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 수다의 씨앗, <스타 탄생>입니다.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 언급이 되긴 하지만, 전혀 안 누아르인, 샤방샤방 상큼하기 짝이 없는, 1937년 영화입니다. 장르로 치자면 로맨틱 코미디 내지는 로맨스와 성장 드라마가 섞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시골의 한 처자가 할리우드에서 성공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홀로 대도시로 향하고는, 각종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성공을 하는데, 그 성공의 기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마침 어떤 남자고, 그 남자랑 결혼도 하고, 그 남자랑 잠깐 잘 살다가, 자, 여기서 가장 큰 스포일러 갑니다. 바로 가요 스포일러. 스포일러, 자, 그 남자가 죽어요. 그 남자가 자살해서 죽어요. 그래서 이전까지는 로맨틱 코미디 같았거든요. 슬랩스틱에 가까운 장면도 나옵니다. 그런데 후반부에 갑자기 남자 배우가 죽으니까 좀… 진지한 로맨스 분위기가 나오다가, 끝에 가서는 고전적인 성장 드라마적 마무리로, 우리의 여자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성공한 배우로서 빛을 뿜는 장면으로 막을 내리는, 그런 영화입니다. 뭐랄까,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나는 배우다’ 하면서 끝납니다. 천생 배우.
이 영화는 <우회> 같은 흑백 영화보다 더 이전 영화인데, 오히려 컬러예요. 오프닝 크레딧에 “테크니컬러로 만들었다!”라고 몹시 뿌듯해하는 듯한 문구가 휘황찬란하게 등장합니다.
그래서 한아임은 영화를 보면서 기분이 참 좋았다. 하. 역시 컬러란. 흑백 영화도 멋있긴 하지만, 컬러란. 특히 이 영화의 컬러는 꽤 과장되었어요. 실제보다 더 반짝이고,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답다. 이 주인공 캐릭터의 샤방샤방함과 성장 드라마라는 서사 특징상,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특히나, 할리우드잖아요? 다른 어느 업계에서 펼쳐지는 성장 드라마가 아니라, 할리우드다. 동네 자체가 업계명이 되어 버린, 할리우드. 시네마 하면 할리우드.
성인이 주인공이 되는 성장 드라마 이야기가 요즘엔 안 나오는 것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 성인이 되어서 뭔가… 요즘 시대에, 2023년에, 예전처럼 성장할 수가 없지 않나요? 이상하게 아이러니한데, 수명은 길어지되 건강 수명은 그대로이면서, 또한 사실 성장을 잘 못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저는 듭니다. 기술이 발달했으니 성장할 사람들은 성장을 하기도 하지만, 또한 그 사람들이 다 남아 있잖아요. 그래서 자리가 없는 것 같아요, 어느 정도는.
반면 <스타 탄생>은 1937년 영화잖아요. 거의 100년 된 영화인데, 이 당시엔 정말, 말 그대로의 성장이 얼마나 비교적 쉽게 가능했을까? 일단 자리가 많잖아요. 그냥 객관적으로. 이 세상에 아직 미정인 자리가 너무나 많아서, 심지어 남의 땅에 쳐들어 와서 빼앗은 게 미국이잖아요. 지금도 미국은 어린 국가인데 이때는 얼마나 더 어렸어요. 미국의 어느 다른 지방에 살다가 서부에 간다는 건, 뭐랄까, 이 당시에 전기도 있고 차도 있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개척’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게다가 이 시대는 어딘가 먼 데로 이사를 가면 연락이 끊기는 게 매우 가능했던 시기이기도 하고, 내가 잠적하려고 하면 CCTV가 곳곳에서 나를 지켜보지도 않으니 충분히 가능하며, 내가 만약 다른 아이덴티티를 만들고 싶어 하면 그것 역시 상당히 가능한 시대였단 말이죠.
실제로 “스타 탄생”이라는 이 영화의 플롯 내에서, 우리의 주인공이 배우로 데뷔를 할 때 예명을 짓는 장면이 나와요. 그리고 예명만 짓는 게 아니라, 성장 배경 스토리 자체를 이제, 그, 기사로 내려고, 그 스토리를 씁니다. 그런데 이게, 완전히 없는 얘기를 지어내는 건 아닌데, 지어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이야기에 장식을 많이 해요. 왜냐하면, 누가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 걍 지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할리우드란 정말… 전반적인 시대상도 그렇고, 특히나 할리우드라는 업계에서, 얼마나 성장이라는 게 가능했던 건가. 여기에 이 주인공이 배우가 되려고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경쟁률이 높다는 얘기가 나오긴 하는데, 그래봤자. 그래봤자 지금 같겠어요? 지금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할리우드가 반짝이는 이유 중 하나가, 사람이 없어서입니다. 일단 사람이 없어서 거리가 깨끗하고요, 사람이 없기에 바로 그 깨끗한 거리가 반짝거릴 공간적 여유가 있어요. 아무리 깨끗하고 반짝여도 사람들이 다 가리고 있으면 그걸 못 보잖아요. 그런데 매우 잘 보여요. 그래서 영화에서 주인공이 할리우드 거리로 가서 그… 바닥에 스타들의 이름이 새겨진 거리 있잖아요. 거기를 주인공이 관광하러 가는데, 어찌나 거리가 깨끗하고 반짝이는지.
그리고 이 주인공이 지낼 스튜디오 아파트를 빌리는데, 1주일에 얼마라고 나오는지 아세요? 일주일에 무려 단돈 6불이 든대요. 와우. 정말. 상상을 못 하겠다 정말.
