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49] 서로를 필요로 하는 흑백, “메트로폴리스”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여러분, 시즌 5의 시작입니다. 5월 5일, 어린이날, 시즌 5도 시작해요. 이번 시즌에 이혜원 기획자와 제가 지금 번역하고 있는 ‘누아르 어바니즘’이라는 책에서 언급되는 영화들 중, 구해서 보는 것이 가능한 영화들에 대해서 얘기하기로 했습니다. 국가마다 이 ‘구해서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상황이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 영화 보기의 첫 타자, <메트로폴리스>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스포일러 다분합니다. <메트로폴리스>의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이번 에피소드를 아직 듣지 마시고, 나중에, 영화 보신 다음에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메트로폴리스>. 캬. 일단 이름이 너무 멋지죠. 한 단어짜리 제목에는 강력함이 있습니다. 게다가 메트로폴리스는 영화 얘기를 하면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경우가 없을 정도로 영화계의 조상신 아닙니까? 1927년 영화고요. 무려 2시간 23분이나 됩니다, 길이가.

저는 이 영화를 ‘튜비’라는 사이트에서 봤습니다. 녹취록에 링크 걸어둘게요. 튜비는 중간중간에 광고가 나옵니다. 그런데 뭐, 2시간 23분짜리 영화에서 광고 타임은… 10번은 확실히 안 됐고, 5번은 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제가 이 영화를 아이패드로 봤거든요? 아이패드에서 사파리 브라우저로 봤는데, 광고가 나오려다가 영화가 잠깐 멈추기만 하고, 알아서 광고 없이 넘어가더라고요. 이건 왜 그런 건지? 음. 그래서 전혀 귀찮음 없이 영화를 봤습니다. 게다가 영화가 이렇게나 기니까, 오히려 광고가 중간중간에 끊어주는 게 고맙더라고요. 여러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는 어쩔 수 없지만, 사실 2시간 23분이나 옴짝달싹하지 않고 한자리에서 뭔가를 하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광고 타임 때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서 스트레칭도 해주시고, 화장실도 가주시고, 물도 마셔 주시고, 하면서 영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주의해야 할 점은, <메트로폴리스>가 무성 영화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소리 크기 설정을 간과하고 멍때리고 보다가 실제로 광고 영상 자체가 플레이가 되는 경우, 깜짝 놀라는 수가 있어요, 소리가 너무 커서. 제가 이번에 메트로폴리스를 볼 때는 광고가 없어서 괜찮았지만, 예전에 봤을 때였나? 다른 무성영화를 봤을 때였나? 엄청 큰 소리로 광고가 나오는 바람에 깜짝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이 점 유의하면서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1927년 영화다. 튜비 사이트에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한 줄 요약으로 대략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번역을 해보자면, “계급으로 극명하게 나뉜 어느 미래적 도시에서, 상류 사회 출신의 신사가 구원자의 도래를 예측하는 노동 계급 예언자와 사랑에 빠진다.”

네. <메트로폴리스>는 서사 구조상 매우 극명합니다. 사랑 이야기고, 계급 간의 싸움 이야기고, 위와 아래의 이야기입니다. 극과 극으로 나뉜 것들의 투쟁과 화합의 이야기예요. 그리고 그것이 영화의 비주얼에도 반영이 되어 있습니다.

좀 더 설명을 해보자면, 이 한 줄 요약에 나오는 ‘상류 사회 출신의 신사’ 캐릭터는 프레더라는 인물이고요. ‘노동 계급 예언자’로 나오는 사람은 마리아라는 인물입니다. 금사빠인 프레더 씨는 마리아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고, 마리아도 프레더를 처음부터 꽤 좋아하는 것 같아요. 왜냐? 그녀가 예측한 ‘구원자’가 프레더라고 생각하니까. 왜냐? 프레더가 이 도시의 1인자의 아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서.

프레더가 마리아를 처음 본 이후에,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발단이 되어 일련의 사건이 터지고, 폭동이 일어나고, 도시가 멸망할 뻔하고, 그러다 구원받는 내용이 <메트로폴리스>입니다.

그건 그렇고 여러분, 눈치채셨습니까? 네 시즌 동안 유지해 오던 네 글자짜리 제목의 틀이 오늘 깨졌습니다. 오늘 에피소드의 제목, “서로를 필요로 하는 흑백, “메트로폴리스””예요. 영화 제목을 에피소드 제목에 넣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고요.

네. 흑백. 다만 흑백 영화라서 흑백이 <메트로폴리스>에서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로 서사 및 서사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어, 흑백에 대해 얘기해보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지난 시즌의 끝에 말씀드렸듯이, 이건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 나오는 내용이 아니고요, 제가 영화 보고 제가 생각한 내용입니다. 실제 책 자체에 대해서는 나중에 책이 나오면 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흑백. 그리고 선악. 빛과 어둠. 이것이 영화의 처음 부분에서는 매우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위와 아래가 도입부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나요. 무성영화인지라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사는 없고, 중간중간에 타이틀 카드가 나오는데, 이것들의 움직임에 특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류 사회의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는 곳이 어딘지에 대한 소개가 나올 때는 타이틀이 세 줄로 나뉘어 이렇게 나옵니다.

“deep below

the earth’s surface

lay the workers’ city.”

뜻은 “지구의 표면 저 아래 깊은 곳에 노동자들의 도시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세 줄로 나뉘어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단어의 순서가 중요한 것 같아요.

“깊은 곳, 저 아래

지구의 표면 밑

놓여있다, 노동자들의 도시가.”

