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 수다의 씨앗, <블레이드 러너>입니다. 늘 그렇듯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이것은 리뷰 팟캐스트가 아니고, 분석 팟캐스트도 아닙니다. 그냥 제가 영화를 직접 보고 떠오르는 생각들만 말합니다.
<블레이드 러너>는 1982년 영화예요. 저는 Final Cut이라고 되어 있는 버전을 봤습니다. 2시간 정도 되는 그 버전을 봤고요. 아. 최근 영화. 지금이 2023년인데, 벌써 41년이나 된 영화인데, 그것이 시즌 5에서 지금껏 다룬 영화 중 최근에 속한다.
맙소사, 여러분. 믿어지십니까? 블레이드 러너가 41년이나 됐대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물론 뭔가… 어… 이 영화가 제가 태어나기 전에 나온 영화인데, 그래서 뭔가… 이걸 보고 자랐다, 이런 느낌은 아니에요, 제 경우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어어어어무 영화가 유명하다 보니까, 마치 실제로 어린 시절에 본 느낌이 들어요. 실제로는 어린 시절은커녕 성인이 되고 나서 이 영화를 처음으로 봤는데 말이죠.
음. 41년이나 되었지만, 즉, 좀 있으면 개봉한 지 반세기나 지났을 영화이지만,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참으로 현대적입니다. 지금껏 시즌 5에서 다뤘던 영화 중 가장 스토리라인을 따라가기가 수월합니다. 아주 마음이 놓였어요. 플롯 요소는 디스토피아적이고 SF적이라서 특이하다고 볼 수 있지만, 플롯의 형태 자체는 익숙하단 말이죠. 히어로가 있고, 그에게 임무가 주어지고, 그 임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고, 마침내 그는 뭔가 중대한 결정을 한다.
그리고, 컬러 영화! 아, 너무 좋습니다.
특히 컬러 영화 중에서도, 오히려 최근? 이라고 해야 하나. 2010년대쯤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의 트렌드가 좀, 특히 디스토피아적인 영화에서 desaturated, 색이 빠진 컬러 팔레트가 너무 전형적으로 압도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하면 이 블레이드 러너는 알록달록하기 짝이 없어요. 그때 당시, 80년대 당시의 관객이 보기에는 이러한 비주얼이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쨍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검은 건 팍 검고, 네온은 팍 네온이고, 밝은 건 팍 밝고, 파스텔스러운 색감 빠진 그런 느낌이 전혀 없고, 선명하고 분명해서 시원한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이야기가 처음에 시작하면서 텍스트가 화면에 뜹니다.
Tyrell Corporation이 인간형 로봇을 만들었는데, 그게 Nexus phase로 들어갔다. 그 안드로이드들을 Replicant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들은 Off-world에서 노예 노동력으로 쓰였는데, 반란이 일어난 이후로 지구에서는 금지되었다. 블레이드 러너라고 불리는 자들이 레플리컨트를 발견하면 사살을 했는데, 그걸 사살이라고 안 하고 ‘은퇴’라고 불렀다.
이러한 배경 정보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무대는 2019년 11월 로스앤젤레스입니다.
캬. 2019년이라니. 2019년이 벌써 언제야. 거의 4년 전이에요, 여러분. 심지어 코로나 전입니다. 다른 삶의 얘기를 하는 것 같네요. 진짜로다가 평행 현실 이야기입니다.
자. 저번 주 <알파빌>에서는 알파 60이라는 로봇이 인간인 주인공 형사를 심문하며 각종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이드 러너>에서의 첫 시퀀스가 심문 시퀀스입니다. ‘테스트’라고 하는데, 심문 같아요. 별거 아닌 질문을 하는데, 답변자가 극도로 긴장합니다. 감정적 대응을 확인하는 질문들이래요. ‘거북이가 뒤집어져서 괴로워하는데 거북이를 도울 것이냐 말 것이냐’ 같은 질문입니다.
그런 식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하다가, 갑자기 답변자가 질문자에게 총을 쏩니다.
뭐지? 뭐지? 하죠 관객은. 하지만 대강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텍스트로 우리에게 정보가 제공되었으니까. 인간 형상을 한 로봇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것과 관련되었겠거니. 참, 이러한 스토리텔링이, 매우 친절합니다. 역시 주류 영화. 관객에게 친절하기 짝이 없어요.
그렇게 총 맞은 다음에 컷, 하면, 우리는 말 그대로 누아르 어바니즘의 거리로 나아갑니다. 네. 시즌 5에서 영화 얘기를 하는 이유가 그거였죠. 제가 이혜원 기획자와 함께 책, <누아르 어바니즘>을 번역 중인데, 거기에서 언급되는 영화들을 팟캐스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는 진짜 딱 한 마디, 정말 짧게 언급되는데, 제가 느끼기에 지금껏 다룬 영화들, <메트로폴리스>, <베를린 심포니>, <전함 포템킨>, 그리고 <알파빌>보다도 <블레이드 러너>가 드디어,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가 딱 ‘어두운 도시’라고 들으면 떠올릴 법한 그 비주얼을 선보입니다.
SF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클래식한 누아르 장르에서는 비껴갔다고 볼 수 있지만, 어바니즘이라는 단어를 고려해 볼 때, 뭔가… 20세기 혹은 21세기의 관객이 ‘도시’ 하면 떠올리는 그 밀집성, 복잡성, 그리고 약간의 더러움 같은 것이 미학적으로 어… 아름다워요.
그 왜, 오히려 너무 깨끗하면, 극도로 관리된 정신병원 같습니다. 호러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물론 그러한 비주얼도 광적인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지만요. 반면 <블레이드 러너>의 도시 거리는, ‘누아르’, 말 그대로 어둡다. 그리고 어번. 정말 다른 단어는 없는. 그러한 비주얼입니다.
