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2] 갈기갈기: 경악과 코믹 사이

[Ep. 32] 갈기갈기: 경악과 코믹 사이 square

1: 오프닝

00:00:00-00:08:12

[Music: Eternity Clock – Shahead Mostafafar]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 슬래셔 얘기를 할 거라고 저번 주에 언급했었습니다. 슬래셔. 캬. 여러분. 가을 아닙니까? 여름에는 좀 오싹하게 귀신 나오는 무서운 영화를 보는 게 어울리지만, 가을, 할로윈의 계절이 오면, 저는 슬래셔가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슬래셔가 무섭기도 하지만, 오싹함은 좀 덜하기 때문입니다.

오싹할 거리가 별로 없어요. 슬래셔는 장르 자체의 정해진 플롯이 이겁니다. 하나의 범인이 나타나서 나머지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다. 그러니까 범인 자체를 보고서 놀랄 건 없단 말이죠. 피가 대놓고 많이 나온다면 징그러울 수는 있겠지만, 그건 오싹한 거와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오싹한 건 좀… 오히려 느리고. 차분하고. 안에서부터 스멀스멀 밀려오는 공포감이라면, 슬래셔 장르에서 나타나는 무서움은 차라리 마음이 편합니다. 저는 이래서 슬래셔에 팬층이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피가 아무리 많이 나와도 마음이 편하거든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니까. 범인이 살인을 저지를까 말까가 궁금할 필요도 없고, 살인 사이사이에 간격이 그리 길지 않아서 많이 마음 졸일 필요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공식의 일부가 아닌 점이라 하면, 마지막에 살아남는 자가 있느냐 없느냐 정도인 것 같습니다. 이건 때에 따라 좀 다를 수 있는 것 같아요.

귀신 나오는 무서운 영화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왁자지껄 보기가 어렵고, 슬래셔는 아무리 시끄러운 파티 때도 모여서 시끄럽게 볼 수 있다는 게 이 두 공포 갈래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가을. 슬래셔를 보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날씨가 으슬으슬할 때 오히려 슬래셔를 보면 뜨거운 피가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할로윈과 슬래셔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아까 말했던 이 점. ‘슬래셔는 왁자지껄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 오늘 제가 중점적으로 다루고 싶은 내용입니다. 공포에 들어 있는 코믹 요소. 그게 관객들에게도 그렇지만, 심지어 공포물 안에 들어 있는 코믹 요소가 있다는 점. 왜냐하면, 경악과 코믹은 한 끗 차이이기 때문에. 또한 경악에도 너무나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오늘 다룰 영화로는 Halloween, 1978년 것, 그리고 Happy Death Day입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그리고 순전히 이론적인 차원에서의 섹스 얘기가 나옵니다. 이건 뭐, 전에도 몇 번 말했죠? 여러분? 이상하게 생각하니까 이상한 겁니다. 관능은 실존하지만, 관능적이지 않은데 자꾸 야하다고 하는 건, 살덩이에 스스로가 주입하는 음란 마귀성일 뿐입니다. 살덩이를 살덩이로 볼 수 있어야 관능도 관능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오늘은 관능 얘기가 아니라 이론적 살덩이 차원에서의 섹스 얘기가 나옵니다.

아무튼, 저번 주처럼 이번 주에도 영화 얘기를 하는 이유는, 슬래셔 장르가 영화에서 더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렇게나 많이 죽는지라, 소설에서는 그 죽는 사람들 중 하나를 주인공으로 설정하면 대미지가 너무 크거든요. 그렇다고 안 죽고 살아남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자니 티 나고. 그렇다고 또 주인공을 끝에 가서 죽이면, 아무리 공포라지만, 그래도 타격이 있단 말이죠.

그러나 영화는, 아무리 카메라의 시선과 시점이 있다 한들, 소설처럼 인물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그 마음속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건 아니기 때문에, 관객이, 또 한 번, 약간 비겁하게, 하지만 제작자들의 배려를 받으며 남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신나게 지켜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만 이상한 것이 아닌 게 위안이란 말이죠. 슬래셔 장르에서 나타나는 코믹성 때문에. 그 내부의 캐릭터들이 마치 관객인 우리처럼 느끼는 경악과 코믹의 모호한 경계 때문에.

그럼 오늘의 수다, 시작할게요.

[Music ends.]


