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 수다의 씨앗, <Rojo Amanecer>입니다. <붉은 새벽>. 강렬한 제목입니다. 이 영화는 음… 스포일러라고 하려면 스포일러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스포일러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줄거리의 기승전결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이런 줄거리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중요한 이야기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멕시코 영화고요, 1968년 10월 2일, 멕시코시티의 틀라텔로코에서 벌어진 학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위해, 이혜원 기획자와 제가 번역 중인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 나오는 부분 일부를 읽어드릴게요. “아버지는 시 정부에서 일하는 관료다. 어머니는 주부다. 그들은 어머니의 연로한 아버지와 함께 사는데, 그는 혁명 때 참전했던 은퇴한 육군 장교다. 그들에게는 십 대 딸, 어린 아들, 그리고 학생 운동에 합류한 대학생 나이의 두 아들이 있다.”
네. 학살 얘기라고 말씀드렸죠. 게다가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다. 그리고 인물 설명을 보면 약간 감이 오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혁명에 참전했던 은퇴한 육군 장교인 할아버지. 정부에서 일하는 관료인 아버지. 학생 운동에 합류한 두 아들. 이 부분만 들어도, 아, 무슨 이유로 벌어진 학살일까? 정치적 이유로 벌어진 학살이란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음… 이 장르는. 정치에 대놓고 관련된 각종 장르는 제가 평소에 절대 안 보는 종류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픽션 이야기에서도 그렇고 논픽션 이야기에서도 그렇습니다. 네. 논픽션도 다 이야기예요. 역사도 다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라고 해서 ‘허구이기에 의미가 없다’, 이런 뜻이 아니라는 건 아임 드리밍 들으시는 분들은 이미 다 아시죠. 이 세상의 모든 게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한 지… 한참이 된 거 같아요. 그런데 명상을 하고 의식에 대해 더 꼼꼼하게 생각하게 된 이후로, 이러한 생각이 더욱 두드러지게 됐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이야기입니다. 잔에 물이 반이나 차 있는가, 반밖에 차 있지 않은가, 그저 반이 차 있는가부터가 이야기이고, 이 영화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이 영화가 바탕으로 하는 실제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어차피 이 세상 온갖 사람들은 다 자기 이야기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아무리 아무리 인간이 과학을 해도, 아무리 측정 기구로 측정을 해도, 그 측정 기구는 객관적일 수 있지만, 똑같은 데이터세트를 갖고도 해석이 달라질 수 있고, 데이터세트에 대한 해석이 같더라도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의 해석은 또 제각각 다르고, 심지어 데이터세트에 대한 해석도 같고 그걸 접하는 사람들의 해석이 최초에 같았을지라도, 그러한 그 최초 해석이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르고, 조절도 못 합니다.
여기에 약간… 음… ‘진정한 자유 의지는 확실히 없다’는 저의 최근 결론도 엮여 있습니다. 인간이 감정에 따른 결정을 할 때보다, 논리적 결정을 할 때 그게 자유 의지와 관련이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전혀. 정말 잘 잘 잘 생각해 보세요. 논리를 따라가고 따라가면 그것이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내가 배우거나 개척했다고 여기는 그 논리는 어떤 학교 내지는 책, 스승, 삶의 체험 등을 통해 온 건데, 나는 그 학교, 책, 스승, 삶의 체험을 선택했습니까? 쉽게 말해, 같은 사건이 벌어졌을 때, 미국에서 태어나서 홈스쿨된 크리스찬이랑, 한국에서 태어나서 공립학교 다니는 무교인 사람이랑, 그 소위 말하는 ‘논리적 결정’이 같을까요? 같을 수도 물론 있지만, 수많은 ‘논리적 결정들’이라는 집합을 살펴보면 다를 때가 훨씬 많을걸요?
우리가 선택한 듯한 그 모든 것들은 사실 선택이 아니고, 심지어 부모의 선택도 아니고, 심지어 국가의 선택도 아닙니다. 날씨, 유전자, 당대 패션 유행, 음악 유행, 혹은 <붉은 새벽>이라는 이 영화에 나오는 학살 사건의 유무, 그리고 그 사건이 벌어질 때의 내 나이, 성별, 거주 국가, 교육 배경, 기타 등등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요즘에 감정이 가장 논리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감정은 아주 정확해요. 얘는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그 패턴이 아주 정확하고, 나를 배신하질 않아. 감정을 내가 배신한 적은 있지만 감정이 날 배신한 적이 없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네.