하여간에 주인공이 처음에 할리우드로 와서 일단 엑스트라로 일하려고 하는데, 일자리가 없대요. 그 사실을 스튜디오의 비서가 꽤나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스타가 될 확률은 1만분의 1의 확률이라고 알려줘요.
그런데 저는 이걸 듣고, 저도 참 미쳤는지, 1만분의 1이면 괜찮은데? 생각했습니다. 그 정도면 어… 해볼 만하다. 이런 시대였단 말이죠. 할리우드 스타 되는 데 1만분의 1이라는 매우 가능한 확률의 이기는 쪽에 서면 된다니. 해볼 만하다.
심지어, 일단 되잖아요? 일단 스튜디오에 들어가잖아요? 그러면 스튜디오에서 다 해주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 주인공도 일단 발을 들여놓고 난 후에는 스튜디오에서 아까 말한 그 예명 정하기, 기사 내주기, 그밖에 자세와 발성 교육, 메이크업 스타일까지 다 정해줍니다. 스튜디오가 기획사이던 시절이에요. 일단 들어가면 다 해준다. 그러니까 정말… 물론 2023년에는 2023년의 강점이 있습니다만, 1937년은 ‘성장’이라는 것이 너무나 물리적으로 수월하게 가능했던 시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자리가 많더라. 그래서 저절로 깨끗하고 반짝이며, 그 깨끗한 반짝임이 보일 공간마저 있더라.
근데 그건 그렇고요. 오늘 원래 하고 싶었던 얘기는 뭐냐면, 배우라는 직업 자체에 대한 얘기입니다. 이러한 장르가 아예 따로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은데, 장르 이름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크게 보면 메타 장르? 그러니까, 무언가에 대한 장르라고 볼 수 있는데, 제가 말하는 건, 음… 아무 무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말하는 겁니다. 메타 영화라고 그냥 부르면 되나?
하여간에 요 장르. 스타에 대한 영화에 스타가 출연하는 그런 장르. 제가 최근에 본 이러한 장르로는 프랑스 시리즈, “Call My Agent!”가 있습니다. 이 영어 제목으로 넷플릭스에 있더라고요. 프랑스 제목은 제가 읽을 수가 없는데 뜻은 “매니저들”인 것 같아요. 말 그대로 매니저 내지는 에이전트들이 자신들의 스타를 매니징 내지는 에이전팅 하면서 펼쳐지는 각종 사건을 담은 시리즈입니다. 저는 매우 재미있게 봤고, 한국에서는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 되었는데, 저는 아마 처음 두 에피소드인가를 봤어요. 여기서 이… 프랑스 시리즈와 한국 리메이크의 싱크로율이 높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한국 리메이크판이 좀 더 코믹 성향이 강한 것 같은데, 이서진 님이 프랑스판 남자 배우분하고 묘하게 겹쳐서 재밌었고요, 서현우 님과 프랑스판 남자 배우분이 너무. 진짜 너무. 너무 많이 겹쳐가지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튼, 이 메타 영화 장르에서 더 메타스럽되 mock-documentary 스타일로 가자면, 한국 영화 중, <여배우들>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게 제가 본 최초의 메타 영화였던 것 같아요. 2009년 영화고요, 윤여정 님이 윤여정 역할로, 이미숙 님이 이미숙 역할로, 고현정 님이 고현정 역할로, 최지우 님이 최지우 역할로, 김민희 님이 김민희 역할로, 김옥빈 님이 김옥빈 역할로 나옵니다. 당시 어린 나이에 막연하게, “아니 이런 서사가 있다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잘 없잖아요, 유명인이 유명인 본인으로 나오는 서사가. 이러한 서사는 그… 이 유명인분들을 알아야만 더해지는 재미가 있잖아요. 즉, 만약 한국 배우계를 잘 모르는 외부인이 본다면, 재미가 별로… 거의 없을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배우의 이미지가 있는데, 그 배우가 영화 내에서 그 배우 역할을 맡으면서 그 이미지에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느냐 등으로 느껴지는 재미를 아마 외부인은 못 느끼겠죠? 그래서 참. 특이한 장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비층이 매우 제한되기 때문에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나 “스타 탄생” 같은 메타물이 더 유리할 것 같아요. “여배우들”과 달리 이 두 메타물은 배우로 등장하는 배우를 잘 몰라도 재밌을 수 있거든요. 왜냐하면, 배우로 등장하는 배우 외의 배우들이 등장해서, 배우 아닌 캐릭터를 연기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프랑스판에 등장하는 배우들을 다 몰라도 재밌었어요. 아는 배우도 있었고 모르는 배우도 있었는데, 이러나저러나 “Call My Agent!” 재밌었습니다.
하여간에, 배우라는 직업. 저는 참 막연하게 배우라는 직업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배우는 직접적으로 서사의 특정 인물이 되는 직업이잖아요. 그러니까, 감독이나 제작자나 시나리오 작가나 소설 작가나 만화 스토리 작가나 만화 그림 작가 등의, 이야기 전체의 각종 인물에 개입하는 직업과는 너무 다르게 느껴지는 거예요.
