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5] 섭취조작: 음식 갖고 장난 좀 그만 쳐라

[Ep. 35] 섭취조작: 음식 갖고 장난 좀 그만 쳐라 square

1: 오프닝

00:00:00-00:03:43

[Music: Eternity Clock – Shahead Mostafafar]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은 배가 고픈 얘기로 시작해서 밥맛을 없애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늦은 밤에 들으셔도 야식의 위험이 없을 것 같아요. 그 대신에 끝까지 들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중간에 멈추면 군침만 돌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한아임이 정말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 만두! 만두에 대해 얘기할 거고요, 오늘의 레퍼런스로는 다양한 매체로 나와 있는 “스위니 토드” 이야기와 홍콩 영화 “만두”입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대충 감이 오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왜 맛있는 얘기를 하다가 밥맛이 뚝 떨어지게 되는지. 그리고 한아임이 엄청나게 잔인한 얘기를 할 거거든요?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는 궁극의 핵폐기물성 인간상 중 하나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쌍욕은 안 할 거고요, 어떻게 죽이면 제일 좋을까에 대해 조곤조곤 얘기할 겁니다. 잔인한 거 싫어하시는 분들은 듣지 마세요.

이런 잔인한 부분, 그리고 또, 하, 역시 공포 영화는 섹스를 빼놓을 수가 없는지라, 섹스 얘기가 나와서, 그냥 팟캐스트 전체의 안전을 위하여, explicit 표시 걸어놨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미안해요. 그런데 어린이 여러분은 사실 내 말을 들으면 안 돼요. 더 크면 돌아오세요. 아셨죠?

그럼 오늘의 수다, 시작할게요.

[Music ends.]


2: 만두사랑

00:03:43-00:07:15

네. 여러분. 한아임은 만두를 좋아합니다. 군만두, 찐만두, 만두국, 다 좋아하고요. 한국 스타일 만두, 일본 스타일 만두, 샤롱바오, 다 좋아하고요. 심지어 만두의 연장선상에 있는 뇨끼류도 좋아합니다. 일단 파스타를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그… 뇨끼가 아무리 커도 몇 번만 자르면 한 입에 넣을 수 있는 게 너무 좋아요.

네. 왜냐하면 저는 그냥 일품요리를 좋아하거든요. 그냥 하나 시키면 그거를 먹을 수 있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만두는 만두국을 시키면 숟가락 하나로 냠냠 먹으면 되잖아요. 뇨끼도 뇨끼 하나를 시키면, 뭐, 잘라 먹더라도, 그걸 먹는 동안 다른 메뉴를 어떻게 먹어야 하나 고민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만두류 음식들이 단순한가? 절대 아니죠. 먹는 제가 편할 뿐, 만드는 입장에서는 손이 엄청나게 가는 음식입니다. 그 만두속을 만들기 위해서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고, 그걸 뭔가… 순서대로 조리해야 하잖아요. 그냥 모든 재료를 동시에 넣고 마구 휘젓는 것으로 되는 게 아니라, 몇몇 재료만 따로 볶아서 넣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물기를 짜내야 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습니다.

하. 군침이 도네요. 요즘에는 비비고며 그런 브랜드들에서 냉동만두가 너무 잘 나오더라고요. 언젠가부터 갑자기 만두 춘추전국시대처럼 돼가지고, 무슨 냉동만두 피가 그렇게 맛있지? 이래가지고, 만두가 엄청나게 손이 가는 음식인데도 불구하고 싱싱한 만두를 더 비싸게 팔지 못하는 것 같아요. 공장에서 나오는 냉동만두가 너무 맛있게 나오니까, 싱싱한 만두가 아무리 맛있어도 막상 가격을 올리지 못하는 거죠. 저는 모든 종류의 만두를 잘 먹습니다. 싱싱한 만두도 좋아하고 냉동 만두도 좋아하고. 아… 만두는 정말.

만두의 매력은 한마디로, 한입에 그 모든 재료를 왕 입에 넣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3: 만두공포

00:07:15-00:15:36

[Sound effect.]

그런데 왜 공포 주제 시즌에 갑자기 맛나는 만두 얘기를 하느냐. 왜냐하면, 만두의 바로 그 특징, 한입에 왕 넣을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무서운 점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만두에 뭘 넣었는지, 정확히 재료가 뭔지, 먹는 사람 입장에서는 알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네. 여러분? 음식 갖고 치는 장난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 이건 현대에만 발생하는 현상은 아닌 것 같아요. 이따 스위니 토드 얘기할 때도 언급하겠지만, ‘내가 직접 조리하지 않는 한, 내가 먹는 음식이 정확히 뭔지 사실은 알 수 없다’는 공포는 인류에 매우 오래도록 있었던 것 같아요. 21세기에 들어서 뉴스를 통해 곳곳의 식당들의 운영 방식이 폭로됨에 따라 생긴 새로운 공포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공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왜, 어린이들이 처음 보는 음식을 보면 안 먹겠다고 하잖아요. 제가 지금 출처를 기억을 못 하겠는데, 이게 진화론적으로 설명이 된다는 이론을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근데 제가 출처를 몰라도 뭐, 논리적으로 말이 되죠.

