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1] 관음조건: 영화는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감시

[Ep. 31] 관음조건: 영화는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감시 square

1: 오프닝

00:00:00-00:06:20

[Music: Eternity Clock – Shahead Mostafafar]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지난주에 좀 메타한 에피소드를 했었습니다. 이야기 안에 이야기가 있어서 이야기 쓴 자와 이야기 속 인물이 잘 분간이 안 되기도 하고, 그 인물은 또 그 인물대로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어찌 보면 그 이야기 속 인물 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되는, 스티븐 킹 님의 미저리에 대해서 얘기했었습니다. 또한, 현실이라고 불리는 것이 얼마나 우리 제각각의 이야기일 뿐인지에 대해서도 얘기했었습니다.

메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재미가 있어서, 오늘도 좀 메타한 주제를 가져왔습니다. 제가 직접 참여하는 분야는 아니며, 바로 그 직접 참여하지는 않되 밖에서 관찰하기만 하는 양상이 오늘의 주제와 연결이 됩니다.

바로 영화 관람에서 나타나는 관음증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관음이라는 단어를 좀 폭넓게 쓰려고 합니다. 누군가를 몰래 지켜봄으로써 성적 흥분을 느끼는 경우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만족감이든 느끼게 되는 경우를 다 포함해서요. 만족감이라는 것 자체가 성적인지, 심리적인지, 신체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튼, 영화 관람에서 나타나는 관음증이 흥미로운 점은, 이 ‘지켜봄’이라는 것이 영화 내의 서사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메타하다, 이 말입니다. 영화 만드는 주인공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 수도 있고, 더 넓게 보자면, 지켜봄에 대한 서사를 다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호러 장르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켜봄 당하는 인물, 즉 관음의 대상이 누가 자기를 지켜보는지 모를 때, 혹은 알더라도 지켜봄 당하고 싶지 않을 때, 이야기는 호러가 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발생합니다. 영화란 허락된 관음이지 않습니까? 관객은 법적,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이 영화를 관람합니다. 관람을 관음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서사의 내용이 관음에 대한 것일 때는 어떨까요? 허락되지 않은 관음에 대한 허락된 관음이 됩니다. 흥미로운 아이러니입니다, 관객의 이 변태적인 호기심이란 것이.

오늘 주로 언급될 영화로는 Peeping Tom, 한국어 제목으로는 “저주의 카메라”가 있습니다. 또한, 쏘우 1을 다룰 겁니다. 스포일러 많습니다. 그리고 스포일러 없이 언급될 영화들로는 가타카, 마이너리티 리포트,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패러노멀 액티비티가 있습니다. 영화가 관음의 서사에 가장 적합한 매체라고 생각하다 보니, 예시가 다 영화입니다.

그럼 오늘의 수다, 시작할게요.

[Music ends.]


2. 관음과 감시의 과거와 미래

00:06:20-00:17:07

보지 말라는데 보는 행위는 영화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또한, 그러한 행위를 벌해야 한다는 개념도 오래도록 있어 왔던 것 같습니다. 이 두 가지가 거의 동시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주 오래전, 인간이 지금의 형태를 띠기 전에는, ‘보지 말라는데 본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강아지가 옷 안 입고 다닌다고 부끄러워하지 않듯이, 인간 역시 옷을 입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을 수도 있고, 만약 부끄러워했다고 하더라도, 동물의 가죽을 구할 수 없거나 옷감을 구할 수 없을 때는 벗고 다니던 때가 많았겠죠? 그러면 ‘보지 말라는데 봤다’고 누군가를 나무라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게다가 집을 지음으로써 바깥과 안을 구분하고, 그 안 내에서도 나의 공간과 타인의 공간을 분리함으로써 ‘타인이 봐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개념이 성립되기까지에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자원이 부족하니까요. 자원이 부족할 때는 남더러 보지 말라고 아무리 해봤자. 벽도 없고 옷도 없는데. 그 상대방도 보고 싶어서 보는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래서 “보지 말라고 했는데 쟤가 계속 봤다”라고 불만을 가지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그것의 처벌이 행해지는 경우도 별로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제인지 우리가 확실히 알 길은 없지만, 어느 시점부터 인류의 부가 싸이기 시작했을 겁니다. 주변 자연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가 더 수월해지고, 생존 그 너머를 상상하기 시작하고, ‘나’라는 것이 상대와 분리된 존재라는 점을 의식적으로 자각하기 시작하던 때. ‘내 것’이라는 개념이 생겨서 ‘나를 보지 말라고 했는데 봤다’는 개념도 생길 수 있었던 때. 소유 의식. 재산 의식. 나와 타인의 소유물의 분리. 내 몸을 저쪽이 마음대로 한다는 의식. 그런 개념들이 있어야 ‘관음’이라는 게 성립됩니다.

