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이번 시즌, 시즌 5에서는 이혜원 기획자와 제가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누아르 어바니즘’에 등장하는 각종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다룰 영화는 <전함 포템킨>입니다. 이 영화는 책 내에서 정말로다가 딱 한 줄 등장합니다. 그것도 <메트로폴리스>를 주로 다루는 챕터에서 등장하는데, 저번 주에 얘기한 <베를린 심포니>도 <메트로폴리스> 챕터에 있다고 했었죠. 그 <메트로폴리스>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 언급된 <베를린 심포니>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 <전함 포템킨>이 언급됩니다.
그렇지만 워낙 너무나 유명한 영화고, 게다가 유튜브에서 공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다루려고 합니다. 아니, 다룬다기보다는… 아시죠 여러분? 아임 드리밍,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입니다. 전함 포템킨 그 자체에 대한 정보가 궁금하시면 위키피디아 검색해 보시는 게 더 빠르고요, 전함 포템킨에 대한 지금까지의 역대 해석이 궁금하시면, 그거 연구하시는 분들의 작업물을 검색하시는 게 더 빠를 겁니다. 그러나 한아임은 그런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리고 관심이 없는 것을 해석해서 내놓을 순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이 세상만사 모든 것이 우리의 거울이고, 우리가 소비하는 이야기도 거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전함 포템킨을 구실로 얘기할 것들은 한아임의 자기소개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제가 요즘 느끼는 건, 웬만한 건 전부 다 자기소개라는 점입니다.
정말 아주 객관적인 거, 예를 들어 오늘의 온도는 12도다, 이런 것을 중점적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객관적인 것만 말하려는 집착 또한 자기소개입니다.
그러합니다.
아무튼, 이 영화 다음부터 나오는 영화들은 좀 더 현대의 영화들이라서 구하기가 어렵거나, 구하더라도 공짜로 볼 순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전함 포템킨, 아무리 짧게 언급된 영화더라도, 다뤄보려고 합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IMDB에 나온 거 살짝 번역할게요. “1905년의 러시아 혁명 중, 전함 포템킨의 선원들은 함선 장교들의 잔인하고 압제적인 체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 결과로 벌어지는 오데사에서의 거리 시위는 경찰 학살을 초래한다.”
영화는 “혁명은 전쟁이다.”라는 레닌의 말로 시작합니다.
곧이어 자고 있는 선원을 그냥 괜히 지나가면서 때리는 장면이 나와요.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 것처럼, 자고 있는데 왜 때리고 가는지. 참 나 원.
그래서, 그 작은 사건으로 인해! 물론, 그전부터 괴롭힘이 있었겠지만, 일단 극 중에서는 그 작은 사건으로 인해 선원들이 모이고, 단결하자! 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장교들이 선원들에게 벌레가 들끓는 썩은 고기를 먹으라고 하자, 이제 선원들이 완전히 빡이 칩니다.
<메트로폴리스>도 그렇고, <전함 포템킨>도 그렇고, 가장 표면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중이 한번 모이면 얼마나 무서워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두 영화에서의 해석이 다르긴 하지만요. <메트로폴리스>에서의 군중은 말 그대로, 영화상, 머리가 없는, 행위만 하는 군중이고, <전함 포템킨>에서는 마침내 머리를 썼기에 행위를 하는 군중이라는 점이 큰 차이입니다.
그리하여 <전함 포템킨>에서는 일련의 장면들을 통해 선원들이 선박 곳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메트로폴리스>에서처럼 기계에 둘러싸여 기계가 해도 될 법한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는, 즉, 지금 현재 2023년에도 사람의 손이 필요할 것 같은 일들을 합니다. 선박에서 매듭 많이 짓지 않나요? 그런 거, 아직 로봇이 못하지 않습니까? 사람 손이 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정교한데.
왜 그… 달걀 말이에요. 그 달걀을 깰 줄 아는 로봇을 만들거나, 안 깨고 집는 로봇을 만들 수는 있는데, 둘 다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로봇은 만들기가 더 어렵다고 한참 전에 들었어요. 벌써 10년도 더 됐으니까 지금은 로봇이 둘 다를 쉽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사람 손이라는 게 그렇게 얕볼 신체 부위냐, 이 말이죠. 그런데도 <메트로폴리스>에서는 Mind와 hands를 대립시키고, 마치 머리만 돌아가면 손은 알아서 따라오는 것처럼 극 중에서 대조를 하며 이용했는데, <전함 포템킨>에서는 좀 다릅니다. 사람 손으로 할 수 있는, 컵을 들고, 음식을 집어 들어서 입까지 가져가고, 각종 도구를 다루는 장면들이 나와요.
이것도 말입니다. 음식을 집어 들어서 입까지 가져가는 거. 이거 절대 당연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대개 ‘오감’이라고 시청촉후미,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을 부르잖아요. 그런데 그 외에도 수많은 감각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내 몸을 인지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오감이 있어서 우리 손과 입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아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시각이 없고 청각이 없고 촉각이 없고 후각이 없고 미각이 없어도 내 몸의 어떤 부위와 다른 부위 사이의 위치적 상관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청촉후미가 있어도, 내 몸 각 부위의 상대적 관계를 알 수 없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 감각이 아직 발달이 안 됐으면 아기들처럼, 숟가락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입을 겨냥하긴 했는데 옷에다가 다 흘리는 겁니다. 또한, 감각이 둔화되면 어른도 혼자서 밥을 먹지 못하게 됩니다.
