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50] “있는 그대로”의 불가능성, “베를린 심포니”와 “액트 오브 킬링”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이번 시즌, 시즌 5에서는 이혜원 기획자와 제가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누아르 어바니즘’에 등장하는 각종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다룰 영화는 <베를린 심포니>입니다. 원래 제목은 <Berlin, die Sinfonie der Großstadt>이고요, 번역하자면, <베를린, 대도시의 심포니>입니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고요, 지난주에 다룬 <메트로폴리스>를 분석하는 챕터에서 함께, 짧게 언급됩니다. 이 두 영화가 왜 연관이 있느냐 하면요, <베를린 심포니>가 <메트로폴리스>가 개봉하고 9개월 정도 후에 개봉했으며, 마찬가지로 도시 생활에서 기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남에 따라 디스토피아적인 측면도 불어난다는 도시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 다 흑백 무성영화인데, 제가 녹취록에 링크한 유튜브 버전에서는 그…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요. 그래서 상당히 몽환적입니다. ASMR이에요. 아무튼 그리고 <베를린 심포니>에서는 베를린시에서의 하루를 아침부터 자정까지 묘사하며, 기계의 움직임, 루틴, 그 속에서 순환하는 교통, 돈, 그리고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몽환적이라는 말을 아까 잠시 언급했는데, 그렇습니다. 비단 계속해서 돌아가는 필름 소리 때문만이 아니라, 영화의 비주얼에 템포가 있어요. 리듬이.

일렁이는 물의 장면부터 시작해서, 속도감이 점점 빨라지다가 느려지다 하는 것이, 보고 있으면 약간… 내가 최면물을 보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연기의 일렁임이라든지, 전봇대에서 전봇대로 연결된 전선들이 화면을 가로지르되, 카메라가 움직이면서 그 선들이 화면의 어디를 자르느냐가 바뀌는 움직임이라든지, 다리 구조물 사이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카메라가 움직임에 따라 변한다든지, 하는 게 몽환적이다.

다큐멘터리인데, “있는 그대로”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다큐멘터리는 아니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1920년대 베를린시에 찍을 게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아무리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한 시대였다고 해도, 나무에 집중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새나 상점들, 사람들의 옷에 집중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시작부터 한참을 보여주는 건 기차선로와 다리에서 보이는 풍경 같은 것들입니다.

사실, 카메라를 든 이상, 뭘 찍고 찍지 않는지부터가 “있는 그대로”라는 걸 보여줄 수 없는 아이러니의 시작이기 때문에, 애초에 “있는 그대로”라는 건 아예 존재하는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오늘의 주제예요. “있는 그대로”의 불가능성.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그 어떤 매체에서도 그렇습니다. 소설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뉴스까지도. 우리가 지금 당장 휴대폰을 들고 우리의 환경을 소위 “있는 그대로” 찍는다고 해도, 환경이란 건 앞도 있고 뒤도 있고 왼쪽도 있고 오른쪽도 있고 위도 있고 아래도 있고, 그 사이사이도 있잖아요.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카메라를 들고 찍느냐, 언제 찍기 시작하느냐, 내가 앉아서 찍느냐 서서 찍느냐, 필터 설정을 하느냐 마느냐 등등으로 “있는 그대로”라는 건 수없이 갈립니다.

심지어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방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있는 그대로”라는 건 사실 없습니다. 카메라가 아닌 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도, 수많은 결정들을 매 순간 하고 있으니까요. 눈을 뜰 것인가 감을 것인가? 뜬다면 가늘게 뜰 것인가 동그랗게 뜰 것인가? 눈을 얼마나 자주 깜빡일 것인가? 무엇을 만질까? 어떤 냄새를 맡을까? 무엇을 맛볼까?