아무튼.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라, 정치물을 안 봅니다. 이건 명상이며 의식이며 더 액티브하게 생각하기 전부터 그랬어요. 정치물은 언제나, 당연히, 한쪽은 자기 말이 맞다고 하고 다른 쪽은 또 그쪽 말이 맞다고 합니다. 너무 부질없고. 게다가 이렇게 학살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를 보면, 와, 그냥 분노가. 이건 정치적으로 어떤 쪽이 맞았네 틀렸네랑 아무 상관이 없이, 학살이 벌어지면 저는 분노가 치미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법이 있는 거 아닌가요? 전쟁이 나도, 전쟁에서 누굴 쏴 죽일 순 있어도, 전쟁 포로를 고문하거나, 심지어 아, 이건 뭐 현대전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중세 로맨스 시대적인 발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등에 대고 쏘는 거, 이거 사실 되게… 가오 떨어진다.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어… 옛날 전쟁물은 봐요. 그마저도 많이 보지는 않지만. 가장 최근에 본 게 한참 됐는데, 티모시 샬라메가 나오는 “더 킹: 헨리 5세”였습니다. 이 영화 재밌습니다. 왜 재밌었냐? 전쟁이 나와도, 일단 왕이 같이 싸워요. 저한테는 상당히 신선했던 점이, 티모시 샬라메 님이 슬림하시잖아요? 막 그… 근육왕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 시대의 전투 방식에서, 양쪽 산맥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와서 적을 치고, 그러는 전략을 구사한단 말이죠. 이때 이 왕이 자기 병사들과 함께, 직접, 몸소 산에 숨어 있다가, 가장 날렵하고 가벼운 동작으로 싸우러 튀어나오는데, 이런 건 저는 멋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총 위주의 싸움이 아니었으니까, 전부 어떤 식으로든 1대 1입니다. 내가 아무리 보잘것없는 평민 출신 병사여도, 저쪽 왕을 죽이는 게 내가 될 수도 있는 거고, 반대로, 왕씩이나 되는 적에게 죽임당하는 나름의… 뭐랄까, 변태적인 영광? 이런 것도 있을 수 있잖아요. 나름 로맨틱하단 말이죠, 넓은 의미에서의 로맨스.
그리고 정치물도, 옛날 정치물은 일단, 옛날이라는 그 시간적 거리 자체 때문에 허구가 더 자유로이 들어가는 경향도 있고, 당시에는 뭘 해도 좀… 독살이라든지. 좀 이렇게 아름다운. 네. 적을 죽이는 데도 좀 아름답고 미학적으로 pleasing한. 카타르시스가 있는. 이런 방식을 쓰는데.
현대 전쟁물, 현대 정치물은 이런 게 없어. 그냥. 불쌍한 어린애들 모아놓고, 늙은이들이 위쪽에서 버튼 누르면 폭탄 터지는, 그런 전쟁. 이건 누구 편인가를 막론하고, 진짜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부질없고 누구를 위한 전쟁이고 왜 쟤네가 죽고 저 다른 애들이 안 죽지? 하는 의문밖에 없어서 저는 현대 전쟁물을 매우 싫어하고, 현대 정치물도 안 봐요. 진짜 싫어해요. 막장 아침 드라마와 동급으로 싫어하는 장르가 정치물, 전쟁물이다.
그런데 이번 시즌 테마가 테마이니만큼, 그리고 이 영화가 <누아르 어바니즘>에 등장하는 챕터에 영화가 많이 언급되는 게 아닌 만큼, <붉은 새벽>이라는 이 영화가 차지하는 역할이 좀 크기에, 봤어요. 보고 나서 너어어어어무 기분이 슈방구라서, 아 이거 그냥 팟캐스트에서 얘기하지 말까, 생각도 했어요.
영화가 잘못됐다는 게 아닙니다. 이런 장르가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에요. 제가 이입을 엄청나게 해서 그래요. 이런 영화를 보면 신체적으로 실제로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고요, 제가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아주 그냥 메소드 배우인가 봐요, 제가. 분명 이런 영화 보고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렇지 않지 않습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안 보는 거거든요. 뻔히 아니까, 뭘 느낄지, 뭐가 나올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뻔히 안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영화 이전에 이런 영화, 이런 다큐, 이런 보도, 이런 책을 이미 접해봤기 때문입니다. 즉, 제가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내용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붉은 새벽>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 일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겁니다. 그리고 싫어하는 건 싫어할 수 있되, 싫어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조차 몰랐더라면 과연 좋았을까?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요즘 제가 자주 언급하는 것 중 상대성이 있지 않습니까? 뜨거운 게 있어야 차가운 걸 알고 차가운 게 있어야 뜨거운 걸 안다. 그거랑 비슷합니다. <붉은 새벽>같이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에 버금가는 반대, 아름답고 찬란한 것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름답고 찬란한 것만 있으면 그 안에서 또 쪼개고 쪼개서 그중에서 끔찍한 일을 만들 거예요.
특히 인류 전체를 보면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인종이 다르면 인종 싸움 하죠? 인종 같으면 안 싸울까요? 아니요. 인종 같으면 학벌 지역 성별 갖고 싸웁니다. 학벌 지역 성별 같으면 안 싸울까? 아니요. 다른 거 갖고 싸웁니다. 소유하는 차종, 사는 아파트, 누구 자식이 더 좋은 대학 갔나, 이런 거 갖고 싸웁니다.
이런 부질없는 데에 삶을 허비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제가 요즘에 생각하기로는, 딱 하나예요. 내 안에 모든 게 있음을 인정하는 겁니다.
내 안에 아름답고 찬란한 것도 있고, 또한, 끔찍한 것도 있다.
이걸 인정하면 외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외부의 일이 아니게 되고, 저 상대와 경쟁, 결투, 전쟁 등을 할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적어도 덜 느끼게 됩니다. 어차피 내 안에 다 있고, 내가 전체니까.