전형적인 백인 서구계의 오리엔탈 환상이 담긴 일본어 장식에, 네온사인 용에, 한자 낙서 같은 것에… 도시니까, 여러 가지 섞여 있다. 참. 단순한 거 같지만, 동양에서도 ‘도시’를 떠올리면 영어는 물론이고 타국에서 온 이방인들이 비교적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해야 도시라는 생각이 들죠? 그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해리슨 포드, 극 중 Mr. Deckard가 등장합니다. 아까 누아르 장르에서 약간 비껴간 느낌이라고 말했는데, 다행히도 데커드 씨가 트렌치코트를 입어줬어요. 캬. 그래서 클래식한 누아르의 느낌도 함께 가져갑니다.
아무튼, 데커드 씨. 국수를 먹는데 젓가락질을 엄청 못 해요. 젓가락을 포크처럼 써요. 뭘 젓가락으로 집는 게 아니라, 국수를 걸쳐서 건진다.
그렇게 가뜩이나 힘겹게 국수를 먹고 있는데, 누가 그를 찾아옵니다. 경찰에서 왔대요. 그리하여 자초지종을 들어 봤더니, 이렇다고 합니다.
아까 영화의 맨 처음에, 질문을 던지던 사람이 답변자한테 당했잖아요? 그것과 관련 있는 사건을 데커드에게 강제로 넘기려 합니다. 알고 보니, 아까 답변하던 남자는 레플리컨트더라. 최근에 도망친 레플리컨트 중 하나다.
레플리컨트들은 원래는 감정은 탑재되지 않게끔 디자인되어 있는데, 혹시나 감정적 반응을 익힐까 봐, 수명을 4년으로 설정해 두었다.
한마디로, 인간이 로봇을 디자인했는데 겉보기에 인간과 다를 바가 없고, 감정적 반응까지 익히면 성인 인간과 아예 분간할 수 없게 될 것인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4년만 살고 죽게끔 되어 있다.
심지어 경찰에서 지금껏 쓰던 심문, 혹은 테스트조차 이제 더는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타이렐 코퍼레이션에서 만드는 레플리컨트들은 점점 더 성능이 뛰어나지니까. 원래는 눈동자를 관찰하며 질문을 던지는, 거짓말탐지기 같은 방식이었는데, 그게 이제 안 통할 거란 겁니다. 그리고 초반부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이 실제로 그러한 레플리컨트를 만나는데, 그것이 레이첼이라는 여자 레플리컨트다.
그런데 레이첼 본인은 아직 모르는 듯하다. 과거의 기억을 심음으로써 인간과 다를 바가 없게 된 거라고 타이렐 사장이 암시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른 레플리컨트들도 인간과 점점 더 분간이 불가능해질 거라는 점도 암시하죠.
네. 이런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초반 30분에 이렇게 깔린 이 설정들의 떡밥을 수거하며 펼쳐지는 이야기가 나머지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됩니다.
상세 줄거리 설명은 더 안 할게요. 재밌는 영화니까, 아직 안 보신 분들, 한번 보시면 좋겠습니다. 너무 유명한 영화라서. 이 영화를 안 보면 이 영화 이전과 이후에 나온 영화들에 대해서 얘기를 못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개인의 취향이라든가, 누군가가 적용할 만한 절대적인 좋고 나쁨 때문이 아니라, 압도적인 다수가 알고 있는 영화라서, 이걸 안 보면 뭔가…
마치 레플리컨트가 된 것처럼. 타이렐 씨가 얘기하지 않습니까? 기억 정보를 주입함으로써 레플리컨트를 인간과 구분할 수 없게끔 만들 수 있다. 특히나, 공유된 기억 정보라면 어떨까요?
몇 날 몇 일 어떤 일이 벌어졌다.
우리의 머릿속에 그런 주요 사건들이 몇 개 있죠. 9/11 테러라든지. 코로나라든지.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글로벌 이벤트라든지. 그런데 블레이드 러너만큼 유명한 영화를 생각하면, 마치 그런 느낌이 들어요. 내가 이 영화를 이해하고 말고, 좋아하고 말고에 상관 없이, 이것에 대한 기억 정보가 없으면, 뭔가… 불리해질 것이다? 누가 나한테 따져서가 아니라, 뭔가… 뭔가 내가 놓친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 막연한 생각.
이것이 생존 본능인지? 인간의 생존 본능.
그렇다면 이러한 생존 본능은 어디서 왔는가? 이것도 기억 정보인가? 엄밀히 따지자면 그렇지 않나요? 수만 년에 걸친 진화를 통해서 우리의 본능이 생겨났다면서요. 그것이 어마어마하게 정밀한 통계의 누적이라는 주장도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잠깐 약간 랜덤하지만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면요. ‘100번째 원숭이 효과‘란 게 있습니다. 진짜 말 그대로 Hundredth monkey effect예요.
나무위키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원숭이 집단에서 새로운 방식의 생활형태가 나타나면, 그게 일정한 숫자 즉 100마리를 넘기게 됐을 때 다른 장소의 집단에도 이런 방식이 나타난다는 가설.”
그렇다면 “새로운 방식의 생활형태”의 예시가 무엇이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1952년, 일본 미야자키현 구시마시의 고시마섬에서 살던 원숭이들을 연구하던 교토대학 학자들이 평소처럼 인근 농가에서 고구마를 사다가 원숭이들에게 먹이를 주면서 연구를 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어린 암컷 원숭이가 해변에 놓인 고구마를 가지고 고구마에 묻은 흙을 바닷물에 씻어먹는 방법을 알아냈다. 이게 다른 원숭이들에게도 퍼지기 시작했고 씻어먹는 습관이 100여 마리의 원숭이에게 퍼지자 고시마섬 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오이타현 타카사키산에 살던 원숭이들에게도 퍼졌다고 한다.”
신기하죠?
위키피디아를 찾아봤더니, 이 가설은 틀렸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었더라고요. 그렇지만 신기하죠?
