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여러분. 저는 최근에 ‘피로사회’라는 책을 다시 읽을 계기가 있었습니다. 한병철 님이 쓰신 독일어 제목 Müdigkeitsgesellschaft로 출판된 것을 김태환 님이 한국어로 번역하신 것이 ‘피로사회’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는 책입니다.
‘피로사회’는 책이 굉장히 짧습니다. 손에 딱 들어오는 책이에요. 저자인 한병철 님이 최근, 그러니까 약 6개월 전 어느 공식 석상에서 말씀하시기를, 책을 쓰실 때 모든 부분을 밑줄 그음 직하도록 쓰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책을 요약하거나, 뭔가 그 뜻을 더 깊게 이해하려고 밑줄을 긋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책 전체가 다 밑줄 그어져 버리는, 그런 현상을 지향하신다고 해요. 그래서 이 책을 요약한다는 건, 책 자체가 짧은 데다가 저자가 그런 현상을 지향하는 만큼, 어… 참 그래요. 책의 모든 부분이 다 핵심이라서.
그래서 이 책은 한번 직접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리되, 그래도 요약을 하자면, 이런 겁니다.
한동안 근대 인류는 주인과 노예가 분리된 세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공장주와 공장 노동자의 분리가 그 예입니다. 그런데 2010년에 나온 이 책, ‘피로사회’에서, 한병철 님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제는 주인이 곧 노예다. 그래서 예전처럼 노예가 주인에 반항해 들고 일어나는 일이 아예 불가하다. 이제 우리는 우리 각자가 주인이자 노예이기에, 과잉 긍정 속에서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극도의 고독한 피로함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그래서 피로하다.
여기서 말하는 과잉 긍정은 제가 누누이 싫어한다고 말한, 그런 종류의 과잉 긍정입니다. 무슨 뭐, 긍정적이면 다 된대. 그리고 또 다 해야 된대. 해야만 한대. 그러한 형태의 긍정이 얼마나 피로한지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를 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2010년경에 이 책이 나왔을 때쯤에 사서 읽었을 때는 이러한 생각이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렇게 이 책을 읽고서 책장에 넣어 두었다가, 최근에 다시 읽었습니다.
일단은. 2010년경에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의 ‘오!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하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큰 이유는 이거였어요. 이 책의 말이 맞아서. 너무 맞았어서, 지난 10몇 년간 그것이 사회의 일부가 되었으니까. 이미 받아들여지는 것은 더는 쇼크가 없잖아요. 그래서 ‘옳다구나!’ 하는 느낌이 더는 있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또한 한아임은 깨달았습니다. 한아임은 지금도 피로하다. 다만, 이 책의 대부분 부분에서 말하는 피로와는 좀 다른 형태의 피로이며, 그것이 이번 에피소드에서 다룰 내용입니다.
여러분. 이 책이 벌써 13년이나 된 책입니다. 그리고 사회는 점점 더 빨리 변합니다. 특히 기술적으로. 1200년대부터 1300년대의 100년이라는 기간 동안의 변화보다 1800년대부터 1900년대의 같은 기간 동안의 변화가 더 빨랐고, 2000년부터 2020년은 100년이 아니라 20년에 불과하지만, 그 사이에 생긴 변화들을 생각하면… 세상이 너무 달라졌습니다. 더 좁혀서, 이 책이 나온 2010년부터 현재, 2023년까지의 13년이라는 시간 동안에도. 너무. 세상이 너무 변했어요.
찾아보니까 2007년에 아이폰이 나왔네요. 아마존 킨들 기기도 같은 해에 나왔습니다. 유튜브는 이것보다 몇 년 전인 2005년에 설립됐습니다. 그런데 2005년 혹은 2007년에 이들이 등장했다고 해서 바로 주류화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적어도 3년에서 5년 정도 걸렸다고 쳐 봅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피로사회’는 이러한 새로운 기술들이 주류화되던 바로 그때 출판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3년이 지났습니다. 아이폰, 킨들, 유튜브는 이제 주류화라고 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주류 정도가 아니라, 이들 없이는 사회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곧 사회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러한 지금, 2023년 다시 ‘피로사회’를 읽었던 겁니다, 제가, 최근에.