이런 아주 근본적인, 지구상에 존재하는 의식이 있는 개체이거나 그 개체가 만들어 낸 물체라면 “있는 그대로”라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두 의식이 같은 걸 본다는 건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경찰이 목격자들과 얘기할 때, 각자 본 게 다 다른 경우들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그 사람 키가 컸다 크지 않았다 하는 묘사를 할 때, 사람마다 느끼는 크고 작음이 너무 다르고, “170cm쯤이었는데요,”라고 나름 객관적으로 말한다고 해도, 누구는 눈으로 타인의 키를 어림짐작하는 행위를 잘하고 누구는 못할 것이며, 잘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서 있는 위치나 조명 등에 따라 그때그때 다를 거예요.

그래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참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 기록’이라고 일컫는 모든 것들—인스타그램 사진이라든지 일기라든지—하는 것들 역시 참 흥미롭습니다. 심지어 남이 해놓은 똑같은 기록을 보고서도 우리가 어떤 상태이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잖아요. <베를린 심포니>를 처음 봤을 때와 두 번째 봤을 때라든지. 베를린에 가기 전에 <베를린 심포니>를 봤을 때와 갔다 와서 봤을 때라든지.

특히나, 이 영화에는 선명한 해석이 없어요.  그러니까, <메트로폴리스> 같은 경우에는 주제가 너무나 극명한 영화였잖아요. 주인공이 있고 악당이 있는 것만으로도 메시지가 어느 방향인지 갈릴뿐더러, 타이틀 카드들이 아예 텍스트로 전달하는 메시지도 있고.

그런데 <베를린 심포니>는 이 영화를 보고 있어도 해석이 너무 다양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관점이 있긴 하죠. 기술을 보여주고. 사람들의 순환을 보여주는 등.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다분합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누군가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고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아요. 예를 들어 누군가가 요즘 유행하는 카페에 간 스토리를 올리면, 한 명의 시청자는 “와 카페가 너무 예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고, 다른 누군가는 “요즘 것들은 왜 이렇게 쓸데없는 것에 돈을 많이 써” 하는 것처럼요.

뭔가 이… <베를린 심포니>의 경우 1927년에 나왔고, 이 당시에는 모두가 촬영 장비나 기술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니까 이런 다큐멘터리가 희귀했기에, 이 영화 혹은 그것에 대한 해석을 접했을 때 “아, 베를린이 원래 이랬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거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원래 그런 것”은 아마 없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어느 특정 사람의 현실에서 “원래 그런 것”이란 게 있을 순 있겠지만, 단 두 사람에게조차 동일한 “원래 그런 것”이라는 건 엄밀히는 있을 수 없는 것 같아요. 두 사람을 나눌 수 있었던 그 시점부터 그 둘은 같은 걸 느낄 수가 없는 게 아닐까.

같은 것을 느끼려면 뭐랄까… 영성적인, 우리는 모두 하나고 사실은 나뉘지 않았다, 라는 철학까지 가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같고, 순전히 물질세계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는, 아무리 다큐멘터리라 하더라도, 심지어 뉴스라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거나 느끼는 것은 불가하다.


제가 본 <베를린 심포니>는 그다지 디스토피아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냥 와, 신기하다, 저렇게 살았구나, 저 시대에 벌써 저렇게 교통이 혼잡했고, 도시에 사람들이 많이 오갔구나. 확실히 유행이 있되, 참 다양한 옷들을 입었구나.

다만, 길에 쓰러진 말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건 슬펐습니다. 길에 차가 엄청 많은데, 마차 끄는 말이 길에 쓰러져 있는 거예요. 그 장면은 참 슬펐어요. 그러니까, 디스토피아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말의 관점에서 느끼는 디스토피아지, 인간의 관점에서는 그다지… 전반적으로, 다들 바삐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도시를 즐기면서?

