지지 않는지부터가 주관성의 시작이라고요. 그런데 쓰여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기 힘들죠. 존재의 타당성은 얼마든지 논할 수 있지만, 부재의 타당성은 그 부재하는 것이 뭔지 모르기에 논하기가 어렵습니다. 존재가 될 뻔했던 부재가 캔슬되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다면야 모를까.

그런데 과학도 이렇단 말이죠. 무엇이 과학의 범주에 들어가는지부터가 계속해서 바뀝니다. 여러분? 이런 비슷한 측면에서 이혜원 기획자와 제가 번역했던 ‘괴물성’ 책이 흥미롭기도 합니다. ‘의학’이라는 분야에 별별 것들이 다 들어 있던 시절이 있었어요. 골상학, 이런 거요. 사람 두개골 모양으로 범죄자를 판별할 수 있다는 미신. 이제는 미신이라고 하지만, 옛날엔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골상학 믿는 사람들 있을걸요?

그러면 그걸 믿는다고 하는 그들의 현실, 즉 논픽션이 그들에게는 아주 객관적일지 몰라도, 외부에서 보면 그 또한 픽션인 겁니다.

또 다른 예로는 정신 의학 전반이 있습니다. 혹은 정신과 관련된 다른 과학 분야들. 정신이 몸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던 시절도 있었고, 정신병이란 건 없다고 여기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세계의 어느 곳에 가면 그렇게 믿을 수도 있어요. 정신병은 그냥 나약해서 아프다고 상상하는 거라고, 현실이 아니라. 그런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상상입니까?

이런 식으로 의학이나 과학에 속하는 건 계속 바뀌고, 또한 일단 범주에 들어가서는 무엇이 핫한 분야인지. 무엇이 여러 가지 사회 경제적 힘으로 인해 더 인기 분야로 되는지. 어떤 나라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어떤 분야로 진출하게 되는지, 등등이 갈립니다. 여기에 과학 법칙이 어딨습니까? 모든 운명을 다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면야 모를까. 객관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주관적인 스토리텔링으로 밀고 당기기를 해서 세상이 변하는 거라고 저는 봅니다.

게다가 과학자의 배우자. 그자의 선배. 자식. 그날 컨디션. 수면 상태. 야망의 정도. 정치 스킬. 운. 이런 것들을 둘러싼 수많은 스토리들이 모여서 과학이 됩니다. 과학자가 무슨 진공 상태에서 과학하는 것처럼 구는 것 자체가 저는 사기라고 봅니다. 누가 보면 밥 안 먹고 잠 안 자고 몸 안에 장기가 없어서 배변도 안 보는 것처럼 구는 과학자들이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저는 이런 자들이 무섭습니다. 자기가 무슨 신인 것처럼. 과학은 논픽션이라는 바로 그 픽션을 등에 업고.

역사를 보면 이런 과학자들이 수두룩해요. 자기가 엄청 다 아는 것 같이 구는 자들. 과학이니까 현실이라고 여기는 거고, 누구나 다 받아들일 줄 아는데, 수십 년만 지나면 그들이 당시에 믿었던 걸 반박하는 누군가가 또 등장합니다.

사실 이게 과학 아닙니까? 이론을 만들고 실험하고 연구하고. 그게 틀리더라도 괜찮아야 하는 게 과학인데, 아니 적어도, 그렇게 주장을 함으로써 그것이 논픽션이며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지식을 찾아낸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객관성의 픽션을 유지하는 동시에 이론에 사상을 주입하려고도 합니다. 아무 과학 역사책이나 한번 읽어 보세요. 얼마나 많은 과학자들이 자기가 진리를 찾았다고 착각했는지. 그걸로 얼마나 잘난 척을 했고, 얼마나 세상을 이롭게 하는 척을 했는지. 오히려 가장 논픽션이라는 과학이 이래서 픽션인 겁니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측정 기구, 아직 가 보지 않은 땅, 아직 존재하지 않아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투사할 수 없는 기계, 동식물, 인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과학의 절대성에 대한 이 오만함 때문에.


4: 미저리

00:22:36-00:35:28

[Music: Never Ending Story – Gumi]

이것이 현실인데. 현실과 허구의 경계는 메인스트림에서 파는 허구의 스토리에서만큼 극명하지 않기에, 픽션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책, 미저리입니다.

