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54] 해소, 정화, 카타르시스, “씬 시티”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 수다의 씨앗, <씬 시티>입니다. 오늘도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줄거리를 그다지 자세하게 설명하진 않을 거지만 말이죠. 이 영화가 특이한 점이, 줄거리가 있습니다. 있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진 않다고 저는 해석했습니다.

그래도, 영화가 어떤 분위기인지를 알려드리기 위하여, 나무위키에 있는 시놉시스의 첫 부분을 읽어볼게요.

“대담한 범죄와 스릴 넘치는 관능으로 가득 찬 도시 ‘씬 시티’

부패와 범죄로 가득 찬 죄악의 도시 ‘씬 시티’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의를 지켜나가는 거침없는 아웃사이더들이 있다. 마지막 남은 양심적인 형사와 살인 누명을 쓴 거대한 스트리트 파이터, 고독한 사진작가와 주위를 맴도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바로 그들. 그들의 거침없는 복수 그리고 매혹적인 사랑이 각각 색다르게 엇갈리며 도시를 휘감는다.

그곳에는 부패한 경찰과 도망자와 영웅,

그리고 뇌쇄적인 스트립 걸이 엮어 갈 숨막히는 범죄극이 있다!”

네. 이러합니다. 이 부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점이, 누구누구’와’ 누구누구라는 설명이 참 많죠. 형사와 파이터, 사진작가와 여인들. 경찰과 도망자와 영웅. 왜 이렇게 ‘와’가 많은가? 인물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주인공이 딱 한가운데에서 중심을 잡는 형태의 플롯이 아니고, 수많은 캐릭터들이 얽히고설켜 있는 영화입니다.


네. 그렇게 수많은 인물들이 얽히고설킨 줄거리가 이 영화에 적합했다고 저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가 시각적으로 굉장히… 과해요. 이런 스타일을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좋아할 법도 하지만, 또,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싫어할 법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흑백이고요, 거기다 쨍한 빨강, 노랑, 초록 등이 아주 과하게 강조되어 시각적으로 포인트를 줍니다. 그래픽 노블이 원작인데, 오프닝 크레딧은 그 자체로 그래픽 노블의 움직이는 버전이에요.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기반으로 한 영화다. 그래서 그 스타일을 실제 인간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부분으로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습니다.

이 그래픽 노블 스타일. 그러니까, 왜 그… 장르로서의 그래픽 노블의 스타일이 있잖아요. 우리가 ‘애니’ 혹은 ‘망가’ 하면 일본 스타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래픽 노블을 생각하면 딱 그… 미국적 스타일이 떠올라요. 넓게 보면 전부 만화인데, 그리고 단어 자체를 생각하면, 애니는 ‘animation’이니까 움직이게만 하면 다 애니라고 부를 수 있을 것만 같고, 그래픽 노블은 말 그대로 graphic한 novel이니까, 그러면 그래픽이 들어간 줄거리 있는 이야기이기만 하면 다 그래픽 노블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지만, 대개는 그래픽 노블이나 애니라는 단어를 쓰면 딱 그… 특정 장르, 특정 분위기를 일컫게 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그래픽 노블 스타일. 미국적. 그… 수십 년 전에는 너드들이 주 수요층이라고 알려졌으나, 마블 영화가 박스오피스의 황제가 된 지도 벌써 십수 년이 된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리고 <씬 시티>라는 영화가 나온 2005년 당시에도 이미 뭐… 주류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나 싶은, 그 스타일이에요. 찾아보니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첫 영화는 <아이언 맨>으로, 그게 2008년에 나왔대요. 그즈음 때부터 지금까지, 뭐… 이제 코믹 책이나 그에 기반한 이야기를 너드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기는 경우는 잘 없는 것 같아요.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래픽 노블 스타일을 실사 영화, 인간 배우들이 움직이는 환경으로 데려오면 좀… 과하긴 하다. <아이언 맨>은 만화처럼 찍은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씬 시티>는 정지 화면의 시각적 스타일도 그렇고, 움직이는 시퀀스의 동작도 그렇고, 만화 같아요. 사실성이 강조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상태에서 만약 플롯이 너무, 뭐랄까, 정석적이었다고 한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씬 시티>는 그런 정석적인 플롯을 택하지 않았고, 파편화된 이야기들이 완전히 엮일까 말까? 하는 그런 구조를 택하면서도, 가장 첫 시퀀스와 마지막 시퀀스도 얼추 연결이 되고, 또한 두 번째 시퀀스와 끝에서 두 번째 시퀀스도 얼추 연결이 되기 때문에, 통일감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줄거리가 있되, 분위기로 밀고 가는 영화입니다. 우리 지금 이혜원 기획자랑 제가 <누아르 어바니즘> 책을 번역하면서, 거기 나오는 영화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잖아요, 이번 시즌에서? 딱 그… 누아르! 어바니즘! 네. 지난주의 <블레이드 러너>에 이어서, 정말 2023년 주류 문화에 익숙한 우리가 누아르에 어반이라고 하면 딱 떠올리는 고런, 다크하고, 아주 그냥 치명치명, 고런 느낌. 그 분위기. 그리고 그 박력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고걸 느끼기 위하여 보면 아주 딱 좋은 영화입니다.

카타르시스의 사전 의미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1.  『문학』 비극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따위가 해소되고 마음이 정화되는 일.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詩學)≫에서 비극이 관객에 미치는 중요 작용의 하나로 든 것이다. ≒정화.

2.  『심리』 정신 분석에서,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를 언어나 행동을 통하여 외부에 표출함으로써 정신의 안정을 찾는 일. 심리 요법에 많이 이용한다. ≒정화, 정화법.”