보지 말라는 것을 보는 것이 죄라는 본격적인 예시로는 레이디 고다이바 이야기가 있습니다. 레이디 고다이바는 11세기에 있었던 실존 인물이라고 하는데, 이분에 대한 전설입니다. 고다이바 부인이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달라고 그 마을의 영주에게 부탁을 하자, 영주가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면 당신 진심을 믿어주겠다”는 전혀 앞뒤도 없고 밑도 끝도 없는 요구를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실제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말을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돕니다. 이때 모든 사람들이 창문을 닫고 커튼으로 창을 가려서 그녀에게 프라이버시를 주지만, 톰이라는 사람만이 빼꼼히 창밖을 내다봤다고 해요. 그래서 아까 언급했던 영화의 영어 제목에 사용된 Peeping Tom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훔쳐보는 톰’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관음은 호기심하고 떼어놓을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관음이란 몰래 지켜보는 것을 뜻하니까, 보는 그 대상에 대한 호기심뿐만 아니라, 내가 들켰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 상황에 나는 어떻게 대처할까, 이런 호기심이 있을 것 같습니다. 즉, 관음이란 ‘예측할 수 없음’이라는 요소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관음이 관음인 이상, 그 예측할 수 없는 요소를 최대한 뒤로 미루고, 관음하는 현재의 순간을 길게 끄는 게 목적이겠죠. 들키기 ‘위해서’ 관음을 한다기보다는, 들킬 수 있는 ‘가능성’만 인지한 상태에서 안 들키는 게 목적인 겁니다.

그런데 관음이 꼭 이런 쪽으로 풀리는 건 아닙니다. ‘예측할 수 없음’의 요소를 아예 제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바로, 관음이 감시로 풀리는 경우입니다.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파놉티콘 감옥에서처럼 소수의 감시자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수용자를 지켜볼 수 있는 구조물도 관음의 일종 아니겠습니까? 나는 지켜봄 당하기 싫은데, 남은 지켜보고 싶은 거. 남은 전부 다 까발리고, 나만 프라이버시를 유지할 수 있는 거.

현대 기술을 사용한 다양한 감시도 관음의 일종이라 봅니다. 여러분 가끔… 아니 자주… 여러분 스마트폰이 여러분이 하는 말을 다 듣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냥 친구랑 나눈 대화 내용에 대한 유튜브 영상이 갑자기 추천에 뜬다든지, 하는 형태로요. 아이폰 같은 경우, 폰을 끄더라도 위치 추적을 할 수 있다면서요? 아무리 폰을 꺼도 우리가 완전한 프라이버시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어쩌면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의 프라이버시는 불가능할지도 몰라요.

빅테크가 행하는 감시뿐만 아니라, 각종 소셜 미디어 유저들의 관음도 있습니다. 인간은 왜 그렇게 남 사는 이야기가 궁금한 건지. 남의 연애사가 방송에 엄청나게 나오죠? 아예 프로그램의 형태로.

그런데 암만 이상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리얼리티 쇼적인 감시는 허락된 감시, 허락된 관음입니다. 2022년을 사는 현대인들이 관음 욕구를 법적으로나 도덕적인 문제 없이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물론 진짜 관음증이 병적인 사람들은 이런 걸로 해소가 안 되겠지만, 가벼운 호기심만 앓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는 전혀 법적, 도덕적 문제가 없는 가벼운 관음을 행할 기회가 엄청나게 많단 말이죠.

그런데 이런 기회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빅테크의 불법적, 비도덕적 관음도 많아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뭐랄까, 우리에게 합법적, 도덕적 관음을 허락하는 대가로 이들이 불법적, 비도덕적 관음을 저지른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모든 종류의 관음을 가능케 하는 기술이 큰 맥락에서 하나라는 점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요?

앞으로, 미래에는, 더 많은 기술이 우리 삶에 더 밀접하게 들어올 텐데. 스마트 워치가 우리 심장 박동수까지 이러저러한 빅테크의 데이터베이스에 집어넣어 주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 그 시대에는, 나의 심장 박동수에 따라 나에게 추천 영상을 띄워줄 건지? 그것은 나쁜지, 좋은지? 이에 대한 거대 절대 정답이 없더라도, 개개인이 선택을 할 수 있긴 할 건지?

예를 들어 지금 스마트폰도, 명목상으로는 갖고 싶은 사람은 갖고 안 갖고 싶은 사람은 안 가지면 되지만, 사실상으로는 스마트폰이 없으면 말 그대로 멍청해지는 거 아닙니까? 너무 뒤처지게 되잖아요? 사실상 일반 회사에 다니면서 스마트폰 없이 산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예 취직이 안 되겠죠. 그러면 미래에는 더 많은 감시를 대가로 감수해야지만 조금이라도 내 생존에 대한 희망을 품어볼 수 있게 될까요? 그리고 그 와중에, 감시당한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타인의 삶을 똑같이 관음하게 될까요? 허락된 관음의 선에서.


3: 미래적 관음감시

00:17:07-00:22:34

[Sound effect]

미래적 관음 감시가 공포로서 나타나는 영화의 예시로는 가타카와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있습니다.

가타카는, 하, 한아임이 좋아하는 영화 10위에 드는 것 같습니다. 정말 좋아해서, 여러 번 봤습니다. 열 번은 넘게 본 것 같아요.