2: Halloween의 죄와 벌

00:08:12-00:27:51

할로윈은 슬래셔 장르에 입문하기에 좋은 영화입니다. 왜냐하면 피가 거의 안 나오거든요. 나오는 피도 뭐… 피라고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 어두운 화면에서 잠깐씩 나오기 때문에, 피를 싫어하시는 분들이 슬래셔가 궁금하시다면 보기에 좋은 영화 같습니다.

옛날 영화라서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뭘 대놓고 많이 보여주지 않던 시절이라서요.

그리고 음… 할로윈의 플롯은. 사실 모든 스탠다드 슬래셔 장르와 다 똑같아서 별로 추가적으로 설명할 게 없습니다. 어떤 범인이 여러 사람을 죽입니다. 이게 끝이에요. 그리고 이야기의 실제 내용은 누가 죽느냐, 누가 사느냐, 범인이 죽느냐, 범인이 사느냐, 이런 겁니다.

음 일단, 오늘의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이 영화에서 다른 많은 공포 장르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들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공포와 죄와 벌. 이 셋의 관계. 이건 정말 공포물이면 언제든 나타나는 것 같아요. 공포물의 특성상, 캐릭터를 어마무시하게 괴롭혀야 하는데, 그러면 창작자, 제작자들의 그런 행위에 대한 정당화가 발생해야 합니다. 아무리 픽션이라도, 관객은 아무 이유 없이 누가 해코지당하는 걸 지켜보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 그러면 자기가 변태인 게 너무 티 나니까.

그래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캐릭터의 죄를 집어넣어야 하고, 그것에 대한 벌로서 공포가 발생합니다. 이때 죄는 이야기 만드는 사람들이 실제로 죄라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고, 사회 풍조상 죄라고 여겨지는 것일 수도 있고, 완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라고 여기지 않는데 극 중 미친 범죄자가 혼자 죄라고 여기는 것일 수도 있고, 다양합니다.

그런데 슬래셔처럼 많은 사람을 빨리 죽여야 하는 장르에서는 이 죄의 개념이 조금 단순? 내지는 간결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곧 죽어야 할 이 많은 캐릭터들이 진짜 죄인인지 아닌지까지 판결할 시간이 없어요. 만약 그럴 시간이 있다 하더라도, 캐릭터에 시간을 들이면 들일수록 생기는 부작용은 관객이 캐릭터를 어떤 식으로든 동정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꾸 보면 정든다고, 별로인 캐릭터도, 괜히 몇십 분 동안 스크린을 통해 보고 있으면, 쟤가 죽는 걸 그렇게 좋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고요.

그래서 슬래셔는 빨리, 가장 간단한,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쟤를 왜 죽이냐’고 항의하지 않을 만한 죄목을 캐릭터들에게 갖다 붙여야 합니다.

이때 가장 잘 써먹는 게 문란함입니다. 특히나 여자 캐릭터의 문란함.

정말 하… 정말 단순하죠. 여러분? 한번 다음에 여러분이 공포물, 특히나 슬래셔를 볼 때 관찰해 보십시오. 누가 제일 먼저 죽나.

슬래셔물은 거의 정말, 범인이 섹스를 못 해서 벌이는 광적 폭발 범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누가 섹스하면 그것에 대해 벌을 주고, 특히나 여자가 섹스를 하면 벌을 줍니다. 아니, 섹스는 혼자 하나?

할로윈이라는 이 영화도, 이 범인이 대체 왜 이러고 다니나를 생각해 보기 시작하면, 한마디로 자기랑 안 자주고 자꾸 딴 남자랑만 자는 여자들을 죽이고 다닌 이야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뭐, 그러다 기회가 되면 남자도 죽이긴 하는데, 근본적으로는 여자를 죽입니다. 그게 목적이에요. 여자 죽이다 남자도 거슬리면 남자도 죽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적 관계를 죄로서 보는 행태가 할로윈에서 특히나 두드러지는 이유는, 분명히 죄인데도 죄 취급을 받지 않고, 따라서 범인에게 죽임당하지 않는 행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법 집행자가 제 할 일을 안 하는 행위입니다.

범인이 피해자들을 죽이고 다니는 이 동네에 있는 법 집행자, Sheriff, 보안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외지 사람이 범인이 이 동네로 향한 것을 알고 보안관에게 경고를 주러 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 보안관이라는 자는 자신에게 경고를 주러 먼 거리를 온 이 외지인의 말을 안 믿어요. 안 믿는 것도 뭐 좀 제대로 찾아보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의 디폴트 모드가 뭐냐 하면, ‘다 괜찮다’ 입니다. 계속 아무 일이 없다고 주장하고, 이 외지인이 일 좀 하라고 하면 자꾸 위험한 거 없다고 하는데.

