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63] 낙원의 렌즈, 혹은 그 부재, “산 자의 기록”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 얘기할 영화, 제목이 멋있는 영화, “산 자의 기록”이에요. 일본어 제목, “이키모노 노 키로쿠.” 이 억양을 제가 잘 말한 건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일본어의 최대 강점 중 하나는, 쓰인 대로 읽으면 얼추 읽혀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한번 읽어봤습니다.

“산 자의 기록”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입니다. 엄청 유명하시죠. 아마도 “라쇼몽”이 이분 영화 중 제일 유명한 것 같아요.

아무튼 “산 자의 기록”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어떤 노인이 수소폭탄, 핵폭탄으로 인한 방사능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폭탄이 터진 직후도 아닌데, 즉, 다른 사람들은 멀쩡히 잘 살고 있는데, 혼자서만 극도의 두려움을 갖고 있다, 혹은 갖고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 자신의 온 가족을 데리고 브라질로 이민을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가고 싶어 하느냐? 아닙니다. 그리고 가족이 한두 명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가족들은 가정 법원에 중재를 요청하는데, 그 내용이 뭐냐면, 법원이 이 노인을 한정치산자로 선고하게끔 해서, 온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뿌리뽑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물들의 요소를 보면, 이 영화는 막장 스토리로 보일 수 있습니다. 네. 막장 요소들에 대한 얘기로 이번 에피소드를 시작해 볼게요. 영화 자체는 막장 영화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그 안의 요소들은 매우 막장적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쉬워요. 제목부터 “산 자의 기록”이고, 방사능에 대한 이야기고, 가족들이 서로에게 무슨 짓을 할 수 있나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것이 자칫 너무 무겁고 진지하게 여겨질 수 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이유가 이 막장 요소들 때문인 측면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너무 막장이라가지고, 그런 무겁고 진지한 주제들에 너무 매몰되지 않을 수 있어요. 많은 사건이 터지고, 인물들이 많은 말을 하고, 인물 자체가 여러 명입니다. 영화가 주제를 주장하느라 흥미 요소가 떨어지는 면이 하나도 없다고 저는 생각해요.

이 영화의 주인공 노인의 이름은 나카지마입니다. 그리고 왜 영화에 막장 요소가 많은가? 일단은, 나카지마는 결혼만 한 게 아니라, 바람도 여러 번 피웠거든요.

음.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할 텐데, 저 역시, 계약 위반이란 건 별로 좋진 않다고 봅니다. 계약을 위반할 거면 계약을 안 하면 되잖아요. A가 B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냐?는 식의 도덕관념을 떠나서, 그런 뭔가… 선악의 관념을 떠나서, 굉장히 귀찮은. 굉장히 쓸데없는. 왜 일을 벌여? 이런 수준의 일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계약을 안 하면 되잖아. 귀찮게시리.

그리고 한아임은 그 수많은 계약 위반 중에서도 가장 어이없는 계약 위반이 결혼 계약 위반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여러분? 결혼은 계약이에요. 아주 여러 국가에서 국제적으로 인정해 주는, 인간이 살면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계약 중 하나입니다. 이 계약을 함으로써, 서로 간에 상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세금 및 재산 분배와 관련이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내가 만약 죽거나 상대방이 죽을 위기에 놓여 있거나 할 때, 내가 배우자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상대가 내 배우자라는 이유만으로, 서로의 생명줄을 쥐고 흔들 수 있다고요. 심지어 누군가가 내 배우자면, 국가에 따라서, 내 본 가족 있죠? 나의 부모나 나의 형제. 나의 배우자가 그들로 하여금 병원에 입원한 나를 못 만나게 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나의 배우자가 내 새 가족, 나의 현 가족이니까.

그리고 국가마다 본 가족이 중요하냐 현 가족이 중요하냐는 다를 수도 있고, 본 가족 현 가족의 구분선이 흐릴 수도 있고 선명할 수도 있고 그렇긴 하지만, 배우자란 유일하게 내가 선택하는 가족이라는 점에는 아무도, 그 어떤 국가의 어떤 누구도, 결혼을 자의로 하는 국가의 사람이라면, 이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부모, 자식, 형제, 친척 중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족은 아무도 없어요. 단 한 명. 내지는, 뭐, 당사자들 합의하에 여러 명이서 그룹 결혼을 한다 치더라도, 그 그룹에 속한 사람들 외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족이 전혀 없다고요.

그래서 결혼 계약이란 것을 다른 계약과 마찬가지로 쌍방 합의로 “우리 이제 그만하자”고 할 수는 있어도, 나카지마 노인처럼 그 계약을 아무렇게나, 여러 번, 지속적으로, 수십 년에 걸쳐서 위반하는 자에 대한 한아임의 포용성은 심히 낮습니다. 특히나 그자가 이 영화에 나오는 노인처럼 스스로를 피해자로 볼 때, 그러니까, 방사능에 의해 자기가 공격당한다고 여긴다든지 할 때, 포용성이 심히 낮고요. 특히나 또한, 이런 자가 사업을 한다고 할 때, 처음 드는 생각이, “당신이 무슨 사업을 해?”입니다.

어… 이 정도 되면, 포용성이 없다고 봐야 해요. 저는 이런 사람을 실제로 만난 적은 다행히도 없는데, 이런 사람하고 사업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기계발서를 보시면, 특히 음, 제가 느끼기엔 미국 쪽? 자기계발서에 이런 말들이 꽤 등장하는 것 같은데, 부자가 되려면, 혹은 뭐, 성공하려면, 행복하려면, 결혼생활 잘 하라는 말이 적지 않은 빈도로 등장을 합니다. 무슨 결혼이 신성하고 결혼이 고귀하고, 이래서가 아니에요. 인간이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선택 중 하나인 그것을 말아먹지 않는 사람이 사업도 잘한다는 뜻인 겁니다. 이혼을 할 순 있지만, 서로 잘 헤어지는 거랑 결혼을 말아먹는 건 좀 다른 문제죠. 결혼을 말아먹는 사람이랑 사업 안 하는 게 좋습니다. 그 사람이 결혼 파트너를 상대로만 바람피우지, 사업 파트너인 나 상대로는 바람 안 피울 거 같죠? 전 피운다고 봅니다. 겪어본 적은 없지만, 겪어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이 세상에는 바람 안 피우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바람을 안 피워요. 피우고 싶은 욕구도 별로 없는 것 같고요, 욕구가 있더라도, 세상에 무슨 그런 귀찮은 일을 벌인답니까?