스티븐 킹 님의 많은 책들 중에는 저랑 세대 차이도 나고 문화 차이도 나서 잘 못 알아듣겠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미저리는 아닙니다.

문화 차이라 함은, 어… 미국에 미국이 하나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의 미국이라는 스토리도 픽션입니다. 물론 제가 믿는 하나가 아닌 미국 역시 픽션입니다. 믿고 싶은 거 골라서 믿으시면 됩니다.

제가 보기에 미국은 수십 개 주로 나뉘어 있고, 각 지방의 문화가 극명하게 다릅니다. 당연하죠. 땅이 그렇게 큰데.

그리고 그중에서도 스티븐 킹 님의 이야기들의 배경으로 자주 나오는 북동부 끝자락의 메인주 시골은 제가 완전히 모르는 문화입니다. 저는 도시나 준도시가 아닌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모두가 모두를 아는 시골은 말만 들어도 무서워요. 스티븐 킹 님의 슈퍼내추럴 소설이 아니더라도 무섭단 말이죠.

그런데 미저리는 매우 협소한 장소에서 벌어집니다. 어떤 집의 어떤 방 하나에서 대부분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오히려 그 때문에 제가 너무 재미있게 읽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메인주의 외딴 마을의 문화는 제가 너무 이해가 안 가는 점이 많지만, 이 방 하나는 이 책에서 묘사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거든요.

꼭 읽으세요 여러분. 저는 영화를 먼저 봤는데, 책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완전히 다른 얘기고요, 영화로는 책에 있는 내용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매체가 달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책도 영화의 내용을 다 담을 수 없는 건 똑같고요. 그러니, 미저리를 기반으로 한 같은 이야기가 책으로도, 영화로도 있다는 것 자체도 역시, 네, 픽션입니다. 우리가 연애하다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쓴다고 해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안 되는 것처럼, 주인공이 광팬한테 감금당한다고 해서 같은 얘기가 되는 건 아닙니다.

물론. 현실적인 법적 이유 때문에 미저리를 기반으로 한 영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요. 법도 픽션이죠.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법은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언젠가부터 세상이 이러저러하게 바뀌어서 저작권이라든지, 각종 법이 중요하다, 이것은 법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계약이죠. 사회적 계약이고. 그 때문에 생겨나는 규칙들이 법이지. 법도 뭔가… 지금 현재의 법이 이러하다 저러하다고 해서 그것이 뭔가 절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건 상당히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법을 어기라는 건 아니고요. 왜냐하면, 말씀 드렸듯이, 충분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것에 동의를 했거나, 직접적으로 동의를 했거나, 동의하기로, 뭐랄까, 국적이라든지, 어떤 그룹에 속함으로 해서 저절로 동의하는 거나 다름없게 되는 경우가 법이기 때문에, 이걸 어겨서 여러분의 삶의 스토리텔링에 별로 좋을 건 없겠죠.

그런데 또 잠깐 뉴스 얘기를 하자면. 인도에서 어떤 소녀들이 집단 강간 살해 당하는 사건이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그곳의 카스트 시스템 내에서는 이 소녀들한테 그래도 된대요. 그게 카스트의 법인 겁니다. 이거 픽션이죠. 카스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인도 분들은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어… 죄송한데 죄송하지가 않네요. 카스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카스트 같은 게 있어선 안 되며 집단 강간 살해자들이 처형당해야 한다는 게 제 법관입니다. 사실 저는 굉장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주의라서. 그보다 더한 걸 해도 된다고 여기는 편이에요. 그런데 제 이런 스토리는 법이 아니죠.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런 제 상상을 다른 사람들의 상상에 융합시키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습니다. 그냥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뿐입니다. 법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간 카스트 같은 시스템에서 주장하는 법이 진짜인 줄 알게 되며, 이 강간 살해범들 같은, 바퀴벌레를 언급하는 것조차 미안한, 바퀴벌레만도 못한 쓰레기가 되는 거라고.

아무튼. 앞서 말했듯이, 주인공이 광팬한테 감금당하는 게 미저리라는 이 이야기의 플롯입니다. 주인공인 폴 쉘던이 부상을 심하게 당했고, 광팬이자 과거에 간호사였던 애니 윌크스가 그 부상을 이용해 폴 쉘던을 뭐… 고문하는. 네. 고문하는 얘기입니다.