이자가 제일 위험해요. 이 보안관이. 자기 동네에 위험한 게 없으면 자기의 존재 이유가 뭐야. 그걸 망각한 것 같아요. 이 동네에 정말로 절대 위험한 게 없다면, 보안관 따위는 필요가 없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자는 대체 왜 존재하냐고. 아주 그냥 설렁설렁, 대충대충 길거리를 누비는데, 그, 이런 남자들 특유의 팔자걸음이 있습니다. 아주 꼴 보기 싫은. 그러고 다녀요.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뭐다? 이자가 벌을 받지 않는다는 점.

더 기가 막힌 것은 뭐다? 극 중 범인에게 벌을 받는 자는 이자의 딸입니다. 이자의 딸이 고등학생인데, 아빠가 집에 없을 때 남자친구랑 만나기로 해요. 그런데 남자친구랑 만나기도 전에 범인이 이 여학생을 죽입니다.

물론 뭐, 그것이 이 보안관 아버지의 벌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자기가 일을 좀 잘했으면, 자기가 ‘이 동네는 다 괜찮고 범죄 따위는 없다’고 말하던 바로 그 순간에 자기 딸이 살인 당하는 일이 없었겠죠. 그런데 왜 이 딸이 자기 아버지 죗값을 받아야 하냐는 말이죠.

이러한… 죄는 아버지가 짓고 다니는데, 딸이 남자친구 좀 만나기로서니 살인까지 당해야 한다는 서사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있어 왔습니다. 대놓고 있는 경우도 있고, 이런 슬래셔 장르에 숨겨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어이가 없죠. 시민들 세금 받아서 길거리나 어슬렁어슬렁 싸돌아다니는 놈 죄가 더 큽니까? 아니면 남자친구랑 섹스 좀 하는 죄가 더 큽니까?

픽션은 절대 현실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영화 만드는 이들의 선택이 의미심장합니다. 슬래셔 장르에서 가장 빠르게, 아무 설명 없이 캐릭터를 죽어도 싼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범죄로 섹스를 사용한 겁니다.

이것이 실제로 화이트칼라 범죄가 블루칼라보다 왠지… 왠지 덜 폭력적인 것 같고. 그래도 좀 머리가 똑똑할 것 같고. 이런 편견과도 얽혀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아까 언급했던 그 외지인 있잖아요? 보안관에게 경고를 주러 온 외지인. 이자가 보더라인 화이트칼라 크리미널의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이자는 의사예요. 이 범죄자를 어렸을 적부터 알았대요. 그런데 그래서 자기가 이 범죄자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범죄자가 출몰할 거라고 여겨지는 딱 그 집 앞에서 죽치고 있습니다. 범죄자가 딴 데 있을 수도 있는데 그냥 거기 죽치고 있는 거예요. 물론 이자의 죄는 보안관의 죄보다는 덜하죠. 왜냐면 뭐, 의사가 무슨 수사를 펼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힘이 센 것도 아니고.

그러나 이자의 그 ‘나는 다 알아. 범인을 알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알아.’ 하는 태도는 분명히 의미심장합니다. 특히나 끝에 가서 범인에게 총을 쏴서 죽이는 자가 이 의사이기 때문에요.

이것도 참. 이 서사가. 이것이 옛날 서사라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스펙트럼이 머리를 쓰느냐 몸을 쓰느냐로 갈린다고 본다면, 극 중 인물들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나열할 수 있습니다. 의사, 보안관, 섹스하는 사람들. 이게 머리를 많이 쓰고 몸을 안 쓰는 순서 같아요, 제 생각에는. 의사가 제일 머리를 많이 쓰고, 보안관은 몸을 써야 할 순간에 머리나 굴리면서 왜 자기 동네가 안전한지 변명이나 하고 있고, 섹스하는 사람들은 몸에 집중하느라 머리를 하나도 안 썼다.

그런데 그 중 범인을 죽이는 것은, 갑자기, 난데없이 나타난 의사입니다. 그 많은 피해자들이 섹스 좀 했다는 이유로 그냥 맥없이 죽었는데, 이 화이트칼라인 자, 크리미널은 아니지만 보더라인 크리미널에 가까운 무능함을 보여주는 자가 갑자기 등장해서 총을 쏴서 범인을 죽입니다.