아무튼, 저는 원래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나카지마가 싫었어요. 그리고 아마 음… 의도된 거겠죠? 이 노인을 굉장히 불쌍한 자로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영화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의 끝에 가서, 아, 역시 스스로가 택해서 한 결혼을 하찮게 보는 사람하고는 사업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집니다. 나카지마 노인이 뭘 하냐면, 브라질로 이민 가자고 가족을, 자기가 막돼먹게 망쳐먹은, 이미 있는 가족을 등한시하면서 여러 사람이랑 바람피워서 낳은 자식까지 포함한 그 대가족을 설득하려다가 그게 안 되니까, 자기가 소유한 주물공장에 불을 지릅니다. 일본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지면 가족들이 브라질로 같이 가줄 거라고 여기는 거예요.

아까 처음에 언급했듯이, 가족들이 나카지마 노인을 한정치산자로 선고되게끔 만들려고 한다고 했잖아요. 이러한 가족들의 행동이 영화의 초반에는 좀 너무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끝에 가서는 이 노인이 실제로 자기 자신이 평생토록 일궈왔다는 그 주물공장에 불을 지른단 말이죠.

공장 직원들은 처음에는 자기네 잘못인 줄 알고 노인에게 사과를 합니다. 자기네가 잘못한 게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일단은 나카지마가 고용주니까 무조건적으로 사과를 해요. 그러다가 나카지마 노인이 자백을 하자, 공장 직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우리가 굶어 죽어도 상관없냐. 브라질로 이민 가기만 하면 당신은 장땡인 거냐, 이런 식으로 말을 해요. 그러자 나카지마 노인이 흙탕물에 무릎을 꿇고 사람들에게 사죄를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 막장인 말을 해요. 제가 보기엔 이때 나카지마가 하는 이 대사가 이 영화 통틀어서 가장 막장적이면서도, 막장을 넘어서서, 이 영화의 주제와 닿아 있으며, 모든 것을 묶어주는 대사예요.

나카지마가 어떤 식으로 말을 하냐면, 자기 직계 가족만 가족이라고 여긴 게 자기 잘못이라며, 공장 식구들도 가족이라며, 너희도 모두 함께 브라질로 가재요.

그러니까, 완전히 미친 사람이죠. 즉, 돌이켜 보면, 나카지마의 가족들이 법원에다가 매우 맞는 주장을 했던 거예요. 이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게 맞습니다. 그래서 한정치산자 정도가 아니라, 이 사람이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가 됩니다.


그런데 영화가 의도한 메시지와 한아임이 받아들인 메시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영화의 주제가 꽤 분명하다고 여겨지거든요.

나카지마가 들어가게 된 정신병원은, 정말, 안 미쳤던 사람도 가면 미치게 될 것 같은 그런 정신병원이에요. 이 당시의 정신병원이란 곳이 아마도 이런 분위기였나 봐요. 이때 좀 나카지마가 불쌍하기도 합니다. 많이는 아니고. 왜냐면, 공장에 불을 지르니까. 이러면 밖에다 두면, 가족들이 밤에 자고 있는데 그 집에 불을 질러도 하나도 놀라울 게 없는 행동을 보인 사람이기 때문에, 정신병원에 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환자들을 괴롭히는, 그런 시설은 아닌 것 같고요, 다만 이미 정신이 혼란스러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그들에게 좋진 않을 것으로 보이는 곳이란 말이죠. 즉, 뭔가…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 가는 곳처럼 보였어요. 포기한 거죠. 나카지마가 저절로 죽을 때까지 그냥 기다리는, 그런 시설로 보였습니다.

아무튼 이 정신병원의 의사가 하는 말이 아마도 영화가 의도한 메시지 같아요. “미친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미친 게 아닌가”라는 말을 합니다. 그것이 아마도 영화가 의도한 메시지 같아요. 우리가 나카지마만큼 방사능 공포에 떨진 않더라도, 그 많은 사람이 죽고, 자연이 파괴되고, 세상이 판도가 달라졌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이 그냥 멀쩡하게 사는 것이 정상이냐, 이 말이죠.

이 말에 저도 어느 정도 동의를 합니다. 어떤 일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 예를 들어 특정 사건이 벌어진 이후의 세대라든지, 아니면 다른 지역의 사람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은 그 일을 겪은 사람들을 아예 이해를 못 하는 경우들이 확실히 있습니다. 그런데 나카지마 노인의 흥미로운 점은, 이 사람이 폭탄을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당연히 그렇죠. 왜냐하면 직접 겪었으면 죽었겠죠. 그리고 이 사람은 폭탄을 직접 겪진 않되, 그 시절을 직접 살아낸 사람 중 유일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죠? 이 사람처럼 폭탄이 터진 그 순간에 일본에 있었긴 했지만, 직접 맞진 않았고, 살아 있는 사람은 엄청 많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방사능 공포에 떨고 있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미친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미친 게 아닌가”라고 말할 때, “미친 세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절대적으로 존재를 하는가? 아닙니다.

