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 수다의 씨앗, <Temporada de patos>입니다. 이 제목의 번역을 <오리 사냥철>이라고 할지 <오리의 계절>이라고 할지 좀 애매합니다. 영화 내에 등장하는 그림이 있는데, 그것과 관련한 대화가 나옵니다. 인물 중 하나가 “오리가 왜 V자로 날아가는지 아느냐. 앞 오리가 길을 터 주면 뒷 오리들은 힘이 덜 들어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거다”라는 말을 합니다. 즉, 영화에서 의도된 오리의 상징은 뭔가… 아름다운 협력, 서로에 대한 위로, 이런 의미를 담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오리 사냥철>은 좀 격한 번역인 것 같아요. 오히려 그냥 말 그대로 <오리의 계절>이 적합할 것 같기도 한데,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내에 총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영어 제목은 <Duck Season>이에요. 보통 영어에서는 동물 이름 뒤에 ‘시즌’이라는 단어가 뒤따르면 사냥이 떠오르긴 합니다. 예를 들어 구글에다가 “Deer season,” 사슴 시즌을 검색하면 사슴 사냥을 언제 해도 되는지에 대한 정보가 떠요. 그런데 그게 스페인어로도 그런지? 스페인어로도 “temporada de”와 동물 이름을 합하면 사냥 시즌에 대한 게 되는지? 제목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협력과 격한 사냥의 모호함은 의도된 건지?
그래서 음… 고민고민이다, 번역. <Temporada de patos>, 요거 번역을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서 어떻게 할지 아직은 미정입니다. 한국에서는 공식 제목이 나온 것 같지 않아요. <덕 시즌>으로 영문 제목 음역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시즌’이라는 단어는 익숙하니까요. 심지어 표준국어대사전에 ‘시즌’이 등재되어 있습니다. “「명사」 어떤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기. 또는 어떤 활동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 이렇게 나와 있어요. 오리를 뜻하는 “덕”은 표준국어대사전엔 없습니다. 하지만 뭐… 도날드 덕, 알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덕’을 알 것 같은데. 음. 아무튼, 그러하다.
<Temporada de patos>,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멕시코 영화이고요, 또한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틀라텔로코의 아파트 단지가 배경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와는 달리 분위기는 그리 어둡지 않고, 흑백 영화입니다.
넷플릭스에 있는 영어 요약의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두 명의 십 대가 있는데, 여느 일요일과 다를 바 없던 어느 날이 매혹적인 이웃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으로 인해 혼돈의 모험으로 돌변한다.”
아무튼, 이번 에피소드에도 역시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일단, <오리의 계절>이든 <오리 사냥철>이든지 간에, 영화의 시작 부분에 노래가 나오는데, 말 그대로다가 오리 소리가 가사에 들어간 노래예요. 한국어로 치면 “오리는 꽥꽥”과 같은 뜻인 듯한 가사가 스페인어로 나와요. 스페인어로는 “오리는 뀌뀌”라고 하나 봐요. 왕 귀여워요. 이 영화를 통틀어서 제가 제일 좋아한 게 바로 이 도입부의 노래입니다. 너무 귀여워요. “오리는 뀌뀌” 요래요래해요.
아무튼 그러한데, 이 영화가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서 언급되는 이유는, 지난주 <붉은 새벽>이 언급된 맥락과 흡사합니다. 그것이 해당 챕터, 멕시코에서의 누아르 어바니즘에 대한 해당 챕터의 저자의 관점입니다. 그 관점에 대해서는 책이 출판되면 그때 더 상세히 얘기하기로 했죠?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Temporada de patos>를 보면서 한아임이 느낀 것에 대해 얘기하는 에피소드인데, 저는 <붉은 새벽>은 매우 디스토피아적이지만, <Temporada de patos>는 전혀 디스토피아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았고, 그뿐만 아니라 ‘사는 게 힘들다’든지 하는 느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예요. 오늘 에피소드의 제목, “사서 느끼는 고통”입니다. 말 그대로, 아, 이것이 사서 느끼는 고통이구나, 라는 생각이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비단 이 영화를 보면서만 드는 게 아니라, 비슷한 분위기의 다양한 픽션은 물론이거니와 논픽션에서도 느껴집니다. 특히나 요즘에. 왜인지는, 뭐, 또, 여러분, 아시죠? 기승전 명상. 요즘 한아임의 최대 관심사. 명상을 하다 보면, 이 물질세계가 얼마나 고통일 필요가 없는 걸 고통이라고 주입을 하는지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제 해석이 이런지라, 이 영화가 장르상 코미디? 좀 다크한 코미디?로 분류되어 있는데, 저는 전혀… 안 웃겼어요. 이건 제 명상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아요. 저는 음… 한국 영화도 코미디로 분류된 걸 보고 대체로 안 웃기고요. 미국영화도 코미디로 분류된 걸 보고 대체로 안 웃긴데. 어… 특히 영화인 경우 그런 것 같아요. 드라마보다. 왜 그런가 생각해 봤더니, 드라마는 여러 시즌 동안 이어져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이상한 개그라도 거기에 항상 맥락이 있어요. 맥락이 많고, 뚜렷해요. 그런데 영화는 뭔가… 상황적 개그를 던지려고 하는데, 하나도 안 웃기다. 특히나 뭔가… 자기가 되게 불쌍하고 자기가 되게 막… 오해받고, 이런 것에서 나오는 특유의 개그가 있어요. 이건 미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고, 보아하니 멕시코에도 있나 봐요. 자기가 불쌍한 줄 아는 사람들을 관객층으로 삼으려고 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하여간에, 안 불쌍하고, 오늘 에피소드의 제목, “사서 느끼는 고통,” 딱 이거라는 생각이 들고, 그러한 스스로 허우적대는 불쌍함에 머물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아, 자기가 불쌍하다는 걸 즐기는구나,” 이런 생각밖에 안 들어요.
