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67] 부자연스러움의 무용함, “철서구(West of the Tracks)”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여러분, 2024년, 새해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복이 많았으면 좋겠는 새해의 첫 에피소드인데, 참으로 울적한 영화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큐멘터리, “철서구”예요. “누아르 어바니즘”에 정리되어 있기로는, 중국의 국유기업이 1990년대 초반부터 위기에 빠지면서, 그러한 기업들이 망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해고되고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는데, “철서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다큐입니다. “이 300분짜리 영화는 300시간이 넘는 푸티지를 잘라 만든 것인데, 녹Rust, 잔해Remnants 및 철로Rails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구글에 검색해 보면 300분짜리 영화, 즉, 5시간짜리 영화가 아니라, 9시간 11분이라고 나와요. 그리고 유튜브에 있는 버전도 파트 1이 4시간 정도, 파트 2가 3시간 정도, 파트 3이 2시간 15분 정도입니다. 지지난 에피소드의 끝부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유튜브에 올라온 이 영화를 언급하는 이유는요, 중국 정부에서 이러한 종류의 당국 비판적인 영화의 유통을 막는다는 이야기가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도 나오고, 전반적으로 뭔가…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싶어서입니다. 이 영화를 어디서 다른 데서 구해서 볼 수 있는지를 모르겠어요, 유튜브 말고. 일반적으로 창작자의 저작권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 다큐의 내용 특성상, 중국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많이 보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닌가? 싶어서 유튜브에 올라온 버전을 언급을 합니다.

나무위키에는 “철서구”에 대해 이렇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왕빙의 다큐멘터리 영화.

왕빙 감독의 데뷔 작이며, 왕빙의 방법론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9시간이 넘는 대작이며, 아무래도 인터미션을 포함해도 9시간을 한 상영관에서 상영할 수는 없다보니 3부작으로 나눠서 상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솔직히 9시간 11분이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다큐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는 왕빙이 철서구에서 카메라 하나만 들고 2년동안 촬영하여 완성하였다. 이 촬영방식은 디지털카메라 세대의 다큐멘터리 연출에 있어서 상당한 임팩트를 남겼다.

왕빙은 어쨌든 첫 작품 철서구 하나로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고 이후 작품들도 유사한 양식으로 만들어나갔다.”

그러합니다. 그럼 오늘의 수다, 시작할게요.


네 여러분, “철서구.”

이것은 거의 뭐, “반지의 제왕” 연달아 보기 이후로 경험해 보지 못한 영화 길이입니다. 이것은 음… 눈을 부릅뜨고 보기에 신체적으로 힘이 든 다큐 같아요. 그랬다가는 눈이 정말이지 너무 아플 것이다. 그래서 아주 느긋하게, 뭘 드시면서. 뭔가 따뜻한 핫팩을 배에다 올려놓고. 고양이 강아지 등 반려동물이 있으시면 그 아이의 온기를 벗 삼으시면서, 정말 천천히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아주 그냥. 반려아이가 “주인 이 녀석은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하면서 여러분을 관찰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큐의 길이가 긴 만큼, 빠른 전개랄 게 없습니다. 특히나 파트 1인 ‘녹’이 그래요. 그러나 이 다큐가 이유 없이 이런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정말… 이것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의 삶의 속도고, 그 느린 속도 자체가 다큐의 메시지 같습니다.

유튜브에 있는 버전은 오디오 싱크가 약간 안 맞던데, 보는 데 불편하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원래 중국어를 못하기 때문에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중국어를 하시는 분들은 좀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튼 그리하여. 녹. Rust. 파트 1.

정말 그 어떤 편집도 없는, 카메라를 기차 앞에 달아서 원래의 기차 속도 그대로 화면이 움직이는 장면이 초반 몇 분에 나옵니다.

정말. 정말정말 느린 속도. 정말 춥고. 눈이 내리는데 그것이 어떤 곳에는 소복이 쌓여 있지만 차창에는 이미 녹아서 물이 되어 아주 그냥 을씨년스럽고. 차라리 아예 텅 비어 있는 게 덜 외로웠을까 싶을 정도로 드문드문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이것은 정말… 아, 저에게는 반려동물이 없지만, 반려동물이 있었더라면 그 아이를 끌어안고 봐도 참 뼛속이 시렸을 그런 장면이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때 잘나갔으나 이제는 망한 그런 산업지구가 배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음… 저는 지금 반려식물밖에 없어요. 이 식물로 말할 것 같으면 아이비류?의 아이인데, 원래 있던 아이비류 식물의 가지를 몇 개 따로 물에 담은, 그런 반려식물입니다. 원래의, 뭐랄까, 모체? 모체 식물은 흙에 든 화분에서 자라고 있었어요. 물만 줘도 엄청 잘 자라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한아임네 엄마현이 영감을 받아가지고, 그 모체에서 떨어진 가지들 몇 개를 물만 든 통에다가 두어 봤어요. 그랬더니 걔네가 자라더라고요? 걔네가 자라는데 너무 잘 자라요, 심지어는. 흙도 없고 물만 있는 통에서요. 그 이후로 떨어져 나간 가지를 여러 물통에다가 담았는데, 다 잘 자라요.