그러니까, 제가 생각했을 때는 도시가 번잡하고, 교통이 많고, 좀 바쁘게 움직인다고 해서 힘들거나 슬플 게 없으니까 이 장면들이 디스토피아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겁니다. 오히려 교통 참 편리하겠다. 사람들이 옛날에는 어디 가려면 며칠을 고되게 걸어서 이동해야 했는데, 이제는 저 1920년대의 예쁜 옷들을 입고—제가 1920년대 패션을 좋아하거든요—그 예쁜 드레스에 모자를 쓰고, 우아하게 기차에 타서 장거리를 이동하겠구나. 중간중간에 나오는 가게들에서 파는 작은 인형이라든지 하는 것도 너무 귀엽고. 아버지로 보이는 인물의 손을 잡고 가는 아이도 뭐, 무서워하거나 힘들어하는 것 같지 않고. 그렇습니다. 시대상이 저랬구나.

밥 먹는 장면이 특히 재밌더라고요. 어찌나들 열심히 음식을 씹는지. 그 장면을 아무리 사자가 고기 뜯는 장면과 번갈아 보여줘도, 또는 불우해 보이며 길거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번갈아 보여줘도, 아, 잘 사는 사람들은 잘 먹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었구나, 하기만 했습니다. 이것은 대도시라서 생겨나는 일이 아니라, 인류가 존재했던 내내, 심지어 인류가 인류이기도 전부터 그랬으니까. 길고양이, 하마 등의 동물도 나왔는데, 오히려 저는, 아, 길고양이와 하마처럼 인간도 참 다양하게 사는구나. 아니지, 오히려, 동물원의 하마로 보이는 저 개체는 안됐다. 원래 자신이 살던 곳에서 살지 못하고, 동물원으로 끌고 왔구나.

음. 동물이 더 불쌍한 영화예요. 대도시에서 사람들 좋으라고 말은 쓰러지고 하마는 동물원으로 끌려오는구나. 길고양이는 쓰레기통을 뒤져야 하고, 개는 입마개를 하고 어디 근처에 있지도 않은 것 같은 주인을 기다리는구나. 사람이야 어디서든 어떻게든 살겠지. 그런데 자연 상태도 아닌 끌려 온 동물은 어떡하나.

그리고 신문 찍어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이런 광경을 좋아합니다. 비슷한 현대의 예시로, 메가 프로세스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올린 인쇄소 영상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공장 생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지럽거나 한 게 아니라, 기분이 좋아져요. 굉장히 힐링되는 영상입니다. 어찌나 기계들이 착착 돌아가는지.

이런 상황인데, <베를린 심포니>가 1시간 정도 길이거든요? 그런데 45분쯤부터 영화의 메시지가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공포에 질린 여자의 표정이 나오기 시작하고, 뺑글뺑글 돌아가는, 뭐지? 그… 착시 현상을 일으킬 것 같은 무늬가 등장하고, 바람이 마구 불고, 우리에 갇힌 동물들이 혼란스럽게 왔다갔다하고, 롤러코스터에 탄 사람의 시점에서 보여주는 정신없는 주변의 장면들이 지나갑니다.

