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 수다의 씨앗, <고지라>입니다. 괴수 영화. 일본의 파멸 문화. 이것에 대한 대표적인 예시로 <고지라>가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 등장하는데, 나무위키에 이렇게 나옵니다. “고지라 시리즈의 기념비적인 첫번째 작품이자, 일본 괴수 영화의 시조격인 작품이다.” 네. 아주 적절한 요약이에요. 위키위키 나무위키. 간결해요.
시놉시스는 이렇습니다. “태평양에서 속발하는 선박의 조난사고. 그 범인은 수폭실험의 방사능에 의해 되살아난, 이상하게 진화된 쥬라기의 거대 생물 고지라였다. 수폭 세례를 받아 더욱 생명력이 길어진 고지라에게는 폭뢰, 화포, 고압전류 등의 근대 무기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고지라는 도쿄까지 상륙한다. 50미터의 거구가 만들어내는 공포의 괴력과 입에서 뿜어 내는 백열광에 의해 도쿄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한다. 맹렬한 불꽃과 방사능으로 아무런 손도 못쓰고 쓰러져 가는 사람들. 수폭의 화신 고지라를 쓰러뜨릴 유일의 희망은 젊은 과학자 세리자와 다이스케가 극비리에 개발한 초 강력 에너지 물질인 옥시전 디스트로이어였다.”
옥시전 디스트로이어란, ‘산소 파괴기’를 말합니다. 그러하다.
네. 고지라. 급전개되는 영화예요. 바다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폭발이 영화 초반 30초 만에 나타납니다. 박력이 장난이 아니에요.
그런데 오늘 한아임이 집중할 요소는 고지라의 파괴력이 아니고요, 에피소드 제목에 나와 있는, “악을 필요로 하는 선”입니다. 선이 있어야 하지 않으면 악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선이 있으려고 하는 바람에 악이 있더라.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세상을 경험하는 관점에서는 말이 안 되는 듯 들릴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시간에 순서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더라.
그런데 사실은 모든 것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이 요즘 제가 자주 하는 생각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각종 사상, 특히 동양쪽 철학이나 종교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차가움 없이 뜨거움이 있을 수 있는가? 아니면 뜨거움 없이 차가움이 있을 수 있는가? 또한, 빛 없이 어둠이 있을 수 있는가? 아니면 어둠 없이 빛이 있을 수 있는가?
없죠. 뜨거움과 차가움은 동시에 존재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그것을 차갑게 여길 수 있는 이유는 뜨거움이라는 게 뭔지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름에 땀을 흘리면서 덥다고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땀 흘리는 더위가 아닌 상태를 그 동시에 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낮에 밤을 알고 있지 않았으면 낮이 낮일 수 없고, 밤에 낮을 알고 있지 않았으면 밤이 밤일 수 없습니다.
근데 선악도 똑같다는 겁니다. 선이 선이려면 동시에 악이 뭔지를 알아야 하며, 악이 악이려면 동시에 선이 뭔지를 알아야 해요.
그런데 참 흥미로운 것이, 선은 참. 특히나 선은 참으로 자기가 혼자 선한 척을 해요. 이것이 선하다고 주장되는 영웅스러운 인물들이 나오는 서사의 흔한 오류입니다. 선하다고 주장되는 모든 인물들은 악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고지라>에서는 특히나 이 경향이 두드러졌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느끼기에, 마치 이 영화의 인물들이 고지라 같은 괴수의 출몰을 옳다구나,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지라의 출몰 이전, 내지는 고지라가 어딘가에서 출몰을 했는데 그 출몰에 대해서 아직 알지 못했던 인물들이 드러내는, ‘나는 킹왕 멋지구리한 짱 착한 인물이야’라는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한 예시로, 영화의 아주 초반부에 나오는 씬이 있습니다. 여기서 오가타라는 인물이 여자친구와 했던, 데이트 약속 비슷한 것을 어기고 서둘러 비상사태를 해결하러 가야 합니다. 고지라와 관련된 비상사태인데, 아직 자세한 건 몰라요. 그런데 이 여자친구의 반응이 이겁니다. “일은 일이니까, 뭐.” 전혀 데이트에 대한 아쉬움이 없어요. 오가타 또한 화를 안 냅니다. “일은 일이니까, 뭐.”