가타카의 내용은 이겁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난 인간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세계에서 주인공은 ‘love child’ 즉, 부모의 무계획적 섹스를 통해서 태어난 인간으로 나옵니다. 무계획적일 만큼 부모가 순간의 끌림을 느껴서 섹스를 해서 태어난, 말 그대로 사랑의 아이, 사랑의 결과물이라는 뜻인데, 이 단어가 좋고 나쁘다로 가를 만큼 단순하지는 않게, 여러 뉘앙스를 담고 있는 단어로 쓰입니다. 무시하는 이도 있고, 경멸하는 이도 있으나, 아름답다고 여기는 이도 있고, 달콤씁쓸하다고 여기는 이도 있고요. 상황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아무튼 사랑의 아이인 주인공은 큰 키, 많은 근육량, 뛰어난 두뇌, 좋은 시력, 이런 것이 미리 선택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났기에, 사회의 하층민 취급을 받습니다. 모든 이들이 다른 이들의 유전자 배경을 알고, 심지어 아는 것이 권리인, 그러한 감시가 권리인 시대입니다. 그리고 유전자에 따라 선망받는 일을 하거나 무시당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이 주인공의 유전자가 별로라는 걸 세상이 다 아니까, 주인공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시켜주지 않습니다. 그걸 리스크라고 생각해요. 유전자 조작이 전혀 되지 않은 인간은 멍청하고 체력이 약할 뿐만 아니라, 정신도 나약하다고.

그러니, 가타카가 공포물이라고 나온 영화가 아니고, 영화 분위기 역시 아주 어둡거나 한 건 아니지만, 무서운 요소가 꽤 있습니다. 저는 만약 유전자 감시가 이루어지는 미래가 온다면, 이게 현실적인 그림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마구 겁박하고 고문하는 건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배당하는 쪽을 지배층이 그렇게 다루면 지배란 걸 오래 하지 못합니다. 아주 뽀얗게, 약간은 느리게, 당연한 것처럼, 스며들듯, 유전자 차별이 이루어지게 될 거라고 저는 생각하고, 가타카가 그런 미래를 그립니다.

나를 전부 까발리는 것이 나 아닌 누군가들의 권리가 되는 시대. 그들의 감시는 사회 보호의 명목상 행해지며, 나에게 진정한 프라이버시는 없는 시대. 관음이 권리인 시대라 관음 당할 것이 분명한 나 자신을 가짜로라도 포장하는 것이 최선이 되는 시대.

그리고… 마이너리티 리포트. 관음 감시의 끝판왕. 어떤 사람의 현재를 보고 미래에 그 사람이 범죄자가 될지 안 될지를 점칠 수 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기본 설정입니다. 지금 현재 그 사람이 자신의 범죄성을 점침 당하고 싶든 말든, 그 사람이 전혀 범죄를 저지를 생각이 있든 없든, 점치는 자들이 “넌 범죄자야!” 하면 그냥 범죄자 취급을 당한다는 거. 무섭죠.

그리고 오프닝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전혀 공포물 같지 않은 관음물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트루먼 쇼입니다. 트루먼 쇼는 진짜, 잘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진짜 변태 같은 설정입니다. 트루먼이 태어나서 수십 년 살 때까지, 자기가 쇼 안에 있는 캐릭터라는 걸 몰라요. 끔찍하죠. 공포물이 아닌데 공포스러운 서사가 이런 식으로 꽤 있습니다.


4: 오다 주운 공포

00:22:34-00:31:05

[Music: Found – The David Roy Collective]

그래도 뭐, 일단은, 2022년 현재, 허락된 관음이 있다. 영화 관람. 그야말로 생각할수록 변태 같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어두운 방 안에 들어가 서로 아무 얘기도 안 하고 스크린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지금 이 시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의 서사를 지켜보는 행위.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빼놓을 수 없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영화관에 가지 않고 집에서 폰으로 유튜브를 보더라도, 행위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모든 영화가 우리의 관음 감시를 돕지만, 특히나 흥미로운 경우는 관음 감시가 아예 서사에 포함된 경우라고 오프닝에서 언급했었습니다. 이럴 때면, 제4의 벽을 허물지 않더라도 괜히 뜨끔하단 말이죠.

제4의 벽을 허문다고 함은, 서사 내에 있는 인물이 서사 밖에 있는 우리의 존재를 자각하는 듯한 서사가 등장할 때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서구식 서사에서는 서사 내부와 서사 외부가 극명하게 구분 지어지지 않습니까? 작품 속 인물들은 작품 밖 세계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며, 따라서 관객은 안전합니다. 관객은 자신이 작품이라는 걸 지켜보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도 돼요. 서구식 서사는 많은 부분, 바로 그러라고 구성된 구조물입니다. 외부 세계를 잊고, 내부 세계로 빠져들라고.

