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65] 갖고 태어난 빛나는 코어, “망상대리인”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 수다의 씨앗, 애니메이션 시리즈, “망상대리인”입니다. 하. 제목 정말. 제목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그리고 제목에 아주 어울리게, 이 시리즈는 참으로 혼란스러워요. 망상이 아주 그냥 망상이 가득합니다.

전체적인 틀은, “쇼넨 밧또,” 즉 “소년 배트,” 그러니까 배트, 방망이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공격하는 어떤 소년에 얽힌 사건을 경찰이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각종 피해자, 용의자, 목격자 등이 이야기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들의 망상이 엄청납니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예요.

그러나,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망상이 심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끝난다면야, 그것은 뭐, 그냥, 광인들의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걸로 끝이라면, 시리즈의 혼란이 그냥 혼란으로 마무리될 것이며, 그것은 뭔가… 그것은… 그런 이야기도 있을 수야 있겠지만, 그것의 포인트는 무엇인가?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좀 찝찝할 것 같단 말이죠. 세상에 미친 망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우리가 보여줘야 아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한아임의 해석으로는 “망상대리인”이라는 이 시리즈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망상이 심한 사람은 누가 봐도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망상하는 그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미묘하게. 망상 아닌 것처럼. 일상생활에 문제없는 것처럼. 그래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그래서 오히려 영영 망상에서 풀려날 길이 없을 확률이 높아 보이는, 그런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에 대하여 오늘의 수다, 시작할게요.


저는 이 애니를 크런치롤에서 봤습니다. 미국 회사인데 애니를 주로 스트리밍하는 서비스예요. 그리고 여기에 댓글 기능이 있어가지고, 여러분? 혹시 크런치롤로 “망상대리인”을 시청하실 거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스포일러를 가리는 기능이 있긴 한데, 스포일러가 아니더라도, 시청자들이 제각각의 해석을 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입장에서는 타인의 해석 없이 자신의 현재 상태에서 기인한 해석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댓글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오히려 스포일러 측면에서는, 어… 이야기가 너무 혼란해서, 스포일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 혼란은 다분히 의도된 혼란 같습니다. 망상대리인이니까. 망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나오니까. 이들이 망상을 한다는 건 이미 에피소드 2쯤 되면 정해진 패턴이라서, 그 망상이라는 걸로 스포일을 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오로지 해석. 이 시리즈는 정말, 해석으로 이야기의 의미가 갈리고, 특히나 만족도가 갈릴 것 같습니다.

음. 그리고 전체적으로 유머 감각이 있어요. 제가 느끼기에, 오프닝 곡이 너무 웃길 정도로 희망적입니다. 또한 그 오프닝 곡의 배경이 되는 애니 내용이, 각종 캐릭터들이 배가 아파 보일 정도로 웃는 모습입니다. 그, 왜, 너무 웃으면 배 근육이 땡기잖아요? 그 정도로 호탕하게 웃는 모습들이 나오는데, 음악의 박자랑 그들의 웃는 모습 화면이 너무나 싱크가 딱 맞아가지고, 좀 예스럽게 웃깁니다.

이렇게 재미난 오프닝 곡으로 시작하는 애니인데, 각 에피소드의 엔딩곡은 대조적으로 몽환적입니다. 모든 캐릭터들이 풀밭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어요. 완전히 널브러져서 잠을 잡니다. 어떤 꿈을 꾸는지, 참… 참 잘 잡니다. 이 때문에 에피소드 1의 끝에서부터 이 시리즈가 환상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게다가 각 에피소드의 끝마다, 엔딩곡 이후에, 할아버지 하나가 나와서 수수께끼를 왕창 던집니다. 그러고서는 에피소드가 확 끝나버리는데, 여기서 엄청난 해석을 하는 것 같아요. 이 할아버지의 수수께끼에 대해서. 시청자들이.

저는 이 수수께끼들이 너어어어어무 수수께끼라서 해석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 해석으로는 여기에 ‘망상자다’라고 대놓고 나오는 사람들이 최대 망상자들이 아닙니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망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오히려 가장 정상인 듯 보일지도 모를 그 인물입니다. 그래서 왠지 이 할아버지가 수수께끼를 던지는데 그거를 해석하려고 하는 나의 모습이 덫에 빠지는 기분이 들어서… 해석을 시도하지 않았다.


계속하기에 앞서. 망상이란 무엇인가? 망상은 약간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상상과는 다르죠.

표준국어대사전은 망상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1. 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된 생각을 함. 또는 그 생각.

2. 『심리』 근거가 없는 주관적인 신념. 사실의 경험이나 논리에 의하여 정정되지 아니한 믿음으로, 몽상 망상ㆍ체계화 망상ㆍ피해망상ㆍ과대망상 따위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가 어떤 특정 시공간을 바라볼 때는 꽤 유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조금만 특정 시공간을 벗어나도 이 ‘망상’이란 단어 그 자체가 붕괴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정의 1에 나오는 ‘이치’라는 단어 있잖아요. ‘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된 생각을 함’ 할 때 그 이치. 대체 그 이치란 뭔가? 그리고 정의 2에 나오는 ‘근거가 없는 주관적인 신념’할 때의 ‘근거.’ 또는 이 정의 2에 나오는 각종 다른 단어들. 사실의 경험. 논리. 그리고 심지어 더 나아가, ‘사실의 경험이나 논리에 의하여 정정되지 아니한 믿음‘이라고 하는데.

즉, 따라서, 마치 사실의 경험이나 논리에 의하여 정정이 된 믿음이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고 근거가 있으며 객관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정의인 듯한데.

과연 그런가요?