물론 일은 일이에요. 일을 굉장히 좋아하는 인물일 수도 있죠, 오가타가. 또한 일이 좋지 않더라도, 오가타가 비상사태에 관련된 업을 갖기로 했으면 당연히 그 일을 해야 하죠. 알고 그 직업을 갖는 거죠. 내가 경찰관이거나 소방관인데 데이트 약속 있다고 일을 안 하면 안 되죠.
그러니까 일을 우선시하는 게 특별히 이상한 게 아니고, 이… 전혀 아쉬움 없음이 이상하다는 겁니다. 전혀. 이 사람들은. 오가타와 그 여자친구뿐만 아니라 이 영화 전반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맡은 어떤 특정 역할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여요. 이것은 1950년대의 서사가 무려 70년이나 지난 2023년의 서사보다 보수적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고, 일본의 서사가 이런 특징을 지녔을 수도 있겠고, 고지라가 특정하게 이런 특징을 지녔을 수도 있는데, 여하튼 간에, 이들은 그러니까 마치…
고지라가 출몰했다는 걸 특정적으로는 모르지만, 마치 고지라 출몰 같은 것을 대비하기 위해 기다려 왔다는 듯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마치 고지라가 출몰하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의 인생에서 상당히 아쉬움을 느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아까 말한 일본 서사의 특징 있잖아요. 그게 좀 있는 거 같긴 해요. 일본에 이 장르가 따로 있다고 봐도 될 정도인데, 장르 이름을 뭐라 해야 할지. 장인 장르? 어떤 사람이 수십 년 동안 한 가지 일만 파는 이야기. 제가 접한 일본의 영화 중에 이런 서사가 굉장히 많아요. 만화책에도 많죠. 초밥왕? 라면요리왕? 이런 거 엄청 재밌게 봤는데, 그… 뭔가 그 분위기가 있어요. 다만 어려움을 이겨가며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게 아니라,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고 어려움이 있지 않으면, 나를 괴롭히는 악당들이 등장하지 않으면, 내가 수치스럽고 비참하지 않으면 뭔가가 빠진 것 같다고 인물 스스로 여기는 듯한 그런 분위기.
그래서 가끔 그런 서사를 보면, 인물들이, 어… 인물들이 고리타분하거나 하여간에 적응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는 면모들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해석이 안 됩니다. 고리타분하고 적응력이 떨어져서 악당을 만들어 가며 일부러 이겨낼 역경을 만드는 듯한 느낌마저 들 때가 있는데, 그런 식으로 해석이 안 돼요. 물론, 어떤 장르적 트로프 내에서 이것이 재밌기도 하죠. 포켓몬 같은 만화도 이런 장르에 속할 것 같고, 요즘 미국에서도 이 LitRPG 장르가 인기가 많습니다. 한국에서의 약간… “나 혼자만 레벨업”의 느낌? 일본의 장인 장르와 흡사한 면이 요겁니다. 어려움이 나와 줘야 한다. 어려움이 나와 주지 않으면 이야기가 전개가 안 된다. 모든 현대적 서사가 그렇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특히나 장인 장르나 LitRPG처럼 뭔가 레벨업하고 성장하고 이겨내야 하는 것이 그 자체로서 목적인 서사에서, 특히나 어려움의 필요성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어려움’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서사의 등장인물들이 그 어려움을 굉장히 고마워하는 건 또 아닙니다. 이게 참. 분명 이러한 장르의 소비자들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광경을 목격하려고 보는 것이고, 따라서 어려움이 스토리에서 차지하는 지대한 비중을 알고 있으나, 극 중 인물들은 참 쉽게도 어려움을 악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요.
레벨업하면서 악당과 싸운다든지. 내가 장인이라서 막 전국을 돌아다니며 레시피를 전수받는데 누가 막 방해한다든지. 어… 근데 요기서 또 약간 서브 장르처럼, 그런 분위기의 레벨업 장르들이 있죠. 나랑 싸웠던 애랑 친구 되고, 막 훈훈하게 끝나는 청춘물 스타일의 장르들. 근데 꼭 그렇진 않아요. 그리고 영화 <고지라>가 바로 이 꼭 그렇진 않은 경우인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이 정말 목 빠지게 고지라 같은 괴수의 출몰을 기다린 듯한 분위기인데도 불구하고, 고지라는 아주 그냥 나쁜노무시키로 여겨집니다. 고지라가 많은 사람들 죽이고 피해를 입혔으니까 이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질 수 있으나, 사실 이 많은 사람들은… 기다린 거예요, 고지라를. 고지라 같은 녀석을.