일반적으로 동물은 초식동물이거나 육식동물인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아니,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인가? 많은 동물들이 제한된 지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다가 죽습니다. 얘네는 ‘모르는 음식’이라는 걸 볼 기회도 별로 없고, 본다 하더라도 그걸 그냥 무시하고 원래 먹던 음식을 먹는단 말이죠. 왜냐하면, 동물도 아니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모르는 음식을 먹다가 혼쭐날 수도 있다는 걸 아니까. 동물들이 숲에 있는 아무 버섯이나 먹었다가 떼로 죽는 일이 흔하진 않잖아요. 웬만하면 얘네는 아는 것만 먹는다는 뜻일 거란 말이죠.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은 태어난 곳에서 살다가 죽기도 하지만, 언제나 다른 곳으로 갈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심지어 게다가 인간은 잡식동물이에요. 본디 태어나기로는 잡식동물이란 얘깁니다. 선택적으로 육식이나 채식을 할 수는 있지만, 인간은 대개 특별한 건강 문제가 없는 한, 모든 걸 먹을 수 있는 상태로 태어나요. 이런 인간이 눈에 보이는 것마다 입에 집어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애기 때는 실제로 이러죠. 모든 게 다 입으로 들어가잖아요. 뭐가 뭔지 모르고.

그런데 요 나이대를 지나면 애들이 뭘 줘도 모르는 건 안 먹겠다고 하는 시기가 온대요. 그래서 요 시기에 애들한테 적절한 모험심과 적절한 경각심의 밸런스를 잡아줘야 한다는 얘기를 어딘가에서 들었습니다. 너무 겁만 심어주면 애가 커서 새로운 걸 아무것도 못 먹는다고 하고, 그렇다고 너무 아무거나 다 먹게 하면 애가… 애가 진짜로 아무거나 먹다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이런 통계도 어딘가에서 들었어요. 회 말입니다. 날생선. 이걸 아시아권에서는 상당히 흔히 먹는데, 미국에서는 아직도 회를 안 먹는 사람들이 많아요. 날생선을 먹는다는 것을 매우 충격적으로 알고, 날것 자체를 잘 안 먹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에 관한 썰이 도시 전설처럼 돌아다니는데, 실제 연구 결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썰이 뭐냐면, ‘35세 이전에 스시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평생토록 스시를 먹지 않는다.’

여기서 스시라고 한 건 아무래도 미국에서 미국인들이 익숙한 날생선의 형태가 스시라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뭐, 사실, 날생선은 스시뿐만 아니라 한국의 회도 있고, 너무 많은 국가에서 그 국가들의 버전의 날생선이 있겠죠.

아무튼 근데 이것도, 제대로 된 연구 결과인지 알 수 없을지라도, 논리적으로 말이 되죠? 실제로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습관의 동물이 되는지라,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는 한 새로운 걸 먹어보지 않습니다. 만약 35세 이후에 처음으로 스시를 먹어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스시만 안 먹어봤을 뿐이지, 다른 다양한 음식을 탐험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 확률이 높대요.

35세 이전에 먹던 것만 맨날 똑같이 먹던 사람은 어디 여행을 가서도 자기가 모르는 건 잘 안 먹는다고 합니다.

참고로 한아임은. 말고기 먹어봤고요. 개구리 먹어봤습니다. 말고기는 아주 어릴 때 체코에서 먹어봐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냥 맛있었던 것 같아요. 멧돼지 고기도 먹었는데, 맛있었습니다.

개구리는 태국에서 먹어봤는데, 닭 맛이 납니다.

그리고 제가 베트남에서 튀긴 악어를 먹어봤거든요? 그런데 그건 뱉었어요. 너무 기름져가지고. 너무 이상해서 못 삼켰습니다. 그렇습니다. 먹어봤다고 하기에 애매하네요.

그밖에 뭐 해파리 산낙지 육회 이런 거야 한국에선 워낙 많이 먹는 거니까, 한국에선 명함도 못 내밀지만, 미국에선 매우 내밀 수 있습니다. 나 이런 거 먹어봤다고.

