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57] 인생의 장르를 골라보자, “우회(Detour)”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 수다의 씨앗, <우회>입니다. 보다 클래식한 필름 누아르 장르에 해당하는, 그런 영화가 아닌가.

그런데 이쯤에서, <우회>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지금껏 시즌 5에서 다룬 영화들과,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가 보겠습니다.

우선 지금까지 시즌 5에서 다룬 영화들을 살펴보면, <메트로폴리스>, <베를린 심포니>, <전함 포템킨>, <알파빌>, <블레이드 러너>, <씬 시티>, <붉은 새벽>, 그리고 <Temporada de patos>였거든요. 전부 지금 이혜원 기획자와 제가 번역 중인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 등장하는 영화들인데, 이 영화들은 사실 딱 그 특정 장르적 필름 누아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왜 책에 언급되었느냐.

아직 출판되지도 않은 책의 인트로덕션에 나오는 말을 잠깐 인용할게요.

“이 책의 제목은 현대적 삶의 경험에 시각적인 요소를 삽입하는 데에 시네마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점을 나타낸다. 물론, 필름 누아르는 특정한 형식이다. 그러나 밝거나 어두운 공간의 고전적인 사용이 광범위하게 유포되면서, ‘누아르’라는 용어는 더 넓고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영화학자들은 이 용어를 특정 영화적 기법을 식별하는 데 사용하지만, 다른 분야의 실무자들은 암울하고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을 나타내는 데에 은유적으로 사용한다.”

네. 우리 대부분은 영화학자가 아니고, 다른 분야의 실무자죠. 이 책에 총 10개의 챕터가 있는데, 각 챕터의 기고자들이 다 다릅니다. 그리고 책의 초반 챕터들, 챕터 1부터 3까지의 저자들은 역사, 소리, 기술, 건축, 정치 등의 측면에서 누아르를 논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런데, 요 영화. <우회>. 이 챕터가 등장하는 게 챕터 4예요. 이 챕터는 완전히 필름 누아르 그 자체에 대한 챕터입니다. 완전완전. 수십 개의 영화가 언급되는데, 우리가 그 영화들을 다 다루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면 팟캐스트가 너무 영화 팟캐스트로 굳혀질 것 같아서, 그러진 않을 거고요.

11월에 누아르 어바니즘 책이 나올 예정이에요. 늦어도 12월까진 나올 것 같습니다. 인쇄 일정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미정이라서, 확실하고 정확하게는 잘 모릅니다. 아무튼 그러나 연말에 책이 나온다. 책이 나오면, 책 챕터 하나, 영화 하나, 책 챕터 하나, 영화 하나, 이렇게 번갈아서 에피소드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뒷챕터 중에는 영화가 언급이 안 되는 챕터들이 있는데, 언급이 되는 챕터에서 영화가 너무 많이 언급돼서, 많아요, 얘기할 영화가 많습니다.

그리고 좀 특별대우를 하고 싶은 레퍼런스가 있으니, 바로, 책 한 권입니다. <누아르 어바니즘> 내에서 언급되는 책들이 영화만큼 다양하진 않지만 그래도 꽤 있는데, 책은 완전히 글자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한국어 번역본이 없으면, 논하기가 어렵잖아요. 거기다 또 어려운 점이, 저는 영어로 된 책을 구하기가 쉽고 한국어로 된 책을 구하기가 어려운데, 어떤 분들은 한국어로 된 책만 구할 수 있고 영어로 된 책은 구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책은 참 여러모로, <누아르 어바니즘>처럼 제가 완전히 뭔가… 이 책은 내가 영어로도 읽었고 내가 직접 번역했고 범고래출판사에 한국 판권도 있고 나는 마케팅 차원에서 이 책에 대해 구구절절 얘기할 권리가 있다, 한 게 아니면 좀 난감하단 말이죠.

그러나. 특별대우를 하고 싶은 책 한 권 하나가 있는데, <누아르 어바니즘> 챕터 9에 나오는 <The Restless Supermarket>입니다. 책이 너무 재밌을 것 같아서, 제가 이 책을 영어로 샀어요. 근데 한국어로는 안 나온 것 같아요. 그런데도 책이 너무 재밌을 것 같아서, 일단 샀단 말이죠. 얘를 아마 중간에, 챕터 순서를 거스르더라도, 넣을 것 같아요. 책 내용이 뭐냐면… 세상이 움직인대요, 말 그대로. 누가 글을 쓰면 그것대로 물질세계가 움직인대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실존 장소가 배경인데, 저는 이런 장르를 좋아하거든요. 실제 세계인데 환상적이야. 판타스틱해. 요런 거 좋아해가지고. 이 책을 다룰 거다.

그리고 왜 챕터 순서를 거스를 것 같냐면요, <누아르 어바니즘>에 대해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여기 나오는 영화 얘기만 해도, 진짜로다가 내년까지 할 것 같거든요? 내년이 끝날 때까지 할 수 있어요. 그래가지고, 그러면 <The Restless Supermarket>은 챕터 9에 있는지라 엄청 끝부분인데, 그렇게 되면 너무…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잖아요, 한아임은 이 책을 이미 샀는데. 그래가지고. 음. 중간에 끼워넣을 것이다. 이건 그때쯤이 되면 공지를 드릴게요. 그러나, 책인만큼, 그리고 한국어 버전이 없는 듯하고, 영어 버전을 구하고 싶으신데 구하기 어려우실 분들을 위해, 이 책은, 영화 아니고 책인데도 얘기할 거라고 미리 공지를 드립니다.

아무튼. 네. 이것이 현재로서의 대략적인 “아임 드리밍” 스케줄 계획이고요, 이번 시즌에서는 한 에피소드의 끝에 다음 에피소드에서 얘기할 거 공지하고 있으니까, 앞서 설명한 내용이 복잡스럽다. 뭔 말이냐, 하시는 분들은, 앞선 내용 다 무시하셔도 되고요, 그냥 에피소드 끝에 나오는 공지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다시 <우회>로 돌아가 볼게요. 네이버에 나온 소개부터 읽겠습니다.