네, 음… 전반적으로 제가 영화를 보면서 밥 먹는 장면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 이건 왜 그런지? 보세요, 이게, 자기소개라니까요. 나는 왜 식사 장면에 이렇게 끌리는가? 영화에 나온 식사 장면 그 자체는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자기소개이지만, 그것이 한 번 더 해석되는 이상 나에 대한 자기소개 아닌가. 제아무리 객관적이거나 학문적으로 방탄인 이론을 제시하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뭔가에 대해 얘기하는 것 자체가 자기소개다. 식사 장면, 언급 안 할 수도 있었는데, 언급하는 순간, 그 자체로 한아임에 대한 자기소개가 된다.
여하튼, <베를린 심포니> 보면서도 밥 먹는 장면이 제일 재밌었는데, <전함 포템킨>에서도 밥 먹는 장면이 초반 10분에 나온 내용 중에 제일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장면들이 겹쳐져서, <전함 포템킨>에서 보는 ‘손’이라는 것은 ‘머리’와 따로 존재할 수 없거니와, <메트로폴리스>에서와는 달리 손만 쓰고 머리는 없는 군중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거의 뭐, 머리만 쓰고 손은 못 쓰는, 즉, 직접 뭐 하나 할 줄 아는 게 없는 듯한 장교들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잠깐. 여러분? 만약 이 에피소드가 마음에 드셔서 계속 듣고 계시다면, 아임 드리밍에 별점을 남겨주세요. 그러면 추천에 뜨게 된대요. 과연 그런지, 확인해 봅시다. 감사합니다.
자, 다시 머리만 쓰고 손은 못 쓰는 장교들로 돌아가자면, 제가 정말 궁금한 건 이겁니다. 여기는 선박이잖아요, 배경이. 이런 환경에서 장교들은 선원들보다 수가 훨씬 적은데, 어떻게 저렇게 자신 있게 선원들을 핍박할까? 아무리 위계질서가 있고, 그걸 지키기로 하고서 배에 탔겠지만, 작작 괴롭혀야지.
물론 제가 2023년적인 관점에서 봐서 이렇게 느끼는 거겠죠. 이렇게 느끼는 게 당시에 당연했다면, 혁명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겁니다. 놀라울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걸 알지만, 시대상이 다른 걸 알지만, 그래도. 장교들은 바보인가? 왜냐하면, 영화에서 22분경에, 갑판에서 사건이 발생합니다. 함장이 아랫사람들한테 시켜서, 대략 스무 명쯤 되어 보이는 선원들을 천으로 덮습니다. 그리고 그 천으로 가려진 선원들 외에 수십 명의 장교들 및 그보다 적어도 서너 배는 되는 것 같은 추가적인 선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으로 가려진 선원들을 집단적으로 총을 쏴서 죽이라고 시킵니다.
그러면 누가 총을 쏘느냐. 장교들이 쏘는 게 아니라, 총을 든 다른 선원들에게 쏘게 합니다. 천 아래에 스무 명 정도가 있고, 보통 뭔가 이런… 집단 사살에서는 총 쏘는 쪽도 여럿이잖아요. 그래야 죄책감도 덜 들고 누가 누굴 쐈는지 모르니까. 천도 그래서 드리운 거겠죠. 천을 드리우면 내가 쏴서 죽일 사람의 눈을 마주칠 수 없으니까. 천이 없는 경우에는 그래서 내가 쏴서 죽일 상대를 등 돌리게 하는 경우도 있죠. 공포는 죽을 상대에게 전부 다 미뤄버리고, 나는 상대의 눈조차 보지 않아도 되며, 나와 함께 동시에 총을 쏠 여러 명 중 다른 누군가가 상대를 죽인 바로 그 총알을 쐈으리라고 정신승리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리하여 전함 포템킨에서 천 아래에 스무 명 정도가 있으면, 총 쏘는 쪽도 스무 명 정도라 쳐볼게요. 그러면, 자, 장교가 아닌데 총을 든 사람이 스무 명이라고요.
이렇게 장교가 아닌 선원들한테 총을 쥐여주고 그들에게 천 아래의 선원들을 쏘게 한 이유는, 또한 총을 맞거나 쏘는 쪽이 아닌, 목격자로서의 수십 명의 선원들 역시 갑판에 남겨둔 의도는, 모두에게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겁을 주려던 거겠죠. 봐라, 너희는 너희끼리를 쏜다. 봐라, 너희가 직접 저들을 쏘지 않았더라도, ‘너희’라고 뭉뚱그려지는 너희 아랫것들, 응? 노동자들, 하찮은 녀석들은 서로를 죽이고 죽는다. 이런 메시지를 장교들이 전달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말하지만, 총을 쥐여줬다고요.