이게 뭔지. 엄밀히 따지면 가장 죄가 아닌 건 이 셋 중 섹스인데. 아니 섹스가 죄면 어쩌라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요, 세상이 돌아가질 않는데. 저는 존재한다고 해서 무조건 보호해야 하고 좋다고 여기는 사상을 갖고 있진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스를 악으로 치부하는 건 그 어떤 사상에도 들어맞지 않는 모순이라고 봅니다. 섹스를 안 하면 인류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사실 시스템적으로 이 세상에 더 많은 해를 끼치는 건 화이트칼라 범죄일 거예요. 이 보안관이 약간 몸을 쓰는 일을 하는 자처럼 보이더라도, 이 영화에서 실제로 몸 쓰는 일을 할 일도 없었거니와, 이자의 죄는 화이트칼라 크라임에 더 가깝습니다. 관료의 게으름. 떼의 히히덕성. 이게 이자의 죄인데, 이자의 죄는 벌을 안 받고, 그야말로 몸을 쓴 사람. 혹은 쓰려던 사람. 섹스를 하려던 사람. 이 사람들이 줄줄이 살인을 당합니다.

이게 진짜, 호러 영화 전통에서 정말 이상한 특징 중 하나예요. 그래서 제가 언급했던… 전에 언급했던 ‘살인마 잭의 집’을 열심히 봤던 겁니다. 거기서도 경찰의 무능함이 피해자 하나를 죽이지만, 그래도 그 영화에서처럼 경찰이 잘못했다는 뉘앙스라도 풍겨주는 경우를 저는 별로 본 적이 없거든요. 아예 경찰 부조리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아주 여러 죄가 있는데, 그중 누가 벌 받는 데 당첨되느냐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는 영화에서 말입니다.

아무튼 이리하여, 영화 할로윈에서 살아남은 주인공은 누구다? 섹스를 안 하고 남의 집 애를 돌보던 일을 하는 여학생. 응. 섹스 안 한 대가로 살았다는 건지? 섹스하고 다니지 말고 애나 보라는 건지?

할로윈의 이 범인은 섹스하고 다닌 다른 캐릭터들은 그렇게 잘 죽이더니, 갑자기 이 주인공을 죽이려고 할 때는 목이 아니고 팔을 찌릅니다. 뭐야 이게. 섹스 안 하는 여자를 보니까 갑자기 겁을 먹은 건지? 나무랄 데가 없어서? 왜?

하여간에. 섹스. 섹스는 공포랑 분리해서 논하기 정말 어렵습니다. 공포 장르에서 대표적으로 벌 받는 행위가 섹스고, 따라서 벌주는 행위를 하는 범죄자도 섹스 때문에 그러한 행위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게 가면 쓰고 숨만 큰 소리로 쉬어대니까 아무도 안 자주지. 누가 자고 싶겠습니까? 가면 쓰고 큰 소리로 숨 쉬어대는 사람에 대한 변태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모를까. 그럼 그런 사람을 찾든가. 그러니까 사실, 섹스를 하기도 싫은 거겠죠, 이 범인은. 섹스하기가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관음증적인 측면도 나타납니다. 범인이 사람을 죽이기 전에 그 사람을 그냥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자꾸만 자기랑 안 자줄 것 같고 자기를 거절할 것 같은 여자들을 죽이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뭐, 영화 내에서 이 범인이 왜 이러고 다니는지에 대해 깊게 나온 설명은 없습니다. 그냥 제 추측이에요.

이걸 뭐 더 성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을 겁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런 서사를 쓰는 이들의 심리가 뭔지. 나랑 안 자주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심리가 내재되어 있는지? 나랑 안 자주면 내가 이런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 이런 심보인지? 그리고 만약 누가 날 막더라도 그것은 화이트칼라 멍청구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총을 든 남자일 거란 얘기인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가 이 영화의 어이없는 죄와 벌의 양상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얘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의 주제가 사실 죄와 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경악과 코믹 사이가 한 끗 차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할 거예요.

그래서 그 틀에서 보면 이 영화 전체가 완전히 코믹화 되고, 이런 기가 찬 죄와 벌의 양상이 벌어져도 그냥 어이가 없어서 웃게 됩니다.


3: 공포의 재미

00:27:51-00:34:44

[Sound effect]

슬래셔가 어떻게 웃길 수가 있는가. 그렇게 사람이 많이 죽는데. 일단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영화에 피가 많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그렇게 잔인하지가 않고요.

저는 사실 오프닝 크레딧 때부터 웃겼어요. 이 영화 전체가 영화 만드는 이들의 농담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웃겨가지고.