“뉴욕 변두리 바의 피아니스트 알은 그곳에서 일하는 가수 수와 사랑하는 사이다. 수가 스타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할리우드로 떠나자, 알은 그녀의 뒤를 따라 LA로 가기로 결심한다. 간신히 숙식비만 해결할 돈을 지니고 히치하이킹으로 뉴욕에서 LA로 가던 그는 도박꾼 찰스 해스켈 주니어의 차에 동승하게 된다. LA로 향하던 중 지병이 있던 찰스가 갑자기 사망하고, 살인죄를 뒤집어쓸까 두려워 알은 찰스의 시체를 숨기고 그의 차와 소지품을 훔쳐 찰스의 행세를 하게 된다. LA로 향하던 중 주유소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던 여자 베라를 태운 알은 베라가 이전에 찰스의 차에 얻어 탔던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베라는 알의 정체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해 함께 LA로 향하고, 둘은 부부 행세를 하며 아파트를 얻고 차를 팔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베라는 찰스의 부유한 아버지가 지병으로 생사를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알을 부추겨 찰스의 아버지가 죽은 뒤 남긴 유산을 가로채자는 제안을 한다. 갈등에 휩싸인 알은 베라의 제안을 거부하고, 격분한 베라가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소동을 벌이는 와중에 우발적으로 그녀를 살해하게 된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다시 히치하이킹으로 뉴욕으로 돌아오던 알은 경찰에 체포된다.”


줄거리만 들어도 필름 누아르스럽죠? 뉴욕과 LA라는 대도시가 나오고, 시체가 나오고, 시체 유기가 나오고, 사기 치는 게 나오고, 경찰은 늘 변두리에서 주인공을 불안하게 하고, 하여간에 절망적이다.

그런데 제가 집중하고 싶은 부분은 그러한 필름 누아르적 요소라기보다는, 또, 이번에도, 또, 한아임은 아마도 영화가 의도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한 것 같다. 마치 지난주의 <Temporada de patos>가 다크 코미디였는데 다크한 건지 코미디인 건지 잘 모르겠었던 것처럼, <우회>를 보고서도… 오히려 우회가 웃겼어요. 코믹했어요.

왜 코믹했느냐하면요, <우회>의 주인공이 사실 <Temporada de patos>의 인물들과 엄청 비슷해요. 장르가 완전히 다른데도 비슷합니다. 어떻게 비슷한가? <우회>의 주인공인 앨은 자기 자신이 어어어어어엄청 불쌍한 인물입니다.

참고로 여러분, 어… 불쌍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지난주에도 설명하려고 노력했는데, “안 불쌍하니까 그만 불쌍해해라, 긍정적으로 살아라, 좋게 생각해라” 이딴 거 아니에요. 정말 그런 태도 아주 큰 문제가 돼요. 제가 명상하면서 느낀 게, 긍정병이 얼마나 문제인 걸 알면서도 제가 얼마나 ‘부정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느낌들을 억누르며 살았나, 그거예요. 엄청 충격이었어요. 저는 호러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잔인한 고어에도 별로 거부감이 없고, 살인이 그 자체로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심지어. 살인할 수도 있지. 맥락이 중요하죠. 누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죽이면 나도 그 사람 죽일 수 있지 않겠어요? 난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죽일 수만 있으면 죽일 것 같아요. 못 죽일 가능성이 높아서 억울한 거지. 살인이 그 자체로 막 엄청 나쁘고, 무슨 막 사람에게 원죄가 있고, 그런 걸 제가 매우 싫어하고 안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명상하면서 억눌려 있던 게 다 나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깜짝 놀랐어요.

즉, 스스로를 불쌍해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쌍해하는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바가 있다는 거지, 여러분이 스스로가 불쌍한데 그걸 억지로 불쌍해하지 말란 뜻은 아니에요. 스스로 불쌍하면, 마음껏 불쌍해하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회>와 <Temporada de patos>의 매우 흡사한 인물, 그러나 전혀 다른 장르가 유의미해집니다.

두 영화 모두에서 인물들은 스스로를 참 불쌍히 여기는데, <우회>에서는 참 객관적으로 봐도 주인공인 앨의 인생이 폭망해요. 앨은 아마 자기가 어쩔 수 없었다고 하겠죠, 자기가 지능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왜냐하면 앨이 차를 얻어탄 해스켈이라는 남자가 죽었을 때, 앨이 신고를 했으면 그냥 그걸로 끝났을 일이에요.

그런데 앨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 내가 신고를 하면 경찰이 나를 의심할 거라고 생각해요. 이게,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앨은 이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앨은 스스로가 불쌍한 사람이니까. 자기는 늘 오해받고, 불쌍하고, 희생자고, 아무도 자기 편이 아니고, 억울하니까.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는 앨의 세상을 만듭니다. 말 그대로 만들어요. 그리고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는 해스켈이 죽은 시점부터 시작한 게 아니에요. 영화의 아주 맨 초반부터 앨은 스스로를 이렇게 봅니다.

그 초반 및 영화 전체 분위기에 대해 얘기해 볼게요. <우회>는 옛날 누아르답게, 내면의 모놀로그가 어마어마합니다. 전형적인 오케스트라 음악도 나와요. 왜, 그, 그 시절 미국 영화의, 현악기가 두드러지는 오케스트라 음악. 그리고 우울해 보이는 우리의 남자 주인공은 중절모에 양복을 입고 있습니다.

흑백이고, 40년대 영화지만, 스토리 구조나 구도 같은 것은 이미 매우 현대적이라고 느껴져요. 90년대까지도 실내 씬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흔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실외로 나오면 스튜디오 롯이 나옵니다. 로케이션 촬영이 아니라, 스튜디오 시설 내에서 촬영한, 그런 점이 좀 옛날옛날합니다. 특히 운전 씬이 나올 때, 배경을 그린, 고런 배경. 야외 씬이 아니고 그려진 풍경 배경이 나옵니다.

