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7] 구조조정: 현재, 과거, 미래의 집합점을 위하여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여러분. 2022년의 끝자락에 시즌 4가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팟캐스트가 시즌제라서, 매주 에피소드가 나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간으로 치면 어느덧 1년이 쓱 지나가 버렸어요. 작년, 2021년 12월 17일에 팟캐스트를 시작했는데, 벌써 그 날짜가 지나간 상태입니다. 올해. 놀랍습니다. 시간이란 게 엄청나게 느리게 가는 것 같다가도 정신 차려보면 훅 가 있어요. 시간은 느리고도 빠릅니다.

2021년 12월 17일에는 생길 줄 몰랐던 일들이 생겼고, 생길 줄 알았던 일들은 또 안 생기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생길 줄 몰랐던 일들이 생기고 생길 줄 알았던 일들이 안 생기는 것이 새로울 게 없는데도, 그걸 또 놀라워하고 있는 저 자신이 놀랍습니다. 얼마나 더 살면 이러한 현상들이 안 놀라울까. 한 백 년 살아도 계속 놀라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이런 상태란 말이죠. 2022년은 끝나는데, 시즌 4는 시작하고, 그 와중에 시간은 계속 가고 있으며, 빠르기도 느리기도 한 상태. 게다가 또 그 와중에 ‘예측’이란 것이 어떤 면에서는 참 무의미한 상태.

저는 요즘에 시간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사실 공간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래도 공간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편인데, 지난 몇 달간 특히 그랬습니다. 이게 어렸을 때 다른 나라에 가서 살아서 그런지. 여행을 많이 다녔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공간이 얼핏 보이는 것만큼 딱딱한, 변하지 않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자각이 있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또 꼭, 공간이란, 필요할 때는 높은 벽만큼 견고한 것이라, 완전히 말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은 서로 얽혀 있잖아요. 이렇게 얽혀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이 수십 년 전에는 생소한 개념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요즘에는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많이들 생각하는 개념이죠.

아, ‘요즘에는’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애매하네요. 오히려 수십 년 전이 아니라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전에는 인류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나 공간이 딱 떨어져 있는, 잴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그럼에도 인간은 시공간이라는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뭐 완전히 도를 닦는 개개인들이 아니고서야 말이죠.

그러다가 산업 혁명 즈음? 과학이나 이성에 대한 맹신이 유행하던 시절에 잠깐 시계나 자 같은 측정 기구들에 대한 의존도가 극도로 높아졌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마치 시공간이 딱딱 떨어지는 무언가라고 여겨지는 현상이 지금까지도 메인스트림에서는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딱딱 떨어진다 함은, 시공간에 인간이 얽매인다는 것 너머의 굉장한 단순화를 말합니다. 시공간에 인간이 얽매이는 건 맞아요. 대부분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걸 부정하는 것은 부질없다는 생각도 드는데, 시공간이 모두에게 같다고 생각하는 거야말로 정말 산업 혁명적인 생각인 것 같거든요. 시공간은 절대 누구에게나 같지 않습니다. 그것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기에 시계나 자로 잴 수 있다는 생각은 시공간이 때때로 얼마나 말랑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에 완전히 눈이 먼 사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공간은 말랑하면서도 틀인데, 그러나 말랑하든 틀이든, 모두에게 같진 않다.


저는 그러한 시공간에 대해 요즘 많이 생각합니다. 더 정확히는, 산업 혁명적인 시공간 개념이 촌스러울 지경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계나 자 같은 측정 기구들에 의존하는 저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뭐, 타인과 약속을 잡으려면 시계를 봐야 하는 게 당연히 맞는데, 그런 걸 떠난 의존도가 심한 겁니다. ‘말랑한 이 시간을 우리가 만나기 위해 틀에 다잡아 보자’ 이런 정도의 실용적인 의존이 아니라, 시계를. 시계를 너무 많이 봐요, 제가. 안 봐도 될 때도 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나 의존도가 높아진 이유를. 제 경우에는 이게 너무나 명확했습니다. 의존도를 높이려고 높아진 게 아니라, 저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어서 의존했던 겁니다. 예를 들어, 글을 쓰겠다고 했는데 글을 쓰지 않을까 봐서 말이죠. 글 쓰겠다고 해놓고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 쓰는 데 영감 찾으러 다니는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글을 쓴다는 행위를 시간으로 재서 ‘나는 오늘 세 시간 썼다’라고 스스로 확인을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나는 오늘 몇천 자를 썼다’라고 스스로 확인을 했던 거죠. 이 글자수 세는 것도, 시계나 자는 아니지만, 재는 거니까요. 확실한 것.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그 누구에는 타인이 있기도 하겠지만, 제일 중요한 ‘누구’는 누구다? 나다. 나를 못 믿어서 쟀습니다. 작업 시간을, 글자 수를.

