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은 책을 다룰 겁니다. 아마도 이번 시즌에서 영화가 아닌 유일한 책이 오늘 다룰 이 책이 될 것 같아요. 제목은 <The Restless Supermarket>이고, 한국어 번역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왜 그런지 알겠다. 저번 에피소드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책은 영어라는 언어 그 자체에 대한 요소를 너무나 많이 담고 있어서, 번역이 거의 불가능한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아임이 이 책을 다루고 싶었던 이유는, 여기에 마법적 사실주의 요소가 나오는 줄 알아서였습니다. <누아르 어바니즘>의 챕터 중 하나에서 남아공의 도시 디스토피아를 논할 때 이 책이 등장하는데, 그 맥락에서 이 책이 나오며, 남아공의 급변하는 도시 경관을 묘사하듯 이 책에 마법적 사실주의적으로다가, 사람이 글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실제 세상이 바뀌는, 그러니까, 건물이 자리를 옮긴다든가 하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언급이 되거든요. 그래서 읽은 책이었는데, 사실은, 알고 봤더니, 별로 마법적 사실주의가 두드러지는 책은 아니었고, 오히려 극사실주의, 그중에서도, 와 정말 이런 인물이 있기도 하지, 싶은, 그런 인물이 주인공이 되어서, 놀라울 정도로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런 이야기였더랬습니다.
줄거리는, 교정자라는 직업을 가졌던, 이제는 은퇴한 남자가, 은퇴 후에도 너무나도 직업을 자신과 동일시 한 나머지, 페이지 위의 글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사방팔방 교정하면서 돌아다니다가 욕먹고 공격당하면서 억울해하고 기 막혀 하다가 누군가한테 칼 맞고 죽을 뻔했지만, 안 죽고 그냥 더 사는 얘기입니다. ‘문학,’ Literature with a capital L, 대문자 L이 붙는 ‘문학’이라는 장르로 분류되는 이야기가 대개 그렇듯, 플롯이랄 게 별로 없습니다. 이 아저씨가 활동 반경은 매우 비좁지만, 그 비좁은 데에서 분주하게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다가 된통 당하는 얘기예요.
일반적으로 소설의 주인공으로는 잔소리 많은 인물이 읽는 입장에서 즐겁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소설은 인물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재미로 소비하는 매체이니까요. 소설에서 외부인이 관찰 가능한 일만 벌어지면, 그것은 더는 소설같이, 특히 현대 소설같이 느껴지지 않고, 영화 대본처럼 느껴집니다. 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귀로 들을 수 없는, 냄새로 맡을 수 없는, 인물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 즉, 인물을 통해 필터된, 인물이 해석한 세상을 소비하는 것이 소설의 재미인지라, 주인공이 잔소리가 많으면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우, 태어나서 읽은 소설 중 이렇게 잔소리가 많은 인물은 처음이에요. 그리고 이 주인공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닙니다.
주인공의 직업이 교정자였다고 했잖아요. 교정을 중요시하는 것을 이해를 합니다. 왜냐하면, 맞춤법 틀리는 것도 좀 정도껏이어야지, 뜻이 틀려질 정도로 맞춤법을 틀리면 진짜 난감해요. 뜻이 헷갈릴 뿐만 아니라, 속이 약간 울렁거립니다, 정도가 심하면.
이 책에는 영어 예시가 나오는데, 그에 상응하는 한국어 맞춤법 예시를 들어볼게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낳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감기에 걸리면 어떻게 하고 싶죠? 감기를 낫고 싶습니다. 시옷 받침입니다. 그런데 간혹가다가, 감기를 출산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시옷이 아닌 히읗 받침을 쓰는 겁니다. 그러면 와우, 머릿속에서 혼동이 일어나요. 아니, 감기를 시옷 받침으로 낫고 싶은 게 아니라, 감기를 히읗 받침으로 낳으면, 감기가 더 많아지는 거잖아요? 감기가 번식하는 거라고요. 끔찍하지 않습니까? 감기보다 더한 병이면 더 끔찍하죠. 심지어 자기가 감기를 히읗 받침으로 낳고 싶은 게 아니라, 타인에게 “감기 낳길 바라” 하면, 히읗 받침으로 감기 낳으라고 타인에게 그러면, 이게 뭡니까. 이게 대체. 널 괴롭히는 그 감기가 네 안에서 더 번식하고 번창하길 바라. 이거잖아요.
근데 요거. 바라, 바래, 요것도 자주 틀리는데, 요 정도는, 음… 구어체로 굳어진 것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약간 짜장면 자장면처럼 쓸데없이 딴지 거는 거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바래랑 바라는 그렇게 크게 헷갈릴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옷의 색이 바래다. 그거랑 소망을 바라다. 이게 헷갈릴 일은 잘 없고, 옷의 색을 바라더라도 그게 그렇게 기괴하지 않거니와, 소망이 바래지는 것 역시 시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옷 받침 낫다와 히읗 받침 낳다는 어떻다? 기괴하다. 참말로 기괴하고, 감기를 출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다 보면, 가끔 뭘 보게 되냐면, “더 낳은 삶”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가 있어요. 댓글에 꽤 흔히 보입니다. 이건 뭐죠? 히읗 받침의 “더 낳은 삶”은 뭔가? 저는 이걸 보면, 너무 기괴해요. 출산 배틀인가? 요즘에 그런 말 쓰지 않나요, 기괴함 그 잡채. 잡채다 정말. 이것은 잡채다. 무슨 이렇게 뒤섞인 잡채가 다 있단 말인가. “더 낳은 삶”을 살라는 거예요, 타인에게. 아니면 자신에게. 이것은 무슨… 어… 충격과 공포예요. 그냥 낳은 삶이면 그러려니 하는데, 더 낳은 삶은, 두 개체 중 누가 더 출산을 많이 했는지를 비교분석하는 건지? 그로테스크하다.