일단 정의 2 자체가 모순이라고 저는 보는데. 믿음에 사실의 경험이나 논리가 필요하면 믿음이 아니라고 저는 여기거든요. 사실의 경험이면 사실의 경험이고 논리면 논리인 거지, 사실의 경험과 논리가 필요하면 믿음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정의 2에 따르면 모든 종교적 느낌은 다 망상이고, 부모가 갓 태어난 자식을 보면서 “이 아이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라고 여기는 것도 망상이 됩니다. 아무 근거가 없거든요. 사실 근거를 따지자면, 이 세상의 데이터를 따지자면, 그 갓난애기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될 확률이 높아요. 객관적으로는 그렇죠. 별로 떨어지지도 않고 뛰어나지도 않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겠죠.

아무튼. 정의 1에 나오는 이 ‘이치’라는 단어는 참. 정말이지. 제 사실의 경험에 의해 정정된 이 ‘이치’라는 단어에 대한 믿음은 뭐냐면요, 이 단어는 좀 위험하다는 겁니다. 제 경험으로는 대개 남한테 살던 대로 살라고 할 때 이치라는 단어를 쓰는 것 같아요. “그게 세상 이치야.” 이러면서. 비슷한 단어로는 “분수”가 있습니다. “분수대로 살아”할 때의 분수.

음…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맞아요. 세상의 이치가 있고 분수대로 살아야 하는 게 맞는데, 대개 이치나 분수라는 단어가 쓰이는 방식대로 사는 게 그 이치나 분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요. 여러분? 우리는 분수대로 살아야 해요.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실의 경험과 논리에 의하여 정정된 제 믿음입니다. 제 입장에선 망상이 아니란 얘기죠. 그러면 한아임이 생각하는 분수는 뭔가? 우리에게 욕망이 있잖아요? 우리가 뭔가를 이루고 싶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일련의 자기 관찰을 거쳐서 그것이 외부에 의한 욕망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샘솟는 욕망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잖아요? 그러면 그 욕망대로 사는 것이 우리의 분수입니다. 그것이 이치입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가 만약에 엄청 유명해지고 싶어요. 엄청 유명한 가수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그것이 뭔가 남한테 잘보이려고 해서가 아니라, 나 이 갖고 태어난 천상의 목소리로 온 세상 사람들에게 천국을 맛보여 주고 싶다고 해볼게요.

이때 이 사람이 분수대로 산다는 건 뭐냐 하면, 그렇게 사는 겁니다. 엄청나게 뛰어난 가수가 되어 세상에 사랑을 주고 가는 게 이 사람이 분수대로 사는 거예요. 그것이 이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반면, “분수대로 살아라” 아니면 “그게 세상의 이치야”가 쓰이는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가수가 되고 싶은 사람더러 “네가 그렇게 잘 될 리는 없으니까 그냥 살던 대로 살아”라는 뜻으로 던지는 말입니다.

이때의 이 분수와 이치는 제가 생각하는 분수와 이치와 완전히 반대입니다. 또한, 제가 봤을 때 이렇게 쓰이는 분수와 이치는 망상입니다.

왜 망상일까?

“살던 대로 산다”는 것 자체가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살던 대로 산다는 건 어디서부터 시작하나요? 과거의 어떤 시점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건 누가 결정하나요? 내가 20살 때처럼 살라는 것인지? 태어났을 때처럼 살라는 건지? 내 부모처럼 살라는 건지?

엄청나게 유명한 가수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진정으로 ‘살던 대로 사는’ 유일한 방법은 진짜 그 유명한 가수가 되는 겁니다. 혹은 적어도 시도를 하다가 죽든가. 우리 안에서 욕망이 올라올 때, 우리는 그 욕망이 어디서 오는지 몰라요. 그것은 자유 의지로 정해지는 게 아닙니다. 내가 가수가 되고 싶으면, 나는 그 욕망이 어디서 오는지 모릅니다. 내가 초코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으면, 나는 그 욕망이 어디서 오는지 몰라요. 나는 왜 바닐라 아이스크림 말고 초코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을까? 몰라요.

그런데 초코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으면 굳이 바닐라아이스크림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초코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초코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분수고 이치라고 한아임은 생각한다는 거죠.

그런데 안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분수대로 살아라’, ‘세상의 이치는 네가 잘난 사람이 될 수 없는 거다’, 이런 식으로 분수와 이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고, 그래서 ‘이치’라는 단어가 ‘망상’이라는 사전 정의에 사용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한아임은 본다.

이 ‘이치’라는 단어를 아무렇게나 막 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실제로 인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관점 중 하나가 뭐냐하면, 정신병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정신병이었던 것들이 지금은 더는 정신병으로 해석되지 않고요. 옛날에는 정신병이 아니었던 것들이 지금은 정신병으로 해석됩니다. 저는 이것이 무슨… 인류의 짧은 역사 동안 인간이라는 종이 심히 변화해서 새로운 병이 생겨나거나 있던 병이 없어진 거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유전적인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세상이 바뀌면서 이치가 달라진 바람에 병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 겁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반팔 반바지를 입고 빅토리아 시대로 가면, 사람들이 우리 감옥에 가둘 거라고요. 미친놈이라고. 살을 저렇게 드러내고 다니냐고. 그, 왜, 피아노 다리도 야하다고 피아노에 양말 신기던 그런 시절로 가면, 우리가 살 드러내는 거 미친 사람이라고 정신병원에 가둘 거예요. 그래 놓고서는 우리한테 제대로 된 화장실도 안 주고서는 더럽다고 하겠죠?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미치겠죠. 그로써 그들의 말은 현실이 되겠죠. 그들의 이치가 레알로다가 이치가 되는 겁니다.