그… 오프닝 크레딧 때 호박이 나옵니다. 여러분 아시죠? 할로윈 때 호박 속을 파고, 겉 부분을 얼굴처럼 조각해놓은 잭오랜턴. 그 안에 촛불 같은 것을 넣어서 불을 밝히면 호박이 으스스하게 밝혀지죠.

그런 호박이 오프닝 크레딧 때 나오는데, 그게 처음에는 저어어어어 멀리에 있어요. 저 멀리 호박이 으스스하게 두둥실 있습니다. 그런데 크레딧이 계속 이어지면서 호박이 점점점점점점점 다가와요. 그게 저는 너무 웃겨가지고. 귀여워요, 호박이. 이렇게 귀여운데 뭐가 무서워.

그런데 처음에는 이렇게 호러 영화가 웃겨도 되나. 이것은 역시 한아임이 그로테스크한 인간이라서 혼자 하는 착각이겠지, 이랬습니다. 저는 이래 봬도 모던 그로테스크 타임스를 하는 사람인데, 이 정도 호러 갖고는 역시 한아임을 놀래킬 수 없는 거야. 하면서 혼자 흡족하게 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갈수록 이게 그냥 제 착각이 아닌 것 같은 겁니다. 왜냐하면 극 중에 아예 나와요, 경악과 코믹 사이의 너무나 가는 선이.

먼저, 여기서 살해당하는 캐릭터들 중 하나의 여동생이 있습니다. 이 아이는 초등학생 같아요. 그것도 초등학교 저학년. 아주 어린 아이인데, 이 아이가 불을 다 끄고 무서운 영화를 아주 뚫어져라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언니가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개가 짖어도 들은 척도 안 하고. 영화에 완전히 몰입해가지고는 눈이 똥그래져서, 너무 귀엽게, 영화를 봐요. 그것도 불을 끄고.

그러다가 언니가 와서 왜 무섭게 그러고 있냐니까, 이 어린애가 그러는 거예요. 자기도 모른다고. 너무 재밌는데, 그게 왜 재밌는지 자기도 모르게 그냥 호러의 마성에 빠진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관객의 모습. 호러가 만약 정말 그렇게 무서운 거라면 막 찡그려야 하고, 돈 주고 보러 가는 일도 없어야 할 텐데, 너무나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눈 앞에 펼쳐지는 공포를 본다.

또한, 여러 장면에서 캐릭터들이 서로를 겁주고 뿌듯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도 너무 귀여워요. 갑자기 뒤에서 덮친다든지. 커튼 뒤에 숨어 있다든지. 저기 누가 있다! 했는데 아무도 없다든지. 그러고 상대방이 겁먹어서 놀라면 뿌듯해하는 겁니다.

이 역시 우리의 모습입니다. 경악과 코믹은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공포 영화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극도의 긴장감이 갑자기 풀렸을 때의 그 희열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남이 나한테 그러면 짜증 나겠지만. 이론상으로라도, 그런 조임과 풀림의 매력을 알고 있단 말이죠.

인간의 삶의 많은 것이 조임과 풀림의 연속입니다. 오늘 섹스 얘기가 많이 나왔으니까 그냥 얘기할게요. 네, 섹스도 그렇습니다. 서사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인체 구조에 따른 섹스의 기승전결에서 나온 게 아니냐는 썰이 있을 정도로, 머리로 이해하는 듯한 이야기도 사실 몸으로 이해하는 거고, 그 몸이 우리의 지금 이러한 몸인 한, 조임과 풀림이 있을 수밖에 없단 겁니다.

우리는 아침에 활동하고 밤에 잠을 잡니다.

배가 고프다가 배가 부르면 늘어집니다.

운동을 하고 몸을 풀어줍니다.

이게 삶의 리듬의 근본이기 때문에, 그것을 즐거워하도록 우리가 진화했다는 이론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이 리듬을 싫어하고 여기에 적응 못 하는 개체는 생존 및 번식에 불리하겠죠.

그러니 공포는 태생부터가 이러한 리듬을 이용하는 서사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포 서사 안, 극 중 서사에서, 캐릭터들이 또 그러한 행위를 반복하고 있더라. 작게 놀래키고 놀래는 행위. 내가 놀래키려다가 다른 사람이나 요소에 놀라서 역으로 된통 당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그것이 웃음으로 해소됩니다. ‘뭐야 놀랬잖아.’ 하고 해소됩니다. 그러나 해소되지 않는 경우가 극 중 캐릭터들에게는 공포가 되는 겁니다.


