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61] 멸망에 잔존하는 미래의 희망,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 수다의 씨앗,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입니다. 정말로다가 아름다운 영화라고 한아임은 생각한다.

나무위키에 나와 있는 시놉시스는 이렇습니다.

“극한의 과학 문명이 “불의 7일”이라 불린 마지막 전쟁에서 거신병들에 의해 멸망하고 천 년이 지난 시대. 각지에는 부해(腐海)라 불리는 숲과 거기에서 날아오는 유독한 포자로 인해 인류는 점점 쇠퇴해 가고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도움으로 부해의 피해를 입지 않고 있던 바람계곡. 그곳에는 바람을 읽고 부해에서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공주 나우시카가 있었다. 어느 날 서쪽의 대왕국 토르메키아의 비행선이 바람계곡 근처에 추락하고 나우시카는 포로로 잡혀있던 페지테 왕국의 공주를 구해내지만 그녀는 “화물을 태워달라”고 부탁하고서 숨을 거둔다. 그리고 얼마 후 토르메키아의 군사들이 바람계곡으로 쳐들어오고 나우시카와 바람계곡 사람들은 거대한 전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러합니다. 이렇게 줄거리가 있는데, 저는 그거에 대해 별로 크게 관심이 없이 영화를 봤습니다. 이 영화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각본, 원작인데, 지브리가 아니거든요? 스튜디오 지브리 제작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너무나 지브리 스타일이고, 나무위키 왈, “일본에선 ‘지브리 작품이 아니어서 놀란 애니메이션’ 1위로 꼽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저도 놀랐어요. 너무 지브리 스타일이라서. 그러나 또, 나무위키 왈, “지금은 지브리에서 저작권 관리를 하고 있어서 딱히 틀린 건 아니기도 하다. 캐릭터 상품이나 영상 매체도 지브리 레이블로 나온다.”

네. 게다가, 뭐, 원칙적으로 따졌을 때 지브리이든 아니든지 간에, <나우시카>를 만들 때 지브리 멤버가 제작진과 창작진에 섞여 있다고 하니, 지브리 분위기가 물씬 나는 건 이상하지 않은 것 같으며, 저는 지브리 작품을 전반적으로 좋아하고, 대개, 지브리 작품을 볼 때, 스토리를 안 봐요. 웬만하면 한아임은 서사의 플롯을 상당히 중요한 재미 요소로 받아들이는데도 불구하고, 지브리 작품은 왠지 그냥 그렇게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한아임은 왜 지브리 작품을 볼 때 서사에 집중하지 않게 되는가? <나우시카>를 볼 때도, 부해며, 무슨 왕국이며, 무슨 전쟁이며, 오염이며, 이를 통한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관심이 없었을까?

저는 그냥 지브리의 공기가 좋아요. 정말이지, 지브리의 공기예요. 이것은 일본의 공기도 아니고, 애니메이션의 공기도 아니고, 지브리 특유의 공기 같고요, 저는 그것을 좋아합니다. 지브리의 많은 영화들이, 나우시카도 그렇고, <마녀 배달부 키키>, <이웃집 토토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 기타 등등이 실존하지 않는 배경을 그리고 있고, 제가 이런 걸… 좋아해요. 그런데 또, 실존하지 않는 배경이되, 분명 현실과 닿아 있어요. 제가 엘프와 오크가 나오는 판타지는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마법이 기정사실화된 세팅에는 흥미가 없고, 마법이 있긴 한데,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마법 못 쓰는 사람들은 그럼 엄청 핍박받고 사는가? 그것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기술의 발달이 지브리 세계관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것이 마법에 가까운 기술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요, 그… 일본 애니메이션 전반적으로 스팀펑크 장르가 인기가 있다는 것이 제가 받는 인상입니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지만요. 그런데 요 스팀펑크스러움이 지브리에도 있단 말이죠. 이를테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이렇습니다.

스팀펑크란, SF의 하위 장르에서, 미래와 과거가 뒤섞인 느낌을 주는 요런 장르를 말합니다. 증기로 작동되는 기계들이 있는데,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타임라인에서 증기가 처음 등장했던 그 시대 같진 않고, 오히려 더 진보된 기술이 공존하는 배경. 기술 내지는 마법, 혹은 마법에 가까운 듯해 보이는 기술.

원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모르면 다 마법 같아 보이죠? 클라크의 세 가지 법칙에서 나와 있듯이 말이죠. 위키피디아에 간결하게 설명 되어 있는 걸 읽어 볼게요.

“클라크의 삼법칙(Clarke’s three laws)는 영국의 SF 작가인 아서 C. 클라크가 고안한 세 가지 법칙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어떤 노년의 과학자가 무엇이 가능하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의 확실히 맞다. 그러나 그가 무엇이 불가능하리라고 한다면 틀릴 가능성이 높다.

2. 가능성의 한계를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은 불가능할 때까지 시도해 보는 방법밖에 없다.

3.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이 중, 세 번째 법칙이 자주 인용되는 것 같아요.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우리가 지금 스마트폰 들고 18세기로 가면, 우리는 마법사를 넘어서서 신이 돼요. 숭배받거나 사형당하겠죠.

