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3] 초자연적(敵): 의도의 무게

[Ep. 33] 초자연적(敵): 의도의 무게 square

1: 오프닝

00:00:00-00:07:19

[Music: Eternity Clock – Shahead Mostafafar]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이번 시즌 초반이었나? 예전 에피소드를 할 때, 한아임은 자연재해 공포 장르를 별로 즐기지 않는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에는 별다른 의도가 없는지라, 적어도 제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의도는 없는지라, 자연이 무슨 일을 저질러도 자연을 오래도록 미워하거나 자연을 설득한다거나 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했었죠. 네. 그렇습니다.

불이 나도, 제 경우에는 불을 증오하기보다는 불을 낸 사람이나, 불을 빨리 끄지 못하도록 한 사람을 증오할 것 같고요. 불이 물론 무섭지만, 그것을 무서워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2022년을 사는 사람으로서 압니다. 혹은, 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불의 신을 모시며 부디 노하지 마시라고 기도하는 게 정석인 시대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자연재해 공포 장르 중에서 제가 무섭다고 여기고, 흥미롭다고 여기는 아주 작은 한 조각이 있습니다. 바로, 사실은 초자연적인 자연재해 장르입니다. 여기서 초자연적이라고 함은, 지팡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든가, 날개를 달고 날아다닌다든가, 하는 의미의 슈퍼내추럴은 아니고요, 아주 극 단순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초자연입니다. 자연을 초월한 것. 자연의 탈을 쓰고 있는데 자연이 아닌 것. 그래서, 자연이었더라면 인간이 의도를 분간할 수 없었어야 했는데, 의도라는 것의 존재를 눈치채게끔 하는, 그런 무언가. 그게 제가 여기서 말하는 초자연입니다.

갑자기 어떤 도시의 모든 나무들이 해바라기처럼 가지를 한 방향으로 돌린다든지.

바다의 밀물 썰물 움직임이 멈춘다든지.

심지어 지구가 자전을 멈춘다든지.

이러면 얼마나 무섭겠느냔 말이죠.

그런 초자연은 우리가 익숙해진 일반 자연과 다르게, 충분히 인간인 저에게 적이 될 수 있어서 무서운 겁니다. 적, 적군,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되려면 그쪽에서 저에게 어떤 선포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걸 공식적으로 할 수도 있고, 바로 행동으로 보여줄 수도 있는데, 어쨌든 저쪽에서 의도를 가져야 적이 되는 거거든요. 일반 자연을 상대로 인간이 아무리 적이라고 여겨봤자, 자연은 관심도 없으니까, 제 생각에 그건 적이라고 보기에 좀 어려운 것 같고요, 요 초자연. 마치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은 충분히 왠지 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공포가 나옵니다. 의도가 없다고 여겼던 것에서 갑자기 의도가 드러날 때. 내가 아무리 무서워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적이 될 수는 없음을 알았기에, 아름다움을 찬양하기도 했던 바로 그 자연이 지금까지의 내 그런 양면성을 다 눈치채고 있었고, 그래서 마치 복수하려는 듯 나를 적으로 삼으려 하는 것 같을 때.

저는 개인적으로 매우 소름이 돋는다고 생각합니다. 요 예시로 오늘 다룰 레퍼런스는 알프레드 히치콕 님의 영화 “,” 그리고 Michael McDowell 님의 책, The Elementals입니다. 이 책은 한국어로 안 나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초자연의 예시가 너무 무서워서, 이걸 택했습니다. 한국어 버전이 없어도 에피소드에서 다루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을 거라 봅니다. “새”와 Elementals 둘 다 스포일러 조금씩 있습니다.

그럼 오늘의 수다, 시작할게요.

[Music ends.]