이런 식이에요. 누가 와서, 외부의 누가 와서 나한테 ‘이치란 이런 것이다’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그것도 객관, 논리, 이성. 무슨 데이터. 무슨 근거. 이런 거를 갖다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하지만 이러한 데이터. 객관. 논리. 이성. 이런 것이 너무나 우위를 차지했다가 지금 막 풀려나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이거야말로 너무나 주관적인 관점일 가능성이 높아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제 우주에서 저는 초콜릿 아이스크림 성분 분석표, 그것을 먹었을 때 살이 찔 확률, 이 세상에 초콜릿 아이스크림 말고도 수십 수백 가지의 아이스크림 맛이 있다는 점, 기타 등등의 사실 관계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객관적이어도, 아무리 초콜릿 아이스크림에 대한 데이터가 많아도, 그것을 제가 먹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에 비할 바가 못된다고 봅니다.

아무튼 그렇다면 한아임이 정의하는 망상은 무엇인가? 제가 “망상대리인”을 보면서 망상에 대한 제 정의가 뭔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요약하자면 이거 같아요. “내가 사는 게 힘든데, 이치, 분수, 객관적으로 보이는 각종 근거, 사실의 경험 및 논리를 적용하며 괜찮은 척하면, 그것이 망상이다.” 즉, 객관적인 망상은 없다. 오직 그 개개인이 얼마나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정의하는 망상과 한아임이 정의하는 망상은 반드시 동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겹치는 부분들이 있어요.

“망상대리인”이라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한아임이 정의하기에도 망상꾼이고,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하기에도 망상꾼인 이들입니다. 몇 명을 소개해 볼게요. 에피소드 1, 2, 3에 중점적으로 나오는 인물들입니다.

자. 어떤 유명한 캐릭터 디자이너가 밤길에 소년 배트에게 몽둥이를 맞습니다. 이것이 에피소드 1에서 벌어져요. 이 캐릭터 디자이너는 사건 당시, 다음 캐릭터를 그려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디자이너가 소년 배트에게 진짜로 공격을 당한 건지, 이 공격을 상상한 건지를 두고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 디자이너의 다리가 부러지긴 했는데, 정말 타인에 의한 공격 때문일까?

게다가 이 디자이너는 자기가 디자인한 캐릭터와 대화를 합니다. 이것은 ‘진짜’라고 봐야 하는가?

그런데 그러다가, 에피소드 1의 끝에서, 다른 캐릭터가 또 소년 배트에게 공격을 당합니다. 이로써 적어도 캐릭터 디자이너가 완전한 망상을 한 건 아니지 않나? 라는 힌트가 주어집니다.

에피소드 2에서 주로 다뤄지는 인물은 초등학생이에요. 이 애는 별명이 ‘이치’래요. 일, 하나, 넘버 원이라서 별명이 이치래요. 자기에고애가 쩌는 소년이에요. 그런데 사람들한테 소년 배트, 그러니까 캐릭터 디자이너를 공격한 자로 의심받는 바람에, 왕따를 당하기 시작합니다. 학생회장 선거가 조만간인데 왕따를 당하니까 이치는 아주 그냥 죽을 맛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해명하거나 어떤 좀 더 효율적인 행위를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의 라이벌인 다른 소년이 루머를 퍼뜨렸을 것이라며, 계속 그 다른 소년 탓만 합니다.

그러다가 이치와 라이벌이 함께 골목을 걷게 되는데, 이때 ‘소년 배트가 라이벌을 때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자, 진짜로 소년 배트가 와서 라이벌을 때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둘이서만 골목을 걷고 있었는데 라이벌이 공격받았잖아요? 게다가 이치는 가뜩이나 소년 배트라고 의심을 받는 상태죠. 그러니까 이치는 지금 당장 소년 배트를 뒤쫓아 가서 잡지 않으면 정말로 오해받게 생긴 겁니다. 그래서 이치는 소년 배트를 쫓아갑니다. 그런데 이때, 소년 배트가 뒤를 돌아봅니다. 이 모습에 이치의 얼굴이 소년 배트의 얼굴과 겹쳐 보입니다.

라이벌 공격 사건 이후에도 이치는 환각을 보는 등, 현실과 상상을 분간을 못 합니다.

에피소드 3에서는 이중인생을 사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중인생 중 하나에서는 매춘부이고, 다른 하나에서는 모범생처럼 보이는 과외선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이런 이중인생을 산다는 걸 알고 있어요. 병원도 가요. 왜냐하면, 이 사람이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과외선생인 쪽은 매춘부인 쪽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하고, 매춘부인 쪽도 과외선생 쪽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거예요. 자기가 어떻게 통제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면서 매춘부 쪽 알터에고를 완전히 청산하려고 하는데, 매춘부 쪽 에고가 더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더 큰 문제는, 매춘부 에고 자체가 그 안에서 또 갈라져요. 각종 분장을 하고서 여러 손님에 따라 여러 캐릭터를 맡는 매춘부거든요.

아무튼 그래서 과외선생과 매춘부가 서로에게 ‘내가 진짜고 너는 가짜다’라고 하는데, 정말이지 이 경우에는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가? 참 알 수가 없습니다.

네. 이런 인물들이 나와요. 이러한 인물들은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를 따르든, 제 정의를 따르든, 망상을 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 쪽에 따르면, 이들은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은 망령된 생각을 합니다. 자기가 만든 캐릭터와 대화를 하고, 라이벌이 자기에 대한 루머를 퍼뜨린다고 여기고, 자기가 매춘부인지 과외선생인지 둘 다인지 둘 다 아닌지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 정의는 이거였죠. “내가 사는 게 힘든데, 이치, 분수, 객관적으로 보이는 각종 근거, 사실의 경험 및 논리를 적용하며 괜찮은 척하면, 그것이 망상이다.” 이 캐릭터들이 다 이러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는 게 힘든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어떻게든 괜찮은 척을 해요.