[Music ends.]

그런데 고문만 들어 있었으면 그냥 거부감만 들고 전혀 얘기가 재밌지도 않았을 텐데, 이 고문의 플롯 안에 폴 쉘던이 생각하는 작가관도 들어 있고, 무엇보다 애니 윌크스의 흐릿한 현실관, 혹은 뚜렷한 허구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흥미로워집니다.

애니 윌크스가 폴 쉘던에게 가하는 고문 중에는 신체적인 것도 있는데, 정신적인 것도 상당합니다. 신체와 정신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정신에 보다 스트레스를 주는 일을 애니 윌크스가 폴 쉘던으로부터 강요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애니가 폴한테 책을 써 내라고 해요. 자기가 좋아하는 ‘미저리’라는 주인공이 나오는 시리즈의 다음 책을 쓰라고. 이거 못 쓰면 폴은 죽는 겁니다. 써도 죽을 수도 있지만, 못 쓰면 반드시 죽는다.

애니 입장에서 봤을 때, 자기가 폴 쉘던을 감금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좋은 책’을 쓰게 하는 건 폴 좋으라고 하는 일입니다. 이 여자는 진짜로 그걸 믿어요. 전주환 수준이죠. 자기가 피해자를 좋다고 하면 피해자가 되게 고마워할 줄 아는 거. 외부인인 우리가 보기엔 전주환도, 애니 윌크스도 허구의 세상 속에 혼자 사는 거라고 할 수도 있으나, 동시에, 제 말은, 이자들이 허구라는 것의 존재를 아예 인정을 안 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허구를 아주 단순한 어떤 신체물리적 현실의 동작으로 현실화할 수 있다고 이자들은 생각해요. 그… 약간… 뭐랄까. 어떤 선을 점프하면 그게 짜잔, 하고 허구가 현실이 된다고 이자들은 생각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애니는 극 중의 극. 즉. 이 이야기 안의 이야기. 미저리라는 스티븐 킹 님의 책 안에서 폴 쉘던이라는 작가 캐릭터가 쓴 미저리 시리즈의 주인공인 미저리. 복잡하죠? 그 미저리 캐릭터가 죽자 어마어마하게 분노합니다.

물론. 분노할 수 있어요. 지금 우리의 현실 세계라는 곳에서도 많은 이들이 인기 캐릭터가 사망하면 분노하고 슬퍼합니다. 그런데 차이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구가 허구라는 걸 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허구로서 내 현실 속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음을 알아요. 그래서 이미 끝난 TV 시리즈 같은 것의 팬덤이 계속 존재하잖아요. 또한 끝날 것 같은데 계속 안 끝나는 프랜차이즈들도 있죠. 얼마든지 새로운 이야기들이 나의 현실에 스며들 수 있으며, 과거에 소비했던 이야기도 내 안에 계속 살아 있음을 일반적인 사람들은 안다고요.

그런데 애니 윌크스는 미저리의 죽음에 진짜로 분노하고. 그런데 그 와중에 또 폴 쉘던이 미저리를 살릴 수 있다는 걸 알아요. 그것을 누가 현실화해줘야 해요. 자기가 그냥 미저리를 추억하며 살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 허구는 너무나 허구여야 하고, 현실은 너무나 현실이어야만 하는 그런 세계관 속에서 애니가 살고 있어서. 자기 상상으로는 성에 안 차니까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현실로 만들어 내라고 폴에게 강요합니다. 그러니까 쓰라고 하는 겁니다. 한 책에서 죽었던 미저리를 다음 책에서 살려내라고.

그러니까 이게… 여러분… 보이십니까? 미저리가 상당히 메타한 책입니다. 픽션 작가가 쓴, 픽션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허구성이 너무나 이 극 중 전반에 걸쳐져 있고, 폴 쉘던이 과연 스티븐 킹의 화신이 아닐 수 있는가 싶을 정도로 자전적인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스티븐 킹 님의 On Writing보다 미저리에 훨씬 작가관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생각을 합니다.