2: 개인

00:07:19-00:10:07

이러한 초자연물을 논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에게 있는, 자기 자신의 상을 세상에 비추어 보려는 습성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 개개인들은 자신의 삶이 어떤가에 따라 세상을 봅니다. 우리가 세상을 그냥 보는 것 같고 그게 객관적인 것 같지만, 전혀 객관적이지가 않아요. 우리는 우리가 어떤 배경에서 살았는지에 따라 완전히 서로 다른 것을 봅니다.

장인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라면, 평소에 길을 걸을 때도 인도의 블록들이 잘 박혀 있나, 그 finesse의 정도를 볼 겁니다. 반면 너무 바빠서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인도의 블록들은커녕 하늘 볼 시간도 없이 스마트폰과 눈이 거의 연결된 상태로 살 수도 있을 겁니다.

다른 예시도 많겠죠. 본인 부모님의 따뜻한 관계를 부러워하는 사람이라면, 배우자를 찾을 때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할지도 모릅니다. 반면 가정에서 불화가 많았다면, 부모님과 정반대인 사람을 찾고 싶을지도 모르죠.

이렇게 인간은 다양한데, 그 다양함 와중에 결국에는 시점의 시작이 ‘나,’ 개개인이라는 점은 다 똑같다고 저는 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다양성의 존재를 안다고 해서 실제로 세상을 다양하게 보는 사람은 엄밀히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양성의 존재를 아는 것조차 그게 나라는 개인에게서 나오는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내가 그런 걸 고려할 상황이 아니거나 고려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는 그런 개념을 장착한 상태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건 이기주의나 개인주의의 차원을 넘는, 훨씬 근본적인 인간의 존재 상태입니다. 내가 보는 파랑이 저 사람이 보는 파랑인지, 정말 그런지, 우리는 절대 몰라요. 평생 몰라요.


3: 인류

00:10:07-00:18:18

[Sound effect.]

이런 성향은 인류 전반에도 적용이 됩니다. 인류는 세상이 다 인류 같은 줄 아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인화를 그렇게나 좋아하는 이유가 이거 같습니다. 인류의 스토리텔링에는, 픽션 논픽션을 떠나서, 의인화된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외계인인데 사실 외모 말고는 인간이랑 다를 바가 없다든지. 귀신인데 사실 인간이랑 원하는 게 다를 바가 없다든지. 그러니까 외계인이나 귀신이 아니라 그냥 외국인인 거예요. 거의 뭐. 이건 이야기에 따라 다른데, 그냥 좀 문화 차이를 잘 모르는 외국인인 것 같은 경우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또는, 인간이 아닌 것들에서 인간의 상을 봅니다. Face pareidolia? 이거 어떻게 읽는 단어인지 모르겠어요. 변상증이라고 한국말로 부른대요. 아무 데서나 사람 얼굴을 알아보는 겁니다. 구름이 사람 얼굴 모양, 대충 눈코입이 있으면, 사람 얼굴 같다고 생각하고. 벽에 있는 콘센트 모양새가 놀란 표정이라고 생각한다든지. 밤에 숲을 걷다가 가지가 뭉쳐 있는 모양새를 보고 사람인 줄 알고 놀란다든지. 이런 거.

심지어 인간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으로부터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개념들을 가져옵니다. 제가 어디서 어렴풋이 읽은 기억이 있어서 출처가 기억이 안 나는데, 검색을 해봤더니 John Wyatt라는 분의 사이트에 “How technology changes the way we understand ourselves”라는 포스트가 있더라고요. 이걸 봤던 건지, 이 비슷한 걸 봤던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여기 내용이 이겁니다. 인간은 언제나 당대 가장 최신 기술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스스로를 이해한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글을 보면, 인간을 “the machine,” 기계에 비교하는 문구들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계 얘기가 나온대요. 그 시대에 기계며 시계가 등장했어서.

