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4] 육중물성: 형태와 존재

아임 드리밍 [Ep. 4] 육중물성: 형태와 존재

1: 오프닝

00:00:00-00:03:12

[음악: Sarah Kang – Make You Mine – Instrumental]

안녕하십니까?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이것은 잠을 못 자는 사람들이 잠에 대한 압박감을 잊고, 적당히 남의 딴생각을 하다가 잠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팟캐스트입니다.

잠을 잊는 게 포인트이기 때문에, 엄청 조용하지만은 않습니다. 또한 잠을 잊는 게 포인트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잠 들어라, 잠 들어라’ 말하지 않습니다.

약간 청개구리 같은 분들이 들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우리의 이 국제적인 팟캐스트 리스너 클럽, 이전 에피소드까지 한국, 미국, 일본, 영국, 폴란드를 포함했던 우리의 작지만 범위는 엄청 넓은 클럽에 새로운 국가가 합류했습니다. 독일입니다. 제가 이 분석을 앵커닷컴에서 보고 있거든요. [오류입니다!!! 닷컴이 아닙니다!!!] 네. 반가워요 독일 청취자님.

오늘의 수다에 대한 대강의 주제는요, 물성입니다. 물질성. 물질이 갖고 있는 육중함. 그러니까, 아무리 날씬하더라도 결국 차지하게 되는 자리.

그리고 그와 관련된 것들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자, 그럼, 오늘의 수다, 시작할게요.

[음악 FADE OUT.]


2: 시공간을 뛰어넘는다는 것

00:03:12-00:08:09

네. 여러분. 지금 이것을 듣는 여러분은 제가 이것을 녹음하고 있는 방에 같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이것을 실시간으로 듣고 있지도 않습니다.

요즘 각종 소셜 미디어에서 ‘실시간’이라는 개념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아서, 저는 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라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어떤 콘텐츠가 있을 때, 그것을 만든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 있어야만 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뉴스를 제외한 TV 방송 같은 것이 그러합니다. 드라마, 예능 같은 거요. 그것은 대개 방송 사전에, 다른 곳에서 녹화된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티비 방송의 시대 훨씬 이전에는 오히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반드시 같은 시공간에 있어야만 했다는 점입니다.

구전 서사시 같은 것이 그렇죠. 아니면 뭐, 예를 들어, 옛날 옛적에 장터가 있었는데, 거기서 전래 동화를 얘기해 준다든지.

그렇다면 이 두 극단 사이. 그러니까 시공간이 완전하게 일치하는 경우와 완전하게 불일치하는 경우가 반드시 겹치지 않으며, 전후의 관계에 놓여 있을까요?

그러니까, 시공간이 일치하면 옛날 것이고, 시공간이 불일치하면 요즘 것일까요?

그건 아닌 것이 신기한 점이죠.

인터넷이 생긴 이후, 그리고 스포티파이 같은 구독제가 생기기 이전에는, 해적판 때문에 음악을 공짜로 듣는 게 너무나 쉬워져서, 음반 시장이 매우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라이브 공연은, 뭐랄까… 라이브는 라이브인 거죠. 그 자체로 대체 불가능한 가치를 갖는 것. 같은 시공간에서 숨쉬기 때문에. 좀 불편하더라도, 음악 외의 소음, 사람들의 땀 냄새, 밀치고 부딪히는 거, 그런 걸 감내할 만큼의 전율이 전해지는 것이 콘서트라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또… 요즘에는, 포트나이트 같은 곳에서 콘서트를 하기도 하죠. 이런 콘서트를 함께 보는 사람들이 같은 시공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공간이라는 게 더 이상 물질이 아니게 된 것일 수도 있잖아요.

네. 저는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결론을 지으려고 하는 생각들이 아닙니다. 이런 게 결론지을 수 있는 거였으면 이렇게 흥미롭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결론을 못 짓는 결정적인 이유는,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정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러한 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관찰은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이것이 옳다 그르다에 대해 생각하진 않습니다.


3: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00:08:09-00:16:22

[음악: Birthday Suite – Morphlexis]

참고로 여러분. 이 경우에 제가 옳다 그르다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경우에도 옳다 그르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랍니다.

또한, 옳다 그르다를 제가 결정하지 못한다고 해서 상대주의자인 것은 아니에요.

상대주의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태도가 뭔가… 안전한 사회의 초석이 될 수도 있기는 하지만, 또 반대로 위험할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라는 태도 때문에 명절 때 친척들이랑 안 싸울 수 있다는 좋은 점이… 있죠. 그리고 외부인이 다른 문화를 가지고 올 때 무조건적으로 싫어하지 않는다는 좋은 점이 있죠.

그런데 반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태도를 너무 당연하게 요구하기 시작하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회에서 어떤 잘못을 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그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돌로 처죽이는 게 그쪽 지방의 문화라고 해서, 그 문화를 그쪽 지방에서 고수할 뿐만 아니라 우리 동네에 가져와도 되는 걸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싫거든요.