그런데 가끔 서사 속 인물이 스크린을 쳐다본다든지, 심지어 관객에게 말을 할 때가 있는데, 이럴 때면 좀 뜨끔하죠. 갑자기 찔리지 않나요? 저는 그렇던데. 이게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얘네를 쳐다보고 있었어, 얘네 모르게. 물론 나를 쳐다보는 얘는 지금도 내가 얘를 쳐다본다는 걸 모르지. 왜냐하면, 내가 얘를 보기 전에 완성된 촬영물이니까. 그렇지만, 그래도.

그런데 관음 서사는 그 자체로서, 제4의 벽을 허물지 않더라도, 뜨끔하는 면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리하여, 영화의 이러한 관음적 측면이 관음적 서사를 통해 어떻게 공포로 풀리느냐. 먼저 가볍게, 스포일러가 없는,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와 패러노멀 액티비티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 두 영화는 파운드 푸티지 장르의 예시입니다. 파운드 푸티지. 말 그대로 푸티지를 찾았다. 오다 주웠다, 이 얘기입니다. 오다 주운 공포, 파운드 푸티지.

이 요소, “의도치 않게 오다 주운 것이지 사실 이 내용은 우리가 봐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왜 보면 안 되느냐 하면, “어마어마하게 무섭고 끔찍한 공포가 담겨 있기 때문에”라는 컨셉 덕분에 파운드 푸티지 장르는 다른 영화 장르에는 없는 메타적 측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관음의 죄와 벌에 대한 개념이 저절로 담겨 있게 됩니다.

메타적 측면이라 함은, 관객이 영화를 단지 서사의 여러 수단 중 하나로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고다이바 부인을 엿보듯이, 봐서는 안 될 것을 본다는 선택을 함으로써 영화의 관음적 특성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고요. 관음의 죄와 벌의 개념이 담겨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 봐서는 안 될 걸 목격하려는 것이 죄이고, 우리가 시달리게 될 악몽이 벌임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장르는 이렇지 않거든요. 예를 들어, 로맨스 영화에서 선남선녀 주인공들을 침 흘리면서 지켜봤더라도, 거기에 죄와 벌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을뿐더러, “어머 세상에, 나는 지금 집에서 추레하게 추리닝이나 입고 감자칩이나 쩝쩝거리면서 얘네 잘생기고 예쁜 걸 선망하고 있네,”라고 의식적으로 깨닫지 않는 한, 지금 내가 하는 행위가 관음의 일종이라는 걸 자각하지도 못합니다.

또한 여러 공포 장르의 갈래들에서도 관음을 늘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귀신이 나오더라도 극 중 캐릭터들을 놀래키고, 살점이 갈기갈기 찢기더라도 극 중 캐릭터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반면 파운드 푸티지에서는 귀신이 나오거나 누가 살점이 갈기갈기 찢겨서 내가 충격이나 공포를 느낀다면, 보지 말라는 그 푸티지를 굳이 주워서 본 관객인 내가 자초한 죄로 인한 벌이 되는 것이죠. 정말 특이한 장르입니다. 꼭 제4의 벽을 대놓고 허물지 않더라도, ‘주운 영상’이라는 특징 때문에, 마치 관객이 그것을 주운 당사자가 된 기분이 들게 할 수 있습니다.

[Music ends.]


5: 피핑 톰

00:31:05-00:43:21

이제부터 본격 스포일러 구간입니다. 피핑 톰 얘기를 할게요. 1960년 영화입니다. 공포물인 와중에 상당히 아름답습니다. 제가 살아본 적 없는 이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아가 느껴질 정도로 컬러 팔레트가 알록달록하고, 드레스와 정장이 너무 예쁩니다. 음악도 운치 있고.

아무튼. 이 이야기 속 세상에 사람들이 방을 빌려 사는 공동 숙소? 내지는 하숙집 같은 데가 있는데, 그곳에 우리의 관음증 주인공이 삽니다. 이 경우에는 주인공이 정말로다가 병으로서의 관음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요. 젊은 남자인데, 허우대 멀쩡하게 생겨가지고는 남을 훔쳐보며, 엿보며 삽니다. 그런데 이 엿보는 방식이 약간 편리한 것이, 그의 직업이 촬영 기사라는 점입니다. 영화 촬영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아르바이트식으로 섹시한 사진 같은 걸 찍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심지어 그는 자신이 사는 공동 숙소의 집주인입니다. 건물주예요. 이래서 이게… 변태가 재력이 있으면 무섭습니다. 변태가 돈이 없으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범위가 협소해지는데, 이 캐릭터는 살 만해가지고, 자기 집에다가 아예 필름 현상할 수 있는 기구며 홈 씨어터 같은 것을 설치해 놨어요.

그의 범죄 수법이 뭐냐면, 여자들을 촬영해준다고 불러와서는 카메라의 삼각대 끝에 달린 뾰족한 송곳 같은 것으로 찔러 죽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공포에 질린 피해자들의 얼굴을 촬영해요.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영화 내에서 그의 관음증에 대한 이유가 분명히 나온다는 겁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합니다. 애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 반응을 기록하려고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아버지가 무슨 심리학자였는데, 완전 싸이코패스였나 봐요. 자기 자식을 완전히 실험쥐처럼 썼던 모양이더라고요.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는 것이, 이 영화는 옛날 영화라 그런지 대놓고 잔인하지 않습니다. 피도 안 나오고, 뭐, 시체라고 나오는 것도 멀리서 보여주고, 그럽니다. 그래서 막 엄청 잔인해서 무서운 영화라기보다는, 정말로 관음증에 집중된, 그런 영화입니다.