이런 종류의 고통을 <붉은 새벽>에서 나오는, 정말이지 사람들이 밟혀 죽고, 총 맞아서 죽고, 얻어맞아서 죽고, 또한 발가벗겨져서 비 맞아서 체온 떨어져서 죽은 사람도 있겠죠? 하여간에 별별 다양한 방식으로 죽어 나가는 그런 내용의 영화에 등장하는 그런 고통하고 비교를 못 한다는 게 제 생각이고요. 무엇보다, 코미디라는 게… 전혀 안 웃기다. 네. 이 영화가 웃기지 않은 이유가 제가 멕시코 문화를 몰라서 그런 것 같진 않아요. 전반적으로, 스스로 불쌍하다고 여기는 것도 모자라서 그것이 웃기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제가 모르나 봐요.
제가 좋아하는 코미디는, 여러분, <Community>라는 시트콤이 있습니다. 미국 시리즈. 이게 제 최애 코미디입니다. 세상 웃겨요. 제가 태어나서 최고로 많이 육성으로 터지면서 웃은 게 이 시리즈입니다. 저랑 취향 비슷하신 분들은 <Temporada de patos>를 교육용으로 보시고, <Community>를 웃기 위해서 보시면 됩니다. 또한 저랑 취향이 반대이신 분들은 그 반대로 하시면 됩니다. 개그 코드라는 게 그만큼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슬픔 코드나 감동 코드보다 개그 코드가 더 세분화되어 있는 것 같아요.
이러한 한아임인지라, 이 영화를 코미디가 아닌 가벼운 공포에 가까운 가벼운 비극으로 봤다. 말씀드렸듯이, <붉은 새벽>에 나오는 내용과 그 무거움의 정도가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가벼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고요, 가볍다고 해서 덜 중요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가벼운데도 불구하고 <Temporada de patos>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는 그 가벼운, 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중요해서 스스로가 너무 너무 너무 불쌍하게 여겨지는 게 핵심이고, 제게는 개그 코드가 빗나간 부분이며, 저 같은 특이 취향자들에게는 공부 재료가 됩니다.
일단, 아파트라는 이 배경 말입니다. <붉은 새벽>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와 같은 배경인데, 이 자체로 뭔가 디스토피아적이라고 여기는 뉘앙스가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어… 뭐가 문제인지? 아파트 단지가 좀 휑하긴 한데, 사람 많이 다닥다닥 붙어 사는 아파트에 콘크리트가 좀 많다고 해서 다 디스토피아면, 그냥 사람 수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으니까 좁은 데에서 사는 거잖아요. 살기 싫으면 시골로 가겠죠. 도시에 사람이 많고 자리가 좁다고 해서 그 자체로 불쌍할 것까지 있나?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사서 느끼는 고통.”
어, 물론, 소음 문제가 실제로 있다든지 한 경우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층간소음도 심각한 문제고, 자기 구역이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시작하는지 모르는 거, 진짜 짜증 나고, 나아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정말로 사람 죽고 죽이기까지 하는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그런 내용이 안 나와요. 이 이야기가 틀라텔로코에서 펼쳐졌다는 것 자체로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보기에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시골에서도 스스로를 불쌍히 여겼을 거예요. 도시 생활이 힘들어서, 도시의 뭔가… 척박함. 분리. 가족도 서로 챙겨주지 않음. 이런 것 때문에 자기가 슬프고 외롭고 아, 오리 그림을 보면서 “오리는 서로 저렇게 도와주는데, 우연히 이렇게 만난 우리도 서로 도우면서 위안을 얻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 같은데, 시골에서도 그랬을 거예요.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아파트가 방음이 잘 되고요. 바깥에서 애들이 논다고 온 단지 떠들썩하게 하지도 않고요. 고요하고, 좋습니다. 만약 이 인물들이 스스로 불쌍하게 느끼지 않기로 선택한다면, 불쌍할 일이 없었을 거란 말입니다.
실제로, 이야기가 시작할 때는, 그냥 평범한 일상처럼 보여요. 두 명의 십 대 소년이 있는데, 이들이 소소하게 집에서 콜라 따라 마시고, 비디오게임을 하고, 그런 내용처럼 보입니다.
음… 아무튼, 콘크리트로 가득한 배경이 과연 절로 디스토피아적인가에 관련하여, 다른 영화 하나를 언급하자면, <가타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고요, 스무 번은 본 것 같아요. 정말 여러 번 봤고, 매우 좋아하는 영화인데, 내용은 디스토피아적이에요. 유전자조작이 가능한 세계에서 유전자조작이 되지 않은 채, 자연적으로 태어난 주인공이 있습니다. 이 주인공은 키도 작고 눈도 나빠요. 그래서 원하는 직업을 갖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꿈을 버리지 않고 벌이는 일 때문에 생겨나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인데, 이거야말로, 불쌍하죠. 누군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겠냐만은, 이 주인공은 특히나 불리하게 태어났잖아요. 거의 모든 사람의 시력이 완벽한데 주인공의 시력이 안 좋다는 것이 이 세계에서는 심각한 장애입니다. 하층민으로 태어난 거예요. 가족이 하층이라서가 아니라, 인간 개체로서 이 주인공이 하층민으로 분류됩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못 해요. 혈액검사, 소변검사 등으로 유전자를 알아내서, 자신을 증명할 새도 없이 사회의 찌꺼기 취급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가타카>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콘크리트를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디스토피아적이고, 슬프고, 주인공을 위해 약간 화도 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콘크리트가 등장합니다. 영화를 보시면 느껴지실 거예요. 그 보송보송함이. 그… 질감이 느껴지는. 그 시각적 효과가 있는데, 끔찍한 측면이 없지 않은 줄거리와 그렇게 아름다운 시각 효과가 대조되면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느낌이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이 영화의 요소들 중 하나입니다.
건물은 죄가 없어요. 콘크리트는 죄가 없습니다. 콘크리트는 대단히 유용한 재료라고요. <가타카>에서 제일 소름 돋는 건 사람이지, 배경이 아닙니다.
<Temporada de patos>에서도 인물들이 하도 스스로를 좀 불쌍히 여기는 것 같아서, 그게 가볍게 소름이 돋는 거지, 배경은 하나도 디스토피아적이지 않습니다. 뭔들, 어떤 영화인들, 배경이 그 자체로 소름이 돋는 경우는… 없든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배경이 그 자체로 소름 돋는 경우가 있는지 떠올려 보려고 했는데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사람이 지옥이다.