또한, 영화 길이가 짧아요. 산뜻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누아르 영화를 보면서 별로 어두컴컴한 느낌을 못 받았을 수 있어요. 최근 10년, 20년간 나온, 뭔가… 배트맨 영화라든지, 그런 영화들을 보면, 어마어마하게 누아르하지 않습니까? 그거… 제가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면서 짤을 봤는데, 배트맨이 리메이크를 거듭할수록 화면이 어두워지는 거예요. 그 점진적인 어두워짐을 모아둔 짤이었는데, 나중에 가면 화면이 너무 어두워져서 배트맨이 아예 안 보여요. 그 지경으로 어두운 영화들이 오히려 21세기에 많은 데다가, 그런 영화들은 길어요. 엄청 길어요. 반면, <우회>는 1시간 8분이에요. 이건 요즘 드라마 1회분도 안 되는 길이입니다. 여러분, <슬기로운 감방생활> 보셨습니까? 저는 너무 재미있게 봤는데, 하나 정말 힘겨웠던 것이, 좀 웃깁니다만, 너무 재밌어서 계속 보고 싶은데, 에피소드가 엄청 길어요. 16부작인데, 한 에피소드가 1시간을 훨씬 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왜, 그, 우리가, 유튜브를 보더라도, 5분짜리 영상이면 “아, 하나만 더 봐야지” 하고 막 10개 보잖아요. 그러면 50분이거든요? 그런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봐요. 반면, <슬기로운 감방생활> 에피소드 하나가 끝나면, 너무 재밌어. 정말 너무 진짜 재밌어서 계속 보고 싶은데, 다음 에피소드가 또 막 70, 80분이야. 그러면 엄두가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쉬다 봐야 했다.

이렇게, 요즘에 쇼츠도 나오고, 초단편 영상물도 등장했지만, 또 다른 극단에는 엄청나게 긴 영상물도 많아서, <우회>는 참, 그에 비하면 산뜻해요.

그리고 대사가 클래식해서 저는 좀. 운치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자, 여기서부터 <우회>의 주인공 앨이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분위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이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에 피아노 치는 장면들이 꽤 나오는데, 피아노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런 장면도 소소하게 즐기실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와중에, 앨은 잘나가는 피아니스트이길 포기했어요. 그렇다고 그럼 지금이 좋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앨은 해스켈의 사망 사건에 엮이기 전에도 항상 얼굴이 꿍했어요. 이 남자 배우분이 약간… 애기 표정 같아요. 제가 느끼기에. 약간 항상 “힝” 요런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인물이.

그런지라, 여자친구인 수가 뉴욕으로부터 캘리포니아로 이사 가서 할리우드에서 잘해보겠다고 하는데, 이 앨 녀석의 반응이 이겁니다. “듣던 중 멍청한 얘기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죠. 뭐 저런 루저가 다 있지? 너가 여기서 살고 싶은 건 알겠는데, 왜 수가 자기 꿈을 말하는데 너 따위가 멍청하대. 누가 멍청하냐. 수가 멍청하냐 너가 멍청하냐.

그런데 더 재밌는 건 수의 반응입니다. 앨이 하도 원래도 꿀꿀하니까, 수가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아요. 수는 자기가 자기 꿈 얘기를 하면 앨이 그것을 헤어지자는 뜻으로 받아들일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수는 헤어지자는 뜻이 아니라고 확실히 말을 합니다.

앨을 보면, 피아노 치는 장면에서, 즉흥 연주도 잘하고, 멍때리고서도 잘 쳐요. 그런데 표정은 맨날 꿀꿀한, 우는 애기 상입니다.

피아노를 잘 치니까 손님이 10불짜리 팁을 주는데, 당시에는 지금의 10불보다 그 가치가 훨씬 컸을 거잖아요. 세 배? 다섯 배?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하여튼 꽤 되겠죠. 그런데 앨이 이럽니다. “나는 무엇인가? 세균이 득실거리는 종이 쪼가리일 뿐인가?” 돈을 보고 세균이 득실거리는 종이 쪼가리라는 겁니다.

이러니까 돈이 없죠. 돈 있었으면 좋겠는데 무의식적으로 돈 무서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앨은 의식적으로도 돈을 경멸해요. 그러니까 돈, 정말 그 표면상의 숫자도 없을뿐더러, 돈이 상징하는 것, 즉,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줘서 그 대가를 받는 것, 그 경험도 하지 못하는 거죠.

이런 녀석입니다, 앨이. 그러다가 이 녀석이 수한테 전화를 합니다. 자기도 로스앤젤레스로 가겠다고. 아무래도 너무 우울했나 봐요. 결혼하고 싶대요, 수랑. 수도 지금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수도 흔쾌히 앨더러 오라고 합니다. 앨이 자기 커리어에 대해 꿍한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앨 같은 사람이 수가 뭐 할 때마다 “멍청한 꿈 꾸지 마라” 하면 수한테 참 안 좋을 것 같은데, 수랑 앨이랑 서로 끌리는 이유가 있겠죠? 자세히는 영화에 안 나옵니다만.

게다가, 여담으로, 제가 요즘 느끼는 게 뭐냐면. 이게, 끌리는데 안 끌리는 척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뭔가 둘이 결핍의 결이 비슷하니까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 “그 남자가 그 남자다,” “그 여자가 그 여자다,” 혹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류의 말이, 그냥 포기한 멘트가 아니라, 진짜 그런 것 같아요. 내가 나인 이상,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이 다 그 사람이다. 하여간에 수가 앨더러 엘에이로 오라고 한다.

그리하여, 돈 없는 앨은 히치하이킹을 해서 서쪽으로 향합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이런 얘기를 해요. “Money, the stuff you have never enough of.” 돈. 절대 충분하지 않은 그것.

이런 종류의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몰라요. 맨날 이런 말을 하니까 돈이 있다가도 도망가겠어요. 여기서 또 중요한 건, 그렇다고 말을 참으라는 게 아니에요. 말을 참으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어차피 속으로 생각할 텐데. 앨이 이 말을 참는다고 해서 돈도 주변인도 이걸 모르는 게 아니에요, 절대로.