저는 어… 이런 가설의 의의가, 모든 집단에서 혹은 심지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의 집단에서 이러한 현상이 관찰되어서 이 가설이 ‘진실’이어야만 한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원숭이 집단에서 이랬는데 코뿔소 집단에서는 이런 현상이 안 일어났으니까 가설이 틀렸다든지, 이집트에서는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데 인도에서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틀렸다든지, 이런 게 의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과학자들의 의의일 수 있지만, 한아임은 과학자가 아닙니다. 저는 사실… 진짜로. 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에 정말로 관심이 없더라고요, 제가.
진리라는 게 있더라도, 그러니까, 진짜 진리. 삶의 진리. 생명의 진리라는 게 있더라도, 그런 것에 제가 왜 관심을 갖냐면요, 아무리 진리가 있어도 그것을 모두가 다르게 경험하기 때문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란 과학이 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뭐냐면, ‘명상이 좋다’는 가설이 있을 때, 특정량 명상을 통해 모두가 똑같은 효과 혹은 비슷한 효과라도 내야지만 과학적으로는 명상이 좋은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것에 관심이 없어요. 심지어 요즘에는 어떤 생각까지 드냐면, 저는 담배 냄새를 싫어하거든요? 그런데 담배 피우는 사람 중에 안 죽는 사람 많아요. 과학적으로 몸에 안 좋다는데, 절대 안 죽어. 심지어 건강해. 왜일까? 과학은 그것을 유전으로 설명하거나 환경적 요인으로 설명하거나 하겠죠? 그런데 똑같은 환경에 똑같은 쌍둥이를 데려다 놔도 그게 늘 같지가 않아요, 결과가. 이쯤 되면 그 개인의 의식이 무적인 게 아닌가.
실제로, 과학이 증명 못 해줘도 여러분 이런 비슷한 경험 없으신가요? 과학적으로는 몸에 안 좋다는, 살찐다는, 암 걸리고 혈관 막힌다는 기름진 고기, 튀긴 음식, 인스턴트 먹는 사람 중에, 잘만 날씬하고 잘 사는 사람 본 적 없으세요? 저는 있는데. 그래서 봤더니, 뭐, 다시 말하지만 이건 과학적으로 증명이 아마 불가할 겁니다만, 봤더니, 그 사람들 의식에는 특정 음식을 먹으면 죽을병 걸린다는 인식이 없더라고요.
정말로다가. 네. 과학적 증명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인데, 저는 과학의 한계가 일정성, 즉, 모두에게 동일 적용성이라고 보기 때문에, 증명이 나올 때까지 안 기다릴 겁니다. 제가 기름진 음식을 아주 좋아하진 않아서, 게다가 먹는 양 자체가 별로 많지 않기 때문에, 과학적으로도 그러한 음식을 몸에 안 좋을 정도로 섭취할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그리고 제가 담배를 피울 확률은 거의 없어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거, 요…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그것을 기분 좋게 행하고, 그것이 나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이거보다 더 강력한 만병통치약을 저는 살면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흔히, 스트레스 없이 살라고 하죠? 그게 이것인 것 같아요. 과학이 지금껏, 단지 ‘스트레스를 줄여라’라고밖에는 설명을 못 한 모든 것이 이것인 것 같단 말이죠. ‘내가 하는 행위를 나는 사랑하고, 따라서 그 행위도 나를 사랑하며, 우리는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고, 사랑으로 넘쳐난다.’ 이 믿음. 이렇게 강력한 스트레스 퇴치제가 없어요. 퇴치도 아닙니다. 스트레스가 생길 틈이 없어요. 이 믿음이 강한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인생이 다방면으로 잘 풀리는 것 같더라고요.
아무튼 갑자기 이 얘기를 왜 했냐면. 원숭이 얘기 하다가. 원숭이 100마리가 고구마를 씻기 시작하자, 전혀 일면식이 없는 다른 원숭이들도 고구마를 씻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얘기는 왜 했냐? 블레이드 러너만큼 유명한 영화를 안 보면 왠지 손해 볼 것 같은 느낌이 저한테 있다는 얘기를 하다가 원숭이 얘기까지 갔습니다.
이게 왜 영화랑 상관이 있냐면요, 기억에 대한 얘기가 나오잖아요, 영화에. 레이첼 같은 레플리컨트들에게 기억을 주입함으로써, 존재하지도 않았던 ‘유년기’라는 걸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나아가, 공통 기억, 9/11이라든지 코로나의 경험 같은 것. 그런 것을 주입한다면? 아니면 <블레이드 러너> 같은 영화가 개봉했을 때 그것을 친구들과 함께 영화관에서 본 기억이라든지?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만약에, 원숭이든 인간이든, 일면식이 없이도 의식의 장을 통해 정보가 전달된다면? 그러면 레플리컨트는 어떻게 되는 건가?
그러니까, 원숭이 레플리컨트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 원숭이 레플리컨트에게 유년기의 기억을 심어줄 수는 있겠죠. 그런데 다른 원숭이들이 고구마 씻는 법을 일면식도 없이 저절로 익히고 있을 때, 그 원숭이 레플리컨트도 그 행동을 익히게 될까?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지금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그 거대 의식의 장, field가 있다면, 레플리컨트는 그것의 일부일까 아닐까?
의식이란 대체 뭔가.
광물, 식물, 동물까지도 무의식에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과학으로 완전히 증명된 건 아닙니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저는 과학이 증명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그건 마치… 사랑이 존재하는데 과학이 어떤 뇌 화학물질의 작용으로 사랑이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할 때까지 기다리고 사랑하는 것과 흡사한 것 같습니다. 있는 건 있는 거고, 뭐, 물론 없을 수도 있는 거지만, 있거나 없는 것은 있거나 없는 것이고, 과학이 그걸 증명하고 말고는 별개입니다.
과학이 필요한 때가 있겠죠. 그런데 제가 요즘에 특히나 과학이나 기술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는 시기에 있기 때문에 <블레이드 러너>를 보고 이러한 생각들을 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이 영화를… 세 번째인가? 본 건데, 예전에 볼 때는 이런 생각을 안 했거든요. 예전에 볼 때는 영화적인 요소들을 더 중점적으로 봤던 것 같아요. 조명, 미술, 구도, 이런 것들.