특히나, 처음에는 <Temporada de patos>를 보면서, “어? 타인이 지옥이다 류의 아이디어를 가진 영화인가?” 했는데, 그리고 그게 의도였을 수는 있는데, 저는 뒤로 갈수록 아니다. 그게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인은 지옥일 수가 없어요. 내가 지옥입니다. 지옥은 내가 만드는 거예요.
네.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이렇게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압도적으로 더 많을 거예요. 영화라는 건, 꽤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에 뭐랄까, 동조를 해서 만들어지는 매체잖아요? 영화란 많은 사람과 시간과 계획과 보험 등을 필요로 하는 매체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한아임 하나가 영화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든 말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수많은 외부 요소들이 특정 영화를 재밌어한다고 해서 한아임에게 상관이 있는가? 상관이 없습니다. 쌍방입니다.
아무튼, 이 영화에 주요 인물이 네 명입니다. 두 명의 십 대 소년, 매혹적인 이웃. 그리고, 아까 그 요약 글에서는 언급이 안 된, 피자 배달원입니다.
두 명의 십 대 소년은 정확히는 14살이고요, 매혹적인 이웃은 16살 소녀입니다. 유일한 성인이 피자 배달원 아저씨예요.
두 명의 십 대 소년은 오늘 집에 둘이서만 있는 날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콜라 마시고, 게임하고, 피자를 시키자, 해서 피자를 시켰는데, 갑자기 16살 이웃 소녀가 들이닥치는 겁니다. 빵을 구워야 한대요. 그런데 자기네 집 오븐이 고장 났대요. 너네 집 오븐을 써도 되녜요. 여기서부터, 제가 처음에 “타인이 지옥이다” 류의 내용인가? 라고 여긴 이유가 시작됩니다.
일단, 이 빵 구우러 온 여자가 굳이 빵을 굽겠다고 굽겠다고 하는 게 지옥입니다. 아니 무슨 빵을 오늘 꼭 구워야 해. 그리고 오늘이더라도 왜 꼭 지금이어야 해. 보호자가 없는 남의 집에 와서 굳이굳이 오븐을 쓰겠다더니, 그러면 너네 집에서 반죽이라도 해 온 다음에 오븐만 깔끔하게 쓰고 가든가, 그것도 아니에요. 남의 집에서 반죽까지 요란하게 해요. 심지어 반죽 무게 재는 저울까지 씁니다.
처음부터 이상해요, 이 여자가. 16살이든 뭐든. 엄마 없어서 집에 손님 오면 안 된다고 하는 애들을 무릅쓰고 벨을 여러 번 눌러서 오븐 쓰게 해달라고 징징대더니, 들어와서는, 정전이 되기 전까지는 애들이 자기들 게임을 하느라 바쁘니까, 못마땅해합니다. 어이없죠? 남의 집에 억지로 들어와 놓고서는 주인이 환대해 주질 않으니 아니꼬워해요.
그런데 그러면 이 집 주인인 14살 소년과 그 소년의 친구인 다른 14살 소년은 뭐, 대단히 정상인가? 아니에요. 피자를 시키고서는 시간을 잽니다. 아마 이 세상 여러 국가의 다양한 피자집이 그렇듯, 오더 후 특정 시간 내로 배달이 완료되지 않으면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피자집에서 시킨 모양입니다.
그렇게 시간을 재는데, 피자 배달원 아저씨가 11초를 늦었다고 돈을 안 주겠대요. 양아치야, 애들이. 심지어 거기다 삿대질까지 해. 11초 늦었다고 돈도 안 내려는 주제에 삿대질을 해. 지난주에 이어서, 이 삿대질이 ‘문화 차이인가?’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아니에요. 멕시코에서도 삿대질당하면 기분 나빠하더라. 삿대질 하는 저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는데, 왜냐하면,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서 이 애들 중에 하나가 뭘 하는지 아십니까? 피자 배달원 아저씨가 하도 돈을 달라고 하니까, 돈을 주겠대요. 그런데 그 지폐를 던져요. 바닥에. 아저씨더러 주우라고. 삿대질하는 손가락 부러뜨릴 만하죠?
아저씨가 먼저 이상한 짓을 했으면 몰라.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전혀.
아무튼 그래서 이 배달원은 빡이 쳐서 애를 밀칩니다. 그래서 애가 뒷걸음질 치다가 어딘가에 부딪혀서 유리에 손바닥을 베여요. 그러더니 쫄래쫄래 자기 방으로 도망가네? 왜? 자기 집인데, 지폐를 바닥에 던지던 그 자신감은 어디로 갔나?
아무튼, 이렇게 되자, 배달원 아저씨는 그냥 돈을 갖고 가지 않고, 애 방에 노크를 합니다. 아주 그냥 대단해요 다들, 오지랖이. 자기 인생사를 애한테 구구절절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한편, 이 집 주인인 부부는 이혼을 하려나 봐요. 그림이며 접시며 각종 물건을 두고, 누가 가져갈지를 결정하느라 싸운대요. 그런데 그러한 배경 설명이 나오는 배경이 뭐냐면, 이 두 14세 소년, 피자 배달원 아저씨, 그리고 빵 굽겠다고 온 16세 소녀가 네 명이서 거실에 눌러앉아가지고는 그러한 임박한 이혼 상황에 대해 수다를 떱니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림을 크리스마스 파티 뽑기에서 땄대요, 이 이혼 예정인 부부가. 그런데 엄마 티켓으로 딴 건지 아빠 티켓으로 딴 건지를 모른대요. 그래서 그 그림을 누가 가져야 할지를 두고 왈가왈부를 한대요. 그런데 또 그러한 상황을 어떻게 할지를 두고, 생판 모르는 남들이 이혼 예정인 바로 그 해당 부부의 집 한복판에서 왈가왈부를 하는 겁니다.
네. 와. 물론 뭐, 영화에서는 이게 막 극단으로 치닫고 이런다기보다는, 코미디라고 분류가 되어 있으니, 웃기다고 생각해서 이런 대화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저는 그걸 보면서. 아, 타인이 지옥이라는 얘기로구나. 라고 여기까지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동안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런 거예요. 이 민폐녀가 15분 동안 빵을 오븐에 구울 테니 소년들 중 하나에게 시계를 맞춰달라고 해요. 그래서, 피자 배달원이 11초 늦었다고 돈을 안 주겠다는 이 양아치 꼬마 중 하나가 시계를 맞춰줍니다. 그런데 시계가 제시간에 안 울려요. 그래서 빵이 타요.