그러니까 제가 스스로 숙제를 내고 숙제를 하는? 다른 말로 하자면 일을 시키고 일을 하는? 그런 구조를 거의 십 년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시즌 3과 시즌 4 사이의 기간 동안, 그리고 시즌 3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이런 구조에 대해 좀 재고해볼 만한 계기가 있었거든요.

이… 뭐랄까. 이런 구조는 졸업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십 년 만에 처음으로 했습니다.

음. 지금도 저는 이런 구조를 썼던 그 과거에 대해서는 후회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글이나 음악이나 미술이나 뭐 그런 소위 말하는 예술이라는 것들은 누가 시켜주지 않거든요. 어디 취직해라 무슨 대학 가라 심지어 결혼해서 애 낳아라 하는 건 그렇게들 주변에서 시킨다던데.

글 좀 써라 음악 좀 만들어라 그림 좀 그려라, 이런 말은… 아마 잘 안 할 겁니다. 하란다고 하는 순간에 그 글, 음악, 그림, 뭐, 그밖에도 영화, 춤, 심지어 학문이나 사업처럼 조금이라도 창의성이라는 게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면, 딱 그 순간에 그것들이 더는 그것이 아니게 되니까요. 학문과 사업도 ‘대학’ 아니면 ‘취직’ 같은 걸로 딱 눈에 보이는 걸 제외하고는 창의성의 영역이 대부분인데, 그 창의성의 영역은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요.

진짜 창의성. 진짜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것. 재고 계획한다고 되지 않는 것들은 누가 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해요. 그런데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걸 어떻게 안다? 특히 초반에?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이 기준을 버려야 하나, 싶은 지금도, 저는 초반에는 기준을 세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시킬 수 없는 일을 한다는 이유로 일을 아예 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거든요. 저는 이랬어요. 나를 믿을 수가 없어. 얘가 글을 쓴다고 하는데 진짜 쓸지 안 쓸지.

글 쓴다고 하고 안 쓰는 사람이 글 쓴다고 하고 쓰는 사람보다 훨씬 많습니다.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준이 없는 거예요.

아무튼 그래서 이런 기준을 썼었는데. 시간 아니면 글자 수. 그런데 이제는 그런 측정 행위가 오히려 짐이 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금까지 써 온 구조는 저 말고 다른 사람이 건드릴 수가 없는 구조였거든요. 다른 사람이 건드릴 자리가 없었습니다. 물론 제가 이혜원 기획자랑도 협업을 하고, 오막이랑도 협업을 하고, 독자나 청취자분들이 감사하게도 이메일도 보내주시고, 하지만. 그런 관계가 이 구조를 건드릴 수는 없게 설계된 구조였습니다.

그렇잖아요? 직장인인 사람이 친구랑 저녁을 먹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일의 구조가 무너지진 않죠. 직장인인 사람이 직장에서 누굴 만나도 그 사람의 일의 구조가 무너지진 않습니다. 그 구조 내에서 사람도 만나고 일도 벌일 수 있는 거란 말이죠. 구조 자체가 그렇게 설계되었으니까.

그리고 일을 하거나 쉬면서 만나는 사람들도 제각각의 구조가 있을 거잖아요. 그러니 대부분의 경우에는 서로의 구조에 영향이 가지 않는 선에서 상호작용을 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일요일 몇 시 몇 분에 너와 내가 이곳에서 만나자.’ 이때 이 만남이 몇 시간 지속될지는 대부분 딱 정해놓진 않지만, 뭐, 저녁 약속이다, 하면 밥 먹는 시간까지 합해서 서너 시간 정도 만나겠거니, 하는 그런… 암묵적인 룰들이 있잖아요. 그 안에서 만나고 헤어지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 몇 달간 제가 시공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계기가 있었다는 거죠. 지금까지의 구조를 바꿔야 하나 싶을 정도로. 그리고 구조를 바꾼다는 게 금방 되는 게 아니라서, 지금부터 생각하면 겨우 내년에야 구조 조정을 완료할 수 있을까, 싶은 프로젝트라서… 그래서 지금부터 생각을 해야 하는 겁니다.