스티븐 킹은 미저리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의 주인공은 폴 쉘던이고 극 중에서 그는 미저리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시리즈를 썼다. 애니 윌크스는 미저리가 진짜 존재하는 듯 행동하지만, 그 캐릭터를 죽인 폴 쉘던을 신처럼 모시는 동시에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문한다. 그런데 또 그 와중에, 애니가 알아요. 폴더러 글을 억지로 쓰게 할 수 없다는 걸.

허구가 뭐고, 현실이 뭔지에 대해 너무너무 재밌게 풀어낸 이야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5: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00:35:28-00:44:09

[Sound effect]

우리가 애니 윌크스가 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전주환도 되면 안 되죠. 이자들처럼 안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제 생각에는 이겁니다. “절대 정답”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책이든, 영화든, 유튜브 영상이든, 현실 세계에서든, 정답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정답은 멀어진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정답은 하나가 아닙니다. 절대 하나일 수가 없습니다. 만약 어느 한순간 하나였다 하더라도, 다음 순간에 변한 변수들 때문에 그 정답은 정답이 아니게 될 겁니다. 따라서 앞으로 직진하는 시간을 사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정답이 하나가 아닌 거와 다름없게 될 겁니다. 1초 전에 정답을 알았으면 뭐 합니까? 어차피 다음 순간에 쓸모가 없게 될 텐데.

그러니 정답을 준다고 하는 매체들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걔네도 모릅니다. 알 수가 없어요. 뭐, 주식을 잘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유튜브 채널들. 천국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겠다는 사이비 교주들. 이런 건 티 나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안 믿죠?

그런데 더 교묘한 것들도 있다고요. 아주 야금야금 우리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들. 조심하지 않으면 홀리는데 홀린 줄도 모르고 저승길로 가게끔 만드는 것들.

제 의견으로는 픽션은 이런 위험성이 좀 덜해요. 픽션이라고 아예 레이블된 것들은.

그런데 일부 논픽션물들이 위험합니다. 논픽션, 현실에 닿아 있다는 탈을 쓰고 자기들의 생각을 관철하려 합니다. 앞서 역사, 과학, 저널리즘 등의 예를 들었는데, 자신들이 논픽션이라고 레이블됐더라도 픽션, 뭐, 좀 더 과학적인 단어를 쓰자면, 이론임을 인지하고 있으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아닌 경우가 있어요.

물론 아무도 논픽션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창작자도 소비자도 그것이 픽션의 일종임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논픽션 레이블이 달려 있어도, 논픽션도 결국 어느 인간이 쓴 거고, 그 인간은 자신의 스토리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인간이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절대 객관적이기만 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믿지 마십시오.

하여간에 이런 점들 때문에 저는 더 많은 사람들이 픽션을 더 깊게 소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머리 아프게 생각하라는 게 아니고요, 재미를 느끼면서도 충분히, 이 세상에 아주 다양한 픽션이 있다는 걸 지각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든. 저널리스트든. 사이비 교주든. 나를 가장 아껴줄 것 같은 가족이나 친구든. 그들의 의도가 어떻든, 아무리 좋든 나쁘든,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들 역시 나처럼 자신들의 픽션 속에 살고 있다는 걸 알면 좋습니다. 자신들이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이 있으나, 그게 ‘진짜 현실’은 아니에요. ‘진짜’라는 게 대체 뭡니까? 이걸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자는 위대한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과학과 철학의 대통합, 현실과 허구의 대통합을 이루지 않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그런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아무튼,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스토리가 주변인들의 스토리와 맞물려 있기에 아주 미친 범죄자처럼 괴리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픽션이기에 완전히 신뢰할 수 없으며, 신뢰할 필요도 없음을 알면 저는 좋다고 봅니다.