소설 작가는, 그래 뭐, 내가 작가고, 각 인물이고, 스토리라인이고, 스토리 배경이며, 소설 그 자체다. 그러면 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겁니다. 재밌죠, 뭐. 재밌는데, 그… 그 부분 중 어느 것도 나 아닌 것이 없으면서 그 부분 중 하나도 내가 아니라는 느낌이 있거든요? 왜냐면 이게, 아무리 소설에 작가 스타일이 묻어난다고 해도, 소설이 곧 작가가 할 말이 되어 버리면, 그건 소설이 아니게 되잖아요. 우화가 될 순 있겠죠. 그런데 현대적 의미에서의 소설, 작가 바깥에 존재할 수 있는 창작물은 될 수 없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소설은 작가이면서도 결코 작가일 수 없습니다.
제가 외부인으로서 관찰하기에는 영화감독도 제작자도, 그리고 소설 외의 다른 종류의 서사를 쓰는 작가도,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리 영화감독이 자기 스타일이 있어도, 그렇다고 해서 다 자기 얘기만 해버리면, 그건 아무리 재밌고 잘 만들었어도 영화감독은 아닌 다른 무언가라고 생각이 들어요. 꼭 허구의 이야기여야 하는 건 아닙니다. 다큐멘터리 감독들도 있잖아요.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허구가 아닌 사실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감독이라고 하죠. 반면, 아무리 긴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해도, 그걸 찍었다고 감독이라고 부르진 않고, 창작물이긴 한데, 뭔가 결이 다르다.
뭔가… 이게 무슨 차이지? 저도 그냥 이게 느낌상의 차이인지 모르겠는데, 왜 그… 아까 말한 그 차이인가? “현대적 의미에서의 소설, 작가 바깥에 존재할 수 있는 창작물”이라고 했는데, 영화도 “현대적 의미에서의 영화, 감독 바깥에 존재할 수 있는 창작물”이라는 게 차이인가? “스타 탄생” 같은 영화는 이 영화의 감독 바깥에 존재할 수 있는 창작물이지만, 인스타그램 라이브는 그 계정주와 분리할 수 없다. 이 차이인가? 그렇다고 인스타그램 라이브 하기가 쉽다는 건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이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결이 다르다는 거죠. 인스타그램 라이브가 콘텐츠이며 창작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것을 함으로써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작가나 감독이 되진 않는다. 그것은 왜인가? 그냥 느낌인가? 그냥 굳어진 관념인가? 관습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바깥에 존재할 수 있는 창작물”이냐 아니냐가 호칭을 가르는가?
음… 아무튼. 일반적으로는 감독이 죽든, 감독이 감옥에 가든, 하여간에 감독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든, 영화는 그 자체로 남습니다. 그 자체로 생명을 갖고 남습니다. 이렇게 창작자와 창작물이 분리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창작자는 창작물의 모든 구석구석에 개입한다.
반면 배우는 어떤가? 배우라는 직업은? 그 창작물의 일정 부분을 맡고 있다. 그런데 그 맡는다는 게, 어떻게 보면 감독이 맡을 수 있는 것보다 더 깊고 완전하게 맡고 있어서,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이잖아요. 배우가 자기 역할을 연기하는 동안에는 그 역할 그 자체잖아요. 그런데 동시에 또 그 배우는, 너무 신기한 것이, 그 역할과 정반대되는 역할을 다른 영화에서 맡을 수도 있어요. 반면, 감독은, 혹은 작가는 자기가 완전 환생에 버금가는 재탄생을 겪지 않는 한, 웬만해서는 비슷비슷한 얘기들을 합니다. 그게 감독 스타일, 작가 스타일이라는 거잖아요. 자기가 같은 얘기 하는 줄 몰라도 결국 같은 얘기를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사람을 아예 갈아 끼울 순 없기 때문에. 우리한테 영이 있는 한, 영혼이 있는 한, 그 영혼에서 나오는 거기 때문에, 무슨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 틀을 깰 거야’ 한다고 해서 깨어지는 게 아니거나, 깬다 하더라도 더 큰 틀 내에서 깰 뿐입니다. 예를 들어 로맨스 찍던 감독이 누아르를 찍어도 그 누아르 내에 로맨스가 있고 로맨스에 누아르 요소가 있었을걸요? 그냥 막 갈아 끼우는 게 아니니까.
근데 배우는. 배우들은 대체 어떻게. 어떻게 때문에? 당최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여러 역할을 맡는가?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배우도 연기 스타일이라는 게 있죠. 그리고 배우는 얼굴을 드러내는 직업이니까 갑자기 다른 사람인 척을 못 하죠. 그런데, 참. 이… 사람 얼굴이라는 것도. 그 얼굴 자체로 거의… 거의 의미가 없어요.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람 얼굴을 안다고 생각해도, 그 사람이 평소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으면 딴 사람 같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가끔은 얼굴, 그러니까 이목구비, 그것이 그 사람의 얼굴인지, 아니면 표정, 그러니까 뭔가 동적인 것, 움직이는 근육,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감정이 그 사람인지, 분간이 안 갈 때가 있어요.