아무튼 아버지가 미친 싸이코패스 심리학자였던 이 주인공은 자기가 어렸을 때 찍혔던 영상들을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관객이 그것을 훔쳐볼 수 있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숙소에 주인공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가 살거든요. 참 친절하고 착한 여자입니다. 이 여자가 주인공이 너무 소극적이고 외로워 보이니까, 말도 걸고 하는데, 그 와중에 주인공의 집에 들어가, 그가 모아 둔 어릴 적 영상들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하여 관객은 이 여자의 입장이 되어 주인공을 지켜보게 되는데, 여자는 영상들을 보고 소름이 돋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하니까요, 부모가 애를 이렇게 강박적으로 촬영하는 게. 요즘 세상에 유튜브 한다, 인스타 한다며 애를 아무렇게나 찍어대고는 별별 것들을 다 올리는 부모를 생각하면, 더 소름 돋죠.

아무튼 이렇게, 주인공의 아버지가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찍은 영상을 보는 여자를 관객도, 주인공도 지켜보고, 관객은 또한 주인공도 지켜봅니다.

그 와중에 관음증에 대한 모티프가 드러나는 겁니다. 지켜보기만 하고 돕지 않는 것. 지켜보려고 일부러 어떤 상황에 빠뜨리는 것. 이것은 얼마나 학대인가. 얼마나 범죄인가.

이 주인공이 당한 학대가 어느 정도냐면, 아버지의 결혼을 시퀀스라고 부릅니다. 아버지가 주인공의 친엄마 사망 이후에 재혼을 했나 본데, “어머니가 죽고서 6주 후 다음 여자와 결혼했다”는 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He married her six weeks after the previous sequence.” 아까 그 시퀀스는 끝났고 이제 다음 시퀀스로 넘어갈 차례라서 넘어간 것처럼 말이죠. 주인공의 엄마가 그저 시퀀스 취급을 당했다고요. 주인공이 엄마를 하찮게 여겨서라기보다는, 아버지가 죽은 자기 부인을 하찮게 여겨서 그런 단어를 사용했고, 주인공은 어린 시절부터 그것에 세뇌된 것 같습니다. 주인공이 변태 살인을 저지르는 와중에도 사람이 뭔가… 불쌍해요. 불쌍하긴 합니다.

아무튼, 이런 주인공이 있는 와중에, 그가 일하는 영화 촬영장에서 영화라는 매체의 합의된 관음도 드러납니다. 지켜보는 이와 지켜봄 당하는 이 사이의 합의된 신경전. 감독과 배우 사이의 신경전이 잠시 나옵니다. 그런데 더 흥미롭게는, 그 둘의 신경전을 촬영장의 다른 사람들은 다 지켜봅니다. 그게 이 합의된 관음에서 그들의 역할이니까요. 감독까지도 촬영장에서의 관음에서는 대상이 됩니다.

또 하나 의미심장한 점은 아까 등장했던 친절한 여자, 우리의 주인공에게 관심을 갖는 여자에게 함께 사는 어머니가 있는데, 그 어머니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어머니가 유일하게 처음부터 주인공을 의심합니다. 어머니가 주인공에게 지켜봄 당할 수는 있지만, 어머니가 지켜보지는 않음으로써 관음의 죄와 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암시 같습니다. 즉, 약점일 것만 같은 시력의 상실이, 이 이야기 내에서는 무기처럼 작용하는 측면이 있는 겁니다.

주인공도 그걸 아는지, 이 어머니를 처음 만날 때부터 불안해합니다. 카메라가 자신에게는 그렇게나 병적으로 중요한데, 눈이 보이지 않고도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걸 견디지 못하는 듯합니다.

나중에 이 어머니와 폭력에 다다를 수도 있었던 씬도 나옵니다. 이 어머니가 이 녀석이 의심되는데 자꾸 딸내미랑 만나는 것 같으니까 찾아가거든요. 그런데 눈이 보이는 사람 같으면 주인공이 엄청나게 밝은 조명을 켰을 때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서 당황해야 하는데, 이 어머니에게는 이런 트릭이 안 통합니다. 어머니도 물론 주인공이 이상하게 갑자기 불을 세게 밝게 켜니까 당황하지만, 빛의 유무만 알 뿐, 원래도 눈이 보이지 않았으니, 주인공의 수법이 평소처럼 통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손으로 주인공 얼굴을 만져서 ‘보려’고 하기도 합니다. 눈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이때 주인공이 말합니다. 나를 찍고 있는 거냐고. 이 주인공은 그러니까… 본인도 병자가 맞고, 의심할 여지 없이 살인범이지만, 포토그래피 바깥의 삶을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완전히 학대당한 인간입니다.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병적이라서, 자기가 죽인 피해자의 시체를 조사하는 경찰을 또 몰래 촬영하고 있어요. 완전 미친놈인 거지, 주인공이. 카메라를 말 그대로 무기처럼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데, 무기인 동시에 방패였던 게 좀 특이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자신 사이에 카메라를 뒀던 겁니다. 그런데 그게 이 어머니 캐릭터에게 통하지 않자, 심히 당황한다.