아무튼. 이 파트의 결론은, <붉은 새벽> 같은 이야기가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고, 이러한 이야기가 존재하는 의의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봐서 기분 좋은 영화인가? 기분은 나빠도 이 자체로 깨달음이 있는 영화인가? 아니다. 네. 저는 이 영화 자체에는, 내부에는 깨달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에피소드에서 다루는 이유는, 이거예요. 이 내부에 깨달음이 없는 건 의도된 것 같아요. 그렇잖아요? 물론 음… 정치적 결론은 있습니다. ‘이런 학살은 일어나선 안 됐다’가 결론입니다. 그러나 그건…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그랬으면 안 됐어’로 끝나는 건 깨달음이 아니죠.
그렇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이 ‘그랬으면 안 됐어’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영화 외적으로. 그거에 대해 남은 에피소드에서 얘기할 겁니다.
만약 <붉은 새벽>이라는 이 영화의 내적인 것에 대해서만 얘기한다면, 저와 비슷한 분들한테는 정말… 좋지 않을 겁니다. 혈압 오르고, 건강 안 좋아지고, 세상은 개떡 같고, 다 죽여버리거나 차라리 내가 죽어야겠다는 생각만 남을 테니까요.
그런데, 제 추측으로는 <붉은 새벽>을 만든 사람들이 이걸 만든 이유가 영화를 보고 그걸로 끝! 이건 아닐 거라는 점입니다. 영화를 본 후에, 영화에서 말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알아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영화라고 보여지거든요. 그게 아니면 뭣 하러 영화를 힘들여서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뭔가 그다음이 있어야지. 그다음이 없다면, 우리 다 지금 지구 멸망해서 죽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게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서 아아아무 느낌 없이 ‘아 그냥 저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것만큼이나, 영화를 보고서 ‘더러운 인류, 그냥 다 같이 죽자’도 창작자들이 의도한 결론은 아니었을 거란 말이죠.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에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영화 같은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정치물, 전쟁물에 관심이 없는 만큼, 그 ‘무엇을 하느냐’도 정치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전혀 없습니다. 들으시는 분들에 따라서 정치나 전쟁에 요긴하게 쓰일 수는 있겠지만요.
영화를 보고서 제가 뭘 했냐면, 지난주에 말한 카타르시스 있잖아요. 그걸 실생활에서 했습니다. 지난주에 <씬 시티>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그 경우에는, 카타르시스가 영화에 내제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보는 사람에 따라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런 분들에게 이번 에피소드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네, <씬 시티>도, 보는 사람에 따라, 저딴 기분 더러워지는 폭력적이고 성적이고 추잡하고 더러운 이야기를 왜 봐, 라고 생각할 수 있거든요. 그래픽한 걸로 치면 <씬 시티>가 <붉은 새벽>보다 훨씬 더합니다.
<붉은 새벽>에도 총으로 사람 죽는 장면, 얻어맞아서 피투성이 되는 장면 등이 나오긴 하는데, <씬 시티>처럼 그걸 오락으로 승화시키진 않거든요. 오히려 <붉은 새벽>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학살 장면은 안 나옵니다. 개개인이 총에 맞거나 피투성이가 되긴 하는데, 거의 모든 씬이, 제가 기억하기로는 두 씬 빼고는 전부 다… 세 씬인가? 아무튼 그 몇 씬 빼고는 전부 다 틀라텔로코의 아파트 건물 내부에서 촬영됐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붉은 새벽>의 포인트는 눈에 보이는 폭력이 아니라, 우리가 배우들의 리액션을 통해 보는 폭력의 거울이에요.
그런데 이게 또 <붉은 새벽>의 킹빡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뭐냐 하면, <불은 새벽>에서 가장 최악을 겪은 사람들은 저 밖, 아파트 밖에 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학살당했거나 학살당하는 중입니다. 생존자들만 이 안, 아파트 안에 있어요. 그러니까, 겪은 자는 살지 못하고, 안 겪거나 일부만 겪은 자가 살아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참 가슴 아픈 아이러니가 담겨 있는 겁니다, 이 이야기에.
실제로 전쟁이나 유사한 폭력 상황을 경험한다면, 생존자들은 거의 <붉은 새벽>에 나온 이런 상태로 경험을 하지 않겠습니까? 벙커에 있든, 동굴에 숨어 있든, 볼 수 있는 모든 걸 보지 못하고, 들을 수 있는 모든 걸 듣지 못한 자들이 살아남는 겁니다. 모든 것을 본 자들 대부분은 본 그것이 지난 후 죽은 자가 될 것이고, 모든 것을 보기는커녕 대부분의 것조차 보지 못한 이들이 살아남아 ‘당시 상황이 이랬다’고 회고하지 않는가.
만약 모든 것을 본 자 중 생존자가 있다면, 그 수는 압도적으로 폭력을 가한 쪽에 생존자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게 약간, 참.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승자도 영원하지 않으며, 언젠가 누군가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하여간에 내가 죽으면 내 이야기는 아무도 하지 않는다. 우주 하나가 사라진다.
그래서 저는 <씬 시티>보다 <붉은 새벽>이 더 기분이 슈방구해졌습니다. <씬 시티>는 극 중 인물들이 해야 할 이야기를 다 하고 깔끔하게 죽는 영화예요. 지난주에 얘기했었죠. 캬, 쾌남. 진짜 남자. 이 인물들은 정말 카타르시스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기들이 언제 어떻게 죽으면 최고로 쾌남이고 진짜 남자일지 알고 죽은 거예요. 그래서 아쉬울 게 없습니다. 박수칠 때 떠났어요.