이것도, 또. 기승전 명상인 요즘에 얽힌 여담인데. 흔히들 겉으로 웃고 잘 지내면 모를 거라고 생각하잖요? 표면적으로는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표면 아래에서는 다 압니다. 이걸 촉이라고도 하고 육감이라고도 하고 무의식이 연결되어 있다고도 하고, 그에 대한 설명도 다양해요. 진화를 하면서 우리는 촉이 발달했다고도 하고, 융 스타일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도 하고, 영성적으로도, 하여간에 다양해요. 어떤 단어를 붙이든, 어떤 설명을 붙이든, 저는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요, 진실이 그러하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겉으로 말을 안 해도, 다 알게 돼요. 그리고 자기가 A라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여기더라도, 다른 발언들과 행동들을 통해 그 A는 반드시 드러나더라고요. 왜냐하면 A라는 그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면, 그것이 내 존재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생각만 하든 말을 하든 행동을 하든, 어쨌든 존재 자체에 A가 있어요.

이에 관해 흥미로운 건, 사실상 앨이 남한테 돈에 관해 불평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에요. 우리가 관객이라서 그의 혼잣말을 듣는 겁니다. 내레이션을 듣는 거예요. 앨이 자기한테 팁 준 손님한테 불평한 게 아니고, 히치하이킹하면서 돈 없다고 불평한 게 아니고, 속으로 생각만 해도, 표정으로 드러난다. 심지어 표정을 아주 잘 숨겨도 결국에는 드러난다. 너무 깊은 믿음이라. 오히려 표정이나 행동, 말을 앨이 잘 숨기면 숨길수록 더욱더욱 괴로울걸요? 그나마 앨이 돈을 무의식적으로 경멸하고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대놓고, 속으로나마 불평불만을 하기 때문에 이 정도로 살아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더 억눌렀으면 더한 일이 생겼을 것 같아요.

 이게 비단 픽션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더라는 게 저의 요즘 생각입니다.

앨은 자기가 매우 운이 안 좋다고 여기고 있어요. 다행히 의식적으로 알고 있기에 망정이지, 무의식적이었으면 아마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의식적으로 알고 있어도 별로 소용은 없다. 왜냐하면, 계속 그 상태에 대해 저항하고 있으니까. 말로 “나는 운이 없어”라고 말한다고 해서 “운이 없는 나”를 받아들이는 건 아니니까요. 그냥 계속 울상 애기 표정 지으면서 그러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잠깐. 여러분? 만약 이 에피소드가 마음에 드셔서 계속 듣고 계시다면, 아임 드리밍에 별점을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아무튼, 이리하여, 이 운 나쁘고 돈 없는 울상 베이비 앨은 히치하이킹을 하다가 해스켈을 만나게 되고, 해스켈이 갑자기 죽자, 자기가 경찰에 신고를 하면 살인범으로 오해받을 거라고 여깁니다. 자신이 해스켈과 함께 있는 걸 본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게 그 이유인데, 이게 참 신기해요. 저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 특정 경우에는. “그 많은 증인들이 나와 해스켈이 사이좋게 밥 먹는 걸 봤다. 우리가 서로 싸울 일이 전혀 없다는 걸 사람들이 증언해 줄 거다.” 게다가 해스켈이 솔직히 좀. 사람이 싸해요. 양아치고. 여자 깔보고.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그 건들건들 거리는 꼴도 많은 사람이 봤단 말이죠. 반면에 앨은,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만큼 겉으로도 불쌍해요. 맨날 울상 애기처럼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앨 같은 사람은 해스켈 같은 사람을 못 죽였을 것이다”라고 오히려 증언해 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따라서, 앨에게는 자신의 그 믿음이 바로 자신의 세상인 겁니다. 그렇게 시체를 유기하고, 차를 훔치고, 해스켈 행세를 합니다. 그 와중에 그런데 참 재밌는 건, 베라에게 차를 태워주겠다고 한 게 앨 본인이었다는 점이에요. 베라가 태워달라고 묻지도 않았어요. 앨이 베라를 보고 굳이 태워주겠다고 한 거예요. 그랬다가 나중에야 베라의 술수에 걸려들어서 다른 범죄들을 저지르네 마네 하게 되는 건데, 처음에는 베라가 전혀 술수를 걸지 않았어요.

이게 참. 어떤 이는 이것이 플롯상 너무 이상하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앨의 캐릭터를 잘 뜯어보면, 그리고 현실의 실제 삶이라는 것들을 관찰해보면, 또한, 심지어 영성적으로, 앨이 이럴 수밖에 없어요. 자신이 굉장히 불쌍한 앨은, 마찬가지로 불쌍하게 히치하이킹하는 차를 기다리는 듯한 베라를 태워준 거예요. 이게. 요 장면. 영화 보실 분들, 한번 눈여겨서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대체. 살인 혐의 쓸까 봐 겁에 질렸다던 앨 같은 사람이 왜 베라처럼 생판 모르는 여자를 태워준다고 했을까?

불쌍하니까. 앨의 온 세상이 불쌍불쌍 또 불쌍하니까. 아무튼 이리하여, 이 에피소드의 초반에 읽어드렸던 영화의 줄거리대로 영화는 펼쳐집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앨은 우연이라고 하지만요.

앨이 이렇게 말해요.

“나 같은 사람한테 운이란 이런 거지. 하필 저 여자를 태우게 된 거야. 헬렌이나 메리나 에블린이나 루스일 수도 있었는데, 하필 내가 절대 만나선 안 될 사람을 태운 거야. 그게 인생이지. 어느 쪽으로 돌든, 운명이 엿을 먹이는구나.”

이런 믿음이 너어어어어어무 깊어요, 앨이.

자, 여기서 또 강조할게요. 앨을 나무라자는 게 아니에요. 앨의 세상이 너무 불쌍하고 운이 나빠서 이렇게 펼쳐졌다면, 한아임의 세상은 어떻길래 <우회>라는 영화를 보고 하필 이런 면을 관찰하게 될까?