4: 섹스의 소리, 재미의 소리

00:34:44-00:42:14

[Music: Jack’s Harvest – Emmanuel Jacob]

그리고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가 소리예요. 전화 통화 장면이 꽤 나와서 극 중 캐릭터들이 소리에만 의존하는 경우도 있거니와, 관객 입장에서 소리가 왜 생겨나는지가 분간이 안 되는 경우가 몇 번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경악과 코믹이 분간이 어렵다는 특성이 다시 죄와 벌까지 연결이 됩니다.

왜냐하면. 극 중, 성적으로 좋아서 소리를 지르는 건지, 죽느라 그러는 건지 불분명한 경우들이 있어요. 사실 아주 처음에 죽는 사람, 즉, 어렸을 때부터 살인마였던 이 범인에 의해 죽는 첫 피해자가 죽을 때 저는 깜짝 놀랐어요.

아니 지금 저게. 사람 죽는 소리야 포르노야. 너무 이상한 거예요. 소리가 너무. 너무 길게 소리를 내고. 죽으면 그냥 윽, 하고 죽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걸 너무 과장해서. 만약 실제로 사람 죽을 때 소리가 그렇다 하더라도,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의도를 하지 않는 한 이런 소리를 넣을 것 같지가 않아요.

[Music ends.]

그리고 이야기 안으로 더 깊게 들어갈수록, 섹스까지 가는 과정에서의 화면 구도와, 살인까지 가는 과정에서의 화면 구도가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분간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교묘하게 이용한 거겠죠?

게다가 죽어가는 사람이 전화를 거는데, 받는 쪽에서 섹스 소리인 줄 알고 장난 전화 취급을 하는 장면이 있어요. 이것도 그러니까, 이런 살인의 희생양이 될 걸 대비해서 평소에 섹스 안 할 것처럼 하고 다니란 건지. 이게 무슨.

심지어 애들이 소리 지르는 것도 재밌어서 그러는 건지, 무서워서 그러는 건지 분간이 안 됩니다. 여기다가, 옛날 영화라 그런지 범인의 칼이 무슨 비닐 호일로 만든 소품 티가 팍팍 나는 물체라는 점도 웃기고.

나중에, 아주 끝부분에 가면, 범인이 죽지를 않아요. 이 주인공, 우리의 주인공, 섹스 안 하고 애 보는 우리 주인공이 범인을 몇 번을 죽이려고 하는데, 실패합니다.

범인이 주인공을 죽이기 어려워하는 것과 비슷해요. 범인이 이 주인공을 다른 피해자들만큼 쉬이 못 죽인단 말이죠. 마치 이 주인공의 성적 순수성? 그런 변태 같은 개념을 믿는 범인이기에, 그런 순수성 때문에 주인공에게 무슨 판타지성 보호 장벽이 있는 것처럼, 범인이 주인공을 못 죽입니다.

그런데 주인공도 범인을 못 죽인다. 죽인 줄 알고 막 한숨 돌리면서 눈물 흘리고 있는데, 화면 저 뒤에서 범인이 슥 일어납니다. 저는 이거. 이 영화 진짜. 할로윈 밤에 약간 무섭고는 싶은데 피는 많이 보기 싫고 그냥 적당히 분위기만 즐기면서 웃고 싶을 때 이 영화 정말 추천합니다. 할로윈 밤엔 할로윈.

범인이 안 죽어. 그리고 영화 내내 섹스 소리와 사람 죽는 소리가 뒤섞여 있고, 심지어 애들 웃는 소리와 애들 기겁하는 소리도 뒤섞여 있고, 일 하라는 관료는 일 안 해, 배운 자라는 의사는 와서 아는 척이나 해, 아주 그냥 난리난리입니다.

재밌어요. 웃기고. 사실 제가 제일 무서웠던 건 이 동네에 백인밖에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그리고 이 동네가 지금도 실제로 그럴 수도 있긴 한데, 저는 인종과 상관없이 한 인종만 있는 걸 보면 좀 무서워요. 다 똑같아 보이거든요. 백인만 있어도 그렇고. 아주 오랜만에 한국에 가면, 최근에 갔을 땐 덜했는데, 옛날에는 한국에 돌아가면 진짜 한국 사람들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좀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갔더니 외국인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졌더라고요. 그래서 안 무서웠습니다.