<붉은 새벽>엔 그런 거 없습니다. 전부 다 얘기하려고 하는 와중에 죽은 자들이거나, 마지막에는, 살아남은 꼬마 아이가 하염없이 떠도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경우에는, 얘는 살아남았는데 이야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런 영화가 <붉은 새벽>이에요. 여기에, 영화 자체에는 카타르시스가 없다고 저는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실생활에서 카타르시스를 찾아야 했다.
제 경우에는 명상으로 했는데, 꼭 명상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기여도 좋고, 친구와 대화해도 좋습니다. 방식은 상관없어요. 어떤 형태이든, <붉은 새벽>을 보고서 숙고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고, 제 해석으로는, 그것이 영화의 경험을 완성시키는 것 같습니다.
예전의 저라면 <붉은 새벽>을 보고 빡치는 데서 그쳤을 겁니다. 분노에서 그쳤을 거예요. 그조차도 그냥 빨리 넘어갔을 겁니다. 저는 아마 분노를 ‘해결’하려고 했을 겁니다. 소위 ‘해결’이에요. 해결해서 분노를 없애려고. 아무것도 진짜로 해결되는 건 없는데, 분노를 느끼기 싫으니까 해결하는 시늉을 하며, 와, 생산적이다, 와, 능동적이다, 이런 일련의 착각들을 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스페인어를 더 열심히 해야 되는데. 하. 미국에서 살면서 <Rojo Amanecer> 발음을 찾아봐야 하는 나는 뭔가? 스페인어는 그냥 쓰인 대로 읽으면 되는데 그마저도 찾아봐야 하는 나 뭐임? 제가 요즘에 듀오링고로 스페인어를 하는데, 그거라도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 이게 뭐냐. 이 세상에 스페인어 쓰는 국가가 얼마나 많은데, 영어 한국어에 독일어 남은 거 조금이랑 스페인어 조금만 더 잘하면, 와, 어디서 전쟁 나도 말 못 알아듣고 죽진 않겠다.
그리고 또 든 생각이, 총을 가져야겠다. 그리도 또한, 카포에라를 배울까? 주짓수를 배울까? 뭐, 뭐 배울까? 유사시에 누굴 죽일 수 있는 무술을 이제라도 배워야 하나? 유사시에 자결할 수 있는 독극물이 필요한가? 맹견을 키울까? 벙커를 살까?
이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더러운 기분을 해결하려고. 그리고 예전 같았으면 여기서 그쳤을 거예요. 또한 물론, <붉은 새벽>에 나오는 상황 같은 상황 속에 있으면, 기분을 막론하고 해결을 해야죠. 내가 틀라텔로코에 있는 사람이면 당장에 총을 구하든 하는 게 실제 해결 방법이 맞고요, 해결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 있지 않잖아요. 이미 지나간 일, 혹은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지금 여기서 괜찮아도 되는 내가 사서 괴로움을 겪는 것은 그냥 표면적인 대처로 해결할 일이 아니라, 안까지 들어가서 녹여야 할 일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음… ‘해결’이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를 내포하고 있어서, 제가 말하는 ‘안까지 들어가서 녹인다’ 역시 해결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 에피소드에서는 둘을 좀 분리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표면적 해결과, 안까지 들어가서 녹이는 것. 짧게, 해결과 용해라고 분리해 볼게요.
대개 표면적 해결은, 상황을 달리해 주는 듯하지만 별로 안 달리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거예요. 내 코가 못생긴 거 같으니까 성형수술을 하면 되겠지. 이게 표면적 해결입니다. 이 경우에, 물론 수술을 해서 코가 예뻐졌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이 예시가 좀… 널리 퍼져 있다보니, 아마 이해하기 쉬우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코 못생긴 거 같아서 코 수술했다가, 보니까 눈도 못생긴 거 같아서 눈 수술했다가, 보니까 조화가 다 망가져서 못생긴 거 같으니까 다른 데도 다 건드리다가 완전히 망해버리고 영영 계속 못생겼다는 자괴감에 빠지는 경우. 그리고 이렇게 심한 케이스가 아니어도, 즉, 이런 완전히 망해버리는 케이스에 대한 인식이 이제는 널리 퍼져 있다보니 거기까진 가지 않더라도, 코 수술을 했는데도 뭔가 자기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해결 안 되는 경우가 꽤 있을걸요?