네. 요렇게 나와 있는데. 꼭 1번 정의에 나온 것처럼 비극이어야만 하는 것 같진 않아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에 카타르시스를 논할 때 그런 의미에서 이 단어를 썼을 순 있겠지만요. 또한, 꼭 2번 정의에 나온 것처럼 언어나 행동을 통해 외부에 표출해야 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보다는 정화. 여기 유의어로 ‘정화’가 나와 있잖아요. 요것. 요것이 핵심인 것 같아요. 비극이든 희극이든 상관없고, 언어나 행동을 통해 외부에 표출을 하든, 방에서 혼자 영화를 보면서 아무 외부 표출도 없이 감정을 오롯이 느끼든,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카타르시스는, 내가 평소에 경험하지 않았던 감정을 지금 여기에 없는 상황을 통해 드디어 느끼는 체험 전반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상황은 타인이거나 허구이거나 지금 현재의 내가 아니라서 간접적이되, 감정 느끼기는 직접적으로.


<씬 시티>의 카타르시스 요소는 여럿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적인 거예요. 이… 누아르. 어바니즘. 캬. 뭐가 떠오릅니까? 치명치명. 왕치명. 킹왕치명.

영화 시작부터, 치명녀, 말 그대로 팜므 파탈이 등장하고, 뒤이어 곧바로, 치명남, 옴므 파탈이 나옵니다. 하. 여러분? 영화에서는 치명녀 치명남이 그냥 줄줄이 마구마구 나오죠.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 세상에 많습니까? 그러나 그게 나는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치명’이란 건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거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미 전반의 기준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바뀌듯, 치명이란 게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도 시공간에 따라 바뀝니다. 그리고 그 바뀌는 대세가, 약간… 일부러 아무나 범접하지 못하는 기준으로 바뀌는 것 같아요. 제가 이번 시즌에서 상대성에 대해 좀 언급을 몇 번 하지 않았습니까? 뜨거운 게 있어야 차가운 걸 알고, 차가운 게 있어야 뜨거운 걸 안다. 그래서, ‘코가 얼굴 가운데에 있다’가 미나 치명의 기준이 될 순 없어요. 그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부합하는 기준이라서. 그보다 더 어려운 거. 더 특별한 거. 아무나 하거나 갖지 못하는 거. 그래서 상대적으로 더 두드러지는 거. 그게 치명이나 미의 기준이 되고, 아무리 기준이 바뀔지라도, 그… 희소성이라는 요소는 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할 순 있겠죠, 치명적이려고. 아름다우려고. 그러나 그 와중에도 상대성이 존재하는지라, 그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이고 아름다운 사람들만 치명치명하고 아름아름하다.

이런 상황이니까, 우리가 아름답고 싶다고 아름다울 수 있습니까? 치명적이고 싶다고 치명적일 수 있습니까? 특히나, 수많은 사람에게 아름답고 치명적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가 운이 좋으면 우리를 너어어무 아름답다고 해주고, 너어어무 치명적이라고 해주는 콩깍지 씐 동반자 혹은 심지어 동반자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주류에서 통하는 시공간의 미 혹은 치명의 기준이 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그 기준에 내가 동의를 하든 동의를 하지 않든, 이렇게 너무 명확하고 시원하게 This is 치명, 하면서 보여주는 <씬 씨티> 같은 영화가, 어… 저는 약간 웃겨요. 웃기다는 게, 가소롭고 하찮은 그런 웃김이 아니고, 진심으로 즐겁게 웃겨요. 이렇게 대놓고 시원하게 딱 그 가려운 부분을, 절대 나는 긁을 수 없는, 절대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치명적이지가 않아가지고 내가 직접 긁을 수 없는 거기를 얘가, 이 영화가, 적당하게 긁어 준다.

치명의 사전 정의 자체가 생각해 보면 좀… 웃겨요.

이렇게 나와 있어요.

‘치명적.’ 명사. 생명을 위협하는 것.

이 자체가. 이… 그러니까, 어떤 상대를 내가 봤을 때, 내가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위협을 느낄 정도로 너무 아름답다는 거 아니야. 이게… 매력인 건 맞는데, 코믹과 정말 한 끗 차이 같아요. 그래서 실제로 에로와 코미디는 잘 섞입니다. 치명치명이 운 좋으면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치명치명하고 섹시섹시한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약간… 웃길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씬 시티>에서처럼 확연히 치명적인 경우도 있다. 물론. 이조차도, 어… 제가 아까 말한 그런 ‘웃기다’를 넘어서서 완전 우습다고 느껴지시는 분들도 계실 거 같아요. 이게 정말 한 끗 차이라서.

뭐든지 그래요. 참 이게. 참 어렵죠? 아니, 전 잘 모릅니다만, 어려울 것 같아요.

내가 어… 내가 너무 아름다워. 그런데 내가 그걸 너무 자각하고 잘 알면, 그럼 좀… 아름다움이 떨어지고, 심지어 우스워질 수가 있다. 근데 뭐, 제가 뭘 알겠어요? <씬 시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아름답고 치명적이어 본 적이 없어서, 전 잘 모릅니다. 그냥 관찰자 입장에서 겪어본 거죠. 관찰하는 입장에서 볼 때 아름다움의 9할은 아름다움이 너무 당연한 나머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치명도 마찬가지다.

아무튼. 이상, 한아임의 치명론이었고요. <씬 시티> 첫 시퀀스에, 치명녀와 치명남이 나오고. 색소폰 멜로디가 두드러지는 재즈 선율이 나옵니다. 줄거리, 이딴 거 다 필요 없고, 분위기로 압도하는, 전형적인 누아르입니다. 화면의 대조는 매우 강합니다. 그… <알파빌> 같은 옛날 흑백 영화의 흑백 대조가 아니고요, 검은색이 매우 쨍한 검은색. 흰색은 매우 쨍한 흰색. 왜곡과 과장, 그 자체예요. 그리고 이 역시도 카타르시스의 요소입니다.