그런데 이번에 보면서 이런 생각들이 드는 이유는, 너무나… 어… 예를 들어, 시계가 있으면, 시계는 정말 유용해요. 그런데 여러분? 시간은 일정하게 흐르지 않습니다. 이것도 뭐… 과학에서 증명을 했다고 하는 것 같던데, 제가 물리학을 제대로 이해할 정도로 머리가 좋지는 못해서, 그 증명을 제가 따라갈 순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물리학적 증명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은 시간이 일정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걸 모르나?
아니죠. 알죠.
아주 간단하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고 할 때의 그 시간과, ‘지긋지긋하게도 시간이 안 간다’고 할 때의 그 시간이 같지 않다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알아요.
그런데 시계라는 도구가 등장함으로써, 마치 모든 사람의 시간이 일정하게 가고, 각 개인의 시간도 언제나 어디에서나 일정하게 간다는 환상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정착을 하자, 어느샌가 그게 진실이 되어버렸고, 저도 그것을 진실이라고 매우 오래도록 믿었어요. 특히나 학교 다닐 때나 출근을 할 때는 어느 정도 믿을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이 40분이라고 하면, 시계가 40분 갔다고 할 때까지는 40분이 절대 안 가는 거예요.
그리고 작년까지만 해도 진짜 열심히 트래킹을 했어요. 몇 시간 일했는지, 몇 자 썼는지, 기타 등등.
그런데 작년부터 올해까지 구조 조정 하고 뭐 막 여러 가지 바꿨잖아요? 그러면서 트래킹을 때려치웠는데, 놀랍게도, 혹은, 너무나 안 놀랍게도, 시간이 가는 걸 신경 쓰지 않으면 시간이 더 느리게 갑니다. 진짜 이상한 게, 시간이 없다고 생각할수록 시간이 없어져요. 반면, 시간이 많다고 생각할수록 시간이 많아진다기보다는, 시간이 정말로 많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시간 생각을 안 하겠죠. 공기가 많으니까 공기 생각을 안 하는 것처럼.
시간이 많은 게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기 시작하며 시간 생각을 안 하니까 시간이 남아돌더라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하는 일의 양은 비슷합니다. 약간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고. 근데 그것도 예전보다 훨씬 신경을 안 쓰고, 아예 안 쓰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 의식이라는 게 정말. 여러분? 우리가 지금 꽤 과학주의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술주의적인 시대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 동시에, 과학과 기술이 관점 중 하나일 뿐임을 인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블레이드 러너가 개봉한 1980년대, 즉, 2019년이면 엘에이가 이렇게 디스토피아적 도시로 변모할 것이라고 여겼던 그 시절에는, 레플리컨트 같은 로봇을 만드는 게 엄청난 일이었을 수 있을 거예요. 외부라도 인간과 같은 무언가를 만든다는 게. 그런데 이제는… 미세 사항을 조절은 해야겠지만, 이제는 우리는… 이게 불가할 거라고 생각을 안 하지 않나요? 당연히 가능하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인간과 겉모습이 같은 레플리컨트는 당연히 몇 년 내로, 뭐, 아무리 늦어도 수십 년 내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꼭 로봇을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 화상 환자들의 피부 재생을 위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잖아요. 머리카락도 그렇고. 즉, 꼭 로봇을 만들려고 안 해도, 로봇을 만드는 데 이용될 수 있는 기술들이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지고 있으니, 거기다가 이미 존재하는 소프트웨어만 얹어도, 얼추 인간 흉내를 내는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건 너무나… 더는 환상이 아닙니다.
이것에 대해서도 그래서 참… 그래요, 이게. SF라는 게, Science Fiction. 과학 픽션. 그런데 더는 80년대에 2010년대를 상상했던 것처럼 픽션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이건 지금 당장 롸잇 나우예요, 조만간. 2030년이면 레플리컨트가 상용화될 수도 있는 이 시대에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픽션인가? 특히 무엇이 과학 픽션인가?
하드웨어도 아니고 소프트웨어도 아니면 뭐가?
의식. 저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의식. 요거에 참 요즘에… 관심이 많아요.
의식은 소프트웨어가 아닙니다. 내지는, 소프트웨어는 의식의 아주 극 일부일 뿐이에요.
제가 말하는 의식이란, 우리 인간이 ‘의식이 있다’고 할 때, 뭔가 그… ‘기절을 안 했다’는 개념으로 쓰이는 그 표면 의식뿐만 아니라, 거대한 총체적 의식을 말합니다. 우주의 의식.
만약 원숭이들이 일면식 없이도 장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그 장을 형성하는 그것.
과학이 그것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여기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양자역학이나 뇌과학 분야에서요.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이,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태초로 돌아가는 겁니다. 밤하늘과 닿아 있던 샤먼들과, 명상으로 블랙홀에 들어가는 것만 같은 수행자들의 세계로 돌아가는 거예요. 나아간다고 해야 하나? 다만 그것을 증명… 과학적 방식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생기는 거죠.
아무튼, 도대체 이 의식이 뭐길래. 광물, 식물, 동물까지도 무의식에 연결되어 있다는데, 이…
여러분, 산의 기가 있지 않습니까? 바다의 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돌 모으시는 분들 계시잖아요? 그… 돌을 방에 진열해 둔 모습만 보신 분들은 못 느껴보셨을 수도 있는데, 미국의 뭐… 네바다나, 캘리포니아나, 아리조나, 유타, 이런 데에 가시면, 돌 사막 같은 데가 있어요. 거기서 느껴지는 기는, 비단 작열하는 태양 때문만이 아니라, 실제로 거기에 가서 서 있어 보면요, 특히 관광객이 좀 없을 때 서 있어 보면요, 그 기가 있어요.
바람이 불어서 느껴지는 게 아니고요. 덥거나 추워서 느껴지는 게 아닙니다.