특히나, 왜 ‘그럴 수도 있지’가 위험한가 하면요.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려면 그 사회의 룰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뭔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잦은데, 굳이 돌로 처죽이는 극단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우리 사회가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는 요소들을 선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일단 우리가 부모를 고른 게 아니니까요.

뭐, 우리가 부모를 골랐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대개는 그런 고르는 과정이 존재하지 않다고 믿기도 하거니와, 그런 과정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기억을 못 하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나는 사회를 골랐다는 주장은… 신빙성의 문제라기보다는… 뭐랄까. 영향이 없다고 해야 하나.

자신과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그것도 자신의 사회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회의 구성원이라도 대부분이 기억을 못 하는 과정이라면, 그것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영향이 없습니다.

오늘 참… 오늘따라 되게… 물성에 대해 얘기한다고 해놓고서는, 거의 뭐 가장 물성이 없는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네요.

[음악 FADE OUT.]

철학? 이라고 해야 하나요?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철학’의 정의가 이렇게 나와 있어요.

1.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흔히 인식, 존재, 가치의 세 기준에 따라 하위 분야를 나눌 수 있다.

2.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인생관, 세계관, 신조 따위를 이르는 말.

지금 제가 이렇게 주절거리는 것이 어디에 속하느냐를 따진다면, 1번보다는 2번에 속하겠죠.

네… 여러분? 저는 결론 없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개인적으로 저는, 개인적 절대주의자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선택한 것에 관해서는 절대성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의견이 바뀔 수는 있죠. 당연히. 그렇지만 의견이 만약 하루에 백 번씩 바뀐다면요? 참 정확히 어떤 기간에 얼마나 자주 의견이 바뀌는 게 좋다 안 좋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좀 너무 자주 바뀌면… 좀 그르다… 라고 대강, 생각하고 있습니다.

맨날 중요한 목표와 목적을 바꾸는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정도를 넘어서서, 한 개인이라고 보기에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이 중요하다는 기준 역시 모호합니다.


4: 개인과 영향

00:16:22-00:21:48

[효과음: THE NIGHT OF THE BOWL, Mallets, F maj, lullaby, phrase – Artlist Original]

‘개인’이라는 게 뭔가요? 정해진 몸에 들어 있으면 개인인가요? 그러니까, 물질이 중요한 건가요? 그렇다면 만약 제 팔다리가 절단되면, 팔다리를 잃은 저는 제 개인성을 잃게 되나요?

아마 많은 경우에, ‘그건 아니다’라고 대답을 할 것 같아요.

반면, 뇌를 다쳤다면? 아니면, 치매에 걸렸다면? 이러면 참… 물질성과 개인의 관계가 흐릿해집니다.

나는 분명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내가 나인 것을 모르거나, 내가 알던 사람들을 전부 잊는다면… 나는 나인가요?

그리고, 치매에 걸리지 않았는데 맨날 의견이 바뀌고 말이 바뀌고 목표가 바뀌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여겨서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자신을 매번 잃는다면, 그것이 한 ‘개인’인가요?

음… 이건 질문입니다. 결론이 없어요.

그리고 저는 이것의 과학적 정의는 모르겠어요. ‘개인’이라는 것의 과학적 정의를. 그런데 ‘개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었더라면, 소설도 없고 미술도 없고 메타버스며 법적 문제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뭐라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야 개인이라고 묶을 수 있는데 그 개인은 변하고, 개인의 개념도 변해요.

이상해요.

분명 물질에 구속된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정신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잖아요. 신체란 분명히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오늘 아침 먹은 음식이 소화가 잘 안 되면, ‘나’라는 것은 그 신체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나’가 정신뿐일 리가 없는 거라고 봅니다.

그러면 ‘영향을 받는다’라는 것 자체가 곧 어떤 것을 정의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걸까요?

어쩌면 이래서 2022년의 사람들이 이렇게나 퍼스널 브랜딩, 인플루엔서 문화에 심취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공간을 넘어서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시대가 왔잖아요.

아무리 요즘 시대에 팔로워 얻는 게 힘들어도, 중세 시대 소작농이 팔로워 얻는 것보다 힘들겠어요? 그들은 글도 못 읽었을 텐데. 글도 읽고 전기도 사용하고 인터넷도 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나’라는 개인은, 그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존재를 증명하려면 끊임없이 영향력을 뻗어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는 것이죠.


5: 증명과 빈칸

00:21:48-00:34:18

[음악: Still Need Syndrome – Yarin Primak]

그래서 요즘에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질문 있잖아요.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그 나무는 소리를 내는가.’

이걸 뭐… 네, 아니오 정도로 답하라고 던진 질문은 아닐 거예요.

그런데도… 음. 네, 아니오 정도로 답해 보자면, 어쩌면 제가 개인적 절대주의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져도 나무가 소리를 낸다고 생각합니다.

나무가 아니까.