그리고 이렇게 변한 사회에서, 번아웃이나 피로라는 단어 역시 너무나 그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게 지금의 우리는 번아웃 혹은 피로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들어서 이것에 대해 전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있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피곤하다고 그러면 나약하다고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피로에 대한 생각을 모든 개개인이 똑같이 하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인 사회의 기조가 피로라는 것의 존재를 받아들이잖아요. 특히나 번아웃이라는 것의 존재. 번아웃 신드롬이라는 단어 자체가 있잖아요.
즉, 번아웃은 이미 정상의 일부가 된 겁니다. ‘정상’의 표준국어대사전 정의는 이겁니다. ‘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 그리고 ‘제대로’의 정의는 이겁니다. ‘제 격식이나 규격대로.’ 혹은 ‘마음먹은 대로.’ 혹은 ‘알맞은 정도로.’ 혹은 ‘본래 상태 그대로.’
그러니까 번아웃이 정상의 일부가 됐다고 말할 때 제 뜻은, 번아웃이 ‘좋다’는 게 아닙니다. 좋아서 정상인 게 아니라, 번아웃이 사회의 당연한 일부로서 받아들여져서 정상이라는 겁니다. 2023년 현재,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며, 누군가가 번아웃이 왔다고 했을 때 그런 것은 존재할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울 겁니다. 번아웃은 그냥 사회의 당연한 일부가 됐어요. 나한테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남이 그런 상태라고 해서 전혀 놀랍지는 않은. 심지어 번아웃이 유행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은.
네. 사회는 많이 피로합니다. 주인과 노예가 같기에, 노예는 주인에게 반항하거나 도망칠 수 없습니다. 스스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쉬는 시간이라는 것의 개념조차 모호해지고, 팽창에 초점이 맞춰진 채 멈추지 못합니다.
‘피로사회’라는 이 책에서 말하듯이, 주인과 노예가 분리됐던 시대는 갔고, 주인이 곧 노예인 시대가 너무나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요.
참고로 여기서 ‘간다’고 함은 이전의 것들이 없어진다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무엇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냐 정도 같습니다.
이를테면, 주인이 곧 노예이며 노예가 곧 주인인 세상이 ‘왔다’고 해서 주인과 노예가 분리된 경우들이 아예 전부 다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지금처럼 프리랜서와 small business의 시대에도 거대 공장들은 존재하고, 심지어 철학에서 말하는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을 넘어선, 진짜 노예와 같은 환경에서 일하는 경우도 동시에 진행됩니다. 이를테면, 옷을 비윤리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어린이 노동을 착취한다든지. 그러니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건 그전의 것들이 다 사라진다는 게 아닙니다. 특히나 당장 사라진다는 건 아니에요. 유기적인 개개인으로 이루어진 사회 역시 유기적이기 때문에, 버튼 하나를 눌러서 스테이지 1에서 스테이지 2로 넘어가는 식으로 확확 바뀌는 게 아니니까요.
2023년 현재, 유튜브의 시대. 거의 모두가 스마트폰을 갖고 있고, 킨들 기기든, 그러한 기기를 파는 아마존 같은 대기업에다가 자기 물건을 팔 수도 있는 상태.
이 부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한 시대가 가고 다른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가는 시대와 오는 시대가 겹쳐져 있다는 거.
유튜브, 대기업이죠. 아마존, 대기업. 애플, 대기업. 삼성, 대기업. 주인은 지금도 있습니다. 노예도 지금 있어요. 철학적 의미에서의 노예도 있고, 정말 진짜 노예 같은 삶의 환경도 안타깝게도 계속해서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또 뭐가 있죠? 유튜브에서 개인 브랜딩 해서 돈도 벌고 열심히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해야죠. 기술이 주어진 만큼 그거 이용해서 나의 최대치 성과를 올려야 하죠. 아마존이나 비슷한 대기업에다가 내 제품 가져다 팔아야 하죠. 그러니까, 남의 시키는 일을 하면서 하루 종일을 보내고 왔어도 또 집에 와서는 자유로운 듯한 내 일을 해야 된다는 생각이 2023년 현재 너무나 정상으로 자리 잡지 않았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정상’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그렇게 하거나 하고 싶어 한다는 게 아니라, 누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단 뜻입니다. 직장인이 퇴근하고 집에 와서 어떤 형태로 부업을 하든 사업을 하든, 아무도 이제 놀라워하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이렇기에. 2023년 제가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옳다구나!’의 느낌이 없었다. 각종 기술 발전과 함께 번아웃 내지는 피로라는 개념은 너무나 정상화되었으니까.