그리고 최근에 본 맞춤법 틀림의 끝판왕은 아무래도 ‘외않되’ 같아요. 이거… 원래는 ‘왜,’ ㅗ와 ㅐ로 써야 하는 것을 ㅗ와 ㅣ로 쓰는 것. ‘안’이라는 글자에서 그냥 니은 받침만 써야 하는 것을 니은 히읗 받침을 쓴 것. 그리고 ‘돼’를 ㅗ와ㅐ가 아니라 ㅗ와 ㅣ로 쓴 것. ‘외않되.’
이것은 정말 현기증을 유발하고. 충격과 공포다. 그리고 이런 것이 그냥 웃기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한아임 속이 울렁거리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란 말이죠. 뜻이 달라지니까요.
특히, 이 책, <The Restless Supermarket>에도 나오듯이, 숫자를 틀리면 큰일이 벌어집니다. 의사가 주사를 일정량 놓으라고 했는데 0 하나가 더 붙거나 덜 붙어서 환자가 죽을 수도 있고요.
현실 세계에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정말 기가 막힌 사건이 있었더라고요. 나무위키에 이렇게 짧게 요약되어 있어요. “기계체조 도마 종목에선 주최측의 어처구니 없는 실책이 발생했다. 여자 개인종합 결승전 경기에 쓰인 도마는 기존의 도마보다 높이가 5cm 낮게 설치되었다. 이 때문에 선수들이 줄줄이 실수를 하며 낮은 점수를 받았고, 일부 선수는 부상까지 입기도 했다. 이런 엉망이 된 종목 진행에서도 우승자를 가리긴 했는데 우승자는 바로 약쟁이였다. 문제의 5cm 낮은 도마도 잘 뛰었지만 약물이 적발되어 메달이 박탈되었다.”
맙소사. 이건 정말. 도마 종목에서 도마의 높이가 얼마여야 하는지 표시한 책자 같은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책자는 수십 명이 검토해서 반드시 옳게, 반드시 맞게 해야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도대체 도마를 설치하는 사람들이 어디서 뭐 하던 사람들이길래 그냥 설레설레 와서는 틀린 숫자가 표기된 책자 그대로 하고 간 건지? 올림픽씩이나 되는 행사에서 그냥 아무 인력이나 와서, 도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이걸 설치하고 가나? 그리고 그 많은 주최측 관계자들이 있었을 텐데, 그걸 아무도 몰랐다고?
위키에는 안 나와 있지만, 주최측 고의였을 거라는 말까지도 있더라고요. 너무 어이가 없으니까. 제가 이 얘기를 유튜브 쇼츠에서 처음 봤는데, 기록이야 대부분 선수들이 다 망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선수가 부상을 입는 그 순간의 표정들이 나와요. 세상에 맙소사. 4년 그 이상을 준비한, 평생을 스포츠에 바친 선수들이 오타 하나 때문에 발목을 못 쓰고 손목을 못 쓰고 어깨를 못 쓰고, 심지어 체조는 정말, 잘못 떨어지잖아요? 목으로 잘못 떨어지면 전신마비가 될 수도 있는 종목이잖아요. 도대체 어떤 미친 자들이 이 설치에 가담했길래 이런 일이 생기는지? 진짜 미스터리하고. 그러니 고의라는 말도 나온 것일 거고. 이런 일들이 있기 때문에, 저는 정말로, 이 <The Restless Supermarket>에 나온 은퇴 교정자 주인공을 이해를 못 하는 게 아닙니다. 이해를 매우 해요. 이런 직업정신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좋습니다.
교정이라는 분야 외적으로도, 음… 소설 시점이 이 주인공의 시점이라서, 즉, 처음에 언급했듯이 모든 세상이 이 주인공의 관점으로 필터가 되기 때문에, 완전히 “그것이 사실이다”라고 신뢰할 순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요하네스버그가 살기 평탄한 곳이 아님은 사실인 것 같아요. 평탄함의 정도, 혹은 평탄함이 부재하는 정도에 대한 의견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스트레스풀한 환경이긴 한 것 같다. 스트레스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도 다를 수 있고, 스트레스가 좋다 나쁘다에 대한 의견도 다를 수 있지만, 스트레스 요소가 있긴 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칼을 갖고 다닌다든지. 위험하게 운전하면서 사람을 칠 뻔하는 자동차들이 있다든지. 거주자들이 여기저기 기물을 파손하고 훔친다든지. 그런 요소들이 사실인 측면이 있는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단, 이 소설 주인공이 워낙 교정자임을 넘어선 교정주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에 이 사람한테 교정함 직한 장면들이 더 꼬이는 것 역시 사실인 것 같아요. 자꾸 그걸 보고, 심지어 찾으니까, 꼬인다.
왜 찾는가? 이것은 다만 이 사람이 부정적인 사람이라든지, 뭔가 그런 성격적인 요소 때문만이 아니라고 저는 해석을 해봅니다. 그 이상으로, 교정이란 이 사람의 존재 이유인 것 같아요. 즉, 교정할 것이 없어지면 이 사람은 자기가 왜 존재하는지를 모르는, 그런 사람인 것처럼 소설 속에서 그려지고요, 따라서, 히읗 받침의 “더 낳은 삶” 아니면 완전히 슈방구 그 잡채로 스펠링된 “외않되”에 상응하는 영어 맞춤법 오류를 보면서 자기는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사실은, 그 뒤집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런 오류들이 없어지면 자기 존재 자체도 없어지는, 그런 인물입니다.