즉, ‘내 코가 못생겼어’에서 진짜 문제가 코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성형수술로 소위 말하는 ‘해결’을 해 봤자 해결되는 게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해결이 아닌 용해란 이 경우에 뭘까? ‘나는 못생겼다’는 마음 자체입니다. 그걸 계속 파는 거예요. 나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나를 싫어한다, 나는 사랑받지 못한다, 나는 버림받았다, 나는 무가치하다, 나는 무능하다, 나는 초라하다, 기타 등등. 이런 말들을 표면으로 이해할 때는, “아니, 난 안 부족한데? 코만 성형하면 돼”라고 반응할 수도 있고, 반대로 “당연하지, 난 부족해. 내가 그걸 아니까 성형하려는 거잖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잘 살펴보면, 두 경우 다 사실 내가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코만 성형하면 부족하지 않을 테니 안 부족하다고 하는 것도 나의 부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부족한 걸 아니까 성형하는 것이니 부족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 역시 부족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해결하려는 것뿐이에요. 어떻게든 안 부족할려고. 어떻게든 초라하고 버려지고 사랑받지 못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그렇다면 용해는 어떤가? 용해는 부족한 상태 그대로 있는 겁니다. 정말로 부족한 게 인정이 되면 그냥 부족한 상태로 있어야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부족을 없애려고 하질 않는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건, ‘그래, 난 부족해. 성형 안 할 거야. 부족한 채로 나는 멋져’라고 정신승리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부족한 나는 멋져’는 그냥 ‘난 사실 안 부족한데?’의 다른 말이에요.
제가 말하는 용해는 정신승리가 아니고 정신항복입니다. ‘아, 나는 완전히 부족하다. 나는 완전히 못생겼다. 완전히 초라하다.’ 거기에 아무 다른 부가 설명도 달지 않고 완전히 항복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면 너무 슬프지 않나? 너무 비참하지 않나? 그런 의문이 드실 수 있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성형 예시 말고, 다른 여러 예시에서 그랬습니다. 맞습니다. 슬프고 비참하고 수치스럽고 죽고 싶고, 타인이든 나든 죽이고 싶어요. 그리고 여기서 ‘어머 세상에, 타인을 죽이고 싶다니?’ 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잘 잘 잘 깊게 깊게 파 보세요. 죽고 싶은 것은 죽이고 싶은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누굴 죽이러 칼 들고 간다는 게 아니에요. 실제로 죽이러 가는 건 죽이고 싶은 마음을 안 느끼려고 정신승리 하는 거고요. 진짜 그 죽이고 싶은 마음, 즉 죽고 싶은 마음과 같은 그 마음이랑 같이 있으려면, 정신항복해야 하기 때문에, 죽이러 못 갑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언급한, 제가 죽고 싶은 마음을 용해할 때 이렇게 했어요. 아, 참고로. 무조건 제 말 따라 하시라는 거 절대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요청하세요. 거주 국가에 자살 방지 핫라인이 있을 겁니다. 거기에 전화를 하셔도 좋고, 친구 가족 애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그냥 제 경험을 얘기하는 거예요. 저도 해보고 너무 신기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한 참고로, 자살한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기에 죽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자살하면 안 된다고 여기는 쪽은 아니에요. 죽음 자체가 나쁘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전혀. 그저 제 경우에는, 죽고 싶은 게 죽이고 싶은 것과 같았을 뿐만 아니라, 살고 싶은 것과 같았기 때문에, 저처럼 혹시 살고 싶은데 살 수 없을까 봐 죽고 싶은 마음이 드시는 분들한테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죽고 싶을 때, 즉, 내가 나를 죽이고 싶을 때의 해결 방법은 죽는 겁니다. 반면, 같은 상황에서 용해 방법은 그냥 죽고 싶은 상태로 있는 겁니다. 이 기분을 없애려고 하지 않고 그냥 두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겠어요? 슈방구 정도로는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개슈방구예요, 아주 그냥 상태가.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 적어도 제 경우에는, 이… 죽고 싶은 마음에 항복하고 그냥 있잖아요? 그러면 얘가 온갖 자기주장을 다 하고서 용해됩니다. 사라져요. 그리고 거기서 동전의 이면이 등장합니다. 살고 싶다. 아, 내가 살고 싶어서 죽고 싶었구나.
<붉은 새벽>을 보고서 관찰한 감정은 이 죽고 싶은 감정보다는 훨씬 덜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굉장한 공포였어요. 그리고 이 공포는 만난 게 처음이 아니었어요.
네. 죽고 싶은 감정은 5월 말인가 6월 초에 피크를 치고, 그전에도 그후에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붉은 새벽>이 끌어낸 공포는 원래도 머리로는 인지를 하고 있었던 공포였던 데다가, 수시로 올라옵니다. 바로, 무력함에 대한 공포예요. 특히나, 떼를 마주했을 때의 무력함. 요거, 아실 겁니다, 제가 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떼로 몰려와서 말 안 되는 거 말 된다고 하고, 히히덕거리고, 우기는 거. 그냥 개인이 와서 이러는 것보다 저는 그게 떼일 때의 공포가 굉장해요. 인간이 떼로 몰려와서 아닌 걸 맞다고 우기면 그냥 그 아닌 게 맞게 됩니다. 이걸 굉장히 무서워하는데, 아주 옛날에는 무서워하는 줄도 몰랐고, 그냥 경멸했어요. 그런데 파 보니까 무서워하는 거더라고요. 너무 무서워.