저는 요… 번역을 하면서 말의 순서가 바뀌는 게 참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무성영화인 이 영화에서는 타이틀 카드가 영화 안에 아예 들어 있잖아요. 영화가 있고 거기다 자막이 얹혀져서 자막을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타이틀 카드 자체가 영화의 일부란 말이죠. 이때 관객이 가장 먼저 보는 단어가 “deep”이고, 이 타이틀 카드 세트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보는 단어가 “workers’ city”입니다. 이 자체로 임팩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게다가 이 세 줄짜리 설명이 그냥 깜빡 스크린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화면의 위에서 떨어져서 아래로 내려옵니다. 그러니 더더욱, deep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단어이며, 같은 줄의 유일한 다른 단어는 below고, 그것이 아래로 떨어지다가 마침내 workers’ city가 나온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다른 언어로 보는 경우 임팩트가 이와 같을지 궁금해요. 영어의 경우 이런데, 혹시 다른 언어로 보면 다른지.

이다음에는 이제 하류 사회와 반대되는, 상류 사회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이때 타이틀들이 이렇게 나와요. 이번에도 여러 줄로 나뉘어져 나오는데, 그걸 끊어서 읽을게요.

“As

deep

as lay

the workers’

city below the

earth, so high above

it towered the complex

known as the “Club of the

Sons,” with its lecture halls and

libraries, its theaters and stadiums.”

뜻은,

“노동자들의 도시가 땅 아래 저 깊은 곳에 놓인 만큼, “아들의 클럽”으로 알려진 단지는 강의실과 도서관, 극장과 스타디움을 품고는 저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있었다” 정도인데, 이 모든 내용을 그냥 화면을 꽉 채운 문장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탑을 쌓듯이, 윗줄이 가장 짧고, 아랫줄이 가장 길도록 화면에 띄운 겁니다. 심지어, 이 줄들이 위로 올라갑니다. 탑을 형성하는 이 줄들이.

그래서 ‘대조’라는 개념이 영화의 초반부터 매우 극명합니다.

검은 화면에 흰 글씨들이 뜨고, 아래의 것과 위의 것이 있으며, 그들은 사회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심지어, 이… 설명의 양을 보세요. 노동자의 도시는 띡 하니 3줄 썼는데, 상류 사회 사람들이 머무는 곳에 대한 설명은 정성 들여서 탑까지 쌓아줬죠.

이후에도 흑과 백의 대조가 너무나 극명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움직일 때 그 움직임의 효과가 제 생각에는 컬러 영상에서보다 훨씬 강조됩니다. 이 영화에 사람이 정말 많이 나오거든요? 민중이 난을 일으키고 이런 씬들이 있기 때문에, 수백이 같이 나오는 씬도 있어요. 이때 이 사람들의 서로 각각 다른 점이 부각되는 게 아니라, 이들이 검은 옷을 입었으면 다 검어 보이고, 하얀 옷을 입었으면 다 희어 보이는 식으로, 덩어리진 움직임이 부각이 됩니다.

즉, 덩어리 간의 대조가 있기에, 덩어리 내부의 공통점도 부각이 됩니다. 일꾼들이 다 함께 일렬로 서서 한 방향으로 행진하는 것이 부각되는 이유는, 이전에 쌓아놓은 흑백의 대조, 위아래의 대조가 뇌리에 남기 때문이 아닌가.


이런 상태인데, ‘흑백’이라는 단어의 표준국어대사전 정의를 살펴봅시다,

“1. 검은색과 흰색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색조가 검은색의 짙고 옅음으로 이루어진 것.

3. 옳고 그름.

4. 흑인과 백인을 아울러 이르는 말.

5. 체육 – 바둑에서, 바둑의 흑지와 백지 또는 상수와 하수를 아울러 이르는 말.”

이렇게 정의가 여럿인데, 4번과 5번은 이 영화 내에서는 연관이 없고, 1, 2, 3번이 전부 연관이 있습니다.

일단 말 그대로 흑백. 1번 정의. 검은색과 흰색이다. 그렇게 뚜렷이 나뉘어져 있고, 3번도, 옳고 그름. 뚜렷이 나뉘어져 있는 어떤 것이다. 아까 말한 대조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2번 정의는 나중에 언급할게요. 왜냐하면 2번은 생각보다 대조가 아니거든요.

일단은, 극명하게 뭔가가 나뉘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1번과 3번 정의다.

그렇기에 ‘흑’은 도입부에서 노동자들의 음침한 작업복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의 지하 세계는 우울합니다.

그리고, 상류층이자 이 도시의 1인자인 프레더네 아빠, 조 프레더슨 씨 밑에서 일하는 비서 같은 사람, 조사파트Josaphat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꽤 높은 직위인 것 같은데도 우물쭈물하고 늘 겁을 먹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특히 이야기 초반에. 그런데 이 사람 옷 색이 어떻다? 완전 까맣다. 그래서 제가 보다가 ‘뭐지?’ 하고 있었어요. 1인자의 비서 정도면 꽤 높은 사람인데 왜 노동자들의 유니폼보다도 더 검은 옷을 입고 있지? 했는데, 웬걸, 금방 짤리더라고요. 조 프레더슨 씨가 조사파트를 자릅니다. 그래서 조사파트는 일꾼들의 도시로 떨어질 위기에 처합니다. 그래서 ‘아아아, 역시, 옷의 어두움 정도는 이 이야기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조사파트는 자살 시도까지 해요. 프레더가 그 시도를 막았기에, 조사파트도 마지막까지 살아서 이 이야기를 나름의 해피 엔딩으로 이끌긴 하지만요.