그러자 민폐 빵굽녀가 그걸 꼬마 책임이라고 합니다. “너는 이제 내가 새 빵을 굽는 걸 도와줘야 한다” 이래요. 즉, 정전인데 남의 집에 와서 오븐을 쓰는 것도 모자라 반죽까지 여기서 하고, 어지럽히고, 애한테 시계를 맞추라고 한 것도 모자라서, “내가 망했으니 이제 네가 날 도와야 한다” 이래요. 이게 지옥이에요.
그러하다. 충분히 ‘타인이 지옥이다’라는 내용일 수 있겠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네. 명상을 하거나 종교를 갖거나 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우리는 하나다’라는 개념을 논하다 보면, 이런 딴지가 걸려 올 때가 있어요. “어? 그래? 너 그렇게 믿어? 그러면 네 집이 내 집이겠네?” 이런 식으로 그걸 남용하려고 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네가 정말로 신을 믿거나, 정말로 영성을 공부했거나, 정말로 정치적으로 우리가 모두 평등하다고 여긴다면, 네 돈이 곧 내 돈이고, 네 공간이 곧 내 공간이어야 하고, 하여간에 네 것인 모든 것이 내 것이어도 너는 괜찮아야 하지 않느냐.” 이런 식의 딴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다”의 뜻이, 영성적이든 종교적이든 철학적이든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심리적이든 뭐든, “누가 내 걸 뺏어가도 된다”라든지, “내 것이란 개념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저는 현재 보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반대예요. “우리는 하나다”가 있으려면 “우리”가 있어야 합니다. 여럿이 있어야 한단 뜻이에요. 여럿이 있으려면 우리는 개체화되어야 합니다. 개인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도 있고 너도 있어야만 우리가 있을 수 있다고요. 즉, 네가 나이면 너는 없는 거예요. 네가 나이면 너는 내 일부로서 내 수족으로서 기능해야지만 되는 거라고 내가 주장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살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내 것을 빼앗아 갈 때만 “우리는 하나다”를 들먹이고, 네가 나로서 기능해야 할 때의 책임을 다하진 않는 건 웃기다는 거죠. 그것은 마치, 나의 손이 내가 핸드크림을 발라줄 때만 내 몸의 일부인 시늉을 하고, 내가 핸드크림을 안 발라주면 젓가락질하기를 거부해서 내 몸의 나머지를 굶겨 죽이겠다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런데 손은 안 그러죠? 그래서 손은 나인 거예요. 그런데 내 손이 아닌 너는 너인 거예요.
그리고 내가 나고 너는 너인 것은 전혀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나고 너가 너이기에 우리는 하나일 수 있어요. 이게 현재의 제 해석입니다. 내 손이 네 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악수를 할 수 있어요. 그런 식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타인이 지옥일 수 있는 이유는, 타인이 명백히 타인인데, 지 필요할 때만 하나가 되려고 하면서 명백히 내 것인 공간, 도구, 시간, 기타 등등을 침범하기 때문이다. 홀로 쓰는 자원이 있어야 내가 네게 줄 수도 있는 건데, 필요할 때만 내 것을 저절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이런 사람들이 계속 나와요.
피자 배달원의 시간을 쓰고서도 11초 늦었다고 지폐를 바닥에 던지는 양아치 소년.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는 온갖 민폐를 다 끼치고 가는 소녀. 피자 배달원 아저씨는 그나마 이해가 가요. 그래서, 여기서부터 좀 의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저씨는 딱히 남의 공간에 침범하는 게 아니라, 피자값을 받아야겠으니까 버팅기다가 이 일에 엮이는 거라고 볼 수 있거든요.
그러면 이 아저씨는 이 이야기에 왜 나왔을까.
여기서부터 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타인이 지옥인 게 아니구나. 내가 지옥이구나.”
이게, 음… 이런 캐릭터들이 엮인 이유가 있어요.
이걸 그냥 우연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기승전 명상인 관점에서 보니, 이들이 엮인 게 당연했습니다. 이들은 혼자 있질 못해요. 타인이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이들은 혼자 존재하질 못합니다. 계속해서 외부를 필요로 해요. 계속해서 비디오게임이나 남의 집 오븐 같은 자극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자기가 구걸하고 다니지 않으면 자극이 주어지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심히 불쌍해합니다.
여기서 오늘 에피소드의 제목의 이유가 드러납니다. “사서 느끼는 고통.”
이 피자 배달원 아저씨가 피자값을 받아야 하는 것 외의 모든 일은 안 일어나도 되는 일이었어요. 일어날 필요가 없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이 피자 배달원 아저씨조차 스스로를 너무 너무 불쌍히 여겨서 이 공간에, 이 다른 인물들과, 이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틀라텔로코라는 이 아파트 단지 자체는, 이 영화만 보면, 혼자 평화롭게 존재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앞서 말했듯이, 조용하고요. 민폐녀가 우리 집에 벨을 누르든 말든, 그냥 가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럼 갔겠지, 자기가 뭘 어떡할 거야.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벌인 건 나. 즉, 이 영화 인물들 개개인들. 이들입니다. 외부의 요소가 아니에요. 틀라텔로코라는 콘크리트 아파트에 살아서도 아니고, 엄마 아빠가 이혼해서도 아닙니다. 물론 애가 14살인 만큼, 어리니까, 그리고 16세 소녀도 어리니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건 그들 사정이거나,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14세나 16세 아이가 내 삶에 나타나면 그때 도와주면 될 일이고, 지금 우리는 이 영화를 본 다음에 이걸 소화를 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영화든 책이든 뭐든 그냥 보고 “아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거면, 특히나, 제 입장에서는 이렇게 안 웃긴 코미디 영화를 보고 그냥 넘어갈 거면, 볼 이유가 없어요. 웃긴 코미디면 그 웃음 자체로 너무나 즐겁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타인이 지옥이다’라는 착각에 빠진, 그러나 사실은 타인이 없으면 숨조차 쉴 수 없는 인물들이 스스로 사서 고통을 느끼는 이야기다. 그거에 대해서라도 생각을 하고 느끼는 바가 있어야 성에 차겠다.