그리고 좀 더 최근의 옛날에는, 그 공포를 머리로만 인지했습니다. 뭐 한, 올해 2월까지만 해도, 머리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여러분? 머리로 아는 건, AI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아하, 떼에 대한 공포라는 게 있군’하고 머리에 입력하는 거, 원시 레플리컨트 모델도 할 수 있어요. 챗GPT도 할 수 있어요. 머리로만 이해하는 거, 논리적인 거 같지만, 가장 비논리적인 게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저는 요즘 정말 자주 합니다. 인간만 할 수 있는 거 해야 해요, 우리는. 머리로 이해하는 걸 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요, 거기서 끝나면 챗GPT에 진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정보입력형 앎은 기계가 우리보다 더 잘 알아요. 아직까지는 인간만 할 수 있는 건 느끼는 겁니다. 온몸으로. 이 우리에게 주어진 아바타, 이 몸뚱아리, 얘는 그 자체로도 소중하지만, 느낌의 도구로 아주 탁월합니다. 이 몸에 신호가 왔을 때—즉, 오한, 어지러움, 울렁임, 눈물, 하품—이런 신호가 왔을 때, 그걸 “무용지물한 반응이군”이라고 해왔던 게 옛날의 저입니다. 혹은 심지어, 그런 반응이 오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계속 관찰하다 보면, 관찰을 하면 할수록, 내 몸에 얼마나 미묘한 신호가 오고 가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호를 처리할 수 있게 돼요. 머리 말고 마음으로.
<붉은 새벽> 영화 얘기로 돌아가자면, 머리로 정보처리를 하는 건, “틀라텔로코에서 학살 사건이 있었고, 정치 문제야 어찌 됐든 간에 사람을 그렇게 많이 그런 방식으로 학살했다는 건 그 자체로 비극이고 문제다”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도 물론 가치가 있죠. 그런데 왜 우리가 굳이 100분 정도 되는 영화를 보느냔 말이죠. 저 문장으로, 저 사실 정보로 끝날 거였으면 왜 영화를 만들고, 왜 끊임없이 사건의 이야기를 재생산하느냔 말이죠. 머리 말고 마음으로 카타르시스 느끼려고 하는 겁니다. 집단적으로 인류에 내재해 있는 이 끔찍함을 용해하려고.
그리고 그렇게 하고 나면, 마치 제가 죽고 싶은 마음을 용해했을 때 그 이면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드러났듯이, 끔찍함의 이면에서 찬란한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죽고 싶은 마음과 달리, 요거, 공포는 그냥 한번 시도해 볼 만하잖아요. 죽으면 이 세상에서는 끝이지만, 공포는, 카타르시스 시도해 봤다가 안 돼도 뭐. 그냥 뭐. 한아임이 틀렸네? 하고 넘어가면 되니까.
그런데 참고로 어… 제가 <붉은 새벽> 관련해서 무력함에 대한 공포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했잖아요. 영화 보고 나서 명상하고 생각하면서 느낀 카타르시스란 말이죠. 그런데 이 무력함, 무능함, 초라함,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대한 공포를 제가 단번에 느낀 게 아니에요. 그런 감정이 있다는 걸 머리로 안 지는 몇 개월이 되었는데, 그걸 최초로 느낀 게 6월 초였고, 그 덕분에 <붉은 새벽>을 6월 말에 봤을 때 바로 공포가 인정이 된 거예요. 공포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용해한 거예요.
6월 초에 최초로 공포를 완전히 온몸으로 느끼기 전까지는, 즉, 그냥 머리로만 알았을 때는, 정말 저는 그냥 제가 괜찮은 건가? 싶었어요. “당연히 무력하면 공포스럽지. 그래, 나는 무력해. 그렇구나.” 그냥 뭐 눈물도 안 나고 하길래, 아, 나는 이 정도인 건가? 내 공포는 심각하지 않았나? 이랬어요. 그와 동시에, 분명히 제 공포가 심각하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그냥 머리로만 생각해도 심각했어요. 떼에 대한 공포, 떼 앞에서의 무력함, 수치, 이런 게 심각했어요. 무력과 수치 전반도 그렇지만, 특히 떼에 대해서.
그래서 이때 “아, 그렇구나, 머리로 아는구나.” 요 상태로 그냥 머물렀습니다. 그냥 머물렀어요. 그러다 진짜 어느 날 갑자기, 싸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몸에. 몸에 오는 감정 신호를 알아차리다 보면 안 느껴지던 게 느껴진다고 하더니, 진짜 그렇더라고요. 평소 같았으면 시계를 보거나, 작업량을 채우거나, 책이나 드라마를 보거나, 운동을 하면서 무시했을 그 신체 신호가 느껴져서, 그 싸—한 걸 또 가만히 봤어요. 본다는 게, 눈으로 본다는 게 아니고, 싸해하는 나를 관찰했어요. 눈 말고, 의식으로.
그러다가 갑자기 온몸으로 눈물 터지고 난리도 아니었던 겁니다. 이건 뭔가… 명상으로만 할 수 있는 신비 체험, 이런 게 전혀 아닌 것 같은 것이, 제 친구는 명상 쪽이 아니라 심리 상담 쪽을 좀 오래 받았던 모양인데, 상담가와 대화하다가 어떤 돌파구를 뚫을 때 눈물이 터져 오르면서 상담가와 얼싸안고 서로 와, 드디어 해냈다, 드디어 뚫었다, 드디어 우리가 이… 막혀 있던 뭔가를 뚫었다, 고 좋아할 때가 있대요. 제 추측으로는 제가 용해라고 부르는 게 아마 상담 중 일어나는 그런 작용과 같은 것 같아요.
