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4] 계획죽음: 존엄한 끝

[Ep. 34] 계획죽음: 존엄한 끝 square

1: 오프닝

00:00:00-00:06:30

[Music: Eternity Clock – Shahead Mostafafar]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 잠시 현실 세계로 돌아갑니다. 이제 정말 곧 핼로윈이지 않습니까? 이를 썩게 하는 데다가 중독성이 있고, 역대 연구 결과를 대충만 뜯어봐도 꽤 위험한 설탕이라는 물질을 잔뜩 넣은 사탕을 애들더러 공짜로 받아오라고 하는, 그날 밤. 미국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핼로윈 밤이면 각종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인지, 영문을 모르게도, 아직도 어린이들이 가면을 쓰고 밤길을 나돌아다니는 풍습이 남아 있는 그날 밤. 그날 밤이 옵니다.

네. 핼로윈은 그냥 전통적으로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날일뿐만 아니라, 안타깝게도, 진짜로다가 죽음과 관련이 있는 날이고요. 저는 원래도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지라, 오늘 현실 세계의 죽음에 대해 얘기할 겁니다.

이번 시즌 테마가 공포잖아요. 그런데 죽음 그 자체가 오늘의 공포 주제인 건 아닙니다. 저는 죽음은 무섭지 않습니다. 죽음은 어떤 측면에서는 릴리즈, 해방일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어려지고 싶은 마음도 없고. 다시 태어난다? 아니. 그냥 죽을래.

제가 무서워하는 건 다른 겁니다. 죽음 그 자체가 아니고, 죽음에 얽힌 슬픈 것들과, 솔직히 말하자면 귀찮은 것들이 무섭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이 죽기 싫은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남의 죽음을 막는 게 착하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무섭습니다.

네. 사는 게 좋은 거라고 퉁치는 자들.

존재하면 그만이라고 착각하는 자들.

저한테 극도의 공포입니다. 이해가 잘 안 가실 분들이 계실 수도 있는데, 이런 겁니다. 여러분이 고문당하는데 누가 여러분을 살리려고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미칠 것 같겠죠? 그런 상황을 말하는 겁니다. 죽고 싶고, 죽는 게 낫다고 내가 말하는데, 다른 누가 와서 굉장히 날 도와주는 척하며, 아니라고, 살아야 한다고 우기는 상황.

이 공포와 관련된 레퍼런스로 “How to Die in Oregon”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해 얘기할 겁니다. 직역하자면, “오레곤에서 죽는 방법”입니다. 안락사, 존엄사에 대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제가 링크를 걸게요. 저는 이걸 무료로 봤습니다. 구글에서 검색해 보니 나오더라고요. 광고 몇 개를 보면 됐는데, 뭐 많이 귀찮을 정도로 많은 횟수는 아니었습니다. 아마 거주 국가별로 이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라이센스가 갈릴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이 특정 링크는 사용이 불가할 수도 있지만, 검색을 하신다면 비슷한 사이트를 통해 시청하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큐멘터리인지라 오늘은 스포일러라고 할 건 없고요. 이 다큐 자체가 공포 다큐인 건 아니에요. 혹시 이 다큐를 직접 시청하실 거면, 매우 슬픈 부분들이 나오기 때문에, 휴지를 한 박스 준비하고 시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오늘의 수다, 시작할게요.

[Music ends.]


2: 로저

00:06:30-00:10:11

처음에 영화가 시작하면 Roger라는 남자가 나옵니다. 오늘은 그가 존엄사를 실행에 옮기기로 한 당일입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편해 보이는 방에 모여 있습니다. 흰 벽과 미끈한 바닥으로 가득한 병원의 소독된 병실이 아니고, 창밖에 자연이 보이고, 내부 가구들은 나무 색이기도 한 따스한 방입니다. 로저가 덮는 이불도 편안해 보여요.

이런 환경에서, 존엄사 과정을 돕는 사람이 법에 따라, 로저에게 확인 질문을 합니다. 당신이 곧 먹을 이 약이 당신에게 무슨 일을 일으킬지 아느냐고. 그러자 로저가 이렇게 말합니다.