그러다가 배우분들 중 휙휙 연기 변신을 파격적으로 하시는 분들을 보면, “아니 저 사람은 내가 아는 그 배우가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아, 사람의 탈은. 이… 이목구비, 키, 몸매, 옷, 이런 것들은 전부 다 허상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은 혼을 갈아 끼웠다. 저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닌데?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면요. 제가 어… 가장 최근에 이걸 강렬하게 느낀 사건이 뭐였냐면요. 여러분? “부부의 세계” 드라마 아시죠? 그걸 제가 초반부를 봤어요. 그런데 거기에 박해준 님이 출연하시는데, 김희애 님의 몹쓸 남편 놈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그걸 초반부를 보는데, 아니 이 박해준 님 캐릭터가. 진짜. 너무 못생긴 거예요. 진짜 무슨 저런 슈방구 같이 생긴 멍청구리가 다 있지? 이러면서 봤어요. 진짜 개떡 같다. 와 캐스팅 진짜 절묘하다. 이랬어요. 그런데 그러다가, 당시 “부부의 세계”가 너무 인기가 많으니까 유튜브에 메이킹 필름이 추천에 뜨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보는데, 이… 저는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박해준 님이 이 몹쓸노무시키 연기를 하시다가 ‘컷!’ 소리가 나자 얼굴이 싹 바뀌시는 거예요. 갑자기. 아니. 너무 잘생겨지시는 거예요. 이건 그냥… 사람이 다른 사람인 거예요. 박해준 님은 박해준 님이고 이 극 중 캐릭터가 전혀 아닌 거예요. 물론 그걸 머리로는 알죠. 그런데 이걸 눈앞에서 보니까. 무슨 마치… 옷 갈아입는 것처럼. 혼이. 몹쓸노무시키로부터 박해준 님으로 돌변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너무 잘생겨지시고, 갑자기. 그래서 아, 이것은. 이것은 대체 어느 경지의 연기인가. 이것은… 그러니까 이분이 소위 말하는 그 못생김이라는 걸 연기하신 거구나. 그냥 이목구비가 못생긴, 그런 거 말고. 진짜 그…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구질구질함. 그걸 연기하신 거예요.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이게 어떻게?
요즘에는 드라마 “악귀”에서 김태리 님이 극 중에서 휙휙 변모를 하신다던데, 제가 악귀를 안 봐가지고. 오정세 님도 다른 드라마에서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다던데. 악귀도 봐야 되는데. 참 나 원.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배우들은 이걸 어떻게?
그리고 이런… 이렇게 메이킹 필름을 만들려면, 이분들은 메소드, 이런 기법을 쓰지 않으시는 분들인 것 같거든요? 메소드 배우이려면 촬영 내내 그 인물 자체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컷’ 하면 바로 본인으로 돌아오고 ‘액션’ 하면 다시 극 중 인물이 될까요?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대체 ‘나’라는 자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쯤에서, 요즘 안 등장하면 섭섭한, 명상 얘기 또 합니다. 늘 그렇듯, 실용적인 얘기만 할게요.
명상을 하면서 제가 불면증이 저절로 사라진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내 걱정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거 흔히 하는 말이잖아요. 나는 내 감정이 아니다. 나는 내 생각이 아니다. 나는 내 관념이 아니다. 근데 이게, 제 경험상으로는, 아무리 말로 들어도, 아무리 머리로 알아도, 마음으로, 즉, 몸으로 느껴내는 거랑은 천지 차이더라고요.
이걸 누가 몰라요. “나는 내 걱정이 아니다.” 누구나 알지. 그러니까 걱정을 해결하려는 거잖아요. 걱정을 해결하면 더는 그 걱정을 하는 내가 아닐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가장 에고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걱정이 내가 아니니까 해결해서 없애려는 거잖아요? 다들 머리로는 압니다. 에고가 가장 잘 알아요, 이건. 안다고 착각을 해요. “내가 이 상황만 벗어나면 더는 이러한 내가 아닐 수 있겠지.”
또한, 그 착각 속에서, “아, 내가 내 걱정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 걱정을 멈춰보자”라는 다짐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게 되느냔 말이죠. 여러분은 되나요? 이게 되는 사람이면 애초에 걱정을 안 할 텐데. 안 되니까 걱정하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걱정을 의지로 멈출 수가 없으니까 걱정을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걱정, 생각, 감정을 누르고 무시하면, 얘네가 내 마음대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속으로 사라집니다. 숨습니다. 저는 이렇게 산 내내 불면증에 시달렸어요. 걱정을 잠깐 잊을 뿐이지, 걱정이 절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걱정이든 생각이든지요. 하나의 생각이 소멸하면 다른 생각이 또 등장했습니다.
근데 명상하면서 알게 됐어요. 없애려고 해서 얘네가 증식해 왔다는 것을. 죽이려고 하니까 살려고 발악을 했던 거예요, 얘네가. 여러분 같으면 안 그렇겠어요? 내가 생각이야. 내가 감정이야. 내가 그냥 이렇게 있어. 그런데 누가, 내 존재 이유만으로 나를 와서 죽이겠대. 그러면 숨겠죠. 그리고 나 죽이려는 자를 나도 죽이고 싶겠죠? 그런 거였더라고요.
즉, 감정이 내가 아니다, 생각이 내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맞는 말인데, 그것은 ‘감정 = 나’는 아니다, ‘생각 = 나’는 아니다라는 뜻인 것이지, 감정과 생각을 부정하라는 뜻이 아니었는데, 저는 그렇게 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는지도 몰랐어요. 왜냐면 저는 올해 명상을 시작하기 전에 이런 분야에 어… 영성 종교 이런 분야에 관심이 딱히 없었거든요. 여러분? 한아임은 굉장히 실용적인 사람입니다. 놀랍게도, 아임 드리밍도 실용적이라서 하는 거예요. 보세요. 아예 태그라인이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잖아요. 이게 실용적이라고 생각을 안 했으면 관심이 없었을 거예요. ‘실용’의 폭이 넓을 뿐이지. 저는 픽션도 실용적이라고 생각해서 쓰고, 소비합니다. 픽션이 쓸데없다는 게 무슨 말인지를 이해를 못 해요. 가짜니까 무용하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합니다. 현실도 가짜예요. 나는 내가 생각하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지금 그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나의 감정도 아니고, 생각도 아닙니다. 나의 몸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게, 감정은 나의 일부가 아니고 생각은 나의 일부가 아니고 몸은 나의 일부가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감정이 나한테 있는 동안엔 당연히 나를 통해 지나가니까 내 속에 있지. 생각도 그렇지. 그리고 몸도 당연히 ‘나’라는 관념 안에 연관 지어졌으니까 나의 일부지. 그런데 수식적으로, 수학적으로, ‘나 = 감정’, ‘나 = 생각’, ‘나 = 몸’은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감정이자 생각이자 몸이고, 무엇보다, 그 너머에 있는 더 큰 무언가니까.