아무튼 그런데 요 점. 요… 기술과 마법의 구분할 수 없음. 이게 제가 너무 좋아하는 지점이고, 이것이 스팀펑크 장르 쪽으로 풀리기도 하고, 마법적 사실주의로 풀리기도 합니다. 제가 쓰는 픽션도 거의 다 이런 배경을 갖고 있어요. 거의 다, 실존하지 않는 배경을 쓰는데, 압도적인 예외가 서울이라는 배경이고요, 그 외에 뉴욕을 한 번 배경으로 쓴 적이 있는데, 그것은 제가 1920년대의 뉴욕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개츠비> 시대 있잖아요. 이 시대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 시대가 실존 시대이긴 한데, 이때 정말 그…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음. 전기가 도입되고 기차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타게 되고, 자기가 소유한 차도 갖게 되고, 여성이 투표권을 갖게 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게 되고, 모든 게 가능할 것 같았는데, 1920년대 말 대공황으로 폭망한 시대.

이래서 제가 1920년대 뉴욕을 너무 좋아하고요.

서울은. 서울이 제 의식 세계에서 갖는 위치가 특별한지라, 제 픽션에서 여러 번 실존 장소로 언급된 도시는 서울밖에 없을 거예요. 나머지는 다 그냥 없는 세계. 그런데 얼추 우리 세계이긴 한데, 거기에 어떤 식으로든 마법이 섞인. 그런데 그게 뭔가… 마법 학교에 가서 마법 배우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마법 내지는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원래부터 어딘가에 있는. 뭔가… 비의 정령이 등장한다든지. 고양이들이 시공간을 워프시킨다든지. 사후생이 있다든지. 그런 걸 제가 참말로 너무나 좋아한단 말이죠.

그런데 지브리 작품들에 이런 요소들이 다분해요. 너무나 너무나 다분하고. 하. 그래서 그 공기. 그냥 어… 사실 이 캐릭터들이 아무것도 안 해도 저는 좋아했을 것 같아요. 그냥 봤을 것 같아요. 이것은 마치, 어… 고양이 유튜브 채널에서 고양이들이 별걸 안 해도 그냥 그 채널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걔네가 숨 쉬는 게 좋은 건데, 지브리가 숨 쉬는 게, 이 공기가 저는 너무 좋아요.

장르 얘기를 하는 김에, 좀 더 해보자면, 제가 이, 1920년대 뉴욕이 그… 황금. 전기. 부귀영화로 가득하던 그곳이 대공황으로 폭망했다는 지점이 매력적이라고 했잖습니까? 그런데 스팀펑크 계열보다 다크하게 가되, 마법적 요소가 섞여 있는 느낌이 드는 장르가 테크노 바바리즘입니다. “Dune” 아십니까, 여러분? 그 영화에 나오는, 멸망한 문명들, 그러나 또 동시에 대단히 발달한 기술. 그런 것들이 공존하는 게 테크노 바바리즘이고, 스팀펑크 같은 하위 장르보다는 아직 생소한 단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Isaac Arthur라는 분의 유튜브 채널에서 이러한 장르를 다룬 적이 있고요, 다른 모든 언급된 레퍼런스들과 함께 제가 쇼노츠에 링크할게요.

아포칼립스 장르,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 그리고 디스토피아 장르 중에서도 거대 문명, 그리고 거기에 공존하는 뭔가… 그런 거대 문명들과 같은 시대의 것 같지가 않은 야만스러움이 공존하는 장르로서 테크노 바바리즘. 캬. 이름도 너무 멋있지 않나요? 일단 테크노가 들어가면 좀 멋있고, 바바리즘. 바바리안이라는 단어가. 약간… 한국어로 하면 오랑캐, 미개인이라는 단어가 되는데, 오랑캐는 왠지… 이… 너무 특정해요. 일단 개그콘서트인가? 거기에 나왔던 오랑캐 캐릭터가 생각이 나고요.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어요. “예전에, 두만강 일대의 만주 지방에 살던 여진족을 멸시하여 이르던 말.” 그리고 미개인도 뭔가 진짜 막 원시인일 것 같은 그런 느낌인데, barbarian이라는 단어는 영어 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in ancient times) a member of a community or tribe not belonging to one of the great civilizations (Greek, Roman, Christian).” 고대 시대에, 위대한 문명들, 즉, 그리스, 로마, 크리스찬 문명들 중 하나에 속하지 않는 공동체 혹은 부족의 일원.

그래서, 이게 왠지 제 편견일지 모르겠는데, 분명히 미개하다는 뜻이기는 한데, 그리스, 로마 신화 시대의 그런 뭔가… 미개하다는 소리를 듣긴 하는데, 솔직히 뭐 그리스, 로마… 당시의 그리스, 로마라고 해서 대단히 안 미개했나요? 로마에 관한 드라마나 서적 같은 걸 보면 로마인들은 화장실 칸막이가 없었다. 그리고 무슨, 이게 무슨, 정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슨… 저기… 배변을 닦는 수건 같은 게 있는데 그거를 뭘 공용으로 썼다는 둥, 이런 얘기를 제가 들었어가지고, 자기들은 굉장히 위대한 문명이라고 하는데, “너희가? 그 시대에?” 뭐, 그 시대의 다른 여느 지역도 다 그랬겠지만, 뭐 얼마나 대단했을까 싶은 생각과 함께, 그들이 미개하다고 부르는 그 문명은 또 얼마나 미개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또 동시에 그 미개함이라는 기준과 별개로, 신화, 정말 그 신들이 나오는 그런 이미지가 그리스, 로마 하면 뜨면서, 인간이야 배변 닦개를 공용으로 썼을지언정, 신적인 뭔가가 있었던 시대라는 이미지와 함께, 그 시대의 미개인들이 굉장히 잔인하긴 한데, 또 뭔가 전사의 영광이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에요.