“It will kill me and make me happy.”

그것은 나를 죽일 것이고,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그다음에 로저가 마지막 말을 남겨요. 유언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그가 담백하게 말합니다. 와줘서 고맙다고. 여기까지는 제가 예상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다음에 한 말이 너무 기억에 남습니다. 로저가 오레곤주의 투표권자들의 지혜에 감사합니다. 네. 여기, 로저가 죽는 장소는 오레곤주. 존엄사가 합법인 미국의 한 주예요. 이 주에 살지 않았으면 로저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대신, 고통의 극한까지 전부 다 경험하고 생을 마감했을 겁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게 해준 오레곤주의 투표권자들의 지혜에 이 사람은 감사를 하고, 자신을 죽일 약을 마십니다.

그러고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곁에 둔 상태에서 죽어갑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자기가 겪는 느낌을 짧게 설명해요. 이 약이 사람을 죽음으로 데려가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5분이 채 안 된 것 같은데, 로저가 말합니다.

“It was easy, folks, it was easy.”

아주 직역을 하자면 이걸 겁니다. “여러분, 이건 쉬웠어요. 쉬웠다고요.” 그런데 이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저는 “편안했어요”라는 의미도 추가로 강조하고 싶습니다. Easy chair라는 단어가 있는데, 쉬운 의자가 아니라 안락의자라는 뜻이거든요. 로저가 말하려는 건 어느 정도 둘 다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쉽고, 편안했다. 즉, 나에게 더는 짐을 지우지 않았고, 나는 이제 자유롭다.


3: 태어난 대가로 생기는 일

00:10:11-00:17:26

[Sound effect.]

네. 여러분? 죽는 것도 참 일입니다.

죽는 데에는, 어떤 방식으로 죽든, 누군가에게는 비용이 듭니다. 일단 금전적 비용이 있습니다. 자연사를 해도 돈이 들어요. 장례식 비용이 들고, 장례를 안 치러도 묻든 화장을 하든, 뭔가를 해야 해요. 그전에, 누가 와서 시체를 가져가야 합니다.

시간적 비용도 듭니다. 관료제도 내에서의 각종 절차를 밟아야 해요. 우리 집 마당에 시체를 묻고 싶다고 해서 그냥 될 일이 아니에요. 그게 유언이라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자살의 경우에도 비용이 듭니다. 사회에 실질적으로 비용이 들어요.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면 수질이 오염되고, 방에서 목매달아 죽으면 누가 와서 시체를 내려줘야 주변 집들에 병이 번지거나 악취가 나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죽는 게 너무 일이라서,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하나. 진짜 무슨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한다고 할 때 그 밑에 서서 그것이 저를 불살라버리게끔 해야 하나. 제가 죽는 게 안 무서운 이유 중 하나가 이거예요. 죽는 게 현실적인 차원에서 진짜 너무 귀찮아가지고, 생각만 해도 귀찮아서, 처리해야 할 일 같은 때가 있어서, 무서울 게 아니라 이건, 하, 누구한테 이 뒷수습 과정을 넘기고 죽으려면 돈이나 많이 벌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남 귀찮게 하기도 싫잖아요? 그리고 귀찮음을 떠나서, 내가 죽어서 남한테 의존하는 것도 싫어요. 죽음이란 태어났으면 할 수밖에 없는 일인 겁니다. 숙제고. 마음대로 미룰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고. 하. 태어나서 살면서도 할 일이 많은데, 죽는 순간까지도 그게 일이에요.

그래서 뭐, 별달리 고통이 없다면 한아임은 아마 그냥 계속 살 겁니다. 죽음을 많이 생각한다고 해서 죽고 싶은 게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죽음을 좀 생각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거라 생각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고 싶은 사람들은 정말 정말 죽고 싶어서 그런 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웬만하면 죽는 게 너무 아득해서 그리 쉬이 죽지 않습니다.