그리고 극 중에 정말이지 대단히 검은 옷을 입은 또 다른 캐릭터가 나오는데, 이 남자도 조 프레더슨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은 조사파트처럼 우물쭈물대는 캐릭터도 아니고, 잘리지도 않고, 자살 시도도 안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검은 옷을 입었는가? 그가 때때로 죽음과 동일시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Reaper예요. 저승사자. 인간이 죽으면 땅속으로 끌고 가기에, 어둠과 분리할 수 없는 그런 존재. 약간 청부살인업자 같은 아우라를 갖고 있고요, 이 인물이 말 그대로 저승사자라는 게 아니라, 후반부로 갈수록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프레더의 정신세계에서 저승사자와 동일시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 현실과 환상의 비경계성에 대해서는 차후에 더 얘기할게요. 일단 이야기의 초반에서는 비경계성보다는 경계성이 훨씬 더 두드러지고, 이 청부살인업자 같은 인물은 엄청나게 검은 옷을 입고 있고, 드라큘라 백작처럼 생겼다. 장갑까지 검은 장갑을 끼고 있습니다. 심지어 귀가 뾰족해요. 무슨 엘프처럼.

반면, ‘백’은 어떤가? 도입부에 나오는 금수저들은 얼굴 클로즈업도 그냥 안 나옵니다. 이들은 뽀사시 필터를 장착하고 등장해요. 햇빛이 짱짱하게 내리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하얘요.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선블록을 쓰나 봐요. 역시 기술이 좋은가 봅니다. 심지어 몸도 충분히 창백한데, 얼굴에는 분칠까지 희게 한 바람에, 운동을 하는 와중에도 그 얼굴이 동동 떠다닙니다.

이 밖에도 이 영화에서 매우 하얗게 나오는 것에는 증기가 있습니다. 증기 기관차 할 때의 증기. 공장의 굴뚝이 내뿜는 증기요. 이 증기가 검은 굴뚝에서 화면을 가로질러 내뿜어지는데, 그것이 마치 일은 노동자들이 하되, 뱉어낸 결과물은 뽀사시 필터꾼들이 가져가는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프레더가 최초로 일꾼들의 지하 세계로 들어가서 우왕좌왕할 때, 그의 눈앞을 가로막는 증기도 흰색입니다. 마치 지금껏 아무것도 몰랐던 프레더의 그… 순진함이 흰색이라는 듯이. 그 순진함이 그의 눈앞을 가로막는 바로 그 증기와 같다는 듯이, 일꾼들은 동일한 공간에서 잘만 걸어 다닙니다. 이들은 프레더만큼 순진하지 않아서인지 말이죠. 오직 프레더만 눈앞이 보이지 않아 당황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흑백으로 극명하게 갈린 세상은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예요. 화합이 핵심이에요. 이 영화는 아주 우화적인 영화입니다. 교훈이 분명해요. 가르치려고 만든 영화입니다. 주제가 꽤 초반부터 대놓고 나와요. ‘둘로 나뉜 것을 이으려면 중간자가 필요하다.’ 이게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를 갖고 마지막까지 끌고 갑니다. 아주 그냥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주제다!’ 하고 끝나요.

그런데 이게… 이게 흥미롭단 말이죠. 흑과 백을 분리하는 게 필름메이커의 목적이 아니라, 흑과 백이 합쳐지는 얘기를 하려는 게 목적입니다.

아까 언급했던 마리아 있지 않습니까? 그녀의 등장 씬이 한 예입니다.

마리아는 어느 날 갑자기 하류 사회 아이들을 수십 명 끌고는 상류 사회 사람들이 노는 장소로 들어옵니다. 여기서 프레더를 만나고, 프레더 씨가 금사빠라는 게 드러나는 겁니다. 마리아 주변에 몰려 있는 아이들은 노동 계급의 짙은 색 옷을 입고 있지만, 마리아 본인은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이게 다만 프레더가 첫눈에 반해서 뽀사시 효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 서사적으로, 마리아 역시 프레더와 흡사하게, 흑과 백을 합치는 데 일조하는 인물이라서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노동 계급 출신이긴 하지만, 마리아까지 완전히 흑이면 백으로의 길을 터줄 수 없으니까요. 예언자의 역할을 해줄 수 없으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빛이 난다. 하얗게 빛이 나는 마리아가, 자신이 데려온 아이들더러 ‘여기 있는 이 상류사회 사람들이 너희 형제들이다.’라고 말을 하고, 마치 영화 <인셉션>에 나오듯이, 프레더의 뇌리에 생각의 씨앗을 심어두고 갑니다. 프레더는 이래요. ‘나의 형제들이라니…! 띠용…!’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흑과 백이 이어지는 내용의 서사이지만, 그래도 이 도입부에서는 아직도 흑백이 뚜렷합니다. 예를 들어, 마리아와 아이들을 쫓아내는 시종들은 검은 바지를 입고 있고, 상의는 흰색이다. 즉, 이들은 상류사회에서 일을 하긴 하지만 하인이다.

반면, 프레더는 이 씬에서도 다 하얘요. 얼굴도 허여멀건하고, 옷도 허여멀건합니다. 상의 하의 전부 다.

다만, 뒤로 갈수록 흑과 백이 이어지는 연결고리들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최초로 노동자들의 지하 세계로 들어간 프레더는 일에 치여서 매우 괴로워하는 한 노동자에게 옷을 바꿔 입을 것을 제안합니다. 11811번 노동자예요. 이 검은 옷을 입은 노동자에게 프레더가 자신의 흰 옷을 제안하고, 이들은 실제로 옷을 바꿔 입습니다. 빛과 어둠이 겉보기에는 자리를 바꾸지 않았지만, 알맹이는 자리를 바꾼 거죠. 즉, 프레더가 어두운색의 작업복을 입음으로써 겉보기에는 어둠이 여전히 어둠의 공간에 남아 있지만, 1인자의 아들이라서, 특히나 1인자가 순진하게 보호해 온 아들이라서 빛의 세계에 속했던 프레더라는 알맹이는 이제 지하 세계에 보다 완전하게 발을 들여놓게 된 겁니다. 그냥 입장만 한 게 아니라, 노동자의 옷을 입음으로써. 일도 열심히 해요, 프레더. 엄청 최선을 다해서 합니다.