그 와중에 선원 중 하나가 “형제들이여, 대체 누구한테 총을 겨누는가?”라고 하는 바람에, 총을 쏘라는 명령을 받았던 선원들이 총을 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러니. 장교들은 바보인가? 물론 극화된 것이고. 실제로 위계질서가 있으니까 반란이라는 게 매번 일어나진 않겠지만. 무슨 이 선원들이 좀 참고 기다리면 장교로 승진하는 것도 아니고. 선원 중 어떤 사람들은 할아버지예요. 승진해봤자 내일모레 돌아가시게 생겼다고요. 이들은 잃을 게 없어요. 그리고 전함 포템킨이잖아요? 전함이라고요. 그러니 갑판 아래로 내려가면 총이 엄청 많아요. 이왕 반란 일으키기로 한 거, 선원들이 내려가서 그걸 막 집어 듭니다. 그러고서 장교들을 막 패요.
심지어는 사제 하나가 선원들한테 막 십자가를 들이대요. 그러니까 선원 중 하나가 사제더러 꺼지라고 하더라고요. 사제도 처맞습니다. 좀 낄낄빠빠를 적당히 해야 하는데. 뭐 믿고… 뭐… 이 경우에는 신을 믿었겠죠? 신을 믿고 방금 직접적으로 총에 맞아 죽거나, 동료가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을 목격할 뻔한 선원들한테 십자가를 들이댑니다. 그러니까 처맞죠. 수세도 너무 밀리고. 진짜 영화에서 막 맞아요. 그리고 뭐, 이건 뭐. 배에서 밀쳐서 다시 못 타게 하기만 해도 죽을 텐데, 뭐.
너무나… 이러한 장교들은 머리라고 볼 수 없다. <메트로폴리스>에 나오는 머리와 손의 대립을 <전함 포템킨>으로 가져와 보자면 마치 장교들이 ‘머리’를 대변하는 것 같지만, 손으로서 시원찮을 뿐만 아니라 머리로서도 좀… 시원찮다. 마치 <메트로폴리스>에서 ‘손’이라고 나오는 노동자들이 머리를 너무 안 굴려서 모든 걸 파괴할 뻔하는 바람에 손으로서도 별로 출중하지 못했듯이 말이죠. <메트로폴리스>의 노동자들의 무능함이 <전함 포템킨>에서의 장교들의 무능함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뭐든지 머리든 손이든, 한쪽으로 쏠리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메트로폴리스>에서는 대놓고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머리와 손 사이에는 중재자가 필요하다’였는데, 거기서도 엄밀히는 ‘머리와 손은 하나여야 한다’는 게 실질적인 메시지가 아닌가 싶었거든요. 중재자가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머리와 손은 곧 하나라고. 흑백을 굳이 나눠야 하나. 그런데 <전함 포템킨>을 보고 나니까, 머리와 손을 나눠 뭐 하리? 하는 생각이 더욱더 듭니다.
영화의 중후반부에서는 전함 포템킨이 육지에 도착하고, 거기서 정부로부터 일반인들에 대한 살육이 자행됩니다. 거기서는 그래도 ‘머리’라고 일컬어지는 지도층이 살육을 지시하는 게 ‘머리를 썼다’고 볼 수가 있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반인들은 총이 없거든요.
그렇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일단… 일반인을 다 쏴서 어쩔 것인지. 여기서 다 쏘고 그다음에 옆 동네 가서 또 다 쏠 건지? 남의 나라도 아니고 자기네 나라에서. 게다가 육지에 들르긴 했지만 전함이니까 어차피 바다에 있을 수밖에 없는 전함 포템킨에서 육지를 향해 포탄을 쏴버립니다. 육지의 오페라하우스를 향해서요. 그곳에 장군이 있다고 해서요. 그리고 선원들은 지금도 전함에서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영화 끝자락에서는 차르가 보낸 함대가 포템킨을 잡으러 옵니다. 포템킨이 함대와 싸워서 이길 순 없습니다. 그래서 포템킨은 깃발을 올려서 그 수많은 전함들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함께하자고, 혁명에 함께하자고. 그러자 함선들이 발포하지 않고 포템킨을 놓아줍니다. 각 함선들의 선원들이 갑판으로 나와서 모자를 흔들며 서로 막 축하하고, 그렇게 해피 엔딩으로 영화가 끝이 납니다. 차르가 명령을 내려봤자, 우리는 안 듣는다. 우리는 이제 머리이자 손이다.
그리고, 포템킨은 함대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 라고 하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네, <전함 포템킨>. 메시지가 분명한 듯한 혁명 영화. 그런데 혁명은 혁명이고, 실제로 벌어진 일이나 영화에서 보여지는 얘기만 하면 아임 드리밍이 아니죠. 오늘 제가 특히나 관심이 가는 주제는 역사적으로 일어난 혁명이라는 사건이나, 언제까지나 추측일 수밖에 없는 제작진의 의도가 아니고요, 그냥 제 해석입니다.
제가 에피소드 초반에, 결국 모든 이야기는 자기소개라는 말을 했잖아요? 그것과 약간 비슷합니다.