이에 관해 제가 얼마 전에 블로그에 쓴 글이 있습니다. 참고로, 여러분? 저는 블로그를 매일 해요. 별 내용은 없는데, 블로그 제목이 ‘일기’입니다. 말 그대로 일기라서 내용이 별로 없어요. 이… 저는 지금 한국어로도 블로그를 매일 하고, 영어로도 블로그를 매일 하고 있습니다. 둘 다 매일 해요. 그리고 둘 다 내용이 별로 없는 건 같은데, 한국어 블로그의 특이점은 이겁니다. 한국어라는 언어가, 누구를 위해 쓰는지 겉으로 많이 드러나는 언어라는 점이에요. 영어는 이렇지 않거든요. 영어는 써놓고도 나를 위해 쓴 건지 누구한테 말하려고 쓴 건지 잘 모를 때가 많아요. 그런데 한국어는 일단 나를 위해 일기를 쓰면 ‘무엇무엇 했습니다’가 아니라 ‘무엇무엇 했다’라고 쓰겠죠. 이 어미에서부터 한국어는 ‘나 혼자의 공간’이라는 차이가 두드러지고, 그래서 이 한국어 블로그는 정말… 어… 저 혼자 노는 공간입니다.

근데 공개인 거예요. 왜냐? 이것을 여러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짧게 말하자면, 제가 좋아하는, 그냥 제가 만든 개념, public privacy라는 개념 때문입니다. ‘공적 사생활’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저는 도시를 좋아해요. 그것도 대도시. 그 이유가,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 때문입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사람이 없다가 갑자기 있으면 어떻게든 저 사람의 존재를 인식해줘야 예의잖아요. 길 지나가다가 고갯짓으로 인사 정도는 한단 말이죠, 보통. 그런데 대도시는 어떻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고갯짓하다가는 고개가 남아나질 않을 겁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확장되면, 대도시에서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도 아무를 안 쳐다보고 아무도 아무를 진정으로 신경 쓰지 않는 상태가 발생합니다.

이것을 차갑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실제로 차가울지도 몰라요. 그런데 저는 그게 그렇게나 위안이 됩니다. 대도시에서는, 길 가다가 제가 넘어져도, 그 순간에는 사람들이 쳐다보고 심지어 도와주려고 일으켜 세워줄지도 모르겠지만, 금방 제가 잊혀집니다. 이게 얼마나 축복받은 상황인지.

그래서 저는 방대한 인터넷 세계에서, 블로그를 합니다. 여기는 대개 날것들이 올라옵니다. 공적 사생활이니까. 그냥 떠오르는 생각 적는 겁니다. 저는 오프라인에서 아무도 안 보는 일기도 쓰는데, 그거랑 또 달라요. 오히려 그 오프라인 일기보다 블로그 일기는 더 오래갈 겁니다. 오프라인 일기는, 어… 제가 종이에 쓰는 모든 걸 다 분해해서 버리는 습성이 지금까지 있어 왔기 때문에, 오프라인 일기는 몇 달 후면 쓰레기장으로 사라져서 아마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제가 뭐, 누가 제 일기를 쓰레기장까지 찾으러 갈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서, 오프라인 일기는 그냥 사라져요.

그러나 온라인 일기는 더 오래 간다. 블로그를 없애지 않는 한.

음. 언젠가는 종이를 보관하는 습성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이… 공간에 대한 제 관념 때문에 일기를 안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공간에 뭘 많이 보관하기 시작하면 그 공간을 떠날 수가 없잖아요.

아무튼, 블로그를 언급하게 된 이유가 뭐냐면, 최근에 올렸던 글 때문이고. 그 글의 내용에 구조 조정이란 하고 싶다고 해서 금방 되는 게 아니라는 그런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구조라는 게 금방 바뀔 수 있으면 애초에 구조가 아니에요. 제목이 ‘구조 조정이라’ 예요.

그걸 그냥 통으로 읽겠습니다.


구조란 변하는 요소가 없을 때라도 영원할 수 있어야 구조다. 즉, 해가 뜨고 진다 하더라도, 그 변화가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변화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야 구조다.

건물이 해가 뜨고 진다고 해서 무너진다든가, 조직이 (만질 수 없는 종류의 조직이) 해가 뜨고 진다고 해서 무너지면, 그것들은 구조라 부를 수 없다. 건물이나 조직이라 부를 수도 없다.

그러나 물론 변하는 요소는 있다. 전쟁이라든지, 대공황이라든지, 누가 태어나고 죽는다든지, 그런 것들.

이때 구조는 변화해야 하는데, 그 변화 이후에는 구조가 또다시 영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구조가 아니다.

즉, 건물이 무너졌다고 해서 대충 텐트를 지어 놓고 구조라 부르면 난감하다. 조직이 무너졌다고 해서 대충 사람 모아 놓고 구조라 부르면 그것도 난감하다. 텐트나 대충 만든 모임은 실제로 해가 뜨고 지는 시간 동안에 무너질 확률이 안 무너질 확률보다 높다. 그런 걸 구조라 착각해서 만드는 데 시간을 들이면, 진짜 그거야말로 낭비다.