이것이 저의 해석이 아마도 영화가 의도한 듯한 메시지와 갈리는 부분입니다. 이 세상에는 모두가 인정하는 단 하나의 객관적 논리적 이성적 세계란 없습니다. 아예 없어요. 아무리 과학이 그러한 세상을 만들려고 해도, 그것은 없습니다. 이 말이 과학이라는 개념에 익숙한,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의 다양한 국가에서 택하고 있는 공교육 제도 안에서 자라난 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놀라운 말로 들릴 수도 있어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이 영화만 봐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일본에 방사능 위험이 있어”라는 사실이 있어도, 그 사실은 절대 객관적 논리적 이성적으로 하나의 현실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는 현실은 다 달라요. “일본에 방사능 위험이 있어”라는 사실로 인하여 이 세상에 단 하나의 객관적 논리적 이성적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마치, 뭐랄까, 초콜릿 아이스크림이란 게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현실을 똑같이 해석할 거라고 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화가 그런 주장을 한다는 건 아니에요. 이 영화, “산 자의 기록”은 의문을 던지는 거죠. 이 대사가 반쯤 질문 형식이거든요. “미친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미친 게 아닌가.” 한 번쯤 생각해 보자 이거죠. 이에 대한 영화의 답이 약간은 한쪽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당연히 영화 만든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영화를 만들면 되는 거고, 저는 저대로 당연히 제가 생각하는 대로 해석하면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영화를 본 다른 많은 사람들, 또한 이 에피소드를 지금 듣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자신의 해석대로 해석하고 살면 됩니다. 그런데 그러하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 모두의 현실이 하나가 아니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의 현실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 속에 살고 있어요. 그래서 이 영화가 흥미롭죠.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문 메타성을 지니고 있어요. “미친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미친 게 아닌가”라고 물으면서, 약간은 “그래, 우리가 멀쩡히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게 미친 거지, 나카지마가 미쳤다고만은 볼 수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만약 그러한 결론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면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아닐 것 같아요. 해석, 해답이 다양하니까 영화를 만들었을 거예요. 즉, “미친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미친 게 아닌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에 영화가 자신의 답을 내놓고 있으면서도, 관객이 거기에 꼭 동의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것을 영화는, 감독은, 압니다. 아니까 오히려 메시지를 주는 겁니다.

아무튼 그리하여, 한아임이 해석하기로는, “미친 세상”이란 건 애초에 객관적 논리적 이성적 형태로 존재를 하지 않는다. 만약 “미친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미친 게 아닌가”라고 누군가가 이 정신병원 의사처럼 말을 한다면, 그렇다면, 그 발언은 그 사람의 시각을 보여주는 측면이 가장 크지, 세상이 실제로 미쳤거나, 세상에 실제로 정상이란 것이 있거나, 세상에 ‘우리’라고 부를 만한 어떤 집단이 실제로 있어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 영화의 메시지가 과연 이 정신병원 의사의 이 의문인가, 라는 점 자체에도 의문이 있을 수 있어요. 이 사람은 영화의 주요 인물이 아닙니다.

이에 관련하여 또 흥미로운 점이 뭐냐면, 이 의사만이 나카지마 가족 외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어, 막장 요소가 다분한데도 영화가 막장 영화가 아닌 이유가 이런 점들에서 나옵니다.

영화가 처음에 어떻게 시작을 하느냐면요, 일단 아주 그냥 을씨년스러운 재즈풍 음악으로 시작을 하고요. 치과 의사인 사람이 주요 인물로 처음 등장하는데, 그는 나카지마 노인의 가족 일원이 아닙니다. 또한 이 치과 의사는 플롯을 미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관찰자로서는 약간… 주인공스러워요. 마치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는 제목에까지 등장하는 주요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플롯상으로는, 엄밀히는, 관찰 대상에 불과하며, 사실은 닉 캐러웨이가 화자이자 주인공인 것처럼요.

이 “산 자의 기록”이라는 영화에 좋아할 만한 인물이 안 나오거든요.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도, 뭔가… 부자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보이고, 이런 측면에서 매력적인 캐릭터이긴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주인공이었으면 “위대한 개츠비”라는 이야기가 “위대한 개츠비”라는 이야기가 아니었을 거예요. 당연한 얘기라서 말하면서 좀 어이가 없네요. 당연히 주인공이 다르면 그 얘기가 그 얘기가 아니었겠지. 그런데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느냐면요. 어… 개츠비라는 인물이 딱 그 동일 인물이었어도, 그에 관한 얘기를 닉 캐러웨이가 아니라 제이 개츠비가 했더라면, 제이 개츠비가 우리가 아는 그 제이 개츠비가 아니었을 거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아임이 한아임 얘기를 아임 드리밍에서 할 때와, 다른 어떤 누군가가 한아임 얘기를 그 사람의 팟캐스트에서 할 때의 차이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우리는 이것을 경험으로 너무나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너무 당연한 얘기인데, 동시에 너무 당연해서 제 경우에는 가끔 망각을 하기도 하는 포인트입니다. 누가 얘기를 하느냐에 따라 얘기가 달라져요. 즉, 마치 “미친 세상”이란 게 객관 논리 이성적으로 단 하나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듯이, “제이 개츠비”라는 인물도 객관 논리 이성적으로 단 하나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아임도 객관 논리 이성적인 단 하나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저에 대해 갖고 있는 어떤 상이 있다면, 그것은 일부 저로부터 온 것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여러분으로부터 온 겁니다.

이 점을 “산 자의 기록”이라는 영화가 매우 인지하고 있다고 저는 추측을 해봅니다. 왜냐? 치과 의사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다. 나카지마 노인도 아니고, 나카지마 노인 가족 일원도 아니고, 치과 의사인데, 왜 이 사람이 등장하느냐 하면, 이 사람이 약간, 부업으로다가? 취미로다가, 필요에 따라 가정 법원에서 중재자로 활동을 한대요. 그래서 나카지마 노인의 가족들이 그를 한정치산자로 만들려고 하는 그 과정에서 중재자 중 하나로 이 치과 의사가 참여를 합니다. 즉, 그는 관찰자 캐릭터입니다. 닉 캐러웨이 같은 캐릭터예요.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닉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지만요. “위대한 개츠비”라는 책은 온통 닉의 관점이잖아요.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 영화는 카메라의 시점이 두드러지죠. “산 자의 기록”도 카메라의 시점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관찰하는 치과 의사조차 관찰되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관객이 관찰합니다.

심지어는 어떤 씬이 나오냐면요, 이 나카지마 노인이 브라질로 이민을 가서 어떻게 먹고살 방편을 찾긴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브라질로 이민을 이미 간 어떤 일본인으로부터 농장을 사려고 하는 모양이에요. 그 농장을 촬영한 영상이 있는데, 그것이 영화 내의 영화로 보여집니다. 영사기로 그 영화 내의 영화를 틀어요. 그 영화에 브라질이 나와요. 그러면 그 영화 내의 영화는 분명 지금 여기의 것이 아니잖아요. 그 영화 내의 영화는 이미 한 번 누군가의 시각에 의해, 그리고 카메라에 의해 필터된 결과물입니다. 그것을 나카지마 가족이 모여서 보고, “산 자의 기록”의 관객인 우리는 또 그들을 봅니다.