그런데 만약 나무도 모르면?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나무조차 모른다 하더라도…

특히 요즘 시대에. 지켜보는 자가 없으면 그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너무… 위험?은 적절하지 않고. 뭐라 해야 하나. 부질없어지는 게 많아진다고 해야 하나.

[음악 끝.]

왜 그. 어떤 식당에 갔는데,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남기지 않으면 내가 거기 가지 않았던 것이 되고 마는.

그리고 나한테 천만 팔로워가 없으면 남들보다 저질의 무언가를 생산하고 있다는 착각. 아, 그보다는, 반대 경우의 착각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나에게 천만 팔로워가 있으면 마치 내가 더 일을 잘하는 줄 아는 착각.

물론. 어떤 종류의 일은 실제로 팔로워 수가 중요할 수 있죠. 많은 사람들이 보느냐 마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팔로워, 혹은 다른 형식으로 지켜보는 이가 많기 때문에 영향력이 클 수는 있지만, 영향력이 작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실제로 하는 일이 저질임이 증명된다고 여기진 않거든요.

예를 들어 뭐… 우동집 두 개가 있는데. 우동집 A는 팔로워가 십만 명이고 우동집 B는 팔로워가 열 명이라서 우동집 A의 우동이 더 양질의 우동이 되나요?

그건 당연히… 아니겠죠.

그런데 저도 결국에는 이 질문, 이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그 나무는 소리를 내는가’라는 질문 때문에 팟캐스트도 하고 웹사이트도 만들고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를 포함한 사람들이 정말로. 놀랍게도.

왜, 그, 원래가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별로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관심이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하고, 그게 전혀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저는 제가 아예 조용히 있으면 사람들이 굳이 제가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게… 뭐, 갑자기 십만 명이 몰려와서 저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닙니다만, 이게, 사람마다 자신이 채워야만 한다고 여기는 빈칸이 있는 거예요. 그걸 제가 간과했더라고요.

이를테면, ‘채워야만 하는 빈칸’이란, 뭐, 그 사람이 사는 장소일 수도 있고, 아, 한국에서 나이 정말 많이 물어보죠. 서열 정리 하느라고. 나이를 모르면 호칭도 모르고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리고 또, 뭐, 다른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 학위. 외모가 출중한지 출중하지 않은지. 키가 큰지 크지 않은지. 옷을 잘 입는지. 영화를 좋아하는지. 등등등.

그냥 너무나 셀 수 없이 많은, 우리가 어떤 ‘개인’이라고 여겨지는 존재를 대할 때 기대하는 정보들이 있고, 그 정보가 제공되지 않으면, 사람에 따라 그것을, 그 빈칸을, 원하든 원치 않든 채우게 되더라고요.

저도 그래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가 그걸 간과하고. 뭔가 가만히 있으면 관심이 없으니까 특별히 빈칸을 채우지 않겠거니, 했어요.

그런데 이건 그러니까, 능동적 관심의 문제가 아닌 거예요. 저한테 무슨 어마어마한 관심이 있어서 사람들이 빈칸을 채우는 게 아니더라고요. 저 또한, 타인에게 어마어마한 관심이 있어서 빈칸이 있을 때 그걸 채우는 게 아닙니다. 그냥 저절로 채우는 거예요.

저 사람은 이름이 이러이러하니까 나이대가 이러저러하겠거니.

저 사람은 이런 종류의 영화를 좋아하니까 이런 사람이겠거니.

또 저 사람은 전공이 이거니까 이런 취향이겠거니.

이런 겁니다.

악의는커녕, 아무 ‘의’도 갖고 있지 않아도, 아무 의도 없이, 그냥 빈칸을 채운다는 겁니다.

일례로, 저의 본명, 그러니까 필명 한아임이 아닌 본명이 있을 거잖아요. 그게 만약 ‘박현진’이라고 쳐볼게요. 진짜 본명은 아닙니다. 그냥 예시예요. 그러나 저는 실제로 미국에서 학교 다니고 회사 다니면서 영어 이름을 쓴 적이 없습니다.

아무튼 본명이 ‘박현진’이라고 쳤을 때, 제가 ‘현진’은 너무 힘들 거 같으니까 ‘현 박’이라고 이름을 썼다고 쳐볼게요. 그런데 이 이름을 미국에서 이메일 시그니처에 쓰면, 그러니까 ‘현 드림’, ‘현 보냄’ 뭐 이런 식으로 이메일을 마무리하면, 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의 열에 아홉이… 제가 남자인 줄 압니다.

신기하죠? 이 열에 아홉이, 미국인일 수도 있고 한국어를 아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현’만 보고 여자들이 주로 쓰는 이름인지 남자들이 주로 쓰는 이름인지를 모르잖아요.

현희. 현준. 현식. 현서. 현주. 기타 등등. 너무 많단 말이죠. 심지어 ‘현진’이라는 이름 그 자체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대개는 제가 남자인 줄 알더라고요. 초면에. 이메일로 초면에.

이런 식으로. 말을 안 하면 사람들이 빈칸을 채웁니다.