심지어 매춘부 겸 과외선생인 사람조차, 이 사람이 병원에 가서 도움을 청하기는 하지만, 이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결혼한 사람한테 되도록 안 알리려고 할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그게 되겠냐고요.

그리고 이치라는 소년은 자기에고애가 쩌는 그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라이벌에게 루머의 책임을 전가합니다. 아주 여러 명이 루머에 가담했을 것이고, 극 중 묘사를 보면 라이벌이야말로 정말 순딩이라가지고, 얘야말로 루머의 확산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처럼 보이는데도, 이치라는 이 소년은 이 라이벌을 나무랍니다. 왜일까? 왜 하필 가장 루머를 안 퍼뜨렸을 것 같은 라이벌더러 뭐라 할까? 이치라는 이 소년이 보존해야 하는 에고의 모습이 있으니까요. 자기는 뭐든지 다 잘해야 하는 넘버 원 이치여야 하는데, 라이벌 소년이 순딩순딩하게 구니까 뭔가 거기에 굴복하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아요, 이치 입장에서. 그래서 지금까지 자기가 인기가 많았던 점, 공부며 운동이며 다 잘했던 점, 이런 객관적으로 보이는 각종 근거 등을 들면서, 라이벌은 자기보다 못하고, 따라서 라이벌이 루머를 퍼뜨렸을 것이다, 라고 계속해서 망상하는 겁니다.

그리고 캐릭터 디자이너는 다음 유명 캐릭터를 생산해 내지 못한다는 압박감을 인정하기 싫어서, 그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소년 배트를 이용했습니다. 자기는 계속 괜찮은 척해야 하니까. 내가 다른 유명 캐릭터를 또 그려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걸 인정하기에 너무 무서우니까, 차라리 다리가 부러지는 공격을 당한 겁니다.

이렇게, 사전에서 정의하는 망상과 한아임이 정의하는 망상이 겹쳐요, 이러한 인물들의 경우에는.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소년 배트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는 형사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합니다.

“이 피해자들이 공격당한 후 전부 다 마음을 놓는 듯 보이지 않았냐.”

네. 그러합니다. 그러한 듯 보입니다. 이 피해자들은 사실은 망상을 유지하느라 매우 힘들었을 거예요. 겉보기에는 이들이 현실과 상상을 구분을 못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것이 맞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무의식 차원에서 이 피해자들만큼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잘 알고 있기도 어려울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정말로 모르면 이 정도로 완벽하게 망상을 못 할 겁니다.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부정하려면 부정할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을 해야 부정을 하잖아요. 이 피해자들은 정확히 알고 있어요. 예를 들어, 매춘부이자 과외선생인 이 캐릭터는, 아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부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부정의 통제를 잃었을 뿐이지, 매춘부 혹은 과외선생, 둘 중 한 쪽은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무엇이 부정되고 있는지.

이치라는 소년도, 자기가 뭘 부정하고 있는지 의식적으로는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정확히 알아요. 아주 너무 정확히 알아서, 그래서 라이벌에 대해 본능적으로 적개심을 갖고 있는 겁니다. 저 라이벌보다 내가 못하다는 걸 인정하면 내가 죽으니까, 내 에고가 죽으니까, 저걸 어떻게든 정확하게 교묘하게 피해야겠다. 그렇게 피하는 겁니다.

캐릭터 디자이너도 마찬가지고요. 자기가 피하고 싶은 걸 아주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의식이 아는 것은 사실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기에는, 무의식이 하는 게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상처를 치유하는 건 무의식이죠. 우리 중 그 누구도 넘어져서 까진 상처가 났을 때 그 상처를 한 땀 한 땀 의식적으로 치유하지 않습니다. 무의식이 알아서 해주는 거예요. 알아서 벌어지는 일들이 엄청 많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 캐릭터들이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들이 부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런 식으로, 소년 배트에게 직접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캐릭터들은 너무… 너무 망상이라가지고, “망상대리인”이라는 시리즈의 메시지를 형성하는 하나의 퍼즐 조각 역할처럼 느껴졌습니다. 캐릭터들 그 자체로서 완전히 조명받는 느낌이 아니었고, 에피소드 당 새로운 소년 배트 사건이 나오는 구조가 이러한 느낌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계속 새 피해자가 나오니까, 피해자 개개인이 크게 중요할 순 없다고 여겨졌어요.

단, 캐릭터 디자이너는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더 큰 역할이 있다는 점이 드러나요. 이 캐릭터 디자이너 얘기는 좀 있다가 더 할게요.

그 캐릭터 외에도 시리즈에 계속 등장하며, 에피소드를 넘나드는 인물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바로 형사들입니다. 정확히는 형사 한 쌍이 나오고요, 이들의 대조를 통해서 “망상”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대 의문이 또 한 번 조명됩니다.

이 형사들이 둘이서 피해자, 용의자, 목격자 등을 조사하고 다니는데, 둘의 조사 경향이 너무나 상반됩니다. 요약하자면, 한 명은 망상을 하는 캐릭터들의 세계에 아주 선뜻 들어가고, 다른 한 명은 “우리는 사실을 찾아야 해!”라고 하며, 그 세계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제가 편의상, 전자를 망상웰컴러라고 부르고, 후자를 망상거부러라고 부를게요. 짧게, 웰컴러, 거부러.