아무튼. 이런지라. 인간이 잡식동물인데 활동 범위도 넓어서 실제로 입에다가 뭘 넣는지 조심하는 게 진화론적으로 말이 되는지라, 혹시나 내가 늘 안다고 생각했던 음식인데 그조차도 내가 직접 조리하지 않는 한 뭔가 내가 모르는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그 공포는 21세기에 뉴스 폭로 때문에 등장한 공포가 아니라, 아마도 언제나 있어 왔던 공포일 것이다.


4: 스위니 토드

00:15:36-00:21:38

[Music: Can’t Look Down – Ty Simon]

스위니 토드 얘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스위니 토드는 2007년 영화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조니 뎁 님과 헬레나 본햄 카터 님이 주연으로 출연하셨던 뮤지컬 영화.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Fleet Street의 한 건물의 2층에서 일하는 어떤 이발사인 토드가 자기 손님들을 죽이면, 1층의 파이집 주인인 Mrs. Lovett이 그 인육을 갖고 고기파이를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고기파이는 만두는 아니지만, 재료를 갈아서 안 보이게 어떤 피 안에 넣는다는 점에서 만두와 결이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시초는 1846년경에 나온 “The String of Pearls”라는 소설이래요. Penny dreadful이라는 장르의 소설이었다는데, penny dreadful은 19세기 영국에서 유행한 대중적 시리즈물이라고 간단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Music ends.]

한 이야기 소책자를 사는 데에 1페니가 들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해요. 그리고 이 시대의 대중이라 하면 아마, 글 읽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던 시대에서 점점 글 읽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생겨난 노동자 계급의 대중을 말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범죄자, 탐정, 슈퍼내추럴, 이런 주제가 선정적으로 많이 쓰였다고 하고, 무조건, 뭐랄까, page turner, 책장을 넘기게끔 해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게끔 하는 플롯 위주의 이야기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스위니 토드가 그러니까 거의 200년 된 이야기란 뜻입니다. 엄청 오래된 얘기죠. 대개 이런 이야기가 탄생하는 배경에 대해 논해질 때면, 우리 범고래출판사의 ‘괴물성’ 책에서 등장하는 것과 비슷한 설명이 사용됩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도시화가 진행되고, 외부인의 유입이 많아지고, 심지어 외국인의 유입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의 직업은 점차 전문화되고, 다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어졌으며, 모르는 사람은 많아지고, 음식 만드는 과정도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슈퍼에 가서 음식을 사지, 대개는 농장에 가서 소를 잡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음식이 대체 어디서 왔는지, 누가 어떻게 만든 건지, 그 ‘누가’라는 자가 한 사람이 아니기에 문제가 생긴다면 어디서부터 누구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이런 의문들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1846년경, 이 스위니 토드 이야기의 원형이 등장했을 때, 그때의 사람들은 이러한 일련의 변화에 아직 적응을 못 했던 때이기에 상당히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것이 대중을 겨냥한 penny dreadful물로서 승화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가 쇼노츠에 링크를 할 텐데, 지금까지 200년이 좀 안 되는 기간 동안 이 스위니 토드 이야기가 참 엄청나게 다양한 소설, 연극, 영화, 만화, 음악 등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내 몸에 집어넣는 것의 정체를 내가 알 수 없다는 공포가 얼마나 오래도록 사람들의 환상을 자극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특히나 흥미로운 점은 고기파이가 실제로 맛있다는 점입니다. 적어도 제가 본 2007년 조니 뎁, 헬레나 본햄 카터가 등장하는 영화 버전에서는 그랬던 것 같은데. 고기파이가 너무 맛있어가지고 장사가 잘되지 않나요? 처음에 말입니다. 네. 맛있어가지고. 아주 신이 나요 Mrs. Lovett이. 이게 참. 이 부분이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합니다. 내가 뭘 먹었는지 모르는데, 그리고 모르는 게 나은데, 그게 맛있어. 그럼 어떡하지?


5: 영화 “만두”

00:21:38-00:36:59

[Music: Who Lives up That Hill? – idokay]

이 의문과 좀 다른 의문이 등장하는 게 영화 “만두”입니다. 홍콩 영화인데, 사실 제 생각에 이 영화의 가장 큰 공포 포인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를 먹는 행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 일단 잠깐 설정을 설명하자면. 젊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두를 만드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이 주인공의 만두의 기본 재료는 낙태된 태아입니다. 이게 기본 설정이에요.