즉, 다큐멘터리이지만, 여기서부터 아주 확실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가 드러나요. 그래서 디스토피아적인 도시관을 가진 다큐멘터리라고 해석을 하는 것 같은데, 초반 45분에서… 전혀. 저는 완전히 하나도 디스토피아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후반 15분에서도, 공포에 질린 그 여자의 표정이나 동물들이 우리에서 괴로운 듯 우왕좌왕하는 장면을 빼면, 또 다시 그냥, 아, 저렇게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후반 15분에 수영 장면, 테니스 장면, 승마 장면 등 운동 경기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신기했고요, 재미있었습니다. 이것이 경쟁사회라는 점을 보여주려 한 건지. 그러나 이 또한 제 생각으로는 도시와 별로 관련이 없습니다. 농경사회에는 경쟁이 없었을까요? 도시에 사람이 많이 몰려 있어서 그렇지, 그리고 신분제도가 공식적으로는 사라져서 그렇지, 농경사회에는 경쟁할 건덕지가 없어서 안 했을 순 있어도, 뭐, 그때도 힘든 사람은 힘들고 안 힘든 사람은 안 힘들었겠죠. 저는 ‘아, 요즘 시대는 도시화 돼서 너무 힘들다’ 하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장면들을 보고 그 자체만으로 디스토피아를 떠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픽션 같은 경우, 아예 인물을 도시생활 때문에 괴로워하는 인물로 그리면, 그러면 그 사람의 상황을 상상하면서 몰입을 하죠. 그런데 <베를린 심포니>의 경우에는…  의도는 보이지만, 그 의도가 보여서, 오히려 더… 읭? 했습니다. 이 영화를 만든 이 입장에서는 급변하는 사회를 담은 것이었겠지만, 거의 100년 후에 살고 있는 제가 보기엔 재밌고 즐거운 장면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와 같은 시대에, 2023년에 살고 있는 사람 중에서 도시생활을 싫어하는 사람이 본다면, 충분히, 이 도시 묘사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디스토피아적인 메시지를 전달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베를린 심포니>를 보다가 다른 다큐멘터리가 생각났습니다. 바로, <액트 오브 킬링>입니다.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 나오는 영화는 아닙니다. 2012년에 나온 영화예요. 내용은, IMDB에 나온 짧은 설명을 번역해 볼게요. “예전에 인도네시아에서 암살단 리더였던 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집단 살해를 원하는 영화 장르로 재연하도록 하는 다큐멘터리다. ‘원하는 영화 장르’에는 클래식한 할리우드 범죄 시나리오도 있고, 호화로운 뮤지컬 공연도 있다.”

아쉽게도 지금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사이트가… 유튜브에서 트레일러로 들어가면 buy or rent할 수 있는 옵션이 있다고 나옵니다. 음, 트레일러를 링크할게요. 트레일러가 2분이 넘고요, 이것만 보셔도 충격적일 겁니다. Anwar라는 남자가 있고, 그는 할아버지이며, 국가적 영웅이고, 티비에도 나오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동시에 그는 백만 명을 죽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가 너무 충격적인게, 아까 줄거리에서 나왔듯이, 제작진이 안와라는 이 사람에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학살의 장면을 재연해 줄 테니, 원하는 걸 말해봐라” 했을 거 아니에요. 뭐, 학살이라고 안 했겠죠? 다른 단어를 쓰긴 했을 거예요. “당신이 그 사람들을 죽인 장면을 재연해 줄 테니, 원하는 걸 말해봐라” 했을 때 이 안와가 엄청나게 스케일이 큰 영화 스타일을 요구했나 봐요. 그러고선 그걸 배우들을 써서 재연합니다. 그 학살의 장면을. 그리고 제작진은 그 실제 사건을 재연하는 영화를 촬영하고, 또한, 그 재연 영화를 시청하는 실제 사건에서의 살인자를 촬영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든 겁니다.

그리고 트레일러에 이런 말이 나와요. ” ‘War crimes’ are defined by the winners. I’m a winner.” “전쟁 범죄란 승자에 의해 정의된다. 나는 승자다.”

이 영화는, 봤을 때 정말 충격이었어요. 제가 아는 이야기 중에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상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거나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게 이 다큐멘터리입니다.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 장르라는 것 자체도 아이러니예요. 흔히 다큐멘터리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고 오해할 수 있단 말이죠. 실제로 정의가 그러니까요. 구글에 검색하면, 구글은 옥스포드 랭귀지에서 정의를 뽑아다 쓰는데, 이렇게 나옵니다. Documentary가 뭐냐. “a movie or a television or radio program that provides a factual record or report.” 그렇다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 factual은 뭐라고 하냐. “concerned with what is actually the case rather than interpretations of or reactions to it.” 혹은, “actually occurring.”

즉, factual은 “무언가에 대한 해석이나 반응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것에 대한 것” 혹은 “실제로 일어나는”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다시 다큐멘터리로 돌아가면, 다큐멘터리란, “무언가에 대한 해석이나 반응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것에 대한 기록 혹은 보도를 제공하는 영화 또는 텔레비전 및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마찬가지로, “실제로 일어난 것에 대한 기록 혹은 보도를 제공하는 영화 또는 텔레비전 및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비슷하게 나와 있습니다. “『영상』 실제로 있었던 어떤 사건을 사실적으로 담은 영상물이나 기록물.”