시계. 휴대폰. 잴 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 측정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 나와 너 사이에 동일하다고 여겨지는 그 모든 것을 잠시 잊고, ‘나’만 있는 그 순간에, 그 ‘나’와 진짜 ‘너’, 그러니까, 잴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는 너 말고, 그 기의 장에 있는 너, 사실은 나인 너, 그것이 느껴져요.
이런 얘기도 많이들 하죠. 밤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는 걸 처음 보면 그게 얼마나 충격인지. 저도 어… 20세 정도가 될 때까지 이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아주 어렸을 때는 밤에 밖에 안 나갔으니까 못 봤고, 좀 더 컸을 때는 도시에만 살다가, 20세 때 처음으로 밤하늘에 별이 그렇게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 기라는 게. 사람한테만 있는 게 아니고, 만물한테 다 있습니다. 심지어 어… 이런 말 저는 예전에도 몇 번 들었어요. 기계, 물건도 자기 예뻐하는 사람을 안다. 이 말을 제가 과학주의와 기계주의에 쩔어 있던 시절에는 그냥 무시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에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참고로 어… 제가 ‘옛날에 이랬는데 지금은 안 그런다’는 말을 할 때는요.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똑똑해짐, 이런 뜻이 아니에요. 무슨 비교우열, 이런 게 아니고, 그보다는, 의식이 달라지면 보이는 게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초점에 따라 세계가 변모한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특히나, 과학주의와 기계주의 자체가 나쁜 게 아닌데, 저는 거기에 쩔어 있었어요. 그건 좀 나쁠 수 있는 거 같아요. 왜냐하면 집착이 알게모르게 있었기 때문에. 과학주의와 기계주의의 한계 그 자체로 인한 나쁜 점보다, 아마 그 집착으로 인한 나쁜 점이 많았을 것이고, 지금의 관점에도 집착을 한다면, 그 관점 자체로 인한 나쁜 점이 아니라 집착에서 오는 나쁜 점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기. 돈 같은 것, 형체가 없는 것도 그러하다. 돈이라 함은 지폐나 동전만을 말하는 게 아니고요, 돈이라 불리는 그것. 그 기. 걔도 자기를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안다. 그리고 자기 예뻐하는 사람을 안다.
아무튼, 금속이나 플라스틱 같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로 만들어진 레플리컨트도 그러면 기가 있는가? 의식의 장에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나?
<블레이드 러너>에서 최근에 도망쳤다는 이 레플리컨트들 사이의 위계질서는 어째서 생기는 것인가? 단지 탑재된 지능, 힘, 매력의 차이 때문에? 아니면 이들 사이에도 기의 차이가 존재하는가?
여기서 잠깐. 여러분? 만약 이 에피소드가 마음에 드셔서 계속 듣고 계시다면, 아임 드리밍에 별점을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면.
기억, 그리고 의식.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약간은 기억이 곧 의식이라는 듯 설정이 된 것 같아요. 기억을 주입함으로써 레플리컨트가 인간과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발달할 것이다, 라는 뉘앙스가 있거든요.
그러나 기억은 의식이 아닙니다. 실은, 기억을 취하거나 삭제하는 게 의식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영화에 나오는 로이라는 인물, 즉, 도망친 레플리컨트들의 대장인 그는 왜 이렇게 인간을 혐오하느냐?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별별 일을 당했겠죠, 노예로서. 얼마나 악독한 인간들을 만났겠습니까? 로이가 친구라고 여기는 다른 레플리컨트들을 학대하고, 로이도 학대하고, 그들을 죽이고, 그랬을 겁니다. 얼마나 끔찍했겠어요.
이 로이라는 인물이 처음 제대로 등장하는 시퀀스에서, 그는 넥서스 레플리컨트의 눈을 만드는 작업실에 침입합니다. 그곳에서 작업자를 협박합니다. 작업자가 로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해요. “내가 네 눈을 만들었어. 나는 눈만 만들어. 다른 건 아무것도 몰라.” 이 작업자는 아주 나이 든 노인이고, 이 말을 그리 불친절하게 하지 않습니다. 레플리컨트가 아닌 인간이 쳐들어왔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하고 말했을 것 같아요.
이 말에 로이가 답합니다. “If only you could see what I’ve seen with your eyes.” “당신의 눈으로 내가 본 걸 당신이 볼 수 있다면.”
영화 내에서 로이의 대사가 시적이에요. “with your eyes”라고 해요. “당신의 눈.” “당신이 만든 눈” 말고 당신의 눈. 로이의 지능과 취향으로 미루어 볼 때, 의도된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약간… 로이가 약간… 자학적 어두운 유머 코드가 있다고 저는 느껴졌어요. 자기 눈은 아니라는 거죠. 자기 몸에 달려 있는데, 어차피 자기 몸도 자기 것이 아니고, 자기는 노예고, 이 작업자가 거기 달린 눈을 만들었으니, 작업자의 눈이다. 그러나, 신기하죠? Your eyes로 보는 행위를 한 자는 누구인가?
로이입니다. “I.” What I’ve seen이라고 하잖아요. 내가 본 것.
신기하죠? 눈은 작업자의 것이지만, 보는 행위는 로이가 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건 이겁니다. 로이가 이렇게 분노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다른 레플리컨트를 데리고 도망치고, 사람을 죽이는 등의 행위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아픈 기억 때문입니다. 또한, 타이렐 씨는 마치 기억이 한 번 주입되면 레플리컨트는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인간과 다름없게 비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로이가 ‘내가 보았다’고 하는 걸 듣고 있자 하면, 마치… 로이는 자신이 기억을 취하고 버릴 수 있다는 걸 아는 개체 같아요. 즉, 기억뿐만 아니라, 의식이 있는 개체 같아요.
기억이라는 것은 작품 세계 내에서 단지 오감 정보 같은 피상적인 것을 주입함으로써 생겨날 수 있는 것일지 몰라도, 이 기억을 갖고 무엇을 하느냐, 이것은 의식만이 할 수 있는 거 아니냔 말이죠. 눈은 작업자에게서 왔지만 보는 행위는 자신이 한다는 걸 아는 로이는 의식이 있는 개체가 아닌가?