그런데 이 설정에서 주된 공포 포인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를 먹는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주인공의 만두를 먹으러 오는 손님들은 아니까요, 자기들이 젊음을 되찾기 위해 태아 만두를 먹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스위니 토드나 그 비슷한 음식 공포물에서의 본능적인 공포보다 좀 더 결이 다양해지는 공포 양상이 나타납니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를 먹는다’가 아니라, ‘정체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 효과를 알 수 없는 뭔가를 먹는다’가 공포의 포인트가 됩니다. 그리고 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른다’라는 주제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이 영화, “만두”에서 끊임없이 나옵니다.

영화의 설정이 잔인해서 그렇지, 영화 자체가 비주얼적으로 잔인하진 않습니다. 피가 아주 많이 나오는 영화는 아니고, 오히려 생각보다 진행이 느려요.

[Music ends.]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는 형태의 영화이고요. 제가 생각했을 때 이 영화의 그로테스크 포인트는 태아 만두가 아니라 다른 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만두를 만들어서 파는 우리의 주인공은 그 사업을 그냥 집에서 해요. 따로 가게가 있는 게 아니고, 손님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약간 암시장처럼 사업을 하는 거죠. 그런데 그 집에 개가 있어요. 귀엽게 생긴 자그마한… 푸들인가? 털이 복실복실 꼬불꼬불한 귀여운 강아지가 있는데, 그 강아지가. 저는 그 강아지의 존재가 그로테스크하더라고요. 주인공이 만두를 만들 때 그 강아지가 부엌 뒤편에 마치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이라든지, 뭐 떨어진 거 없나 종종걸음으로 부엌을 왔다 갔다 할 때라든지.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가지고. 그게 좀 그로테스크하고.

이 만두 만드는 주인공의 폼이 너무나 그로테스크 해요. 이 사람이. 만두 만들던 손으로 발 만지고, 흙 만지고, 개도 만지는데, 카메라에 비친 장면 상으로는 만두를 만든 다음에 이 모든 것들을 만지는 거지만, 왠지 카메라가 장면을 담지 않는 동안 만두 만들기 전에도 발이랑 흙이랑 개를 만지고서 손을 안 씻었을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이 주인공은 대체 바지를 어디서 구하는지. 여러분이 이 영화를 보시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실 겁니다. 어… 이 영화를 저는 저번 주에 본 영화, How to Die In Oregon에서와 같은 사이트에서 광고 포함 무료로 봤는데, 그 링크 쇼 노츠에 넣을게요. 여러분이 사는 지역에서도 광고 포함 무료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튼 보시면 이해하실 겁니다. 대체 이 주인공은 바지를 어디서 구하길래 저렇게 절묘하게 촌스럽고 비호감인가. 이 배우분이 연기를 너무 적절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이 사람이 아주 기묘하게 기분이 나쁜 사람이거든요? 이 사람이 왜 이 일을 하게 됐냐면, 중국에서 한 가구당 한 아이만 낳게끔 강제할 때, 이 사람은 자기가 나라를 위해서 일했다고 말을 합니다. 실제로 이 사람이 일하기 싫다고 해서 ‘그래, 하지 마라’라고 해줬을 리가 없겠죠. 그렇게 시작한 일을 이 사람은 지금도 하고 있는 거예요. 물론 지금은 그만둬도 되는데 안 그만둔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그래서 이 인물이 설정 자체가 동정이 가지 않는 인물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태아 만두를 만드느냐 만들지 않느냐를 떠나서, 그 만두 안 만들어도, 아주 절묘하게 촌스럽고 비호감인 그 연기를 이 배우분이 너무 잘 나타내주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영화 전체의 주제는 만두라는 음식이 아니라, “뭘 하는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될지 몰랐던 것”이며,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다는 그 착각에 집착했던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 주인공은 자기가 의사가 될 때 나라에서 강제하는 낙태를 실행하는 의사가 될 걸 몰랐고, 주인공의 만두를 먹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태아 만두를 먹는다는 건 알지만 그것이 가져올 각종 부작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게 있잖아요. 젊음. 그걸 갖는다는 데에 집중할 뿐이지, 즉, 이 음식의 효과를 안다는 착각에 집착할 뿐이지, 다른 건 중요치 않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영화의 주제라고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들도 있습니다. 이 영화가 태아 만두가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임을 보여주는 게 목적인 1차원적인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씬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그냥 얌전히 길 가던 이 만두집 주인공을 불러 세워서는 그 사람 짐을 검사하는 관료들이 나옵니다. 뭐 도시락통을 열어 봐라. 이것저것 시켜요. 그러고서는 이제 뭐, 그냥 밥에 햄이랑 계란후라이 하나를 얹은 것 같은 도시락이니까, 가던 길 가라고 합니다.