그러다 증기 동력의 시대에 가자, 시계 장치에 대한 비유가 점점 사그라들고 수압, 증기에 대한 비유들이 나온대요. 인체를 이제는 튜브와 챔버와 체액의 구성으로 보는 겁니다. 여기서 프로이드가 인간의 심리를 어떻게 봤는지도 영향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증기 장치의 과도한 압력을 안전하게 완화해주지 않으면 그것이 폭발할 수 있듯이, 리비도, 성욕을 해소해주지 않으면 인간의 정신이 아주 그냥 폭망해버린다는 사상이 여기서 나온 게 아니냐. 너무 웃기죠?

이러저러해서 지금, 21세기에는 이제 기계에 지능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간의 뇌를 “정보 처리 기계”로 보는 관점이 등장합니다. 심지어 인간을 로봇으로 보는 관점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로 분리되어 있다는 개념이라든지. 또한 여기에 구체적인 문구들이 나옵니다. “ ‘hard-wired’, ‘suffering from information overload’, ‘programmed for failure’, ‘needing a reboot.’ ” 각각, 하드웨어에 내장된, 정보 과부하에 시달리다, 실패가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리부트가 필요하다. 이런 뜻입니다. 이런 문구들을 인간한테 우리는 쓴단 말이죠.

이게 잘 생각해보면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정말 대단해요. 개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인류 전체 차원에서도 그렇고, 자신의 상을 세상에서 보려 하거나, 그게 안 되겠으면 세상의 상을 자신에게 적용시켜버려서 자신과 세상의 상이 일치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립니다. 이게 심리학적으로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뭐, 어떤 위안을 주는 것 같긴 해요. 뭔가 괴리가 없어서 안심이 되는 건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신기하다.

그리고 신기한 가운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초자연 공포물이라고 해도 조금만 어긋나면 우스워지는 수가 있어요. “초”자연이어야 하잖아요? 자연을 넘어야 한단 말이죠. 스스로를 간간이 자연과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는 인간 역시도 넘어야 합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아닌 건 아니잖아요. 진정으로 “초”자연이려면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면서도 그 안에 들어 있어야 하는 게 너무나 어려운 선인 겁니다. 만약 아예 초월해 버리면 우리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줄도 모를 거거든요. 저 바깥 우주에서 무슨 일 벌어지는지 우리 맨눈으로 못 보잖아요. 저 심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그냥은 모릅니다. 웬만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평소에 생각도 안 합니다.

그런데 눈앞에 초자연이 펼쳐지려면, 그 사람이 평소에 자기 관점에서 인식하던 자연과 확실히 다른 동시에,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협소한 범위 내에서 그 “초”성. 그 초월성이 펼쳐져야 하는 겁니다. 뛰어넘을 초. 초자연.

제 생각에는 히치콕 님의 “새”와 Michael McDowell 님의 책, The Elementals가 그 선을 절묘하게 지킨 것 같아요.


4: 퍼덕퍼덕 – 현실

00:18:18-00:24:18

[Music: Lullaby to a Bird – Yoav Ilan]

먼저 “새” 얘기부터 해보겠습니다. 영어 제목도 그냥 “Birds”고요, 좋은 제목 같아요. 정말 버드 말고는 다른 내용이 거의 없고요, 새로 시작해서 새로 끝나는 영화입니다.

저의 엄마님이 이 영화를 참 무섭다고 예전부터 말했었거든요. 엄마님이 어디 산책을 가거나 하면 새를 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영화가 생각나기도 하고, 새의 눈이 아주 땡그랗지 않습니까? 그래서 싫다는 거예요.

저는 이 영화 “새”를 아주 최근에 봤는데, 엄마님이 새를 좀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것에 약간 동의를 합니다. 새는 정말 똑똑해요.