그리고 요즘에 savage라는 단어를 예전 같이 안 쓰잖아요? 아주 수많은 팝송들의 제목에 savage란 단어가 들어가죠? 그래서 그런지 이런 의미를 가진 단어들, savage 혹은 barbarian이라는 어감이… 어… 박력 있어요. 멋이 없지가 않아요. 그렇게 느껴집니다.

아무튼, <나우시카>. 약간의 테크노 바바리즘적 측면이 있고, 분명 포스트 아포칼립스이며, 스팀펑크스러운 탈것들이 나오되 꼭 증기로 작동된다기보다는 그런 증기스러운 비주얼을 갖고 있다는 측면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디스토피아는 아니에요. 디스토피아라고 엄밀히 말하려면 좀 더… 정부가 잘못했다. 그런 느낌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세상이 멸망해서 살기가 힘든 겁니다.


근데 세상이 멸망해서 살기 힘든 와중에도 너무나 아름답다 이 말입니다.

일단 오디오가, 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잖아요? 바람 소리가 듣기 좋습니다. 비록 아포칼립스 때문에 바람이 부는 배경 스토리가 있지만, 너무 좋단 말이죠. 제가 명상할 때 듣는 화이트 노이즈로, 다른 소리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듣는 화이트 노이즈 중 하나가 바람 소리입니다. 바람 소리, 참 좋아요.

비 소리를 너무 많이 들으면 화장실이 가고 싶고요, 불 소리는 좀 따끔거리고요, 새 소리는 줭말 정신이 어지러워서 못 듣겠는데, 바람 소리는 좋더라.

그리고 나우시카랑 크게 관련은 없지만, 옛날에, 포켓몬 말입니다. 포켓몬 2기인가? 거기에 루기아라는 포켓몬이 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포켓몬이에요. 저는 어릴 때 그 포켓몬을 타고 날아다니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나우시카를 보면 1인용 비행정 같은 걸 타고 다니는 인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새가 된 듯. 너무 아름다워요.

또한, 음악이 너무 좋죠. 하. 장대하면서도 섬세한 음악. 오프닝 때부터 신화적이고, 아름답고, 너무 좋아요.

그리고 뭔가… 이… 독성이 있는 균류가 세계를 장악한, 그런 설정인데, 이 독성 균류가 일반적으로는 인간보다 훨씬 작잖아요? 곰팡이라든지 버섯이라든지. 근데 분명 제가 균류와 연관 지어 생각한 비주얼들이 이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는 사람만 한 크기, 혹은 그보다 더 큰 크기로 등장하니까, 그… 제가 생각하는 ‘알맞은 척도’에 부합하지 않는 비주얼이 등장하다 보니까, 제가 원래 갖고 있던 세계관이 즉시 깨지면서,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저는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전반적으로 좋아하고, 웹툰도 좋아합니다. 창작자가 완전히 신이 되어 세계관을 설정할 수 있는 게 너무나 명확한 이러한 이야기들을 좋아해요.

예를 들자면, 애니메이션에서 눈이 사람 얼굴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설정을 하면, 그냥 그 세계에서는 그게 정상이 되는 거잖아요? 저는 그게 너무 좋아요. 나아가서, 뭐, 이번에 바비 영화 나왔죠. 바비의 신체 비율이 너무 비인간적이다, 인간 여성은 이렇지 않다, 이런 말들이 나오잖아요. 근데 그게 너무… 일차원적인 해석입니다. 애니메이션에서 왜 실제적인 걸 찾는 건지 잘 모르겠고요. 심지어 굉장히 표면적인 실제 요소를 찾는 이유를 모르겠고, 실제적이지 않은 요소의 표현을 나쁘다고 함으로써 뭘 이룰 거라고 여기는지 모르겠어요.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기도 거기에 맞춰서 바뀌어야 할 거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가 어떤지를 관찰해야죠. 그리고 바비를 보고서 몸매 개조를 해야 한다고 여긴다면, 왜 하필 바비인가? 영화 300을 보고서 몸매 개조를 해야 한다고 여기면 왜 그러한가? 자기 스스로가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여기니까 바비든 300이든 애니든 실사든 그걸 보고 그렇게 되고 싶다고 여기는 것일 텐데, 왜 그런가? 그 ‘왜 그런가’가 문제지, 바비의 신체 비율을 인간과 가깝게 해서 될 일일까요, 과연? 그러면 현실이란 건 뭔데? 현실에 엄청 다양한 신체 비율들이 있잖아요? 그중 하나 고르면 또 그건 평균이 아니라서 나쁘다고 할 건지? 그럼 평균만이 이야기화될 수 있는가? 평균 아닌 사람은 이제 이야기에 나올 권리도 없나? 평범한 게 유세인가? 뛰어난 자는 이제 스크린 타임도 못 갖는가?