아무튼. 아마도 별일 없으면 자살은 안 할 한아임인데, 만약에 별일이 있다면 어떡할지. 그 생각도 합니다. 만약 제게 거대한 고통이 있다면, 소행성 충돌의 스케줄이 제 고통이 극한에 다다르는 시점과 맞길 바라야 하는 게 아닌가. 이걸로 이야기를 쓸까도 생각해 봤어요. 소행성 충돌 헌팅을 갈 파티원을 모집해서, 고속버스 대절해서 소행성 충돌 예정지에 잠입하려다가 죽는 얘기. 왜냐하면, 아무래도 그 장소를 관리하는 그… 국가 기관에서는 웬 사람들이 소행성에 죽으러 간다고 하면 막으려고 할 거잖아요? 막 군대도 동원할 수 있어요. 엄청난 스릴과 서스펜스 얘기가 되겠죠. 그러니 고속버스를 타고 다 같이 몰려가서 누구라도 통과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죽게 서로 도와주는 얘기.

소행성이 자주 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또, 예측 장소에서 빗나갈 수도 있으니까, 한 백 명이서 같이 가서 죽고 싶은 누구라도 깨끗하게 불살라져서 죽을 수 있으면 금전적 비용도 절약하고, 거기까지 가는 여행도 재밌지 않을까.

백 명은 될 겁니다. 고속버스에 탈 사람들이. 왜냐면, 이렇게 죽고 싶은 사람들이면 아마 신체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의사며 간호사들을 구해야 고속버스를 타고 거기까지 갈 수 있을 거예요. 진통제도 어마무시하게 필요할 거고요. 고속버스를 운전해줄 사람도 고용해야겠죠. 가족들이 같이 오고 싶을 수도 있고. 소행성 부분 말고 그 전 부분까지 같이 여행하려고. 그래서 실제로 죽고 싶은 사람이 열 명이라면 동행자가 90명은 될 것 같아요.

음. 네. 이상, speculative fiction을 쓰는 작가의 이상적인 죽음에 관한 단상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사변 소설이라 부르던데 너무 진지하게 느껴져서 사변 소설이라고 부르고 싶지가 않아요. Speculative fiction도 책 읽는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기도 하더라고요. 그런데 충분히 유의미한 단어이긴 합니다. 왜냐하면 이게 판타지는 아니잖아요. 해리 포터 류도 아니고, 반지의 제왕 류도 아니고. 그렇다고 찐 공상 과학도 아니죠. 우주선 안 나오고 외계인이 안 나오니까.

그러나 미래적 요소나 판타지적 요소가 적당히 들어가되, 현실 세계와 맞물린 시공간이 배경이라면, 그게 사변 소설, speculative fiction에 속한다고 봅니다.


4: 코디

00:17:26-00:24:44

[Music: Inevitable Death – When Mountains Move]

아무튼, 다시 How to Die in Oregon로 돌아갈게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나오는 인물은 코디라는 여자분입니다. 이분은 꽤 젊으세요. 참 아름다우신데, 고칠 가망이 없는 병에 걸리셨습니다. 그래서 존엄사를 결심하신 케이스예요.

이분이 처음부터 단박에 그런 결정을 한 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병이 낫기 위해 수술도 하고, 그것 때문에 온몸의 통제를 잃기도 했었대요. 그리고 회복까지 했었고요. 그런데 병이 낫지 않은 겁니다. 완전히 낫질 않았고, 나을 가망도 없다는 말을 들은 겁니다.