그러니 구조를 조정할 거면, 영원할 줄 알았던 이걸 버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영원할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뭐, 뭣하러 굳이 조정을 해. 그냥 구조가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지. 대충 텐트 치고 ‘어차피’ 또 변화가 생길 테니까 제대로 된 집을 짓지 않고, 대충 모임을 만들고 ‘어차피’ 해산할 테니 제대로 된 공동체를 만들지 말지.

아무리 ‘어차피’ 변화가 생겨도, 그 가운데서도 영원할 걸 만드는 게 인간이다.

그러니 구조 조정의 과정은 길다. 방향을 잡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무엇보다 구조 조정을 할까 말까 결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다. 그래서 구조 조정이란 자주 해봐야 십 년에 한 번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현 구조는 딱 십 년 정도 됐다. 갈을 때가 돼서 갈을 생각이 드는 것인지, 그런 생각도 든다.


이런 주절주절을 저의 공적 사생활 공간에 올렸었는데. 이걸 쓴 것도 이런 생각을 하고 난 지 한참 된 이후입니다. 이런 생각을 한 지는 몇 달이 되었는데, 이제서야 ‘어… 진짜 구조 조정 해볼까?’ 하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해서요. 그러니까. 확신도 아니고,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게 구조라는 것의 특징입니다. 참말로. 모든 변화가 생길 때마다 구조를 바꿀 순 없어요. 그랬다가는 그 구조를 써먹기도 전에 또 구조를 바꿔야 할 겁니다. 구조 바꾸는 일을 하는 사람이 풀타임으로 내 삶에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죠. 내 삶에는 나밖에 없는데, 내가 풀타임으로 구조 조정만 하고 있으면 실제로 구조 이용은 누가 해. 아무도 못 하게 되는 거니까요.

그런 이유로. 몇 달 전부터 생긴 이 계기가 계속 내 삶에 있을 건지? 아니면 지나갈 건지? 그런 생각을 해야 했는데.

굳이 그런 생각을 해야 했던 이유는, 그 계기에 순식간에 혹하는 제가 약간 무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삶에 많은 변화가 있고 그것들은 대부분, 아무리 변화일지라도,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머무는 변화가 있잖아요. 이게 좀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 있는데, 변화인데도 지나가기에 끝끝내는 변화가 아닌 것들이 있고, 변화인데 머물기에 변화일 수 없을 것 같아도 가장 큰 변화인 것들이 있습니다.

수수께끼 얘기하는 것 같죠? 네. 사생활 보호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저는 사례나 예시에 대해 그다지… 그다지 그것에 의존하지 않는 성향인 것 같아요. 사례나 예시는 실제 세계에 존재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나 실제 세계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도 사유로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다 이해한다는 게 아니고요. 남이 저를 다 이해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요.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함은 누가 그래야 한다는 게 아니라, 사유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지탱될 수 있는 구조다, 라는 뜻 정도 같습니다.

이를테면, 하얀 백조만 있을 줄 알았는데 검은 백조가 나타나기도 하지 않습니까? 현실 세계에서? 그런데 하얀 백조의 예시, 사례만 있다고 해서 검은 백조의 가능성을 몰라선 안 된단 겁니다. 검은 백조, 있을 수 있지. 내가 사유해서 검은 백조를 생각할 수 있으면 그게 왜 없겠어. 하다못해 현실 세계라고 불리는 것에는 없을지라도, 내가 그걸 쓰고, 그걸 그리고, 그걸 음악으로 만들면 검은 백조가 있는 건데, 왜 없어.

여러분? 만질 수 있고 눈에 보이는 것. 이미 있는 사례. 이미 있는 예시를 어떤 사유의 믿음직성에 대한 기준으로 사용하면 아직 없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게 됩니다. 심지어 불가능해질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남이 만들어놓은 것만 진짜라고 믿으면서 살게 됩니다. 심지어 자기 인생의 구조에서도.

그래서 저는 지금 아직 없는 구조를 상상해보려고 합니다. 이게 대단히 뛰어나고 창의력이 넘쳐서 아직 없는 게 아니라, 실제로, 말 그대로, 간단하게, 아직 세상에 없기에, 아직 없다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

아무튼. 그 이전 구조, 지금 현재의 구조는 십 년을 견고했는데, 어떤 계기가 생기자마자 한아임은 혹했다. 그걸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 특정 예시나 사례가 없다 하더라도 사유로서 이해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앞서 말했듯이, 삶의 많은 변화는 대부분 지나가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변화가 아닌데, 어떤 변화는 머물기에 오히려 가장 큰 변화가 된다.