이 관찰하고 관찰하고 해석하고 해석하는 연쇄작용을 영화는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래서 그 수많은 막장 요소들이 있는 가운데에서도 결코 이 영화는 그 자체로서 막장 영화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꽤 메타적인 것 같아요. 메타성이 주목적은 아니라고 여기지만, 메타성이 있어요. 내가 지금 보는 것. 그러니까, 꼭 눈으로 본다기보다는, 내가 감각 작용에 의해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 인식된 것들에 대한 나의 해석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 그리고 사실은 잘 따져보면, 논리적 이성적이지도 않다.


여담으로, 이 치과 의사 씨가 낯이 익길래 어디서 봤나 했더니, <고지라>에 나왔었더라고요. 아저씨, 당대 잘나가는 배우였나 봐요. 다카시 시무라라는 분이십니다. 이분 필모그래피가 엄청나요. 위키피디아에 나열된 것만 해도 무슨 100개는 되는 거 같던데. 아저씨가 좀 호감상이세요. 그래서 얼굴이 기억에 남네요.

아무튼, 다시 나카지마 가족으로 돌아가 볼게요. 저는 처음에는 가족들이 나카지마 노인의 돈만 보고 노인을 한정치산자로 만들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에피소드 초반에 말씀드렸듯이, 실제로 노인이 제정신이 아닌 듯하며, 법적 의학적으로 말하는 ‘제정신’일 수야 있지만, 기본적으로 무책임한 인간이었던 겁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애인이 셋씩이나 된대요. 심지어는 그 와중에 부인한테 잘해주지도 않습니다. 얼굴 자체가, 나카지마 노인 역할을 맡은 이 배우분이, 얼굴 자체가 그래요. 연기를 잘하신 거죠 그러니까. 이목구비를 논하는 게 아니라, 표정을 말합니다. 나카지마가 바람피워서 낳은 아들 중 하나한테 미소를 보이기 전까지, 저는 이 노인이 무슨 병에 걸려서 찌푸린 상태로 얼굴이 굳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 정도로 자기 가족한테 막돼먹게 굽니다.

하여간에 제가 본 영화의 버전은 영어 자막이 달린 버전이었는데, 확실히 설명을 해줘요. 결혼했다가 이혼했다가 해서 부인이 총 네 명인 게 아니라, 부인이 하나에 애인이 셋이라고. 이런 사람이니까 가족들이 이 사람 공포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겁니다. 이 사람 공포가 진짜여도 상관이 없어요. 천둥 번개가 치자, 이 사람이 극도로 무서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나카지마의 모습을 분명 알 텐데도 아들 중 하나가 이런 말을 합니다. “아버지는 공포 때문에 도망치는 거지, 브라질에 가서 어떻게 살지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 차갑게 들릴 수도 있죠, 상황에 따라서. 그런데 왜 가족들이 나카지마의 공포에 이렇게나 관심이 없을까? 계약을 좀 여러 번 갖은 방법으로 위반했어야 말이지. 자식을 낳는 건 계약은 아니지만, 심지어 권리라고 주장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아요. 그것은 이번 에피소드에서 논하지 않을게요. 자식을 낳는 것은 권리인가. 혹은 의무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을 건데, 어쨌든 태어난 그 자식이 보기에 자신의 부모 중 하나, ‘부’를 담당하고 있는 자가 자신의 ‘모’를 저렇게 여러 번 지속적으로 배반하는 것을 볼 때, 사회상이 어떻든, 시대상이 어떻든, 결혼이라는 개념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와 시대의 그 자식이 보기에 ‘부’를 담당하고 있는 자가 믿음직스럽겠습니까? 당연히 아니죠. ‘부’가 공포에 질렸다고 해서 자식이 마냥 ‘부’가 안쓰럽겠어요? 당연히 아니죠.

그런데 심지어는 이제 그 ‘부’가 자신의 공포를 온 가족에게 적용시키려고 해. 이 노인은 이런 말도 해요. 자기는 일본에서 평생을 보냈는데도 떠나려고 한다. 그런데 너희는 왜 안 떠나고 싶어 하냐. 이런 걸 보면, 어… 이 자식들이 다 주물공장에서 일하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아, 이 자식들이 아버지를 싫어하긴 하는데 아버지 돈 없으면 안 되니까 한정치산자로 만들려고 하나 보다. 나카지마도 좀 불쌍하네.”

그런데 이 노인이 하는 걸 보면, 가면 갈수록, 아마 이 자식들이 주물공장 말고 다른 데서 일하려고 했어도 또 못 하게 했을걸요? 못마땅해했을걸요?

이 영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빠가”입니다. 제가 일본어는 못 해도 “빠가”가 뭔지는 알아요. 이 노인이 “빠가”를 가족에게 얼마나 많이 얘기하는지. 그러니까 이게. 어… 이게, 도덕관념을 논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지금. “빠가”는 나빠, 이런 말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빠가”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뭐냐면, “내 가족은 ‘빠가’야”라는 렌즈로 세상을 보는 나카지마 노인 앞에 펼쳐지는 공포의 세계는 전혀 객관적 이성적 논리적인 게 아니며, 만약 그 세상이 “미친 세상”이라고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나카지마 노인의 해석에 의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사람 눈에는 “빠가”랑 공포밖에 안 보여요.

이런 자랑 어떻게 브라질을 가. 뭘 믿고. 돈 말고 뭐가 있어. 부인한테 하는 거 보면, 딱 그 돈이며 자기가 공장을 세웠다는 둥 하면서 어찌나 수십 년 동안 유세 떨었을지 딱 보이는 타입. 그러면서 자식들이 다른 거 하고 싶어 했어도 못 하게 했겠죠. 일본 특유의 그 “자식은 부모의 사업을 물려받아야지” 하는 느낌도 있거니와, 이 노인의 성깔이 하도 괴팍하니까. 젊을 땐 젊은 게 무기고 늙을 땐 늙은 게 무기인 타입. 그러는 와중에 자기의 자식들은 젊을 땐 젊으니까 아버지 말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 같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왜 아직도 자기한테 기대냐며 욕했을 것 같은, 딱 그 타입. 자신의 온 가족을 한심하게 여기는 바로 그 자신의 마음 상태가 그들을 한심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모르면서 공포에 질려서 움직이는 인간.