이렇게, 이 주인공 아저씨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실제로 맞춤법 등의 오류라는 것은 정말이지, 그냥 무슨 종이에만 남아 있는 일이 아니고, 시드니 올림픽 예를 들었듯이, 물질세계에 영향을 준다. 그 도마 높이 수치 표기에 단 하나의 숫자가 틀렸기에 수많은 선수들의 선수 인생이 망가졌단 말입니다. 숫자는 특히나 이런 영향력이 있고, 문자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어, 책에 진짜 웃긴 예시들이 나와요. 부고란에 쓰인 오타라든지, 이런 예시가 나오는데, 진짜 이건… 고인 모욕 오타 있잖아요? 그런 게 나와요. 고인이야 고인이니까 그렇다 쳐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보면 어이가 없겠죠.
근데 아무튼, 이렇게,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서도, 이 주인공 아저씨의 피해의식이 너무 심각하다. 처음에는 약간의 시적 허무함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적 허무함이란, 어, 이 아저씨가 그런 말을 하거든요. “나의 일은 잘하면 잘할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죠? 도마 종목에서 누가 오타를 잡았으면, 재난이나 다름없는 미친 실수가 벌어질 기회가 없었을 것이기에, 도마 높이라는 정해진 숫자가 있다는 것조차 많은 이들이 인식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경기 자체를 봤겠죠.
이게 약간 그… 제가 간간이 말씀드렸던, “일을 너무 잘하면 아무 이야기도 없다”는 그런 아이러니와 연결이 됩니다. <고지라> 같은 영화에서 사람들이 일을 너무 잘해가지고 <고지라>가 등장하자마자 죽었다면, <고지라>라는 영화는 없습니다. 당국이 자기네 능력을 뽐낼 기회조차 없어요. 너무 능력이 좋으면 능력을 뽐낼 기회가 없다. 특히나 이런 뭔가… 재난 방지. 사고 방지. 뭘 안 일어나게 하는 일은 그러하다.
그리고 거기에 약간 비운의 측면이 있을 수 있긴 하잖아요. 그래서 그것이 좀 시적 허무함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그런데 가면 갈수록 이 아저씨가 스스로를 너무 불쌍해하는 거예요. 하. 이게 약간, 이번 시즌에 의도치 않게 계속 등장하는 요소 같은데, 제가 생각해 봤어요. 왜 그런지.
왜 그런가 하니, 기본적으로 현대적 서사란 갈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이 처음엔 꼬이다가, 잘 풀리는 것에서 독자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잖아요. 이때 일이 처음에 꼬이려면, 처음에라도 반드시 주인공이 스스로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늘 그래요. 왜냐하면, 모든 게 다 평탄한 주인공에게는 현대적 서사가 들어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뭔가 문제가 있어야 해요. 크든 작든.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카타르시스를 위하여, 이야기의 끝에 가서는 그 과도한 자기 연민이 용해되고, 독자도 주인공도 어느 정도 행복하게 끝난단 말이죠.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게 없어요. 카타르시스 없어요. 주인공 아저씨는 그냥 영원히 자기가 계속 불쌍해. 그런데 그게 무슨 뭔가… 진짜 너무 힘들게 사는 경우도 있잖아요. 몸이 너무 아프다든지. 너무 경제적으로 빈곤하다든지. 그런 경우들이 있는데, 이 아저씨는, 이 아저씨가 생각하는 문제는, 심지어 은퇴를 한 상황인데도 문제라고 여기는 그 문제는, 얼마나 하찮은 것이냐면, 페이지에 있는 글자 한두 가지란 말이죠. 그러니까 처음에는 좀 시적 허무함인 줄 알았던 것도, 어… 이 소설 자체에는 시가 있을 수 있지만, 이 인물에는 시가 없다고 저는 여겨졌습니다. 하나도 안 불쌍해요.
이 주인공은 자기 일이 굉장히 위대하다고 여기면서, 자기한테 고칠 거리를 주는 사람들한테 고마워하질 않아요. 이 사람의 일은 투명한, 보이지 않는 일인 걸 넘어서서, 누가 먼저 잘못을 해놓지 않으면 아예 시작을 못 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걸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자기가 이 세상을 다 맞춤법에 맞게 해놓으면 자기의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는 걸 이론상으로라도 모르는 것처럼 굴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가 왜 이 사람한테 연민을 못 느꼈냐면, 영어에 대한 책이라고 했잖아요. 이 소설책이 <누아르 어바니즘>이라는 논픽션 책의 남아공 챕터에서 언급되는 이유는, 남아공의 뒤섞인 문화가 나타나는 방식 중, 언어의 오용과 남용이 논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한 픽션 레퍼런스로서 <The Restless Supermarket>이라는 이 소설책이 쓰이는 건데, 어… 그래서 저는 근본적으로 이 소설 주인공이 안 불쌍한 거예요. 이 사람은 백인이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백인이 아닌, 혹은 백인이지만 외국인인 사람들에 대해서 온갖 교정을 늘어놓는 겁니다. 이 측면이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서도 언급돼요. 그 챕터를 쓴 저자분도 이 소설책의 주인공에 대해 느끼는 양가적 감정이 저랑 흡사한 것 같습니다. 즉, 이 주인공이 맞춤법을 중요시하는 게 이해는 가고, 실제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는 게 맞는데, 이 주인공은 독자가 막 좋아하고 이해하고 그런 부류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그리고 <누아르 어바니즘> 해당 챕터의 저자분은 그것이 의도된 것인 듯하다고 얘기를 하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소설책은 그러니까, 주인공이 문제가 있었는데 끝에 가서 그것을 해결하고, 승리하고, 행복해지고, 세상이 평탄해지고, 그런 서사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는 그대로예요. 별로 달라지는 게 없고, 저는 오히려 어… 이 사람의 정신 상태가 끝에 가서 더 의심될 정도로, 음… <누아르 어바니즘>의 해당 챕터의 저자분이 결말에 대해 해석한 것은 약간 희망적이었는데, 제가 느끼기에는 이 소설 주인공에게 전혀 아무 가망도 없는 식으로 소설이 끝났다고 여겨질 정도로, 이 은퇴 교정자는, 왕년에 교정자였던 것을 넘어서서, 교정주의자예요. 그리고 이야기의 처음보다도 끝에 가서는 더 교정주의자가 되었다고 저는 여겨지던데, 아무튼, 왜 이런 주인공에게 연민을 갖다가도, 한아임의 경우에는 연민이 사라졌을까, 했을 때, 하필이면 이 사람이 다루는 언어가 영어이기 때문인 게 꽤 컸습니다.