아까 말한 그 집단 강간 살해당한 소녀들. 인도의 소녀들. 그 소녀들이 속한 카스트가 달리트 계급이라고 하는데, 그 계급에서 최근에 천주교 추기경이 나왔대요. 그러니까 만약에 이 추기경 되신 분이 ‘달리트는 천해, 달리트는 죽어도 싸’ 이런 스토리를 정말 믿었으면 이분이 이렇게 되실 수 없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천주교가 카스트 제도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고요, 종교도, 그러니까, 그 종교의 스토리가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면 정말 위험해지는 겁니다. 그거 정말,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있어요. 미국은 천주교는 아니고 개신교 중에 주마다 공교육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느냐에 대한 법이 굉장히 다른데, 어떤 주의 어떤 학교 교육 과정을 거친 사람들은, 예를 들면, 다윈의 진화론을 안 믿을 뿐만 아니라, 그거에 대해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듣지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경우가 있어요. 제가 이 경우를 실제로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 사람이 미국 중부의 어떤 주들 중에 하나에서 평생을 살았다고 하는데, 그러고서 그, 그 주의 주립 대학교를 갔어요. 그런데 주립 대학교를 졸업한 그 사람이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아예 모르는, 그러니까 믿지 않는 정도, 뭐, 동의지 않는다, 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제가 실제로 살면서 봤습니다.

이거는 그러니까 얼마나 현실이라는 것이, 이 사람이 사는 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 사람이 아닌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이나, 뭐 세계인들의 현실과 얼마나 괴리가 큰지를 정말 잘 알 수 있는 계기였고, 충격이죠.

아무튼. 정답에 대한 집착을 줄여야 합니다. 그러면은 혹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진화론을 몰랐어. 그러더라도. 뭐 일단,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진화론을 고려해볼 순 있겠죠?

내지는 뭐, 반대의 경우도 그렇겠죠. 진화론, 뭐, 진화’론’이니까. 아니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아무도 몰라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어떤 증거가 어떻게 나올지. 그런데 문제는 이거라는 겁니다. 이 많은 다양한 스토리들의 존재 자체를 아예 모르게 되면 안 되니까.

그리고 내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것을 절대 현실로 만들기 위해, 뭐, 자기가 좋아한다고 주장한 사람을 살해를 하는 것이나, 아니면 아무 죄 없는 소녀들을 집단 강간하는 것이나, 아니면 뭐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 박해하는 것이나. 그런 일을 벌이면 안 되니까, 이야기의 존재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6: 클락테크: 마법이 사라진 세계

00:44:09-00:50:44

[Music: End of Our Story – Cameron Mackay]

에피소드를 끝내기 전에 잠깐 첨언하자면. 클락테크. 에피소드 하나를 이 주제에 쓸 것 같진 않아서 잠시 다뤄보겠습니다.

아서 C 클락이라는 과학 소설 작가가 있습니다. 이분이 클락의 세 가지 법칙이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그중 세 번째 것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이겁니다. “Any sufficiently advanced technology is indistinguishable from magic.”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기술이 진보하면 진보할수록, 이런 개념은 소설 속에만 있는 게 아니게 될 겁니다. 실제로 지금 우리가 가진 스마트폰으로 교통량을 맞히는 건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신의 능력 같겠죠. 그러면 백 년 후는 어떨까요? 이백 년 후는?

이런 세상의 거대한 흐름이 저는 흥미롭습니다. 신난다는 측면에서 흥미로운 것도 있고, 무섭다는 측면에서 흥미롭기도 해요.

왜 신나냐면, 예를 들어, 생각만으로 집안의 온 물건들을 조종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해리 포터에서 마법이라는 레이블로 등장하는 물건 움직이기를 지팡이 없이 그냥 내 생각으로 실행할 수 있다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커튼을 생각으로 열 수 있다면? 제가 이렇게 타이핑하고 녹음하는 와중에, 부엌에 있는 컵한테 ‘물 좀 떠 와라’라고 시킬 수 있다면? 너무 신기할 것 같죠? 지금 마법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기술의 영역으로 들어온다면.

[Music ends.]

그런데 이게 공포스럽기도 한 이유는, 그렇게 되면 정답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더 두드러지게 될까봐서입니다. 지금 우리는 해리 포터의 마법을 픽션으로 알고 있잖아요. 그냥 하나의 이야기라고. 그런데 기술이 더 발달해서 그 모든 마법이 설명 가능한 것이 된다면, 그리고 그와 함께 세상 전반이 점점 더 절대 현실의, 허구가 아닌 논픽션,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면, 그 절대 현실에 속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이 다 무시당하는 게 아닌가.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합니다. 지금도 픽션의 역할의 상당 부분을 논픽션이라는 레이블을 가진 매체들이 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유튜브가 그렇습니다. 유튜브에는 ‘진짜 인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채널주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회사가 아닌, 개인들이. 이 개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이 진짜인 줄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게 아니에요. 그보다는 이 채널주의 팬들은 이 채널주를 믿고, 태클을 걸면 태클러들과 싸우고, 무엇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두고 싸운다는 뜻입니다.