이렇게 이미 프레더가 흑과 백의 경계를 넘은 시점에, 그는 카타콤catacomb, 지하 묘지에 대해 알게 됩니다. 메트로폴리스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2천 년 된 지하 묘지래요. 여기는 노동자들이 종교의식과 비슷한 모임을 하는 공간이에요. 여기서, 첫눈에 반했던 그 예언자와 프레더가 재회합니다. 마리아와 재회한다. 그리고 지하 묘지이기에 어둠으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그녀는 유일하게 빛을 냅니다. 이들의 첫 만남과 약간 반대되면서도 대칭되는 상황이죠. 처음에는 마리아가 빛을 갖고 빛의 세계…라고 딱 말하긴 좀 애매하지만 빛의 세계에서 허용한 약간의 어두운 세계로 들어왔습니다. 요 점 이따가 자세히 설명할게요, 왜 약간의 어두운 세계인지. 그렇지만 빛의 세계에서 허용하는 범위 내의 약간만 어두운 세계로 마리아가 빛을 갖고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그리고 나중에 재회할 때는 프레더가 어둠의 옷을 입고 어둠의 세계로 들어와, 그곳의 유일한 빛인 마리아를 바라본다.

그리고 바로 이 재회의 공간에서, 이 재회의 순간에, 프레더슨과 로트왕Rotwang이라는 미친 과학자 역할의 캐릭터도 노동자들 및 예언자를 염탐하러 지하로 내려갑니다. 프레더슨은 아까 말한 프레더의 아버지, 이 도시의 1인자고요. 로트왕은 미친 과학자인데, 기계 인간을 만들어서 사랑하던 여인이자 프레더의 어머니이자 프레더슨의 아내였던 사람을 되살리려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 설정 자체가 또 대조의 경계를 허무는 내용이죠. 죽음과 삶의 경계가 분명했는데, 죽은 이를 살리려는 로트왕은 경계를 허물려는 자이니까요.

아무튼, 이렇게 프레더와 마리아, 프레더슨과 로트왕까지, 여태껏 영화에 등장했던 모든 주요 인물들이 빛의 상징들과 어둠의 상징들 및 그사이의 존재들로서 최초로 만납니다. 만난다는 걸 아는 쪽은 프레더슨과 로트왕처럼 중간계에 머무는 자들이고, 만난다는 걸 모르는 쪽은 프레더와 마리아예요. 프레더와 마리아는 프레더슨과 로트왕이 자기들을 지켜본다는 걸 모릅니다.

그 와중에 이 장소는 어떻다? 메트로폴리스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지하 묘지. 그래서 가장 감춰져 있을 것 같지만 동시에 어떻다? 모든 진실의 요소들이 모이는 장소다. 진실이, 진실의 시작이 드러난다. 적어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노동자들이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 프레더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 프레더가 마리아를 사랑한다는 것 등등.

카타콤 공간은 또한 유기성을 띠고 있습니다. 직선이 아니라, 여태껏 영화에 나오지 않은 자연적인 곡선들을 띠고 있어요. 벽면도 평평하고 매끈한 게 아니라, 우리가 자연의 동굴에 들어가면 볼 수 있는 거친 특성을 갖고 있어요. 거칠다 함은, 빛이 반사될 때 그 굴곡에 의해 여러 방향으로 튕겨져 나갈 수 있음을 뜻하죠. 그래서 카타콤 전체가 지하 묘지라서 극도로 어두운 가운데에도, 그 벽면의 자잘자잘한 굴곡 하나하나에 빛이 담겨 있습니다. 어두운 가운데에도 빛이 있어요.

노동자들에게 설교를 하는 마리아 뒤에 세워진 십자가들도 반듯하게 세워진 게 아니라 삐죽삐죽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촛불도 여럿 있는데, 촛불의 높낮이도 다 다르고, 촛농이 녹아 있는 모양새도 유기적입니다.

그리고 카타콤이 등장하기 전에도 프레더가 노동자들의 지하 공간으로 들어간 후에야 각성하는 것을 보면, 깊은 곳,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진실을 알 수 없다는 메시지가 직관적입니다. 빛은 힘, 심지어 선과도 관련지어지는 듯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게다가 금사빠로 사랑에 빠진 프레더가 가장 먼저 해야겠다고 여긴 일이 지하 공간으로 들어가는 일이니까. 이것에 대해서도 여러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빛나는 ‘아들의 클럽’에 있던 프레더, 그는 사랑에 빠지자 지하로 빠져든다.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다가 보니까 “흑과 백이 분리되지 않고 합쳐지는 얘기다”라고 이 얘기를 보는 것 자체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느껴지더라고요. 흑과 백은, 어찌 보면, 분리된 적이 없었습니다. 흑백의 대조가 아무리 거대 테마의 가장 중심에 있더라도, 가장 흑인 공간에도 백이 있고, 가장 백인 공간에도 흑이 있습니다.