왜곡과 과장. 실제 삶에서 우리는 일단… 어, 삶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왜곡과 과장을 하는 게 불가하고요. 통제할 수 있는 부분에서조차, 삶이란 매우 긴 장편 영화 같기에, 왜곡과 과장을 마음대로 못 합니다. 왜곡과 과장 그 이후를 우리는 살아야 하니까요. <씬 시티> 속 인물들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행복하든 불행하든 그 세계에서 살거나 죽겠지만, 우리는 끝나고 영화관을 나와서, 상대성이 존재하긴 하되 너무나 얽히고설켜 있어서 하나를 건드리면 다른 모든 것도 다 영향을 받게 되는 ‘현실’이라는 세계로 돌아와야 한단 말이죠. 그 ‘현실’에서도 이렇게 왜곡과 과장을 했다가는, 어… 아니,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뉘앙스가 많이 사라질 것 같고, 그것은 막대한 손실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씬 시티>의 이런 쨍함. 이런 대조. 혹은 그래픽 노블이나 애니 전반의 비현실성. 여기에 분명한 매력이 있습니다. 치명적인 성적 매력을 담지 않은 그냥 정지된 화면에도 매력이 있어요. 이런 시각적, 청각적 스타일에요.

아무튼. 이 첫 시퀀스에서 왜곡되고 과장된 치명녀 치명남이 등장하더니, 갑자기, 치명남이 치명녀를 죽여요. 영화의 첫 몇 분 안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왜 죽였냐? 돈 때문에 죽였다. 캬. 이것도. 돈. 그리고 그것과 흔히 연관되어지는 권력. 역시나 카타르시스의 요소입니다. 누아르 장르가 지속적으로 매력을 뿜는 이유가 있어요. 자본주의 등장 이래 주류 사회에서 우리가 원하거나 원해야 한다고 주입받는 것들이 여기 많이 들어있거든요. 섹스, 과장, 돈.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력.

<씬 시티>에서 사람이 그냥. 막 죽어요. 그냥 죽는 것도 아니고. 총을 맞아도, 뭐, 손목에 맞았는데 손이 통째로 날아가고. 성기에 총 쏘고. 나중에는 성기를 뽑습니다. 무섭죠? 엄청난 카타르시스예요. 뽑을 만한 놈이었어서 뽑은 건데, 우리가 살면서 직접 그럴 일이 몇 번이나 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한 번도 없죠. 죽음 자체는 너무 일상적인 일이라 뉴스에 안 나지만, 성기를 뽑았다고 하면 요즘처럼 별별 뉴스가 다 전달되는 세상에서조차 온 세상 뉴스에 날 일이에요. 그런데 그게 <씬 시티>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누아르적 도시의 압도적인 분위기로 시작한 영화는 얽히고설킨, 서로 연관성은 있되 완전히 앞뒤가 맞아야만 작동하는 것은 아닌, 여러 인물의 이야기들로 진행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계속, 끝까지 묶어주는 건 이 분위기, 이 도시, 죄악의 도시, 씬 시티입니다.


아니 그래서, 이런 영화를 대체 왜 보냐. 왜 만드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성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묘사. 이 비현실적인 왜곡과 과장. 이 돈과 권력에의 목매닮.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폭력. 여기서 대체 무슨 카타르시스를 느끼냐? 왜 느껴야 하냐?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맞아요. 꼭 개개인이 다 직접 느껴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는 개개인으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집단으로서도 존재하지 않습니까? 꼭 내가 농사를 지어서 쌀을 수확해서 밥을 지어서 먹지 않아도, 길 앞 식당에 가서 돈을 지불하면 식사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즉, 꼭 내가 <씬 시티> 장르를 좋아하거나, 소비해야 하거나, 심지어 그 존재를 알 필요조차 없습니다. 다만, 얘가 존재해서, 인류 집단 측면에서 봤을 때 정화될 게 정화된다는 게 핵심이라고 봅니다.

정화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 정의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1. 불순하거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함.

2.  『문학』 비극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따위가 해소되고 마음이 정화되는 일.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詩學)≫에서 비극이 관객에 미치는 중요 작용의 하나로 든 것이다. =카타르시스.”

이건 아까 카타르시스에서 나왔던 정의죠.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아까 나왔던 것과 같게,

“3.『심리』 정신 분석에서,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를 언어나 행동을 통하여 외부에 표출함으로써 정신의 안정을 찾는 일. 심리 요법에 많이 이용한다. =카타르시스.”

마지막으로,

“4.『종교 일반』 비속한 상태를 신성한 상태로 바꾸는 일.”

이렇게 네 가지 정의가 ‘정화’라는 단어 아래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성적인 생각 안 한다. 나는 이렇게 치명치명한 거 관심 없고, 비현실적인 왜곡과 과장 싫고, 돈과 권력에 미친 거 너무 이상하고, 폭력적인 거 아주 별로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이러한 저항이 크다? 하면 그 저항이 또한 집착과 같습니다.

뭐냐 하면, 예를 들어, 진짜 식상한 예를 들자면. “돈 많이 버는 놈들은 나빠.”라는 생각이 있다고 쳐봅시다. 그러면 그 생각은 표면상으로 보기에는 돈 많이 버는 놈들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잘 보세요. “돈 많이 버는 놈들은 나빠”라는 생각을 세게 하면 세게 할수록, 나는 “돈 많이 버는 놈들”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인 겁니다. “돈 많이 버는 놈들”을 나쁘다고 내가 주장하는 건 상관이 없어요. 나쁘다고 말을 하든 좋다고 말을 하든, 나의 에너지는 돈 많이 버는 놈들한테 가 있습니다. 나아가, 돈에 가 있습니다.