여러분? 어…
아임 드리밍 벌써 1년을 훌쩍 넘게 했잖아요. 2021년 12월 17일에 시작했는데 2022년 12월 17일이 벌써 반년 전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딱히 콘텐츠 경고 같은 건 넣지 않을게요. 우리는 원래 죽음 혹은 죽음과 연관 지어지는 각종 주제에 대해 자주 얘기하는 팟캐스트니까요.
제가 2023년 3월쯤부터 몇 달간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사실 그전에도 힘들었고 그 후에도 힘들었는데, 4월 중순부터 5월 말까지는 정말 어… 내가 죽나? 죽을까? 죽어볼까? 이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이게 새로운 건 아니에요. 제 기억으로 저는 네다섯 살 때부터 죽음을 생각했어요. 제 죽음이 아니더라도, 왜 그, 7, 8세 이전에는 애들이 죽음이 뭔지 모른다는 이론이 있는데, 제 경우에는 확실히 네다섯 살 때 죽음이란 게 뭔지 알았어요. 왜 제가 이걸 기억하냐면, 전에 얘기했던 그. 물고기 사건이 있었던 걸 기억을 하거든요. 세수를 하다가 펑펑 울었습니다. 그때 제가 했던 말을 인용하자면, “세수를 하긴 해야겠는데, 그 과정에서 머리카락이 하수구로 들어가서 바다로 떠내려가면 물고기가 죽을 테니까 불쌍해서 울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죽음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꽤 자주 죽는 게 낫지 않나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죽는 건 참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이고, 그게… 뭔가… 포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인데, 포기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포기라고 하기엔 일부러 죽으려면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아무튼, 지금은 죽을까? 이런 생각을 뚫고 지나가서 ‘오, 내가 정말 살고 싶어서 죽고 싶었구나’라는 상태로 왔습니다.
이게 제가 얘기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살고 싶어서 죽고 싶었다. 이것과 비슷한 뉘앙스의 얘기들을 제가 옛날에도 했었을 수도 있어요. 동전의 양면, 이런 컨셉.
그런데 이번에 그 ‘죽고 싶다’는 생각을 뚫고 가면서 느낀 게, 정말로 양면이구나. 이게 제가 요즘에 명상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진리라기보다는, 아직 도가 부족하니까. 경험? 정도입니다.
만약 제가 명상을 안 했으면, 제가 죽고 싶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죽음에 대해서 생각은 많이 해 왔지만, 정말 죽고 싶은 것, 죽고 싶은 이유,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한 생각을 파고 파고 파고 파고 들어가서 반대편에서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명상을 해서 죽고 싶은 바닥을 한 번 찍어 보니까 살고 싶어서 죽고 싶었던 거더라고요.
그리고 명상을 하게 된 계기도 비슷합니다. 그 계기 이후로도 바로 명상을 한 게 아니고, 일단 뭐, 명상을 하면 좋다고들 하는 걸 어렴풋이 알긴 하지만, 실제로 아주 막 좋아 본 경험이 없으니까 명상을 해야겠다고 바로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4월 중순에나 가서야 본격적으로 명상을 하게 된 겁니다. 더는 너무 다른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한 거예요.
외부에서 보기엔 달라진 게 없어요. 가장 큰 차이는 픽션을 못 쓰고 있는 건데, 이것도 못 쓴 지 벌써 한 1년? 되어 가지고, 그게 당장에 연관성이 있다는 심각성을 못 느끼고 있었고, 팟캐스트들은 계속 굴러가고, 블로그들도 계속 굴러가고, 범고래출판사랑 하는 일도 뭐, 잘 굴러가고, 그러고 있었거든요. 뭐… 그러고서 외부 사건이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실제로 2월, 3월, 4월, 이때 당시에는 외부 사건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아는 것은, 외부 사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외부 사건도 내부 사건이에요. 내부 사건도 외부 사건입니다. 내부와 외부가 하나였어요.
전함 포템킨이 있다. 그것이 외부에 있다. 그러나 그걸 내가 보고 다시 그것에 대해 내뱉는 순간, 그 내뱉는 이야기는 나에 대한 자기소개가 된다. 그런데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은 외부의 것이다.
외부의 사건이 있다. 그것을 내가 소화한다. 그러는 순간 그것은 내부의 사건이 된다. 그리고 나의 내부로 인하여 외부가 또한 변한다.
그리고 아이러니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는 것도 애매하다는 겁니다. 외부의 사건이 ‘안 좋다’고 여겨서 제 내부에서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으나, 그걸 명상하면서 바닥까지 내려가고 치고 올라왔더니 사실 나는 ‘살고 싶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렇다면 그걸 마침내 알게 해준 그 외부의 사건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또한, 죽고 싶은 것이 살고 싶은 것인 건 어쩔 것인가?
왜냐하면, 여러분, 만약 사람이 아무 기준이 없고 그냥 존재만 하면, 죽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왜, 그, 돌고래가 자살을 할 줄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게 ‘할 줄 안다’고 할 만한 이유는, 자살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살할 능력이 있진 않아요. ‘내 삶이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줄 아는 생명체만이 자살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돌고래, 혹은 고래류 전반을 아쿠아리움 같은 데에 가둬두면 애들이 미치거나 자살하거나 누굴 죽이거나 하는 건가 봐요.