‘진짜 현실’을 두고 싸워요. 이게 정말 이상한 것이… 돈 많은 유튜버가 좀 힘들다는 얘기를 하면, 그걸 그 사람의 현실, 그 사람의 이야기라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너는 돈이 많으니 힘들 리가 없다’는 식으로 싸우는 놈들이 꼭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유튜버나 인스타그래머들의 아름다운 삶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질투하거나 동경해서 자살까지 이르기도 하고. 이것들이 이야기임을 사람들이 인지를 못 하는 것 같아요. 편집된 이야기. 필터된 이야기.

진짜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서 허구성이 덜해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진짜 사람이 등장하니까 허구의 개념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더 생기는 것 같습니다.

클락테크가 점점 더 많아진다면. 마법처럼 보였던 게 다 기술이 된다면. 이 경우 역시 허구의 개념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아닌가? 내 현실이 유일한 현실인데 남들이 그걸 안 믿어. 그러면 죽여서라도 믿게 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게 저한테 공포입니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는 원래가 모호한데, 점점 더 세상의 많은 것들이 논픽션의 탈을 쓰되, 그 논픽션도 상당수 이론이기에 픽션적 측면, 즉 해석, 의견, 모호함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음은 쏙 빼놓고, 마치 논픽션이 진리인 것처럼 팔리니. 마법이 사라진 세계의 그 끝에는 자신의 현실을 관철시키려는 범죄자들이 판을 치는 게 아닌가.


7: 마무리

00:50:44-00:56:16

[Music: So This Is It – Ty Simon]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픽션을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현실의 삶을 말하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쓰세요. 지금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있든, 그것이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닙니다. 특히나, 남의 픽션을 해치지 않는 한, 여러분이 그 어떤 픽션을 써도, 그자는 자기 할 일이나 할 것이지, 여러분을 막을 권리는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믿는 것도 픽션입니다. 실제로 많은 나라에서, 저 같은 사람은 팟캐스트를 할 권리도 없고, 말을 자유롭게 할 권리도 없고, 만약 그래도 한다면 어디 가서 사살될 수도 있습니다. 뭐, 한두 번 있는 일 아니죠? 그런 데에 살고 있는 자들 중 일부는 그 스토리가 좋다고 믿지 않습니까? 미성년자를 집단 강간 살해하고도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그래도 된다면서요. 그게 픽션이 아니면 대체 뭡니까?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제 얘기를 듣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그런 극한의 상황에는 살고 계시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싫은 상황에 있는 여러분에게 누가 ‘지금 이게 네 최선이야’ 하면, 어… 도망치세요. 그자가 없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또한 교묘하게 긍정적인 척하면서 여러분이 뭘 열심히 하려고만 하면 여러분이 마치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배은망덕한 인간인 것처럼 세뇌시키는 경우에도, 도망치세요.

그리고 꼭 고독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가져 보시길 바랍니다. 저도 없고, 다른 무슨 말을 하는 신문 기자들, 정치인들, 각종 작가들, 예술가들, 가수들, 친구들, 가족들, 연인들, 그들이 전부 다 없는, 아무 인간도 없고 나만 있는 고요의 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에서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은지, 그런 적막의 순간에서 나오는 답이 그 시공간에서는 여러분에게 가장 정답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좀 메타 해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소설 작가가 소설 작가에 대해 쓴 소설 속의 소설 주인공들이 작중 소설의 주인공을 두고 별별 일을 다 저지르는 미저리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고. 인간에게 있어 무엇이 진짜인지를 알 수 없음에 대해 얘기를 했는데…

참말로 거대한 주제입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맹신이 지옥입니다. 맹신지옥이에요. 맹신하지 마십시오. 저는 개인적 절대주의자지만, 그 또한 픽션임을 압니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Music ends.]


모든 링크

이 에피소드를 하는 이유인 전주환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의 범죄자): https://namu.wiki/w/%EC%A0%84%EC%A3%BC%ED%99%98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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