또 하나 식상한 예. 어떤 시공간에서는, 여자들이 발목만 드러내도 야하다고 하잖아요. 이게 얼마나 웃깁니까? 웃긴 거예요. 그 어떤 이유를 대도 웃긴 겁니다. 사람의 신체 부위를 보고, 심지어 생식기도 아닌 신체 부위를 보고 바로 섹스 생각을 한다는 게, 얼마나 머리에 섹스만 가득  차 있는 겁니까? 물론, 이런 개인 취향일 순 있어요. 그런데 저는 지금 개인 취향을 말하는 게 아니고요, 어떤 특정 시공간에서 여자들의 발목 equals 야함이라고 공식화를 해서, 아예 발목을 못 드러내게 한다든가, 하는, 두뇌도 심장도 쓰지 않는 압제를 가하는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명목상으로는 섹스 너무 불결해, 성적인 거 너무 더러워, 이러면서 압제를 가하죠, 보통.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봐도 뭐다? 발목이 야해 보이는 건, 보는 자 머리에 섹스밖에 안 들어 있어서이지, 발목이 실제로 야해서가 아니다.

특히나, 이러한 저항이 가벼우면 저항이라고 부르기에도 뭐하지만, 저항이 강하다? 그러면 집착과 다를 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저항과 집착은 동전의 한 면이에요.

저항이나 집착이 잘못돼서 없애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없애야 한다거나 있어야 한다는 생각들도 그 자체로 저항이고 집착이에요. 다만, 저항 내지는 집착이 있는데 없는 척하거나 있는지도 모른다면, 그게 어디로 갑자기 사라지는 게 아니라, 쌓입니다. 저항 혹은, 그 반대 개념이되 같은 힘으로 작용할 수 있는 집착은 해소, 정화를 하지 않으면 그게 없는 척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무의식이든 의식이든에 쌓인다고요.

그렇다고 해서 훌렁훌렁 벗는 게 싫은 사람들이 야한 영화를 꼭 봐야 한다. 아니면 부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부자를 좋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를 꼭 봐야 한다. 이런 게 아니고요.

스스로 한 번쯤은 깊게 관찰을 해보면 좋긴 하단 겁니다. 나는 왜 이렇게 야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가? 성이 나쁜가? 왜 나쁜가? 벌거벗은 사람은 나쁜가? 벌거벗은 성인은 나쁜가? 벌거벗은 아기는 나쁜가? 몸의 어떤 부분을 보여주는 게 나쁜가? 왜 손은 되고 가슴은 안 되나? 누가 나에게 성이 나쁘다고 가르쳤는가? 나는 그 사람 말을 왜 믿었는가? 등등등.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왜 부자는 나쁘다고 여기는가? 이 세상의 부가 유한하다고 여기나? 내가 차지한 부는 왜 괜찮은가? 쓸 만큼만 벌면 그것은 착하고, 안 쓸 것도 벌면 그것은 나쁜가? 그러면 모두가 쓸 만큼만 벌어야 하나? 쓸 만큼만 벌어서 아무것도 나누어주지 못하는 것은 어떤가? 혹은, 가졌는데 나누어주지 않으면 나쁜가? 그렇다면 나는 내가 가진 걸 나누어주는가? 부자와 가난한 자 중 누가 더 기부를 많이 하거나 할 수 있는가? 내가 부자가 되면 나는 많이 나누어줄 건가? 만약 그렇다면, 내가 부자가 되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내가 부자가 될 수 없다고 여기나? 왜 그러한가? 누가 나는 부를 가질 수 없다고 내게 말했나? 나는 그 말을 왜 믿었는가? 이런 믿음이 내게 도움이 되는가? 등등등.

이런 것들은 그냥 예시입니다. 흔한 예시죠. 아이러니한 것이, 자본주의 내지는 물질주의 사회가 되면서 성과 부에 관련된 저항이 더 커지는 거 같지 않나요? 저는 이게 집착과 관련이 있는 거 같은데. 물질주의 사회에서 성과 부에 대해 더 열려 있는 것 같지만, 그리고 외면적으로는 그래 보이지만, 실제로는 집착이 커지면서 저항도 압도적으로 커진 것 같아요. 그래서 그걸 해소, 정화하기 위해서 <씬 시티> 같은 영화들이 나오는 거고, 이런 영화를 없앤다고 해서 무슨… 세상이 깨끗해지고 그런 게 아니라, 이런 영화가 없으면 오히려 세상이 깨끗해지지 못하는, 정화되지 못한다는 게 제 주장? 내지는 생각입니다.

성이나 부나 폭력이나 왜곡 및 과장이 더럽다는 게 아니고요, 걔네는 그냥 걔네 자체로 있는 애들이고, 그에 대한 집착과 저항. 즉, 성은 엄청 좋아. 혹은 성은 엄청 나빠. 아니면 폭력은 엄청 좋아. 혹은 폭력은 엄청 나빠. 이런 감정들이, 굳이 말하자면, 음… 불필요하단 거죠. ‘더럽다’고 보기엔 애매하고. 왜냐면 이런 집착과 저항도 그냥 그 자체로서 있는 애들이니까. 그러나 그 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반대편에 매칭되는 힘이 등장합니다. 그냥 작용 반작용이에요. 누르면 저쪽에서 밉니다. 내가 벽을 주먹으로 치면 벽도 날 때려요. 벽을 살살 쳐보세요. 그다음에 세게 쳐보세요. 살살 치면 벽이 날 살살 때리고, 세게 치면 벽도 날 세게 때립니다.