사람도 이렇단 말이죠. 우리가 ‘내 삶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또는 ‘나는 이래야 한다’는 마음이 없으면 죽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즉, 삶에 대한 생각이 있으니까 죽고 싶은 거란 얘기입니다.
물론, 내 삶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여기는 건 큰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저도 이것 때문에 죽고 싶었던 거였어요. 내 삶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내 삶에 저런 일은 일어나야 한다. 나는 이래야 하고 저러지 말아야 한다. 저들은 이래야 하고 저러지 말아야 한다. 등등등.
그러나, 그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걸 진짜 믿는 거랑, 그렇게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은 별개입니다. 그 능력 자체가 좋거나 나쁜 게 아니고, 그 능력은 그냥 있습니다. 존재합니다. 인간에게 있는 능력 중 하나예요.
만약 ‘내 인생이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없으면, 우리는 산에 가서 아무 독버섯이나 먹고 죽을지도 몰라요. 그 죽는 것도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알 수 없다 치더라도 말이죠. 그런데 대개는 ‘내 인생이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있고, 그만큼 두려움이 있고, 또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고통 또한 있는 거라는 생각을 요즘에 하게 됐습니다.
이… 사랑이라는 것도. 또한 두려움이라는 것도. 하나더라고요.
삶과 죽음도 하나고.
외부와 내부도 하나고.
좋은 것과 나쁜 것도 하나고.
제가 이걸 체험한 게 이번이 처음이라서 저는 약간 고무고무합니다. 물론 이 상태가 오래 계속되진 않아요. 아마 그래서 수행하시는 분들이 그걸 풀타임으로 하시나 봐요. 저는 풀타임으로 수행을 하고 싶을 것 같진 않습니다. 왜 그… 제가 어디선가 봤는데, 사람의 가장 내면의 진정한 자아가 가장 좋아하는 게 있대요. 예를 들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고,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요. 비슷하게, 수행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고, 돈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거라고.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돈이 그저 수단일 뿐이라서 돈에 집착하면 고통이 생기지만, 돈 그 자체가 자신의 능력 그 자체인 사람들도 있어요. 정말로 있습니다. 제가 건너건너 들은 어떤 분은 그 말로만 듣던 serial entrepreneur래요. 연속 사업마. 연속 사업가. 사업 하나 만들고, 그거 돈 되게 한 다음에 다음 사업으로 옮겨가신대요. 이게 그 분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고 존재 이유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거래요.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수행 그 자체가 저에게 풀타임으로 할 정도로 즐거울 것 같진 않지만, 최근에 정말 죽을 것 같아가지고 명상을 거의… 네, 단기간에 풀타임으로 했어요. 어… 일어나서 아침에 죽을 것 같고 아무것도 하기 싫으니까 그 와중에 명상은 하고 싶길래 명상을 했어요.
그런데 계속 이렇게 하고 싶진 않거든요. 지금 저는 뭔가… 지금 아픈 거예요. 그래서 집중 치료를 한 겁니다. 그리고 그 치료란 뭘 더하는 게 아니라, 뭘 덜하는 거였어요. 그런 이유로, 저는 감히 말하건대 현대 과학에서 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을 거고, 앞으로도 이 측면에서 그럴 겁니다. 현대 의학에서 해결해 줄 수 없어요. 저한테 알약을 주면서 뇌의 문제라고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이건 근본적인 상태예요 지금. 심지어 이걸 해결을 하려는 것 자체가 곧 악화라고 저는 생각하게 됐습니다.
즉, 해결과 악화도 동전의 양면, 결국 같은 거란 얘기입니다.
지금까지 해결한답시고 해결한 거, 다 안 됐어요. 오히려 바닥까지 내려가서 치고 올라와야 사라지는 거였어요. 이 말을 제가 여기저기서 참 많이도 주워들었었는데, 이번에 좀 이해한 것 같아요. 앞으로도 또 바닥까지 내려갈 일이 생길 수도 있겠죠.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 바닥까지 내려가 봤으니, 늪에 빠지면 저항을 할 게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그 반대편으로 빠져나온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이… 아무것도 안 함으로써 한 경험이 엄청 신기했습니다, 저는. 이 두 개가 같은 것일 수 있을 거라고는 말로만 들었지, 체험해 본 적이 없었어요.
물론. 네. 이 상태가 지속되는 건 아니에요. 막 엄청난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가지고 세상 모든 것에 초연해하고, 이런 거 아닙니다. 그게 목적도 아니에요. 저는 태어나서 이렇게 목적이 없어 본 적이 처음인 것 같아요. 인간이 정말 한 치 앞을 모른다고.
그런데 이렇게 내가 무능하고 초라하고 하찮고 죽어도 싸고 열등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가치한 와중에도 괜찮은 건, 아니, 적어도 괜찮을 수도 있지 않나?라고 고려해 본 건 지금이 처음인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게 있긴 한데, 그 이유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를 받아들이자 하고 싶은 게 떠오르더라고요.