어… 무슨 말이냐 하면, 예를 들어, 어떤 작은 나라에서, 그 나라 사람들만 쓰는 말이 있는데, 그 나라가 여러 전쟁과 침략을 겪었다고 하면, 그 나라의 교정자가 그 언어에 부여하는 중요성이 막대할 거라고 여겨지거든요. 그런데 영어? 영어? 영어 쓴다고 지금 이러는 거니, 주인공아?
어… 영어가 왜 파괴될까요? 많은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제 생각에는, 영어 쓰는 자들이 남의 나라 하도 침략하고 다녀서 그렇습니다. 영어 파괴되는 게 싫으면, 영국은 제국주의를 하지 말지 그랬어, 애시당초에. 왜 이 나라 저 나라 파괴하고 다닌 것도 모자라서 이제 와서는 영어를 못한다고 난리야.
심지어 이 주인공은 유럽에 대한 묘한 집착이 있는데, 유럽인이 아니에요. 이 녀석은 남아공 사람이라고요. 근데 뭐, 부모가 유럽에서 왔는지, 아니면 조부모가 유럽에서 왔는지, 그렇다고 쳐도, 뭐다? 그러면 굴러들어 온 돌이잖아. 그런데 근본이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근본 따지면서 이래라저래라하니까 어이가 없는 거예요.
특히나 이 주인공이 영어 외의 다양한 언어들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보면, 타인이 영어를 소중히 안 여겨주는 게 당연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영어를 소중히 여기던 타인도 이 사람 앞에 가면 영어를 안 소중하게 여겨줄 거예요. 왜냐하면, 영어 외의 다른 언어를 이 사람이 엄청나게 막 써요. 심지어 그 다른 언어가 어떤 한 인간의 이름일지라도, 그걸 막 씁니다. 그러니까 저는 처음에는 이 주인공이 교정을 사랑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잘 뜯어보면 그것도 아니에요. 자기가 자기 나라 말이라고 여기는 그 언어만 중요하고, 남의 나라 말 교정은 안 중요하단 겁니다.
그런데 심지어 자기가 자기 나라 말이라고 여기는 그 언어가 뭐다? English. English는 굳이 따지자면 뭐죠? 영국어죠? 영어. 근데 남아공 사람이 유럽인인 척하면서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심지어 영국은 이제 유럽이 아니라고도 말하잖아요. 지금 현재, 현실에서. 이제 영국은 따로 놀잖아요. 원래부터 섬이었는데, 그 상태에서 남의 나라 침략하고 다니다가, EU 였지만 이젠 아니잖아요. 대륙을 분류할 때는 유럽이라고 분류가 되기야 하겠지만, 문화적 의미에서의 유럽? 영국은 이제 유럽 아니라는 사람들 여럿 봤어요. 영국인 포함해서. 정신적으로 유럽에서 탈퇴했다 이거죠.
아무튼 저는 정치적으로 유럽이란 무엇이냐를 정의하려는 건 아니고요, 언어적으로, “우리 나라 말 망가뜨리지 마!”라고 할 자격이 가장 없는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English라고요. 그 뒤에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등이 있겠네요. 하여간에 제국주의 해놓고서, 그 결과로 인하여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너희 나라 말을 쓰게 됐는데, 그게 너희가 작은 땅덩어리를 차지할 때에 비해 원활하게 통제되지가 않고, 통제되지 않음을 넘어서서 현지 언어와 섞여서 다른 언어가 되는 듯해 보일 때, 내가 그걸 왜 불쌍히 여겨줘야 하지?
그런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어요, 예전에. 영국에 가서 워러라고 하면 못 알아듣고 워터라고 해야 알아듣는 경우가 있다고. 물론 뭐,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닐 테지만, 어… 저는 미국에 사는데, 영국인들 중 영국 영어에 대한 웃기는 자부심 있는 경우가 있다는 이미지는 미국에 좀 있는 것 같고요. 영국 내에서도 또 어떤 영어 쓰는지 따진다면서요. 할 일 드럽게 없어.
이게 어… 웃긴 건, 원어민이란 건 원래가, 외국인이 좀 이상하게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것이 바로 원어민이란 점입니다. 그렇잖아요? 내가 원어민이면, 상대가 좀 틀려도, 나는 나의 언어의 여러 경우의 수를 알기에, 척하면 척 알아들을 수 있는 측면이 있어야 내가 원어민인 건데, 워터 워러 따지고 있는 거 보면, 좋겠다 너네 그래. 좋겠어 아주 그냥. 너네 나라 제국주의의 잔재를 그런 식으로밖에 못 써먹어서 좋겠어, 아주 그냥.