그러면서 애인들과 외부 자식들까지 브라질로 데려가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본부인과 그 자식들에게 그게 얼마나 치욕입니까? 브라질 가서 현지 언어도 못 하고 아무도 모르는데 아버지라는 작자가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에나 걸쳐서 외도한 결과물로 만들어진 사람들까지 데려와서는 같이 브라질 농장에서 살라는 거잖아요.

저는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아버지랑 왜 연을 안 끊지? 하면서, 돈이 아쉬운 게 유일한 이유라면, 저 가족들도 뭐 그렇게 스스로를 귀히 여기는 사람들은 아닌가 보다, 했는데, 가면 갈수록, 가족들이 나카지마 노인한테서 위자료를 받아야겠더라고요. 한정치산자가 문제가 아니라, 위자료를 요구해도 놀랍지가 않을 것 같다. 정신적 트라우마에 대한 위자료.

결국에는 아들 중 하나가 “아버지 당신 브라질 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꼭 돈 때문에 아버지를 말리려고 했던 건 아닌 모양이에요. 아버지가 모든 돈과 함께 브라질로 가는 게 걱정됐으면, 브라질로 혼자 가라고 하지 않겠죠. 아들이 “정부들이랑 사생아들 데리고 브라질로 혼자 가라, 아버지.” 하니까, 나카지마 노인이 뭘 하게요? 애한테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또 때려요. 이것이 뭔가… 동양 문화권? 내지는 보수적 문화권에서 당연하게 느껴지거나 적어도 그럴 수도 있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 구타 행위가. 이것을 구타라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 노인이 뭐… 70인지 80인지 90인지,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나이가 되도록 말이 안 통하면 손이 먼저 나가는 자가 무슨 인간이겠어요? 빠가 빠가 거리다가 말 안 통하니까 때리는 이것이… 이 사람이랑 어떻게 브라질을 가요.

아무튼, 만약 결혼 계약 위반, 자식을 바보 취급하면서 그 자식이 왜 바보인지를 모르는 바보스러움, 구타 행위 등등이 도덕적으로 “나쁘다” “틀렸다”고 취급을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발언과 행위의 렌즈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어떤 인식을 할지를 생각해 보자 이겁니다. 지금 나카지마 노인이 도덕적으로 잘했다 못했다를 따지자는 게 아니란 겁니다.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이 빠가, 적, 아니면 바람피울 대상이나 바람의 결과물 등등인 인간이 나카지마 노인입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유일하게 안쓰럽게 여긴 인물이 나카지마가 가장 최근에 바람피워서 낳은 아기였는데, 이 아기가 갓난쟁이예요. 그런데 영화에 나카지마 노인이 이 갓난쟁이 아기를 안고 두려움에 떠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람이 불자 방사능을 무서워하면서, 공포스러워하면서 아기를 보호하려는 장면이 나와요.

여기서 저는 무슨 생각을 했느냐면, 나카지마 노인은 왜 갓난쟁이를 안고 있을까? 그 애는 저항하지 않으니까. 아직은. 이 노인한테 안음 당해도 갓난쟁이는 아직은 저항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 인간 개체가 유일하게 이 갓난쟁이니까, 온 세상을 빠가, 적, 아니면 바람피울 대상 혹은 그 결과물로 보는 나카지마 노인은 이 아이를 안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노인의 자식이 한두 명입니까? 이 갓난쟁이가 크면 그 아이도 빠가, 적, 아니면 바람의 결과물로 보겠죠. 그리고 그것은 갓난쟁이의 책임이 아니고, 이 노인의 렌즈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이 애기 발이 너무 귀여워요. 촬영하는데 진짜 자는 것 같아요. 어쩜 저렇게 잘 자나. 애기들 그… 나풀거리는 머리카락 있죠. 머리카락에 힘이 없어가지고 나폴나폴거리는데 너무 귀엽습니다. 약간 걱정돼요, 애가. 애들은 뭐든지 흡수하는데, 저 노인의 저 공포를 애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그러니까, 모르는 것처럼 외부 관찰자들에게 보이지만, 사실은 흡수하고 있을 거라고요.

나카지마 노인은 폭력적인 사람입니다. “원자폭탄, 수소폭탄 같은 걸 만든다니!” 이러면서 막 신문을 찢고 공포스러워하는 그런 장면도 나오고, 자식 때리고, 욕하고. 온 사방이 적인 거예요. 방사능은 그냥 핑계입니다. 방사능이 없었으면 다른 걸 무서워했을 거예요. 방사능 무서워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안 무서워했을 리가 없는 인물이란 뜻입니다.

바람을 왜 피울까요? “산 자의 기록”이라는 이 이야기의 신인 창작자들은 왜 하고 많은 인물 중 바람피우는, 그것도 여러 번 피우는 인물을 설정을 했는가. 왜 이렇게 가족이 줄줄이 많은데 그중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주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는 인물을 설정했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카지마 노인의 경우에는 그의 공포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거라고 추측을 해봅니다. 이 사람은 되게 자기가 뭘 책임지는 줄 알지만, 아무것도 책임을 안 져요. 결혼도 무책임하고, 이 많은 자식들을 낳아놓고서 빠가빠가거리면서 구타하는 것도 무책임하고, 브라질로 이민가려는 것도 무책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엄청나게 폭력적이에요. 계속 가족한테 자신의 공포를 이해하라는 식으로 명령을 하는데, 이 노인에게 공포가 있다면 그것은 그 자신만이 이해해 줄 수 있는 겁니다. 이 사람이 아무리 바람을 백 번 피워서 가족을 백 명 천 명으로 만들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이해하게끔 강제하게 하고 싶어도, 가족은, 그것이 내가 낳은 자식이든, 내가 택한 배우자든, 내가 배신한 배우자든, 내가 배우자 대신 바람피운 대상이든, 그 누구도, 나 대신에 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 대신에 내 공포를 느껴줄 수 없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계속해서 나는 나를 버리면서 외부에서 나를 보호해 달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굉장히 강한 척하면서 나약해 빠졌어요. 나약한 건 죄가 아닌데 이 정도로 민폐 끼치면서, 막 주물공장에 불을 질러가지고 수십 명 직원들의 생계를 위협하면서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빡이 치죠. 만약 이 노인이 “나의 공포는 객관적이야”라고 주장을 한다면, 이 사람이 일으킨 불로 인한 생계 위협이야말로 더 객관적이고,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더 중요하잖아요. 더 공포스럽잖아요.