구조를 조정한다면 이 계기는 한아임 인생에 머물 수 있을까.

저는 그런 것들을 지난 몇 달간 생각했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마치 평행우주가 열린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이번 시즌은 좀… 대체적으로 사유적인 시즌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간간이 실용적인 것도 들어가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는 이 사유, 참말로 예시나 사례를 들 수가 없어서 들으시는 분들에게 수수께끼처럼 들릴지도 모르는 이 사유를 통해 저는 실제 삶에서 쓸 구조를 만들려고 하는 거거든요. 이렇습니다. 저는 사유를 좋아하지만, 어… 사유만 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제 생각으로는 사유만 하는 사람은 그 존재를 알기가 힘들어서 그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마 우리는 모를 겁니다. 이 세상의 사유자들, 정말 깊게 생각하는 자들 중에 우리가 아는 사유자들은 그들이 그 사유를 통해 책을 썼든, 강연을 하든, 뭘 결국엔 해서 알렸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정말 정말 사유만 한다면, 정말 오두막에서 사유만 한다면, 우리는 알 길이 없겠죠.

누가 사유를 알아줘야만 사유가 가치 있다는 게 아닙니다. 전혀 아니에요. 다만, 사유를 사유에서 끝내면 외부에서 그것의 존재를 모르는 건 당연하단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아임은 사유를 사유로만 끝내지는 않는다. 실제로 구조 조정이 있을 것 같아서 이번 시즌을 이렇게 구성하는 겁니다. 구조 조정 할까 말까 고민하던 몇 달은 이제 갔고, 구조 조정 해야 할 것 같아서. ‘해야 할 것 같다’는 마음의 시작점에 제가 있어서.

그래서 이번 에피소드는 이번 시즌 전체의 오프닝 같은 에피소드입니다. 그리고 이번 시즌의 테마는 ‘시작 툴키트’예요. 이렇게 프레임하면 저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좀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아무리 제가 공적 사생활을 좋아한다지만, 뭔가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어야 들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의 상황은 제 상황과 같지 않을지라도, 같이 큰 의미에서의 구조 조정을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시작하고.

무언가가 죽고 무언가는 태어나는 시점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로 나아가려면, 시작하는 데에 어떤 툴키트가 필요한가?

그것이 이번 시즌의 거대 주제가 될 겁니다.

그리고 이번 에피소드의 존재 이유는, 오프닝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이겁니다. 시작 툴키트의 시작에는 시작하려는 결정이 있어야 한다.

제가 몇 달이 걸렸어요. 시작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구조 조정 자체를. 이 계기가 있을 건가 말 건가.

이 계기가 정말… 뮤즈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말하면 좀 더 와닿을지도 모르겠어요.

평행우주가 열린 것 같다고 했잖아요. 제가 지금까지 써왔던 구조에서는 일부러 빼놓았던 것들이 있었는데, 최근에 열린 평행우주에는 그 빼놓았던 요소들이 들어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평행우주를 제가 마치… 마치 그것을 현재에 본 것 같아요. 그것은 미래에 있지만, 현재에서 제가 그 미래를 봤고, 과거에 있던 모든 일까지 그 평행우주의 비전으로 인해 다 말이 되는 그 현상을 제가 겪었어요.

이거 전혀 종교적인 얘기 아닙니다. 한아임은 종교가 없습니다, 여러분. 종교가 아니라, 에피소드 초반에 말한, 시공간의 초월성. 잴 수 없는 것. 시계로 재지지 않고, 자로 재지지 않는 것. 그걸 말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 없어도 지금 여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지금 여기 없어도 내 안에서 모든 설명이 되는 것.

이런 계기니까, 이런 뮤즈니까 제가 혹한 겁니다. 이것의 존재는 설명이 안 됩니다. 계획하지 않았고,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없어도 될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우주란, 혹은 초월성이란, 혹은 종교 밖에서의 진정한 신이란 정말이지 오묘해서, 어떤 이유에서 어떤 결과를 낳으려고 계기 내지는 뮤즈가 찾아오는지는 저도 모르고 아무도 모릅니다.

결정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걸 계기 내지는 뮤즈로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지나갈 변화로 받아들일 것인가. 후자라면, 변화이지만 지나갈 테니, 구조를 조정할 필요는 없는, 큰 그림에서 보면 그냥 작은 점에 불과한 그런 변화일 것인가?


그런데 시작점에 있다고 했잖아요. 아무래도 진짜 변화로 받아들일 것 같다. 그리고 제가 이 뮤즈를 구조 조정을 할 만한 계기로 여기겠다고 결심한 이유에는 여럿이 있습니다.