이게 참 아이러니예요. 어떤 통찰이 극도로 들어맞게 되면 거의 그게 통찰처럼 안 느껴지게 됩니다. 2010년에 책이 나왔을 때 그렇게 충격적이었던 통찰들, 내지는 그 통찰들을 가능케 한 기저의 현상들이 13년에 걸쳐 사회에 스며들고 나자, 한아임은 그 통찰이 곧 기정사실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아임이 느끼는 피로는 ‘피로사회’라는 이 책에서 말하는 주인과 노예가 하나가 되어 스스로 쉬지 못하는 피로와는 약간 결이 다르다.
물론,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러한 피로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또 못하다. 왜냐하면 한아임이라는 개인도 이 사회와 마찬가지로, 예전의 것이 가고 새로운 것이 온다고 해서 완전히 예전과 동떨어지진 못하니까. 이건 개인의 노력으로 완전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회에 아직 현실판 노예제도가 있고, 노예제도까지는 아니어도 개개인들을 노예처럼 부리려는 제도나 조직들이 있고, 거기다 사회에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는 자기 계발 및 극도의 고통스러운 존버 정신이 팽배해 있는 가운데, 한아임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겁니다.
제가 이전 에피소드에서 잠깐 언급했었듯이, 저의 정신적 문제 중 하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말 잘하는 사람들 세상에 많고, 볼 거 너무 많고 들을 것도 너무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은데 그걸 다 제대로 연습할 시간은 없고. 너무나 그… ‘이거 언제 다 해’ 느낌. 이게 있어서.
그런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하지만, 저의 피로는 ‘피로사회’에서 말하는 정확히 그 상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 상태는 세 번째 상태도 포함하고 있어요. 즉, ‘피로사회’ 책에서 과거의 것이라고 말해주는 주인과 노예가 분리된 첫 번째 상태도 아니고,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해주는 주인과 노예가 하나 된 두 번째 상태도 아닌, 그 다음, 세 번째 상태.
그렇다면 이 세 번째 상태는 무엇일까? 이건 책에 나오는 게 아니고, 한아임의 생각입니다. 저의 생각에, 지금 현재 스스로를 과잉 긍정으로 채찍질하며 무한 팽창이 정상이라고 주장되는 세태에 회의를 느낀 주인이자 노예인 이들이 향하고 있는 다음 단계는 주인도 노예도 없어지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저의 피로를 고독하게만 하지는 않으며, 심지어 제가 느끼고 싶은 피로는, 바로 이 피로입니다. 제가 주인이자 노예라서 느끼는 피로가 아니라, 주인도 노예도 아니라서 느끼는 피로.
앞으로 말할 것들은 순전히 한아임의 관찰에 기반한 생각입니다. 워낙 아임 드리밍은 한아임이 주절주절 얘기하는 팟캐스트니까요.
한아임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일들을 합니다. 이것저것 해요. 팟캐스트도 하고 책도 쓰고 번역도 하고, 뭐 많이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에 대한 동기의 일부는 제가 지나갔다고 주장하고 있는 사회상들에서 ‘정상’으로 일컬어지는 것들과 겹칩니다.
주인과 노예가 분리된 면이 한아임에게도 있습니다. 누가 저에게 시키는 일을 할 때도 있어요. 제가 일을 시킬 때도 있고요. 이때 시키는 자와 하는 자는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으며, 하는 자는 해야 하는 일만 하고 나면 완전히 손 털고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동시에, 주인이자 노예인 면도 있습니다. 타인이 저한테 하라고 굳이 시키지 않기 때문에, 제가 스스로 모니터링 하지 않으면 안 하게 되는 일들이 있어요. 글도 어느 정도 그렇고, 이 팟캐스트도, 제가 이걸 안 한다고 하면 뭐… 슬퍼하실 청취자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지만, 만약에 제가 생활고에 시달려서 도저히 팟캐스트를 할 시간이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그 어느 누가 저한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팟캐스트를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느냔 말이죠. 저 말고는 저한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저한테 시켜서 하는 일이에요, 이거. 제가 저한테 시키지 않으면 이 팟캐스트는 없습니다.