그러니까, 둘 다 가질 순 없어요. “내 공포가 객관적이니까, 이 세상은 절대적으로 미친 세상이니까, 나 좀 알아줘”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 하나의 절대적 이성적 논리적 현실로서 존재하는 세상에 해를 가할 순 없다고요. 자신의 세계관 내에서 앞뒤가 안 맞잖아요.

이 노인이 오히려 “내 공포는 내 머릿속에만 있어.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어. 너무 공포스러워. 너무 무서워.”라고만 했어도, 가족들이 이렇게까지 나오진 않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이란, 정도는 다르지만, 어느 정도는 다 알 거예요. “무섭다”는 감정이 꼭 그 대상이 정말로 무서워야지만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까 내가 안 무서워도 상대가 뭔가를 무서워할 때, 그걸 내가 다 이해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는 그 무서움을 상상해 줄 순 있잖아요.

그런데 왜 이 가족들은 그걸 안 해줄까? 자꾸 이 노인이 자신의 공포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심지어 그 공포를 안 좋다고 하면서, 그 안 좋은 걸 온 가족한테 주려고 하니까. 그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뺏으면서.


그래서 보는 관점에 따라서, “산 자의 기록”이라는 영화는 매우 실용적입니다. 제목부터가 “산 자의 기록”이라서 멋진데. 멋도 실용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멋스러움은 캬.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 실용적이에요.

이… 일본어 단어의 원래 뜻이 어떤지 제가 몰라요. 사전 의미를 찾아볼 수야 있겠지만 뉘앙스를 모릅니다. 그래서 영어랑 한국어 제목을 살펴보자면… 영어로는 life가 생명이자 삶이잖아요.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두 버전이 있는데, 하나는 I live in fear고 하나는 Record of a Living Being이더라고요. 둘 다 live라는 동사가 들어가지만, 저는 후자가, 그러니까, “산 자의 기록”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제목, “이키모노 노 키로쿠”라는 문자 그대로의 제목을 번역한 영어 버전이 더 멋있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는 정말로 살아 있는 어떤 존재에 대한 기록이고, 나아가 I, 그러니까 ‘나’, 그중에서도 나를 살아 있다고 보는 나라는 어떤 존재에 대한 기록이에요. 그리고 그 기록을 여러 명이 해요. 카메라가 하고, 나카지마 노인이 하고, 치과 의사 캐릭터가 하고,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고, 각 가족 구성원들이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렇다면 그런데 살아있다는 게 대체 뭔가. 영어로는 life가 생명이자 삶인데, 한국어로는 다르죠. 목숨과 삶이란 좀 다른 뉘앙스죠. 일본어로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임 드리밍은 한국어 팟캐스트니까, 이 목숨과 삶의 차이에 대해서 좀 얘기해 볼게요.

산다. 나는 산다. 할 때 나는 목숨만 붙어 있는 생을 말하는가, 아니면 진짜 삶이라고 함 직한 삶을 말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여기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죠? 제가 ‘우리’라고 할 만하죠? 보통은 숨만 붙어 있다고 해서 살아 있다고 여기지 않잖아요. 만약 그렇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면, 사회에 별로 문제가 없을 거예요. 숨만 붙어 있어도 산다고 여긴다면, 아무리 회사에서 상사한테 욕을 먹어도, 아무리 재산이 없어도, 아무리 건강이 안 좋아도 아무도 삶이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았을 거예요. 근데 보통은 그렇지 않죠. 보통은 뭔가가 더 필요하다고 여겨요. 그것이 부귀영화가 아닐지라도, 숨만 붙어 있는 것으로는 대부분의 인간이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산 자의 기록”이란 어떤 기록인가. 어떤 자가 “산 자”인가.

이 영화에서 나카지마 노인이 이런 말을 해요. “너희는 생명이 소중하지 않느냐.”

여기서 이 사람이 말하는 생명이 이 사람 가족이 말하는 생명과 극명히 다르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 노인은 방사능이 무섭다는 핑계로 온 가족의 삶을 뿌리째 뽑으려고 하고, 그것이 가족을 위하는 길이라고 여겨요. 그 정도로 이 노인의 공포가 심한 겁니다. 숨만 붙어있으면 된다고 여길 정도로.

그리고 이 측면에서 이 노인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에요. 마지막에 정신병원에 있는 이 노인이 너무나 평온해하는 장면이 나와요. 이 사람은 자기가 정신병원의 그 병실에서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숨만 붙어 있으면 되는 거예요. 어디 나갈 필요 없어. 어디서 뭘 겪거나 누릴 필요 없어. 그냥 숨만 쉬면 되는 거야. 죽지 않고.

이 노인은 방사능 공포를 느끼기 훨씬 이전부터, 아마 ‘삶’이라는 건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목숨’이 뭔지는 알 수 있는데, ‘삶’이 뭔지 모르는 것 같아요. 제가 앞서 누누이 말한 여러 요소들, 막장 요소들, 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이 사람은 계속 도망쳤던 거예요. 무엇으로부터? 결혼생활로부터, 방사능으로부터, 등등의 핑계를 아무리 대도, 사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쳤던 것으로 생각되고, ‘삶’이라는 것을 누릴 수 있는 자신이 아예 사라졌을 때, 즉, 정신병원의 작은 병실에 갇혀서 숨만 붙어 있게 됐을 때, 어떤… 부담감? 같은 것을 내려놓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그 병실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어떤 절대적 조건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 크기의 병실에서, 심지어 감옥에서도 책을 쓰고 명상을 하고 몸을 단련하고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나카지마 노인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그 병실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가만히 숨만 붙어 있는 겁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미친 세상”이 아니고, 그가 택한 “미친 세상”이에요. 그리고 그 “미친 세상”이 정신병원이라는 점도 흥미롭죠. 객관 논리 이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러한 기준에 의해 “당신의 정신은 이상하다”고 판정 내려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장소. 거기에 이 노인이 있고, 거기서 자신의 미친 세상을 펼치고 있는데, 그 펼침이 아주 국소적. 정말로 이제는. 이 노인 외의 누가 봐도 이 노인 말고 아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혼자만의 세계에 살고 있어요.