뭐, 일단, 이미 말씀드렸듯이, 혹했다. 그것이 보여주는 평행우주의 가능성에 혹했다. 너무 흥미롭고, 너무 아름다워서. 이 혹하는 게 없으면 사실. 상당히 고될 구조 조정을 단행할 가치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사람이 좋아하는 건 그냥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자유 의지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사실 이거 자유 의지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은 제가 의지로 좋아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이 계기도, 이 뮤즈도, 좋다는 걸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처음부터 알았어요. 이건. 얘는.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해서도 안 되며, 영원하다.

그러나 좀 더 현실적으로는, 혹한 것 외에도, 이 계기 내지는 뮤즈가 지금 이 구조 내에서, 제가 십 년간 써 온 구조 내에서도 제게 좋은 것들을 가져다주고 있어서 구조를 조정해서 그 계기를, 그 뮤즈를 제 삶에 합병시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평행우주가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며 그 평행우주에 제가 없이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또 동시에, 제가 그것들 없이 삶으로써 갖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들 역시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얻을 건 엄청 많은데, 저만 잘하면 제가 잃을 게 없겠더라고요.

이런 계기는 진짜. 살면서. 너무 적지 않나요?

저는 감을 믿는 편입니다. 감이란 게, 자주 오지 않아요. 살면서 몇 번 안 와요, 이런 종류의 감은. 아까 말한, 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가 되는 그런 레벨의 감은 정말 손에 꼽아요. 정확히는, 제 경우에는 이번 계기가 두 번째입니다, 제가 태어나서 두 번째예요.

첫 번째로 이런 감이 왔던 때가 언제냐면, 그때가 10년 전이었습니다. 2012년 4월 4일, 그냥 갑자기 ‘나는 글을 써야겠다’ 생각한 그날. 그날 이랬어요. 그 날 그냥 알았어요. 나는 글을 쓸 건데, 평생 그럴 것이다. 글을 안 쓰는 나는 죽은 나일 것이다. 그게 뭐, 물리적 죽음일 수도 있고 상징적 죽음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글은 안 쓰면 나는 내가 아님으로 해서 죽은 내가 될 것이다. 그 현재의 순간에 앞으로의 미래가 그럴 것을 알았고, 과거의 모든 순간들도 그 현재의 순간으로 모이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 사회적 의미에서의 종교적 경험이 아닙니다, 이건. 이건 그냥. 굳이 다른 단어를 붙일 필요가 없는 경험이에요. 종교라는 말을 끌어다 올 필요가 없고요. 그냥 아는 겁니다. 그 순간에. 다른 어떤 설명 필요 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가 되어서, 모든 것이 설명이 되고 다른 설명은 필요 없는 찰나의 순간이 있었어요.

이것 때문에 제 인생 구조를 송두리째 바꿨습니다. 그 순간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 순간은 매 순간에 있었어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었어요. 그리고 또 과거에도 있을 거였고 현재에도 있을 거였고 미래에도 있을 거였어요. 또한 과거에도 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어요. 이… 시간과 공간이 없어지는 경험인 거예요, 그러니까.

왜냐하면 시간이 없어지면, 즉,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가 되면, 공간도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계속 한 자리에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내가 시간 속을 흐르면서도 유지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게 됩니다.

이런 역대급의 순간이 인생에서 처음 발생한 게 2012년 4월 4일이었다는 거죠.

이게 음…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인 것 같아요. 좀 클리셰하지만, 이런 얘기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보는 순간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걸 알았다. 이게 클리셰가 된 이유가 있을 거예요. 모두가 그런 현상을 겪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현상이 그렇게 희귀한 것도 아닙니다. 희귀하지 않다고 해서, 심지어 흔하다고 해서 그 가치가 덜해지는 종류의 현상도 아니고요.

사랑이 찾아오는 순간 아는 거예요. 이 사랑이 없는 나는 죽은 나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랑을 하다가 만약 사랑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것은 더는 내가 아닐 테니까. 나는 죽고, 다른 뭔가가 태어나더라도 그건 이 사랑 없는 나일 테니 죽은 나겠지. 그러니 현실적, 논리적, 이성적으로 봤을 때는 좀 미친 것 같아도, 이 사랑을 어떻게 어떻게든 곁에 두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이런 겁니다.

제 경우에 이번 계기는 글쓰기 계기처럼 날짜가 분명한 건 아닙니다. 정확한 시작이 기억이 안 나요. 2022년 10월경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때도 확실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12월 초쯤에는 확실했던 것 같아요. 이번 계기는, 저번 계기와는 달리, 스며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번 계기와 달리 이번 계기는 저처럼 이렇게 주절주절대는 인간한테도 좀 믿기 어려운 계기였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봤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 되는 걸.