이들이 가장 간단하게는 어떻게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느냐. 정전 상황에서의 태도입니다. 정전 하나 났다고 다들 어찌나 우울해하는지. 이게 참. 이게 코미디인지. 제가 정말 웃김을 이해를 못 하나 봐요. 안 웃겨요. 그래서 안 웃기다 보니까 이렇게 별별 생각을 하는 건데. 이 인물들이 정전을 너무 무료해해요. 무료하면 책을 읽든지. 산책을 나가든지. 무슨 할 일이 저렇게까지 없지? 낮잠을 자든지. 얼마나 좋아요, 낮잠? 뭘 막 열심히 하라는 게 아니에요. 시간이 이렇게 많은 그 사치, 내지는, 사치는 좀 비판적인 뉘앙스가 있으니, 적어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그걸 이용하고 감사하는 게 전혀 아니에요., 이 캐릭터들은.
즉, 뭐냐 하면, 무료함이 문제가 아닌 거예요. 정전도 문제가 아닙니다. 정전이 문제인 상황이 있을 수 있어요. 내가 데드라인이 있는데, 파일을 보내야 해. 그 데드라인 안 지키면, 즉, 파일을 상사한테 못 보내면, 난 짤려. 그러면 타인이 지옥이든 내가 지옥이든 나는 당장에 굶어 죽어. 이건 정말 실질적인 문제고, 걱정이 될 만합니다. 그런데 이들 중 그런 사람 하나도 없어요. 정전이 문제일 필요가 없단 겁니다.
정전이 문제이게끔 하는 건 이들이 자초하는 자기 연민입니다.
무료함도 문제가 아니에요. 무료함이 문제이게끔 하는 것 역시 자기 연민입니다. 무료함은 좋을 수도 있어요. 얼마나 좋아. 평화롭고 조용한 어느 날 오후에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사치를 누릴 수 있다는 게.
여기서 다른 영화 하나가 생각났는데, <Bodies Bodies Bodies>라는 호러 영화예요. 슬래셔? 사람 다 죽는, 그런 영화인데. 거기에 각종 20대들이 나옵니다. 거의 다 매우 부유해요. 이 중 백인도 있고 흑인도 있어요.
그런데 그 영화에서도, 다들 자기가 불쌍해해. 아주 그냥 자기가 불쌍해. 참고로, 돈이 많다고 결핍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돈 암만 많아 봤자 결핍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게 포인트예요. 물론, 돈이 없어봤자 결핍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에요. 돈이 있으나 없으나, 똑같아요. 돈이랑 결핍은 별개예요.
아무튼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유함 얘기를 왜 하느냐면요, 이 캐릭터들 중에 하나가 흑인 소녀예요. 그런데 대사 중에 백인 소녀가 이 흑인 소녀에게 “너는 네가 아주 그냥 불쌍하지?” 하는 식의 대사가 나와요. 이게 흑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여자라서 하는 말도 아닌 것이, 말씀드렸다시피, 이 <Bodies Bobies Bodies>라는 영화에서도 인물들이 아주 그냥 스스로가 불쌍해서 자기 연민에 찌든 케이스예요. 그러니까 너, 나 할 것 없습니다. 다만 이 백인 소녀가 흑인 소녀에게 하는 말과, 그에 대한 대꾸가 너무 웃겨서 제가 이 부분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백인 소녀 왈: And you’re just so in love with your rags
to riches narrative, like you’re the only fucking person in the world who didn’t come from money. You know what? Your parents are upper middle class.
뭐냐 하면, “넌 네가 무일푼에서 출세했다는 서사와 사랑에 빠졌어. 마치 이 세상에서 돈 없이 태어난 망할 년은 너 하나밖에 없다는 것처럼 굴어. 근데 그거 알아? 네 부모님 중산층 중에서도 윗계층이야.”
그러자 흑인 소녀가 진짜 멍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No, they’re not. 아닌데.
그러니까 다른 애들이 그래요. “맞거든?” They teach at a university. 부모님이 대학교수시잖아.
그러니까 이 흑인 소녀가 너무나 놀랍게도 하는 대답이 이겁니다. It’s public. 공립이잖아.
그러자 다른 캐릭터들이 이래요. Oh, my God.
그리고 저 역시, 오마이갓,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친구들은 자기보다 훨씬 훨씬 훨씬 더 부자고 백인이고 하여간에 가진 게 더 많은데, 자기 부모는 겨우 고작 공립 대학교 교수밖에 안 되니까, 자기는 되게 힘들게 살았고, 이 중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다 이거야.
그런데 이러한 인물이, 왜 여기 있겠어요? 자기가 제일 불쌍하다고 여길 수 있어서 여기 있는 거예요. 만약 자기가 정말로 이 불쌍함을 표면적으로라도 해결하고 싶었으면, 자기가 제일 돈 많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무리로 가면 돼요. 근데 아니다. 왜냐? 다른 캐릭터가 지적했듯이 “나는 불쌍하다”는 서사와 사랑에 빠졌으니까.
아무튼. 이러한 인물이든, <Temporada de patos>에 등장하는 인물이든, 하다못해 이들이 뭔가… 뭘 막 이루려고 열심히 하는 인물들이었으면. 왜 그, 있잖아요, 전형적인 선형 서사에서 주인공은 초반 10% 정도에 배경 맥락을 깔고, 10에서 25% 정도에 영화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루려고 노력할 목표를 발견하고, 25%에서 90% 정도까지 여러 trial and error, 시도와 실패를 겪지 않습니까? 이 시도와 실패가 묘미인 이야기도 있거니와, 우리 삶에서도 실제로 뭐, 시험 준비를 한다든지, 연애를 하고 싶은데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어떻게 하면 좋게 보일지를 고민한다든지, 이런 뭔가, 각종 외부적 노력, 부딪힘, 배움, 이런 게 매력이기도 하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뭐라도 해보려고 하는 인물들이 때로는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런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가만히 있으면 불안한 내면의 결핍이 있으니까, 그리고 결핍이 아니더라도, 진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으니까 뭔가를 해보고, 실패하고, 다시 해보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Temporada de patos>에서는 전혀, 그것도 아니야. 이 애들이 무슨… 학업에 찌들어서 스트레스를 푸는 애들? 그런 맥락도 안 나오고요. 부모가 이혼한다는 애가 하나 있긴 한데,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애가 어리니까 이해는 합니다만, 심지어 당연하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이 애가 아니고, 이 애가 지금 우리 앞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니, 우리는 이 인물을 이용해서 이 안 웃긴 코미디로부터 뭐라도 얻으면 좋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이 애가 어린이가 아니었으면? 아니면 이 애가 어린이되, 부모가 이혼을 안 했더라면?