게다가, 이런 자잘한 걸 외국인들만 틀리는 것처럼 망상하는 원어민들이 있는데, 그럼 원어민들은 다 해당 언어를 잘하는가? 전혀 아니죠.
한국어로 감기를 출산하는 사람 중 외국인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대부분은 한국어 원어민이 감기를 출산하고 다니는 겁니다.
영어도 똑같아요. 영어 틀리는 사람 중 외국인이 더 많게요 원어민이 더 많게요? 당연히 원어민이 더 많죠. 그냥 원어민 자체가 더 많으니까, 숫자가.
이게 어… 한국어든 영어든 어떤 언어든, “와, 외국인인데 우리 나라 말 잘한다” 이럴 게 아닙니다. 이게 특히나 요즘, 2023년에 얼마나 웃긴 말인지, 그냥 아무 유튜브 영상이나 틀어서 거기 댓글창 보세요. 장담컨대, 첫 50개의 댓글에 최소한 50개의 맞춤법 오류가 있을 겁니다. 띄어쓰기는 말할 것도 없고, 어, 아주 후하게 쳐줘서, 옛날 띄어쓰기 방식까지 맞는 걸로 치고, 습니다 읍니다, 이런 거, 지금 방식 옛날 방식 다 맞는 걸로 친다고 해도, 그래도 첫 50개의 댓글에 최소한 50개의 맞춤법 오류가 있을 것이고, 그중 외국인이 있다 친들, 대부분의 댓글은 원어민이 단다. 대부분의 오류는 외국인이 아닌 원어민이 하고, 특히나, 각 국가의 각종 표지판 있죠? 그건 공무원이 쓸 거잖아요. 그러면 내국인이겠죠? 완전 찐 내국인이겠죠? 국적까지 내국인인 내국인이겠죠? 근데도 거기도 오타가 있다니까. 그런데 무슨 외국인을 무시해. 외국인이 자기 나라 말 해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물론. 전혀 현지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경우는 아주 꼴사납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도 솔직히. 영어 사용자가 더 많나요, 다른 언어 사용자가 더 많나요? 영어 사용자가 더 많습니다. 뭐냐 하면, 한국 사람들 미국 오면 대부분 영어 배우려고 하죠? 아무리 한인타운에 영어 한마디도 못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들, 대부분은 영어를 배우려고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게 무슨 통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영어 사용자 중에, 남의 나라 가서 당연히 상대가 영어를 잘할 줄 아는 경우가 있어요. 물론 모든 나라의 말을 배울 순 없지만, 현지 언어를 못 배워서 미안해하는 거랑, 현지 언어 한마디도 못 하는 주제에 와가지고는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식으로 구는 거랑은 천지 차이잖아요? 영어 사용자만큼 남이 자기의 언어를 구사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나요? 저는 본 적이 없는데.
다시 말하지만,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적반하장인 건 아니죠. 그렇지만 비율적으로? 음. 영어 사용자. 심지어 그중에서도 제국주의 영어 사용자. 그런데 <The Restless Supermarket>의 주인공은 심지어 그 제국주의 영어 사용자 중에서도, 어… 이 아저씨를 제국주의자들이 끼워 주지도 않을, 그런 자라고요. 그래서 이 사람이 느끼는 방식으로의 자기 연민은 제가 느껴줄 수 없지만, 이 사람이 불쌍해요. 다른 방식으로. 뭐냐면, 이 사람은 크나큰 망상에 빠진 거예요. 자기가 남아공에 사는 백인인데, 자기가 유럽인인 줄 알고, 하여간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남아공에 사는데 왜 자기가 유럽인인 줄 알아요? 말이 아예 안 되잖아요. 게다가 아예 차라리 대놓고 제국주의자인 것도 아니게, 하여간에, 진짜 이상한 캐릭터예요. 웃겨요. 웃기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요. 그리고 문학이라는, Literature with Capital L 장르의 특성상, 주인공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히어로가 아닌 경우가 꽤 되죠. 이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어… 웬만한 독자는 이 사람보다는 생산적인 삶을 살고 있을, 그런 인물이에요.
그런 와중에 양가적 감정이 끝까지 유지가 됩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왜냐하면, 아까 언급했듯이, 교정이란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바는 아닌 데다가, 이 사람 주변에 있는 다른 인물들이 확실히 정상이 아니에요. 이 주인공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 사람더러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상하다고요.
그 왜, 자기가 되게 외향적이고 춤추는 거 좋아하고, 노래하고 시끄러우면 잘 지내는 걸로 망상하는 사람들 있죠? 규칙 어기면서 그것이 자기가 되게 자유분방한 줄 아는 사람들. 그런 류의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 정도가 굉장히 심해요,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그냥 무슨 취향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불법, 폭력, 막 이런 정도까지 갑니다 나중에는.