아까 언급했던 2번 사전 정의 말입니다. ‘색조가 검은색의 짙고 옅음으로 이루어진 것.’ 이거… 흥미롭지 않나요? 흑과 백이라고, 마치 검은색과 흰색에 대한 정의 같지만, 검은색에 대해서만 얘기합니다. 검은색의 짙고 옅음에 대해서만 얘기해요. 즉, 검은색의 정도의 차이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어째서 흰색의 존재와 부재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고 검은색의 짙고 옅음에 대해서 얘기할까요? 이 점도 신기한데. 사진 매체 같은 것에서, 혹은 우리가 빛의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측면에서, 이미 빛인 것에 검은색의 정도의 차이만 있게 추가한다는 뜻인지. 음…

아무튼 이러나저러나, 흑백이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라는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자면, 이 이야기가 ‘와, 흑이랑 백이 싸우다가 중간자가 나와서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했다!’ 같은 뭔가… 1 더하기 1이 되어서 2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라기보다는…

애초에 흑에도 백의 측면이 있었고 백에도 흑의 측면이 있었는데, 다만 서로를 인지하기 위하여 흑은 백더러 백이라 하고 백은 흑더러 흑이라 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마치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는 줄 알고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는 줄 아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둠과 빛이 서로 싸워서 중간에 누가 끼어들어야지만 둘이 사이좋게 지내는 게 아니라, 어둠은 어둠대로, 빛은 빛대로 존재함으로써 상대 역시 존재하게끔 해주는 역할이라는 거죠.

음… 영화에서의 주제는 이런 방향으로 드러나진 않습니다. 단, 초반에 흑백이 매우 뚜렷한 와중에도, 중간계, 회색의 존재가 분명합니다. 일단, 우리가 검은 점하고 흰색 점으로 이루어진 극단순화된 모델에 기반한 영화를 보려 하는 게 아니면, 당연히 사람의 형상은 흰 와중에도 검고 검은 와중에도 흽니다, 흑백 영화에서. 그래서 애초에 흑백은 나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편의주의에 가까운 프로파간다인지 알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거의 다 피부색이 같은데, 다른 색의 옷을 입혀놓고 조명을 달리해서 흑백 구도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이 주제를 그렇게 잡아서 그렇게 프레임하는 게 가능한 거지, 뭔가 이 인물들이 타고나기를 누구는 흑, 누구는 백이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흑도 백도 아닌 중간의 공간이 나와요. 바로, Eternal Gardens입니다. 여기는 어둡지도 밝지도 않습니다. 상류층 자제들이 노는 곳이라는 설정인데, 여기에는 여러 여자들이 반쯤 벗고 있는 상태로 차려입고서는 마스터 프레더, 즉, 이 도시의 1인자의 자식인 그를 접대하려고 기다립니다. 이 장소는 말 그대로 가든이에요, 정원. 그리고 나름 자연의 습함에는 어둠이 필요하다고 여겼는지, 흑도 백도 아닌 중간의 회색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일단 분수가 있어서, ‘아들의 클럽’처럼 햇살이 쨍쨍하고 보송하지도 않고, 노동자들의 일터처럼 기계의 미끈한 표면으로 둘러싸여 있지도 않습니다.

이런 장소를 왜 만들어 놓았을까? 흑과 백 사이에는 원래부터 그 중간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그것을 프레더처럼 뽀송하고 쨍쨍한 백의 공간에만 있었던 사람은 모르고, 어둠의 노동 공간에만 익숙한 일꾼들도 모를 수 있지만, 도시의 1인자인 프레더네 아빠는 압니다. 조 프레더슨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이 1인자의 이미지는 중간입니다. 그는 양쪽을 다 알고 있어요. 그의 거대한 사무실은 고층 빌딩의 위층에 위치했는데도 불구하고 제법 그늘이 져 있습니다. 또한, 눈썹과 머리카락이 프레더처럼 희여멀건하지 않아요. 아버지가 프레더보다 나이가 많을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도 프레더의 머리가 더 희어 보여요, 화면에서. 아무래도 옅은 금발이라는 뜻이겠죠? 아버지의 머리는 회색빛이고요.

그리고 이러한 회색의 겉모습이 암시하듯이, 프레더슨은 일꾼들의 끔찍한 사고 소식을 들을 때 놀라지 않습니다. 프레더는 깜짝 놀라가지고 가슴을 부여잡고 하소연을 하는데, 아빠는 안 놀란단 말이죠. 프레더가 아버지한테 이런 말을 해요. “All of us in the city’s light.” 우리는 다 이 도시의 빛 속에 존재하지 않냐. 프레더는 일꾼들의 사고 장면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진짜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동조하지 않습니다. 일꾼의 사고 소식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심지어는 사무실의 거대한 커튼으로 외부의 빛을 가립니다. 이 도시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자신 같은 1인자는 빛의 세계에만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양쪽을 다 봐야 한다는 걸 안다는 듯이.

그리고 일꾼들 중 대장 격인 사람이 아버지의 사무실에 올라오는 씬도 있습니다. 즉, 가장 지하에 있는 이 대장이 가장 높은 곳의 아버지를 보러 올라온다고요. 즉, 흑백의 경계가 그리 분명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할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프레더가 중간자 역할을 하지 않았을 때도, 이미 알고 있었어요.

다시 Eternal Gardens로 돌아가자면, 여기가 마리아와 프레더가 처음 만난 곳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마리아가 하류 사회 아이들을 데리고 상류 사회의 놀이터로 그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얼마나 흑백의 경계가 원래부터 그리 분명하지 않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렇잖아요. 마리아 혼자도 아니고, 꼬꼬마 애기들을 수십 명을 데리고 와서는 반라의 여자들과 놀고 있는 프레더를 보여준단 말이죠. 경계가 몇 개가 허물어지는 건지.

그래서, 글쎄요. 언뜻 보면 대조의 세계인 듯한 <메트로폴리스>는 사실은… 꽤 합리적인 세계입니다. 이것이 오늘 아임 드리밍 에피소드 제목의 이유입니다. 흑과 백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프레더슨과 노동자 대장 같은 사람들은 그걸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프레더가 중간자가 되기 전부터. 흑이 있어야 백이 있고, 백이 있어야 흑이 있는데. 그래야 서로의 존재가 감지될 수 있는데.