에피소드 5에서 이 두 형사들이 완전히 가상의 세계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웰컴러와 거부러의 수사 스타일이 완전히 갈려요. 이 가상의 세계의 경우에는 어떤… 던전 앤 드래곤 같은? 아니면 뭔가 롤 플레잉 카드 게임류? 그런 세계관을 가진 망상 캐릭터가 구축해 낸 가상의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에 들어가서조차, 거부러는 원래 자기가 입고 있던 양복을 입고 있고요, 웰컴러는 아예 그 세계 속 캐릭터가 됩니다. 즉, 웰컴러는 이 망상 세계의 진실을, 세계관을 알려고 하는 반면, 거부러는 말 그대로 거부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웰컴러는 이 범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말하자면 번역을 할 수 있게 돼요. 그런데 거부러는?

이 거부러가 사실, 제가 이번 아임 드리밍 에피소드 맨 초반에서 말한 그 인물입니다. “일상생활에 문제없는 것처럼. 그래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그래서 오히려 영영 망상에서 풀려날 길이 없을 확률이 높아 보이는, 그런 인물.” 그 인물이 이 거부러 형사예요. 이 사람은 언뜻 보면 되게… 되게 그냥 열심히 사는 형사 같아요. 이 사람은 “정의가 있다고 믿으며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말을 하고요, 오히려 망상웰컴러가 “그런 헛소리를 뭐하러 하냐”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정의가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얼마나 픽션인지를 말하는 것 같아요.

정의가 없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정의는 있다고 믿는 사람한테만 있다는 얘기입니다. 정의가 무슨 절대적인 존재로서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 거부러는 정의라는 픽션은 믿으면서, 남들의 픽션은 안 믿어요.

그리고 일반 사람이면 이래도 돼요. 아무 상관 없어요. 믿기 싫은 거 안 믿으면 돼요. 문제는, 이 거부러의 직업이 형사라는 점입니다. 지금 웰컴러는 망상의 세계에 들어가서 범인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언어를 이해하고 있는데, 거부러는 계속 “이건 현실이 아니야. 이럴 리는 없어. 정의는 진짜고 존재하지만 남들의 세계관은 절대 있을 수가 없는 거야.”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수사를 잘 못합니다.

예를 들어, 에피소드 6에서 이 거부러는 노숙자 할머니인 어느 목격자를 앞에 두고는, 다짜고짜 사실을 불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반면 이때 웰컴러는 어떻게 하느냐? 조근조근 친절하게 할머니에게 상황을 설명해 줍니다.

누가 더 수사를 잘할까요? 당연히 웰컴러가 더 수사를 잘합니다. 웰컴러는 목격자든 용의자든 누구든, 일단은 그들의 언어로 그들과 대화합니다. 이건 엄청난 능력이잖아요.

망상웰컴러와 망상거부러 둘 중에서 오히려 현실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쪽은 웰컴러입니다. 왜냐하면, 나와 대화하는 저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망상하는지를 알아내고 그것을 따라 해서 그 사람의 세계관으로 들어가려면, 그 사람이 부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웰컴러는 이걸 아주 잘해요.

웰컴러도 거부러도, 지금 여기까지만 보면, 사전적 정의로는 망상을 안 하는 거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정의하는 망상의 정의에 이 거부러가 서서히 부합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사는 게 힘든데, 이치, 분수, 객관적으로 보이는 각종 근거, 사실의 경험 및 논리를 적용하며 괜찮은 척하면, 그것이 망상이다.” 이게 제가 정의하는 망상인데, 이 거부러는 점점 더, 분명 수사에 도움이 안 되는 자신의 망상을 적용하려고 해요. 그런데 이자는, 요 정도 망상으로는, 아무도 이자를 정신병원에 넣는다든지, 너 어디 가서 도움 좀 받아봐라 하지 못합니다. 할 필요도 없고요, 사실. 왜냐하면 제가 느끼기에 이 시리즈의 핵심 메시지가 이거예요. 우리가 다, 이런 크고 작은 망상을 하고 산다는 사실입니다.

소년 배트한테 공격당할 정도로 큰 망상을 하는 캐릭터들은 오히려 약간… 맥거핀? 약간 주의를 돌리기 위한 도구 같고, 진짜 핵심은 이 형사들, 그중에서도 망상거부러라고 보는 겁니다, 저는. 이 캐릭터가 얼마나 망상을 거부하면서 사실은 가장 답이 없는 망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여러분? 제가 이렇게 픽션을 보고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캐릭터를 보고 “와 쟤는 망상하네”에서 끝내려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이전 에피소드들에서 다룬 인물들도 전부 다 그래요. “산 자의 기록”에서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을 줄 아는 인물을 보면서, “쟤는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는 것도 모르네” 이렇게 끝내자는 게 아니고요. 우리가 그런 망상을 하지 말잔 겁니다.

아무튼, 망상대리인에서 망상거부러가 사실은 망상을 제일 격하게 하더라. 그런데 그 망상의 정도가 겉보기에는 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이 사람이 사는 게 힘든데도 불구하고, 이치, 분수, 객관적으로 보이는 각종 근거, 사실의 경험 및 논리를 적용하며 괜찮은 척하는 게 너무나 가능하더라. 이걸 가지고, “아 저 캐릭터가 저러는구나”로 끝나지 말자는 거죠.

내가—우리 각자 개개인이—내 우주에서 어떤 망상을 논리 이성 객관 같은 미명 하에 유지하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건데, 한아임 세계관 특성상, 여러분 각각의 우주를 제가 알 수 없단 말이죠. 아예 정의상 제가 여러분의 우주를 아는 게 불가해요. 그러니 그것은 내가—우리 각자 개개인이—해야 하는 작업인 것이고, 다만 한아임이 할 수 있는 건 “망상대리인”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와 있는 픽션을 가져다가, 즉, 논픽션보다 훨씬 더 작품 하나 안에 모든 기승전결이 다 들어 있는 도구를 가져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사는 게 힘들면, 망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어… 잠깐만 제 예를 들자면, 이런 거예요. “나는 운동을 못 해.” 이런 거. 운동을 못 한다고 생각하니까 운동을 점점 못 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망상을 진짜로 믿었어요. 이것도, 내가 살면서 불편함을 못 느끼면 망상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저는 어… 운동을 막 전문적으로 해야겠다고 여긴 적은 없지만, 계속해서 나는 운동을 못 한다는 생각 때문에 크고 작게 피해를 스스로 만들어 냈던 것 같아요, 살면서. 그렇게 내가 사는 게 힘들면서도 그걸 제 분수인 줄 알았다니까요.