참고로 제가 그걸 봤다고 해서 제가 무슨 미래를 예측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현재, 과거, 미래가 하나가 되면 그것은 예측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또한 예측이 불필요하기도 하거니와, 제가 본, 내지는 느낀 그 찰나의 순간은 아주 아주 아주 작고 핵심적인 상징 같은 겁니다.

즉, 제가 무슨 뭐… 2030년이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차가 생길 것을 예측한다든가, 2040년에 핵전쟁이 난다든가, 이런 걸 예측하는 게 아니고요. 아주 근본적인 것. 그러한 기술적 변화나 세계정세 변화에도 끄떡없을 것. 핵 중의 핵. 그런 걸 말하는 겁니다.

저는 사유하는 사람에게 이런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핵. 그리고 핵 중에서도 그 핵. 표피 말고, 겉면 말고, 핵. 그리고 저는 이걸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곳저곳에서 논해지는 철학적 담론 중, 사람이 바뀔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주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드러나는 양상이 바뀔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어느 정도냐면, 제가 얼마 전에 MBTI 테스트를 다시 했습니다. 뭐, 한 5년 전? 7년 전에 처음으로 했고, 최근에 다시 했단 말이죠. 최근에 다시 하기까지의 5, 6, 7년 동안을, 그 세월 동안을 저는 제가 INTJ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INFJ에 걸쳐진 INTJ. 이… MBTI 테스트를 보면 퍼센테이지를 알려 주거든요. 얼마나 F인지, 얼마나 T인지. 극강의 F일 수도 있고 극강의 T일 수도 있는데, 저는 거의 반반 F와 T 사이였어요.

그런데 최근에, 몇 달 전에, 이것도 이… 구조 조정 할까 말까,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확인하는 작업에서 MBTI를 다시 해본 건데, 성격이 바뀌었다고 나오는 거예요. 제가 ENTJ래요, 얘가, 테스트가. 아니. 너무 웃겨가지고.

이거 보고 제가 이혜원 기획자한테 그랬어요. ‘혜원아. 이 테스트가. 책 팔려고 관종이 된 나를 외향적인 걸로 몰아간다.’

그러니까 이런 테스트는 정말이지… 이 테스트 구조 자체가 사람의 핵은 절대 모릅니다. 테스트 문항을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이 테스트는 현재의 상태에 대해 물어봐요. ‘너는 사람들 만나는 걸 좋아하냐?’ 이런 식으로 물어봐요. 사람 만나는 게 왜 좋은지, 이런 것까지 안 물어보고, 물어보지도 못합니다. 이 테스트는 말하자면 원시적인 투표물 같은 겁니다. E에 해당하는 거 손드세요! 하고, I에 해당하는 거 손드세요! 하고, 더 많이 손든 쪽에다가 ‘네가 이겼다’ 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 핵이 변해서 I에서 E가 된 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양상이 변한 걸 갖다가 이 테스트는 ‘성격이 변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아무튼. 저는 핵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갖고 있는 핵으로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느라 양상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핵을 보호하느라 생겨나는 여러 방어 기제 때문에 핵이 바뀌는 것처럼 보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즉, 웬만한 외부 관찰자가 보기에는 실제로 사람이 바뀌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정말 정말 정말 가까운 사람, 핵을 공유한 사람, 핵에 닿은 사람은 알 거라는 게 제 이론입니다. 무엇을 아느냐? 그 사람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변할 수도 없다는 걸.


제 첫 번째 인생 계기, 2012년 4월 4일의 계기는 핵에게 가장 친절한 방향으로 구조를 조정하게 해주었습니다. 다른 면에서는 안 친절해요. 다른 건 다 슈방구예요. 그러나 핵에게는 친절하다.

그런데 이 두 번째 계기. 이제 제가 계기로 인정하기로 한 이 뮤즈 계기는 음… 제가 이것 때문에 구조를 바꾸려고 생각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렇게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가장 큰 이유가, 아이러니하게도 이겁니다. 제가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뮤즈 계기가, 계기 뮤즈가, 저를 지원해준다는 점. 저더러 바뀌라고 하는 게 아니라는 점. 바뀌어야지만 머물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는 점. 오히려 반대예요. 그래서 좀 무서운 느낌도 듭니다.

그 뮤즈 계기, 계기 뮤즈 때문에 바뀌고 싶은데, 너무 혹하는데, 그런데, 나의 핵을 유지하지 않으면, 또한 양상도 유지하지 않으면, 이것은 나를 떠날 것 같다.

이게 좀. 무서운 겁니다. 그러는 동시에 아름다운 겁니다.