저희 동네에 좀 괜찮은, 캘리포니아의 일반 도로 중에서 참 드문 괜찮은 긴 인도가 있습니다. 저는 거기서 가끔 산책을 해요. 사람도 거의 없고, 길도 꽤 넓고, 너무 좋은데, 문제는, 아니 뭐, 문제랄 것까지야 없지만, 약간 문제는, 여기에 가끔 까마귀와 청설모가 상당히 많이 모여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청설모와 까마귀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일단 청설모는. 이 아이들은. 어떤 때는 귀엽지만. 귀여움보다도. 좀 멍충미가 있습니다. 예. 애들이 눈치가 없어요. 동네에 가끔 얘네한테 먹이를 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사람만 보면 ‘어? 혹시 나한테 먹을 거 주나?’ 이러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청설모 씨께서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봐가면서 행동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닌 거예요. 이 아이들은 인간의 동작을 읽어내는 능력이 없습니다. 뭐, 인간인 저도 얘네가 정확히 뭘 원하는지, ‘먹이를 원하겠거니’ 하는 것 말고는 별로 없고 말이죠. 그래서 평화롭게 산책을 하다가 청설모 씨가 갑자기 길 옆구리에서 불쑥 튀어나와요. 그러면 화들짝! 놀라고, 그때부터 서로 없는 눈치를 봐 가며 누가 먼저 길을 갈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게 상당히 좀 무서워요. 이 경우에는 그냥 자연이 무서운, 그런 단순한 경우인데, 그래도 무섭습니다. 얘가 갑자기 나한테 뛰어들 건지. 아니면 갑자기 저리로 점프할 건지. 길 안 비키는 경우도 있어요. 아무 무서움도 없는데, 그렇다고 또 어딜 가진 않고. 아니면 무서워서 얼어 버린 건가? 그러면 빙 돌아가야 합니다.

[Music ends.]

반면. 까마귀 씨. 까마귀 씨들은 하나 같이 똑똑합니다. 유튜브에 보면 많죠? 엄청 똑똑한 까마귀들. 동전 주워오면 먹이 나오는 장치를 마당에 설치해 놓으면 까마귀들이 동전을 넣어주고, 그런 영상들이 있어요. 까마귀 씨들은 저희 동네에서도 똑똑하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 인간이랑 마주칠 것 같으면 알아서 속도를 올리거나 줄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저를 쳐다봐요. “너 가냐? 안 가? 그럼 나 먼저 간다.” 얘네는 진짜 눈치가 통하는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 제가 This is the Voice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거기에 나오기를, 새들은 사투리가 있대요. 그래서 종끼리만 울음 소리가 다른 게 아니라, 어느 지역에서 자란 새인가에 따라 액센트가 있다는 겁니다. 엄청나지 않나요? 그렇게 주변 환경을 흡수하는 존재가 새래요. 다른 동물들이 다 이렇진 않은데 말이죠.


5: 퍼덕퍼덕 – “새”

00:24:18-00:29:37

[Bird sound.]

그래서 그런지 정말. 영화 “새”에 나오는 새들도. 너무. 너무너무. 무섭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어요. 사실 영화 자체는 뭐, 별로 내용이 없어요. 새가 그냥 인간을 공격하는 내용이에요. 그리고 저는 이야기가 그런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유를 갖다 붙이기 시작하면, 그게 인간의 이유가 될 테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이유가 없기에 결론도 딱히 없는 영화이지만, 그래도, 무서웠다.

무서운 부분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즉, 영화의 초반부터, 새들의 날개 퍼덕이는 소리가 정말 너어어어무 거슬리고, 너어어어어무 지속적으로 나오면서도, 사이사이에 쉬는 구간이 적당히 길어서, 오히려 더 잘 들립니다. 이게, 소리가 계속 나면 그에 대해 둔해지는데, 소리가 나왔다가 안 나왔다가 하는 패턴이 지속되니까 매번 새로이 거슬리는 거예요. 새소리 때문에 대화가 안 들릴 정도인 씬도 있습니다.