그래서 제가 최근에, 2021년에 느낀 게 뭐냐면, 길게 봤을 때, 이 빈칸들을 적절하게 미리미리 메꿔주지 않으면, 오히려 복잡해질 수 있겠구나. 이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나 역시도 내가 누군지 알려면. 꺼내 보아야 한다.


6: 미래적 신체

00:34:18-00:39:06

[효과음: THE NIGHT OF THE BOWL, Harp, F major, singular ascent – Artlist Original]

그리고 저는 가끔 이런 생각도 합니다. ‘기술이 점점 발달하면서, 그리고 수명이 점점 길어지면서, 이런저런 신체 부위를 대체하면서 사는 경우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까지 내 신체를 대체할 수 있을까.’

‘기억’이란 게 너무나 강력한 것이라서, 팔다리가 절단된 사람들이 phantom pain을 겪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러면 저는 과연 저를 어디까지 대체할 수 있을까, 이 생각을 하는 겁니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시대가 오긴 왔는데, 동시에 또 그만큼 라이브의 가치가 높아진 시대이기도 하단 말이죠. 이것이 그러니까, 물질에 의존하며 살아온 시절이 너무나 긴, 인간이라는 종이, 물질을 완전히 잊기엔 어려워서 라이브가 더 가치 있어진 건지, 그런 궁금증도 있습니다.

비주얼적으로도, 오디오적으로도, 필터란 게 너무나 쉬워졌습니다. 저는 제 목소리로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것 또한, 그냥 제 생목소리는 아니에요. 생목소리를 그냥 팟캐스트에 쓰면요, 잡음이 있기 때문에, 적절히 필터로 녹음 파일을 깨끗하게 합니다.

그런데 숏폼 비디오의 대유행을 생각해 보면, 그 매력이란 게, 오히려 약간 러프한 것 아닌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매끈하게 잘 떨어진 오디오비주얼이 아니라. 약간 거친 것. 잡음도 있고. 그런 것. 왠지 필터가 없을 것만 같은 것.

그런데 또, 틱톡 같은 플랫폼은 필터가 엄청나다고 들었습니다. 화장을 안 해도 화장한 것처럼 보이게 해줄 수가 있다던데. 진짜인지? 저는 틱톡을 몇 번 들어가 보긴 했는데, 워낙 그… 빠르게 움직이는 비주얼을 싫어해가지고, 플랫폼 자체는 흥미롭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빠르게 움직이는 템포 자체가 제 취향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제대로 써본 적은 없고, 따라서 화장 필터가 있는지 없는지, 그 효과가 어떤지,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튼, 물성. 나의 몸. 나의 물질적 몸이 아닌 또 다른 여러… 뭐랄까. 조각들.

이 팟캐스트의 목소리 같은 것. 이 목소리는, 제가 요즘 실시간으로 그 어떤 실제 공간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오래 가고, 더 멀리 갑니다.

그렇다면 이 팟캐스트 목소리 조각은, 내가 ‘갖고 있다’고 여기는 그 어떤 나의 팔다리, 뇌, 이런 요소들보다, 타인이 보기에는 더욱 ‘나’인 것이란 말이죠. 그들은 나의 팔다리를 모르니까.

음… 그렇습니다.


7: 취향과 빈 공간

00:39:06-00:46:07

[음악: Who Blew the Whistle – Alon Peretz]

좀 덜 관념적인 얘기를 해볼게요.

제 취향에 관한 겁니다.

저는 어떤 면에서는 점점 더 물질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종이를 덜 씀이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종이책만 읽고, 종이 노트에만 글을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스마트폰도, 저는 전혀 얼리 어답터가 아니었어요. 제 나이대 사람들에 비해 꽤 늦게 썼던 것 같고, 노트북 컴퓨터 같은 것도 아주 초창기 때부터 쓴 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점점 더, 나이가 들수록 저는 물질성을 띠지 않는 것에 관심이 많아지더라고요.

이를테면, 글이 종이에 인쇄되었다고 해서 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이와 잉크라는 형태를 띰과 글 그 자체는 전혀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이라 함은, 뭐, 어떤 기준에서 봐도 더 좋지 않단 거예요. 저 같은 경우에는 신체적으로 꼭 종이로 읽어야 할 이유가 없거든요. 그래서 어떤 형태로 글을 읽어도 글자만 잘 보이면 그 물성 때문에 글이 더 재밌어지거나 더 감동적이게 되거나, 하지 않습니다.

옛날 옛적에 종이가 귀했던 시절에는, 실제로 종이에 인쇄된다는 그 자체가 그 글의 중요성을 입증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종이가 너무 흔하고. 너무 많이 버려져서요.

[음악 끝.]

사실 저는 2022년쯤 되면, 집에 다 3D 프린터 하나씩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책 같은 것도, 무슨 천 부씩 인쇄해서 안 팔리는 거 오백 부 파기하고 또 재활용하고 이런 게 아니라, 다 POD, 프린트 온 디맨드일 줄 알았어요. 자리도 안 차지하고, 낭비도 없이, 필요한 사람만 다운받아서 읽고, 재활용하고, 뭐 그럴 줄 알았단 말이죠.