이게 핵심이더라고요, 여러분. 뭐든지, 죽여 없애려고 하면, 걔는 저항을 합니다. 내가 저항하는 만큼 걔도 저항해요. 그런데 내가 감정 생각 몸보다 더 큰 존재가 되잖아요? 그러면 얘네를 죽여 없앨 필요성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얘네는 알아서 녹아요. 감정을 받아들이면 얘가 녹아서 흘러가고, 그 감정에 묶여 있던 생각도 흘러갑니다. 몸도, 내가 몸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서, 이게 마치 감옥인 것처럼 굴면 몸도 그만큼 나를 미워합니다. 그런데 몸에 내가 갇혀 있다는 것만큼 에고적인 패턴이 또 있을까요? 내가 왜 몸에 갇혀 있어. 만약 내가 몸보다 큰 존재라면 몸에 갇혀 있을 수가 없어야 하는 건데, 놀랍게도 도 닦는다는 사람들 중에 몸을 죽여야 한다는 둥, 몸을 벗어나야 한다는 둥, 에고를 죽여야 한다는 둥, 이런 얘기들을 해요.
물론 언어의 한계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 말만 갖고서는 사실 잘 알 수가 없는데, 왜냐면 원체가 언어가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언어로 설명하려다 보니까 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같은 문장을 쓰더라도 그 뜻으로 하는 경우가 아닐 수도 있어요. 그런데, 분명 실제로 에고를 적으로 삼으라는 뜻으로 그 말을 하고, 몸을 적으로 삼으라는 뜻으로 그 말을 하는 소위 도 닦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어… 글쎄요, 그분들이 실제로 그래서 에고를 죽였는지 모르겠는데,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이 듭니다. 내가 거대한 존재면 에고를 죽일 필요가 없어요. 에고 얘 그냥 알아서 서서히 녹던데. 물론 제가 무슨 산에 들어가서 도를 24시간 닦지 않는 한, 여러 사건들이 살면서 또 일어나기 때문에, 에고가 또 저항하려고 합니다. 무슨 이게 감정을 없애는 작업이 아니에요, 명상이. 감정을 아주 생생하게 느끼고 흘려보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감정이 아니니까. 감정이 내 일부였던 적이 없는 게 아니라, 나는 아주 큰 존재라서, 감정 자체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얘네 중 그 누구도 죽일 필요가 없어요. 그냥 두면, 저항하지 않으면, 알아서 얘네도 잘 삽니다.
만약 도를 엄청 계속 닦으면, 에고가 없어진 상태가 될 수도 있겠죠? 이게 뭔가, 소위 말하는 깨달음? 깨어남? 그런 상태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머리로 “에고 죽여야지” “에고는 나빠”라고 결심해서 했다면… 그게 가능한가? 이게, 어… 이런 케이스들이 있긴 한 것 같아요. 뭐냐면, 명상 방석 위에 앉아 있을 때는 한없이 고요하거나 내지는 고요해 보이는데, 사실은 계속 투쟁하고 있는 거고, 그래서 명상 방석만 벗어나면 바로 무너지는 케이스. 흔히 보는, 이론과 삶이 합일되지 못한 케이스. 제가 연초까지 이렇게 명상을 한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삶하고 완전히 별개로 존재하며, 따라서 명상을 하지 않는 순간에는 아예 그냥 무너지는, 이런 케이스들밖에 못 봐가지고 명상, 종교 등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냥 뭔가… 문학적, 미학적 관심에 그쳤었거든요? 제가 과학이나 다른 분야에 대해 갖고 있는 관심하고 똑같았어요. 서사적으로 뭔가 취할 만한 요소가 있나 없나, 이런 관심에 그쳤었어요. 왜냐하면, 마치 일주일 내내 죄짓고 다니다가 일요일에 교회 가서 사죄하면 다 해결되는 줄 아는 패턴과 비슷하게 명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있고요. 그러고서는 막, 명상하면서 깨달았다고 해요. 자기는 에고를 죽였다고. 제일 에고 패턴스러운 말 하면서.
저는 전혀 안 깨달았고요. 제 에고는 건재하고요, 잘 살고요, 건강해요. 저는 전혀 에고를 죽이고 몸을 죽이고 감정을 죽이고 생각을 죽이고, 그런 식으로 깨닫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명상을 최근에야 한 건데,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 명상 방식도 충분히 있다는 걸 참 운 좋게 알게 돼서, 그래서 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안 죽여도 되더라고요. 녹이는 거더라고요. 제 경우에는 말 그대로 뭉친 근육이 녹는 게 몸에서 느껴지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공격할 때, 즉, 분명 감정이 내 안에 있고 생각이 내 안에 있고 몸이 나의 일부인데도 불구하고 걔네를 내가 아니라고 하면서 공격할 때, 몸이 딱 보여줘요. 아주 정확하게. 어떻게 몸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몸은 거짓말을 안 하더라고요. 몸을 아주 충성스러운 동반자로 이용하면 됩니다. 나도 몸을 이용하고 몸도 나를 이용해요.