그리고 불필요한 CG가 없어서 더 무섭습니다. 새 CG 같은 게 옛날 거라 좀 구리더라도, 그 구림마저 없었으면 더 무서웠을 겁니다. 막 마법이나, 그런 판타지 류의 슈퍼내추럴이 아니라, 정말 날것의 새가 나와서, 약간 구려야 안 무섭지, 만약 정말 진짜 새가 이러는 것처럼 나왔으면, 저는 정말… 너무 무서웠을 것 같아요.

하나 안타까운 점은, 알프레드 히치콕 님께서 영화 외적으로 여기다가 이유를 붙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게 진짜인지, 그냥 소문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녹취록에 링크를 해두긴 할게요. 버드갭닷컴이라는 이 웹사이트에 따르면, 히치콕 님이 이랬대요.

“영화 “새”에서 새들이 공격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들을 괴롭혀왔기 때문이고, 이제 반격을 하려고 해서다. 모자 같은 걸 만들기 위해 사냥되는 게 지겨워서 현재의 상황을 뒤집기 위해 인간들을 살해한다. 서로 협력함으로써 이들은 인간과 겨룰 수 있다.” 아니 이럴 수가. 이런 인간적인 이유라니.

영화 내에서도 계속해서 약간씩 암시가 나오긴 합니다. 이것이 불쌍한 새들을 새장에 가둬두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요. 이 새들을 사람 세계에 가둔 대가로 이들이 공격하는 거란 점 말이죠. 그런데 그래도 확실한 이유로서 나온 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설명을 안 하는 게 더 무섭긴 했을 것 같아요. 답답하긴 하지만.

그리고 영화 내내 인간들이 새를 무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누군가가 “새가 고의로 공격한 것 같다”라고 하면 안 믿어요. 이거 정말 이상하죠? 아니 그렇다는데, 뭐가 아니래. 공격받아서 부상당한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마치 새한테 고의라는 게 있다는 게 놀랍다는 듯.

그런데 새를 안 본 사람이거나, 좀 멍청한 새만 본 사람만이 새한테 고의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동네 까마귀님들만 해도 엄청 똑똑한데 뭐.

그런데도 영화 속에서 계속해서 나옵니다. 자꾸만 새는 뇌가 너무 작아서 조직적인 공격을 할 수 없다는 둥, 의도를 가질 수가 없다는 둥, 특히 서로 종이 다르면 사이좋게 협조할 리가 없다는 둥.

그러니, 인간이 새를 너무 무시해서 큰코다쳤다는 단순한 메시지가 히치콕 님의 발언이 진짜인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눈에 띄긴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공식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그렇게 밝혀지는 건 없다는 점. 끝까지 뭐, 별로 밝혀지는 게 없어요. 왜냐면 사람이 이걸 너무 이해하고, 이유를 분석할 수 있기 시작하면, 그것은 벌써 초자연이 아니고, 그냥 자연이거나, 과학이거나, 현실이거나, 뭐 그런 것들이 될 테니까요.

저는 처음에 별로 스트레스풀하지 않을 줄 알고 보기 시작하는데, 어우, 너무, 새 날갯짓이 너무 그냥. 이거 보고 다음날 밖에 나갔는데 참새 보고 움찔했어요. 무섭더라고요. 얘네는 충분히 자연에 속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우리가 자연의 법칙이라고 알고 있는 걸 위반하고, “아 더는 빡쳐서 못 살겠다!” 하고 조직적으로 들고 일어날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여겨지더라고요. 의도가 있는 존재들.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는 없는 의도가 있는 존재들.

의도가 없다고 여겼던 것에서 갑자기 의도가 드러날 때, 진정한 적이 될 수는 없었을 것만 같았던 것이 갑자기 적이 될 때, 그때 무섭습니다.


6: 헐떡헐떡

00:29:37-00:35:27

[Sand sound.]