일단, 기승전 명상은 아실 거고, 저도 이 앨과 같은 면이 있는 거예요. 이래서 픽션이 좋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 속사정까지 다 알 순 없어요. 아무리 끝도 없이 얘기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픽션은, 일단 인물이 있고, 그 한 겹 뒤에 픽션을 만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장담컨대 논픽션에서보다 픽션에서 천만 배 솔직해요. 이게 무슨 1대 1로, 어… “이야기에 피아니스트인 주인공이 나오면 사실 한아임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거다” 이런 건 아니에요. 그리고 이야기에는 항상 주인공과 주인공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때문에, 양면이 있어요, 언제나. 그것이 픽션의 아름다운 점 아닙니까? 그래서 픽션에는 저의 모든 게 있는데, 동시에 저는 아무 데에도 없어요. 뭐랄까, 저라고 할 만한 것이 엄청 많지만, 또한 제가 딱 ‘나’라는 것으로 살 때의 뭔가, 나는 여자다, 나는 키가 작은 편이다, 나는 이러이러한 일을 한다, 그런 게 없어요. 픽션에는 모든 것인 ‘나’가 있되, 거기 어딘가에 도저히 현실에서 펼쳐지는 인간관계에서는 자잘하게 알 수 없는 속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픽션도 그렇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꼭 작가를 찾으려고 한다기보다는, 어쨌든 간에 한 사람, 혹은 한 사람의 감독하에 이루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현실보다 훨씬 질서정연한 기승전결로 전후관계를 관찰할 수 있으며, 따라서 내 삶의 이야기를 관찰하는 데에 무한한 도움을 줍니다.

물론, 현실에서 펼쳐지는 인간관계에는 또한 픽션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죠. 어느 쪽이 더 낫다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있고 픽션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있는데, 현실을 매우 우월하다고 여기는 경우, 아니면 심지어 현실과 픽션이 아예 동떨어져 있어서 전혀 서로 왕래가 없다고 여기는 경우, 얻을 수 있는 걸 못 얻는다는 얘기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앨을 나무라자는 게 아니고요. 앨은 앨이고, 이런 측면, 흔하지 않습니까? 돈 없어서 불쌍한 나. 그러면서 돈 천대하고. ‘나는 운이 나빠.’ 이건 그리고, 자기 자신만 알아요. 겉으로 아무리 긍정적이어도 상관없습니다. 자기만 알아요. 내가 정말로 운이 나쁘다고 여기는지 아닌지.

그리고 제가 가장 슬프게 여긴 앨의 대사는 이거였어요. 베라를 태운 앨이 엘에이에 도착하며 하는 내레이션입니다.

“몇 시간 후 우리는 할리우드에 다다랐다. 나는 수가 편지에 쓴 곳들을 알아보았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여행의 끝에 도달한 게 아니었으며, 내가 처음 길에 나섰을 때보다 수와 나 사이에는 더욱 머나먼 거리가 존재했다.”

이게 너무 충격이지 않습니까? 충격이면서도, 너무 익숙하지 않나요? 저는 익숙한데. 그렇게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면서 노력을 했는데, 결국 처음보다 목표로부터 더 멀어졌더라.

그리고 심지어 여기서 더 나아가요.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으려 애를 쓴다. 그리고 해스켈의 차가 내 앞에 멈추지 않았더라면 내 삶이 어땠을지를 궁금해한다. 하지만 한 가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나는 안다. 언젠가는 내가 멈춰 세우지 않은 차가 나를 데리러 올 거라는 점을. 그래. 운명, 혹은 다른 미스터리한 힘이 당신, 혹은 나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겨냥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멈춰 세우지 않은 차”란 경찰차를 말하는 건데.

이게 참. 앨이. 이 많은 일을 겪고도, 자기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야. 자기는 그냥 해스켈 차를 타는 바람에 재수가 없었다는 거죠.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너무 놀라운데. 만약 이 영화를 1년 전에 봤다면 이런 놀라운 느낌이 들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너무 놀라워요. 그 많은 행위들을 자신이 했는데, 끝까지, 끝까지 자기가 너무너무너무너무 불쌍하더라, 이 앨이라는 사람은.


그런데 사실 오늘의 주제는, 에피소드 제목에 나와 있듯이 “인생의 장르를 골라보자”였어요. 그래서 저번 주의 주인공이었던 <Temporada de patos>를 다시 언급해 보겠습니다.<Temporada>와 <우회>의 주인공들은 공통적으로 스스로가 너어어어어무 불쌍하다.

그리고 여러 번 언급했듯이, 이건 뭔가, 긍정술로 억누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야 관객으로서 이 인물들을 보고 분석할 수 있지만, 사실 이런 분석은, 어, 이것도 여담인데. 정말 안 좋아요. 하. 이론을 아무리 열심히 알려고 노력하고, 실천까지 하고 각종 행동을 다 해도, 끝끝내 분석이 남아 있으면, 절대 이 불쌍함이 용해되지 않더라고요. 저도 아직 분석이 남아 있는데, 저의 자기 위로는, 제가 이걸 알아채고 용해하려고 한 지 얼마 안 됐다는 점이고요. 저는, 어… 10년을 넘게 각종 노력을 했는데, 끝끝내 분석, 그 티끌만 한, 정말, 정말 나 자신도 모르는데 사실 조금만 얘기해 보면 상대방들은 다 알, 그러한 너무 분명한데도 스스로는 알아보기 힘든 그 티끌만 한 분석성을 놓지 못해서, 그래서, 계속, 10년을, 20년을, 똑같은 감정을, 하, 용해하지 못하는, 그런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너무 무서움과 동시에, 이… 이 차이를, 제가 직접 잘하지는 못해도, 이… 분석하는 것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를, 분석적으로는 알겠어요. 아이러니하죠?