왜 그… 전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어떤 거대한 폭망 사건을 두고 펼쳐지는 이야기에 크게 두 가지 구조가 있습니다. 스릴러와 미스터리예요. 스릴러는 그 폭망 사건이 펼쳐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서사고, 미스터리는, 폭망 사건이 펼쳐진 이후에 그것을 누가 야기했는가를 푸는 서사라고 짧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스터리야 뭐, 사건 이후니까 이미 늦었고, 그렇다 치더라도. 스릴러의 흥미로운 점은 이겁니다. 사건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긴 한데, 사건이 너무 막아지면 안 돼요. 뭐냐 하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일을 너무 잘해가지고 모든 폭망 사건들이 다 막아지면 안 돼요. 그리고 이러한 흥미로운 점은 스릴러 장르로 분류되지는 않되, 전반적으로 스릴러적 요소를 지닌 서사에도 적용됩니다.
이런 거예요. 고지라가 나타났잖아요. 그리고 고지라가 무찔러집니다. 그런데 그 무찔러짐의 순간까지, 고지라는 반드시 해악을 끼쳐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한 것은 아무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일을 너무 잘해서 빛을 발하지 못하는 거예요. 웃기죠? 그런데 그래요, 이게. 이 사람들이 일을 너무 완벽하게 해서, 만약에 고지라가 아직 바다에 있을 때, 고지라가 도쿄에 도착하기 이전에 잡았잖아요? 그러면 영화가 없습니다. 그냥 서사가 없어요. 괴수를 누가 잡긴 잡았는데, 너무 가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잡았고, 정부에서 아무리 “우리가 이렇게 일 잘했습니다. 보세요!” 해도 사람들이 안 본단 말이죠. 반면 고지라가 난리 브루스를 치고 세상을 파괴한 이후에 고지라를 죽이면 어떠한가? 정부가 고지라를 잡은 건 똑같은데, 더 잘 잡은 것처럼 보여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더 잘 잡은 것처럼 보인단 말이죠. 왜냐? 어마어마한 악, 내지는 어마어마한 희생이 따랐으니까, 그 악을 무찌른 선이 엄청 커 보이는 겁니다. 악이 크지 않으면 선도 미미합니다.
그것을 고지라의 등장인물들은 처음부터 아는 것 같아요. 저는 그래서 처음부터. 이… 데이트 약속이 깨지는데 “일은 일이니까, 뭐” 하는 이 장면부터. 아하. 이런 영화구나. 이런 인물들이 나오고, 일하면서 어마무시하게 자신의 희생,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지, 기타 등등을 참말로 강조하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점. 선은 악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누아르 어바니즘의 해당 챕터에서도 언급이 돼요. 제가 좀 좋아하는 챕터 중 하나예요, 요 챕터가. 파멸이 벌어지면 서로 싸우던 사람들도 협동할 수밖에 없다는, 그러한 메시지를 해당 챕터의 저자가 전달하는데, 요거, 아주 흥미로운 점이라서, 나중에 책 나오면 더 자세히 다뤄볼게요.
지금은 일단은, 네. 그렇습니다. 뭔가가 잘못되길 기다리는 아이러니한 측면이 인간에게 분명히 있다. 괴수 영화, 스릴러 장르 전반이 존재하는 이유 자체가 이거겠죠. 카타르시스. 현실에서 이런 걸 맨날 쫓다가는 우리 다 사망하니까, 픽션으로 해소하는 겁니다. 건강한 방식이죠. 이… 뭔가가 망했으면 좋겠는 욕구가 인간에게 있어요, 분명. 놀이기구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고, 익스트림 스포츠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근데 그러니까, 여기서 줄타기를 잘 해야 하는 거예요. 너무 ‘망했으면 좋겠다’ 쪽으로 가면 대놓고 자해, 자학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안 망하려고 열심히 노력은 해야 하는데, 다분히 망할 수 있는 리스크를 안고 가는 데에서 쾌감을 느끼는 겁니다. 굉장히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그 일이 망할 위기에 처해보고 싶은 변태적 욕구. 늘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 일부러 망치진 않지만, 일단 망쳐질 만한 요소가 발생하자 신나는 듯한? 그런 느낌이 <고지라>에 있습니다.