그런데 요게 좀 애매하단 말이죠. ‘내가 나한테 시켜서 하는 일이다.’
여기서 ‘시킨다’라는 단어가 아주 애매해요.
사실 이 단어의 애매함에 대해 생각하다가 ‘피로사회’가 저문다는 생각까지 가게 된 겁니다. 제가 이 책을 다시 읽을 때까지 저는 주인이자 노예인 상태에 꽤 확실하게 머물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리고 생각을 해보면 해볼수록… 이게… 아닌 거예요.
이 책에서, 그리고 이제는 책의 통찰이 너무나 보편화되었기에 2023년 현재 사회에서 말하고 있는 긍정 과잉이라든지, 팽창 집착이라든지, 고독한 피로라는 것이… 이게 제가 움직이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생각에, 제가 스스로 ‘나는 주인이자 노예다’라는 패러다임을 갖고 있었던 이유는, 제가 생각을 안 했기 때문이에요. 제가 게을렀어요. 그래서 받지 않아도 되는 스트레스를 받았고, 느끼지 않아도 되는 피로를 느꼈어요.
이제는 보편화된 이 통찰의 패러다임을 그냥 갖다 쓴 거예요. 제가 그 패러다임에 맞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번아웃이든 피로든 잠재력 계발이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든 투잡이든 파이어족이든, 이런 개념들이 보편화되어 있으니까, 제가 아무 생각을 안 하고 그 패러다임을 갖다 쓴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 패러다임의 부작용인 피로를 느낀 겁니다.
그러나. 그러나 생각할수록 아니란 말이죠.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그 패러다임을 쓸 필요가 없었단 말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 생각에 이겁니다.
제가 저한테 뭔가를 ‘시킨다’고 할 때는, 그것에 어떤 목적성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있을 때도 있지만, 없을 때도 많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 극단순하게 말하자면 저는 대부분의 일을 순전히 좋아서 합니다. 그리고 뭔가를 좋아하는 이유의 가장 기저에는 이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숨 쉬는 것과 같다.’
제가 몇 번 말했잖아요 예전에. 글을 안 쓰면 머리가 아프고. 몸이 안 좋아지고. 심지어 머리카락이 빠지고. 잠을 못 자거나 너무 많이 자고. 식욕이 없어지거나 너무 많아지고. 이게 뭐냐면, 숨 쉬는 것처럼, 이걸 안 하면 살 수 없어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스스로를 모니터링하면서 글을 쓰려는 것은 글을 씀으로 해서 성취감을 이뤄서가 아니에요, 사실. 그럴 수도 있잖아요. 어떤 이야기를 다 쓰면 그것을 마무리했다는 것에서 뿌듯함을 느끼는 경우.
그런데 저는 이게… 이 성취감이 놀랍도록 적습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요. 처음 몇 이야기를 끝마치고 나서, 별로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던 거. 감동적일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별로 안 감동적이었어요.
왜냐하면 이 이야기 하나를 끝마친 게 포인트가 아니니까. 오늘 쉴 숨 다 쉬었으니까 이제 그만 숨 쉬어야겠다고 생각 안 하잖아요. 아니면 평생 쉴 숨 미리 댕겨 쉬고 쉬어야지, 이런 생각 안 한단 말이죠. 그것과 비슷합니다. 이야기 하나 다 썼으면 다음 이야기 써야지.
그러니까 성취감 때문이 아니라, 모니터링을 하지 않으면 남이 시키는 일이나 내가 나를 채찍질하느라 해야 한다고 여기는 일들에 글이 밀려서 등한시되는 수가 있으니까 모니터링을 하는 게 가장 근본적인 이유인 겁니다. 물론. 글 쓰기 시작한 초반에는 저를 믿지 못해서 진짜 노예 부리는 주인처럼 모니터링한 것도 있지만. 지금 현재에도 내가 글을 쓰나 안 쓰나 확인하는 이유는 그때와 결이 다르다는 거죠. 마치 남이 시키는 회사 일이나, 내가 채찍질하느라 스스로에게 가하는 자기 계발을 하느라 끼니를 거르는 일이 생길까 봐 내가 밥을 잘 먹고 있나 확인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생각을 하니까 제가 뭔가를 시작할 때 구조를 잡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 되더라고요. 구조를 절대 하나 하고 끝나는 식으로 안 잡아요. 왜냐하면 구조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삶에 받아들이기로 한 것, 즉, 숨쉬기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영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거더라고요.