분명, 머리로 이해하는 건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피아노를 쳐도 이론 공부도 병행하는 거고, 글 쓰는 사람이 글을 쓸 뿐만 아니라 글에 대한 공부를 하는 거고, 미술 하는 사람이 미술사를 알아보려고 하는 거고, 그런 거죠. 그러나 결국에는 그러한 분석은 남에 대한 거고, 나는 나 자신을 분석 없이 완전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게 안 될 때의 엄청난 그… 파국. 정말 사람 죽어 나가는 파국. 죽지 않는다면, 죽지 못해 사는 파국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분석을 하더라도, 여러분은, 우리 모두 제각각이 스스로에게는, 분석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분석으로 끝나기만 할 거면, 이런 생각을 안 하는 게 나아요. 왜 그, 깨달음을 얻으려고 막 공부하고 뭐 수행하고 아무리 이래봤자, 시골에서 홀로 농사짓는, 이런 분야에 아무 관심이 없는 어떤 농부의 깨달음보다 못할 수가 있다고요. 농부는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깨달았을 수도 있는 거고, 나는 아무리 공부하고 수행해도 머리에 이론만 가득해서, 그 아무 노력도 안 한 사람보다도 못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깨달음이란 대단한 무슨… 무슨 대단한 그런 게 아니고, 살면서 내가 스스로 괴롭지 않은 그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아무리 머리로 공부를 해도, 나는 그 상태에 못 도달할 수도 있고, 전혀 그런 상태에 이론적으로 관심이 없는 농부든, 관료든, 교수든, 하여간에 그런 여러 사람들보다 나는 못 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론 공부는 양날의 검이에요, 어떤 분야든지 간에.

아무튼 그런데, 이 스스로를 불쌍해하는 인물들에게 분명히 공통점이 있는데, <템포라다>에서는 다크 코미디가 되고, <우회>에서는 앨의 인생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주 폭망한단 말이죠. 각종 범죄에 연루되고, 경찰한테 쫓기고, 사랑도 잃고, 직장도 버렸고, 기타 등등.

여기서 이 인물들이 스스로에 대한 불쌍함을 용해할 수 있으면 그게 가장 좋겠죠.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안 될 수 있잖아요? 긍정술로 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내 안에 뭐가 있는지 나도 모르는 경우가 많고, 어차피 파고 파면 계속 나와요.

그렇다면 이 끝나지 않을 과정에서, 우리는 분석적으로나마, 좀, 반창고스럽긴 하지만, 일단은 좀 응급처치스럽게나마, 어떻게 하면 좀 더 <템포라다>스럽고 덜 <우회>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왜냐하면, 솔직히, <우회>에서처럼 경찰에 쫓기면, 내가 정말로 불쌍한 건지, 아니면 불쌍하다고 착각해서 이렇게 세상이 나를 엿 먹이는 건지, 점점 더 분간이 어려워질 것 같거든요. 점점 더 억울하다는 게 실체를 갖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겠죠.

물론 이것도 약간 양날의 검이에요. 왜냐하면, 너무 살 만하면, 문제가 없다고 여기기 쉽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우회>처럼 폭망하는 게 스스로 자기가 살던 패턴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는데, 그러나, 하필이면 장르가 필름 누아르에서, 여기 무슨 갱생이 있어요. <슬기로운 감방생활>에는 갱생이 있지만, 필름 누아르는 장르적으로, 갱생이 불가합니다. 아예 이 장르에서는 갱생이 옵션이 아니에요.

반면, <템포라다>는, 살 만하긴 해서 문제가 없다고 여기며 살기도 쉽지만, 마찬가지로, 자기가 자기 틀에서 나와서 용해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일단 용해하고 나면, 수월하게 살 수 있어요, 주관적으로도 그렇고 객관적으로도 그렇고.

이렇게. <템포라다>와 <우회>의 주인공들은 다들 자기가 불쌍하지만, 차이는 장르다. 도저히 갱생도 불가하고 너무 암울해서 “이건 객관적으로 좀 너무 불쌍하지 않나?” 싶은 필름 누아르 같은 장르에 들어온 이상은, 참 진짜, 그냥 불쌍하다고 스스로를 여기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가는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인물들과 우리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이론적으로나마 한 이상, 우리 삶의 장르를 어느 정도 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니라고 하실 분들을 위해서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아니라고 하실 분들 계실 거예요. 진짜로다가 신분제도가 있는 지역들이 지금도 있고, 정말로다가 성별, 종교, 기타 등등에 따라 사살당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정 사건이 벌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특정 장르가 되는 게 아니에요. 시체에 얽힌 사건들이 좋은 예시입니다. 시체가 나오는 그 자체로 아무 장르적 must가 없어요. 시체가 나오는 장르는 엄청 많아요. 탐정 장르일 수도 있고, 누아르일 수도 있고, 심지어 코미디일 수도 있어요. 아니면 가족 드라마일 수도 있고, 로맨스일 수도 있습니다. 시체가 나온다고 해서 “꼭 이 장르여야만 해”라는 룰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 마치 꼭 “이 방향이어야만 해”라고 믿는 경우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시험에서 낙방했다고 하면, 그것이… 시험을 잘 보고 싶었던 이상, 그 낙방이 실패인 건 맞아요. 그걸 긍정술로 “이것은 실패가 아니야”라고 한다든지, “슬프지 않아”라고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부인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특정 사건은 사건인데, 장르는 선택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슬프고 비참하고 수치스럽고 짜증 나고 억울한 가운데에서도, 어떤 사람들한테는 그게 뭔가… 청춘 드라마라서, “괜찮아, 또 시도해만 되지!”가 되는 거고, 어떤 사람들한테는 그게 <스카이 캐슬>처럼 성적 때문에 정말… 죽고 죽이는 듯한, 어… 제가 스카이 캐슬을 다 보진 않았는데, 죽일 듯이 그러더라고요, 공부 갖고. 그런 장르가 되는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걸 안다고 해서, <스카이 캐슬> 속에 있는 청소년이, 학교며 부모며 친구들이라는 지금까지의 환경을 다 넘어서서, 갑자기 샤방샤방한 청춘 드라마의 평행 현실로 옮겨타기는 힘들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 이걸 알기만 해도 도움이 됩니다. 이 가능성만 알아도. 즉, 이… 내가 지금 성적 때문에 죽을 것 같은 이 상황이, 이 상황 자체로서는, 즉, 맥락 없이는, 아무… 아무 좋고 나쁨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어떤 이야기 속에서는 학교 공부 성적이 바닥을 쳐서, 부모가 싫어하는, 뭐, 모르겠어요, 공부하라는 부모면 기술 배우는 거 싫어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기술을 배웠어. 그런데 마침 AI 시대가 도래해서 화이트칼라 직종의 90%가 말살됐어. 그러면 기술 배운 내가 공부 잘하던 내 친구들보다 생존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떼부자가 될 수도 있잖아요.