책 얘기를 할게요. The Elementals. 이 책은 음. 재밌습니다. 영화 “새”와 달리, 초자연의 초자연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즉,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설명이 없으면서도, 이야기 자체에는 기승전결이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간단하게, 어떤 가족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휴양지, 좀 외딴곳, 자기들끼리만 있는 곳으로 가서 초자연적인 것을 경험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플롯 자체가 그리 중요하진 않고요. 좀 지루하실 수도 있어요. 이 배경이 정말, 정말 정말 습한 미국의 Alabama 주거든요. 그리고 이 주인공들이 향하는 휴양지가 걸프 코스트에 있는 해변입니다. 그리고 이 해변에 모래가 있어요.

그런데 이 모래가. 모래가 문제입니다. 네.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니고 모래가. 하, 모래가.

여러분, 먼지 무서운 거 아시죠? 먼지가. 먼지는 진짜 아무리 싸워도 이길 수 없는 게 먼지잖아요? 오늘 치워도 내일 또 와. 그런데 얘는 적도 아니야. 아무 의도도 없고, 그냥 세상은 계속 새로운 먼지가 생산되도록 구성됐어. 그냥 디자인이 그래. 계속 치워. 계속 또 생겨. 먼지는 정말. 정말 속 터지는 게 먼지인데.

그 먼지는 아닌 모래가 있습니다. 그러면 모래는 그래도 좀 더 입자도 굵고 하니까, 해변에 모여 있으면 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아닌 겁니다. 자연의 모래가 아니에요. 여기에 뭔가. 령이. 혼령이. 의도가 주입되어 있어서, 이 휴양지에 서 있는 집들을 위협합니다. 모래가 온 사방에 있어요. 그런데 그것에 대한 묘사가 너무너무나 디테일합니다. 온갖 방의 가구들의 사이사이에 차 오른 모래. 털어도 털어도 또 나오는 모래. 막 그냥, 그리고 주변 환경. 그 높은 습도. 그 찌는 듯한 태양. 그 와중에 모래가 턱까지 차오르는 텁텁함. 그 알갱이. 그게 읽으면서 목 안에 들어와서 식도를 긁는 것 같은 공포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어이없죠. 이거 왜 느끼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게 너무 짜릿하고요. 어…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이 혼령이 왜 이러는지 분명하지 않고,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요구를 곧이곧대로 들어주기도 난감합니다. 초자연성을 띤 적이긴 한데, 적한테 항복을 하려고 해도 애매하고, 결국 떠나는 수밖에 없는, 그런 이길 수 없는, 그런 거대한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모래. 저는 제가 기억하는 것 중에 이야기 속에서 무생물인 것에 의도가 붙어서 초자연적 공포가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이게 유일한 것 같습니다.

아, Rubber라는 영화가 있다. 그게 뭐냐면. 그런데 그건 제가 기억하기로 코미디였어요. 뭐냐면, 자동차 타이어 있죠? 그게 갑자기 막 사람들을 죽이고 다닙니다. 떼굴떼굴 굴러다니면서. 근데 그건 말만 들어도 웃기잖아요. 고무 타이어가 도잉도잉 튕겨 다닐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래는 아니다. 모래는 내 귀에도, 코에도, 목에도, 눈에도 들어올 수 있고, 나를 숨 못 쉬게 할 수 있고, 나를 내 안에서부터 뒤집어놓을 수 있습니다.


7: 마무리

00:35:27-00:44:38

[Music: So This Is It – Ty Simon]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놀라셨죠? 급 마무리. 이럴 수가.

네. 공포를 자아내는 무언가에 어떤 의도가 들어 있긴 하되, 그것을 인간의 방식대로 완전하게 해석하지 않는 픽션이 그렇듯, 오늘의 에피소드도 약간 급 마무리입니다. 그냥 이런 공포 장르가 있습니다. 특이한 장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모든 픽션은 다 인간 위주입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변태 같은 사람들이 변태 같은 특정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초자연 공포물을 보면 좋다. 한아임이 가끔은 그중 하나다.