이 영화에는 흑백의 경계 말고 다른 경계들도 허물어지는 테마가 몇 개 나옵니다.

하나는,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예요. 프레더가 최초로 노동자들의 지하 세계에 입장할 때, 그는 혼자 약간 멍충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일꾼들을 관찰하다가, 참 보기에는 아름답고 포근한 증기에 일꾼들이 데여서 죽는 사고를 목격합니다. 이때 그것이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고를 당한 노동자들은 몰로흐Moloch로 표현되는 신의 허연 입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계단을 올라서 승천하는 듯 그 입 안으로 입장합니다. 왜 갑자기 몰로흐라는 신이 나오느냐 하면, 일꾼들을 지배하는 듯한 거대한 기계, 철과 미끈한 표면으로 만들어진 기계가 갑자기 이 고대 신의 형상을 띠어요, 프레더의 상상 속에서.

몰로흐 또는 몰록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신이다. 가나안과 페니키아에서 숭배되었으며, 북아프리카 및 레반트 문화와 연관이 있다. 바빌로니아 지방에서는 명계의 왕으로, 가나안에서는 태양과 천곡의 신으로 알려졌다. 소의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어린아이를 불태워 바치는 인신공양 제의가 행해졌다고 한다. 신명기와 레위기에서 몰록이 언급되며, 유대교 및 기독교에서는 이방신 우상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니까,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사고를 당하는, 상당히 뭐랄까… 현대적이고 현실적인 사건을 목격하는 프레더가 그것을 소화하는 방식은 별로 현대적이거나 현실적이지 않고, 고대적이며 환상적이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허연 입이라는 게 특이하죠. 그 뻥 뚫린 입으로 낙하하는 게 아니라 승천하는 이미지도 특이하고요.

게다가 사고를 당한 일꾼들은 증기에 데였으니까 검은 작업복을 벗었는데, 이들이 노예처럼 끌려갑니다, 그 허연 입 속으로. 인신공양 제의가 행해졌던 신의 형상을 하고 있는 걸 고려하면, 이 일꾼들이 바쳐진다는 뜻이겠죠. 그런데 거기다 추가로, 증기에 직접적으로 해를 입지 않은, 아직 검은 작업복을 입은 일꾼들은 누가 특별히 이들을 끌고 가지 않아도, 마치 자발적으로 일렬로 전진해 몰로흐의 허연 입으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몰로흐는 제물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고, 일꾼 하나하나가 직접적으로 사고를 당하든 당하지 않든, 같은 처지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는데, 이러나저러나 경계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발명가 로트왕의 공간은 시간 개념을 허뭅니다. 메트로폴리스의 다른 공간들은 전부 직선의 고층 빌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것이 지상층의 빛의 공간이든, 지하층의 어둠의 공간이든 말이에요.

 그런데 로트왕의 집 및 작업실이 있는 건물은 혼자 무슨 중세 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처럼 생겼어요. 시간이 멈춘 건지, 시간이 되돌려진 건지, 알 수 없는, 그런 공간입니다.

로트왕은 심지어 한 손은 인간의 손이고, 한 손은 의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을 대신할 기계 인간을 만들죠. 아까 말한, 죽은 사랑을 대체할 기계 인간을. 색채 면에서는, 로트왕의 공간은 완전히 백이거나 완전히 흑이지 않은 중간계의 색과 빛을 띠고 있습니다.

또 하나 제가 흥미롭게 여긴 건… 프레더의 아빠 이름이 조 프레더슨이란 거예요. 보통 ‘슨’이 붙으면, 누구누구의 자식이라는 뜻이란 말이죠. 그리고, 성이니까, 프레더의 이름이 프레더 프레더슨이긴 할 거예요. 그런데 극 중에서 프레더는 그냥 프레더로 나오고 조 프레더슨은 프레더슨 씨, 뭐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죠. 그래서 마치 아버지가 아들의 자식인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요. 실제로 아버지보다 나은, 발달한, 승리한 자식이라는 교훈적인 메시지가 너무 명확한 서사이기도 하고요.


이야기 내에서, 흑백의 대조 외에도, 생각을 하는 mind와 행위를 하는 hands 사이의 괴리에 대해서 계속해서 나옵니다. 설정상으로는 mind가 흰색이자 빛이고, hands가 검은색이자 어둠인데, 이것도 너무나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분리된 것의 화합이라는 주제를 틀로 삼고 있는 건 알겠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래요, hands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이 생각을 하지 않고 떼로 몰려 다니는 광경이 많이 나오긴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빛의 세계에 속하는 ‘아들의 클럽’의 그 아들들의 부모들은 어디 있는가? 아예 나오지도 않아요.