그런데 마침 나우시카는 공주다. 저는 사실 이런 요소도 좋아합니다. 너무 뭔가… 평범한 군중 속 1인, 이런 스토리라인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제가 읽었던 픽션 중, 그러한 인물들이 너무나 그… 뭔가… 백인 상위권 중산층 중, 먹고사는 게 쉬엄쉬엄하니까 마약이며 술에 중독되어 뭐, 바람피우고, 자기 막 저기 quarter-life crisis, mid-life crisis, “이제 인생 어떻게 살지?” 이런 거를 굉장히 이 세상 삶 전반의 고통 같은 걸로 포장한 서사 있죠? 그런 거가 대부분이었어가지고, 별로 안 좋아해요. 그… 자기가 굉장히 평범한 군중 속 1인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사실은 자신을 무척이나 불쌍해할 만큼 특별하게 여기는 게 분명한 그 조합을 제가, 참, 그거에 대한 참을성이 없어요.

그래서 그냥 나우시카가 공주인 게 좋고요, 특별해서 좋고요, 뛰어나서 좋고요, 참 어진 공주라서, 이 점도 이따가 얘기할게요.

일단은, 멸망한 세계의 묘사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전부 마스크를 쓰고 다녀요. 독성 균류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와중에도 포자가 날아다니는 그 광경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눈처럼 소복이 쌓여요. 그러한 부조화? 위험과 아름다움의 공존. 이 이야기 속 인물들이 죽을 수도 있지만, 죽는 그 순간 미학적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이 완성될까, 하는 변태적 관객의 시점. 요런 걸 또, 만끽할 수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마법적인, 실존하지 않는, 꿈 세계의 묘사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오무라는, 세상 징그럽게 생긴 벌레 녀석이 나오는데, 엄청 커요. 웬만한 탱크보다 더 크고요, 바퀴벌레보다 징그럽게 생겼어요. 이 “오무”가 종이에요. 벌레 종 이름이에요. 그런데 그냥 마냥 벌레가 아니라, 약간… 알고 보니 영물인, 자연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빅 픽처를 알고 있는, 그런 종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무가 무서우니까 오무를 마냥 공격하기만 하는데, 나우시카는 그렇지 않다. 특히나, 지난주에 얘기했던 <고지라>에서 인간 개체들이 고지라를 다뤘던 방식과 대조된다. 고지라를 죽이려던 사람들과 달리, 나우시카는 오무를 타이릅니다. “여기는 너의 세계가 아니야,” 이러면서, 너의 구역으로 돌아가라고 오무를 타이릅니다. 그런데 오무가 말을 안 들으니까, “이 녀석, 화가 많이 났네” 이런 반응을 보여요. 그러면서 얘를 기절시킵니다. 죽이지 않고 기절시킨 거죠. 그러고서는 곤충 피리를 불어서 숲으로 돌아가게끔 합니다. 이런 반응이 너무 친절하고. 너무… 고지라랑 확연히 다르죠.

그리고 또, 여우다람쥐가 나와요. 얘는 오무와 정반대로, 아주 작아요. 손바닥만 하고 엄청 귀여운데, 아주 난폭해요. 막 할퀴려고 하고, 나우시카를 깨물어요. 그런데 나우시카는 자기를 깨문 여우다람쥐에 대한 반응도, 가만히 있는 겁니다. 깨물게 둬요. “무섭지 않아” 이러면서. 오히려 얘를 타일러요. 그걸 보고 다른 인물이 “생명체 전반들과 소통하는 나우시카의 힘이 묘하도다”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특별한 능력인 거죠. 나도 이런 능력 있었으면 좋겠다.

나우시카는 벽이 없어요. 마음의 벽이 없는 것 같아요.

이쯤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이걸 어디서 들었는지. 지대넓얕이었나? 하, 정말 지대넓얕 팟캐스트 너무 재밌었었는데. 인간은 대개 고양이, 강아지 등 포유류를 좋아하는데, 만약 바퀴벌레가 날 좋다고 부벼대면 어쩔 것인가? 오무가 나 좋다고, 귀여워해달라고 하면 난 어떡할까?

내가 오무를 징그럽다고 하는 건 벌레란 위험하고 더럽다는 경험 때문인가? 아니면 나라는 개체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유전세뇌된 정보인가? 인간은 그러한 유전세뇌 정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벌레를 식량으로 섭취하게 될 미래에는 어떨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참 아름답다고 느껴집니다. 이미 인류가 상당히 멸망한 상태에서 잔존하는 미래의 희망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제가 변태라서 이런 것 같아요. 1920년대 뉴욕을 한아임이 왜 좋아한다? 망할 걸 아니까. 망할 걸 아는 2023년의 한아임은, 망할 줄 몰랐던 당대 사람들이 걷잡을 수 없이 쾌락과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 그냥 계속될 거였으면 안 아름다웠을 텐데, 망했으니까.

이… 참… 변태스러운데.