우리가 태어날 때, 이왕이면 오래도록 숨 쉴 수 있는 구조를 갖고 태어나고 싶지, 하루 쓰고 갈아야 하는 신체를 갖고 태어나고 싶지 않잖아요. 그런 겁니다. 한 번 하고 안 할 것들에 대해 저는 점점 더 관심이 없어져요.
팟캐스트를 해도 계속할 수 있는 구조.
글쓰기도 책 한 권을 쓴다는 생각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스토리텔링을 한다는 구조.
운동을 할 때도 1년 다이어트해서 살 뺀다는 생각이 아니라, 영원히 포에버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
식단도 그렇고, 물질적인 걸 구매할 때도 그렇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것들은 닳으니까 언젠간 버려야 할 때도 있지만, 저는 일회용품이 너무 스트레스예요. 그래서 항상… 제가 환경에 별로 관심이 없는데도, 그리고 밖을 돌아다니다 보면 환경에 안 좋은 여러 물품도 쓰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환경에 꽤 괜찮은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 막 포장된 걸 보면… 스트레스받아가지고. 쓰기 싫어서 안 써요. 저거 다 버릴 거잖아. 그런 것보다는 내 삶에 놓고 두고두고 쓸 수 있는 뭔가를 소장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특징들은 주인과 노예가 통합되어 발생하는 무한 팽창과는 결이 다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숨쉬기’라는 삶에서 빠질 수 없는 행위에 다른 행위들을 포함시킨 거였어요.
그런데 이걸 갖다가 ‘너는 숨 쉬는 것을 멈출 수 없도록 중독되었으니까 너 자신이 피로한지도 모르고 점점 더 긍정 과잉에 매몰되어 가는 존재야’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뭔가가 너무나 삶의 일부라서 멈출 수 없는 것과, 성취 그 자체에 취해서 멈출 수 없는 것 사이에 분리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찰은 한아임 개인의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무슨 특출한 생각이냐? 하면 그건 전혀 아닙니다. 앞서 등장한 시대들, 즉, 주인과 노예 분리의 시대, 그리고 주인과 노예 합병의 시대와 동시다발적으로, 이제 좀 여기저기서 눈에 띄기 시작하는 듯한 새로운 시대가 이 시대입니다. 주인도 노예도 아니고, 그냥 숨 쉬는 것처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시대.
이 가장 최근의 시대에 대한 얘기가 요즘에 눈에 띕니다. ‘피로사회’ 같은 근사한 이름이 붙여진 시대는 아닙니다. 아직 이름이 없어요.
그런데 실제로 이런 경우들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 아무 기대 없이,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들을 세상에 내놓는 경우. 예를 들어, 춤을 좋아한다고 하면.
옛날 옛적에는 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춤추는 데에 보내고 싶다면 어떤 단체에서 고용을 해주기를 기다려야 했을 겁니다. 발레단이든. 다른 형태의 댄스 컴퍼니든. 아르바이트생으로서든.
그런데 최근에는 개개인이 좀 더 주도적이게 됐죠. 프리랜서로서 일을 한다든지. 1인 기업이 된다든지. 더 나아가서는 퍼스널 브랜딩을 하고 부수입을 만들고 직장을 때려치우고 유튜브 채널을 만드는 경우.
그런데 요 다음 시대가 오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입니다. 이 시대는 앞선 두 시대와 더욱 더 다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앞선 두 시대, 즉 주인과 노예 분리의 시대와 주인과 노예 합병의 시대가 어마어마하게 다른 것 같아도, 이 두 시대는 춤을 좋아하는 이 예시의 주인공이 춤을 추는 근본적인 이유는 망각하고 있어요. 주인과 노예가 분리됐든, 주인이 곧 노예든, 뭔가를 얻기 위해서, 성취하기 위해서 춤을 추고 있는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춤꾼이 춤을 좋아하는 이유가 먹고살기 위해서냔 말이죠. 당연히 아니죠. 저는 춤을 못 추고 춤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춤꾼은 정말. 이 춤꾼이라는 단어 너무 좋지 않습니까? ‘꾼’이라는 단어가 멋있는 것 같아요. 재주도 있는데, 자기 일을 사랑하는 것 같아. 그리고 꾼이라는 말이랑 찰떡처럼 잘 붙는 단어는 항상 춤이에요. 왜일까? 노래꾼이나 운동꾼이나 글꾼 이런 말은 안 쓰잖아요. 그런데 춤꾼은 항상 춤꾼이야.