얘네부터가 극혐입니다. 관료 네가 뭔데 길 가던 사람을 멈추라 마라야. 아주 잠깐인 씬이지만, 관료라는 자들의 존재 자체가 자기네가 뭘 알 수 있고 안다고 착각하는 게 직업 아닙니까? 숨을 왜 쉬는지.

그리고 여기 웬 늙은 남자가 나오는데, 이 남자도 상당히 비호감입니다. 여기에 호감인 캐릭터가 거의 안 나와요. 호감이라 하면, 호감도 종류가 여러 가지지 않습니까? 호감이, 특히나 이런 픽션에서 사람이 착해야지 호감이 가는 거는, 반드시 그런 거는 아니거든요. 능력이 굉장히 출중할 수도 있고, 외모가 엄청 수려해서 호감이 갈 수도 있고, 아니면은 뭐, 자기 강아지한테 잘해줘서 호감이 갈 수도 있는 건데, 그 어떤 형태로도 호감이 가지 않는 캐릭터들이 거의 대부분이고, 모든 주요 캐릭터는 다 비호감이에요.

공포물에 허용된 특유의 성질이죠. 이번 시즌에 몇 번 언급했듯이, 공포물의 포인트는 많은 부분 죄와 벌이니까요. 죄를 지어야 벌을 받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주제로서 다루려면 주요 인물이 죄를 지어야 하죠. 그러니 주요 인물들이 비호감인데도 변태스러운 관객인 저 같은 사람들이 공포물을 보는 겁니다.

아무튼 이 늙은 남자가 반쯤 부화한 계란을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거 곤계란이라고 하던가요? 이놈도 뭐, 정력에 좋다고 먹는지. 왜냐면 이자가 부인 두고 바람피우는 자거든요. 극.혐. 극.혐이에요. 그 반쯤 부화한 계란을 처묵처묵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뭘 섭취한다는 것 자체가. 그게 뭐, 좋아하는 사람이 맛있는 걸 먹는다든지 관능적인 분위기라든지, 이런 상황의 맥락 때문에 그게 아름답게 포장될 수 있는 거지, 그 자체로서는 사람이 뭘 먹는 장면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심지어 살려고 먹거나 맛있어서 먹는다기보다는, 이놈처럼 이… 정력? 뭔가 음식을 즐기는 것 넘어서의 목적성을 갖고 먹는 게 저는 추잡스러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나 이놈이 아들 밝히는 놈이라는 게 영화 후반에서 밝혀졌을 때, 저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너 같은 놈 닮은 거 낳아서 뭐 할라고. 너무 혐오스러워가지고. 지구에 너조차 없어야 하는데 네 자식 낳아서 뭐 할라고.

이자가 자기 부인한테 그래요. 젊었을 땐 많이 웃었는데 당신은 이제 왜 안 웃냐고. 너 같으면 웃겠냐, 너 같은 거랑 사는데?

그런데 이 부인도 웃겨요. 이 부인이 만두집 고객 중 하나거든요. 이런 놈이랑 살면서 이놈이랑 섹스 좀 해보겠다고, 젊음을 되찾겠다고 태아 만두를 먹습니다. 얘랑 섹스해서 얘랑 애 낳아서 뭐 할라고.

이게 혐오스러운 거예요. 자기가 이 결혼을 개떡같이 한 걸 아는데, 그걸 안 이후에도 그걸 놓지 못하고 어떻게든 자기가 정답을 안다고 생각하며 집착하는 거.

심지어 이야기 중간에 갑자기 이놈이 사고를 당했는지 다리가 부러진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가 이 부인이 이미 태아 만두를 많이 섭취했을 때거든요. 그래서 그게 무슨 슈퍼내추럴한 효력이 있는지, 이 남자가 다리가 부러져서 그것이 병실 천장에 걸려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이 부인이랑 자보겠다고 발버둥 치며 섹스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정말 그로테스크합니다. 이게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르겠는데 짐승이라고 부르면 짐승한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그런 장면이 나와요.

그러다가 이야기 후반부에 이놈이 만두집 주인이랑 섹스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그 장면도 심히 그로테스크합니다. 섹스의 즐거움이 있는 장면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음식 섭취든, 섹스든, 그 자체로 즐거움이 있다면 보는 사람도 그 순수함이 느껴질 수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 순수성을 일부러 배제한, 목적성 있는 섭취와 섹스의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즉, 이건 사실 쾌락이 아니라고 봐요, 저는. 쾌락이 아니라, 숙제하듯이 반쯤 부화한 계란을 먹고, 숙제하듯이 섹스를 합니다. 굉장히 안 섹시하고, 거부감이 드는 장면들인데, 제 생각에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그것을 의도한 겁니다.