그리고 그들이 주인공을 대하는 방식이 수동공격적입니다. 자기네가 이 주인공이 싫으면 안 놀면 되잖아요. 무슨 같은 학교에 다니거나 같은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닌데, 돈 벌러 온 것도 아니고 공교육 받으러 온 것도 아닌 사람들이 뭣 하러 그렇게 주인공을 생각해 주는 척을 하면서 돌려 말하고 또 돌려 말하는지. 주인공더러 눈치 없다고 하면서, 대놓고 말을 안 해줍니다. 눈치가 없다고 정말로 생각하면 대놓고 말을 하겠죠. 그런데 그 와중에, 그렇게 배려해 주는 척을 하면서 주인공한테 억지로 자기네 방식에 맞추라고 해요. 그러면서 그 이유를 들 때 뭐라고 하냐면, 주인공이 자기네더러 주인공 방식에 맞추라고 해서래요. 그러니까 쌍방과실입니다. 그냥 끼리끼리 만난 거예요. 차이가 있다면, 주인공은 혼자만의 싸움을 하고 있고, 주변인들은 떼로 몰려다닌다는 게 그 차이입니다.
그 떼가 소설의 끝에 가서는, 이들이 모두 함께 자주 모이던 카페 겸 식당을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어요. 완전히 기물을 파손하고 그냥… 정말 이건 정상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구나, 하는 그런 결말이 나오거든요. 그걸 보면 그러니까, 주인공을 마냥 나무랄 수도 없는 거긴 하단 말이죠. 얘네가, 나머지 애들이, 실제로 정상이 아니야. 주인공이 겁에 질릴 만도 해.
그러나 쌍방과실이라는 건 뭐냐면, 그러니까, 이들 모두가 엮일 만해서 엮였다는 겁니다. 자기 연민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 엮일 만해서 엮여서는 서로 불쌍해하고, 끝까지 불쌍해하다가 끝나는 얘기인데, 다만 끝에 가서는 그 카페 겸 식당이 완전히 박살 나기 때문에, 이들이 여기서 다시 만날 일은 이제는 없을 겁니다. 그게 희망이라면 희망이에요.
그래서 뭔가 이 소설이… 어… 재밌어요. 왜냐하면, 이야기 중에, 주인공에게 몰입되어서 재밌는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 속 인물들 중 그 누구도 잘되든 망하든 하등 관심이 없어서 마음이 편한 이야기가 있잖아요. 이 이야기는 저에게 후자였습니다. 잠깐 이 아저씨가 시적 허무함 스타일의 아저씨인가 싶었는데, 그냥 자기 연민이 쩌는 아저씨였고, 그래서 아저씨가 망하든, 죽든. 왜냐면, 끝부분에 거의 죽을 뻔하거든요? 거기서 아저씨가 죽었어도, “아, 그래 죽임당할 만했지.” 이랬을 거예요. 유럽인도 아닌 남아공 백인이 제국주의 언어의 대표주자인 영어를 남들이 망가뜨리네 마네 하면서, 남들 이름은 막 부르면서 그 사람들 하는 말을 교정을 하고 다녔다니까요, 사람들을. 그래서 죽었어도 놀랍지를 않았을 거예요.
이런 식으로, 인물에게 엄청난 정을 품게 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편한 면이 있고, 제가 궁금했던 건, 도대체 이 인물의 시점에서 본 요하네스버그가 실제 요하네스버그와 얼마나 흡사한가,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모든 인물이 그렇겠지만, 이 인물은 특히나 자신만의 세상에 사는 인물이라서, 대체 이 사람이 말하는 게 사실인지를 좀 알 수가 없었어요. 남아공 사람이 유럽 들먹이는 것부터가 이상하잖아요. 뭔 소리야 진짜. 그래서 이 사람이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게 뭐냐면, 이 아저씨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아저씨는 일단 은퇴를 해야만 했던 것 같아요. 자의로 일을 그만하게 된 것만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지금, 2023년처럼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게 수월하지 않은 시대인 것 같아요. 1990년대가 배경이거든요? 2008년경 아이폰이며 킨들이며 등등이 나오면서 페이스북 애플 구글 등 거대 테크 기업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1990년대면, 어… 아날로그 시대죠, 아직. 국제적으로 교정 프리랜서 작업을 하는 건 당연히 어려웠을 것이고, 요하네스버그 내에서도 집에서 작업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아요.
그런데 만약 이 아저씨가 2023년에 살았다면? 이 똑같은 교정주의 아저씨가 2023년에 살았다면? 저는 요하네스버그에 가본 적은 없지만, 일단 인터넷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교정에 미친 이 아저씨가, 뭐, 일을 사랑하는 거야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니까, 교정 작업을 은퇴하고서도 계속하고 싶었으면, 생산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았을 거예요.