춤꾼이 춤을 좋아하는 이유가 누군가에 의해 고용되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걸 2023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제 말은, 춤꾼이 춤을 좋아하는 이유가 유튜브 채널 만들어서 퍼스널 브랜딩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춤꾼은 춤이 그냥 좋아서 춤을 추는 거예요. 누가 춤꾼을 알아주고 박수 치고 보면 더 좋겠지만, 아무도 없어도 춤을 출 테니까 춤꾼일 거란 말이죠.
그런데 이제. 드디어. 그러한 춤꾼을 위한 시대가 오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겁니다.
‘피로사회’에서도 언급되듯이, 한 시대가 저물고 다음 시대가 온다는 것을 다음 시대가 구체화되기도 전에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현시대에 대한 피로가 누적되는 게 눈에 띄기 시작하면 알 수 있습니다.
즉, 주인과 노예가 분리되어 있던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은 노예의 반란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주인이 있지만, 노예들이 예전에 비해 항시 반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인과 노예가 분리된 시대가 저물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비슷하게, 주인과 노예가 합병된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은 주인도 노예도 되기 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호소로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 이 호소의 초창기 단계 같아요. 한평생 계속 무슨 자기 계발, 스스로 채찍질, 팽창, 이런 거 하기 싫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는 것 같고. 번아웃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있겠다는 게 아니라, 주인과 노예라는 개념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는 의미로 저는 해석합니다. 제 생각에 ‘성과’라는 것 자체를 믿는 한, 주인이 나이든 타자이든, 괴롭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성과’라는 잴 수 없는 것, 혹은 재더라도 끝이 없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 게 아니라, 다만 오늘 내가 숨 쉬듯이 내가 하려는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면 훨씬, 정말 훨씬 스트레스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순전히 멘탈 관리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 멘탈 관리를 통해 심지어 잘먹고 잘살 수 있는 최초의 시대가 2020년대인 것 같다. 기술적 발달 때문에 이제는 춤꾼이 춤에 대한 수수한 사랑으로 잘먹고 잘살 수도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게 아닌가, 라고 한아임은, 참 이상적이게도,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시대가… 없었잖아요. 일단 뭔가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랑을 중심으로 삶이 돌아가려면, 엄청 넓은 망을 던져야 합니다. 만약 인터넷이 아예 없어서, 내 사랑을 내 옆집 사람들 10명밖에는 알 가능성이 없으면, 그 사랑이 아무리 깊고 순수하더라도 그걸로 잘먹고 잘살 수 있을 가능성이 너무 희박해요. 그러니까 인터넷이 없는 시대에는, 주인이 노예가 되기조차 사실 힘든 시대고, 주인도 노예도 아닌 인간으로서 살기에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거의 불가능한 시대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현재, 2023년. 지금이야말로 원래 하려던 거 숨 쉬듯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잘먹고 잘살 수 있는 시대가 열리는 게 아닌가. 다시 춤꾼으로 돌아가자면, 그저 춤을 추며 살고 싶었던 사람이 댄스 컴퍼니에 고용되거나 개인 교습소를 차리지 않아도, 정말 극단순화하자면, 틱톡에 춤 영상을 올려서 원래 추려던 춤으로 살 수 있는 시대가 왔지 않았냐는 겁니다.
틱톡을 해서 돈을 벌고 유명해지려는 것과 원래 춤을 좋아해서 틱톡을 하는 바람에 돈을 벌고 유명해지는 것은 좀 결이 다르다고 봅니다. 이것도 한아임의 이상주의인지 모르겠는데, 저는 전자가 결국엔 들통난다고 생각해요. 요즘 사람들, 눈치 빠릅니다. 하도 돈 벌고 유명해지려고 틱톡이든 유튜브든 인스타든 뭐든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별로 좋지도 않은데 좋은 척하고 일부러 하는 것을 1년, 5년, 10년 유지한다? 힘들 거라고 봅니다. 진짜 자기 일을 너무 사랑해서 그 사랑이 넘쳐나는 사람은 티가 나요. 그리고 이제는 그런 티 나는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시대가 됐지 않았냐는 겁니다.