이게… 그… 죽고 싶었던 당시에, ‘나는 무기력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은 예전에도 왔다 갔다 했어요. 문제는, 네, 그때 당시에는 정말 문제였던 것 같은 게, 그런 생각을 뭔가… 긍정? 자기 계발? 이런 걸로 누르고 있었어요. 그런 무한팽창의 사상이 부작용이 있는 걸 알면서도, 다른 방법을 몰랐어요.
그런데 그러니까 이게… 이런 말들 있잖아요. 위기가 기회다. 이것도 말로만 그냥 들어오던 거였는데, 레알로, 위기가 기회더라고요. 사건이 생기니까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더라고요. 그래서 안 하던 짓, 명상을 한 겁니다. 다른 건 해봤으니까. 아니, 하루에 15시간 일이든 공부든도 해보고. 도피하려고 여행도 가보고. 운동도 해보고. 운동 안 하기도 해보고. 기타 등등, 뭐 메인스트림에 나와 있는 거 다 해봤는데 잠깐뿐이지, 다음번에 더 심한 강도로 부작용이 오더란 말이죠.
네. 효과가 잠깐 지속되는 건 근본적으로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진짜 문제는, 부작용입니다. 해결을 하면 할수록 다음번에 해결해야 할 게 더 산더미처럼 불어나는 게 제가 예전까지 해결이랍시고 해결을 해오던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안 하던 거 한 게, 저항을 안 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저항을 안 하자, 즉, ‘그래도 이건 해야 한다.’ ‘이걸 안 하면 너는 한심하고 한심한 건 나쁘니까 안 한심하려면 이걸 해야 한다.’ 같은 말을 멈추니까. 또한 즉, ‘이걸 꼭 해야 하나?’ ‘한심하면 나쁜가?’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한심한 나를 받아들이니까 오히려… 어… 시간이 좀 걸리긴 하는데, 결국엔 하더라고요. 결국엔 뭔가를 하더라고요.
그리고 지금 제가 초반이긴 하지만 신기한 점은, 산더미가 불어나는 게 아니라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즉, 부작용이 생기는 게 아니라, 부작용 생길 건덕지가 조금씩 풀려서 사라지는 중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게… 이런 명상을 제가 추천을 드리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음… 일단 그 죽고 싶은 기간 동안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명상, 잠, 생존을 위한 섭취. 이런 거 빼고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게 정말… 이게 대단한 사치라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명상이나 그 비슷한 활동을 멈추고 죽고 싶은 상태로 반년, 1년을 살아야 한다면, 그게 어떨지 저는 모르겠어요. 그런 사례를 제가 몰라요. 저는 제 사례밖에 직접적으로 모르고, 곁에서 지켜본 사례도 없습니다. 유튜브를 찾으면 여러 사례가 있지만, 제가 직접 겪거나 옆에서 지켜본 사례가 아니라서 이… 어디까지 심각할 수 있는지를 제가 몰라요. 게다가 저도 이번에 그냥 어쩌다 보니 우연히, 완전히 확률로 인해 뭔가… 퍼즐이 들어맞은 것일 수도 있잖아요? 사실은 명상 때문이 아니라 운 때문일지도 모른단 말이죠. 제 삶을 A/B 테스트해 볼 수가 없어가지고, 확인할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뭔가 이걸… 추천…까지 한다기보다는. 음… 저한테는 참 좋았다. 이거 아니었으면 혹시 또 모른단 말이죠. 어떻게 하면 좀 깔끔하게 죽나, 그 방법을 제대로 찾고 있었을 수도.
아무튼 근데 확실한 건, ‘그냥 생각을 하지 마라’ 아니면 ‘좋은 생각만 해라’ 이건 정말… 이건 정말 해결책이 아닙니다, 여러분. 좋은 생각만 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좋은 생각이 곧 나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건 쌍으로 오고, 집착은 고통을 낳아요. 그 자체로. 게다가 뭐가 좋고 나쁜지 정말로 모르는 경우가 잘 생각해 보면 허다할 겁니다.
저는 어쩌면 주변에 이런 경우는 좀 자주 봐왔어서 이걸 쉽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어요.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해서 안 됐는데, 그게 오히려 좋은 일이었던 경우를 꽤 봤습니다. 반대로 뭔가가 됐는데, 안 좋았던 경우. 이런 경우는 음… 극에서 많이 쓰는 장치이기도 하고요. 여러분? 픽션을 보면 정말로 삶에 도움이 됩니다. 제가 누누이 말하던 그 픽션과 논픽션의 희미한 경계, 그것이 존재 안 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저는 점점 더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구성하는 우리 삶에 대한 서사 자체가 픽션이에요. 아주 진부하게 말하자면, 반쯤 차 있는 물컵을 보고 반이 있다, 반이나 있다, 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픽션이라고요. 중립도 픽션입니다. 특히나, 중립, 객관성 등등에 대한 집착은 픽션입니다.