그러한 물통 중 하나를 한아임이 엄마현에게서 받아왔습니다. 그 아이가 한아임의 반려식물입니다. 얘는 정말 물만 먹고 자라요. 그냥 일반 수돗물. 가지에서 뿌리 같은 게 나와요. 엄청 신기해요. 아, 그리고 햇빛을 먹죠. 근데 직사광선도 아니고, 그냥 희미한 햇빛에 물만 먹어도 잘 자랍니다.

그리고 얘의 이름은 ‘무럭이’입니다. 네. 무럭무럭 자라라고, 식물 이름이 무럭이예요. 그리고 실제로 지금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더라.

제가 이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철서구’라는 이 다큐에, 눈과 기차가 나오는데… 하이고 정말 시려워요 몸이. 근데 심지어, 차라리 그 장면이 나아요. 노동자들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면 이제 정말, 아 정말 진짜 울적하다. 이제 정말로 울적해지기 때문에 먼저 ‘무럭이’를 언급해봤습니다.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촬영되었다고 하는데, 그 시대에 다른 나라도 아니고 중국에서 공장이 망하면, 그곳에서 일하던 공장 노동자들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 같고, 실제로 그렇게 보입니다. 그냥 무한히 기다려요. 어떤 일이 벌어져 주기를. 이렇게 이들이 얼마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그것이 그 시공간의 핵심이고, 그것을 보여주는 방법 중 하나가 말 그대로 ‘그냥 계속 찍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 빨리감기나 컷편집을 쓰지 않고, 그냥 계속 찍는 것.

어… 여러분? 저는 중국에 대해서 참 모릅니다. 뭐라도 안다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모릅니다. 심지어 중국은 그래도 방문을 해본 나라인데도 그래요. 근데도 “누아르 어바니즘”에 나온 모든 국가 중에 제일 모르는 국가가 중국일 것 같아요. 남아공이나 멕시코보다도 더욱더. 남아공이나 멕시코는 가본 적도 없는데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중국은 가봤는데도 뭘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모른다는 생각이 더 드는 것 같아요.

물론 어떤 국가에 대해 뭘 안다고 하더라도 그건 지극히 한아임 개인에 의해 필터된 현실일 겁니다. 심지어 우리는, 인간은, 나에 대해 내가 의식적으로 아는 것조차 지극히 제한되어 있어요. 그러니 한국이나 미국에 대해서 제가 아는 것도 제한적인 것이 당연하긴 한데, 중국에 대해서는 뭔가… 어떤 이미지조차 잘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일본이다, 하면, 제가 일본에 대해서 다 아는 건 매우 아니고, ‘사실을 안다’는 더더욱 아닙니다만, 그래도 일본 하면, 이번 시즌에서 많이 다룬 애니의 나라라든지. 뭔가 왠지 그러한 애니의 서브장르 중 한아임이 심히 좋아하는 분위기의 작품들이 있다든지. 아니면 뭐 음식문화라든지, 이런 것을 ‘안다’, 그러니까 객관 사실은 아닐 수 있지만 한아임의 경험 세계에서 알아진 것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중국은… 중국에 잠시 있을 때도, 그때 한 달인가 있었는데, 그때도 혼란했고, 지금도 뭘 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 스케일이나 거기서 벌어지는 일이 감이 안 잡히는 나라고요. 지금껏 만난 중국 사람들을 봤을 때도, 그 수가 많지 않은 것도 있지만, 뭔가… 공통 지점이 없는 느낌? 분위기라든지 중국에 대한 그들의 태도라든지에 그 중국 사람들의 공통 지점이 없는 느낌? 나라가 거대해서 그런지.

그래서 이번 에피소드에 중국에 대한 저의 이런 혼란함이 담기게 될 것 같습니다. 이 다큐를 보고 나서 더 혼란해요. 이 노동자들의 상황이 사실의 한 버전으로서 ‘철서구’에 담겨 있는데, 다큐 자체가 혼란해서가 아니라 한아임의 중국에 대한 이런 미스터리한 느낌 때문에 혼란하다. 그래서 여러분이 보실 때는 별로 안 혼란하실 수도 있어요. 별로 안 울적할 수도 있고요.