참고로 제가 ‘사랑하는 일’이라고 할 때, 무슨 사랑이 그 자체로 저절로 밥 먹여 줘가지고 이 사람이 무료로 모든 걸 제공해야 한다거나,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사랑하는 일로 얼마든지 돈 벌 수 있고 돈 벌어야 마땅하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하는 생각 중 하나가 시장이 사랑이라는 생각입니다. ‘시장’이라는 단어가 노예 대 주인 패러다임과 함께 좀 더럽혀진 것 같아요. 그런데 시장이라는 단어는 있은 지 오래됐습니다. 현대의 자본주의보다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시장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받는 아름다운 장소입니다, 여러분. 이 단어가 요 몇십 년간 엄청난 스트레스와 부담을 동반하게 된 것 같은데, 안타깝습니다. 사랑도 시장에서 나눌 수 있어요. 그래서 시장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서로 필요한 걸 나누지 못하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각자 갖고 태어난 것만 갖고 평생 살아야 하는데, 그 ‘평생’은 아마 엄청 짧을 겁니다. 진짜 수명이 줄어들 거예요, 서로 거래를 못 하면. 돈이란 건 가치를 주고받는 도구이기 때문에, 사랑이 가치가 있다면, 서로의 동의하에 사랑을 시장에서 주고받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무튼, 심지어 유튜브, 아마존, 애플 등등의 대기업에 대한 불만도 높아지고 있는 이 상황에, 오픈소스 무료 소프트웨어들은 언제나 여기저기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영미권에서는 요즘 트위터의 소란으로 인해 블로깅이 다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트위터처럼 중앙화된 동네의 거주자들이 과연 탈중앙화된 밀림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트위터를 떠났으니 어딘가로 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블로깅 디렉토리들이 마치 90년대에처럼 다시 생겨나더라고요. 그러니까, 역시나 또, 시간은 앞으로 흐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것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Seth Godin이라는 마케팅계의 능력자가 있는데, 이분이 말하는 것들이 제가 말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이분 책 중 The Practice라는 책이 있어요. 그리고 이분이 블로그를 매일 하신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이분의 삶의 방식과 이분 책이나 각종 유튜브에 나오는 말들이 제가 하려는 말과 비슷합니다.
이분이 자주 얘기해요. 자신이 블로그를 매일 하는 이유는 무슨 기똥찬 할 얘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내일이 왔기에 그곳에 새 포스트가 있는 것뿐이라고.
즉, 이분은 돈을 벌려고 일을 하는 게 아니고, 포스트를 올렸으니까 성취감을 느끼려고 하는 게 아니고, 사업도 성취를 하거나 계발을 하거나 하여간에 뭐 무슨 그런 목적을 따로 갖고 하는 게 아니라, The Practice. 매일매일의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이게. 이 말이. 너무 맞아요. 사랑해서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일합니다. 도대체 기똥차다는 것의 기준이 뭐냔 말이죠. 성과의 기준이 뭡니까? 타인이 시키든, 내가 스스로를 채찍질하든, 성과의 기준이 뭐냐고요. 그런 어차피 알 수도 없는 기준이 아니라, ‘다만 내일이 왔다’는 기준이 사랑으로 일하는 사람의 정신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어마어마한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들 아니까. 노예와 주인이라는 개념의 존재 자체가 피로하다는 거. 그런 개념을 벗어나서 사랑으로 행하는 사람을 볼 때, 세상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주인과 노예의 분리는 지금도 존재하는 패러다임이지만, 별로 잘 팔리지는 않는 구제품이고.