여러분? 우리의 분수는 가장 빛나는 내 안의 욕망의 존재로서 사는 겁니다. 여러분이 올림픽 대표선수가 되고 싶으면 되는 거고요, 아까 예로 든 유명한 가수, 아니면 뭐, 백억 부자, 그것이 뭔가… 결핍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진짜 여러분 내면의 그 빛나는 코어에서부터 오는 욕망이면, 그것은 신성한 거라고 저는 생각하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분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우리 개개인이—그 빛나는 존재로 살지 않고 있는 동안 사는 게 힘들면 당연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 빛나는 존재가 나인데 나 아닌 것으로 사니까 힘든 거예요. 이건 마치, 내가 아주 작고 귀여운 지렁이면, 한 평짜리 방에 들어가서 사는 게 천국 같을 수 있지만, 내가 아주 커다란 사자면, 한 평짜리 방에서 사는 것이 지옥인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지렁이가 사자보다 못하거나 사자가 지렁이보다 못한 게 아니고요, 지렁이는 지렁이고 사자는 사자고 다 나름대로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분수대로 살려면 지렁이는 한 평짜리 방에 남아도 괜찮지만, 사자는 방에서 나와야 하는 게 이치에 맞는다는 거죠. 그게 진정한 이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자더러, “너는 분수대로 살아야 해. 너는 한 평짜리 방에서 행복해야 해. 너, 이 동물원에서는 모든 사자들이 다 너처럼 살아. 그게 사실을 기반으로 한 논리적 근거야. 너 여기 지금 너처럼 안 사는 사자 보여? 한 마리도 없지. 그러니까 넌 우리 살던 대로 살아야 해. 네가 뭔데 유독 너만 더 자유롭게 살려고 하니?”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건, 이거야말로 망상이고 지옥이다.

우리 안의 빛나는 그거대로 살면 힘이 안 들어요. 저는 이, 제가 하던 망상 중에 몇 가지만 버렸는데도, 벌써 훨씬 힘이 덜 들거든요? 진짜로 그래요. 그래서 저는 그 경험을 기반으로, 이거야말로 진짜 논리적으로, 어… 저 말고는 데이터세트가 없어요. 제가 유일한 샘플이에요. 저 하나의 샘플이기 때문에 그 어떤 외부 과학도 이걸 증명해 줄 순 없지만 제가 저한테 증명했기 때문에 저는 압니다. 믿음이 아니에요 이건. 앎이에요. 이 망상들을 녹이면 원래 모습대로 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원래 모습은 내 욕망을 없는 척하는 게 아니고요, 욕망대로 사는 겁니다. 욕망이 있으면 이유가 있는 거예요. 내가 한 평짜리 방에서 나오고 싶으면, 내가 욕심이 많고 분수를 몰라서가 아니고요, 분수를 아주 정확히 알아서 그런 겁니다.

이러한데, “망상대리인”에 나오는 이 망상거부러 형사는, 아… 답이 없어요. 이 사람은 너무나 사랑에 빠져 있어요, 망상하는 자기 자신과. 왜냐하면, 이치에 맞고, 분수에 맞다고 여기거든. 너무나 객관적이거든. 정의. 듣기 좋잖아요? 사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아주 그냥 논리적인 형사. 자기가 조사하는 사건이 망상에 대한 사건이고, 망상웰컴러 형사가 좋은 예시를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망상거부러는 빽빽 소리나 지르면서 계속 ‘현실은 이래야 한다’를 주장합니다. 지옥이 따로 없어요. 이… 사는 게 힘든 나와 사랑에 빠진 자의 이 모습 같은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내가 미쳤다고 여기는 피해자, 목격자, 용의자를 앞에 두고, 내가 그들더러 자꾸만 현실 세계로 오라고 빽빽 소리를 지르면 누가 미친 걸까요? 내가 미쳤죠.

심지어 그 와중에 내가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으로 망상한다? 정말로 미쳤죠.

아 정말, 성인 남자가 노숙자 할머니 어깨를 부여잡고 쥐고 흔들면서 “당신이 범인이지!” 이러는데, 이거야말로, 제정신을 빙자하며 이 세상에 세계관이 하나밖에 없는 줄 아는 미친 세계관의 망상꾼이로구나.

심지어 나중에는, 용의자를 체포를 합니다. 그 용의자는 카피캣이었던 것으로 드러나요. 하지만 그렇더라 하더라도, 용의자가 카피를 하려면 일단 진본에 대해 뭔가를 알았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카피캣 용의자의 말을 들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 망상거부러 형사는 사람을 체포까지 해놓고, 말을 골라 듣습니다.

골라 듣는 것뿐만 아니라, 심어요, 말을. 용의자를 조사를 하는 게 아니라, “너는 이렇게 했어”라고 주입합니다. 실제로 이 형사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수사를 이렇게 하다니.