이렇게 정의가 되어 있으니까 혼란이 발생합니다. 사실적. 실제로 있었던 것.

그런데 대체 뭐가 사실이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란 말인가. 무엇이 “일”인지, 무엇이 “사건”인지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정의가 동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전을 찾아보고, 사과를 사고 싶으면 슈퍼에 가서 사과 섹션에 가서 사과를 집어 들지만, 참말로, 조금만 더 의견이 들어갈 수 있는 단어가 되면, 명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심지어 사람에 따라, ‘사과’라는 단어조차 두 사람이 같게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이러하기에.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참 흥미롭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 사실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도 흥미롭고,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도 참. 복잡하고도 흥미로워요.


다큐멘터리의 의미란 그러면 뭘까? 그리고 논픽션이라는  것은 과연 픽션이 아닐까? 살면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 정말 당연한 건 뭐가 있을까? 내가 존재하는 것 말고 당연한 게 또 있나? 심지어 이조차도 당연하지 않은가?

아주 그냥 별별 생각이 다 듭니다. 내가 하루 종일 아무도 안 만나고 나 혼자 내 방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어도 그것에 대한 해석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데.

음.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사실일 수 없기에 기록을 하지 말자는 건 전혀 아닙니다. 사실일 필요가 없다고 저는 사실 생각합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기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것이 실제로 이랬다”고 너무 믿지 않으면 될 일이라고 봅니다. 뭔가… 의견을 갖지 말라거나, 도를 닦으라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고요. 실제로 이러지 않았을 수 있으니 그 어떤 안 좋아 보이는 일이 생겨도 매사 긍정적으로 살라든지, 이런 얘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 점이 전달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제가 요즘에 생각하고 있는, 아주 근본적인 존재의 무한함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나와 물질세계의 다른 누군가가 서로를 완전하게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해서 슬퍼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유와 무한한 가능성에 두근거려도 될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뭔가를 억누를 일이 없어집니다.

여기서 억누를 필요가 없다고 하는 건, 지금 당장 나가서 범죄를 저지르라는 뜻이 아니고요. 제가 순진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뭘 억누르지 않으면 범죄를 저지르거나 그런 파괴적인 행위를 하고 싶은 욕구를 안 느낄 것 같거든요? 파괴를 하고 싶은 이유는 다른 뭔가가 억눌려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추측을 하는 겁니다. 세상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서 누가 불을 지르고 싶어 한다고 가정을 해보자면, 그 사람은 불을 지르고 싶은 게 아니라,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있다든지,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있다든지, 버림받을까 봐 무서운 욕구를 억누르고 있다든지, 하는 거라는 게 제 추측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욕구를 꼭 외부, 흔히 ‘사회’나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억누르고, 나는 억누름당하고만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그런 욕구나 두려움, 분노, 수치심, 죄책감 같은 것을 이 방화예정자가 스스로 억누르고 있을 거라는 것도 제 추측입니다.

뭔가…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이 다 자기네끼리 ‘정답’이라는 걸 공유하고 있고, 있는 것들, 가진 것들은 그 해답지를 자기네들끼리 돌려봐서, 나만 불리하고, 아니면 나처럼 가진 것 없는 것들은 불리하고, 절대 승리할 수 없고, 싸워야 하고, 파괴해야 하고, 라고 생각할 수가 있지만, 여기서 가장 억누름을 행하고 있는 건 이 방화예정자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억누름입니다.