책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전부.

그런데 웬걸… 아직도 기부니만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를테면 애플이 충전기를 콘센트에다가 연결하는 그 부분 있잖아요? 그걸 안 주는 이유가 환경 때문이라고 백날 말하면 뭐 할 건가요? 그거 다 결국 각자 사는데. 그냥 애플이 코스트를 안 먹겠단 거지 그게 뭘 환경을 위한 거겠어요. 전 애플 프로덕트가 장기적으로 가성비가 좋아서 그걸 많이 쓰는데, 그래도 환경 생각하는 척은 좀 심했지.

기부니만 좋게 하려는 거예요, 기부니만. 환경 생각하는 척하면서.

여러분, 기부니가 좋아지는 것 중, 그저 소셜에 퍼뜨리기 좋은 값싼 위로라서 행해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아무튼, 저는 물질에 대해서 예전보다 점점 더… 거의 회의적인 것 같습니다. 물질이. 너무 많아요. 넘치고 또 넘쳐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환경을 많이 생각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환경 때문이 아니라 성향상 낭비를 점점 더 싫어하게 되고 있습니다. 굳이 환경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자리가 없습니다.

특히나, 책 같은 경우에는… 저는 정말 물질로 된 책을 놓을 자리가 집에 없어요. 자리가 있어도 그걸 그냥 비워두고 싶거든요. 저는 시간이 갈수록 빈 공간이 가장 가치 있게 여겨집니다.

여러분,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보는 걸 다 DVD로 사서 집에 놔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자리 얼마나 차지할지. 책도 똑같은 겁니다. 그 많은 책을 보는데, 그걸 둘 자리가 저한텐 없습니다.


8: 수건과 화환, 그리고 공간성

00:46:07-00:53:55

[효과음: THE NIGHT OF THE BOWL, Harp, F maj, full phrase – Artlist Original]

아무튼, 이런 이유로, 제가 유일하게 글과 물질이라는 개념을 연결시킨 경우는, ‘수건과 화환’이라는 공간에서 전시에 참여할 때뿐이었습니다.

그 전시의 기획은, 물리적 공간에 여러 작가의 여러 글을 모아두고, 정해진 시간에 독자들이 와서 글을 읽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게 아주 흥미롭다고 생각했어요. 평소에는 뭔가를 만들 때 공간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요.

이를테면, 팟캐스트를 녹음할 때, ‘꿈자리 수다’라는 프레임이 있으니까 여러분이 대개는 밤에 듣겠거니라고 생각은 하고, 그에 맞춰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기는 하지만, 이걸 제가 100퍼센트 조종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진 않습니다. 여러분이 애플 디바이스를 쓸지. 안드로이드를 쓸지. 이어폰으로 들을지.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글을 쓸 때는, 종이책이라는 물질에 담길 글이라고 하더라도 독자가 어디서 어떤 형태로 글을 읽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종이가 아니라 전자 기기로 읽을 경우, 글 그 자체, 그러니까 알파벳이나 한글이 배열된 순서 외에는 제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게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e리더 같은 전자 기기로 읽으면, 글씨체, 줄 간격, 글자 간격, 배경색, 기타 등등이 전부 독자의 선택이 됩니다.

그리고 핸드폰 같은 기기로 읽어도, 글씨를 확대할 수도 있고, 나이트 모드를 설정해놓을 수도 있게 되는 거죠.

저는 이렇게 독자의 선택 폭이 넓어져도 글이든, 팟캐스트든, 그 자체가 전달할 것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과 팟캐스트가 하나일 수도 있어요. 이야기라는 건 형태를 규정짓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요.

글이란 것이 마치 인쇄된 것, 혹은 스크린에 보이는 것이라고 편의상 퉁쳐지는 경우가 있지만, 그 편의를 넘어서면, 정말로 글이 인쇄물인가요? 아니면 글이 스크린샷인가요?

이야기라는 게, 인쇄물인가요? 스크린샷인가요? 목소리인가요?

어린이에게 잠자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준다고 해서, 그러니까 그 애가 책을 자기 눈으로 보고 읽지 않는다고 해서 책을 안 읽는다고 하진 않죠? 네. 책을 ‘읽는다’는 개념이 다양해질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핸드폰으로 읽든, 이리더로 읽든, 종이책으로 읽든,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자꾸 종이책만 책이라고 하는 바람에 흔히 말하는 ‘요즘’ 사람들이 글을 안 읽는 것처럼 비춰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확한 통계는 없습니다만, 여러분, 그냥 한번 생각해보세요. 글을 전혀 못 읽던 시절이 있었잖아요. 그냥, 글 몇 자 배우면 엄청 배우신 분이라고 했던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그런데 요즘에 어때요? 그 많은 사람들이 정말 사상 최대로 글을 많이 읽습니다.