아까 언급했던, 독성 균류가 내뿜는 포자에 죽을 수 있는 걸 알면서도, 그것이 또 눈처럼 소복이 쌓여서 아름다운 것과 같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에도 그렇고, 나우시카라는 인물도 그렇고, 벽이 없어요. 어느 한 쪽만 있었으면 무매력이었을 텐데,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요소들을 나란히 둠으로써 모든 것이 죽는 와중에도 꽃이 핍니다.

그래서 약간, 여담이지만, 여러분. 어… 슈방구였다가 잘되는 게 더 좋습니다. 그렇죠? 이게… 음… 상반되는 것이 공존하는 게 아름답다는 저의 취향에 동의하신다면, 특히나 그 상반되는 것이 한 개체, 이를테면 “나”라는 것 안에 공존해야 한다면, 슈방구였다가 잘되는 게 잘나가다가 폭망하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오히려 지금 내가 슈방구라면, 그것은 잘나가는 나의 존재 증거예요. 잘나가는 나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지금을 슈방구라고 인식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살겠죠?

게다가 우리가, 인간이 죽을 수 있다는 건 좋은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슈방구였다가 잘나갔다 하더라도, 또다시 언젠가 폭망할 날을 두려워하며, 왜 그, 좀 진부하긴 하지만, 신들이 나오는 그런 서사에 보면 있잖아요? 굉장히 지루해하는, 영생을 지루해하는 신들이 나오는데, 그 와중에 또 지루하다고 해서 그럼 용감해지느냐? 꼭 그렇지도 않아요. 왜냐면 영생을 해야 하는 바람에 생에 대한 부담이 엄청 크잖아요. 근데 우리는, 이 아바타계에서는 죽을 거잖아요, 언젠가? 그래서 슈방구였다가 잘나가는 상태에 도달한 다음에, 잘하면, 멘탈 관리 잘하면, 잘나가는 상태 그대로 사망할 수 있습니다. 폭망하지 않고.

아무튼 다시, 나우시카.

강인한 나우시카는 용감하면서도 여립니다. 너무 멋져요.

이것도 제가 좋아하는, 변태적으로 공존하는 요소들의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고, 좀 더… 뭐랄까, 정상적이라고 해야 하나, 좀 더 전통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해석으로는, 여러분? 음양 상징 있죠? 태극 문양. 그것을 나타낸 그림들 중에, 큰 태극만 있는 게 아니라, 그 태극 안에 작은 원이 또 들어간 그림을, 검색해 보시면,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게 제가 갖고 있는 공존의 이미지입니다. 어떤 특정한 성질을 지녔다고 여겨지는 그것 안에는, 그것과 반대의 성질이라고 여겨지는 바로 그것이 들어 있어요. 부 안에 빈이 있고, 빈 안에 부가 있습니다.

저는 어… 좀 이상주의적일 수 있는데, 외부에서 가하거나 스스로 내부에서 가하는 억압이 없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아주 여러 요소들을 시의적절하게, 때에 따라, 자유로이 쓸 수 있는 게 정상이라고 느낍니다. 그냥 머리로 하는 생각이 아니고, 이것은 느낌입니다. 가슴에서 느끼는 마음이에요. 내가 그냥 뭔가가 좋거나 싫을 순 있지만, 뭔가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든가, 뭔가가 있으면 죽을 것 같다든가, 이런 게 없는 게 본연의 상태 같아요. 그렇지만 실질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게, 억압을 통해서 한 쪽을 붙들고 다른 쪽에 저항하는 분야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왜 이번 에피소드에서 하느냐.

나우시카는 멸망을 이미 한 거나 다름없고, 계속해서 천천히 죽어가는 문명 속에서, 너무나 자유로워요.

바지, 치마를 골고루 입는 건 뭐, 너무나 작은 예시고, 날아야 할 필요가 있으면 날고, 걸어야 할 필요가 있으면 걷습니다. 털이 복실복실한 귀엽고 작은 여우 친구를 곁에 두되, 거대 바퀴벌레 괴물스러운 오무 역시 어여삐 여깁니다. 사람들을 통솔해야 할 때는 통솔하고,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서 섞여야 할 때는 섞입니다. 분노해서 공격해야 할 때는 분노해서 공격하고, 치료해야 할 때는 치료하고 돕습니다. 싸움도 잘해요, 이 언니. 강할 땐 강하고, 울 땐 잘 웁니다.

이것이 희망이다. 멸망에 잔존하는 미래의 희망이 있다면 이것이다. 벽 없음.

그렇다고 나우시카가 취향이 없느냐? 아니에요. 이 언니의 옷 스타일이 있다고요. 이 언니가 행하는 방식이 있고요. 그러니까 캐릭터죠. 그냥 막 아무거나 오는 대로 다 받아들여서 흐릿해지는, 그런 무언가가 아니라, 아주 선명하고 반짝이는 캐릭터입니다. 벽이 없다고 분별이 없는 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벽 없음을 알려면 벽 있음도 가능해야 하는데, 모든 게 다 뒤섞여서 검은색이 되면 벽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다 하나의 뭉텅이가 되잖아요.