마지막에 가서는 어… 네, 결국 죽어요, 이 주인공이. 사실 뭐, 해피 엔딩이 있을 리가 없죠, 사람을 그렇게 여럿 죽이는 연쇄살인마였으니까.

그러나 주인공이 그렇게 되기 전에 이 모녀가 둘이서 주인공을 좀 안타까워했는지라, 혹시 조금만 더 일찍 그 젊은 여자와 만났더라면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 주인공이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이 여자는 카메라와 주인공의 이상한 관계를 눈치채고 카메라를 좀 떨어뜨려 놓으려고도 하거든요. 게다가 이 여자와 마침내 첫키스… 라기에도 애매한, 첫뽀뽀를 할 때, 주인공이 하필 눈을 감는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이 여자를 더 일찍 만났더라면 카메라를 놓을 수도 있었을 것처럼.


6: 쏘우

00:43:21-00:52:50

[Music: Slash Pine – Shahar Haziza]

오늘의 메인 메뉴, 쏘우로 들어갑니다. 쏘우는 관음적 공포가 있는 동시에 슬래셔적 성향이 조금 있습니다.

완전히 슬래셔는 아니라고 봐요. 제가 찾아봤더니, 쏘우가 슬래셔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던데, 슬래셔가 맞다는 쪽은 “슬래시를 하지 않느냐”라고 합니다. 피가 낭자하지 않느냐, 라는 거죠. 반면 슬래셔가 아니라는 쪽은, “슬래시를 하는 자가 범인이 아니라서 슬래셔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쏘우는 범인이 사람들을 직접 조각내면서 다니는 영화가 아니거든요. 쏘우는 범인이 사람들을 어떤 협소한 공간에 가두고, 그들에게 빠져나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잔인한 방법을 일러줌으로써, 갇힌 자들이 스스로를 조각 내게 하는 수법이 등장하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슬래셔 장르에 대해서 다음 주에 얘기할 건데, 쏘우를 거기다 안 넣고 이번 주에 다루는 겁니다. 제 생각에 쏘우는 슬래셔라기보다는 스릴러 호러입니다. 쏘우에 미스터리 요소도 있으나 스릴러라고 부르는 이유는, 스릴러와 미스터리의 차이에 대해 제가 들은 가장 간단한 기준 때문입니다. 스릴러는 어떤 일이 생기는 걸 막는 이야기입니다. 반면 미스터리는 어떤 일이 생긴 후에 왜 생겼는지의 수수께끼를 푸는 이야기입니다.

쏘우에서 이 피해자들이 범인에 의해 왜 좁은 방에 감금되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미스터리이긴 하지만, 그 미스터리는 이 피해자들에 의해 풀리는 게 아닙니다. 이 피해자들이 서사상으로 주인공의 위치인데, 이들은 미스터리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데드라인까지 이 방을 살아서 나가느냐 못 나가느냐, 즉, 스릴러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왜”라는 미스터리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순전히 “어떻게” 나갈 것인가, 하는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봐서입니다. 대신, 외부인들, 형사들, 이 방에 없는 주인공이 아닌 다른 캐릭터들이 “왜”의 미스터리를 관객을 위해 풀려고 고군분투합니다.

심지어 근데, 풀지도 못해요, 가장 마지막까지.

[Music ends.]

이미 스릴러적 데드라인을 지킬 수 없는 게 밝혀지고 나서야, 즉, 다 망했다는 걸 알고 나서야 미스터리가 풀립니다. 그 측면에서도 장르적으로 호러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합니다. 정통 스릴러는 망하는 걸로 안 끝납니다. 성공하고 끝나죠. 호러처럼 망하는 걸로 끝나기에 수월한 장르가 없어요.

아무튼, 그래도, 스릴러와 미스터리 중에서는 스릴러에 가까운 것 같고, 슬래셔보다는 관음성 호러인 것 같다. 그 와중에 해피 엔딩이 아니라 모든 게 망하고서 끝난다. 즉, 정통 스릴러 팬들은 싫어할, 딱 그런 엔딩이다. 그래서 쏘우는 스릴러 호러다. 스릴러성 요소를 갖고 있는 호러.

이러한 쏘우. 호러 서사의 분명한 강점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피가 낭자하는 잔인한 서사들은 대개 주인공이 크게 동정을 사게끔 디자인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너무 동정을 사면 관객이 괴롭고, 관객이 화내니까요. 관음하러 온 관객을 호러는 상당히 배려합니다. 그래서 대개 타 장르보다 주인공의 잘못이 두드러집니다.

철없는 십 대 애들이 멋모르고 유령의 집에 들어갔다가 귀신한테 죽임당하는 얘기 있지 않습니까? “그러게 거길 왜 들어가”가 절로 나오죠.