심지어 틱톡 비디오를 봐도, 그런 거 어떻게 하면 잘 만드는지 설명해주는 유튜브 비디오를 보면 꼭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오디오를 늘 켜놓지는 않기 때문에, 틱톡 비디오에 캡션을 넣으면 알고리듬에 좋다’라고.

그리고 유튜브는 어때요?

제목도 글이죠.

캡션도 글이죠.

설명란에 있는 것도 글이죠.

글은. 저는 이게. 음… ‘요즘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생각이 짧아지고 그들이 사유를 못한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말 그런가요?

사유가 달라진 게 아니고?

적응을 한 게 아니고?

생각이 긴 예전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의 그 짧은 생각, 쉬이 하던가요?

음… 네. 여기서 잠깐, 제가 인스타그램을 하던, 벌써 옛날이 되어버린 2021년 중반 정도에 올렸던 글을… 읽어볼게요.


9: ‘죽지 않아’

00:53:55-01:03:20

[음악: Dr. Molotov’s Cocktail (Shaken and Stirred) – Colonel Mustard]

제목: 죽지 않아.

요즘 인스타그램을 하다 보니 읽을 게 엄청 많아졌다.

오늘도 이 지구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요즘 사람들은 글을 읽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왜 내가 가는 데는 다 글이 범람하고, 글 읽는 사람들도 넘쳐날까?

1.

소크라테스인지 아리스토텔레스인지 테스나 레스 중 하나가 이랬다고 한다.

‘요즘 애들은 참 게을러. 어떻게 기억력을 발달시킬 생각을 하지 않고 정보를 글자로 적어두려고 하지?’

그렇다.

그들 시대에는 문자가 신기술이었나 보다. 그래서 ‘어른들’한테는 그게 아주 나쁘게 보였나 보다.

2.

컴퓨터가 만들어지자 사람들은 더는 종이가 필요 없어지게 될 줄 알았다고 한다. 근데 웬걸, 컴퓨터로 문서 작업을 하기 시작하자 그 어떤 때보다 많은 종이가 프린트하는 데에 쓰였다고 한다.

3.

얼마 전 유튜브에서 본 댓글인데, 이제는 비디오가 유행이기 때문에 사진이 사라질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모두가 인스타그램에서 릴만 찾고, 모두가 틱톡을 쓰며, 아무도 사진을 안 본다는 것이다.

나는 박장대소했다.

새로운 것이 나타나도 예전 것은 아예 사라지진 않으며, 그렇다고 예전 것이 예전의 광명을 누리리라고 착각하는 것 역시 오산이다.

현대인들은 스토리텔링을 종이로도 받아들이고, 액정으로도 받아들이며, 글로도 보고, 영화로도, 음악으로도, 만화로도 본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지구가 예전보다 살기 좋아져서 하찮은 평민인 우리도 글 배우는 것을 특권이 아니라 권리로 알며, 원한다면 책 만드는 원데이 워크숍에 가서 책을 만들 수 있고, 아주 여러 권을 원한다면 인쇄소에 가서 찍어달라 하면 된다.

성이 메디치도 아닌 주제에 예술가의 그림을 소유하질 않나! 스타, 즉 연기든 노래든 춤이든 그 예술이 어떤 식으로든 경지에 올라서 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온라인상에서나마 메시지를 주고받질 않나!

그런데도 글이 죽었다

소설이 죽었다

예술이 죽었다

아주 그냥 다 죽었다는 소문이 돈다.

어느 동네 사는 어떤 예술이 죽었는지 궁금하다.

아마 우리 동네 사는 예술이 아닌 거 같다.

중세 시대 기사들의 갑옷을 차려입고 운동회를 여는 동호회가 생길 정도로 전체적으로는 세상이 살기 좋아진 게 21세기다.

심지어 난 이제 좀 있으면 뇌에 스토리가 주입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냥 그게 또 하나의 스토리텔링 형식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머리에서 당신의 머리로

당신의 머리에서 나의 머리로

우리는 공상 과학에나 나왔던 텔레파시를 하게 될 거다…!

그렇다고 글이 사라지고 사진이 사라질까?

아니면 테스인지 레스인지가 그때 그 시절 ‘요즘 애들’을 나무랐을 때 걱정한 모양인 것처럼, 인간 기억력이 아예 사라질까?

둘 다 아닐 것 같다.

아니면 설마 혹시…

신기술에 과거의 것이 묻힌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보며 박장대소하는 내가…

혹시 멍청이…?!

오래 살아야겠다.

난 궁금하다. 죽었다고 소문난 게 먼저 죽을지, 아니면 죽었다고 소문낸 자들이 먼저 죽을지.

일단 내가 오늘은 안 죽을 예정인 것 같다.

나는 딱히 지병이 없다. 만에 하나의 경우가 아니라면 앞으로 몇십 년간은 심장 마비로 갑자기 죽지 않을 것 같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이렇게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죽었다고 소문은 간간이 나지만 아직도 죽지 않은 예술 중 하나인 소설, 글을 읽으러 간다.