이야기 전체의 맥락을 보면, 만약 그랬다 하더라도 자기 연민은 존재했을 것 같아요. 이 피자 배달원 아저씨를 보면 그렇고, 이 애의 부모를 보면 그렇습니다. 그냥 스스로가 불쌍한 거야.
정전이 되면 정전이 돼서 게임을 못하는 자기가 불쌍하고, 오븐에 빵 못 굽는 자기가 불쌍하고. 무료하면 시간이 남아돌아서 좋은 게 아니라, 시간이 남아도는 자기가 불쌍한 거야. 애초에, 아주 근본적으로, 이들은 혼자 존재하는 자신이 너무 불쌍해서 같이 있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예를 들어, 이 16세 민폐녀는 오늘이 자기 생일인데 가족들이 까먹어서 빵을 구우려고 했대요. 이것이 겉표면으로 보기엔 슬픕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말하지만, 그래, 16살이니까, 게다가 특히나 계속해서 시선이 외부로 향한 게 너무나 습관화되어 있어서 생각을 안 해봤다면, 스스로가 불쌍할 수 있습니다. 서러울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걸 외부에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스스로 자초한 고통이 아주 겹겹인 거예요.
그래요, 가족이 생일을 까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표면적으로는 이 생각부터 해볼 수 있어요. 내 생일을 기억조차 못 하는 가족한테 생일을 기억당함을 당해봤자, 그게 뭐 그렇게 좋을 일인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를 홀대하는 상사가 있다고 쳤을 때, 그게 기분이 나쁠 순 있는데, 그 상사가 나를 홀대를 안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경우, 다시 한번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아니, 저자는 나를 홀대하는데, 그런 자의 인정을 나는 왜 갈구하지?”
그리고 이 소녀의 경우, 더 나아가서, 또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생일을 기억 못 하면 그게 왜 나쁜가?” 즉, 내 생일을 누가 까먹으면 나는 굶어 죽나? 나는 집에서 쫓겨나나? 나는 성적이 떨어져서 나중에 가족으로부터 독립하는 데에 불리해지나?
내가 내 생일인 걸 아는데 다른 누가 왜 알아야 하나? 다른 사람이 박수 짝짝 쳐주면 좋은가? 왜? 박수를 짝짝 쳐주지 않으면 왜 안 좋은가?
즉, 누가 축하를 해주면 즐거울 수야 있겠으나, 축하를 안 해준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슬픈데, 심지어 슬픈 걸 인정을 안 하고, 그걸 표면적 해결, 즉, 지난주에 말한 ‘용해’와 반대되는 개념인 거짓 ‘해결’을 하기 위해 남의 집에 쳐들어가서 민폐 끼치며 오븐 쓰고, 밀가루 다 날리고, 그 집에서 나중에 약도 해요. 별의별 짓거리를 다 하는 이런 내가 정당화가 되나?
그러니까, 나는 내가 불쌍하기만 하면 그냥 막 너무 막 연민이 샘솟아가지고, 그냥 막 아무 앞뒤 없이, 실제로는 해결 안 되는 일을 해결이랍시고 벌이고 다녀도 되나? 심지어 그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불쌍한 척을 하는 게 이게… 나한테 좋나?
그런데 이 인물들이, 잘 보면, 영화 뒤로 갈수록, 모두가 이래요. 이 네 명이 다 이러는 바람에, 그래서 넷이 만난 겁니다.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생일 따위, 누가 기억할 수도 있고 안 기억할 수도 있지 뭐”라고 하는 사람이었으면, 여기서 정전됐다고 무료해하고 스스로를 불쌍해하는 이 무리에 있다가도 그냥 갔을 겁니다. 왜냐하면 또, 스스로를 불쌍해하려면 나를 버리고 가는 사람을 없애지 못해요. 불쌍해야 하니까. 오히려 내가 나를 불쌍해하는 데에 안성맞춤입니다.
이 인물들이 하는 얘기들이 다 그런 얘기예요. 이 피자 배달원 아저씨도. 누가 날 버리고 갔어. 기타 등등.
누가 내 눈 앞에서 이러고 있을 때 위로를 해주는 거랑, 내가 영화를 보고서도 “와, 저 사람들은 진짜 저 사람들 생각대로 불쌍해서 위로를 받아야 한다. 또한, 나도 저런 상황에서 나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게 당연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건 별개예요.
우리가 “괴롭다”고 생각하는 것 중 정말로 괴로운 것도 있어요, 당연히. 차에 치여서 다리가 부러지면 괴롭습니다. 그런데 차에 치여서 다리가 부러져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할 거라고 하는 생각은 가짜입니다. 나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오히려 나를 도와주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시당할 거야’라고 믿는 그것이 나를 괴롭게 합니다. 다리가 부러진 건 그냥 고통이지만, 무시당할 거라는 믿음은 사서 느끼는 고통입니다. 피할 수 있는 고통이에요.