그런데 실제 생활하면서 벽을 세게 치고 싶다고 매번 세게 치다가는 손의 모든 뼈가 산산이 조각 날 것이니. 그리고 비슷하게, 성, 왜곡, 돈과 힘, 폭력 같은 것에 대한 집착이나 저항을 실제 생활에서 다 실현했다가는 세상이 전체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미쳐 돌아갈 테니, 픽션으로 해소하는 겁니다. 정화하는 겁니다. 그게 픽션의 매우 큰 역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각에서는 ‘폭력적인 게임을 하면 폭력성이 커진다.’ 이런 주장도 있던데. 그러는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폭력적인 게임을 해서 실제 생활에서 폭력을 휘둘렀을 법한데 안 휘두른 경우에 관한 연구는 진행하기가 좀 더 어렵죠. 이런 연구나… 실제 세계라고 불리는 곳 전반에서는, 벌어진 일을 관찰하는 게 벌어지지 않은 일을 관찰하는 것보다 월등히 쉽지 않습니까?

누가 화가 나서 화재를 일으킨 건 관찰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누가 화가 나서 화재를 일으킬 뻔했는데 영화 보고 스트레스를 풀든, 샌드백을 쳐서 스트레스를 풀든, 게임을 하고 스트레스를 풀든, 등산을 하고 스트레스를 풀든, 해서 화재가 안 난 건 관찰하기가 거의 불가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 불러다 모아가지고, ‘너 오늘 화재 일으키고 싶었는데 안 냈어? 왜 안 냈어?’ 이거 물어봐야 하잖아요.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물질주의가 부상하게 되면서 그저 존재할 뿐인 것들에 대한 집착과 저항이 점점 거세진 것은, 잠을 덜 자기 때문인 것도 같아요. 꿈이란 게 우리에게 대체 어떤 역할을 해주는지, 잠이란 것 전반이 우리에게 대체 어떤 역할을 해주는지, 연구가 존재하기야 하지만, 인간은 아직 과학적으로는 모르는 게 많습니다.

그런데 잠이 좀 줄어든 건… 사실이죠? 특히나 잠의 패턴이 교란된 건 사실이죠. 밤늦게까지 전구를 켤 수 있고, 컴퓨터 화면에서 불빛이 나오고, 어디서든 스마트폰으로 연결되고. 그리하여 우리는 이 물질세계, 3차원 세계에 머무는 시간도 길어진 데다가, 원하면 언제나 머물 수 있게 된 거예요. 죽지 않을 만큼 잠은 자야겠지만요. 그렇게 잠을 줄이고 잠을 등한시하면서, 전구, 컴퓨터, 스마트폰 같은 물질들이 없었던 시절 같았으면 애저녁에 꿈나라로 향해서 거기서 각종 꿈을 꿀 상황에서, 계속 3차원 세계에서 머물면서 집착과 저항을 강화하고만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꿈을 다 기억을 못 하지만, 꿈에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때릴 수도 있고, 성적인 꿈일 수도 있고, 부자가 되는 꿈일 수도 있고, 기타 등등, 내가 인정하지 않는 모든 무의식의 것들이 꿈에선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을 스마트폰에 중독되어서, 아니면 무슨 공부를 하라고 애들 잠 못 자게 한다든지, 해서 당연히 일어나야 할 정화가 덜 일어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카타르시스 과정을 거치지 못한 집착과 저항들이 3차원 세계 내의 꿈으로 비유할 수 있는 픽션의 세계로 넘쳐흐르고, 그조차도 넘쳐흐르면 실제 세계의 폭력, 범죄, 극단성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정도가 저의 이론입니다. 증거는 없습니다.


여러분? 요즘 제가 기승전 명상이잖아요? 그래서 오늘도 기승전 명상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도 성이나 돈이나 폭력 등에 대해 저항이 있습니다. 다만 그게 좀 교묘한 종류의 저항이었어요. 예를 들어, 부자가 나쁘다는 생각을 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가난한 게 나쁘다는 생각도 안 해봤지만, 부자라서 나쁘다는 생각은… 한 번도 그냥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남들은 부를 가질 수 있어도 나는 왠지 좀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저도 몰랐는데, 있었던 거예요. 저는 몰랐어요, 최근까지. 설마 이런 저항이 있을 줄이야. 머리로는 ‘대체 왜 이런 저항이 있지?’ 하는데 마음으로 이게 있는지를 몰랐어요.

이 두 개의 차이가 확연합니다. 머리로 아는 거랑 마음으로 아는 거. 그래서 <씬 시티> 같은 영화를 보고 겪게 되는 정화가 머리랑은 아무 관계가 없어도 되는 거예요. 머리로 “폭력을 쓰면 안 되지”라고 하는 거랑, 내 안에 폭력성이 있는데 그걸 전혀 모르는 거랑은 관련이 없습니다. 세상 비폭력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가장 내면에 폭력을 억눌러놓았을 수도 있어요. 네. 자기도 몰라요. 자기가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는 한, 자기도 몰라요.

아무튼, 이런 교묘한 저항들이 저한테 있었는데, 명상을 하면서 그걸 상당 부분 푸는 중이고, 그래서 명상을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제가 잘못 생각했던 건, 일부러 숨 고르게 쉬는 게 그 자체로 명상인 줄 알았어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마 그게 그분들에게 도움이 되어서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일 거예요.

그런데 제 경우에 일부러 숨 고르게 쉬는 건 전혀 아무런 도움이 단 하나도 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긍정긍정 초긍정병이 저한테 도움이 안 된 거랑 똑같았어요.