즉, 명상을 하든, 일기를 쓰든, 상담을 하든, 그 방식은 아무 상관이 없고요. 레이블도 상관이 없어요. 신비 체험이든, 용해든, 돌파구든, 상관이 없습니다. 존재하는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름이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존재와 레이블은 별개예요.
그리고 <붉은 새벽>이 카타르시스의 도우미로서 너무나 적절한 이유가, 떼에 대한 공포 말고도 공포스러울 게 많아요. 그냥 다큐성 영화로 보면 사실 같지만, 이입을 하면서 보면 공포가 많단 말이죠. 세대 차이로 인한 갈등이라든지.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할아버지 캐릭터라든지. 와 저는 정말 얘네가 삿대질하는데, 어찌나 꼴 보기 싫던지. 처음에는 문화 차이인가? 했는데, 엄마 캐릭터가 삿대질을 스스로에게만 하거나 하늘에만 대고 하는 걸 보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애들한테 대고 삿대질하는 것은 하찮고 같잖은 마초성의 발현이든가, 그냥 싸가지가 없어서 그런 거 같아요.
심지어 이 할아버지 캐릭터가 자기 딸인 엄마 캐릭터를 앞에다 두고, 자기 손자인 대학생 아이들 둘이 감옥에 끌려가도 뭐, “드디어 정신 차리겠지” 식의 발언을 할 때는, 싸가지 정도를 넘어서서, 저건 무슨… 싸이코인가? 정말 그랬어요.
참고로, 싸이코성 발언과 싸이코인 것은 저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고 보는데, 이 경우에는 다만 싸이코성 발언을 하는 자가 아니라, 왜, 우리, 그런 예시들이 있잖아요. 무슨 뭐, 싸이코 테스트 이런 걸 할 때, 관찰해 보면은, 그거를 모든 걸 다 종합적으로 하면 싸이코라고 볼 수 있을 수도 있겠지만, 살면서 여러 사람들이 그냥 그런 말들을 하기도 하는 경우가 꽤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사람이 싸이코다’인 것과, 그러니까, ‘나는 싸이코다’ ‘그는 싸이코다’인 것과, 싸이코성 발언인 것, 혹은 가스라이터다와 가스라이터성 발언, 아니면 나르시스스트다 ‘그는 나르시시스트다’와 나르시시스트성 발언, 이런 것들 사이에 차이가 엄연히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이 영화에서 너무 계속 지속적으로 그런 말들을 해가지고, 게다가, 그냥 누구 뭐 제3자에게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 딸 앞에서 자기 손자들이 감옥 간 것에 대해 ‘감옥 갔으니까 정신 차리겠지’ 이러는 거야. 그래서 저거는 싸이코성 발언을 뭔가 어떤 그런… 그냥 한 말, 이런 게 아니라, 싸이코인가? 그랬어요.
자기 손자들이 감옥에 가서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르는데, 그래서 걔네를 낳은 자기 딸이 걔네를 걱정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걸 걔네가 정신 차릴 걸 좋아하고 있다고? 네. 저는 개인적으로는 이런 거에 대한 공포는 없어서 그냥 ‘미친 건가?’ 하고 넘어갔지만, 다른 관객은 이런 할아버지의 태도를 보고 엄청난 트라우마가 올라올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작작 해야지. 자기 말이 옳다고 여기고 싶은 거 알겠는데, 애들이 감옥에 끌려가는 거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러고 있어. 심지어, 애들이 괜찮을 거라고 이 할아버지가 착각하는 이유가, 자기가 왕년에 장교였다는 점 때문이에요. 이것도, 트라우마 카타르시스거리입니다. 완전한 착각이에요. 완전한 착각이었다는 게 영화에서 나중에 드러나는 데다가, 영화에 대놓고 착각임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이 할아버지의 이… “왕년에 내가 말이야” 하는 방식이, 와우, 정말이지. 만약 이런 행태에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를 본 이후에 그에 대한 숙고를 함으로써 온몸으로 감정을 느껴낼 수 있겠다.
왜냐하면, 머리로는 이런 트라우마가 있다는 걸 알아도 감정으로 매번 올라오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이런 영화가 좋은 도우미인 겁니다. 영화 속 인물들에 이입하다 보면, 머리에 기억 정보로서만 입력되고, 마음으로는 희미해졌던 것들이 올라와요. 굉장히 실용적이에요. 말씀드렸듯이, 이… 더러운 기분에 머무는 게 목적이 아니고요, 그 이면에서 반대 감정이 드러난다는 게 핵심입니다.
내가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의 할아버지, 혹은 어떤 다른, 스스로를 윗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꼴 좋다, 이제 네 잘못을 알겠지?”라고 했던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 기분 더러움에 머무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걸 완전히 느껴서 늪의 반대쪽에서 빠져나오는 게 핵심입니다. 버려진 나를 나는 안 버리면 돼요. 실제로 벌어진 상황하고 아무 관계 없이, 내 안에서, 내 마음에서 내가 나를 안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카타르시스의 또 하나의 핵심은 이겁니다. 감정에 너무 매몰되면 안 된다는 점.
그 측면에서 아까 말한 <씬 시티> 같은 영화가 유용한 도우미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가 카타르시스를 느껴보려는 거잖아요? 그래서 처음부터 ‘저들의 감정이 내 감정이 아니다’를 너무나 명확히 알 수 있어요.