백인만 모여 있는 걸 보면 백인이 무서워서 그 모습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떻게 저렇게 똑같은 피부색에 똑같은 머리카락 색만 한 사람들만 모여 있나 싶어서 무서운 겁니다. 그런데 심지어 이 서사 속에서 그 똑같게 생긴, 극 중 주인공과도 똑같게 생긴 사람들이 이 주인공을 도와주질 않아요. 아무리 도와달라고 소리쳐도, 경찰이나 불러줬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 무서웠습니다.

여러분? 나랑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날 안 도와줄 때보다, 나랑 같다고 여기던 사람이 안 도와줄 때 더 무섭습니다. 그 측면에서는 핼로윈이 무섭지만. 전반적으로는. 웃기고. 어이가 없고. 그것은 옛날 영화라서만은 아닌 것 같고, 어느 정도 의도된 것 같다.


5: Happy Death Day

00:42:14-00:52:25

[Sound effect]

다음 레퍼런스로 넘어가겠습니다. Happy Death Day. 제목부터가 오늘의 주제와 들어맞습니다. 죽음이라는 경악할 만한 일도 해피할 수 있다. 미리 말해 두자면, 저는 이 영화를 너무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이야기의 기본 설정은 이겁니다. 어떤 대학생이 자신의 생일에 살인을 당하는데, 살인을 당하는 순간, 자기 생일날 아침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래서 이 대학생이 살인을 당할 때마다 계속해서 그 생일날이 반복됩니다. 마치 영화 Groundhog Day처럼. Groundhog Day는 한국에서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는데, 호러는 아니고 아예 코믹 드라마 요소만 있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그 얘기에서도 주인공이 계속 특정 하루에 갇혀 버리거든요. 계속해서 어느 한 하루를 반복해서 삽니다.

이러한 설정을 가져온 Happy Death Day는 그렇게 함으로써 처음부터 경악과 코믹을 합쳐버립니다. 경악. “소스라치게 깜짝 놀람.” 이것을 웃음으로 승화시켜요. 이 주인공이 계속 죽는다는 끔찍한 일이 발생하는데, 어차피 다시 태어날 거니까 웃을 수 있는 겁니다. 사실, 주인공이 처음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잘 생각해 보면 이거 슈퍼파워예요. 불사신의 능력을 갖게 된 겁니다, 이 주인공이.

심지어 아까 언급한 공포 영화 특유의, 완전하게도 어이없는 죄와 벌의 양상을 고려해 볼 때, 2017년에 나온 이 영화의 주인공, 그것도 여자 주인공이 이런 불사신의 파워를 갖게 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여자 주인공도, 아니나 다를까, 잘 알지도 못하는 남학생의 기숙사 방에서 잠을 깨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해요. 이 남학생이랑 잔 듯한 뉘앙스로 처음에 시작이 됩니다. 시작이 뻔하죠. 아하 또 소위 말하는 헤픈 여자 주인공이 죽는구나.

그런데 그런 얘기가 아닌 겁니다. 너희가 헤프다고 하든 말든, 이 여자 주인공은 범인이 죽여도, 아무리 죽여도, 죽는 그 순간, 다시 아까 그 남학생의 기숙사 방에서 잠을 깨는 상황으로 돌아갑니다. 불사신이에요. 아까 다룬 영화 할로윈이 1978년에 나왔고, Happy Death Day는 2017년에 나왔는데,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섹스가 벌 받을 일이냐 아니냐에 대한 대중의 시각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섹스 그 자체보다는, 어떤 섹스를 하느냐에 더 중점이 맞춰져 있고, 그조차도 비교적 중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지, 사실 별로 그렇게 죄로서 다뤄지진 않습니다. 극 중 여자 주인공이 유부남 교수와 섹스를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주인공을 나무라지 않는 방식이었다고 저는 생각해요. 주인공이 자책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오히려 영화 만드는 이들이 그 점을 이용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교수라는 놈이. 대학생 데리고 결혼한 교수가 바람을 피우면, 교수 잘못입니다.

그것을 아는 2017년의 관객에게 영화 제작자들은 스스로를 자책하는 주인공을 주었다.