즉, 내가 학교 공부 성적이 바닥을 쳐서 스스로가 아주 불쌍한 와중에도, 이야기의 장르를 선택한다는 생각을 이론적으로라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지금껏 고려해 보지 않았던 가능성이 보일 수 있지 않나, 하는 겁니다. 내가 계속 성적 때문에 죽을 듯한 <스카이 캐슬>에 살 것인가, 아니면 성적 때문에 죽을 것 같긴 한데, 다른 길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SF 미래물에 살 것인가.

제가 느끼기에 요거는 정신승리와 좀 결이 달라요. 성적 때문에 죽고 싶지 않은 척하라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가 이야기를 소비하다 보면 알 수 있죠. 이게 참, 픽션이 그래서 재밌는 건데, 인물이 정신승리로 “나는 SF 미래가 도래할 걸 알기 때문에 나는 걱정하지 않아” 이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그 인물은 진심으로 힘들고, 진심으로 죽을 것 같고, 그걸 다 받아들여요. 그러지 않는 인물은 사실은 그 이야기의 끝까지 가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그러한 장르들이 또 있죠, 그 인물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끝나는. 그런데 대개는, 특히나, 우리가 대중적인 이야기들이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이유가 있어요. 그렇게 변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인물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왜 싫어할까? 안 되는 걸 우리가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알아요. 내 인생에서 내가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거지, 실제 우리가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든, 살아 있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든 픽션 이야기든을 소비할 때 그 주인공이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꼴이 너무, 너무 싫은 거를 사람들이 알아요, 무의식적으로는. 자기 인생에서는 하기 힘들어서 그런 건데.

성적이든 돈이든 연애든 뭐든, 그것들 때문에 힘들지 않은 척하라는 게 아니고, 스스로 불쌍하거나 누구한테 화가 나거나 세상이 경멸스럽거나 하는 걸 억지로 멈추라는 게 아닙니다. 이건 긍정술이 아니에요.

장르를 택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떤 특정 사건이 그 자체로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으니까. 모든 것에는 그 전과 후의 맥락이 있어야 이야기가 전개가 됩니다. 사람의 삶에도, 이 물질세계에서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전후 맥락이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그 전후 맥락의 의미 부여를 내가 원하는 쪽으로 해보자는 겁니다. 정신승리 없이.

후뿐만 아니라 전까지도 내가 의미 부여를 함으로써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이유는, 이야기의 패턴이 정말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스카이 캐슬>류의 이야기에서는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어요.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특정 점수를 받아서 특정 대학에 입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뭐, 죽는 거나 다름없다. 이런 이야기도 있고. 한편으로는 70대가 되어 꿈을 찾는 이야기도 있는 겁니다. 그러면, 만약 그러한 이야기가 100분 영화라고 치면, 70년의 세월은 100분 영화 중 1분도 안 차지해요. 그러나 어차피 삶은 이야기이고, 우리는 우리 세상에 사는 거지, 남이 우리 이야기를 살아주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스카이 캐슬>의 한 학생이 “70대가 꿈을 찾는 이야기”의 노인에게 “당신은 데드라인을 어겼으니 당신의 이야기는 말이 안 된다”라고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 70대 노인은 나머지 99분 동안 어마어마하게 충만한 인생을 살다 갈 수도 있는 겁니다.

아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스카이 캐슬>류의 학생이 입시에 완전히 실패했다고 해볼게요. 성적이 완전히 안 나와서 완전히 망하고, 기술도 못 배워서 SF 시대변화에 탑승하는 것도 실패하고, 하여간에 다 폭망했어. 완전히 망했어. 이 학생이 <스카이 캐슬> 장르에 남아 있으면 확실히 망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70대의 어느 날, 이 학생이 갑자기 장르를 갈아타기로 하면, 그때부터, 정말 갑자기, 물질세계의 시공간 관념으로는 말도 안 되게, 100분 영화에서 99분이나 남은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는 겁니다.

공부를 못해서 스스로 불쌍하고 죽고 싶었던 건 똑같아요. 불쌍해하는 걸 멈추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를 계속 불쌍해하는 바람에, 100분짜리 영화의 50분 이상을 또 스스로 불쌍해하느라 여러 고난과 역경을 겪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인생의 매 시점에서, 언제나, 내 삶의 장르를, 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완전히 가능하다. 나를 아무리 불쌍하게, 운 나쁘게, 보잘것없이 여겨도, 이것은 가능하지 않은가.

그러한 생각을, 참 나. 네. 저도 참. 별생각을 다 하네요. 근데 그렇지 않나요? <우회>의 주인공인 앨이 피아노 바에서 피아노를 치며 자신을 아무리 불쌍하게 여겼다 한들, 그리고 수가 그를 떠났다 한들, 그가 <템포라다> 같은 다크 코미디 장르의 주인공으로 스스로를 정의했더라면, 그 불쌍한 와중에도 일이 이렇게 꼬이진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만약 우리가 우리 삶의 이야기를 쓴다면, 내가 앨일 때, 내가 돈도 없고 운도 나쁘고 사랑도 없고 일도 별로인 앨일 때, 그 모든 요소들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바꾸지 못하더라도, 장르만이라도 좀. 어느 정도 머리로 택할 수 있는 장르만이라도 좀 방향을 잡으면 나중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됐을 때도 좀 편하지 않을까.