6: 진짜 주제

00:36:59-00:53:07

[Music: Into the Next Dimension – Shahead Mostafafar]

태아 만두는 영화에 쇼킹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1차원적 도구고, 실제로 다루려는 주제는 이런 것들인 겁니다.

아까 말했던, “뭘 하는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될지 몰랐던 것.”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다는 그 착각에 집착했던 것.”

심지어 더 나아가, “그 착각이 가짜라는 걸 다 인정하고서도 놓지 못하는 것.”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가장 끔찍한 이야기 요소이되 그나마 이러한 주제들의 덫에 빠지지 않고 그 덫에서 빠져나가는 유일한 케이스는 다음 인물들에 관한 겁니다. 이게 참, 안타까워요, 그래서. 이 영화의 죄와 벌의 굴레에서 유일하게 빠져나가려는 인물들이 빠져나가는 방식이 죽음 혹은 완전한 파멸이라서.

어떤 인물들이냐면요, 아버지가 강간해서 임신한 학생과 그 학생의 어머니가 만두집 주인공을 찾아와 제발 낙태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 만두집 주인공이 실제로 이들을 도와줘요. 낙태를 해줍니다. 당연하죠. 임신한 학생이 15살인데 어…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되지. 이자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진짜 아버지들에게 누가 되는 행위니까, 폐기물? 쓰레기 폐기물이니까 폐기물이라고 대강 부를게요.

이 폐기물과 결혼을 한 여자는, 이 영화 전체에서 거의 유일하게 영화 주제에 대해 다른 캐릭터들과 다르게 반응하는 인물입니다.

이 인물은 “뭘 하는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될지 몰랐던 것”은 맞아요. 폐기물과 결혼하면서 잘 살 거라고 믿었으니까 결혼했겠죠.

그러나 그다음 단계부터 반응이 다릅니다. 그다음 단계에서, 다른 캐릭터들 같았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다는 그 착각에 집착”했을 것인데, 이 인물은 그러지 않아요. 자기 애, 이 15살짜리 불쌍한 애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으로 여러 수단을 알아보지, 자기가 결혼한 폐기물을 변호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Music ends.]

왜, 그런 경우도 믿기 어렵지만 있잖아요. 가족 내에서, 어린이가, 특히나 어린이가 강간을 당했을 때, 뭐, 너네 삼촌이 그럴 리가 없다는 둥, 너네 아버지가 그랬을 리가 없다는 둥, 하면서, 막 부인하죠, 그 사건 자체를. 그런 경우가 실제로 있는데, 이 여자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겁니다.

심지어 더 나아가는데, 더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이 15살짜리 애가 이 위험한 낙태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피 흘리다가 죽거든요.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 여자가 폐기물을 죽이려다가 피투성이가 된 장면이 나옵니다. 가정폭력 신고가 들어왔는지, 경찰이 집에 찾아와서 피투성이 현장을 목격해요. 즉, 이 여자는 “그 착각이 가짜라는 걸 알고서도 놓지 못한” 죄를 범하지는 않았다는 얘기죠.

어떤 이유에서인지, 폐기물에게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경찰의 대사가 나오긴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이 여자가 자신의 착각을 “놓지 못해서” 생긴 일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보다는 이 여자가 매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딸이 폐기물 때문에 죽었으니까. 폐기물이 자기 딸을 임신시켰는데, 그 애가 자기 손자인지 배다른 자식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였으니까. 이 폐기물한테서 정자가 온 건 상관없는 거죠. 정자야 뭐. 구하면 되는 게 정자잖아요? 어차피 제대로 키울 거 아니면 정자 구하는 것쯤이야 매우 쉽습니다. 그런데 그 폐기물이 내가 품어서 내가 낳은 내 딸을 건드려서 딸이 죽었으니까, 어떻게 해. 폐기물을 죽여야지. 그런데 죽이는 과정이 힘들어서 죽이다가 완전하게 못 죽인 거 아닐까.

여러분? 여기서부터 한아임이 하는 잔인한 묘사 나옵니다. 잔인한 거 싫으면 듣지 마세요.

네. 눈에는 눈이 아니라, 눈에는 눈 두 개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냐? 가만히 있는 사람 건드린 대가로.