굉장히 생각할거리가 풍부한 플롯이에요. 막장 요소들조차, 그 요소들이 필요하잖아요. 그 요소들이 없었다면 나카지마는 나카지마가 아니었겠죠.

게다가 나카지마가 평탄하게만 병실에 있는가? 하면 또 아니에요. 태양을 보면서 공포에 질려하고, 그런 장면도 있는데. 어…

그러니까, 이 사람의 공포는 방사능이 아니에요. 자기 자신에요.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는가, 이 말에 담긴 센티먼트가 너무 멋있어서 제가 검색을 해봤더니, 정말이지 유용한 위키위키 나무위키에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더라고요. 이 대사가, 원래는 이런 대사래요.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그리고 이것은 “미우라 켄타로의 만화 베르세르크를 상징하는 명대사”라고 위키에 나오네요.

너무 멋있다.

저는 베르세르크를 안 봤는데, 이 대사가 나오는 전체 씬의 좀 더 긴 대사가 있어요. 이거 읽어 볼게요.

“봐라. 내 주변의 어둠을.

여기가 네가 도착한 곳, 여기가 네 낙원이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도착한 곳, 그곳에 있는 건 역시 전장뿐이다.

돌아가. 여긴 나의 전장이다.

넌 너의 전장으로 가라.”

와우. 너무 멋있다. 아.

그리고 이런 해석이 페이지에 있습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부분만 인용하여 마치 “어차피 낙원은 없으니 포기하고 살아라”식으로 뜻을 곡해해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해당 대사의 전체 문맥을 보면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싸우라는 내용이지, 어딜가도 부조리가 있으니 받아들이고 참고 살라는 식의 자기합리화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해력이 부족하면 아예 직설적으로 말하는것 이외에는 저런 비유적인 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 대사의 전문을 보고도 뜻하는 바가 뭔지 모르는 일이 발생해서 이렇게 뜻이 왜곡되곤 한다.

베르세르크의 주제는 가혹한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이고, 이것을 가츠라는 인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게는 어디에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전장이 있기 때문에, 당당히 맞아 싸우는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가츠는 앞으로 내딛어라. 이끈다!는 말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말이 나무위키 페이지에 있습니다.

어… 다시 말하지만 저는 베르세르크를 안 봤고요. 이 에피소드에서, 그리고 이 팟캐스트 전체에서, 나아가 제 영어 팟캐스트, 심지어 픽션에서도 언급하듯이, 모든 것이 해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약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를 그냥 부조리를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문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베르세르크에 특정 정해진 메시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뭔가 의도된 메시지는 있을 수 있겠죠. 제가 “산 자의 기록”을 보면서 영화의 메시지가 아마 이런 것이었다, 라고 추측하듯이, 메시지가 뭔가 있겠죠. 사람이 만든 거니까. 그런데 그것을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저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 이런저런 식은 베르세르크가 객관 논리 이성적으로 그러하기 때문에, 혹은 “산 자의 기록”이 객관 논리 이성적으로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삶이 그렇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나카지마 노인이 방사능 공포에 질린 건, 일본이 방사능 공포에 질린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이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방식이 자신의 렌즈를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렌즈를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봐요. 그래서 여러분? 제가 또 명상 끼워팔기 잠깐 할게요. 그래서 명상이 좋습니다. 명상을 하면 내가 나 혼자, 나 개인이라는 망상을  차차 벗을 수 있어요. 이것을 제가 망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실제로 인간의 의식이란 무엇이든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호접지몽 아시죠 여러분? 꿈에 나비가 나왔다고 하는데, 정말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가? 이런 이야기가 있잖아요.

우리가 익숙해진 에고의 레이블을 조금만 벗어던져도, 우리의 의식이 우리가 습관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얼마나 더 거대하며, 나아가서 무한한지를, 아니면 적어도, 무한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내가 지금 가난하고 비참하고 무능하고 열등하고 못생겼다고 여긴다면, 어… 명상을 안 하셔도 한번 논리 이성 객관적으로라도 생각해 보세요. 과연 그것이 정말 나인가. 아마 조금 생각해 보시면 여러분이 지금 가난하고 비참하고 무능하고 열등하고 못생긴 순간에 있을 순 있어도, 그것이 여러분 그 자체의 존재를 정의하는 건 아님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너무 에고 패턴에 익숙하면, 아, 정말, 20세기 말 21세기 초반의 공교육이라고 불리는 그 제도를 통과한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는 이게 처음에는 약간… 낯설 수 있어요.

나는 학교에서 시험 점수를 50점 맞는 사람이야.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못생긴 사람이야.

나는 월급이 50만원 밖에 안 돼서 50억짜리 아파트를 못 사는 사람이야.

이런 식으로 ‘나’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어떤 한순간의 특성일 뿐임을. 나아가 과거와 미래는 지금 여기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사실 과거도 미래도 지금 여기에서 내가 불러오는 어떤 상임을 느껴보면, 사고가 무한해집니다.

이를테면, 나카지마 노인이 방사능 공포에 떠는 자신을 보면서, ‘나는 공포에 빠진 인간이다. 세상은 나의 적이다. 내 자식들은 빠가다. 나는 계속 바람을 피워서 새로운 자식을 생산해서, 나한테 저항하지 못하는 갓난쟁이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품을 게 아니라, 공포는 공포고, 나는 나로서 아무도 망가뜨릴 수 없는 존재임을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명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목숨줄만 붙어 있다. 숨만 내쉬는데, 그 숨. 그… 숨 쉬는 것에조차, 그 단순해 보이는, 어… 제가 이번 에피소드에서 비교를 위해 좀 얕잡아 보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지만, 사실은 위대한 일인 그 숨 쉬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조차 모른 채, 그는 그냥 그 정신병원에 갇혀서, 이제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

여러분 정말. 음… 느껴보세요 한번.