오늘 생일인데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아서 슬프다는 생각은 들 수 있지만, “가족들은 나를 하찮게 여긴다”는 건 사회에서 주입된 착각입니다. 실제로 가족들이 나를 하찮게 여길 수도 있지만, “생일을 기억해야지만 나를 존중하는 것이다”라는 관념 자체가 허상이라고요. 그냥 만들어 낸 거예요. 인류는 달력 없이도 존재했습니다. 그러면 1년이라는 개념이 없어요. 1년이 돌고 돌아 내 생일이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그냥 만들어진 관념이에요. 나이라는 것 자체가 관념입니다. 심지어 신체 나이랑 문서상 나이는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어디서 언뜻 뭘 들었냐면… 걱정을 사서 많이 하는 사람들은 텔로미어? 그… 노화를 초래? 노화와 관련 있는 그… 뭐라 해야 하나. 신체 구조물? 그것이 엄청 짧대요. 무슨, 걱정을 안 하는 70대의 텔로미어 길이와 걱정을 엄청 하는 20대의 텔로미어 길이가 같다는 거야. 이걸 제 기억으로는 아마, 김주환 교수님 채널의 어떤 영상에서 봤던 것 같은데, 어떤 영상인지 기억이 안 나서 김주환 교수님 채널을 링크할게요. 음. 김주환 교수님 본인은 크리스천이신데, 범종교적으로 명상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많이 올리셨고요, 너무 영성적으로 가지 않는, 극히 실용적인 명상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에게 특히 유용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분이 말씀하시기를, “명상을 하면 성적이 올라간다.” 혹은 “감사를 하면 성적이 올라간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그 이유가, 제가 기억하기로는, 그렇게 실용적인 걸 연결을 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저는 이보다는 더 영성적인 결이 취향에 맞는데, 사람에 따라서 김주환 교수님 영상들이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튼 그런데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그렇다는 거예요. 정신 상태에 따라 텔로미어 길이가 70대랑 20대가 같을 수가 있다는 거야. 나이는 허상이에요.
그리고 교수님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명상 및 정신건강의 장점을 알리기 위해 성적, 텔로미어 길이 등을 언급하며 설명을 해주시지만, 저는 더 영성적인 결이 취향이라고 했잖아요. 그쪽으로 가면, 더해요. 이 정신건강의 차이에 따른 현실의 차이가 더하다고요. 그냥 지구에서의 수명이 연장되고, 긍정적이라서 성적이 오르고, 이 정도가 아니라, 내 세상이 바뀝니다.
그것을 표면적으로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죠. 정전이 일어났을 때의 무료함을 자기 연민으로 해석하는 자보다, 같은 무료함을 독서의 기회로 삼는 자의 인생이 30년 후면 훨씬 더 풍요로울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마 과학주의든 종교주의든 영성주의든 철학주의든 그 어떤 이즘을 믿으시는 분들도 동의를 하실 거예요.
그런데 진짜 영성 쪽으로 가면, 그 정도가 아니더라고요. 제가 영성에서 매우 흥미로워하는 부분이 이겁니다. 내가 무료함을 자기 연민의 대상이 아닌 축복으로 볼 수 있는 ‘나’이면, 나의 세계는 너무나 풍요로워서, 뭐랄까, 너무나 결핍이 결핍되어 있어서, 나는 나로서 무한히 온전할 수 있는 겁니다.
이거, 어… 실용적 명상이든 좀 더 이런 아방가르드한 듯한 영성적 명상이든, 해보신 분들은 겪어보신 적 있으실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나로서 존재하는데 무한히 온전한 상태. 내가 돈이 많든 돈이 적든. 내가 키가 크든 작든. 내가 시간이 남아돌든 시간이 촉박하든. 이런 관념들에 치이다가도, 그 관념들이 그저 허상이며, 특히나 그 관념들에 좋다 나쁘다를 갖다 붙이는 게 얼마나 허상인지를 알 때—아니, 그보다는, 추가적 앎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관념들을 제거해서, 원래부터 알던, 순수한 존재의 상태에 가깝되 내가 지금 이 물질 세계 껍데기를 걸치고 있기에 대조로서 체험할 수 있는 앎을 느낄 때—그 무한함이 어마어마해요. 그걸 느끼고 나면 이런 가벼운 문제 있잖아요. 즉, <붉은 새벽>에 나오는 학살 말고. 그건 정말 심각한, 정말 내가 그 상황에 처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멘탈 관리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진짜 도를 많이 닦아야 가능할, 그런 상황이고, 요런, <Temporada de patos>에 나오는 요 정도의 문제. 사실 이건… 도를 안 닦아도, 전혀 명상을 안 해도, 이걸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걸요? 도랑 아무 관련이 없어요, 그냥 제가 요즘 명상에 꽂혀가지고, 그거밖에 보이질 않아서 이런 해석을 하는 거지, 가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생일에 별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저만 해도, 원래 그랬고. 정전이 났는데 집에 먹을 것도 있고, 어차피 요리할 것도 아니었고, 방금 시킨 피자도 있고, 놀 친구도 있는데 그게 자기가 그렇게 불쌍하게 여겨진다고? 이게 무슨…
완전히 사서 느끼는 고통인 거예요.
내 생일을 누가 까먹었는데, 나라도 민폐를 끼쳐가면서까지 나를 위해 빵을 구워야지만 내 마음의 이 텅 빈 구멍을 채울 수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착각입니다. 텅 빈 구멍을 느끼기 싫어서 저항하는 거예요.
그리고 어쩌면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사실은 이러한 자기 연민이 사서 느끼는 고통이라는 점을 아는지도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이 빵굽녀가 계속해서, 영화 내내 뭘 먹어요. 남자 꼬마애들도 계속 뭘 먹어요. 의도된 연출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생활에서도 흔합니다. 마음이 고픈데 배고픈 줄 알고 계속 먹는 경우. 각종 중독이 이렇습니다. 알코올 중독, 니코틴 중독, 카페인 중독. 계속 뭘 채우는 거예요. 그 외부의 것들로 채울 수가 없는데, 도파민과 세로토닌에 뇌가 흠뻑 젖어 있으면 그게 행복인 줄 알고.
제 경우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속해서 오디오를 들었어요. 거의 하루 종일 내내, 다른 일을 집중해서 할 때가 아니면, 비는 시간 마다마다 오디오를 들었습니다. 팟캐스트도 듣고, 유튜브 영상을 보지는 않고 소리만 듣기도 하고, 오디오북도 들었어요. 시간을 절약한다는 반쪽짜리 논리적인 생각에 기반한 행동이기도 했는데, 근본적으로는 계속해서 외부 자극을 달고 살았던 거예요. 이 외부 자극이 있는 동안에는 내가 나를 들여다볼 필요가 없으니까요. 내가 나인 것도 잊을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뭐 배우고 성장하는 느낌 들어요, 시도 때도 없이 오디오를 달고 다니면. 그런데 지금에 비해 저에 대해 1도 몰랐습니다.