이 도시의 어떤 유흥 공간에 모인, 턱시도 입은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이 나오긴 하지만, 그렇다면 그들은 뭐 생각이 그렇게 많게 돌아다니나?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들도 자기들 눈앞에 있는 것에 혹해서 떼로 몰려 다닙니다. 그래서 굳이 hands와 mind를 나누자면, 노동계급과 상류층의 결을 따라 나눌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나눠야 한다면, mind와 hands를 둘 다 갖고 있는 인물들이 있고, hands만 가진 듯한 비인물들이 있습니다. 인물들로는 프레더슨, 프레더, 마리아, 로트왕, 조사파트처럼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즉, 하고자 하는 마인드도 있고 행하는 핸즈도 있기에 이 영화 내에서 따로 이름이 있을 정도의 비중이 있는 자들이 있고, 비인물이라 하면 군중 씬에서 떼로만 나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군중이란 건, 노동자 군중 씬이 압도적으로 많긴 하지만, 꽤 부유한 듯한 사람들의 군중 씬도 있단 말이죠. 게다가 영화 도입부부터, 아주 빽빽하게 차가 막힌 고속도로 씬이 나와요. 이 씬들은 뭘까요? 폭동만 안 일으키면 mind를 갖고 있는 걸까요? 지상층에서 차를 살 형편이 된다고 해서? 아닌 것 같은데. 시키는 대로 일제히 같은 시각에 차를 몰고 나가는 바람에 러시아워에 걸린 쪽이 오히려 더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이들은 폭동을 일으킬 생각조차 못 하잖아요. 차가 이렇게 막히는 비효율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만약 막히는 차들 사이에 갇힌 사람이 자신이 생각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다만 흑으로 표현되는 노동자들이 자기보다 더 흑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비슷하게, 부유한 사람들이 나중에 마리아의 형상을 한 로트왕의 기계 인간을 보고 일제히, 떼로, 아무 생각 없이 음흉한 시선 그 자체가 되어, 얼굴도 없이 눈알만 남는 씬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만약 이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각 있게 산다는 착각을 할 수 있다면 그건 노동자 계급을 ‘생각 없다’고 치부하기가 너무 쉬운 극 중 사회 구조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다? 노동자들은 봉기라도 일으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리아가 노동자 계급이다. 그리고 또한 결정적으로, 반대로 상류층이 쓸모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프레더가 상류 계급이다. 누가 누구더러 손이 없네 생각이 없네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극명한 대조를 찾자면,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대조 같습니다.

이런 씬이 나와요. 로트왕이 기계 인간을 만들 예정이란 걸 알게 된 프레더슨, 즉, 프레더의 아버지가 로트왕에게 이렇게 시킵니다. 기계 인간이 마리아의 형상을 띠게 하라고. 마리아와 프레더 사이에 오해를 쌓게 하려고 말이죠.

그런데 로트왕과 프레더슨은 무슨 사이냐면, 둘 다 프레더의 어머니를 좋아했잖아요. 앙숙 사이입니다. 그런데 프레더슨이 그 상황에서 로트왕더러 기계 인간이 마리아처럼 생기게끔 하라고 시킨 거예요. 프레더를 계속 눈먼 상태로 두기만 하면 앙숙과 팀 먹는 건 아무려면 상관없다는 건지. 나아가, 노동계급과 상류 계급을 지금처럼 계속해서 분리하되, 균형 잡힌 분리 상태로 두기만 하면 아무려면 상관없다는 건지.

그래서 로트왕이 프레더슨더러 바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죽었는데, 그 여자에게서 얻은 아들마저 잃을 거라고. 그걸 로트왕은 아는데 프레더슨은 모른다. 그런데 로트왕은 자식이 없기라도 하지. 프레더슨은 제가 기억하기로… 이 영화에 나오는 이름이 있는 인물들 중 유일하게 아버지 역할인데, 영화 내내 하는 일이 거의 이거예요. 아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두려 하는 것.

심지어 프레더슨 이 녀석이 뭘 하는지 아십니까? 마리아 형상을 한 기계 인간을 불러다가, 프레더를 충격 주려고, 마리아랑 썸 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쓰레기죠?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인 걸 알고, 일부러 그 여자 모습을 한 기계 인간이랑 썸 타는 모습을 보여주다니. 충격과 공포입니다. 메트로폴리스의 흑백의 경계, 빛과 어둠의 경계, 하류층과 상류층의 경계를 유지하기 위해 프레더슨은 아버지와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 사이에 있어야 할 경계를 허물기를 택한다고요. 막장 of 막장입니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구세대의 무책임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나중에 노동자 계급이 반란을 일으킬 때, 노동자 계급 부모들, 그러니까, 수백, 수천에 이르는 그 부모들이 뭘 하는지 아십니까? 자신들 아이들을 전부 다 버려두고 반란을 일으키러 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마리아를 탓해요. 사실은 어떻게 된 거냐면, 마리아 형상을 한 기계 인간이 노동자들을 홀려서 반란을 일으킨 건데, 이것도 참 어이가 없죠. 아무리 극 중 설정이 ‘노동자들은 생각이 없고 행위만 한다’는 극단순한 설정이라도 그렇지. 마리아 형상의 기계 인간한테 홀려서 도시를 멸망시켜 버릴 뻔하고서는, 나중에 자기들 자식이 어딨냐며, 마리아를 화형시키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을 구한 것은 진짜 마리아와 프레더, 그리고 조사파트입니다. 그리고, 머리와 손 사이에는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주제는 묘하게 안 들어맞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중재자 역할을 한 게 프레더와 마리아, 그리고 그들을 도운 조사파트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 중간중간에 7개의 대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7개의 대죄란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예요.

여기서 이 죄를 짓지 않은 인물들은 프레더, 마리아, 조사파트, 그리고 아직 어려서 뭘 할 겨를도 없었던 노동자들의 어린이 세대입니다.