그렇다면 그러니까 대체 이 ‘나’는 뭔가. ‘나’는, 내가 몸을 이용하려면, 내가 몸뿐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내가 감정 생각을 흘려보내려면, 내가 몸 감정 생각일 뿐일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이 애들보다 훨씬 큰 뭔가예요. 이 뭔가를 저는 어… 제가 뭘 느꼈는지 레이블을 붙일 만한 경험인지는 모르겠어요. 따뜻하고 충만한 느낌입니다. 명상하면서 감정 생각을 죽이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고 나면, 몸에서 빠져나가요. 그리고 몸이 따뜻해지고 찌릿찌릿해져요. 그러면서 모든 것이 온전하고 잘못된 게 하나도 없는 상태가 찾아옵니다. 거기 가려고 해서 그 상태가 오는 게 아니라, 그냥 그게 원래 상태에 가까운 상태인 것 같아요. 이거보다 더 깊고 큰 상태도 있겠죠? 아마 그럴 거예요.
그렇지만 하여간에 그 깊고 큰 상태가 뭐든지 간에, 저는 제가 저를 죽이면서 그리로 가고 싶진 않아요. 아니 애초에, 어딜 가려고 뭘 한다는 것 자체가 가장 에고 패턴적인 거라서, 무슨 말인지… 그게 무슨 말인지 아예 이론 수준에서 머리로도 이해가 안 가요. 목적을 이루고 뭘 쟁취하고 해내고 성장하고—이건 에고의 방식입니다. 잘못된 방식은 아니지만, 에고를 죽인다고 하면서 에고의 방식을 따르는 게 아이러니하다는 거죠. 반대로,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아무것도 쟁취하려고 하지 않고 성장하려고 한 적도 없는데 모든 걸 얻게 되고 가장 실용적이게 되는 것. 요거. 요게 제가 지금 소소하게 겪고 있는 거고요, 그 측면에서 명상과 픽션은 매우 흡사합니다. 픽션도 뭘 얻으려고 쓰면 어… 슈방구가 되는 것 같아요.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지만서도. 일단 쓰는 사람이 픽션을 통해서 뭘 얻으려고 하면 영혼이 망가지는 것 같아요. 하고많은 것 중 픽션을 씀으로써 얻고 싶었던 게 있을 텐데, 여기서 그 ‘얻는다’는 건 어떤 감정 생각 그런 게 아니고, 그… 더 큰 나의 느낌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모든 예술은, 남이 예술이라고 인정하든 말든, 내가 좋아서 하는 게 예술인데, 그래서 삶 자체가 예술일 수 있는 건데, 외적인 것을 얻으려고 하면 슈방구가 되는 것 같아요.
하여튼 다행히 요즘 시대, 2023년에는, 사람들이 뭔가, 완성형만을 찾는 게 아닙니다. 대단한 깨달은 사람들만 발언권을 갖는 게 아니라, 저 같은 신생아도, 그리고 저보다 더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아무나, 아무 말이나 할 수 있어요. 얼마나 다행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것, 뭐, 돈을 많이 버는 것, 좋은 학위를 따는 것,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 이 모든 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 특히나 뭘 누구나 할 수 있냐면, 명상해서 요 정도의 좋은 점은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요. 나라고 여겼던 것들에 얽메이지 않을 정도가 되는 것. 아무리 이걸 특별한 거라고 에고 패턴자들이 우겨도, 그것은 이론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론 자체가, 우리는 사랑과 빛으로부터 왔기 때문이에요. 우리 모두가. 종교도 그렇죠? 예를 들어, 기독교 믿으면, 모두가 하나님 하느님의 자식인 겁니다. 누구 한 명 빼놓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종교 쪽이든, 범종교적인 명상 쪽이든, 깨달음이나 깨어남이나 뭐 거기까지 가는 데에서 겪는 여러 일이 굉장히 특별하다? 나만 좋다? 나만 힘들다? 이렇게 주장하는 경우는 어… 제가 보기엔 그건 사이비예요. 왜냐? 한아임이 그렇다고 말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교리에, 사상에 어긋나니까. 모두가 신의 자식이고, 모두의 안에 신의 왕국이 있고, 모두가 빛과 사랑으로부터 왔으면, 누구나 그 빛과 사랑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거예요. 그냥, 정의 자체가 그러니까요. 뭘 믿으라고 남이 결정해줄 순 없지만, 적어도 자기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의 이 정도로 근본적인 뿌리가 되는 관념은 견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여간에 이… 아임 드리밍은 아주 잡스러운 팟캐스트잖아요? 그래서 제가 여기다 끼워넣는 겁니다. 여기다가 ‘명상 팟캐스트’ 이렇게 붙이면 명상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들어와요. 그러면 불과 몇 달 전의 저 같은 사람들은 이 에고 패턴자들의 예시를 너무 많이 봐가지고 명상에 관심이 없어서 듣고 싶지 않을 수가 있어요.