뭐냐 하면, 팔레트에 있는 모든 물감 색은 그대로 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제각각 색깔이 있는 건 좋은 거예요. 그걸 다 뒤섞는 게 제가 말하는 벽 없음은 아닙니다. 뜨거운 거, 차가운 거 있으면, 그걸 다 뒤섞어서 미지근하게 만들어 버리자는 게 제 말이 아니에요. 그걸 뒤섞는 건… 음… 무지개색을 전부 다 섞어서 검은색만 쓰자는 얘기가 될 텐데,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고요. 그보다는, 팔레트 물감 사이사이에 칸이 없어서, 섞일 필요가 있으면 언제나 섞일 수 있는. 더 나아가, 내가 팔레트라서, 내 위에서 모든 물감을 다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나우시카 같아요.

언니 너무 매력 터지고.

어… 이것이 섹시함이다.

네. 저는 섹시함이 무슨 뭐… 근육질 남자라든지 쭉쭉빵빵 여자라든지 그렇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도 섹시할 수 있지만, 섹시함의 극히 일부라고 생각을 하고요, 진짜 섹시함은, 존재. 나우시카의 존재가 섹시하다. 언니의 혼이 섹시하다. 언니랑 섞이고 싶다. 성적으로 한정된 의미가 아닙니다. 저는 이성애자예요. 그런데 내가 이 나우시카 언니의 팔레트의 물감이고 싶다. 나를 써줘.

나도 나우시카처럼 되고 싶다. 언니는 못 하는 게 뭔가. 정확히 몇 살인 캐릭터로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일본 만화 특성상, 제 나이 절반일지도 몰라요.

여러분 그거 아세요? 제가 좋아하는 다른 애니 영화, 아까 언급했던 “마녀 배달부 키키”의 주인공인 키키의 극 중 나이가 13살이에요. 위키피디아에 이러네요. “마녀들의 사회에서는 13살의 청소년이 되면 수습 마녀로 불리며 1년간 고향을 떠나 마녀가 없는 타지에서 지내며 수행을 쌓아야 한다.” 이러니, 키키가 13살이라니까요. 세상에 맙소사. 나 13살 때 뭐했어. 일본 애니에 나오는 애들은 왜 이렇게 어려.

“약속의 네버랜드”에 나오는 애들도 다 애들이잖아요. 약속의 네버랜드라는 애니의 1기가 재밌더라고요. 1기라고 부르는 게 맞나? 애니메이션은 1기, 2기, 이렇게 부르는 것 같은데. 1기 재밌다. 근데 다 애들이다. 그냥 말만 애가 아니라. 완전 미성년자. 이룬 업적들은 다 언니오빠인데, 나이는 애들이다. 이거 왜 그런 걸까? 일본 픽션 문화 내에서 어째서 이렇게 어린 캐릭터들이 나오는가? 아시는 분, 이에 관련된 레퍼런스물을 아시는 분, 이메일로 연락 주세요.

일본은 분명 엄청난 고령 국가인데, 어린이들이 폭력적인 픽션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양상이 생긴 지 한참 된 것 같아요. 이것이 원래 그런지? 일본 역사상 원래 그런 트렌드가 있었는지?

애니뿐만 아니라, 전에도 언급한 것 같은데, 일본 문화 특유의, 고교 졸업 이후 삶이 없을 것만 같은 고교 문화에 대한 집중. 이런 것도 느껴집니다. 이거 왜인가.


나우시카가 하는 일 중에 “벽 없음”을 대변하는 중요한 일이 있는데, 바로 부해의 독성 있다고 여겨지는 포자들을 모아서 작은 식물원을 자신의 거처 안에 만든 겁니다. 그런데 이 식물들 자체에는 독성이 없다는 걸 나우시카가 알아냈습니다. 땅이 오염된 게 문제였다. 부해의 식물들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었다. “누가 왜 세상을 이렇게 만든 건지” 이런 말을 해요, 나우시카가. 이 영화에 인간 존재란 대체 뭔가, 하는 의문을 갖게끔 할 만한 내용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냥 그런 내용만 있는 게 아니라, 지브리의 공기가 있다. 캬.

어… 이 식물원을 둘러싼 벽은 아마 나우시카가 만들어 놓은 유일한 벽일 겁니다. 식물원에 독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포자를 들이는 것이었으니, 외부의 것이 더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그리고 내부의 것이 외부로 나가지 않게 벽을 만든 거죠. 이 경우에는 만약 벽이 없다면, 독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식물들이 나우시카의 거처가 있는 곳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으니까. 나우시카 본인이야, 만약 독성에 중독된다면, 자기는 알고 한 일이니까 억울할 일이 없겠지만, 주변인들은 억울하겠죠. 일국의 공주가 자기 손으로 독성 포자를 들여와서 백성을 죽였다! 이렇게 되겠죠.

그런데 이렇게 벽을 만들었는데도 왜 이게 “벽 없음”의 행위를 대변한다고 제가 말씀드렸냐 하면, 벽이 있긴 한데, 벽 안에 있는 것과 벽 바깥에 있는 것이 같아서 그렇습니다. 독성 포자가 밖에도 있고 안에도 있어서. 뭔가 그… 안에만 있는 무언가를 따로 밖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벽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똑같은 게 들어 있어요, 안팎에. 이것이 인상적입니다.