저는 정말… 제가 순진한가요? 방화를 정말로 진심으로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음. 정답이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 나만 모르고, 나는 영원히 모를 것 같고, 안 끼워줄 것 같고, 나는 버림받을 것 같고, 창피할 것 같고, 난 영영 틀렸고 글렀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방화를 하고 싶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게 아닌지, 하는 겁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건 사회가 아무리 좋아지고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누가 대신 빼내 줄 수 있는 마음 상태가 아닙니다. 빼내려고 타인이 시도를 해볼 순 있어요. 이 사람에게 심리 상담을 해줄 수도 있고, 이 사람이 생각하는 어떤 기준, 예를 들어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주고, 학위가 필요하다 하면 학위를 주고, 해줄 수 있어요. 그런데 학위가 있고 돈이 있는 사람 중에도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만 방화 확률이 줄어들 순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나는 돈도 있고 학위도 있으니까 그걸 잃고 싶진 않다. 잃을 게 많으니까 감방에 갈 수도 있는 방화는 안 하겠다.’ 그렇게 생각할 순 있지만… 그렇다면 또, 학위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다 방화 혹은 다른 방식의 파괴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뭔가 이… 여러분? “모두가 사는 게 힘드니까 파괴하지 말자” 이런 뜻 아닌 것이 꼭 전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사는 게 안 힘들어요. 이 생각 자체가 하나의 관점입니다. “사는 것은 힘들다.”

제가 정말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객관적으로 사는 게 힘들 수 있지” 생각했거든요? 세상에 얼마나 불공평한 게 많아요. 실제로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고, 사실이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최근에 드는 생각이, 세상이 제아무리 얼마나 더 많이 공정해지고 공평해지고 모두가 똑같은 돈을 갖고 기회를 갖고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도, 그래도, 아무리 그런 세상이 와도, 지금과 똑같을 단 하나가 있다면, 이겁니다: 그 세상에서도 모두가 다른 관점을 갖고 있을 거라는 거.

그 생각을 하니까, 소름이 돋더라고요. “있는 그대로”라는 게 얼마나 근본적인 차원에서 불가능한지를 생각하니까. 애초에 “모두가 똑같은 세상”이란 것 자체가 없는 겁니다. 인간의 의식은 매 순간, 꿈꿀 때조차 쉼 없이 세상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기술이 발달해서 어찌저찌 우리가 완전히 몸을 겹쳐서 존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니까, 물질세계에서 나와 네가 완전히 포개진 상태로, 내 머리가 있는 곳에 네 머리가 있고, 내 발이 있는 곳에 네 발이 있는 궁극의 시간 및 위치적 동일함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래도 또, 그 두 존재들은, 두 존재이기에, 또 관점이 다를 겁니다.

그래서 참… 이것이… 처음에는 좀 씁쓸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것만큼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가 주어지는 관점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이다. 네, 이것도 관점입니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함정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 관점을 그대로 갖고 살아도, 제 관점이 존재하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제 관점은 그 사람의 관점이 존재하는 데에 약간 지장을 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이 말 또 쓰네. “사실.” 굳이 경쟁을 붙이자면, “너는 너의 세상에 살아라, 나는 나의 세상에 산다.” 만큼 다른 관점이 이기기 어려운 관점도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도가 터서, 어떤 멍충구리적인 상황을 봤을 때 빡이 치지 않는다든가, 누군가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내가 다 억울해서 분노와 눈물이 치솟지 않는다든가, 하는 게 아니에요.

그 반대예요. 이것도 좀 전달이 잘 됐으면 좋겠는데.

내 세상 네 세상이 다 완전히 다르게, 전혀 겹치지 않는 “있는 그대로”에서 존재한다고 해서 나랑 남이 더 분리되는 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 더 합쳐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나와 물질세계의 다른 누군가가 서로를 완전하게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해서 슬픈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자유와 무한한 가능성에 두근거릴 뿐만 아니라, 억누를 것도 없어지고, 그 사람이 뭘 하든지 간에 나에게 어떤 타격을 입히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더라고요.

네, 이건 뭔가 과학적으로 잴 수 있거나,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있는 게 아니고, 믿음 체계입니다. 종교적인 것에 국한된 믿음이 아니라, 사람이 살면서 뭔가 신조? 곤조? 하여간에 관점이 있잖아요.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겁니다.

저는 이런 믿음이 상당히 없었어요. 그러니까, 믿음이 있긴 했는데, 이런 믿음은 없었다.