그리고 아까 언급했듯이, 형사들이 범인에 대해 특정 가정을 하고 있긴 해요. 그 가정은, “공격당한 사람들이 공격당한 이후에 마음이 놓인 듯 보인다.” 그러니까, 이 모든 망상인인 피해자들은, 자기가 피해자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피해자가 아닌 듯 행동하는 측면이 있다. 이런 가정을 형사들이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과학수사를 하겠다고 주장하면서, 망상거부러는 망상웰컴러에게 “어떻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만 타겟하는 범인이 있을 수 있겠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누가 나를 좀 공격해줬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을 품었던 사람들이 실제로 공격을 당한 후 마음이 놓인 모습을 보인다는 수사 이론이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느냐고 묻는다는 겁니다.

근데 아니… 이것이… 일본이 아무리 제법 아날로그한 나라라지만, 이 애니에 휴대폰도 나오고 컴퓨터도 나오는데, 어떻게긴. 사람들 뒤만 좀 캐도 금방 피해자 타깃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여기서 좀 흥미로운 장면들이 나옵니다. 망상웰컴러가 다른 사람들의 망상을 웰컴하는 것도 모자라서, 스스로도 망상에 빠져요. 자기 자신의 이론에 빠져듭니다. 피해자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서, 이들이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이것이 맞는 이론이다, 하는 망상에 빠집니다.

그러니까 망상웰컴러가 망상거부러보다 약간 수사하는 데에 유리한 측면이 있지만, 망상웰컴러도 망상러다. 아주 그냥 이 시리즈 전체가 망상의 향연이에요. 이 형사들이 둘 다 수사를 한다고 하긴 하는데… 이것이 수사인지… 내 세계관 최고 게임을 하는 건지…

급기야는, 음… 이 사건들의 가해자가 지금 ‘소년 배트’잖아요. 방망이 들고 다니는 소년이란 말이죠. 즉, 용의자도 미성년자예요. 그런데 이 미성년자 용의자가 경찰에 붙잡힌 상태에서 진짜 소년 배트에게 공격당합니다. 그리고 이 용의자는 다른 피해자들처럼 그냥 머리만 처맞고 끝나는 게 아니라, 죽임을 당해요.

그런데 아… 이쯤 되면, 이쯤 되면 자기가 잘못한 거 인정할 만도 하잖아요? 아니 내가 보호하던 용의자가, 일단 범인이 확정되기 전까진 무죄니까, 보호하던 용의자가, 그것도 미성년자가, 경찰서에서 살인을 당했는데, 그거에 대해 전혀 아무 뉘우치는 기색이 없고.

아. 정말. 이번 아임 드리밍 시즌을 관통하는 불쌍병을 드러냅니다. 타인이 나를 불쌍해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실제로 객관적으로 불쌍한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한없이 불쌍한 녀석으로 본다는 게 아주 큰 망상이에요. 이게 상당히 아이러니한 현상이에요. 자, 한아임이 정의하는 망상. “내가 사는 게 힘든데, 이치, 분수, 객관적으로 보이는 각종 근거, 사실의 경험 및 논리를 적용하며 괜찮은 척하면, 그것이 망상이다.” 여기에 무엇이 숨어 있느냐 하면, 내가 괜찮은 척을 하면서도 사는 게 힘든 게 확실하니까, 괜찮은 와중에 또 불쌍한 척을 해야 해요.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 이것이 뭔가 애니를 보고 ‘이 캐릭터 이상해’로 끝내려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이 애니에 수많은 망상꾼들이 나오는데, 대부분의 망상꾼의 레벨까지 우리는 아마 안 갈 거예요. 그런데 가장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케이스가 이 망상거부러예요. 아. 이 사람과 이 사람 부인의 불쌍병 증세로 말할 것 같으면 정말 끝도 없어서, 어… 짧게만 말하자면, 이 캐릭터랑 이 사람 부인 캐릭터를 보면, 둘이 천생연분이에요. 지옥이 따로 없다, 아주 그냥.

하여간에 이 망상거부러 형사는, 아주 교묘하게, 정말 그 망상의 양상이 너무나 교묘하여, 요런 교묘함은, 여러분, 박찬욱 감독님의 ‘아가씨’ 보셨습니까? 거기서 판이 뒤집히고 또 뒤집히잖아요? 약간 고런 교묘함인데, 아가씨에서 서너 명이 짜던 판을 이 망상거부러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혼자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게 너무 습관이 되어가지고, 진실이 뭔지 자기가 몰라요.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피해자, 용의자, 목격자보다 오히려 더 위험해요. 얼마나 위험하냐면, 그 망상의 결이 너무나 교묘하여 경찰로 한동안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다고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현실로부터 도망치지 말라는 주장을 하는 이 캐릭터가 이 시리즈를 통틀어서 가장 미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저의 이 해석이 일리가 있다고 제가 여기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다양한 그림체 때문입니다. 이전 에피소드들에서 여러 번 말했던, 아, 정말, 애니메이션의 크리에이터들이 신이 되는 그 매력. 그야말로 세계를 형성하고 붕괴할 수 있는 그 힘. 그것을 이 시리즈의 창작자들이 최대치로 발휘하고요. 그것이 뭔가… 그냥 힘을 뽐내려고 뽐낸다기보다는, 이야기에 너무나 잘 어우러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끝에 가서는, 망상거부러 캐릭터가 완전히 그림체가 다른 세계로 빠져듭니다. 즉, 망상을 거부하고 거부하다가 망상의 세계로 뛰어든 거라고 저는 해석을 합니다.

소년 배트에게 공격당한 다른 캐릭터들은 망상의 정도가 엄청난 것 같으면서도 아예 다른 세계로 매번 뛰어들진 않거든요? 이 세계에 있으면서 망상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풀려요. 그런데 망상거부러 형사는 아예 그림체가 다른 곳으로 간단 말이죠.

그리고 잠깐 다시 캐릭터 디자이너로 돌아가자면. 결국엔 캐릭터 디자이너가 어릴 적 갖고 있던 트라우마를 소화하지 못해서 이 모든 망상이 시작되었다, 라는 식으로 시리즈가 약간은 마무리가 됩니다. 완전히는 아니고, 상당히 열린 결말로 마무리가 돼요.