<붉은 새벽>의 경우에는 영화 외적으로, 우리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이라 약간은 좀 더 감정 매몰의 리스크가 있지만, 그래도 실제 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보다야 훨씬 덜합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 벌어지는 일에서는 특히나 감정을 느끼되, 즉, 정신승리하지 말고 정신항복을 하되, 꼭 늪의 반대쪽으로 나올 때까지 포기 마시고 관찰을 하시거나, 만약 시간상 중도에 잠깐 멈춰야 한다면 그 상황과 나를 분리한 후에 멈추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쓰는 방법은, 영화관 방법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방에 있습니다.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누워 있습니다.
방은 어디 있습니까? 어떤 건물에 있습니다.
건물은 어디 있습니까? 어떤 동네에 있습니다.
동네는 어디 있습니까? 어떤 나라에 있습니다.
그 나라는 어디 있습니까? 어떤 대륙에 있습니다.
대륙은 어디 있습니까? 지구에 있습니다.
지구는 어디 있습니까? 우주에 있습니다.
우주는 어디 있습니까? 지금, 여기, 우주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에 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그 편안하고 깊고 검은 무한함 속에, 영화관 하나를 동동 띄워 봅시다. 그냥 아무 앞뒤 없이, 관객석이 몇 개 있는 영화관이 동동 떠다녀요.
앞에 스크린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객석에 앉아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옆에 여러분의 미니미가 있습니다. 아이라고 상상하셔도 좋고, 그냥 크기만 작다고 상상하셔도 좋고, 귀여운 만화 캐릭터라고 상상하셔도 좋습니다.
미니미가 있어요. 얘가 공포스러워하는 미니미입니다. <붉은 새벽>을 본 이후의 제 경우에는 떼에 대한 공포였고, 여러분의 경우에는 다른 공포일 수도 있어요. 코가 못생겨서 사람들한테 수치당하고 무시당하고 버려지는 공포라고 해볼게요.
여러분과 여러분의 미니미는 나란히 관객석에 앉아서 스크린에 뜬 장면을 봅니다. 코가 못생겨서 사람들한테 수치당하고 무시당하고 버려지는 장면이에요.
자,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관객석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미니미인 공포를 느끼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또, 그 공포의 장면을 보여주는 스크린이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영화관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 영화관을 품고 있는 우주가 있습니다.
그것을 품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게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스크린에 뜬 상황이 아닙니다. 공포 미니미도 아닙니다. 심지어 그 미니미랑 같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석의 ‘나’도 아닙니다.
제 경우에는 요렇게 내 안에 많은 나가 있다는 걸 좀 시각적으로 상상하는 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여담으로, 이런 이유로, 픽션 글쓰기가 건강에 이롭습니다. 나는 작가이자 독자이자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공포 미니미, 즉, 이야기 속 인물 중 하나, 내지는 그 인물이 특정 상황에서 느끼는 특정 감정으로 동일시될 확률이 거의 사라집니다.
물론, 실제로 살면서 이걸 지속적으로 인식하기에는 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다 보면 훨씬 편해져요. 저도 이제 막 연습하는 중이고요. 그런데 정말, 픽션 글쓰기. 와. 그것이 정말로다가 도움이 됐다. 내지는, 이번이 영화 시즌이니까 영화에 비유하자면. 여러분은 감독이고 작가이고 카메라맨이고 대본이고 영화관이고 스크린이고 배우고 인물이고 하여간에 그 모든 것들입니다. 전부 다예요.
그리하여, 심지어는 죽고 싶은 마음조차, 그 마음이 내 일부이기는 하되 그것만이 나일 수는 없음을 알 때, 그와 동시에 살고 싶은 마음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럴 때 저는 영화관에 죽고 싶은 미니미와 살고 싶은 미니미 둘 다를 데리고 앉아 있습니다. 제 양옆으로 관객석에 앉아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앉아 있는 저도 있지만, 그 셋을 지켜보는 더 큰 저도 있습니다.
<붉은 새벽> 같은 영화나 그 영화가 기반한 실제 사건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고, 이어 무력감이 밀려오지만,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뚫고 한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명상도 좋고, 일기도 좋고, 상담도 좋고, 친구와의 대화도 좋고, 다 좋습니다.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습니다. 이야기를 써보는 것도 정말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방의 어느 작은 인간 개체가 아니라, 방을, 건물을, 동네를, 국가를, 대륙을, 지구를, 우주를 담는 전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그 어떤 방식도 좋습니다.
이거 굉장히 실용적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냥 선택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 다른 모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말이죠. 여러분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믿으세요. 모든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도움이 안 되는 건 정신승리로 해결만 하기보다는, 정신항복으로 용해해 버리세요. 제 경우에는 그 효과가 더 오래가더라고요.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제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얘기할 영화, <Temporada de patos>입니다. 일단 미국에서는 무려, 넷플릭스에 있는! 영화입니다. 링크, 쇼노츠에 걸어둘게요. 그런데 모든 국가에서 시청이 가능한지? 넷플릭스, VPN 이용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음. 어케저케, 각자의 거주 국가에서 관람 가능한 플랫폼을 찾아서 봐봅시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Las Pampas – Los Peregrinos
- Rafi B. Levy – Rise up Today
- Master Minded – Opening Up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 2023 한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