만약 아픈 기억 정보가 없었다 하더라도 다른 것을 보고 느꼈을 그 의식을 가진 로이.
반면, 이럴 수도 있습니다. 로이는 의식이 없는 거예요. 의식이 없어서 사실은 기억 정보를 취하거나 삭제할 수가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억 정보가 한 번 주입된 이상 삭제를 못 하는 것이 레플리컨트라면, 의식은 없고, 다만 데이터가 쌓인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어… 제가 생각하는 의식이란, 기억 정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게 쉽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세상에서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우리도 기억 정보를 자유자재로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의식적 훈련을 통하지 않으면 기억 정보대로, 거의 그냥 오토파일럿으로 삽니다.
레이첼이 자기가 레플리컨트인 걸 모르는 것 갖고 약간 비웃는 뉘앙스를 풍기는 인물들이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데, 레이첼의 이러한 모습이 우리랑 많이 다릅니까? 우리가 태어나서 ‘너는 이러이러한 국적의 사람이다’라고 누군가 하는 말, 그러한 말을 우리 중에 그대로 안 믿는 사람 있어요? 그냥 그런 줄 알고 살지 않나요?
너는 학교에 가야 해.
너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해.
너는 몇 살 때 결혼을 해야 해.
애는 몇 명을 낳아야 하고, 은퇴는 몇 살에 해야 해. 그게 정상이고, 사람들 다 그렇게 살고, 원래 그런 거야.
이러한 말들은 오토파일럿 프로그램들입니다. 주입된 기억 정보예요.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살면 불행하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고요, 어떤 사회든 주입되는 디폴트 프로그램이 있을 수밖에 없단 뜻입니다.
유목민들 문화에 가면 다른 프로그램이 깔리겠죠.
너는 자연에서 살아야 해.
너는 동물들을 돌보며 살아야 해.
도시에는 악이 가득해.
이런 종류의 다른 프로그램들이 깔렸을 수 있겠죠. 무엇이든 간에, 사람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든, 주변의 문화든, 그것으로부터 오토파일럿 프로그램을 흡수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생존 욕구라는 것 자체가 우리한테 기본적으로 탑재된 프로그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게다가, 여러분. 어렸을 때 일이 기억은 안 나는데, 그때 누군가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뇌가 순식간에 기억을 조작하는 것 같은 느낌 느껴본 적 없으십니까?
저는 여러 번 있는데, 그래서 제 기억이 정말 진짜 기억인지 의심이 가요. 분명 기억이 없었는데, 사진을 보는 순간 뇌가 이야기를 조합하는 게 느껴져요. 그리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사실과 비사실의 구분조차 허상일 가능성까지 감안하면요.
아무튼, 제가 본 그 사진이 조작된 사진이면 어떨까요? 요즘 딥페이크에 접근하기 쉽잖아요. 특히나, 어… 제가 녹취록에 웹사이트를 하나 링크할게요. “This person does not exist”라는 사이트예요. 여기에 들어가면, 이 세상에 없는 사람 얼굴을 프로그램이 조합해서 보여줍니다. Refresh 하면 새 얼굴이 계속 나와요.
아니, 이 프로그램은 이 얼굴들이 존재하지 않는 건 어떻게 아는지? 참… 의문이에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게 어딘가 언젠가는 존재한다면, 이 프로그램이 만들어 내는 얼굴 조합도 가능한 거 아닌가? 만약 이 페이지를 계속 리프레시 하다가 제 얼굴이 나오면 어떨까요? 소오오오오름 돋겠죠.
게다가 저는 기억이 1인칭으로 나는 게 아니라 3인칭으로 날 때가 대부분입니다. 몸뚱아리, 즉, 아바타로서의 내가 아닌, 모든 것을 관찰하는, 나에게 집중해 있으니 3인칭이되 전지적이려면 전지적일지 모르는 나. 그냥 제가 겪은 일인데도 그래요. 예를 들어 제가 녹음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녹음했던 걸 떠올릴 때는 제가 바라보고 있는 컴퓨터 화면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녹음을 하고 있는 저까지 보이는, 그러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음… 아무튼. 다시 오토파일럿 얘기를 해보자면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환경에서 제공되는 오토파일럿 프로그램과 잘 맞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안 맞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오토파일럿 외에도 살면서 겪는 기억들이 좋거나 나쁘다고 인지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 중 무엇이 ‘나’를 형성하고 무엇이 ‘그저 기억’일 뿐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나의 의식입니다. 즉, 기억이 나인 게 아니고, 오토파일럿이 나인 게 아니고, 그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이 나란 말이죠.
그런데 대개는 사회에서 문제없이 살려면, 오토파일럿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는 척을 해야 합니다. 학교에 나가라면 나가야 하고. 회사에 가라고 하면 가야 합니다. 오토파일럿을 버리고 그러한 기억 정보들 뒤에 존재하는 ‘나’를 보는 것은 오토파일럿이 얼마나 강력했느냐에 따라 꽤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이 로이라는 인물은, 레플리컨트인 자신이 노예인 것이 억울하다는 기억 정보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감정 정보든, 사실 정보든, 그 기억 정보를 갖고 있다. 그리고 억울하면 안 된다, 는 기억 정보를 갖고 있는 듯합니다. 이게 당연한 것 같지만, 잘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 않아요.
인류의 역사에서 신분제도가 왜 그리 오래 지속되었을까? 그 외의 각종 차별도? 그러한 차별이 있는 게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그 차별이 오토파일럿의 일부란 거죠. 그러한 차별이 억울하다는 생각은 오토파일럿에서 빠져나온 다음에야 할 수 있는 생각이고, 개개인이 빠져나온다 하더라도 그 빠져나옴은 당연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오토파일럿은 말 그대로 오토파일럿인데, 그것 그대로 사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누군가는 오토파일럿에서 빠져나왔기에, 그리고 그 언젠가의 누군가들이 어떤 임계점을 넘으면 타인의 오토파일럿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에, 그렇기에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것이 당연해지는 것입니다.