그러니 굳이 대조 테마를 넣어보자면, 세대교체? 앞으로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음. 세대로 선이 갈리는 건가 싶은 또 다른 이유는 로트왕 때문입니다. 로트왕은 굉장한 능력자예요. 아니, 기계 인간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드는 데 성공하다니. 마리아 형상을 한 기계 인간을 어찌나 잘 만들었는지, 그 많은 노동자들을 홀리고,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프레더마저도 헷갈리게 하는 능력자란 말이죠. 기본적으로 기계를 잘 다루고, 심지어 그의 한 손은 의수, 한 손은 살로 되어 있는, 말 그대로의 중재자. 죽음과 삶 사이의 중재자. 기계와 인간 사이의 중재자. 노동계급과 상류층의 중재자가 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는 대죄 중 여럿을 범합니다.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 빼고 다 범하는 것 같아요. 사랑을 빼앗겨서 프레더슨을 질투하고, 그 사랑이 아이를 낳다 죽은 데에 분노하고, 자신의 기술적 천재성에 대해 교만하고, 그것을 남을 위해 쓰는 데에 인색하고,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탐하고, 심지어 나중에 진짜 마리아를 쫓아다니면서 잡으려는 씬이 나오는데, 대체 뭘 하려고 그러는 건지, 마리아 싫다는데. 잡아서 뭘 하겠다고. 강간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완전히 그냥 미친 과학자예요. 그래서 로트왕은 그 능력을 가지고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고, 결국에는 죽습니다.

영화에서 주요 인물들 중 유일하게 죽는 게 로트왕이에요. 조사파트, 자살하려다 안 죽고. 그 많은 노동자들도 얼추 해피 엔딩으로 끝나고, 그들의 아이들도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데, 로트왕은 죽어요. 메시지 상으로 봤을 때 죽어도 싼 인물이 로트왕이라는 거겠죠. 구세대 인물 중 가장 중재자로서 재능이 있었으나, 그걸 자기가 말아먹고, 마리아를 겁탈하려던 건지 뭔지, 하다가, 그러는 와중에 죽습니다.

나중에 찾아봤더니, 로트왕이 마리아를 쫓아간 이유가, 그녀를 자기가 사랑하던 여자로 착각해서였대요. 그런데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 싫다고 저렇게 최선을 다해서 도망가는데 저렇게 쫓아간다고? 마리아로 알고 쫓아갔든, 사랑하는 여자라고 착각해서든, 사랑은 무슨. 그래서 로트왕이 죽어도 싸서 죽은 게 아닌가.


이러하다, <메트로폴리스.>

이 영화가 사이언스픽션으로 카테고리화되어 있지만은, 약간 귀신, 슈퍼내추럴한 면면이 있습니다. 또 경계가 허물어지는 거죠. 장르의 경계. 묵시록에 대한 레퍼런스도 그렇고, 7개의 대죄나 저승사자도 그렇고, 기계문명과 역사, 미래와 과거가 만납니다.

기계 마리아가 노동자들을 선동할 때는 ‘기계들을 굶겨 죽이자’고 합니다. 기계들을 죽이자고. 마치 기계가 살아 있는 것처럼. 이런 언어도, 마치 기계가 피와 살로 이루어진 것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데, 이런 게 점점 더 후반부로 갈수록 많아져요. 기계 마리아를 죽이려고 할 때는, 노동자들이 그녀를 ‘마녀’라고 부릅니다. 이게 미래의 이야기인지, 중세 시대의 이야기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애초에 흑백 사이에 중재자가 없었어도 장벽은 허물어졌을 것 같습니다. 물론, 중재자의 역할에는 장벽이 허물어진 후에 다시 도시를 재건하는 역할도 있지만요.

장벽을 허무는 것 자체는, 어느 정도까지는 프레더슨 씨가 원하던 바입니다. 다만 그는 그렇게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 모든 걸 노동자들의 잘못으로 덮어씌우려고 했던 모양이에요. 그리고 아마 예전과 똑같이 장벽이 건재한 듯한, 겉보기에는 흑백이 뚜렷한 메트로폴리스를 다시 세우려고 했겠죠. 근데 프레더 때문에 그렇게 되진 않았다. 중재자님, 대단해요.

아무튼, 그 와중에 이 영화의 재미는, 제법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한 서구 메인스트림 서사적 히어로가 나온다는 점입니다. 프레더, 성장하는 캐릭터예요. 점점 더 강해져요. 처음에는 막 사고를 목격하고서 환영을 보고, 나중에도 아버지랑 기계 마리아가 썸 타는 걸 보고 몸져눕고 그랬는데, 그러지 않을 때는 나름 막 몸싸움도 하고, 진짜 17대 1이 뭐야. 170대 1도 가능한 강한 인간이 됩니다. ‘이긴다’라고까진 볼 수 없지만, 죽진 않아요. 170대 1 했는데 안 죽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하죠.

그리고 이 영화에는 요즘 히어로물에서는 당연시되는 사이드킥, 조사파트도 나오고. 히어로의 사랑, 마리아가 나오는 가운데 마리아도 나름의 역할이 있고. 영화가 길기 때문에 돌아가는 느낌이 있기도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매우 메인스트림하다. 추격씬도 엄청 많고요. 스케일이 어마어마해요.

또한, 흑백영화 특유의 포근함이 있지 않습니까? 색이 없기에 더 포근하게 느껴지는 그 필름의 질감. 그것을 즐기는 제법 박진감 넘치는 방법 같습니다. 소리에 지친 날, 방을 어둡게 하고, 색감조차 없는 순수한 빛이 움직이는 것만 보고 싶을 때, 그때 <메트로폴리스>를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안내 드릴게요. 우리 이제 2주에 한 번씩, 시즌 사이사이에 쉬는 기간 없는 스케쥴로 바뀌었죠. 저는 2주 후에 돌아올 겁니다. 그리고 다음 에피소드에 얘기할 영화, <베를린 심포니>입니다. 짧은 영화고, 유튜브에 있더라고요. 다큐멘터리예요. 기회 되시면, 요것도 한번 봐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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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아르 어바니즘: 현대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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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Oran Loyfer – Too Many Steps – Instrumental Version
  • Aquartos – Cyber Metropolis
  • 2050 – Cyber Runner
  • Ian Post – Endless Fields – Pizzicato Version
  • Charlie Ryan – Oscillating Form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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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