‘건드린다’는 것의 정의가 좀 모호한 상황도 삶에서는 많지만, 강간은 ‘건드린다’고 명확하게 봐도 될 것 같고요, 눈 두 개가 뭐야. 발톱 열 개. 손톱 열 개로 시작해, 이빨 있는 거 다 하나하나, 그다음에 코 하나, 혀 하나, 눈 두 개. 그리고 가장 문제가 된다고 봐도 전혀 과장이 아닌 성기. 이렇게 순서대로 다 뽑아야하는 것 아닌가. 눈을 나중에 뽑아야되겠네요. 성기 뽑히는 걸 본인이 봐야 하니까.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진행하기 전에 머리카락을 잘라서, 그것을 잘게 갈아, 먹이도록 하죠. 목에 그 느낌이 자글자글하게.

그다음에 광화문 광장에서 능지처참을 하고, 참수해서 그 목을 높은 장대에 걸도록 하죠.

네. 한아임, 고어물 잘 봐요. 특히나 죄와 벌의 구도에서 한아임이 생각했을 때 죄를 받아 마땅한 인물이 벌을 받는 고어물? 잘 봅니다.

저는 사람이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뭐만 하면 인권인권거리는데, 아니요, 범죄도 종류가 있고 정도가 있는 거지, 이런 범죄자는 인권 없습니다. 얘 인권 챙겨줄 시간에 정말 뭐, 그래, 배고파서 도둑질을 한 사람이라든지, 그런 사람들 인권을 챙겨주면 될 일입니다.

아무튼. 영화 “만두”는 고어물이 아닌지라, 제가 묘사한 장면이 나오는 건 전혀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폐기물을 굳이 얼굴조차 안 보여주는 게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아까 그 바람피우는 놈이야 극혐이긴 한데, 그렇다고 폐기물에 비할 바는 솔직히 아니잖아요? 그래서 바람피우는 놈은 스크린 타임이 꽤 되는 반면, 폐기물은 진짜. 아예. 죽어서도 얼굴이 안 나옵니다. 진짜 핵폐기물이 얘보다 더 깨끗한 그런 존재라서 얼굴이 아예 안 나와요.

이런 영화인지라, 그로테스크함이 단순하지 않다는 매력이 있고요,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그게 공포물의 매력이죠. 지켜보는 관객 역시 죄와 벌의 사이클의 일부라는 점이.

저를 포함한 관객의 상당수가 이 영화가 이상한 만두에 관한 거란 건 알고 관람을 결정했을 거란 말이죠. 태아 만두에 대한 거란 걸 알았을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젊음을 찾는다는 컨셉이 나오면 뭐, 화장품 경향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태반 화장품 이런 거 있지 않나요? 거기서 공포로 나간다면 뭘까. 그러면 답이 나오죠.

그런데 그 태아 만두가 이 영화의 핵심은 아닌 거로 영화가 점점 드러내니까. “뭘 하는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될지 몰랐던 것.” 단순히 태아 만두의 그로테스크함에 대한 영화를 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그 주제가 적용됩니다.

그런데 이다음부터가 우리의 선택인 거예요. 이 영화에 나오는 수많은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처럼 굴지, 아니면 유일하게 조금이나마 착각에서 깨어난, 15세 어린 딸의 안타까운 어머니처럼 굴지.

내가 몰랐던 걸 인정할지, 아니면 계속 안다는 그 착각에 집착할지.

계속 이 영화가 태아 만두에 대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아니면 우리 모두가 집착하는 착각에 관한 영화라는 점을 고려해 볼지.

더 나아가, 그 착각이 가짜라는 걸 다 인정하고서도 놓지 못할지, 아니면 놓을지.

이 세 개가 각기 다 다른 단계인 것 같아요.

1번, 주어진 상황이 뭔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모르는 단계.

2번, 안다는 착각에 집착하는 단계.

3번, 가짜라는 걸 다 인정하고서도 놓지 못하는 것.

다시 정리하자면 1번은 영화 내의 스토리텔링에선 이런 겁니다. 폐기물과 결혼한 여자가 자기 남편이 폐기물인 걸 모르지만,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안다고 여기는 단계.

2번은 이런 겁니다. 폐기물과 결혼한 여자가 그놈이 자기 딸을 강간한 걸 부인하는 단계. 왜냐하면 자기가 결혼한 이 남자가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3번은 이겁니다. 폐기물이 자기 딸을 강간한 걸 다 인정하면서도 이놈이랑의 결혼생활을 포기 못 하는 것.

관객도 이 세 단계로 나뉩니다.

1번은,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 이 영화가 태아 만두에 대한 영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여기는 단계.

2번은, 이 영화에 태아 만두 외에 훨씬 더 내 삶에 적용 가능한 각종 죄와 벌의 개념이 나오는데도, 태아 만두라는 가장 단순하고 쇼킹한 요소에 집착하는 단계. 이러기가 너무 쉬워요. 왜냐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살면서 태아 만두를 먹을 일이 없으니까, 나는 극 중 상황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나는 굉장히 선하고 착하고 정상적인데 저 극 중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비정상적이고, 그들만 그로테스크한 것이라고 치부하기가 쉬워요.