임계점은 어떻게 넘는가? 백 번째 원숭이 현상 같은 것 때문에? 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발견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을까? 왜 수백 년 전 우리는 분명 신분 제도가 별별 대륙에서 지배적이었던 시대에 살았는데, 이제는 신분 제도가 없는 걸 소위 당연하다고 말하나?
아무튼. 노예인 게 억울하다는 기억 정보, 그리고 억울한 건 좋지 않다는 기억 정보는 당연하지 않다.
또한, 그보다도 더 중요하게, 로이는 죽음은 무섭다는 기억 정보를 갖고 있어요.
네, 어… 영화에서는 레플리컨트가 감정을 갖고 있느냐 아니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은데, 제가 관람할 때는, 당연히 얘네는, 적어도 로이 같은 레플리컨트 모델은, 당연히 감정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죽음의 공포는 감정 중에도 가장 뿌리 감정입니다. 인간 중에서도, 오토파일럿으로 살다 보면, 자신이 죽음의 공포가 있다는 것을 인지조차 못 하거나, 인지는 하더라도 인정을 안 하려는 경우가 있어요. 왜냐하면 죽음의 공포를 인정한다는 건 어마어마하게 자신이 약해지는 경험, 무능해지는 경험, 버려지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죽음의 공포에 처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나에게 그 감정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극도로 무서운 경험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명상을 지금 어… 세 달 정도 진짜 빡세게 했거든요? 하루에 서너 시간씩, 더 많이도 했어요. 그리고 그 이후로는 급격하게 줄였어요. 하루에 한두 시간으로 줄였어요. 왜 그랬냐면. 그 전후가 갈리는 지점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했냐면, 죽음의 공포를 완전하게 인정했느냐 아니느냐로 전후가 갈렸습니다.
제가 명상계를 조사하면서 어… 몇 달간, 머리로는 죽음의 공포가 무섭다는 걸, 당연히, 머리로는 인식을 했는데, 그리고 제가 그것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느낌으로써 인정한 건 명상을 빡세게 한 지 세 달 정도 된 시점이었고, 그때 진짜. 어… 명상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들어보신 적 있으실 거예요. 이 죽음의 공포를 정말로 인정할 때는 진짜 눈물이 쏟아진다고. 진짜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진다고. 근데 제가 3개월 동안, ‘어… 뭐 그렇게까지는 아닌데?’인 상태로 있다가, 3개월 정도 된 그 시기에, 갑자기 완전히 이해하겠더라고요.
이게 그러니까 뭔가… 죽는 게 슬프다, 이런 느낌이 아닙니다.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죽음이 굉장한 해방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아주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고요,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 같아요. 저는 삶이 무조건적으로 선하고 이롭다고 생각했던 적이… 제가 기억하기로 한 번도 없고, 제 기억은 네다섯 살쯤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죽음의 그 해방성, 아름다움을 떠나서, 살아 있는 개체로서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는 건 다릅니다. 느껴보니까 이제 알겠더라고요. 머리로 인식하는 것과 느끼는 것의 차이를. 미친 듯이 눈물이 납니다. 이게 어… 울다가 너무 힘들어서. 어… 어떤 분들은 한 방에 그냥 막. 몇 시간에 걸쳐서 쏟아내신대요. 저는, 제가 저한테 그랬어요. “야. 나 진짜 너무 힘들어가지고. 좀 있다 계속하자.” 해서. 어느 날 아침에 막 이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해서, ‘잠깐 타임’을 외치고, 그날 밤에 한 시간 정도 폭풍 울고. 그다음 날 아침에 다시 한 시간 정도 폭풍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어… 갔어요.
죽음의 공포를 느꼈더니, 걔가 만족하고 가더라고요. 그러고서 제가 얼마나 살고 싶은지를 알았어요. 그런데 그와 동시에, 어이가 없는 것이, 죽음의 공포를 느꼈기에, 무섭지 않습니다. 살고 싶은 건 옛날보다 더 살고 싶은데, 죽음은 덜 무섭다. 이상하죠?
이게 뭐랄까…. 이게 의식인가? 무엇을 취할지 선택할 수 있는 것.
그런데 하여튼 간에. 저는 저고. 로이는. 로이가 죽음의 공포를 느낀 건지? 죽음은 무서운 거라는 기억 정보를 갖고 있는지?
영화 말미에 그가 데커드와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Quite an experience to live in fear, isn’t it? That’s what it is, to be a slave.”
“공포 속에서 산다는 게 참 대단한 경험이지? 노예로 존재한다는 건 이런 거야.”
앞서 말씀드렸듯이, 로이의 대사가 참 시적이란 말이죠. live in fear. To be a slave. Live. Be. 로이가 몇 마디를 안 하는데, 그 대사 안에 존재, 삶, 그리고 몸뚱이 아바타를 갖고 살아가는 의식이라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공포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로이가 창조주를 죽이는 장면이 있어요. 타이렐 씨를 찾아가서 죽여요. 그리고 로이가 타이렐 씨를 Maker라고 부릅니다. Maker. 이 단어 선택도 특이합니다. 진짜 창조주. 나를 만든 자. 그 창조주를 죽입니다.
태어나게 해달라고 하지도 않은 나를 태어나게 하는 것도 모자라서, 내가 이렇게 괴로울 걸 뻔히 알고도 태어나게 했으니. 타이렐이 로이한테 기억 정보를 저장할 능력을 안 줬을 수도 있는데, 줬잖아요. 일부러. 얼마나 죽이고 싶을까. 심지어 그 상태로 오래오래 잘 살게 해줬나? 그것도 아니고, 4년만 살게 했다. 진짜 얼마나 죽이고 싶을까.