은근히 마음 놓이는 게 있습니다. 자연은 왠지 이해해야 할 것 같고 설명되어야 할 것 같은데, 설명 안 되는 게 분명하니까 마음이 놓이는 면. 일반 판타지물에서는 인간 캐릭터들이 등장해서 자신들의 의도를 투사해 놓고 가지만, 초자연, 진짜 자연을 초월한 무언가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에서는, 그조차도 불가능하니까, 뭐랄까, 포기의 아름다움? 그런 게 있습니다.

그리고 급마무리를 하는 대신에 잠깐 소식을 전하자면요, 한아임이 오막 친구와 함께 하는 고막사람 뉴스레터가 있지 않습니까? 음악 뉴스레터. 그것이 본 파트는 뉴스레터인데 인스타그램 계정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며칠 전에 갑자기 정지가 된 겁니다. 뭐 얘네는 설명도 안 해요, 이 메타 망할 놈들. 그냥 너가 수상하대. 그냥 이쯤 되면 제 존재 자체가 수상하다는 건데, 이혜원 기획자랑 하는 모던 그로테스크 타임스 계정도 계속 수상하다고 신원을 확인하라는 둥 정지하겠다는 둥 귀찮게 하는 걸 보면, 공통점이 있죠. 미국에 사는 제가 한국에 사는 오막이나 이혜원 기획자와 공동으로 로그인하고 쓰는 계정이라는 점.

글로벌 기업 메타, 참말로 대단해요. 맨날 물어봐, 이 로그인이 너 맞냬. 나 맞아. 맨날 기기를 확인할 거면 뭣하러 물어보는지 모르겠어요. 물어봐서 내가 대답하면 어쩔 건데, 또 까먹을 거면서. 당최 이해를 못 하겠고, 이해를 하려는 제가 멍청한 것 같아요. 거의 메타는 이쯤 되면, 얘가 초자연이에요. 얘는 자연의 것이 아니고, 설명을 할 수가 없고, 메타에서 일하는 개개인들에게 없는 자기만의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인간 따위인 저는 자동 로봇 님들의 깊은 뜻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정지가 됐었거든요? 그런데 또 며칠 후에 정지가 풀린 거예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진짜 왜 그럴까요?

그런데 아무튼. 한아임은 원래도 메타 같은 데 안 믿지 않습니까? 저는 어디 큰 중앙 한 군데에다가 뭘 맡기는 걸 정말 싫어합니다. 이딴 기업에다가 오막이랑 제가 만든 그 무엇도 맡길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언제나와 같이 백업을 계속할 거고요. 한아임이랑 영어 필명이 공동으로 쓰는 웹사이트 다이제스트에도 인스타 게시물이랑 동일한 게 올라갈 거고요. 글도 백업할 거고요. 뉴스레터 파트. 오막이와 제가 컨트롤하는 파트는 평상시와 차이 없이 그대로 갑니다. 뉴스레터는 좋은 게, 저희가 쓰는 툴이 스티비거든요? 그런데 뉴스레터는 원래, 여러분이 구독을 해주시면 여러분의 이메일 주소는 스티비 것이 아니라 저희가 가져갈 수 있는 겁니다. 오막이랑 제가. 그래서 다른 어떤 뉴스레터 툴로 옮겨가도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뉴스레터를 하는 겁니다.

우리 글 이제 많이 모였어요, 여러분. 음악에 대한 얘기,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한아임은 또, 음악 얘기만 할 리가 없잖아요. 잡얘기. 책얘기. 사는 얘기. 이런 거 들어 있습니다. 구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서 쫓겨난 한아임을 이메일로 위로해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역시 우리 특이 취향자들은 마음이 따뜻합니다. 캬. 정말. 우리는 너무 멋져. 너무 최고고. 다른 모든 것들은 그냥 도구고. 메타든. 메타의 인스타그램이든. 뉴스레터든.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들이지만, 특이 취향자들. 너무 멋져요.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Music 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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