또한 꽤 잦은 빈도로, 호러 영화에서 제일 먼저 죽는 사람은 소위 옷을 헤프게 입고 다니는 여자입니다. “그럴 만해서 죽었다”는 암묵적인 메시지가 있는 겁니다. 그 메시지가 옳든 그르든, 그게 통할 거라고 믿는 거죠,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쏘우에서도, 감금된 두 캐릭터들이 뭔가. 애들이 뭔가. 뭔가 하여간에 처음부터 이상해요. 한 명은 아주 요란스럽게 패닉을 하는데, 저 상황에 처한다면 나 역시 그럴 거라는 걸 알지만서도, 저렇게 시끄럽게 패닉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은 일단 첫째로 멈추게 하고 싶은 감정이 듭니다. 아기가 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현실 세계에서 내 애가 운다고 생각하면 얼른 달래줘야 한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영화 보러 온 관객이 애가 2시간 동안 우는 영화 보겠습니까? 안 보죠.

이게 관음의 죄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쏘우가 시작할 때부터 나오는 이 시끄럽게 패닉하는 캐릭터를 약간… 쟤 왜 저래. 시끄럽기 짝이 없구만. 이런 생각을 갖고 보게 됩니다.

반면, 감금당한 또 다른 캐릭터는 이상하게 차분합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차분해요. 그러면 관객은 또 이러죠. 쟤는 왜 이렇게 사람이 정이 없어. 이게 또 관음의 죄입니다. 우리가 돈 내서 얘네 이렇게 괴로운 걸 보러 왔으면서, 저 캐릭터들이 이렇네 저렇네를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생각하고 있다는 거.

그리고 관음의 죄에 대한 마지막 셋업이 나옵니다. 이 감금된 캐릭터들을 지켜보는 범인. 범인이 이 둘을 가둬놓고서는 모든 반응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관객인 우리는 또 이러죠. “와, 희대의 변태 새끼네.”

그런데 여기서 누가 변태입니까? 이거 돈 주고 보러 온 우리가 어떤 대단한 이상을 갖고 이 둘을 감금한 범인보다 더 변태 아닌가? 적어도 이 범인은, 서사의 끝에 가서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 교훈을 주려고 감금 행위를 했다는 점이 밝혀진단 말이죠. 그런데 겨우 고작 재밌으려고 이런 괴로운 모습들을 보면서, 그 와중에 또 우리 너무 괴롭지 말라고 배려하는 영화 제작자들의 안전장치를 누려야 하는 우리, 관객은 대체 얼마나 변태인가? 만약 관객이 이 범인을 혐오한다면, 그 혐오스러운 것을 지켜보는 관객은 스스로를 혐오해야 하지 않나? 이것이 쏘우에서 나타나는 관음의 벌의 시작입니다.


7: 쏘우 계속

00:52:50-01:02:14

[Sound effect]

자기혐오. 이런 감정과 호러 전반을 떼어놓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관음성 호러에서처럼 잘 드러나는 경우도 없습니다. 관객이 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잖아요, 서사 속 범인과.

쏘우는 일반 영상을 파운드 푸티지성 장면과 뒤섞음으로써 이를 더 강조합니다. CCTV 화면이 일반 영화 화면 사이사이에 등장해요.

게다가 캐릭터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정보를 줘서 우리에게 짐을 줍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 캐릭터들에게 동정을 느낀다면, 이들을 도우고 싶어야 한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한테 전달할 수 없는 정보를 쥐여주는 바람에 우리 양심의 가책은 배가 됩니다.

심지어 눈으로 관음하는 것뿐만 아니라, 귀로도 훔쳐 듣습니다. 범인을 돕는 어떤 캐릭터가 피해자 중 하나의 아이와 부인을 인질로 잡아 놓고, 그들이 공포에 질린 순간에 그들 심장 소리를 청진기로 듣는 장면까지 나오거든요. 눈으로도 훔쳐 보고, 귀로도 훔쳐 듣고.

거기다가 지켜보고 지켜봄 당하는 연결 고리들이 서사 내에서 많이 나옵니다. 가장 간단하게는, 거울에 비친 모습. 그것을 보는 인물. 그리고 그것을 보는 관객.

또한, 갇힌 캐릭터들이 잠깐 불을 다 껐을 때 우리도, 범인도 상황을 모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관음이 불가능해진 이 잠깐의 순간에 느끼는 엄청난 궁금증.

게다가 여기 갇힌 두 인물 중 하나는 사진가인데, 그자가 미행하며 사진을 찍어야 했던 타깃이 바로 함께 갇힌 인물입니다. 즉, 미행한 자와 미행당한 자가 한 방에 갇혀 있는 거란 말이죠.