이 부분에서 병원이라는 지옥에 대해 나옵니다. 병원은 살고 싶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죽고 싶은 사람을 살리는 고문을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살린다는 이유로 온갖 검사에 수술이 반복됩니다. 사람 내장을 들춰냈다가 다시 봉합했다가 또 들춰내고, 몸을 못 움직이게 하기도 하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기도 합니다. 머리카락은 빠지고, 자기 몸의 통제를 잃어서 배변을 홀로 해결하지 못하게 되고, 몸에 있는 각종 구멍에서 체액이 줄줄 나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 통제를 상실하는 과정들은 인간이 삶의 의지를 잃게 만듭니다. 제가 알기로 인류의 그 어떤 국가, 어떤 사회에서도 성인인 사람에게 이런 상태가 마냥 허용되는 집단은 없습니다. 아프다고 해도 그래요. 성인과 유아를 구분 짓는 주요 기준 중 하나가 스스로 배변을 할 수 있느냐. 자신의 체액을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느냐. 여기저기 자기 것을 흘리고 다니지 않느냐. 이런 것들입니다. 땀만 좀 과하게 나도 흘겨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코디를 비롯해 온몸의 통제를 잃을 예정인 사람들은 그 예정된 미래가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통증과 별개로, 통제를 잃는다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인 겁니다. 내 몸을 내가 관리하는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칭찬받는 행위입니다. 아기들이 스스로 옷 입으면 잘한다고 박수 쳐 주고. 스스로 걸을 줄 알면 대견해하고. 먹을 걸 흘리지 않으면 이제 다 컸다고 말해주는 게 세상인데, 그 모든 것을 다 잃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도 모자라서, ‘넌 살아야 해. 사는 게 이기는 거야. 존재는 무조건 좋아. 살아보면 다 나아질 거야.’ 라고 누군가가 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Music ends.]

살고 싶겠습니까? 저는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무섭습니다. 어떤 사상에서 저런 무책임한 말을 할 수 있는지 상상이 안 돼요. 뭘 보태줄 거냐고 묻고 싶기도 하고요. 하다못해 병원비를 대줄 건지. 아니면 뭐, 시간을 내줄 건가? 봉사활동을 해줄 건가? 뭘 해줄 거죠?

삶의 자발적 포기는 코디만큼 아픈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통제권입니다. 현재 기술상 어차피 언젠가는 멈춰야 할 삶을 스스로 마감할 마지막 권리라고요.

코디더러 삶을 포기하는 건 패배자나 하는 일이니까 나쁘다고 하거나, 삶을 포기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지옥에 갈 거라고 하거나, 그런 걸 뉘앙스라도 풍기는 건 비인간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기가 왜 존엄사를 택했는지에 대해 코디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This will be tidy.”

이편이 깔끔할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코디가 고통을 끝내고 싶은 건 맞아요. 몸의 통제를 잃어서 좀 창피한 것도 있어요, 맞습니다. 그런데 아주 큰 이유가 이것인 거예요. 깔끔할 것이다. 남의 이목 때문에 죽으려는 것도 아니고, 고통을 감내할 만큼 강인하지 못해서도 아니라, 자신의 삶이 조만간 완전히 통제 불가능해지고, 지저분, 너저분, 복잡, 혼돈일 게 너무 뻔히 보이니까 이 길을 택하는 겁니다.

참고로 이 사상. ‘고통을 감내할 만큼 강인하지 못하다,’ 이 사상. 제가 여러 번 말했죠. 이거 아주 위험한 사상이라고. 제가 정말 싫어하는 사상입니다. 완전. 너나 아파라 하와이예요.

저는 웬만하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자는 주의입니다. 이런 식으로 타인의 고통이 감내할 만한 것인지 아닌지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이게 공포예요. 진정한 현실 공포. 차라리 이걸 그냥 자기 이익을 내세우면서 주장하면 괜찮아요. 그런데 안 그런 경우가 많아요. 자기 착한 척하는 거예요. 긍정병 걸린 겁니다. 한아임은 현대에서 사용되는 긍정이라는 말의 수많은 틀린 뜻들을 믿지 않습니다. 타인에게 아프라고 하는 건 긍정이 아니에요.

살고 싶은데 죽이는 것만큼이나, 죽고 싶은데 살리는 것도 폭력입니다.


5: 코디의 가족

00:24:44-00:29:56

[Music: All Those Death Tunes – Skygaze]

그런 측면에서 코디와 코디의 남편은 정말 아름다운 커플입니다. 네. 코디 남편이 나와요. 코디가 곧 죽을 예정이기 때문에 둘이 특히나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 같습니다. 코디의 딸과 아들도 나오고요. 가족이 서로 시간을 많이 보냅니다.