다시 말하지만, 그게 도움이 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도움이 되니까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실 거고요. 그런데 이게 그러니까, 제 추측으로는, 억눌린 게 없는 분들은 숨 고르게 쉬면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런데 전 억눌린 게 적지 않았어가지고 이게 아무 소용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한… 3, 4개월 전에 명상을 시작했는데, 제가 초반에 한 명상은 특히나 일부러 숨을 고르게 쉬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습니다. 상당히 격했어요. 하품은 기본으로 나오고, 가벼운 오한도 기본으로 들었고요. 아주 격할 때는 몸이 저절로 경기 일으키듯 움직인 적도 있었고, 눈물도 납니다.

그런데 그걸 지나고 나니까, 이제, 드디어, 이제서야 숨이 고르게 쉬어지는데, 그게 일부러 한 게 아니었어요. 정화가 되어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져서, 내가 느껴야 할 거 다 느꼈기 때문에 당연히 숨이 고르게 쉬어지는 거였어요. 긍정도, 긍정적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지금도 뭐, 제가 긍정적? 전형적인 긍정성을 지녔다고 하기엔 애매한데, 이건 뭐냐면…

다 괜찮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본 거예요.

<씬 시티>에서 치명녀랑 치명남이 돈 벌려고 서로 죽이고, 그 스타일이 비현실적으로 왜곡되고 과장이 되었든, 아니면 <씬 시티> 같은 픽션이 그러한 집착과 저항의 요소들을 더는 담아내지 못해서 현실에서 비슷한 사건들이 벌어지든, 심지어 그러한 일이 나한테 벌어질지라도, 어쩌면 괜찮을 수도 있겠다.

물론, 어. 지금 제 말은. 제가 득도했다는 게 아니에요. 안 괜찮은데, 어쩌면 괜찮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뭔가… 왜 그… 도 많이 닦으신 분들 중에, 아니면 종교인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는 도를 너무 많이 닦아서, 중생들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 하찮게 취급하는 거야. 이게 사실 그러니까, 도를 덜 닦은 거죠. 자기는 득도해가지고, 남들이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건 다 약간, ‘왜 저러지? 도 닦아서 득도하면 되는데’ 하는 식으로 보는 거야. 이런 상태는 저는 피하고 싶습니다. 그 아무리 어떤 도를 닦아도, 만약 득도가 그런 상태라면, 도를 적당히만 닦아서 저런 상태로 가지 말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벌써부터, 도도 안 닦았으면서, 닦기 시작도 안 했으면서, 합니다.

뭔가, 득도를 했으면 온 인류의 정화를 도와야 한다, 이런 게 아니고요. 만약 나의 세계에 괴로워하는 누군가가 들어왔으면 그 자체로 나와 뭔가 연이 닿아서인데, 그걸 혼자서 ‘왜 저러지? 너도 득도하지 그래? 득도하면 간단할 걸 왜 괴로워해?’ 이러는 건, 완전, 사실… 완전 득도의 정반대다. 득도를 하면 무슨 착해지고 뭐 선해지고 이래서가 아니라, 그 도 안에 무한한 나, 하나인 우리, 사실은 경계가 없는 우리가 있는데, 만약 득도를 했다면, 굳이 남의 인생을 건드려서 해결을 할 것까지야 없지만, 저런 “힘들면 너도 득도해” 같은 태도는 나올 수가 없는 것 같단 말이죠.

갑자기 이 얘길 왜 했지?

아. 제가 말하는 ‘괜찮을 수도 있겠다’가 이런 득도 아닌 득도의 상태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무튼 제가 득도를 한 건 아니에요. 전혀 득도 근처에도 안 갔어요.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제 생각이 어떻냐면. 제가 말하는 ‘괜찮을 수도 있겠다’의 상태는 이 세상일에 관심이 없고, 누가 죽든 말든, 누가 괴로워하든 말든, 나의 무슨, 뭐, 긍정적 주파수를 유지? 이런 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오지랖 넓게 굳이 찾아가서 막 참견하고, 이런 것도 아니고요.

이렇든 저렇든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이 있긴 하지 않겠느냐, 라는 게 지금 저의 상태입니다. 예전에는 괜찮을 수가 아예 없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이런 복병들, 이런 득도 아닌 득도의 상태, 혹은 득도했다고 막 참견하고 다니는 거, 요런 상태들을 피하면, 즉, 마치 성이나 돈에 저항하거나 집착하듯이 도에 저항하거나 집착하는 것만 피하면, 왠지… 괜찮을 수도 있지 않나?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괜찮을 수도 있는 가능성’에는 카타르시스가 꼭 필요하다. 정화가 필요하다. 내 안에 뭐가 있는지를 내가 관찰해서 알아내고, 나한테 필요한 걸 내가 줘야 하는데, 대개 그 ‘필요한 것’은 느껴야 할 것들을 느끼는 것뿐이다.

그리고 <씬 시티>라는 영화에는 그렇게 느낌 직한 것들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마무리하기 전에 영화 내용을 몇 개 더 짚어볼게요. 단편적으로다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영화 내용이 워낙 조각조각인지라.

자, 먼저, 하티건이라는 형사가 또 치명치명하게, 인상을 쓰고, 얼굴에 흉터도 있고, 트렌치코트를 입고 등장합니다. 목소리는 하루에 담배 열 갑 피우는 느낌. 바람이 적당하게 불어줘서 넥타이가 펄럭임으로써 압도적 누아르 분위기에 협조합니다.

이런 거. 알잖아요, 우리? 약간 이. 남자. 와. 남자다.