벽이 있는데, 벽 안의 것이 벽 바깥의 것과 같아서, 벽이 없는 것과 흡사하다. 그럼으로써 이 벽 있음의 행위는 벽 없음의 행위와 같아진다.

게다가 평소에는 그렇게 벽이 없었던 나우시카가 벽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벽 없음을, 벽이 없는지를 아이러니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왜냐면은, 늘 벽이 없어야 돼, 사람은 벽이 없어야 돼, 이렇게 집착하는 게 그 자체로서 벽이에요. 이게 제가 이번 시즌에서 계속 놀려먹고 있는, 도 닦는다고 하면서, 깨달은다고 하면서 그거 너무 열심히 도 딱고 깨달으려고 해가지고 에고 패턴… 가장, 이 사회에서 가장 에고 패턴적인 행위와 별다를 게 없는 에고 패턴적 행위를 하는, 그것과 같아지는 것이 벽이 없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벽 없음에 집착하는 행위거든요. 그렇잖아요? 벽 없는 데에 집착하면 그 자체로 벽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나우시카는 얼마나 벽이 없는가? 벽이 없을 땐 없고, 벽이 있을 땐 있어야 된다는 걸 알 정도로 벽이 없다. 이거 너무… 깊죠.

이걸 뭔가… 철학적으로, 영성적으로, 상징적으로 분석하려면 한도 끝도 없이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설정이라고 저는 느껴지고요. 이 영화 자체가. 그냥 이 영화 통으로다가. 이것은, 어… 꼭 보세요. 저의 추천은, 스토리 플롯보다는 이러한 공존함을 중점으로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플롯하고 관련된 공존함도 많긴 하지만요. 예를 들어, 나우시카가 인질로 잡혀가는데, 인질인 와중에도 그녀는 너무나 공주예요. 인질인데, 그 와중에 너무 멋있다.

애니를 보고 사람들이 뭔가를 따라 한다? 300이 너무 잔인하다? 씬 씨티 너무 잔인하다? 바비의 몸매가 너무 비현실적이다? 사람들이 그런 픽션을 보면서 따라 하고, 비현실적이게 된다?

아닙니다. <나우시카> 보고 “나우시카처럼 멋진 사람 되어야지,” 하고 따라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굳이 300이든 씬 시티든 바비, 그것도 바비의 다른 것도 아니고 하필 그 비현실적인 몸매를 따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따라 하는 행위는 그 사람이 시청한 픽션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원래 안에 갖고 있던 것 때문입니다.

현실이 온통 각각 개개인이 가진 서사의 장인데, 하필 픽션을 보고 따라 하는 것만 봐도, 픽션이라서 따라 한 것도 아니고, 원래 있던 결핍을 마침 픽션이 기승전결까지 넣어 가며 간결하게 요약해 주니까 따라 하기 쉬워서 따라 하는 겁니다. 픽션이 누군가의 결핍을 확인해 주지 않기만 하면 그 결핍이 더는 결핍이 아니게 될 거라고 여겨서, 픽션의 내용을 관리해야 한다고 여기는 건, 환상이에요. 그거야말로 희대의 픽션입니다. 환상 중에서도 망상이에요, 망상.

인간은 결핍이 있으면 반드시 그 결핍을 확인할 무언가를 찾습니다. 픽션으로 안 주면 현실에서 찾습니다. 그것이 인간 의식이 가진 힘이에요.

적어도 변명은 하지 맙시다. 내가 이미 갖고 있던 결핍을 다른 누가 만들어 낸 거라고 변명하진 말자고요. 꼭 누구를 따라 해야겠으면, <나우시카>를 보고 나우시카를 따라 하자.


마지막으로, <우회>라는 영화를 다룰 때 제가 “야레야레”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인생의 장르를 골라보자는 말을 하면서, “야레야레”가 왠지 일본의 학원물을 떠올리게 한다는 그런 말을 했는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마침 “야레야레”가 나오더라고요. 제가 시간과 분도 기록을 해놨어요. 1시간 13, 14분쯤에 야레야레남이 나오더라.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야레야레는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야레야레.

꼭 이런 캐릭터가 나오더라고요. 세상 다 산 것 같은, 약간은 유머를 위해서 존재하는 듯한 캐릭터가 잦은 빈도로, 서사마다 한 명씩은 등장하는 것 같아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경우에는 이 야레야레남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하다.

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너무 아름다운 영화고. 지브리의 공기, 너무 좋고. 어… 살면서 숨 못 쉬겠다 싶으실 때, 지브리의 공기를 마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여러분? 인간의 의식은 정말로 막강합니다.