단, 이 아저씨가 아무리 자기를 유럽인으로 봐도, 아마 아무도 그를 유럽인으로 쳐주지 않았을 겁니다. 음… 영어는 그러니까. 영어가 널리 쓰여서 영어 사용자들이 편한 것도 맞지만, 그만큼 그 안에서 세분화가 되어 있어서, 미국 영어, 캐나다 영어, 영국 영어, 여기에 교정자를 다 따로 구하겠죠. 예를 들어, Color에다가 u를 넣느냐 마느냐, 이런 차이부터 갈릴 것이고, C-e-n-t-e-r이냐 c-e-n-t-r-e이냐, 이런 것도 갈리겠죠. 게다가 뜻이 달라지는 단어도 많대요. 저는 미국 영어 말고는 잘 모르는데, 가끔 영국 드라마 보다 보면 저게 뭔 말이야 싶은 것들이 꽤 됩니다. 그러니 이 아저씨가 아무리 자기가 유럽인이라고 우긴다 한들, 남아공 안에서 작업을 하는 게 가장 유리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아저씨의 망상과는 달리, 교정자는, 다른 많은 직업이 그렇듯, 그렇게 대단히 희귀한 직업이 아닙니다. 이 아저씨는 또 막 자부심에 쩔어가지고 위대한 교정자는 드물다 어쩌고저쩌고 이러는데, 물론 드물겠죠. 모든 직업이 그렇겠죠? 모든 직업에서 가장 위대하게 잘하는 사람은 정의 자체가 드물게끔 정의되어 있으니, 드물겠죠. 그런데 안 위대해도 교정할 수 있고요, 안 위대해도 가수를 하고, 안 위대해도 공무원을 하고, 안 위대해도 책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스포츠도 하고, 그런 거잖아요, 원래. 왜냐하면, 위대함이 가수, 교정자, 화가, 작가, 정치인, 공무원, 회사원 등등의 단어에 아예 내포되어 있으면, ‘위대한 무엇무엇’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불필요한 반복이겠죠. 그런데 그러한 다양한 직업, 다양한 무엇무엇들에 ‘위대함’이란 건 내포되어 있지 않은 게 당연하기 때문에, ‘위대한 무엇무엇’도 있고 ‘안 위대한 무엇무엇’도 있잖아요. 그리고 안 위대한 무엇무엇들도 다 그 무엇무엇을 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위대한 교정자만 남아야 한다는 것처럼 얘기를 하는데, 여기서 약간, 그는 스스로가 프로라고 하지만 프로가 아닌가? 싶더라고요. 이… 이러한 태도는, 업계인이 아닌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특유의 특권입니다. 말하자면, 방구석 축구러가 세계적인 축구선수 훈수를 두는 것과 비슷한 특권이라고요. 그러나 그 어떤 축구선수도 다른 축구선수한테 쉽게 훈수를 못 둘걸요? 그것은 관계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프로란, 같은 업계 타 프로 중에 마음에 안 드는 프로를 보고 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내가 축구선수인데 왜 내가 못한다고 여기는 축구선수를 보고 있어요. 잘하는 축구선수를 봐야지.
이런 이유 때문에, 사실, 2023년에 이 아저씨가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재미 삼아 상상해 보는 거긴 한데, 그 어떤 시대에 태어났어도 못 살았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문제에 중독된 인물이거든요. 이 책을, <The Restless Supermarket>을, 그 측면에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문제 중독. 문제를 해결한다고 자기는 생각하지만, 그것은 망상에 가깝다.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해결하기 위해 문제가 있어야 하는, 문제에 중독된 사람이다.
이것도 이번 시즌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네요. 원인과 결과의 하나됨. 실제로 이 소설책을 읽으면, 그 둘을 분간할 수가 없어서 흥미로운 순간순간들이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거의 뭐랄까… 해결하기 위하여 잘못되어야 함? 이런 중독의 뉘앙스가 있어요. 그래서 이 아저씨는 아마 어떤 시대에 태어났어도, 문제를 필요로 하기에, 문제를 만들어 냈을 겁니다. 그것을 해결한다고 자기는 생각하지만, 해결하지 않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기에, 그러니까, 해결하지 않는 자신은 존재의 이유를 모르기에, 또 한 번 그러니까, 자신을 어떤 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도구로서 기능하지 않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어서, 그 어떤 시대에 태어났어도 문제를 봤을 것 같아요.
이 사람이 틱톡을 했으면 인기를 끌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 아저씨는 아마 틱톡을 안 했을 거예요. 틱톡을 해봤는데 별로여서가 아니라, 틱톡 그 자체를 저급하다고 여겼을 것 같아요. 이 아저씨가 위대한 교정자에 대해 얘기하는 거나, 자기가 유럽인이 아닌데도 유럽유럽거리는 거나, 남의 나라 말은 다른 사람 이름인 경우에조차 막 쓰면서 영어의 위대함 어쩌고저쩌고하는 거나, 그런 걸 보면, 그렇게 말하는 내용이 문제가 아니고, 그런 것만 보는 인간이기 때문에 틱톡을 저급하다고 여겨서 못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내용 그 자체는 너무나 틱톡 material이라고 저는 생각했거든요. 틱톡은 뭔가… 1시간 듣기는 짜증 나는데 16초 보기에는 웃긴, 그런 콘텐츠가 너무나 번성할 수 있잖아요. 이 아저씨가 웃긴 말도 많이 해요. 이 아저씨가 교정을 하는 게 틀린 걸 교정하는 건 아닙니다. 나중에 가서는 좀 이 사람이 제정신인가 싶은 그런 씬들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이 사람이 아예 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반쯤은 개그 콘텐츠로, 반쯤은 교육 콘텐츠로, 틱톡 같은 플랫폼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본인이 원한다면. 근데, 아마, 본인이 안 원한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람이 사실은 가장 문제를 필요로 한다는 아이러니. 이것에 대해 요즘 참 많이 생각합니다. 이것이 긍정주의적으로 해석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교정과 교정주의가 다르고 과학과 과학주의가 다르듯 긍정과 긍정주의가 다르다는 게 그 이유 중 하나이고요, 그저 긍정적이라고 하더라도, 긍정적인 게 더 좋아서, 그래서 긍정적이어야 해서 문제를 문제로 보지 말아야 한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뭔가 그런 옳고 그름, 좋고 나쁨, 긍정과 부정, 이런 뜻이 아니고요,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봤을 때,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이 있는 것만큼이나, 해결책이 있어야 하므로 해서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더라는 거죠.
긍정 부정, 좋고 나쁨, 옳고 그름에 대한 거라기 보다는 시간의 순서, 내지는 순서 없음에 대한 측면에서 저는 이 아이러니를 요즘 자주 생각합니다. 앞뒤와 앞뒤 없음이랄까.