하티건은 말로 안 통하면, 파트너 죽빵을 날립니다. 건강 문제가 있는데 알약을 먹어가며 막 고통을 참아요. 도움이 필요한 소녀를 구하려고 이러는 겁니다. 왜냐? 그는 개킹마초남이니까. 자신의 유용함을 증명해야 하고, 막 이런단 말이죠.

이런 거에 대한 카타르시스의 필요성, 있죠? 저는 남자는 아닙니다만, 이러한 느낌을 느낄 필요성에 대한 인지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현실에서 하면 어떻게 되죠? 죽어요. 실생활에서 담배 열 갑 피고 파트너 죽빵 날리고 소녀를 구하기 위해 알약을 먹어가며 고통을 참지 않으면 남자가 아닌가? 아니죠. 아무 상관 없어요. 진짜 남자이고 뭐고인 거랑 아무 상관이 없는데, 그러한 이미지에 대한 사회적 관습 때문에 그런 느낌에 대한 집착이든 저항이든 갈증이든 이 있긴 하잖아요?

그걸 영화 보고 해소할 수 있단 겁니다. 실생활에서 파트너 죽빵 날리지 말고요.

비슷하게, 다음 이야기 조각에서, 의문의 죽음이 벌어집니다. 어떤 매우 험악하게 생겼고 혼자 움직이는 외로운 늑대 스타일의 남자가 아름다운 창녀와 하룻밤을 보내는데, 다음날, 그녀가 죽어 있고, 이 험악하게 생긴 남자는 그녀를 위해 복수를 하리라 다짐합니다. 왜냐? 이 남자는 되게 여려요. 굉장히 외로웠나 봐요. 그런데 너무 험악하게 생겨가지고 돈으로 창녀를 살 수도 없었대요. 너무 위험할 거 같으니까 여자들이 싫어한 거죠. 그런데 이, 지금은 사망한 아름다운 창녀가 어떤 사연으로 인해 이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거예요. 그래서 이 남자는 나름의 방식대로 매우 고마운 거죠. 그리고 그 고마움 때문에, 또한 그 자신에게 솔직해지자면, 그녀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도 없는 목적 없고 사랑 없는 삶이기에, 복수를 하려는 겁니다.

이런 거. 실생활에서 이런 뭔가… 치명적 사랑. 죽은 끝사랑. 그리고 심지어 나는 매우 험악해. 복수할 힘이 있어.

그런데 심지어 나의 사랑을 죽게 한 놈이 사제야. <씬 시티>를 지배하는 자들 중 사제가 있거든요. 그래서 이 영화에 이… 부패한 종교에 대한 거부감. 신의 탈을 쓰고, 신의 이름을 남용하여 자신들의 집착을 채우려는 자들에 대한 혐오감. 이런 감정들을 정화할 만한 내용도 많습니다. 제가 즐긴 장면들이 이런 장면들이었어요. 아시지 않습니까? 한아임은 신의 존재, 거대한 힘의 존재를 믿습니다. 제가 모르는 게 세상에 너무 많고, 인류 전체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그러나 종교는 신이 아니다. 특히, 종교의 탈을 쓰고 그 꼭대기에서 우두머리 행세를 하는 인간 개개인들은 신이 아니다.

그래서 아무튼 아까 그 험악한 남자가 사제를 찾아가는데, 이 사제가 분위기 파악을 못 하네? 험악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가 직업적으로 창녀인 건 맞지만, 그리고 창녀라는 단어 자체를 쓰는 거야 불가피할 수 있겠지만, 이 사제가 그 단어를 아주 깔보는 거 티를 팍팍 내며 씁니다. 약간 뭔가… ‘그년은 창녀라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 이런 식으로 말을 해요. 그냥 prostitute이라고 안 하고 slut이라고도 하고요.

그런데 그런 성직자가 주제넘게도 이 험악남을 my son이라고 부르는데, 제가 다 혈압이 오르더라고요. 자주 쓰는 말이죠, 영어권에서, 아무한테나 my son이라고 하는 데다가, 이 성직자는 자기가 father라 이거죠. 그런데 저도 혈압이 오르는데 험악남은 이 성직자가 얼마나 같잖겠어요.

화룡점정으로, 자기 무덤을 열심히 파는 이 사제가 험악한 남자에게 이래요. “창녀 하나 때문에 죽고 싶냐?”

그랬더니 험악한 남자가 바로 총을 쏴서 사제를 죽여버리는데, 어떻게 죽이는가? 당근 빠따지! 하는 스타일로 죽입니다.

“Worth dying for. Worth killing for. Worth going to hell for. Amen.” 한 문장 말할 때마다 한 방씩 쏴요. 아멘 빼고.

“그녀를 위해 죽을 만하지. 죽일 만하지. 지옥에 갈 만하지. 아멘.”

캬. 쾌남. 그는 쾌남이었다. 명대사가 많아요, 이 영화에. 왜냐하면, 분위기로 압도하는 영화니까. 인물들이 다들 아주 그냥, 정말 capturable한, 이건 캡처해서 짤로 만들어야 할 것 같은 대사들을 툭툭 뱉습니다. 아무튼, 이 장면, 카타르시스죠 완전히. 권선징악. 죽어야 될 자들이 죽는. 이건 현실에서 마음대로 구현하기 어렵습니다.

아 참, 이… <씬 시티>의 Sin이라는 단어가, 그냥 crime이 아니란 말이죠. Crime은 경찰에서 다룰 수 있는 범죄고, sin은 종교적 원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분히 의도되지 않았나, 이 영화의 제목, 그리고 내용, 그리고 연출 스타일이. Sin에 집착하고 sin에 저항하는 도시의 이야기.

험악남은 다음에 죽일 놈을 두고 이렇게 다짐합니다.