그런데 딸과 아들은 선택한 관계가 아니잖아요. 자식도 부모를 선택하지 않고 부모도 자식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 시각에서 볼 때 코디의 남편의 역할이 매우 컸을 것 같습니다.

삶의 끝에서, 코디는 너무 힘들고, 너무 고통이 크고, 몸에 말 그대로 구멍이 뚫리고 내장이 부풀어 오른 상태입니다. 여기 무슨 설명이 나왔더라, 임신을 안 한 상태에서 임신 9개월로 1주일 만에 간 걸로 봐도 될 정도래요. 그렇게나 갑작스럽게 배가 부풀어 올랐다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 정확히 기억이 안 나요. 임신 7개월인지 8개월인지 9개월인지가 확실하지 않은데, 그렇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코디의 내장이 1주일 만에 급속도로 부풀어올라서 극심한 고통을 겪는 모습이 나옵니다.

상상을 해봅시다. 내가 이 상태라서 내가 죽고 싶다고 했을 때, 날더러 참고 살라고 하지 않고 나 죽는 걸 도와주는 사람은 나를 대체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인가. 저는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정말 든든할 것 같아요. 이런 사람이 있으니 코디도 정말 고통이 웬만했으면 살려고 했겠죠. 이 사람 두고 죽고 싶다고 하는 코디는 얼마나 죽기가 싫은데도 죽고 싶은 거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이런 남편 두고 죽는 게 좋아서 죽겠어요? 살 수 있을 것 같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죠.

저는 정말… 아, 코디의 남편이 정말 강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요. 코디도 강인하고. 코디 남편과 코디의 유대관계는 정말… 매우 깊은 것 같아요.

배우자가. 죽고 싶다고 하면 믿어야지. 코디가 평소에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던 이유도 있겠죠. 그래서 남편이 코디 말을 믿어줬겠죠.

네. 너무 아름다운 커플이고, 너무 슬픕니다. 휴지가 필히 필요해요.

이런 사람 만나면 정말 좋겠다. 제가 죽고 싶다고 할 때 살라고 하지 말고 죽여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게 불법이라면, 그래도 어떻게든 죽여줄 사람이 필요해요. 만약 제가 죽고 싶다고 했는데 살라고 하면 헤어질 것 같아요. 뭐, 어차피 죽을 거니까 이래 헤어지나 저래 헤어지나 상관은 없겠지만. 제가 죽고 싶다고 했는데 살라고 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저를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Music ends.]

사실 그때까지 같이 있어서도 안 됐던 사람이고. 죽을병 걸린 기회에 잘 헤어졌다고 생각해야 할지. 혼자 죽는 게 낫지.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해 못 하는 사람, 대화 못 하는 사람, 같이 있어 봤자 같이 있지도 않은 사람이랑 있는 것보다 그냥 혼자 있는 게 낫습니다. 그렇습니다.


6: 끝의 불평등

00:29:56-00:39:10

이렇게 인간으로 태어나진 자들의 마지막 통제권을 위해 저는 존엄사가 합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큰 문제 중 하나는 이겁니다. 자진으로 죽고 싶은 게 아닌데, 누가 자진처럼 조작해서 죽일 위험.

이 위험은 저도 모르는 바 아닙니다. 무시해선 안 되는 위험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존엄사가 세계적으로 합법화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만약 존엄사의 가격이 너무 저렴해진다면, 병든 친척을 돌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이 사람이 존엄사를 원한다’고 꾸며서 죽일 수도 있잖아요. 그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게 더 싸니까.

그런데 그래서 일단 첫째로, 이런 방법이 있습니다. 아까 다큐 첫 부분에서 등장했던 로저 아저씨 있잖아요. 그분에게 존엄사 과정을 돕는 분이 확인 질문을 했었죠? ‘당신이 곧 먹을 이 약이 당신에게 무슨 일을 일으킬지 아느냐고.’ 알고 먹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거죠.

그리고 존엄사를 진행할 때 있는 또 다른 규칙이 뭐냐면, 그 약을 다른 누가 먹여선 안 되고, 자기가 직접 마셔야 한대요.