그래서 이 주인공하고 자는 이 유부남 교수가 거의 뭐… 개그 캐릭터입니다. 이런 말을 해요, 이놈이. “어떤 여자가 더 나이 많은 남자랑 사랑에 빠지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이딴 말을. 무슨 애 다루듯이 이 주인공한테 하는데, 주인공이 바로 이럽니다. “나 너 사랑 안 하는데.” 영어에 존대 같은 거 없는 거 아시죠? You. 너. 너 사랑 안 한다고. 교수고 나발이고, 안 사랑한다고. 누가 계약 파기범이랑 진지하게 만날 생각을 해, 요즘 시대에. 이 주인공은 어린 대학생 시절에, 사연이 있어서 스스로를 망가뜨리느라 유부남이랑 잠깐 노는 겁니다. 물론 좋은 일은 아니지만, 나이가 훨씬 많은 데다 결혼 계약을 한 장본인인 사람보다야 훨씬 변명거리가 많죠. 요즘 애들이 옛날처럼 정보가 없는 바보도 아니고. 기혼자가 바람피우는 게 얼마나 급 낮은 짓인지 다 압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슬래셔긴 한데, 같은 캐릭터가 계속 죽는다는 특이한 세팅이라 캐릭터를 알아갈 기회가 있습니다. 이 주인공이 왜 생일에 죽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이 주인공이 생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거든요. 즉, 영화 만드는 이들이 관객에게 분명히 일러줘요. 우리의 주인공은 사실은 잘못한 게 없고, 스스로를 자책할 정도로 기준이 높은 사람이며, 사실 죽으면 안 될 사람이다.

게다가 이 주인공이 계속해서 발전합니다. 살인범이 계속 죽이러 온다고 했잖아요? 살인범이 죽이면 주인공은 다시 생일날 아침에 부활하고. 그날 또 살인범이 죽이면 또 부활하고. 죽이고 또 부활하고. 그 사이클을 거치면서 레벨업 되는 주인공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역이용하기까지도 하고. 너무 멋있어요, 주인공이.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도 나와요. 섹스와 살인을 분간하기 어려운 순간이 존재한다는 점이. 다만, 그것이 할로윈이나 다른 정통 공포에서는 정말 무서운 순간으로 그려지는 반면, Happy Death Day에서는 주인공이 어차피 살아 돌아올 테니 덜 억울하고 덜 공포스러운 유머의 일부로 등장합니다.

게다가 이 범인이… 너무 열심히 일해요. 물론 이 범인은 자기가 계속해서 주인공을 반복해 죽이고 있다는 점을 모릅니다. 왜냐면 주인공만 계속 부활하는 거지, 범인에게는 이 생일날의 반복이 존재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관객은 알잖아요. 그러니까 관객인 제가 보기에는 이 범인이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그게 웃겨요. 어쩜 그렇게 열심히 죽일까. 아주 죽이는 방법도 너무 다양하고. 재밌습니다.

이 영화는 보셨으면 좋겠어서, 마지막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밝혀질 때도 웃깁니다. 공포 영화에서 섹스가 죄로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추어 한번 이 마지막 스포일러를 관찰해 보시면 재밌을 것 같습니다. 영화 할로윈이 나왔던 1978년부터 Happy Death Day가 나온 2017년까지, 섹스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는 개념이 얼마큼의 변화를 거쳤는지가 이 마지막 반전과 이에 대한 주인공의 리액션, 또한 아마도 관객이 보일 리액션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제 취향에 너무 교훈적이지도 않고 너무 무의미하지도 않고 연기도 너무 좋고 엔딩도 만족스러운, 그런 영화였습니다.


6: 마무리

00:52:25- 00:56:30

[Music: So This Is It – Ty Simon]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Happy Death Day에 등장하는 대학교의 마스코트가 아기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게 바로 그 아기 캐릭터 마스크입니다. 누가 그 마스코트를 디자인하고, 누가 그걸 마스크로 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극 중 그 역할을 맡은 디자이너, 마케팅 담당자, 응? 등장하진 않지만, 서사 속 어딘가에서 그 역할을 맡은 자들. 그자들이 이 호러의 초래자입니다. 와, 정말. 그런 마스크를 왜 만들어. 범죄 저지르라고 만든 마스크 같아요. 그러니 범인이 그걸 쓰고 날뛰지.

가뜩이나 마스크 같은 걸 쓰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신기하죠? 상대가 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자각 자체가 우리의 행동을 다르게 한대요. 그런데 그렇게 소름 끼치는 아기 캐릭터 마스크를 쓰면 정신이. 음. 정신에 좋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영화는 재밌다. 웃기다. 슬래셔는 웃길 수 있다. 피가 좀 나오는 경우에도 충분히 서사에 따라 웃길 수 있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Music 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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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32] 갈기갈기: 경악과 코믹 사이 ver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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