옳다구나! 이때다, 기회가! 내가 이 일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걸 증명할 기회로다!
이것을 긍정이라고 해야 할지? 넓은 의미에서의 긍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만, 어… 이 영화, <고지라>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개인이라고 이름 붙여진 인물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단체를 대변하기 위한 역할인 것 같아요.
개개인은 이렇게 긍정? 내지는 파멸에 대한 변태적 욕구를 인지하고, 적절히 이용하면서 살면 좋을 것 같아요. 이것은 음… 도파민 있죠. 요즘에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얘기가. 도파민 중독. 중독되면 안 된다, 어쩌고저쩌고. 근데 도파민을 아예 없애려면, 우리는 뭐 그냥… 밥도 먹지 말고, 사랑도 하지 말고, 그냥 좀비처럼 살면 돼요. 그러니까, 도파민은 없앨 게 아니라, 잘 이용하면 그만입니다. 그것처럼, 파멸에 대한 변태적 욕구를 인지하면 개개인에게 참 유리할 것 같거든요? 왜냐하면 또, 파멸에 대한 변태적 욕구를 안 인정하는 개개인들이 있거든요. 혹은 그러한 욕구가 정말로 없거나. 이것도 동전의 양면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파멸에 대한 변태적 욕구라는 것이 ‘내게 있다’고 하려면 ‘내게 없다’고 믿거나,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내가 만약에 파멸에 대한 변태적 욕구를 인정하고 이용하는 인물로서 내 인생 영화를 살겠다고 하면, 그 자체로 유리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걸로 영화를 찍고 10권, 20권, 30권짜리 만화책을 그리고 쓸 정도로 사람들이 그런 인물을 좋아하거든요. 파멸에 대한 변태적 욕구를 껴안고 즐기는 인물을 인간은 사랑합니다. 각종 스포츠 종목의 선수들이 사랑받는 이유도 이 때문인 것 같아요. 파멸을 하려고 스포츠를 하는 건 아니지만, 파멸의 리스크가 너무 크잖아요. 각종 부상. 스캔들. 어린 나이에 해야 하는 은퇴. 등등. 그런데 그러한 리스크에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힘이 있단 말이죠.
근데. 그러한 경향이 <고지라>에서는 단체 단위로 펼쳐져요. 그래서 소름 돋는다. 고지라가 무서운 게 아니라 한아임은 이 떼들이 무서웠다. 많이 무서운 건 아니고, 살짝. 저는 워낙 떼에 대한 공포가 있어서요.
과연 이 영화의 인물들 중 한 개인이 ‘난 이렇게 살기 싫어요’, ‘나는 파멸에 관심 없어요’, ‘나는 일하다 순직했다고 칭찬받기보다 그냥 저 멀리 피해서 살래요’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선택적으로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아닌 것 같거든요. 무조건적으로 이렇게 살라고 할 것 같아요. 일터에서 벌어지는 재앙을, 즉 부정적 이벤트를 긍정으로 승화시키지 않으면 매우 배척할 것 같단 말이죠.
이런 식으로 선은 또 악이 될 수 있다. 영화 <고지라>에서는 그런 씬이 직접적으로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그것은 영화의 인물들이 착한 척하느라 너무 바빠서인 것 같아요. 이 착함에 이의를 제기하는 인물은 한 명도 안 나옵니다.