근데 이거 되게 간단한 거더라고요. 복잡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말 믿기 전에 어떻게 사나 관찰해 보세요. 외부 요소 관찰하라는 게 아니에요. 저 사람이 도 닦아서 돈 잘 버나, 이런 거 보라는 건 아니고요, 자기가 스스로 만족해 보이는지를 관찰해 보면 됩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이든 스스로가 괜찮아 보이는지. 스스로를 죽이려고 드는 게 아니라, 스스로와 괜찮아 보이는지.
이거 불면증자 팟캐스트잖아요. 잠 잘 자고 싶으시면 스스로하고 그만 싸우는 걸 심각하게 고려해 보시길 바랍니다. 세상하고 그만 싸우는 것과 스스로하고 그만 싸우는 게 같더라고요. 나랑 안 싸우면 세상하고 싸울 일도 서서히 줄어듭니다. 근데 이거는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어요. 그러니까, 세상 평안해 보이는 사람이 속에서는 전쟁하고 있을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만 아는 거예요. 겉으로 그 사람이 웃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상과 안 싸우고 있는 건 아닙니다.
요지는, 안 해도 되는 거 괜히 하면서 힘 뺄 필요가 없다. 그 힘 빼던 시간에 실제로 잠을 자게 됩니다.
다시 배우라는 직업으로 돌아가 보자면. 이… ‘나’가 감정 생각이 아니라면. 그리고 몸도 아니라면. 그리고 그것을 별로 안 깊은 수준의 명상, 한아임 수준의 명상으로도 쉽게 몸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거라면, 혹시 어쩌면 우리가 대단한 배우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명상을 하든 하지 않든, 이것을 체화한 사람들인가?
왜냐하면, ‘명상’이라는 레이블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말은 명상인데 에고 패턴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수두룩하다니까요. 차라리 명상을 안 하는 게 나아. 명상을 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진 거예요. 반면, 말로 명상이라고 안 해도 충분히 득도한 듯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배우라는 직업이 혹시 그런 실용적 득도를 요하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 전체가 아닌 이야기의 한 인물이 되되, 그 인물도 됐다가 저 인물도 됐다가 또다시 촬영을 하지 않을 때는 ‘나’라는 인물로 돌아온다는 건, ‘나’가 누군지를 모르면 굉장히 무서울 것 같거든요? 이… 그래서 그런 경우도 있지 않나요? 뭔가 그… 배우인데, 혹은 연예계 전반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와 ‘진짜 나’ 사이의 괴리가 너무 괴로워서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이게 그러니까, 뭔가, 역할을 맡았을 때, 혹은 대중 앞에 설 때의 그 웃는 표정, 혹은 웃는 감정, 예쁜 옷, 완벽한 몸매, 이런 것이… 이런 것이 ‘나’가 아닌데, 그것이 ‘나’인 줄 알았다가 그것이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상당히 공포스러울 것 같거든요.
역할이 늘어날수록, 게다가 다채로워질수록 무서울 것 같아요. 이… 만약 내가 사이코패스 킬러 역할부터 순진한 청년 역할까지 다 맡을 수 있는 배우라면, 그러니까, 거의 모든 감정 생각의 스펙트럼을 다 극 중 역할로 맡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감정 생각의 스펙트럼을 다 빼고, 거기에 어울리는 옷, 메이크업, 헤어스타일, 표정도 다 빼고, 그러고서 남는 ‘나’가 만약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겨진다면, 그러면 정말 공포스러울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모든 것 외에도 ‘나’가 있다는 걸 안다면. 즉, ‘나’는 그런 요소들보다 훨씬 더, 너무 많이 커서, 절대로 내가 어떤 역할을 맡거나 맡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안다면, 그러면 자유롭고 용감할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이, 혹시, 우리가 대단한 배우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느끼는 느낌일까? 합니다.
그런데 음… 다시 “스타 탄생”으로 돌아가 보자면요. 이 영화에서는 우리의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이, 성장 드라마의 과정을 거치는 와중에 미래의 남편을 만난단 말이죠. 이 남자가 유명한 배우예요. 여주인공 남주인공이 만날 당시, 남주인공은 이미 매우 잘나가는 배우다.
그런데 그는 알코올에 중독되었고, 너무나 스타의 삶에 익숙해져서, 평범함이 뭔지를 모르는 듯합니다. 모든 게 다 연기 같고, 과장되었습니다. 모든 게 쇼예요. 그러면서도 할리우드라는 업계 자체를 벗어나고 싶어 해요.
그러다가 여주인공을 만나면서 좀 안정을 찾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점점 저무는 별이 되고, 여자는 떠오르는 별이에요. 그런데 남자가 업계를 떠나고 싶어 했으니, 처음엔 미련이 없는 것 같거든요.
문제는, 이 감정 생각. ‘나는 할리우드에 미련이 없고 업계를 떠나고 싶다.’는 이 감정 생각. 뭔가… 여기에는 진실된 게 없고, 다 가짜였고, 나도 가짜였어, 라는 생각 너머에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어요. 이 남주인공은 업계를 탓하지만, 사실 업계 탓은 아니거든요? 물론 자기가 몸담고 있던 업계를 떠나서, 다른 일을 별달리 하는 게 없다는 건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일이긴 합니다. 스스로가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지겠죠. 그런데 다른 할 일을 하고 싶은 것도 없다는 게 이 사람에게는 큰 문제예요. 그걸 문제로 여기는 자체가 문제예요. 이 사람의 직업은 이제 약간 ‘여자 주인공의 남편’인데, 그걸 이 남자가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남자 아니에요. 지가 관두겠다고 관둬놓고서 자기보다 여자가 잘나가니까 못 견디는, 그런 루저는 아니에요. 하지만 아무 다른 열정이 없으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와중에, 스트레스를 받는 그 자기 자신을 좀 슬프고 한심해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다시 술에 빠지고.