제가 좀 수수께끼처럼 말했잖아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가 된다. 그러려면, 그러한, 뭐랄까, 영감의 순간은 과거의 나를 전부 부정하는 것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과거의 내가 전부 다 말이 되게끔 하는 무언가일 겁니다.

그래서 어… 이 정말… 참말로 수수께끼 같이 들릴지도 모를 이 에피소드를 왜 팟캐스트로 녹음하고 있냐면요. 이것을 여러분이 고려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혹시나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 되는 영감의 순간이 올 때 그것이 여러분이 지금껏 갖고 살아온 핵을 부정하는 순간인지 그것을 지원하고 그것으로부터 나아가게 해주는 순간인지.

여러분이 아무리 힘들고 우울하고 포기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걸 하찮은 것으로 버리라고 주장하는 영감인지, 아니면 그것을 비료로 이용해 자라나게끔 해줄 수 있는 영감인지.

지금 제가 하는 말이 ‘포기를 하지 말아라’, 이런 게 아니에요. 한아임, 아픈 거 엄청 싫어해요. 통증 싫어하고요. 아픈 거 참고 버텨라, 이런 거 정말 싫거든요. 포기할 때 포기하는 게 맞아요.

그러나 그만할 거 그만하고 버릴 거 버리더라도, 그거에 대한 서사가 있을 겁니다.

한아임은 또, 이야기하는 자잖아요? 그러니, 서사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인간이 서사로 해결을 못 하는 게 거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게 무서운 점이기도 해요. 고통과 고난을 겪으면서 그걸 자칫하다가는 아름답게 포장해서 영원히 고통스럽고 고난을 겪는 수도 있어요.

그러나 서사를 잘 쓰면 어떻다? 고통과 고난에서 벗어나서 그것을 과거에 두면서도, 그러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가 되어, 모든 게 말이 되고, 모든 게 평화로워지고, 모든 것의 조화가 맞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이러한 순간은… 열심히 한다고 찾아오는 게 아니고.

안 올 수도 있습니다. 안 온다고 해서 잘 살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온다고 해서 잘 사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러나 그 순간이 오면. 오면, 알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그러한 순간이라는 걸.

그러합니다. 참말로. 어… 이번 에피소드, 좀 당황스러우신가요? 그럴지도 몰라요.

아임 드리밍은 시즌마다 구조가 조금씩 변합니다. 팟캐스트의 구조가 변하는 것도 저의 정신 상태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구조가 없는 건 아닙니다. 구조가 변화하는 거지, 구조가 없는 건 아니다.

틀 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측면이 있고, 저는 그래서 틀을 꽤 좋아합니다. 틀이면서도 말랑하기에 바꿀 수 있는 틀. 남이 부여한 틀 말고, 제가 사용하는 틀. 그리고 이 ‘남’이라는 단어에는 더는 제가 아닌 저도 포함됩니다. 예전의 제가 특정 틀을 사용했다고 해서 지금의 제가 그걸 계속 일부러 쓸 필요는 없습니다.

2022년이 갑니다. 이제 곧 2023년입니다. 한 해라는 개념도, 편의상 인류가 쓰는 틀입니다. 때로는 몇 날 몇 시에 만날지 정하는 행위가 필요하니까. 공동의 틀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그 틀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그걸 이용할 수 있는 만큼 이용하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한 해가 달력상에서 끝나고 다른 한 해가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간단하며, 누구한테 더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편리한 계기입니다. 미니 계기예요. 작은 계기.

그래서 이걸 계기 삼아, 우리, 시작 툴 키트를 다뤄봅시다, 이번 시즌에. 동양에서는 또. 시작의 계기가 참 여러 번 있잖아요, 연초에. 양력 새해도 있고, 음력 새해도 있고, 새 학기도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작할 계기가 참 많아요. 이거, 좋은 것 같습니다.

이번 시즌에 제가 구조 조정을 시작하며 실제로 사용할 툴에 대해 얘기할 겁니다. 실용적인 것도 있고, 좀 사유적인 것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결국엔 두 개가 하나가 아닌가. 과거 현재 미래가 핵에 중요한 무언가에 대해서라면 결국 하나이듯. 사유에서 도구가 나오고, 도구는 사유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하여. 어느덧. 이렇게 얘기를 했더니. 벌써 시간이 꽤 갔습니다. 역시 시간은 놀라워요.

여러분, 2022년 마무리를 잘하셨으면 좋겠고, 2023년에 또 만납시다.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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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음악

Opening

  • All Things Fade – Jameson Nathan Jones

Within episode

  • Flake Dance – No Synths – Ian Post
  • Freedom – Shahead Mostafafar
  • The Night of the Magic Elves – Francesco Dandrea

Closing

  • Sugar Colours – Crazy Paris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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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한아임

소개

✨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