<He Walked by Night>랑 비슷하게, 그 영화가 마치 엘에이 관광공사에서 예산을 댄 영화인 듯 엘에이가 얼마나 좋은지, 엘에이 경찰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장황하게 나왔듯이, <고지라>에서는 일본 당국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군대, 그 과학자들, 그 정치인들이 얼마나 어마무시한지가 나옵니다. 이런 서사가 미국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데 일본도 전반적인 경향이 이런지는 모르겠어요. 한국에는 이런 서사가 잘 없는 것 같은데. 경찰이나 군대나 그런 국가를 대변하는 집단이 그 자체로 어마어마하게 존경함 직하다는 뉘앙스는 한국에서는 잘 없는 것 같아요. 특정 우월한 캐릭터가 경찰이거나 군인일 수는 있어도 말이죠. 오히려 한국에서는 국가 대변 집단에 대한 의심이 담긴 서사가 많은 것 같고, 일반 시민들 개개인이 자랑스럽다는 뉘앙스가 더 주류인 것 같아요. 그러다가 일본의 <고지라> 같은 영화나 미국 특유의 국가 숭배적 서사를 접하면 참… 신기해요. 저는 무서워요. 국가 집단이 일을 잘할 순 있는데, 국가 집단이라서 일을 잘하는 건 아니고, 집단이라서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이 조직에 대한 숭배가… 아, 한국 서사에도 있긴 한 것 같은데, 좀 더… 뭐랄까, 기업체? 그런 쪽으로 더 많이 등장하는 것 같긴 하네요.
아무튼, <고지라>에 일본 특유의 전통에 대한 강한 의미 부여가 나옵니다. 특히나, 개개인을 희생하는 전통. 전통이 잘못된 게 아니라, 이 전통에서 빠지면 전통 안 지킨다고 뭐라 하는 것도 모자라서, 전통 자체가 남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전통인데 그걸 버젓이 전통이라고 숭배하는 모습이 나와요.
이 영화에서 언급되는 그 전통은 예전에 어린 여자애를 괴물한테 갖다 바치는 행위였습니다. 인신 공희입니다. 그런데 그 전통에 대해 얘기하는 남자 노인이 누구냐 하면, 전통에 대해 설명하는 씬보다 불과 1, 2분 전에, 다른 씬에서 “전통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버리겠다”는 협박을 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통이 좋은 건가요? 누구한테 좋은가? 이제 너무 늙은 데다가 태어나서 평생토록 한 번도 여자였던 적이 없어서 절대 바다에 갖다 바쳐질 일이 없었던 이 남자 노인한테 좋은가? 뭐가 무섭냐. 고지라가 무섭냐? 아니면 이런 걸 전통으로 잘도 포장하는 것도 모자라서, 영화 속에서 지금 현재에 살아 있는 사람들한테 똑같은 짓을 하겠다고 협박하는 이 남자 노인이 무섭냐?
항상 이런 서사에서 저는 괴물이 안 무서워요. 귀신 영화에서도 귀신 안 무섭습니다. 사람이 최고로 무서워요. 아무리 고지라가 등장해도, 고지라가 날 죽일 확률보다 사람이 날 죽일 확률이 더 높다. AI도 비슷한 이유에서 안 무섭습니다. AI가 날 굶겨 죽일 확률보다, 길 가던 사람한테 칼 맞거나 총 맞을 확률이 더 높다. 무엇보다, AI는 나를 타겟하지 않는다. 고지라는 나를 타겟하지 않는다. 귀신은 좀 다를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사람이 훨씬 더 무섭다. 대의를 명목으로 어린 여자애를 갖다 바치는 걸 전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데다가 심지어 그 시절이 간 지 한 50년은 지난 것처럼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 노인이 아직도 그걸 붙잡고 늘어지는데, 심지어 그걸 주변에서 아무도 안 말리는 사태가 가장 무섭다.
인간은 대체 착한 척을 할려고 어디까지 갈 텐가? 이런 내용에 환멸을 느끼는 경향이 지난 반세기보다 많아졌기 때문에, 2023년 현재, 안티히어로물이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게 된 것 같습니다. 저도 안티히어로물을 좋아해요. 다만, 안티히어로물과 <고지라>처럼 영웅들이 등장한다는 서사를 비교해 보면, 누가 안티고 누가 그냥 히어로인지를 모르겠어서 안티히어로라는 단어에 의문을 가질 뿐이죠. 이… 하여간에. 파멸을 할 거면 좀 대놓고 하는 데에서 희열이 있어요. 이딴 거 전통이라고 말하는 자들 다 부숴버리라고.