심지어 인스타그램에서.

예술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 계정에 창작물을 매일 올린다. 계산해 봤더니 1년에 소설 한 권, 시라면 시집 여러 권이 나올 양이다.

아무리 양이 전부는 아니라지만, 매일 뭔가를 꾸준히 하다니! 그것도 꾸준히 한 그것을 세상더러 보라고 내놓다니!

그 자체로 예술적이지 않은가? 방구석에서 굉장히 예술적으로 예술을 논하는 것보다야.

행하지 않는 자가 행하는 자더러 모자란다고 하기는 참 쉽다. (내가 둘 다 해본 경험에 따르면 그렇다. 하는 것보다 말하는 게 쉽다. 완.전.)

아무튼 만약 당신이 이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200년 전 지구의 평균적 평민이 평생 동안 읽을 글보다 더 많은 글을 읽었을 거다. 그 평민은 글을 못 읽었을 확률이 높아서.

그러니

테스도 레스도,

메디치가 사람도,

중세 시대 기사도 아닌,

그냥 스마트폰을 손에 쥔 사람이

논해지는 예술이 아니라 실제로 행해지는 예술을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시대는

단군 이래 지금 이 시대다.

[음악: 끝]


10: 다시 수건과 화환

01:03:20-01:10:14

어떤가요? 여러분은 이 글을 눈으로 보고 읽었나요? 아니면 귀로 들었나요?

음… 네. 저는… 제가 짧은 글을 잘 못 써서 그렇지, 인스타그램에서 어쨌든 짧게 쓰려고 노력도 해봤고, 안 하던 걸 해봐서 좋았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인스타그램 플랫폼의 스팸성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거랑 별개로, 거기에 글을 올리는 행위 그 자체, 거기든 어디든지 간에 뭔가를 하는 그 행위 자체가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무언가가. 옆에서 누가 죽는다 죽는다 한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안 죽습니다.

요즘엔 기록 남기는 게 너무 쉬워져서, 전 세계 컴퓨터가 다 동시에 셧다운되고, 뭐 소행성 충돌이 일어나고,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냥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무언가가 죽기가… 어려워요.

특히나 소설이나 예술처럼 규정하기 어렵고 사실, 규정할 필요도 없다고 전 생각하는데. 아무튼 그런 것들은. 애초에 물성이 없고, 있더라도 매우 개인적인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당장 죽어도 이 팟캐스트가 남아 있을 거고, 심지어 누가 알아요? 알고리듬이 발달해서, 죽은 사람이 남긴 팟캐스트만 듣는 특이 취향을 가진 사람이 백 년 후에 이걸 듣게 될지.

아, 만약 당신이 이걸 먼 미래에 듣고 있다면… 어…

안녕?

네. 그러니까, 저는 취향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종이책을 좋아하든, 중세 시대 기사 패션을 좋아하든, 뭐 메타버스가 신이 나든, 고궁과 한복이 좋든, 비트코인이 좋든, 음악을 엘피판으로 듣든 스포티파이로 듣든, 그건 다 취향이에요. 자신의 취향이 세상이 움직이는 방향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정해진 공간에서 벌어지는 독서 행위도 죽지 않았어요.

수건과 화환이 전시를 하잖아요. 전시 이름은 ‘텍스트 뷔페’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2022년 1월 17일까지 계속되는 전시인데,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105-52에서 합니다.

포스터 ♥️
같은 글씨, 다른 색, 다른 느낌.

저는 수건과 화환 공간에 직접 가 보지는 않았는데, 사진으로 구조를 보았고, 이 전시는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을 읽는 환경을 제가 알 수 있는 아주 특이한 기회였습니다.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그 장소에서 글을 읽는 거였단 말이죠. 이건 상당히 신기하잖아요. 아주 여러 면에서, 이 전시에 참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글 제목은 ‘검은 구름 행성의 꿈’이었고, 소설이고, 파편화된 오프라인에서 읽히도록 나름대로 설계를 해서 쓴 겁니다. 아직은 보관소에 올리지 않았고, 전시 끝나면 올릴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여러 이유들로, 저는 평소에 공간을 생각하고 글을 쓰지 않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공간에 상관없도록 글을 쓰려고 하기 때문에, 수건과 화환 전시에 쓸 글은 새로 쓰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보관소에 올리면 또 다른결이 생길 거라 봅니다. 그건 그것대로 또 누군가의 취향이겠죠.

구전 문학이 구전 문학으로 지금 존재하는 이유는 구전을 문자로 썼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말하든, 누가 읽어주든, 본인이 종이로 읽든, 본인이 디지털로 읽든, 크게 상관없습니다. 다양한 결과 취향이 있겠지만,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해서 남들이 좋아하는 물성 있음이나 없음이 죽진 않으니까요.