주인이 곧 노예가 되는 패러다임 역시 현존하지만, 근래에 불만이 누적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마치 숨 쉬듯이, 당연히 그러하듯이, 조건 없이 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잘먹고 잘살 수 있는, 주인도 노예도 아닌 시대가 오는 거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자신의 패러다임을 바꾸려고 해요. 주인도 노예도 아닌 패러다임으로. 이렇게 ‘생각을 바꿔야지’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참 스토리텔링의 동물인지라, 스트레스가 줄어들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거든요. 반면, 벌써, 이미, 숨 쉬듯 글을 쓰는 것뿐이다, 숨 쉬듯 팟캐스트를 하는 것뿐이다, 라고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반 이상 줄어듭니다.
제가 오히려 아주 아주 아주 초창기 글 쓸 때는 이랬어요. 왜냐하면 기대하는 게 없었거든요. 글 쓰는 행위를 모니터링하면서도 별로 스트레스가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에 아주 그냥 욕망덩어리가 되면서 스트레스가 늘어났는데, 다시 좀. 욕망을 줄여라, 갖고 싶다는 생각을 아예 없애라, 이런 게 아니고요. 목표를 갖되, 시간을 빠르게 가게 할 수 없는 인간밖에 되지 않는 저 자신을 굳이 스트레스줄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숨은 미리 쉴 수가 없으니까요. 오늘의 숨은 오늘만 쉴 수 있습니다. 오늘 쉴 숨 내일로 미룰 수 없고, 내일 쉴 숨 오늘로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게… 기준 없음이 스트레스를 상당히 많이 야기하는데, ‘오늘’이라는 개념은 지금까지도 인간이 참 어찌할 수 없는 불변의 기준이란 말이죠. 그래서 그러한 불변의 기준을 이용하면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제가 피로를 아예 안 느끼게 되진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타인이 내게 하기 싫은 일을 시켜서 생기는 현상이나, 내가 나 자신을 채찍질해서 생기는 현상이 더는 아닌, 다만 내가 오늘 쉴 숨을 쉬어서 생기는 현상이다. 라고 스스로 생각하면 저의 고질병인 ‘이거 언제 다 해’ 병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예전 에피소드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말했었죠. ‘이거 언제 다 해’에 대한 정답은 ‘언제 다 못 해’입니다. 인간이 숨 쉴 수 있는 기간은 한정되어 있어서, 그 양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뭘 다 하려고 하면 안 된다. 어차피 다 못 한다. 그것은 내가 무능해서가 아니고, 내가 무슨 내 잠재력을 인정을 안 해서가 아니다. 그냥 당연히 인간은 언젠간 죽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고 싶은 걸 다 해. 다만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걸 조금씩 할 뿐이지.
이럴 때 느끼는 피로가 ‘피로사회’의 끝부분에 나오는 말 같습니다. ‘피로사회’는 ‘미래가 이러저러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측하는 책은 아닌데, 이 끝부분에 다음 단계에 대한 암시가 있어요. 자기착취적인 피로가 아닌 종류의 피로에 대하여. 한병철 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때 나는 너한테 지치는 게 아니라, 한트케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너를 향해 지치는 것이다.’
한트케가 ‘우리-피로’라는 말을 했다고 해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내 기억으로는 늘 밖에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앉아 있었고 말을 하기도 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 [……] 피로의 구름이, 에테르 같은 피로가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 주고 있었다.’
한병철 님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아무튼. 멘탈 관리의 필요성을 제가 자각했기 때문에. 결국엔 차차 패러다임 전환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구조 조정에 필요하다.
저는 다 하지 못하고 죽을 겁니다. 네. 아무리 매일매일을 숨 쉬어도, 쉬고 싶은 숨을 다 쉬진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러나 숨 쉬는 동안에는 최대한 사랑하는 일만 할 거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심지어 내가 시킨 일도 아니고, 숨 쉬는 것과 같아서 내가 할 수밖에 없으며, 하지 않으면 정말… 아파지고. 괴롭고. 힘들어서. 도무지가 안 할 이유가 없는 사랑만 하면서 살 거다. 그리고 사랑하면서 만든 거, 글이든, 팟캐스트든, 블로그든, 뭐든, 다 이 세상에 내놓고, 그러고서 한아임은 숨을 거둘 것이다.
그러하다.
그리고 혹시나, 비슷하게,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숨 쉬다 죽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주절주절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모든 음악
Opening
- All Things Fade – Jameson Nathan Jones
Within episode
- Aves – Day Off
- FewDoors – Stay with Me
Closing
- Sugar Colours – Crazy Paris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 2023 한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