하여간에 그래가지고. 전함 포템킨을 본 건 제가 죽고 싶은 상태가 정점에 이르기 전이었어요. 5월 초 정도에 본 것 같고요, 지금 5월 말, 정점 찍고 온 다음에 대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교롭게도, 전함 포템킨이 마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단 말이죠. 머리와 손을 나누려는 부질없는 짓을 하려던 어떤 인간 집단이 마침내 머리와 손이 하나임을 깨달음으로써 절대 안 풀릴 것 같았던 일이 절로 풀린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 장면 말입니다, 전함 포템킨이 차르의 함대 사이를 가겠다는 장면. 이거 너무 fairy tale이잖아요. 갑자기 샤라라 하면서, 어머나 세상에, 모든 문제가 해결됐네? 이런 느낌. 참… 혁명은 전쟁이라는 말로 시작한 이 영화는, 끝이 동화입니다. 이 역시 하나인가? 전쟁은 동화이고 동화는 전쟁인가?
그리고 신분제도라는 게 말입니다. 이렇게 사회를 분리하는 것도 참 고통을 초래하는 현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게…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인류는 지금, 지구 차원에서, 고통을 해소하는 단계에 있다고. 과거에 비해서는 신분의 벽이 많이 허물어졌고, 여행의 제한도 허물어졌고, 그 밖에도 각종 벽들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특히나 모든 게 외부에 있다고 여겨지던 시절을 넘어와서, 꼭 뭔가… 심리적 영적인 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생각의 결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이제 알고 있잖아요. 많은 직업들에 물리적인 측면이 거의 없기도 하지 않습니까? 서비스업이라든지, 경영이라든지.
생존이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매우 빠르게 바뀌고 있고, 그 속도 때문에, 특히나 그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진다면, 그 바뀌는 것 하나하나를 쫓는 것보다 그냥 나로서 있는 게 더 말이 되는 때가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 나아가, 다시 전함 포템킨의 ‘머리와 손은 하나일 때 강하다’ 류의 사상으로 돌아와 보자면, 예전에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예를 들어 이 팟캐스트를 만들 때, 제가 대본 짜고, 녹음하고, 편집하고, 올리고, 뿌립니다. 이걸 한 사람이 대여섯 시간이면 다 해요. 기술이 좋아져서.
출판도, 예전 같았으면 진짜로 이메일도 없으니 발로 뛰어서 서점에다 책 넣고 이래야 했던 걸, 저는 방구석에서 뚱까뚱까 타이핑을 해서, 파일 변환하고, 이북 디스트리뷰터들한테 돌려서, 전 세계 어디서든, 뭐, 중국이나 이란이나 북한 같은 데가 아니면, 어디서든 누구나 저를 찾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 전에, 한때, 90년대, 2000년대쯤에 아웃소싱의 로망이 굉장히 강하던 때가 있었던 것 같아요. 팀 페리스의 4-Hour Workweek 아십니까, 여러분? 여기에 아웃소싱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런데 지금 이 단계를 넘어선 것 같아요. 아웃소싱조차도 필요가 없습니다. 기술이 너무 좋아져서, 사람이 아예 안 해도 되는 일이 너무 많아졌어요.
여기서 대응 방식에 따라 자기소개가 되겠죠.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걱정하고 한탄하고 세상은 왜 이렇게 돌아가나 두려움을 느끼는 방식이 있을 수 있고, ‘와, 내가 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나 많아지다니’ 하는 방법이 있고.
이러한 대응 방식 중에 뭐가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둘 다 맞아요. 언뜻 후자가 고통이 덜하니까 좋은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전자의 고통을 누르고 후자 쪽으로 무조건, 좋게좋게 생각해야지, 하면 그 집착이 더 큰 고통을 낳는다는 것! 이게 참. 이것이 어려운 점인 것 같습니다.
일자리가 없어서 무서우면 그걸 다 인정을 하고. 그에 따른 죽음의 공포가 있다면 그것도 인정을 해야 합니다. 물론 어려워요. 이거 저도 다 인정 못 했어요, 죽음의 공포. 죽음의 공포는 실질적인 금전적 상황과 하등 관계가 없습니다. 재벌이면 죽음의 공포 없을 것 같나요? 그들 중에서도 죽음의 공포에 휘말린 사람들 꽤 될 겁니다. 죽음의 공포라 함은 지금 누가 나를 칼을 들고 쫓아오는 게 될 수도 있지만, 내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게 두려울 수도 있고, 내가 상속 싸움에서 져서 수치당하는 게 죽음이나 다름없을 수도 있고, 뭐, 다양할 것입니다.
이것을 다 받아들임으로써 괜찮게 되는 것, 죽어도 괜찮게 되는 것. 그것이 사는 데에 가장 필요한 요소 아닌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유일한 것.
왜 그.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이 말도 제가 최근에 다시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인지. 제가 실천을 못 해서 그렇지.