왜 열린 결말이냐 하면요, 소년 배트가 망상이라는 것도, 이게 참… 이게 이상해요. 어떤 사람이 망상을 했는데 그것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보고, 그것 때문에 경찰이 움직이고, 경찰 중 누군가는 해고를 당하고, 경찰이 데리고 있던 용의자가 살해를 당하고, 이랬는데, 이쯤 되면 그것을 망상이라고 부를 수 있나요? 이것이야말로 가장 구체적인 현실 아닙니까?

시작은 캐릭터 디자이너의 망상이었을지언정,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망상 때문에 움직였고, 영향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렇다면, 이 망상은 우리가 하는 다른 망상들과 뭐가 다른가?

이 애니메이션 시리즈 전체의 시작과 끝에,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각종 핑계를 둘러대는 몽타주가 나옵니다.

그래서 또 한 번, 저는 생각한 거죠. 우리가 망상대리인 에피소드를 하나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망상꾼은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크고 작게 하나씩 피해의식이든 과대망상이든 갖고 산다고. 내가 사는 게 힘든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뭔가… 원래 남들도 그렇다는 둥.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둥. 이걸. 어… 남한테 뭐 막 다 드러내고 인정하고 다닐 필요는 없어요. 그런데 내가. 나 자신이. 나를 계속 속이면 얼마나 불쌍하면서도 불쌍하다는 것조차 인정을 못 하면서 또 되게 불쌍해야만 하는 교묘한 덫에 빠지는지를, 망상거부러 형사가 보여줍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우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만 확인하고 관리하면 됩니다. 우리 각자의 개개인의 우주요. 우리는 분수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치에 맞게 삽시다. 내가 사자인데, 아니면 코끼리인데, 아니면 사슴인데, 한 평짜리 방에서 행복한 척을 하는 건 분수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이치에 맞게 사는 것도 아니고, 망상이에요. 심지어 내가 금붕어인데 한 평짜리 방에 살아봐요. 어항이 아닌 방. 그러면 나는 그냥 죽는 거예요. 거기에 대고 지렁이가 와서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거야” 하면 그게 뭡니까? 심지어 금붕어인 내가 지렁이 말을 믿고 “사람은 다 이렇게 괴롭게 사는 거야”라고 하고 다녔다가, 실제로 괴롭게 살다가 죽었다고 가정해 볼게요. 그러면 뭐, “아 역시 내 말이 맞았어, 사는 건 괴롭고 죽는 것도 괴롭지” 이러면 뭐… “와! 네 말 맞았다! 이겼다!” 이렇게 결론이 나는 건가요? 너무나… 너무나 이… 이치며 분수라는 말은. 너무나 이상하게 쓰일 때가 많은데, 우리는 타인이 이치며 분수라는 말을 또 다른 타인들에게 어떻게 쓰는지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내가—우리 개개인이—나 자신에게 뭘 하고 있는지만 보면 됩니다. 내가 사는 게 힘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것은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봐서일 수도 있고, 문제인 걸 문제 아닌 척해서일 수도 있어요. 그건 외부에서 어떻게 말해줄 수가 없어요.

다행이도, 우리가 “망상대리인” 같은 픽션을 보면서 할 수 있는 건, 잘 정리된 기승전결을 거울삼는 겁니다.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어느덧. 아임 드리밍 2주년입니다. 2021년 12월 17일에 시작한 아임 드리밍, 2년 했어요. 2년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덧 이렇게 되었네요. 시간이란 참으로 미스터리합니다. 있으면서도 있지 않은 것이 시간이다.

음. 다음 에피소드가 시작하기 전에 크리스마스가 올 겁니다. 그리고 다다음 에피소드가 나오기 전에 새해가 될 거예요. 그래서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픽션 레퍼런스물 얘기 안 하고 연말 마무리 에피소드를 할 거예요.

단, 다다음 에피소드에서 다룰 것이 무엇인지 미리 이야기해드릴게요. ‘철서구’ West of the Tracks, 어… 중국어 발음은 줭말 모르겠는, 그런 다큐멘터리 영화인데요. 저어어엉말 길어요. 위키에 나와 있기로, 551분. 네. 이 압도적인 길이 때문에 다음 에피소드에서 안 다루고 다다음 에피소드에서 다루는 측면도 있고요. 또한 다큐가 정말… 줭말 울적해요. 어… 한 번에 보기에는 너무 울적하더라고요.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 나오기로는, 중국 정부에서 이런 종류의 다큐의 유통을 막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검색해 보시면, 유튜브에 있어요. 제가 링크까지 걸기는 좀 그런데, 어… 유튜브에 있습니다.

창작자의 저작권은 중요하지만, 저작물의 내용 자체가 어떤 정부에서 덮고 막으려고 하는 내용일 때는, 그 정부의 영향력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최대한 그 저작물을 많이 보고,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알고 있는 것이 저작 의도에 부합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이 들어서, 유튜브에서 검색이 되긴 되더라, 라고까지만 말씀을 드릴게요. 다른 채널에서 제가 찾지 못했어요. 정말 중국 정부에서 다 막은 건지, 그거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네. 그러합니다.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 와중에 저는 철서구. 중국 다큐 철서구를. 음. 2주에 걸쳐서 보기에 너무 우울해가지고. 4주에 걸쳐서 제가 보고, 고것은, 다다음 에피소드에서 다루겠습니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Curtis Cole – Teenage Dream
  • WEARETHEGOOD – Run Away – No Lead Vocals
  • sero – One Without
  • Muted – Silhouettes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 2023 한아임

소개

✨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