그런 과학 연구 결과들 있잖아요? 피아노를 실제로 연습하는 것과 피아노 연습을 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것이 상당히 비슷한 결과를 낸다. 운동에서도 그렇고. 그래서 스포츠 선수들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많이 한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어… 연구 결과에 이런 점이 지적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속이진 못한다는 거예요. 저도 많이 시도해봤지만, 나를 속이려는 시도는 늘 실패로 돌아갔다. 예를 들어, 순전히 내가 게을러가지고 연습하기 싫어서 피아노나 운동을 상상으로 하는 건, 제가 추측하기로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자기 자신을 용납을 못 할 거예요. 그런데 내가 부상을 당했다든지. 아니면 시간이 없다든지. 아니면 집에 피아노가 없어서 종이에 피아노 건반을 그리고 연습을 하는 거라든지. 아니면 운동장이 근처에 없어서 방에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거라든지. 이런 경우에는, 즉, 내가 연습을 안 하려고 안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했고,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그때조차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피아노, 내가 사랑하는 운동을 하는 나를 그리기에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고 하면, 그게… 효과가 없는 게 이상한 것 같아요. 과학 연구로 밝혀졌기도 하지만,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정도로 뭔가에 몰두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 자체만으로도 연습 효과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숨 쉴 공기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수 있는 걸 하고서 숨 쉴 공기를 찾는 건 정신 승리나 긍정병이 아니고, 나를 챙겨주는 겁니다. 그러니, 살면서 숨 못 쉬겠다 싶으실 때, 그런데 정말, 어… 솔직히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싶으실 때, 그때 우리가 할 남은 일은, 현실이 있든 말든 존재하는 나, 즉, 꿈 세계에서도 있는 나, 어째서인지 잠잘 때와 깨어 있을 때 연결되어 있으며 무궁무진한 나, 걔를 챙기는 일입니다.

할 일 다 하고서 지브리 영화든,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 숨 쉴 공기를 찾는 것, 나아가, 공기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풍요를 내가 경험할 권리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 태어났다는 걸, 남들은 뭐라고 아니라고 그들이 빡빡 우겨도 내가 나를 위해 계속해서 되새기는 것은 결코 현실 도피가 아니고요, 정신 승리나 긍정병이 아니며, 오히려 언젠가는 현실에서 숨 쉴 공기를 찾는 그 장면의 증거입니다.

이게… 너무 빡빡하다 보면, 숨 쉴 공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잊고, 원하는 방법도 잊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인식 자체를 못하게 되면, 둔감해져가지고 안 괴로운 듯, 해탈한 듯, 굉장히 깨우친 듯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실상은 그것이야말로 평화로운 좀비가 되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늘, 기회가 되는 대로, 생생하게 살릴 수 있는 것들. 그것이 고통이든, 숨 쉴 공기의 기쁨이든, 그런 걸 어떻게 해서든, 나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팔레트에 아주 여러 물감을 두고, 그것을 다 쓸 수 있게끔 말이죠.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이번 시즌의 유일한 책, <The Restless Supermarket> 갑니다. 아까 언급한 <우회> 에피소드에서 조만간 이 책 다룰 거라고 예고했었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아임이 생각했던 그런 장르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 예고를 했었고, 어… 얘기할 거리는, 언제나처럼, 항상, 무엇에 대해서든, 얘기할 거리는 있기 때문에, 이 녀석을 다음 에피소드에서 다루겠습니다.

근데, 음. 그때 언급했듯이, 한국어 번역은 없는 것 같고요, 왜 없는지 알겠어요. 한국어뿐만 아니라, 그 어떤 다른 언어로 이것을 번역한다는 것이 상상이 안 갑니다. 왜냐하면, 말장난이 너어어어어무 많고, 내용 자체가 언어에 대한 것이며, 특히나 영어에 대한, 아주 특정하게 영어에 대한 이야기라서 그래요.

이에 대해서 “누아르 어바니즘” 책의 해당 챕터의 저자가 이야기를 하는데, 아임 드리밍에서는 언어에 대한 거 외의 것들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어 팟캐스트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영어에 대한 매우 특정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 책에 관해 할 얘기는 많다. 특히 주인공 녀석이. 하. 참. 이 주인공 녀석이 참 특이한 녀석이라, 그 녀석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할 것 같아요. 따라서, 다음 주까지는 아무것도 보실 필요도, 읽으실 필요도 없답니다.

혹시 영어로 읽으실 분들도, 음…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읽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이 주인공 녀석은, 한마디로, 나우시카 언니와 반대예요. 안쓰러울 정도로. 나우시카 언니가 섹시하다면, <The Restless Supermarket>의 남자 주인공, 그는 반섹시. 안티섹시. 논섹시. 그것들의 상징이요 살아 숨 쉬는 화신이다. 거의 뭐, 어… 역대급이에요. 제가 태어나서 소비한 모든 픽션을 통틀어서 이렇게 섹시함이 결여된 인간은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근데 또 그러한 특성대로, 할 말은 많다. 왜냐하면 할 말이란 건 언제나 하면 만들어지는 그런 거니까. 왜냐? 저는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이니까요. 그 어떤 점들이 제게 던져져도, 저는 연결해서 모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거 얘기했던가? 그게 제가 좋아하는 거더라고요. 연결 못 할 것 같은 점을 연결할 때의 희열. 이것은 말이 안 될 것이다 했는데 말 되는 거. 의미와 상징의 동물인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하는, 그 이야기하기를 한아임은 가장 사랑한다. 벽이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니까.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Veaceslav Draganov – The Last Hero
  • Charlie Ryan – Forward Motion
  • Roman P – Arise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 2023 한아임

소개

✨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