믿음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뭔가를 다들 믿어요. 돈을 많이 벌면 좋을 거라든지, 공부를 잘하면 좋을 거라든지, 못생기면 수치스럽다든지, 해외여행을 1년에 한 번 못 가면 수치스럽다든지, 모두가 믿는 게 있죠. 저도 이런 여러 가지 믿음들이 있었는데, 아까 말한 그런 종류의 믿음은 없었어요. ‘아, 내가 완전히 그냥… 그냥 나의 “있는 그대로”에서, 그냥 나만 아는 내 버전의 내 현실에서 그냥 내가 할 걸 하면 되는구나. 어차피 저 사람은 그냥 저 사람대로 살 거구나.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현실이 겹치지 않는구나.” 정말로 안 겹치더라고요. 관심사가 다르면 만날 일이 없는 것과 비슷하더라고요.

이런 믿음이 최근에 갑자기 약간 생기기 시작했어요. 저 사람이랑 나랑 진짜 정말 아무 상관이 없어서 오히려 저 사람이 뭘 하든지 난 그냥 내 걸 하면 되는 그런… 음. 제가 설명을 잘하고 있는 건지. 하여튼, 그런 상태가 됐다.

그래서 인간의 의식이란 참으로 무한하며 오묘하고,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든, 논픽션 전반이든, 심지어 우리가 사는 ‘현실’이라고 불리는 곳이든, 내가 원하는 게 뚝딱, 도깨비방망이처럼 한순간에 생겨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선택이 있다. 그것은 모두가 공유하는 “있는 그대로”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내가 “있는 그대로”를 선택하고,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에도 몇 번 언급했듯이, 여러분? 기록을 하면 좋습니다. 그게 타인이 보기에 사실이 아니어도 됩니다. 사실이란 건 애초에 존재를 안 하는 걸지도 몰라요. 그러니, 순전히 나를 위해 일기를 써도 되고, 인스타에 스토리를 올려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순전히 나를 위해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걸 곰곰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어지는 거라고 봅니다. 방화, 파괴, 이런 거 말고. 그걸 정말로 하고 싶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안 하고 싶을 것 같은데. 다른 뭔가가 안 될 거라고 여겨져서, 무서워서, 두려워서, 걱정돼서, 그래서 파괴가 안전할 것 같아서 하고 싶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여러분? 이런 말들. 무섭다, 두렵다, 걱정된다.

이거,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메인스트림 문화에 따르면 내뱉으면 안 되는 말이잖아요? 무슨, 말이 씨가 된다는 둥. 저는 여기에 격하게 동의 못 합니다. 오히려 반대예요. 이런 감정들: 무섭다, 두렵다, 걱정된다를 억누르다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게 파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다 같은 말이네요. 무서운 거든 두려운 거든 걱정되는 거든, 근본적으로 두렵다는 뜻인데, 아무튼, 두려움을 인정하면 매우 시원하더라고요. 해봤더니 그렇고요. 오히려 두려움을 인정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소위 말하는 긍정적인 마음을 저절로 갖게 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저는. 긍정적이려고 노력을 어마무시하게 해서 긍정적으로 비춰지는 게 아니라, 실제로 마음이 편해서 그냥 뭔가… 디폴트의 상태가 되는. 그런 경향이 있어요.

만약에 긍정적인 말만 하는 게 잘 통하셨으면 계속 긍정적인 말만 하시면 되고요. 만약에 긍정적인 말만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해서 해봤는데 답답하기만 하고 기분은 더 안 좋아지고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드시는 분들은 일기를 쓰거나, 거울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 말을 걸거나, 뭐… 친구랑 얘기를 하거나, 하시면서, 내가 지금 가장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속에서 꺼내서 쫙 진열해 놓고 한번 바라봐 보세요. 비유적으로 바라봐 보세요.