그런데 그래서 아이러니가 뭐냐면, 너무 힘이 없고 너무 사경을 헤매고 있으면 존엄사를 진행하지 못합니다. 아직 적당히 정신과 힘이 남아 있을 때만 스스로 삶을 마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참. 난감해요. 아니. 적당히 아픈 게 뭔가.

코디도 이 난감한 선에 대한 말을 합니다. 배가 급속도로 부풀어오기 전만 해도 코디는 참 놀랍게도 건강해 보이거든요. 코디가 농담도 해요. 사람들이 자기더러 ‘너 좋아 보인다,’ 이렇게 말한다고. 그러면 자기가 이런대요. ‘Cancer diet 해서 그래.’ 암 다이어트 해가지고. 얼굴이 핼쑥해져서. 코디가 원래도 아름다웠을 것 같은데 아마도 말라지면서 사람들이 칭찬을 해줬나 봐요. 그걸 유머로 승화시킬 정신도 있으니, 코디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죠.

이렇게 마지막 나날에 배가 급속도로 부풀어 오르기 전만 해도 코디는 멀쩡한 듯 보이는 때가 잠시 있었거든요. 통증도 좀 덜 느껴지고. 그러니까 코디 입장에서 난감한 거죠. 나는 정신과 힘이 완전히 없을 정도로 아프면 존엄사를 진행을 못 하는데, 그렇다고 정신과 힘이 너무 멀쩡한 지금 죽으면 너무… 그게 코디가 원하는 건 아니니까. 조금이라도 이렇게 멀쩡한 상태에서, 고통을 좀 관리할 수 있는 상태에서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코디는 함께하고 싶으니까.

이러한 점이 나오는데. 저는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누군가가 존엄사를 이용해 타인을 살해할 위험이 있기에 자발적으로 약을 먹어야 하며, 약이 자신의 몸에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 확인하는 절차가 있는 건 좋은 생각 같은데, 갑자기 상태가 악화하는 사람은 어떻게 할지.

그런데 일단은, 기준을 하나 더 설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존엄사를 진행하려는 사람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꽤 객관적으로 기준점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코디가 먹는 진통제의 양이 어마어마해졌다고 말하는 의사의 인터뷰 장면이 이 영화에 나오거든요. 코디가 상당히 오래 아프긴 했지만 뭐, 예전에는 1의 진통제 양을 먹었다면, 마지막 나날에는 갑자기 10, 이렇게 먹어야 했던 거예요. 고통이 급속도로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거죠. 즉, 진통제의 양이 기준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존엄사 신청 과정은 고통이 1일 때 시작하더라도, 존엄사의 실제 실행은 8 이상이어야 할 수 있다든지, 이런 기준을 설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또한 그 약의 양을 의사의 감독하에 결정하니까, 가족이나 친구들 이외에 제삼자가 계속해서 존엄사를 겪을 사람의 의사와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거죠. 간호사도 있을 거고. 존엄사 과정을 서포트해주는 여러 자원 봉사자들도 나옵니다. 이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서 모니터링을 한다면 경제적 이득을 노리고, 순전히 아픈 사람이 귀찮아서 존엄사를 하게끔 조장하려는 케이스를 단속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런데. 제가 정말 슬프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이거예요. 존엄사 약의 종류가 다른데, 비싼 게 있고 싼 게 있어요. 이게 진짜. 이게 너무 슬픈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특정 경제 계층에 어떻게든 속하게 되잖아요. 부모가 돈이 많을 수도 있고 돈이 없을 수도 있고. 부모가 아예 없을 수도 있고.

그런데 죽을 때도. 내가 죽음을 선택하는데도. 약이 비싸서 내가 먹고 싶은 약 먹고 죽는 게 아니라 더 싼 약을 먹고 죽어야 하는 경우가… 있을 거예요.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라에서 이걸 보조를 해줘야 하나. 얼마큼 보조해줘야 하나. 그러면 이 죽으려는 사람은 마지막 나날까지 보조 받으려고 서류 작업 하다가 죽어야 하나. 서류 작업 할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이면 어떡하나.