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괜찮아요. 어… 완전히 괜찮진 않은데, 예전보단 확연히 나은 이유는, 예전에는 제 안에 이런 마음이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고,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즉, 저 자신 안에서, 제가 나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드디어 존재를 인정받기 시작한 기분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제가 좋다고 했던 모든 것들도 오히려 두 발 뻗고 존재하게 된 기분입니다. 언젠가 얘네가 전부 플러스 마이너스, 작용 반작용이 되어서 0이 될 뿐만 아니라 그게 좀 더 장기적으로 지속되거나 더 자주 찾아올 때, 그때 뭔가 희열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마무리하기 전에, 잠깐 <전함 포템킨>에 나오는 음악 얘기를 좀 해볼게요. 무성영화인데, 오케스트라 음악과 함께 보면 참 분위기를 잘 읽을 수 있더라고요. 점점 치솟는 분노가 느껴져요. 그리고 긴장감이 흐를 때는 음악이 잦아들어서 더욱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등, 음악이 본능적이고요, 웅장해요. 그리고 확실히 집중하기가 더 쉬운 것 같아요. <메트로폴리스>를 보면서 좀 힘든 건, 영화가 두 시간 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소리가 아예 없어서였는데, <전함 포템킨>의 한 시간은 금방 가더라고요.
그리고 여러분, 또 하나의 소식은, 제가 뜬금없이 삭발을 했습니다. 죽고 싶어서 삭발한 게 아니고요, 죽고 싶었던 정점을 찍고서 2023년 5월 18일에 삭발을 했습니다. 정확히는 6mm 바리깡으로 반삭을 했고요.
왜 했냐면요, 원래 아주 오래도록 하고 싶었어요. 저는 아마 초등학교 때는 삭발이란 것의 존재를 몰랐던 것 같아요. 그냥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중학교 때 한국에 오면서, 남학생들이 삭발 혹은 반삭이라는 걸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근데 애들이 막 머리를 깎고 오면, 머리가 보들보들 재밌지 않습니까, 느낌이? 그래서 친구들끼리 놀림 반 진심 반 머리 쓰다듬으러 모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반삭을 한다고 했으면 반항하냐고 따져 물었을 거 아닙니까, 교사들이? 그래서 가뜩이나 귀찮은데 더 귀찮기 싫어서 안 했고요. 미국에 살 때는, 미국은 성이 머리카락에 얽혀서 굉장히 코드화되어 있습니다. 이거 전에 제가 언급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안 했어요. 이것 역시 가뜩이나 귀찮은데 더 귀찮기 싫어서 안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V for Vendetta라는 영화 포스터에 나탈리 포트만이 너무나 아름다운 그 두상을 뽐내도록 해주는 반삭 머리를 하고 등장한 걸 보고서는, 엄마한테 톡을 보냈습니다. 나 반삭하면 어떠냐고. 엄마가 오, 그래, 해보자, 쉬울 거야. 하더라고요.
그러고서 그날 밤으로다가 반삭을 해서, 이렇게 됐습니다. 엄마가 밀어줬어요, 머리를.
이에 대한 에피소드를 스펀지에서 했는데, 영어이긴 하지만, 사진이 첨부되어 있어요, 그 녹취록에. 그거 링크할게요.
결론은, 엄마가 매우 흡족해했다. 제가 감히 말하건대, 제 두상, 특히 뒤쪽이 완벽하거든요. 엄마가 엄청 공들여서 만든 두상입니다. 그것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점에 엄마가 매우 흡족해했고, 아빠는 똘똘해 보인다고 좋아했고, 동생은 처음엔 좀 제가 후회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매우 잘 어울린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보고 약간 충격을 먹기도 했는데, 부러워하는 애들도 있고, 역시 이상하군, 하는 듯한 애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걸 정말 해보고 싶었어요. 지금 안 하면 못 할 거 같더라고요. 왜냐하면 지금이 제가 가장 타인을 안 만나고 내면에만 집중할 시간인 것 같았어요. 이게 또, 아무리 성인은 두발 자유라고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너무 자유로운 게 민폐일 수가 있잖아요. 저는 직장은 안 다니지만, 그래도. 그래서 이렇게 자유로울 때만 할 수 있다, 반삭은. 해서, 반삭을 했다.
참고로 스펀지 녹취록에 있는 인증샷에 제 얼굴은 안 나옵니다. 반삭도 충격인데 얼굴도 충격일 것 같아서. 뒷모습만 나옵니다.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제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얘기할 영화, <알파빌>입니다. 이건 무료로 볼 수 있는 데를 찾지를 못했습니다. 아마 각자의 거주 국가에서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감상하셔야 할 듯합니다. 어차피 돈 내고 봐야 하는 거, 특정 플랫폼 편 들어줄 필요가 없으니까, 링크는 없습니다. 각자의 세상에서 이 영화를 감상 가능한 플랫폼에 가셔서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 <전함 포템킨>
- 에피소드 49, “서로를 필요로 하는 흑백, “메트로폴리스””
- 팀 페리스의 4-Hour Workweek (나는 4시간만 일한다)
- 반삭 사진이 있는 스펀지 에피소드 녹취록
- “V for Vendetta”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Alan A Craig – Rowing the Warship
- Shahead Mostafafar – Revolution
- Enzo Bellomo – Fear and Revolution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 2023 한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