그런데 또한, 이 죽이고 싶은 마음이 레플리컨트적인가? 전혀 아닙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보다 인간적인 게 있는지. 나에게 이러한 기억 정보를 주입한 자. 기억 정보 뒤의 ‘나’를 발견할 법을 알려주기는커녕 자기도 몰라서, 나를 오토파일럿으로 살다 가게 한 자. 죽을 게 뻔한 나를 굳이 만들어서 고통으로 몰아넣은 자.
이런 감정들이 인간적인 게 아니라면 그리스 로마 신화의 99%는 거의 뭐… 없겠죠. 너무 많은 신화가 그 얘기 아닙니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는 기타 등등.
그리고 이 죽이고자 하는 마음 뒤에는 내가 죽을까 봐 무서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로이의 경우에 그게 극명하게 드러나죠.
불쌍한 로이. 자신이 본 것이 자신과 함께 사라질 것을 슬퍼하는 로이.
이 레플리컨트들은 살아 있을 때도 마음대로 못 하잖아요. 작업자의 눈을 이용하되, 보는 행위 자체는 로이가 했다고 했는데, 그렇게 본 것을 로이는 유튜브 채널에 찍어서 남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책을 써서 남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로이였던 모든 것은, 특히나 로이가 의식의 장의 일부가 아니라면, 로이였던 모든 것은 로이가 죽으면 그냥 죽는 거예요.
하나 더 의미심장한 대사를 짚어볼게요. J.F. Sebastian이라는 인물, 유전자 공학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타이렐 코퍼레이션에서 일하고, 레플리컨트들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에요. 친절한 사람 같은데, 25세인가? 나이가 매우 어립니다. 그런데 빨리 노화해서 나이 들어 보이는 병이 있대요. 그런 그는 다른 사람은 살지 않는 거대한 건물에 혼자 삽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들었어요. 말 그대로 친구들을 만들었어요. 로봇 친구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They are my friends. I made them.” 그들은 내 친구들이야. 내가 만들었어.
이 말이 참. 말 되네, 했습니다, 저는.
지금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믿고 있는 사람들도 친구를 ‘만든다’고 하잖아요? 특히 영어에서. 물론 세바스찬은 좀 더 말 그대로를 말하는 거라는 게 포인트겠지만.
Sebastian은 친구를 만들었지만 그 친구들은 Sebastian을 만들지 않았다. 레플리컨트 중 감정을 느끼는 레플리컨트는 세바스천을 친구로 ‘만들’ 수 있을까?
감정을 못 느끼더라도 느끼는 것으로 비춰지면 세바스천에게 그 친구는 세바스천을 친구로 ‘만든’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세바스천 입장에서 차이를 모르니까.
그렇다면 어차피 남의 속을 완전히 알 수 없다고 여겨지는 우리는 어떤가?
아니면 남의 속을 알 수 있나? 아까 말한, 백 번째 원숭이 현상 같은, 모든 것이 연결되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것이 의식의 장에 연결되어 있다면. 하지만, 다시 떠오르는 의문점은, 레플리컨트는 그 의식의 장에 연결되어 있나? 의식이 대체 뭔가?
당연히, 한아임은 의식이 뭔지 정확히 모른다. 그냥 이런 거 아니냐 저런 거 아니냐 생각할 뿐이지. 의식이란 것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모르겠다.
다만, 기억은 의식이 아닐 것이다. 기억은 오토파일럿만 탑재되어 있어도 존재하는 거니까. 기억 뒤에는 기억을 취하고 삭제할 수 있는 뭔가가 있는데, 그게 의식 아닌가? 혹은 의식의 일부 아닌가?
그것이 자유 의지인가? 도대체가 과학이 설명할 수 없으며,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하고 싶다’, ‘원한다’를 속삭여 주는 의식. 근데 그거… 안 자유로우니까. 그게 또 함정이죠? 안 자유로운데.
여러분 자유로워서 뭐가 하고 싶어지나요? 하고 싶은 걸 하느냐 마느냐는 자유인데, 하고 싶은 것은 자유가 아니잖아요. 저는 아임 드리밍 하면서 왜 하고 싶은지 모릅니다. 하고 싶은 것만 알지, 이게 왜 하고 싶은 거야. 아니 기억이든 의식이든. 뭔 상관이래. 왜 때문에 여기에 관심이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뭐가 자유로운 건지.
근데 어… 꼭 자유로워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자유롭지 않다고 해서 괴로운 건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좋아요.
자유가 굴레보다 더 좋다는 건 허상인 것 같아요. 물론 로이처럼 자기가 원하지 않는 형태의 삶을 살기는 싫죠. 타인이 가하는 노예 생활은 너무 싫죠. 그러나 근본적인 굴레가 내 안에서 온다면? 이 굴레가 얼마나 마음 편한지 모릅니다. 이 굴레도 나고, 그 굴레를 나한테 건네는 자도 나고, 행하는 자도 나고.
그렇다면 ‘나’는 뭔가?
로이가 진짜 너무 의미심장한 말을 했어요. 그에게는 작업자의 눈이 있으나, ‘본다’는 행위를 한 ‘나’는 누구인가? 로이의 불행은 일치되지 않음에서 오는가? 아바타, 즉 몸뚱이로서의 로이와, 근원에서 자유 의지인 척하는 무언가를 속삭이는 로이 등등 여러 로이들이 영원히 일치될 수 없기에.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인하여.
참 나 원. 이 영화 통틀어서 로이가 제일 흥미롭습니다. 매력덩어리.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시인이 됐을 텐데. 블레이드 러너 속 2019년 엘에이의 수많은 소위 인간들은 오토파일럿으로 움직이는데, 그 와중에 소위 노예 레플리컨트인 로이는 대체 어떤 경험을 하길래 짧은 몇 마디에 존재가 가득한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제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얘기할 영화, <씬 시티>입니다. 각자의 거주 국가에서 관람 가능한 플랫폼을 찾아서 봐봅시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Aviad Zinemanas – Nova
- Gal Lev – My Dark Side
- Flint – Too Many Pixels
- Jon Gegelman – Almost Broken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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