그런데 만약 치부하지 않았다, 너무 다양한 죄와 벌의 요소들이 있고, 심지어 영화의 주제가 나에게도 적용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다면, 마지막 3번 단계의 관문이 있습니다. 이 영화가 태아 만두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받아들이고 나서도, 그걸 인정하게 되면 생각해야 될 게 너무 많아지니까 그 깨달음을 그냥 없던 것으로 치고 그냥 태아 만두에 대한 무서운 영화였다고만 기억하게 될 것이냐 말 것이냐.

3번 단계의 고비를 넘긴다면, 이 영화의 주제가 삶에 매우 적용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굉장히 실용적인 영화더라고요.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임을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임이 쇼킹하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어렵더라도 모르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 모르는 척하지 않는 것.

얕은 행복의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무지입니다.

조금씩 알면 알수록 불행해져요.

그러나 그 와중에도 알게 된 것들을 부정하거나 아는데도 모르는 것처럼 굴지 않고, 아는 것을 써먹는 것이 저는 오늘 당장 안 죽고 사는 데까지 살아보는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7: 마무리

00:53:07-01:01:16

[Music: So This Is It – Ty Simon]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여러분? 스위니 토드류의 이야기는 꽤 웃깁니다. 생각보다 무섭지 않아요. 왜 그런 장르 호러가 있잖아요. 사실 엄청 잔인한 건데 그게 너무 업템포라서 무섭게 와닿지 않는 호러. 특히 2007년에 나온 영화는 뮤지컬 영화이기도 해서, 음악이 꽤 즐거운 측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만두”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로테스크하고요, 그래서 실용적이기까지 합니다. 역시 공포물의 교훈은 여타 장르가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영화 “만두”의 또 다른 교훈. 자기 자신을 사랑하자. 스스로 발전하지 못하면 망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한 인간에게 전부를 걸면 걸수록 sunk cost fallacy가 발생하잖아요. 매몰 비용 오류. 투자한 게 너무 많으면 진실을 알고서도 안 보려는 심리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투자는 영끌을 하면 안 돼요. 안타깝지만 사랑에 있어서도 스스로를 최우선시해야 합니다. 이 영화에 결혼생활 망한 사람이 너무 여럿 나온단 말이죠. 그 망한 이유가 그 상대가 쓰레기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 쓰레기인 자가 쓰레기가 아니라는 확신 하에 너무 자신을 내던져서 그런 것도 확실히 있습니다.

여러분? 영끌하지 마세요. 자기 영혼은 자기 것이어야 합니다. 악마에게도 팔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팔지 마세요. 그 사람이 안 떠날 거라 하더라도, 내가 내 영혼을 여전하게 간직하면 간직할수록 아마 그 사람이 정상인이라면 고마워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던 그 모습 그대로 있어 줘서. 영혼을 내주더라도, 한꺼번에 덜컥 내주지 마시고, 저쪽에서도 조금 내주는지 확인한 다음 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구멍이 안 날 거 아니겠어요? 저쪽에서 내가 준 만큼 구멍 메꾸게 해주는지 안 해주는지 확인은 해야 될 거 아니냔 말이죠. 아무리 사랑이 거래가 아니더라도, 나한테 너무 안 주는 자한테는 내 걸 많이 주면 안 됩니다. 절대 네버.

그리고 저는. 만두를 좋아하는 관계로, 앞으로도 많이 먹을 거고요. 이 영화 “만두”에 나오는 다른 문제들에 비하면 뭐가 들어 있는지 잘 모르는 만두를 먹는 것쯤이야 위험성 스케일 원 투 텐에서 원에 해당하는 리스크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제 으른인지라, 아기가 아닌지라, 웬만한 거 먹고서 죽기 어렵거든요. 웬만하면 중금속이 들어 있든 쓰레기가 들어있든, 먹고 안 죽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만두 정도는 뭐가 있는지 식당 주방에 들어가서 일일이 다 확인하지 않고도 먹겠다.

그러나 삶의 다른 측면에서는 리스크가 크면 클수록,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몰랐던 게 밝혀지면 안다고 여겼던 그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 집착조차 가짜로 드러났을 때, 모르던 상태로 돌아가길 바라지 않으며 살아보도록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올인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영화 “만두” 얘기가 이렇게 무섭게 들리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인간이 생활의 모든 측면을 어느 정도 다각화를 해야 하는데, 어렵습니다.

만두나 먹어야겠어요.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Music 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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