그런데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어도. 존엄사를 그냥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는, 더 슬픈 게 뭔지 아십니까?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 안 하면 안 할수록, 실제로 돈 없고 시간 없고 형편 안 되는 사람들은 마지막을 평온하게 마감하는 게 아니라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게 될 겁니다. 부자들만 존엄하게 죽게 될 거고. 부자 아닌 사람은 울부짖으며, 비명을 지르며, 눈물도 못 흘릴 만큼 아프며, 거의 기절 상태로 그냥 혼절해서 죽게 된다고요. 이게 무슨 삶입니까? 이게 긍정입니까? 이게 존재의 선이에요?

현실적인 문제들은 해결해야 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해결을 왜 못 해. 이렇게 필요한 건데. 태어나는 것도 마음대로 못 했는데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는 건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겁니다. 해결을 해야 해요.


7: 마무리

00:39:10-00:47:19

[Music: So This Is It – Ty Simon]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마무리 썰로. 제가 이걸 온라인에서 링크로 봤다고 했잖아요. 구글에 검색하면 나와요. 유료 옵션도 있고, 광고 보면 무료로 볼 수 있는 옵션도 있던데. 제가 본 그 옵션은 무료고, 광고가 있었단 말이죠.

제가 이 영화를 밤에 봤습니다. 그런데 광고가. 광고가 세 개 연달아 나오더라고요. 짧은 광고들이었어서 길이가 너무하거나, 한 건 아니었는데. 광고 1이 세제 광고인 거예요. 그래서 음. 세제 광고, 이러고 딴짓하고 있었어요. 몇 초 안에 광고 1이 끝나더라고요.

그러고 광고 2가 나오는데, 또 세제 광고인 거예요. 그때부터 보기 시작했어요. 뭐지? 하고.

또 광고 2가 몇 초 안에 끝나더라고요. 그런데 광고 3이 나오는데 또 세제 광고인 거예요. 각각 다른 세 개의 세제 브랜드의 광고가 연달아 나오는 거예요.

이게 뭔지. 이게… 왜지?

밤에 보는 사람들은 세제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건지? 아니면 알고리듬님께서 저를 세제가 필요한 자라고 생각한 건지? 약간 섬뜩하더라고요. 빨래를 해야 되는데 안 했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뭐, 오레곤에서 죽는 방법 보는 사람들은 세제가 필요하다고 여기나?

아무튼, 그랬습니다. 그냥 그랬다고요.

네. “오레곤에서 죽는 방법.” 유머가 많아요. 은근히 재밌고, 웃깁니다. 이렇게 통증이 심한데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상상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우아한 사람들입니다. 신기해요.

여러분?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심지어 물건도 존재하고 싶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누군가들이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존재하게 된 자에게 그냥 죽으라 할 순 없습니다. 일단 존재하게 되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관성이 생기게 되기도 하거니와, 그런 관성이 없더라도 남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만약 그 존재가 그 관성을 반할 정도로 죽고 싶어 한다면? 그게 의미하는 바가 뭘까?

돌고래도 자살을 한다잖아요? 지능이 일정 수준 이상 되는 동물만 자살을 고려합니다. 왜냐하면 기준이 있기 때문이에요. ‘나의 삶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기준. 기대. 희망. 희망이 있어서 죽는 겁니다. 희망이 없어서 죽는 게 아니라, 삶이라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이 있어서 그 삶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 삶을 스스로 없애는 거라고요.

그 기준이 과대망상이었는지, 소박한 꿈이었는지를 판단하는 건 외부인이 할 일이 아닙니다.

죽을 때만이라도 아프지 않고 죽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 누구나. 그리고, 덧붙이자면, 각자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무조건 살고 싶은 분들은 어떻게든 끝까지 고통을 느끼며 살기를, 원하는 대로 빌어드리겠습니다. 그러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여러분에게는 최대한 고통 없고, 존엄하고, 우아한 죽음이 삶의 끝에 기다리고 있길 바랍니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Music 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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