“And when his eyes go dead, the hell I send him to will seem like heaven after what I’ve done to him.”

직역을 하자면, “그놈 눈이 죽어갈 때, 내가 놈을 보낼 지옥은 내가 놈한테 한 짓에 비하면 천국 같을 것이다.”

즉, 그놈을 죽여버릴 건데, 그놈이 아직 살아 있을 때 내가 놈한테 할 지옥 같은 짓거리에 비하면 실제로 갈 지옥은 천국이나 다름없을 거다.

캬. 쾌남이었다. 순정남이었다. 엄청 폭력적인데 그는, 참, 그 와중에, 개는 또 안 죽여요. 다른 장면에서 어떤 건물에 몰래 들어갈 일이 있는데, 개가 짖자, 개를 한 방 때려서 기절시킵니다.

네. 그는 따뜻한 남자였다. 이런 자잘한 것 같으나 중요한 포인트들. 카타르시스입니다.

게다가 이 험악남은 유머 감각까지 있어요. 사람을 죽일 때마다 험악남이 죽은 사람 트렌치코트를 그렇게 탐내요. 그도 그럴 것이, 하도 피투성이로 사람을 죽이다 보니까, 새 코트가 계속 필요한 거죠.

이… 이런 짓을 겪고 이런 짓을 하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쾌남성. 이건 현실적으로 어… 현실에서 가지려고 하면 너무 힘들어지고, 나 때문에 죽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지고, 나 같은 사람이 한 명만 더 있어도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대신 <씬 시티> 하나를 봐서 쾌남 느낌 너무 갖고 싶은데 쾌남 못 되는 사람들이, 성별을 불문하고, 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머리 잘려 죽는 사람들. 총 맞아서 죽는 사람들. 나중에는 사지 절단까지 나옵니다. 아주 그냥. 어마어마해요 영화가.


현실에서 못 하는 것 종합세트, 그게 <씬 시티>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 혹은 이런 내용의 다른 픽션을 소비하는 것이 현실에서 집착과 저항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다. 현실에서 일어났을 집착과 저항의 문제가 생기기도 전에 정화한다. 마치 우리가 잘 때 꿈이 해주는 작용처럼. 단, 한아임은 이걸 증명을 못 한다. 왜냐? 벌어지지 않은 문제가 왜 안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고, 심지어 특정 사건이 벌어질 사건이었는데 안 벌어진 건지, 아니면 애초에 벌어질 사건이 아니어서 안 벌어진 건지를 증명을 못 하니까.

음… 자주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고요. 저는 아마 이 영화를… 그래도 서너 번은 본 것 같아요. 2005년에 나왔는데, 간간이 보긴 했으나, 자주 보기엔 좀 과하다. 그러나 여러 번 다시 봤다는 거 자체가 저한테는 이 영화가 얼마나 강렬한 인상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이 영화 같은 다른 영화는 없는 거 같아요. 2014년에 후속편이 나왔나 봐요. 그런데 왠지 후속편이라고 하니까 안 보고 싶어가지고, 아마 그냥 안 볼 것 같아요.

그리고 비슷한 느낌으로는, 프랭크 밀러와 린 발리 원작의 <300>을 바탕으로 한, 같은 제목의 영화 <300>이 있습니다. <씬 시티>가 2005년에 나왔는데 <300> 영화가 2006년에 나왔대요. 와. 프랭크 밀러님. 물이 많이 들어왔고, 노도 열심히 저으신 것 같습니다. 영화 <300>도 음… 여기선 쾌남을 넘어선 것 같아요. 쾌남은 뭔가… <씬 시티>의 쾌남은 유머도 있고, 폭력성 가운데에 좀 더 로맨스가 있었는데, <300>은 더욱… 영광. 뭔가… 빅 픽쳐… 개인적 복수가 아닌 거대한 힘. 요런 또, 참 현실에서 더욱더 겪기 어려운 감정들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훌렁훌렁 탈의에 대해 별로 감흥이 없는 저도 <300>을 매우 재밌게 봤습니다. 이것은 스파르타에 대한 애국 탈의인 것 같아서 좀 의미가 있지 않았나.

게다가 성별 불문하고, 아주 그냥 다양한 카타르시스가 제공됩니다. 나도 저런 몸을 갖고 싶은 사람이든. 저런 몸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거나 그런 사람이 날 좋아했으면 좋겠는 사람이든. 그냥 인간의 몸이 어디까지 조각 같을 수가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사람이든, <300>은 그것을 충족시켜 줄 것이다.

여담으로, <300> 같은 영화를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만약 <300>류의 영화에 폭력성이 두드러지기에 실제 세계에서 폭력성을 증가시킨다면, 게다가 그러한 증가를 <300>류의 픽션과 그리 분명하게 연관 지을 수 있다면, 왜 <300>류의 영화에서 마찬가지로 두드러지는 조각 같은 몸은 실제 세계에서 안 증가하나? 혹은, 만약 증가를 했다면, 왜 연관 짓지 않나?

앞서 말했듯이, 한아임의 이론은, “포인트가 카타르시스지, 영화에 나온 걸 따라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뭐. 그러나 증명할 수가 없다.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제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얘기할 영화, <Rojo Amanecer>입니다. 멕시코 영화예요. 음… 제가 발음을 맞게 한 거였으면 좋겠네요. <Rojo Amanecer>. 구글 발음 따라해 봤어요. 아무튼. 각자의 거주 국가에서 관람 가능한 플랫폼을 찾아서 봐봅시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Downtown Binary – Other Worlds
  • Tamuz Dekel – Blue Beings
  • Beauregard – Thoughts – Instrumental Version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hanaim.imaginariumkim

© 2023 한아임

소개

✨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