내가 만약 40년 전에 태어났다고 치면, 40 곱하기 365일만큼의 밤잠을 잤을 거잖아요. 낮잠까지 잔 적이 있다면 훨씬 많은 횟수를 잠에 들고 깼겠죠. 그 여러 번을, 내가 자는 사이에 숨이 멈출 수도 있었는데, 어떻게 내 숨이 그대로 붙어서, 잠에 드는 순간 내가 당연히 내일 깰 거라고 여기는지를 한번 느껴보세요.

어… 이것 역시 뭔가… “살아 있는 건 좋은 거다” 이런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한아임은 존재가 선하다고 여기지 않아요. 존재가 악도 아니지만 선도 아니다. 사는 게 무조건 좋다. 이런 거 아니에요.

사는 게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선악을 떠나서, 그런 어떤 가치 판단을 떠나서, 그냥 살아진다는 게 신기하긴 하단 얘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저절로 숨이 쉬어진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얘기하는 겁니다. 이 놀라운 것을 가능케 하는 ‘나’가 정말로 학교에서 시험 점수를 50점 받는 나입니까? 다른 사람보다 못생긴 나입니까? 월급이 50만 원밖에 안 돼서 50억짜리 아파트를 못 사는 나입니까?

아니에요. 근데 제 말을 그냥 믿지 마시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그런 숫자들과 레이블들은 어떤 하나의 상태를, 순간을 묘사하는 거지, ‘진짜 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진짜 나’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래요. ‘진짜 나’가 뭔지 모를 순 있지만, ‘진짜 나’가 뭐가 아닌지는 알기가 더 쉽습니다.

인간은 그 인간이 받는 시험 점수도 아니고, 버는 돈도 아니고, 심지어, 제가 요즘 느끼는 건, 그 사람이 하는 일도 아니에요. 심지어는. 특히나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억지로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은 그 사람이 아닙니다. 직업은 그 사람이 아니에요. 나 equals 나의 직업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도망친 곳에는 낙원이 없습니다.

나와 낙원이 동떨어져 있다고 여기면 도망친 그곳에 낙원이 있다고 여길 수 있지만, 낙원까지 데려가는 유일한 그것이 ‘나’임을 인정하면, 도망치기 전에 낙원이 없었다면 도망친 후에도 낙원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센티먼트를 담은 대사가 “산 자의 기록”이라는 이 영화에도 나옵니다.

나카지마 노인이 주물공장에 불을 지르고 정신병원에 가기 전에, 먼저 유치장 같은 데에 갇히는데, 거기에 함께 갇힌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지구상 그 어떤 곳도 수소폭탄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없다.” 나카지마 노인이 아무리 도망쳐도 소용이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음… 제가 아까 영화의 메시지를 추측하긴 했잖아요. “미친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미친 게 아닌가”라는 이 대사가 영화의 메시지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상 그 어떤 곳도 수소폭탄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없다”라는 대사가 메시지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쪽이든 저쪽이든이 메시지라고 제가 결정을 한다고 해도, 어차피 그 해석은 또 다양하고, 그래서 어차피, 들으시는 여러분들이 각자의 세상에서 받아들이시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재밌는 영화입니다. “산 자의 기록.” 제목이 너무나 멋있고. 산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고. 적어도 산다는 게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서 얻어갈 수 있는 측면이 많습니다.

저의 결론은 이겁니다. “미친 세상”이란 건 있다고 여기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여기면 없습니다. 나아가, 미친 세상이 있다 한들, 미친 세상에서 정말 꽃처럼 흐드러지게 살다가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라는 것이 어떤 삶을 사느냐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입니다. 원하는 렌즈를 끼면 됩니다.

아니, 그보다는, 꼈던 렌즈를 벗으면 됩니다. 그러면 원래 갖고 태어난 나의 렌즈가 있어요. 거기에 묻어 있는 걸 전부 다 깨끗하게 닦으면 됩니다. 저는 지금 그 과정 중에 있고요. 요만큼만 닦아도 너무 좋더라고요. 별로 닦지도 않았어요. 근데도 벌써 이렇게 좋아. 이것이 얼마나 편한지. 얼마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지. 얼마나 무한한지. 얼마나 풍요로운지. 얼마나 자유로운지. 낙원은 지금 여기 있다. 낙원 is right here right now. 내가 있는 그곳이 낙원이다. 그러합니다. 내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면, 도망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어딜 가도 있을 단 하나의 그것은 ‘나’인데 그 ‘나’가 마음에 든다? 그러면 나는 어디 있어도 상관이 없는 거야. 어느 때여도 상관이 없는 거야. 내가 낙원이다. 낙원의 렌즈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낙원이고 세상이 나고 내가 낙원이다. 물론, 어… 더 닦아야죠. 한참 더 닦아야죠. 평생 닦아야죠, 렌즈를. 저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갖가지 생각 감정 경험을 많이 누리고 갈 생각입니다. 그래서 가끔 렌즈가 더러워지는 걸 막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영향을 받는 걸 막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산에 들어가서 도 닦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이 세상에 펼쳐진 모든 생각 감정 경험을 누리고 갈 겁니다. 저는 그러려고 죽지 않고 지금 여기 있어요. 선택으로, 굳이 지금 여기 존재해요. 그리고 어떤 생각 감정 경험이 벌어져도 그것은 잠시 나의 일부일 순 있어도, 근본적으로는 ‘나’가 아니더라. 내지는, 나는 내가 나라고 하는 그것이다. 무엇이든. 무한하게.

돌이켜 보면. 제가 한아임 필명을 지을 때 ‘나는 나다’라는 뜻으로 지었는데, 그냥 말 그대로 그런 뜻으로 지은 거거든요? I am I am이라고, 그런데 한국어 이름을 한아이엠으로 지을 순 없으니까 한아임으로 지은 거예요. 근데 그 뜻이 명상적으로 이렇게 연관이 있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합니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 『누아르 어바니즘: 현대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들』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Ben Fox – Paradise
  • Charlie Ryan – Paradise Drive
  • Roman P – Finding Paradise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 2023 한아임

소개

✨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