그러니까, 이 사람은 결핍이 큰데, 처음에는 할리우드라는 업계 때문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는 그 업계를 나와서 다른 할 일이 없어서인 줄 알았다가, 술 때문인 줄 알았다가, 뭐 때문인 줄 알았다가, 구구절절 이것 때문일 줄 알았다가, 결국에는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못 견뎌서 자살을 합니다. 이 남자 주인공하고 여자 주인공이 끝까지 서로를 참 사랑했는데, 남자 주인공이 약간… 여자 주인공에게 짐이 될까 봐서, 이 여자가 자기 때문에 지금 막 잘나가려는 커리어를 접으려는 생각을 하니까, 그때 자살하거든요.
그러니까 뭔가, 이 남자는, 어… 굉장히 자기 자신을 찾고 싶어 했는데, ‘나’란 무엇인가를 찾고 싶어 했는데, 할리우드 커리어를 탓하다가, 그걸 관뒀다가, 술을 탓했다가, 결국에는 자기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의미가 이거였던 것 같아요. ‘나는 적어도 내 와이프한테 짐이 되는 남자일 수는 없다. 이 여자 앞길을 막는 남자가 될 순 없다.’ 하고서 죽은 겁니다.
즉, 뭔가… 자기 자신의 실용성? 내가 이러이러하지 않으면 나는 가치가 없다. 이게 굉장히 깊었던 것 같아요.
평생을 ‘너는 이것이다’라는 외부 의견이 주어지는 직업이 유명 배우일 거라고 상상이 되고, 극 중에서 그런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이 남자 배우가 무엇을 하든 대중은 ‘너는 이것이다’라고 말해줘요, 직접 얼굴에 대고든, 아니면 영화에 대한 반응으로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이 남자 배우한테 대고 너는 이것이다, 저것이다. 너는 이제 이 옷을 입고 저 옷을 입고 이 역할을 맡고 저 역할을 맡아라. 이 배우가 그 역할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일단 그 역할을 맡으면 그 역할인 거잖아요? 그러고서 그 역할이 끝나면 또 ‘유명 배우’라는 역할을. 그래서 그 역할을 그만두니까, 아무 역할이 없는 것 같더라. 그 와중에 ‘유명 배우의 남편’이라는 역할을 새로 얻는 것 같았는데, 그조차도 오래가지 않았고, 남자는 계속 공허하고, 술은 결코 그 공허를 채울 수 없고, 결국 죽는다.
참고로 이 둘은 돈이 많아요. 여주인공, 남주인공은 돈이 많아요. 잘나가는 스타들이니까요. 돈도 남자의 이 결핍을 결코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극 중, 여주인공은 ‘나’라는 의식이 더 확고한 인물로 나와요. 살던 곳을 떠나오고, 여러 역할을 맡고, 남편이 알코올중독자인 와중에도요. 심지어 남편이 한번은 실수로 여자를 쳐요. 치려고 친 게 아니라, 술 마시고 우왕좌왕하다가 가격을 하게 됩니다. 끔찍하죠. 그런데 이 여자는 자기 경력을 버리고 할리우드를 떠나겠다고 하잖아요, 이 남자를 위해서.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이 여자에게 ‘나’의 일부일 뿐이지, ‘나’는 아닌 겁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남편이 죽고 나서도, 처음에는 배우를 관두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안 관두고 계속 스타의 삶을 산다. 그리고 이 재탄생. 이… 관둘 수도 있었는데 안 관둔 것. 스타가 아니면 죽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스타인 게 제법 괜찮아서 내 인생에 선택적으로 스타라는 직업을 남겨둔 것. 이것이 이 영화에서 말하는 “스타 탄생”인 것 같습니다. 이 여주인공이 맨 처음 역할을 맡았던 때가 아닌. 이 여주인공이 처음에 잘나가던 때가 아닌. 스타라는 레이블을 버릴 수도 있었는데 안 버리고 두기로 한 그때. 그때 스타가 탄생했다.
그러합니다. 여러분. 이… 실용적이려고 하다 보면 망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아이러니하게도, 안 실용적이라서 실용적인 것들이 있어요. 뭘 가지려고 하면 못 갖는데, 가지려고 안 해서 가져지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가지려고 한다는 건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 없는 상태가 유지되고, 실용적이게 하려고 한다는 건 쓸모가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 쓸모가 없는 상태가 유지가 됩니다. 그런데 안 실용적이어도 상관이 없으면 그 중 실용적인 게 있고, 안 가져도 상관이 없으면 그 중 갖게 되는 것들이 있다.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근데 실제로 그런 것 같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얘기할 영화, <고지라>, 1954년 버전입니다. 우리 이제 일본으로 갑니다. 일본에서의 파멸 문화에 대한 누아르 어바니즘 챕터에 등장하는 영화들. 재밌을 것 같아요. 아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들이 책의 뒷부분에서 추가로 언급이 되기도 하는데, 그 영화들을 볼지 말지, 그때 할리우드로 돌아올지 말지, 그것은 아직 미정입니다. 일단 <고지라>, 괴수 영화의 꽃, <고지라>를 각자의 거주 국가에서 관람 가능한 플랫폼을 찾아서 봐봅시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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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Eli Benacot – The Joy of Morning – Instrumental Version
- Lux-Inspira – Serenity
- Yarin Primak – Ten Thoughts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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