11: 우연의 매력

01:10:14-01:19:08

[효과음: ILAN POST-THE NIGHT OF THE BALL Track 1 – Fairy Dreams – Mallets.A1 F maj.01 LOGO – Artlist Original]

그렇지만. 말씀드렸다시피 본디 의도가 오프라인에서 읽히는 것이었던 글은… 이 ‘검은 구름 행성의 꿈’이 처음이에요.

왜냐하면, 애초에 글을 읽고 쓴다는 행위는 라이브가 아니잖아요.

할란 앨리슨처럼 라이브 글쓰기를 하는 쇼맨십이 있는 작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죠.

아, 여러분? 제가 쇼노츠에 할란 앨리슨 할아버지가 작가한테 돈 안 주는 놈들 욕하는 비디오 하나 링크할게요. 언어를 못 알아들어도, 아저씨의 제스처를 보면, 재밌으실 겁니다.

할란 할아버지. 아. 몇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약간 욕쟁이 할아버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너무 괴팍하고. 전 너무 좋아합니다. 재밌습니다.

아무튼… 네. 수건과 화환 전시. ‘텍스트 뷔페.’

이… 여러 사람이 쓴 여러 글을, 또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한 공간 안에서 찾으러 다니고, 그것이 물질성을 띤다는 게 저는 너무 흥미로웠습니다. 특히나, 물질성을 띠어서 뭔가 더 통제가 늘어난 것 같지만, 동시에 그 공간 안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순서로 글을 어떻게 읽을지를 알 수 없다는 측면도 흥미로웠습니다.

왜 그. 저는 온라인보다 오프라인에서 오히려 랜덤성이 증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제 경우에는 그래서요.

제가 전에 그랬잖아요. 어디 여행을 가면 무작정 걷는다고. [파트 4: 여행 스타일] 이 큰 이유는 랜덤성을 증가시키려고 그런 겁니다. 왜냐하면. 관광객이 많이 가는 곳들을 가서 보게 되는 것보다, 갑자기 어디서 불쑥 튀어나오는 것들을 보는 게 좋아서 그런 거예요.

걷다 보면 우연히 보게 되는 것들이 있단 말이죠.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는 온라인으로, 전자 기기로 독서를 훨씬 더 많이 하지만, 서점이 전부 망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망하더라도 또 생겨날 거라고 생각해요. 마치, 중세시대 기사단 동호회처럼.

서점의 매력이란 책과 그 안에 담긴 소설 그 이상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저 역시도 앞으로 서점에 갈 계획이고, 전자 기기로 독서를 대개 한다고 해서 집에 종이책이 한 권도 없다는 게 아니에요.

제가 서점에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종이라는 물질이 갖는 냄새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오프라인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과정의 랜덤성을, 온라인 세상은 아직까지는 재현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점에서 책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것보다는, 온라인에서 어떤 식으로든 검색을 통해서 들어가는 게 좀 더 목적성을 띤단 말이죠. 아무리 어떤 커뮤니티에서 우연히 듣게 되는 소식이라고 할지라도, 그 커뮤니티에 내가 일단 들어가야 하는 거고. 그 커뮤니티는 이미 대개는 알고리듬화 되어있어요.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유튜브에서 우연히 어떤 소식을 들었다고 내가 생각하더라도, 그 소식 자체가 알고리듬의 결과물로서 나에게 추천된 비디오에 달린 댓글일 것인데. 그러면… 완전 우연은 아니란 거죠.

그러니까, 오프라인 서점에서 나를 모르는 서점 주인이,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골라놓은 상황은 온라인에서는… 거의… 재현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현 시스템 내에서는.

온라인에는 나를 안다고 생각하거나 착각하는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프라인 공간은 분명 매력이 있고, 죽지 않을 겁니다.

서점, 혹은 수건과 화환처럼 전시라는 맥락에서는, 사람이 용감해집니다. 울타리가 있어서. 안 보던 책도 보고. 안 읽던 작가를 집어보고.

그러니 ‘우연’에 대해 다시 얘기해보자면. ‘텍스트 뷔페’ 전시에서는 사람들이 글을 어떤 순서로 읽을지조차 저는 모르는 거예요. ‘검은 구름 행성의 꿈’이라는 이야기가 조각조각 쪼개져 있었거든요.

그래서 전 뭔가… 사람들이 어떤 순서로 글을 읽느냐에 따라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그런 걸 쓰고 싶었고.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기승전결이 기승전결이 아닌 이야기.

승전결기일 수도 있는 이야기.

전결기승.

결기승전.

아니면 기랑 승만 읽고 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전과 결만 읽고 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게. 랜덤성. 공간성. 물리성과 어우러져서. 질문이 없기에 결론은 없으나 너무나 흥미로운, 재미난 경험이었습니다, 저한테는. 그리고 글을 읽으러 간 사람들에게도 재미난 경험이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약 10일 정도 전시가 계속되기 때문에, 한국에 계신 분들, 서울에 계신 분들, 한번 가보시면 좋겠습니다.


12: 마무리

01:19:08–01:21:22

[음악: To the Moon and Back – Ty Simon]

여기서 ‘급’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음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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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한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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