하여간에, 이 남자 노인을 떠나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집단이, 자신이 얼마나 선하며 어마무시하게 대단한지를 참… 참 아주 그냥… 그… 특유의 예의 바름 있죠? 나 되게 예의 바른 거 엄청 잘 알아서 안 예의 바른 그런 예의 바름. 그런 태도로 임해요. 나 왕킹 전문가라서 왕짱 잘 안다. 전문성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이… 선함. 나 착해. 나 왕짱 일 잘해. 너희는 몰라도 된다. 이… 무지한 인민들아. 국가에서 알아서 한다. 너희의 무지함과 대조되는 국가 집단의 유능함. 그러니 너희 인민은 너희의 할 일을 해라. 근데 너희의 일은 우리가 하는 일보다는 솔직히 좀 안 중요해. 그래도 각자가 자기 일을 하는 게 선한 거니까 눈 감고 걍 일 하든가 대피할 일 있으면 대피해라. 그러면 존중해 줄게. 근데 안 그러면 가차 없이 인신공희 해버리마.
그런데 누가 가장 인신공희와 파멸을 필요로 하는가? 이 국가 집단.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걷어가는 세금과 그들이 가하는 체제 유지의 집착을 정당화하지 못할 테니까.
근데 이게 너무 무서운 게, 수소폭탄 실험으로 인해 고지라가 자기 서식지에서 쫓겨났다는 얘기가 나온단 말이죠. 즉, 애초에 그 대단하다던 전문가 집단이 이 일을 초래했다고요. 그래 놓고서 뒤에 가서는 각종 전문가 집단이 일을 해결하는데, 이러한 서사가 무엇을 말하는가. 전문가 너희들이 북 치고 장구 치잖아. 정부 당국 너희가 북 치고 장구 치잖아. 너희가 애초에 선인 척을 안 했으면, 이 악이 없다니까. 이건 뭐, 선악이 결국 하나고, 이런 철학적인 것까지 갈 필요도 없이, 그냥 아주 선형적인 시간 개념으로 세상을 보더라도, 정부에서 이 실험을 안 했으면 고지라가 안 출몰했다.
심지어 고지라가 처음 출연했을 때 정치인들이 고지라를 일반에 공개할까 말까, 이걸 두고 자기들끼리 싸웁니다. 그런데 이쪽저쪽으로 결정을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이들이 이걸 갖고 왈가왈부할 수 있다는 자체가 무섭습니다. 이 집단에 있지 않은 외부 사람들은 이 집단의 결정대로 따라야 하는 거잖아요? 따르는 것인 줄도 모르고.
항상 이런 영화를 보면, 인간이라는 개개인의 개체가 참 놀랍습니다. 인류 차원에서는 이렇게 각자 역할을 분담하는 게 효율적이지만, 인간 개체 개개인은? 우리는 정말 믿을 수 있는가? 종교인들을? 정치인들을? 어떤 당이든 상관없어요. 내가 아닌데 전문가라는 명목하에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는 사람, 믿을 수 있습니까? 요즘엔 심지어 내가 죽고 싶어도 병원에 가면 살아짐 당해야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난 죽고 싶은데 죽는 것도 맘대로 못 죽어.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아, 진짜 맨날 독약 공부해야 한다고, 해야 한다 해야 한다 생각만 해놓고, 한아임은 안 한다. 독약을 어디서부터 공부해야 할까요? 나 하나 죽고 싶을 때 좀 자유로이 죽을 수 있게, 독약을 항시 소지해야지 원.
<고지라>라는 이 이야기를 만든 사람들은 특정 인물들의 스탠스에 동의를 했을까, 하면,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일본 당국의 각종 집단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을지. 고지라를 불쌍하다고 생각했을지. 누구 편이었을지.