이 외에도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켜보는 자와 지켜봄 당하는 자의 연결고리들이. 범죄자가 모델하우스처럼 범죄 씬을 만들어 놓은 현장에 형사들이 출동하고, 그 모델하우스를 관찰하는 장면. 거기서 어떤 남자를 만나는데, 당장 도와주지 않고 작전상 후퇴해서 지켜보는 장면. 이때 범죄자가 들이닥치자 형사들이 튀어나오긴 하지만, 이미 그 남자는 죽음의 게임의 희생양이 될 운명이 됐다는 점. 지켜봐도 이제 늦었다는 점. 그것이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는 점. 동료 형사가 죽게 된다는 점. 살아남은 쪽은 관음의 대가를 부상이라는 형태로 살아낸다는 점.

마지막으로, 이 모든 범행에 연루된 자가 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는 사람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영화는 ‘잡역부’라는 직업에서 무엇을 주목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줘요. 이 잡역부가 병원의 모든 일을 알지만, 아무도 이자를 보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말해준단 말입니다. 그는 눈에 띄지 않게 모두를 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잡역부가! 단지 범인을 도운 인물일 뿐만 아니라, 그 도움 행위 자체가 잡역부가 살아남기 위해 한 행위였음이 마지막에 가서 밝혀집니다. 즉, 잡역부도 범인을 돕고 싶어서 도운 게 아니라, 죽음의 게임에 타의적으로 던져졌던 겁니다.

그러니까 쏘우의 서사 구조 자체가 너나 얘나 다 나쁘다입니다. 한마디로, 너도 죄인이고 얘도 죄인이다.

범인이 마지막에, 모든 것이 밝혀질 때 말하기를, 자기가 곧 죽을 예정이라서 이런 일을 벌였다고 합니다. 자기는 곧 죽을 건데 너희는 삶을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교훈을 줘야 했다며. 완전히 개소리죠. 남이사 자기 인생을 낭비하든 시궁창에 던져버리든.

그러나 그 궤변조차 관음의 죄와 벌의 일부가 아니겠습니까? 이 범인은 자기가 아무리 남들을 단죄하려고 해도 죄인입니다. 법적으로도 그렇고, 도덕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벌을 서사 속에서 안 받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처음부터 관객이 관음의 죄와 벌의 일부였기에, 저는 이자도 벌을 받게 되는 거라고 봅니다. 쏘우를 보고 나서 “와 정말 저런 처단자가 있어야 해”라고 하는 관객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이 범인이 단죄하는 자들이 그냥 다 뭐… 바람을 좀 폈다든지. 마약을 좀 했다든지. 이런 자들이에요. 이 범인도 그러니까, 자기 그 대단한 교훈적 메시지를 구현하기 위해 전과 18범을 잡아다 혼쭐내 줬다든가, 무슨 뭐 전쟁에서 죄 없는 민간인을 수십 명 죽인 대가로 훈장을 받은 자의 사지를 찢어발겼다든가, 그런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닙니다. 그냥 자기 레벨보다 약한 애들을 잡아다가 괜히 멋있는 척한 거예요.

물론 영화는 너무 재밌지만, 저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이 범인이 늘어놓는 이 마지막 궤변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거라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깔봤습니다. 자기 인생이 그렇게 소중하다는 자가 죽기 전 얼마 안 남은 시간 동안 이러고 다닌다고? 이러고 다니는 자가 있다는 걸 못 믿겠는 게 아니라, 이러고 다니면서 자기가 대단한 일 하는 줄 아는 게 웃기다는 겁니다.

전형적인 그… 왜… 범죄자도… 범죄자 처단하는 범죄자 유형이 있잖아요. 덱스터라든지. 그런 캐릭터들은 멋있잖아요. 전 멋있다고 보거든요? 범죄자를 처단할 자는 다른 범죄자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해서요. 그런 흉악한 자들을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처단하나, 해서.

그런데 쏘우의 이 범인은… 양민이야. 천민도 아니고 양반도 아니고 그냥 아주 그냥 평범한. 자기는 곧 죽게 되어서 삶의 소중함을 느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주 그냥 시간이 남아도는. 정말 할 일 없는. 참. 그런 자다. 남을 가둬놓고 몰래 지켜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자가 뭐, 안 봐도 뻔한데, 그걸 또 돈 내고 보러 간 관객인 내가, 내가 양민이다.


8: 마무리

01:02:14-01:06:18

[Music: So This Is It – Ty Simon]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은근히, 호러란 교훈적인 장르입니다. 다른 장르보다 대놓고 교훈을 줘도 아무도 그걸 교훈이라고 생각 안 하는 효과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호러를 보면 그 시대에 벌받아야 한다고 여겨졌던 행위들을 알 수 있습니다. 호러의 역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죄와 벌의 역사 역시 길어질 거라고 봅니다.

그러합니다. 그래서 저는 호러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관음성 호러는 나의 이런 존재를 인정해 주기에 이상하게 안심이 되는 장르입니다. 나 자신의 양면성 내지는 양민성을 아주 잘 알 수 있어요. 이도저도 아닌, 대단히 고귀하지도 않고 대단히 천하지도 않은, 딱 중간이라 어쩌면 더 고귀하거나 천한, 아주 그냥 딱 중간밖에 안 되는 나 자신을.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Music ends.]


모든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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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한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