이 생각을 하면서 떠오른 말이, 그거예요. 그… 아… 어떤 맥락에서였는지 모르겠는데,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말이었어요. 누가 나를 괴롭히면, “훗, 아무래도 내가 귀여워서인가 보군” 이렇게 생각하라는 거였어요. 요게 언뜻 들으면 정신승리 같을 수 있는데, 그래도 약간 제가 하려는 말과 통합니다. 저는 약간… 이 말을 듣고… 일본 애니가 떠올랐는데, 실제로 이 말이 일본 애니와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일본 애니 중에 학원물 같은 걸 보면, 막 엄청 시끄럽게 치고받고 싸우는데, 그 와중에 약간 무슨… 꼭 안경 쓴 선배 캐릭터? 이런 사람이 나와서 “야레야레” 이러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이 상황을 그… 특유의 병맛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찾아보니까 “야레야레”는 “저런저런” 같은 뜻이래요.

그러니까 아무리 엿 같은 상황이 있어도, 캐릭터가 빡을 치면서도, 장르가 일본 애니인지라, “야레야레”로 마무리가 되는 거예요. 반면, 똑같은 상황이 발생해도, <타인은 지옥이다> 같은 완전 생호러가 될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느끼기에는, 상황이 개떡 같은데 그것을 안 개떡이라고 여기게 되는 데에는 좀. 노하우가 쌓여야 되는 것 같아요. 자기 존재 자체를 바꿔야 개떡 같은 상황이 안 생기거나, 개떡을 봤을 때 그게 개떡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는 듯하더라고요. 저의 제한적인, 얼마 안 된 경험으로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를 사랑으로 채우는 과정에서, 반창고스럽게나마, 아무리 개떡 같아도, “야레야레” 권법을 써서. 좀. 음. 내가 피아노를 잘 침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피아니스트여도, 야레야레로 넘어갈 수도 있는 거고, <우회>처럼 폭망할 수도 있지 않은가. 오히려 야레야레로 넘어감으로써 내가 굉장히 힘들고, 너무 비참하고 너무 싫다는 걸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무래도 경찰에 끌려가지 않는 편이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를 바꾸는 데에 좀 더 유리하지 않을까? 자신을 들여다보려면 사색의 시간이 필요한데, 감옥에서 쉬울 것 같지 않거든요. 야레야레 권법도 물론 반창고일 뿐이지,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약간은 좀 시간을 버는 것뿐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물질세계에서 시간을 벌면 좋으니까요. 우리가 영원히 사는 건 아니니까. 시간을 번다는 게 그 자체로 의의가 있지 않나?

네. 야레야레. 하. 저는 일본 애니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닌데, 이 야레야레와 그에 동반된 특유의 성우 목소리. 항상 안경 끼고 교복 입은 선배. 그… 일본 문화 특유의 영원한 고교 생활의 느낌. 그리하여 그 스트레스풀하긴 하지만 안전한 틀에서의 고교 학원물의 그… 느낌적 느낌. 그게 떠오르네요.

음… 저는 제가 스스로 여기기에, 제 삶의 장르를 에픽 판타지라고 생각합니다. 에픽 판타지는 흔히, <반지의 제왕> 류의, 엘프 나오고 오크 나오는 판타지로 쓰는 단어입니다만, 제 경우에는 좀 더 literal하게 씁니다. 에픽, 엄청 길고 거대한 스토리 요소. 그리고 판타지, 환상. 꼭 마법 나오고 이세계 나오고 그런 게 아니더라도, 환상적인. 그렇게 저의 삶의 장르를 보고 있습니다. 거대한 환상 이야기. 그래서, 어…

하루하루에는 엿 같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앨을 보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울상 베이비페이스, 앨 님. 힝힝. 나는 피아노 잘 치는데 이렇게 팁이나 받으면서 일하지.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에요. 실제로 극 중에서, 피아노를 잘 치는 역할로 나오니까 손님이 감명받고 팁을 주는 장면을 넣었다고 보여지거든요. 앨도 에픽 판타지를 택했더라면, <우회>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또 다른 100분짜리 영화의 초반 5분을 채 차지하지 않는, 말 그대로 우회, 잠시 돌아가는 사건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앨은 필름 누아르를 택했고, 그래서 본인이 망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내지는, 앨은 자기가 선택권이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권이 없다고 생각할 때 정말 선택권이 없나?

아무튼, 한아임은 에픽 판타지. 거대 환상 이야기를 택하는 바람에, 아임 드리밍도, 범고래출판사에서 하는 번역도, 고막사람도, 기승전 명상도, 영어 필명으로 하는 것도, 지금 사는 곳도, 앞으로 살 곳도, 앞으로 만날 모든 사람도, 앞으로 할 모든 일도 그 어마무시하고 장난 아닌 거대 환상 이야기의 일부일 거라, 이 말입니다. 쩔죠?

음. 뭔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네.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얘기할 영화, <히 워키드 바이 나이트>입니다. 제가 일부러 이렇게 발음하는 게 아니고요, 네이버 영화에 딱 이렇게 제목이 나와 있더라고요. <He Walked by Night>를 아주 정직하게 읽었다. <히 워키드 바이 나이트>. 번역하기가 애매하네요. <그는 밤에 걸어 다녔다>. 하면 그… walk의 느낌이 안 사니까요. 그냥 걸어 다닌 것 같잖아요, 룰루랄라, 어슬렁어슬렁. 그런데 실상은, 이 영화도 아주 고전적인 필름 누아르이고, 사람 죽이고, 막 총 쏘고, 그런 영화입니다. 79분짜리 영화예요. 아, 깔끔하다. 옛날 영화의 좋은 점 중 하나입니다. 각자의 거주 국가에서 관람 가능한 플랫폼을 찾아서 봐봅시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Ella Daniel – Make This Love Last – Instrumental Version
  • Ziv Grinberg – A Scary Ferris Wheel Ride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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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한아임

소개

✨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