그런데 이 점 하나는 아마 맞을 것 같아요. 뭐냐 하면, 관객에게 “보아라, 평화로운 척하는 너희들아. 이것이 바로 너희가 원하던 그 재앙이다.” 이런 느낌. 우리는 이런 일을 직접 당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당하는 느낌을 느끼고 싶어 하고, 그래서 이러한 서사를 보려고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그리고 이러한 적절하고 소소한 해소가 건강하다고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이러한 욕구를 갖고 있는데도 해소를 안 하면 현실에서 해소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 여러분? 우리가 스트레스받을 때 슬픈 영화 보고서 눈물 쏟으면 좀 시원하잖아요? 그거랑 똑같습니다. 사람이 너무 기쁘기만 해도 기쁨을 못 느껴요. 그리고 살면서 슬픈 일을 자연스럽게 겪게 되긴 하지만, 거기에 매몰되면 늘 슬픈 경우가 생길 수 있는 데다가, 슬플 일을 소소하게 픽션으로 만들면 이게… 건강합니다. 이게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그… 내가 현생에서 치타에게 쫓기면서 운동을 하는 대신에, 헬스장에 가서 소소하게 러닝머신 뛰는 거랑 흡사합니다. 뭣 하러 운동을 치타한테 쫓겨가면서 해요. 훨씬 생생하겠죠? 와! 원시인들이 야생동물들에게 쫓기던 것처럼 생생하다. 근데 뭣 하러 그렇게 해요. 그거랑 흡사합니다. 현생을 살면서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느껴버릇해야 느껴지더라고요. 픽션으로 내가 절대 살 수 없는, 그냥 아예 이번 생에서는 불가능한 삶들을 살아보면, 내 생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에 적용할 수 있는 감정의 범위도 다양해집니다. 픽션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각종 상황을 간접경험해 봐서 내가 경험하는 상황에 내가 유기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어… 간접경험? 이것도 과연 이게 간접적이라고 해야 하나, 좀 의심쩍은 게. 제가 이 얘기를 시즌 1 에피소드 7에서 했었는데. 네. 삼백만 년 전 같아요. 무슨 얘기를 했었냐 하면, 그대로 읽을게요.
“제가 예전에 어디서 인터넷 돌아다니면서 봤는데… 어떤 사람이 포럼 같은 데다가 푼 썰이에요. 그 사람이 이랬어요.
‘얘들아 있잖아.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와가지고 나한테 묻는 거야. 책에 나오는 건 다 가짜인데 어떻게 책이 실제 세계보다 재미있을 수가 있냐고. 얘 완전 머저리 아님? 얘는 감히 지가 햄릿보다 선명한 줄 착각하고 있어!’ “
이 얘기를 제가 삼백만 년 전에 시즌 1 에피소드 7에서 했었어요. 그런데 진짜. 이게 웃긴 거예요. 자기야 자기한테 제일 선명하겠지. 책에 나오는 건 다 가짜인데 어떻게 책이 실제 세계보다 재밌을 수 있느냐고 물은 그 사람이 자기 자신과 친하다면, 자기 자신이야 자기한테 제일 선명하겠지. 그러나 책을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웬만해서는 실존 인물과 햄릿하고 만큼 친해지기 힘들어요. 햄릿에 나오는 인물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러잖아요. 이걸 누가 현실에서 몇 명하고 이런 대화를 나누냐고요. 많아 봐야 서너 명하고 나누겠죠? 그게 아니면 직업이 상담사거나.
픽션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 안에 누가 혼을 쏟아부은 거예요, 자기 혼을. 그리고 햄릿의 배경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공간이 아니지만, 그 시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비참함, 슬픔, 분노라든지, 아니면 뭐… 승리감, 광명, 기쁨, 이런 것은 지금 우리의 시공간에서 느끼는 것과 흡사합니다. 심지어 예를 들어, 내가 <고지라>의 선한 역할을 맡은 사람이면 다른 시공간에서 선한 역할을 맡은 사람하고 더 흡사한 감정을 느끼지, <고지라>의 고지라와 더 흡사한 감정을 느끼진 않는단 말이죠. 즉, 우리가 있는 시공간에서는 나와 너가 각각 다른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극명하게 바로 감정의 유사성이 느껴지지 않는데, 오히려 나와 다른 시공간에 있는 누군가가 나와 동일한 상황에 놓였다고 여겨질 때, 그때 감정의 공명이 더 잘 일어난단 말이죠.
그런지라, 이걸 알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마치 헬스장에서 러닝머신 뛰는 것과 같다. 치타를 기다리지 말자. 헬스장에서 러닝머신 뛰어 본 사람이 치타랑 붙었을 때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다.