근데 일반적으로 미디어에 나오는 그런 식으로 하소연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연인과 헤어졌을 때 술 마시고 친구 앞에서 엉엉 우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걸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제가 말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그대로 봐라’가 그 행동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엉엉 우는 그 아래에 뭔가 더 깊은 게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연인이랑 헤어져서 우는 게 아니라, 사실은 ‘이번에도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게 서러워서 우는 것이든가, ‘나는 앞으로 아무도 못 만날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든가, ‘내가 망쳤는데 인정하기가 싫다’ 혹은 ‘내가 망친 걸 인정하면 수치스러워서 무섭다’라든가.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냥 그 연인과의 지금 이 하나의 사건 때문에 이런 것들이 무섭고 수치스러운 게 아닐 수가 있어요. 내가 예전부터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을 못 받았다든가, 답을 틀렸을 때 멍청하다고 많이 얻어맞았다든가, 그래서 틀리는 걸 사실은 공포스러워했다든가, 이런 차원으로 정말 깊게 두려워하는 것들을 생각해보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게 부정적인 게 아니라, 얘네는 그냥 있는 애들이에요. 이런 공포는, 이렇게까지 내려가면, 부정적이라고 보기가 미안해지는 애들이 있을 수가 있어요. 즉, ‘연인과 헤어졌다’는 부정적일 수 있지만, 그 때문에 우는 나는 그냥 단순히 추잡스럽게 허우적대는 게 아니라,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억눌린 버려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든가,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공포를 ‘부정적’이라고 보기엔 스스로 너무 안쓰러워서 오히려 스스로 안아줘야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그러고 나면, 긍정적이려고 어마무시한 노력을 안 해도 긍정적이게 되는 효과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음. 이건 그냥 예시예요.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아마도 여러분이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요. 그런데 그걸 스스로 관찰을 해서 나의 “있는 그대로”를 정립하지 않고, 표면에서만 ‘연인이랑 헤어지는 건 쪽팔리는 일이야’라고 프로세싱하고 끝내 버리면, 연인이랑 헤어져서 쪽팔리는데도 웃으려고 노력하고 속에서는 계속 쪽팔리고 수치스럽고 두려운데 왜 그런지 몰라서 나 자신이 말이 안 되는 느낌을 받으며, ‘왜 나는 긍정적이지를 못하지?’ 하는 자괴감에 빠질 만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그런 사이클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긍정 확언이 통하시는 분들은 굳이 문제가 있지도 않은데 깊게 파서 문제를 찾으실 필요는 없지만, 왠지 지금까지 긍정 확언, 낙관적인 세계관, 이런 게 잘 안 됐다 하시는 분들, 한번 시도해 보세요.

그러면 모두에게 적용되는 “있는 그대로”나 “원래” 그런 것은 하나도 없고, 나 역시도 정말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어서 그렇게 여겨졌던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긍정적이고 부정적이라는 레이블을 붙여서 그런 것처럼 보이도록 내가 관점을 그렇게 세팅했던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실제의 나는 ‘연인과 헤어져서 엉엉 우는 나’도 아니고 ‘어렸을 때 기억을 아직도 못 잊어서 추잡스럽게 구는 나’도 아니고, 그냥 다 자기 이유가 있는 안쓰러운 나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걔는 그냥 우쭈쭈해줘야 하는 애가 되고, 걔가 나니까 내가 나를 평생 잘 데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좀… 기분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나아집니다. 나에게 적용되는 나의 ‘있는 그대로’를 찾은 것 같아서.

네… 제가 다큐멘터리 장르를 보면서 요즘에 생각하는 건, 이런 것들입니다. 저 약간… 3, 4월에… 환골탈태했어요. 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네요. ” 사람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하여 전혀 딴사람이 됨.” 음… 더 나은 방향인진 모르겠고, 전혀 딴사람이 될락말락 하는 것 같긴 하다.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제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얘기할 영화, <전함 포템킨>입니다. 유튜브에 있더라고요. 링크 걸겠습니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ANBR – City of Light
  • Avi Goldfinger – Killing Journey
  • Borrtex – Being Grateful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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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한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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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