이게 정말 신기한 것이, 그때보다 지금 시간이 더 많아요. 1시간 동안 집안일 하면서 같은 1시간 동안 오디오를 들으면 시간이 2배로 유용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줄어들었어요.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냥 들으시는 분들, 그냥 즐거워서 들으시는 분들은 시간이 줄어들지 않아요. 그냥 즐거워서 듣는 거라서 그래요. 그런데 저처럼 어떤 결핍 때문에, 막 더 배우려고, 더 성장하려고, 내가 나라는 생각을 망각하기 위해, 마치 담배에 중독되듯이 습관적으로 들으셨던 분들은 정말 한 번만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계셔 보세요. 시간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늘어납니다. 오히려 시간이 줄어들었던 건 시간이… 시간을 2배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그때, 즉,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걔를 2배로 만들지 않으면 결핍이 심각했던 그때, 그때입니다.
저는 이 영화의 인물들처럼 저를 자학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서 고통을 느끼고 있었어요. 외부의 뭔가가 나의 공허를 해결해 줄 거라고 여기는 자체가 자학이었더라고요.
“타인이 지옥이다” 만큼이나 “타인이 천국이다”도 꽤 인기 있는 허상 중 하나인데, 이 영화가 약간 그런 식으로 끝나요. 아까 에피소드의 맨 처음에 언급했던 그 그림, 오리들이 V자로 날아가는 이유가 서로 돕기 위해서라는 내용을 언급하게 한 그 그림. 그 그림이 마치 “와, 타인은 지옥인 듯하지만 사실은 이렇게 우리는 서로 위로하니까 얼마나 타인이 없으면 안 되는 거니. 타인은 사실 천국이다.” 이런 식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네. 아니다.
타인은 천국일 수도 있고 지옥일 수도 있으나, 그들을 그러하도록 만드는 건 나다. 이건 굳이 명상까지 가지 않더라도, 텔로미어 길이만 보더라도, 정전이라는 상황의 무료함을 어떻게 쓰는지를 표면적으로만 관찰하더라도 알 수 있다. 그 아무리 많은 사람의 위로를 받아도 핵심 문제는 계속 남아 있다.
이게 참. 신기한 게. 주류에서, 이미 많이 논의되지 않습니까? 왜, 그, 인기 스타들의 공허함에 대하여. 화려한 무대에서 너무나 큰 만족감을 느낀 스타들이 집에 와서 느끼는 공허함에 대하여. 다 그렇다는 게 아니고요, 그런 분들이 실제로 계셨고, 그래서 많은 사람 앞에 서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자살 위험이 더 높은가에 대하여 다양한 담론이 있어 왔지 않습니까?
그런 담론을 보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니다”라는 자각이 이미 주류에 있어요. 그런데 참 특이하게도, “적은 수의 몇몇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다”라는 자각은 아직 없는 것 같아요. 이게 참 신기해요.
<Temporada de patos>의 인물들이 함께 보낸 하루는 아주 작은 무대에서 서로 박수 짝짝 쳐주고 헤어진 거와 다를 바가 없는데, 서로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뭔가 저절로 연결고리가 돈독하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어떨까요? 과연 이들이, 이렇게나 자기 연민에 빠진 이들이, 뭔가를 표면적으로나마 해결했을까요?
저는 아닐 것 같거든요. 다음에도 또 누가 작은 무대에서 박수를 짝짝 쳐줘야 자기 안에 있는 그 구멍을 메꾼 착각이 들 겁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메꾸지 않았지만요. 사람한테 받는 위로가 아예 무용하다는 건 아닙니다. 위로 좋죠. 그런데 외부 위로는 근본적인 구멍을 메꿀 수가 없습니다. 만 명이 나를 지켜보는 스타디움에서 박수갈채를 받은 이후이든, 세 명이 나를 지켜보는 틀라텔로코의 어느 아파트에서 하루 웃고 떠들어서 구멍이 메꿔진 듯하든, 똑같습니다.
우리는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습니다. 우리랑 평생 함께하는 사람은 우리 자신밖에 없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이 말을 듣고 좀 무섭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이보다 안 무섭고 안 외로울 수가 없어요.
그리고, 어… 만약 외롭고 무섭다 하더라도. 참. 이 정도로 자기 연민에 빠지긴 힘들다, 진짜. 이 영화에 나온 것처럼. 음. 이런 사람들을 실생활에서 본 적은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제 주변에는, 어, 이것도 제가 저이기에 제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제 주변에는 진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인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자학적일 정도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어서, 정전이 됐으면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었겠죠.
네. 그런데, 여러분. 자학도 문제예요. 자기 연민만큼 문제고요. 어떻게 보면 둘이 쌍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근원은 같습니다. 결핍. 그리고 연민이 자학이기도 하고 자학이 연민이기도 해요. 연민에 빠져 있는 자체가 쓸데없이 사서 고통을 느끼려는 자학이고, 자학을 하면서 내가 한없이 불쌍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하여튼, 영화가 저한테는 안 웃겼으나, <붉은 새벽>과는 달리 트라우마가 될 만한 영화도 아니라서, 그 점에서 코믹할 수도 있겠습니다. 웃기기도 해요. 관찰하면서 보면 많은 것이 웃겨 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를 관찰하다 보면, 현실이라고 불리는 물질세계에서 나를 관찰하는 것도 재밌어집니다. 지난 에피소드 언젠가에도 말했듯이, 여러분? 우리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서사를 택합시다. 만약 내가 아프면, 아픈 그 자체는 문제일 수 있으나, 그로 인해 나를 너무 불쌍해하거나, 아픈 나를 너무 탓하면, 그것은 사서 느끼는 고통이다. 그 역시 받아들여서 용해할 필요는 있겠으나, 그러고 나면, 굳이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전혀 아무 문제도 없는 나 자신을 허용하세요. 이거, 저도 행동보다는 말이 쉽습니다만, 일단 머리로라도 이해하니까 좋더라고요. 내가 아무 문제가 없는데 자꾸만 문제를 일으키는 건, 어떤 때는 정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제 경우, 90% 이상이 그냥 저 혼자의 망상입니다.
네. 다음 에피소드에서 얘기할 영화, <Detour>입니다. 한국어 제목, <우회>. 각자의 거주 국가에서 관람 가능한 플랫폼을 찾아서 봐봅시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Las Pampas – El Mayor
- Migra – Tierra de Nadie
- Pangal & Gana – Andean Feeling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 2023 한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