특히나 이.. 선악에 관련된 거. 이게 참. 이게 좀 아이러니하게. 음… 선악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어떤 한 쪽을 좋다고 붙잡으면 다른 쪽이 반드시 따라 오더라고요. 예를 들어 내가 너어어어어무 유능하고 싶어서 맨날 유능하려고 하면 내 주변에 무능한 사람들이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게 내가 유능함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거든요. 그런데 그러한 유능함이 내가 느끼고 싶은 유능함인가? 그건 아닐 거예요.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유능해지면 사실 나는 최대치로 유능해질 수 없거든요. 나 혼자 맨날 빨빨거리면서 일 해결하면서 돌아다니는 거예요. 여러 사람하고 하는 큰 일 못 하고. 도와줄 사람 없고. 그러면서 최악은, “나는 이렇게 유능한데 혼자 유능해서 너무 불쌍하다” 이런 덫에 빠질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 한쪽을 붙잡는 게 불필요하고, 안 좋더라고요. 안 붙잡고, 또 반대편에서는 안 밀어내는 게 쉽진 않지만, 어… 하여간에 이… 아무것도 상관이 없다. 유능과 무능은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상관이 없더라. 그런데 픽션에서만큼 이걸 관조하는 연습을 쉽게 할 수 있는 아레나가 현실에선 없습니다. 그래서 각종 철학 종교 사상에서 자꾸 비유를 쓰는 것 같아요.
모든 것은 꿈이다. 이것은 영화다. 홀로그램이다. 이런 비유들을 쓰는데, 그 이유가, 현실에만 계속 있으면 전체를 보기가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픽션을 통으로 보는 연습을 하면 현실에서 유용하더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마치 고지라의 이 선한 척하는 인물들처럼 살면서, ‘난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왜 고지라 같은 괴물에게 당하지?’ 이렇게 생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대체로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와 대상이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는 서구적 교육 시스템에서 자라온 사람들은 대부분, 저를 포함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전체적으로 보면 그게 아니란 말이죠. 고지라 같은 괴물한테 내가 당한 게 아니라, 고지라가 없었으면 내 존재 가치가 증명되지 않는 인물로 나를 설정해 두었기에 내가 하필 고지라가 나오는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된 겁니다.
이거를 어… 한번 적용해 보세요. 재밌습니다. 여러분이 캐릭터라고 생각하시고, 여러분 생에 누가 악당으로 나오나 한번 관찰해 보세요. 그러면 놀랍게도, 내가 저 망할노무시키를 필요로 하는 인물로 나 자신을 설정해 두었다는 사실이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야기의 등장인물로서만 사는 게 아니라, 이야기 전체를 볼 수 있고, 어… 처음엔 기분이 썩 좋진 않지만, 나중에는 그 이야기를 나가서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을 확률이 높아진다고 하더라고요. 음. 이런 측면에 대한 소소한 경험담은 차차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이에 앞서, 잠깐 누아르 어바니즘 출판 소식을 전해드릴게요. 원래는 연말에 출판을 하려고 했는데, 우리 이혜원 기획자가 운영하는 범고래출판사가 다른 책의 출판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미술계에서 일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에요. 이 책이 아마 연말에 출판될 것 같고, 누아르 어바니즘은 내년 초로 미뤄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아르 어바니즘에 등장하는 레퍼런스물이 워낙 많아서, 아임 드리밍 에피소드 진행에는 별로 변화가 없습니다. 원래도 내년에도 한참을 누아르 어바니즘 테마로 가려고 했잖아요. 변화가 약간 있는 측면은, 책에 등장하는 각 챕터를 12월이면 다루기 시작할 것 같았는데, 그러지 않고 내년 초에 다루기 시작할 것 같다. 요 정도입니다.
미술계 종사자들의 이야기에 관한 책, 그리고 누아르 어바니즘 책, 둘 다 더 결정되는 대로 상황 업데이트를 해드리겠습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얘기할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입니다. 만화 말고, 애니메이션판 영화를 말합니다. 1984년 개봉되었다고 하네요.
캬. 이 영화. 하. 전에 봤는데 이번에 또 봤거든요. 참말로. 너무 아름답고. 어… 나우시카 언니. 극 중 등장하는 나우시카 언니가 너무나 한아임 스타일이다. 너무 멋있어. 존재가 멋져. 이에 대해서 다음 에피소드에서 더 자세히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각자의 거주 국가에서 관람 가능한 플랫폼을 찾아서 봐봅시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 “고지라”
- “미스터 초밥왕”
- “라면요리왕”
- “나 혼자만 레벨업”
- “He Walked by Night”
- “햄릿”
- 시즌 1 에피소드 7 – [Ep. 7] 인간포장: 그 이후의 삶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Shay Zagreba – Countryside Squabble
- Ziv Grinberg – Its Fun Being a Cat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 2023 한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