이 모든 것이 요즘 한아임이 관심 두는 명상과도 연결이 된다. 명상, 글 쓰는 방식, 모든 것을 하거나 하지 않는 방식이 전부 연결이 된다. 잠을 자는 것, 자지 않는 것. 못 자거나 안 자는 것. 밥을 먹는 것, 밥을 먹지 않는 것. 못 먹거나 먹지 않는 것. 그 전부. 다 연결이 된다.
밥을 먹기 위해 사는 건지, 살기 위해 밥을 먹는 건지.
글을 쓰기 위해 사는 건지, 살기 위해 글을 쓰는 건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닭이 없으면 닭의 달걀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지만, 또한 달걀이 없으면 그 달걀을 낳은 닭도 있을 수가 없지. 여기에는 ‘낳은’이 히읗 받침을 갖고 있습니다.
“더 낳은 삶.”
하… 울렁거리네요. 히읗 받침의, 더 낳은 삶. 누가 더 낳나 보자. 이런 느낌. 댓글에 그런 게 쓰여 있더라니까요. “우리 모두 더 낳은 삶을 살아요.” 이런 글이었는데. 세상에 맙소사. 우리 모두 경쟁하자는 건가? 누가 더 낳나?
이 책의 주인공이 정말로,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재밌어요. 왜냐면 아저씨가 좀 제정신인 거 같을 때는 굉장히 유창하거니와, 실제로 너무 이상한 일들이 많이 벌어져서, 그것들이 만약 아저씨의 망상이 아닌 사실이라면, 정말 무섭고 걱정될 것 같거든요. 그리고 아무리 외부에서 망상이라고 하든 안 하든, 사실 이 아저씨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죠. 본인의 세상에서 그것이 정말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고, 소설은 그러한 개인의 우주의 절대성을 아주 잘 드러내 주는 매체이며, 그래서 소설이라는 것 자체가 흥미롭고, 특히나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이런 인물이 등장하면, 좀 스트레스풀하긴 하지만, 나름의 재미가 있다.
순서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언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데, 그 측면에서도 이 소설이 흥미로웠습니다. 이 각종 사건들에서 도대체 무엇이 시작이었는지, 그것에 대해 이 주인공이 자주 언급하거든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라고 자주 질문을 해요. 그런데 어쩌면 이 질문에서부터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어요. 질문 자체가 이렇잖아요. 잘못이 있다고 여기잖아요. 이런 뉘앙스의 질문을 주인공이 여러 번 던집니다. 뭔가 문제가 있는데 이 문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것을 해결이라고 주인공은 여기지만, 해결을 구하려는 그 의문에 이미 문제의 원인이 들어 있는 걸 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문제가 생기기 전부터 주인공은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던가.
언어란 정말이지. 신기하죠? 언어의 특성이, 그림과는 다르게, 순서가 있잖아요. 그 자체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언어라면 그런 특성이 있단 말이죠. 순서라는 특성이.
반면 그 왜… 한국에서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원래 제목은 “Arrival”인 영화에 외계인이 나오는데, 그 외계인들은 문장을 한꺼번에 말하잖아요. 문장이라는 개념이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어요. 그들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현재에 알고 있는 그런 외계인인 것처럼 그려지는데, 그래서 문장도, 그들이 뭔가 말을 할 때, 원 모양의 얼룩무늬 같은 것을 통해 소통을 합니다. 인간은 문장이 종이 위에 쓰일 경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니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아니면 위에서 아래로 흐르잖아요. 혹은, 말로 할 때, 이렇게 단어를 순서대로 말합니다. 제가 “이렇게”라는 단어와 “말합니다”라는 단어를 한꺼번에 말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그렇게 한다면 알아들을 수가 없겠죠.
그런데 그 영화의 외계인들은 모든 것을 동시에 내뱉는다. 그래서 인간인 제가 보기에는 문장, 말이라기보다는 그림으로 느껴지던데. 많은 부분, 인간은 항상 이 시간성 안에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간성을 벗어날 수 있는 경험을 하면 정신건강에 좋은 것 같습니다.
미술작품을 본다든지. 나아가 나의 머릿속에서 과거와 미래의 경계를 굳이 만들지 않고 여행을 떠난다든지. 그러니까, 자유로울 수 있는데도 굳이 안 자유스럽지 않도록 말이죠. 습관으로 인해 선형 해석을 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진짜, 이 책. 그렇더라니까요. 이 주인공 아저씨는 문제가 있기에 해결하려 한다고 주장하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그게 아니에요. 해결하려고 해서 문제가 있더이다.
그러합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다시 영화 얘기를 합니다. 한국어 제목이 “산 자의 기록”이라는 영화인데, 일본 영화입니다. 영어 제목은 두 버전이 있나 봐요. I Live in Fear라고 번역된 버전이 있고, 문자 그대로 번역해서 Record of a Living Being이라고 된 게 있습니다. 일본어 제목은 “산 자의 기록”인가 봐요. “이키모노 노 키로쿠.” 그래서 한국어 제목은 일본어 제목을 그대로 번역한 것인가 봅니다. 근데 영어 제목은 왜 두 개의 버전이 있는가? “산 자의 기록”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뜻이 멋있는 데다가, 영화를 봐 보니까, 실제로 “산 자의 기록”이라는 말의 의미가 돋보이는 것 같아요. 멋진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 “The Restless Supermarket”
- 2000 시드니 올림픽
- “2000: The Sydney Vault Debacle and the Apparatus Norms Hypothesis”
- “컨택트”
- “산 자의 기록”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Avner Kelmer – Sugar Cubes
- Matt Stewart-Evans – Sneaky Tricks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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