‘녹’ 파트에 나오는 이 노동자들을 보면은, 그리고 ‘철서구’라는 세 파트로 구성된 다큐 전반을 보면은, 여러 가지 존재론적 의문이 듭니다. 대표적으로 존재의 유용성에 관련된 것들인데…

사람이 꼭 유용해야지만 존재할 자격이 있는가, 라는 의문이 있을 때, 유용이 뭔지를 정의하는 게 가장 관건인 것 같아요.

저는 사람이 자연스러운 상태로 있으면 무용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자연스럽다는 건 숲에 들어가서 전기와 난방이 없는 곳에서 자연인으로 산다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지금 가진 모든 사회, 기술, 문화, 경제, 정치적 요소들, 기타 등등 모든 것들에 원한다면 자연스럽게 접근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접근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다면 그 사람이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을 할 테니, 그게 숨만 쉬는 것이더라도 무용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유용하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그런 유용의 의미입니다. ‘숨만 쉬는 것’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 여러분? 숨을 잘 쉬는 거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습니다. 간단할 순 있지만 쉽진 않아요. 호흡에 영혼을 담아서 쉬는 게 반드시 저절로 벌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아무튼… 다시 말하자면,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으면 유용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저의 생각이라는 건데, 사회에서 ‘이것이 유용하다’고 기준을 정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연스러운 상태라면 알아서 자기가 어떻게든 누군가에게는 유용하다고 여겨질 행위를 할 거라고 여긴다는 뜻이란 말이죠. 저는 우리가, 인간이, 날 때부터 원래 유용하다고 생각해요. 원래 유용하게 태어났는데, 오히려 사회에서 애들을 유용하게 만들려는 과정에서 사람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꼭 특정 정치 시스템이나 경제 시스템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즉, 이 다큐는 중국을 다루고 있으니까 나라에서 멋대로 경제 확장을 한 후 그것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피폐해진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안 벌어지는가, 하면, 벌어집니다.

그래서 이 다큐를 볼 때 먼 시공간의 이야기로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혼란하고 울적한 와중에도 저한테 안 생길 일이라서, 혹은 제가 사는 우주에서 벌어지지 못할 일이라서 낯설게 느껴지는 않았어요. 이 다큐에서 보여주는 망해가는 중국의 공장 지구는 사회에서 사람을 유용하게 만든답시고 벌인 일들이 얼마나 나중에 가서는 사람을 무용지물로 만드는가를 아주 처절하게 보여주고, 그러한 현상은 중국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공산주의 국가 전반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닙니다. 정도와 느낌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수월하느냐에 대한 정도와 느낌의 차이가 있을 순 있지만, 이것이 이 다큐의 상황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면 이 노동자들이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지 못해서 얼마나 무용해졌는가. 예를 들자면, 자기들끼리 싸워요. 초반 30분도 안 됐는데. 막 몸싸움을 하려고 해요. 그런데 뭐, 자세한 정황은 제가 뒤섞인 중국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모르겠습니다만, ‘철서구’ 다큐 전체를 종합해 볼 때, 할 게 없어서 싸우는 거예요. 도무지 일을 하고 싶어도 일조차 못 해서요. 공장들은 문을 닫아가고, 어차피 일을 해봤자 돈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럼 이동이 자유로운가? 일단 중국이니까 안 자유로운 점도 있을 것이고, 명목상 자유가 있다고 해도, 우리 어떤가요? 민주주의 자본주의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원하면 아무 데로나 막 이사 갑니까? 서울의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이사 가는 것도 어려울 수 있는데, 가뜩이나 돈 없고 막막한데 어딜 이사를 먼 데로 가겠어요.

그러니까 이 노동자들도 그냥 기다리는 거예요. 공장이 다시 열기를. 아니면 급여를 받기를. 아니면 하여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기를. 그러다가 너무 지루하고 비참하고 할 게 없으니까 몸싸움이 나고 그러는 거라고 저는 해석했습니다.

아, 정말이지. 저는 떼가 너무 무서워요. 이거는 아임 드리밍 아주 초반부터 제가 얘기했죠. 떼가 무섭다고. 그나마 지금은 많이 떼에 대한 공포가 녹여진 상태인데, 여기서 떼에 대한 공포란, 내가 혼자인데 누가 떼로 몰려오는 것도 무섭지만, ‘철서구’ 같은 경우에는, 내가 떼에 속하고 싶지 않아도 나를 떼의 일부로 만드는 어떤 또 다른 떼, 그러니까 국가 집단 같은, 아니면 웬 전문가 집단, 이런 것들이 무서운 경우입니다.

나는 그냥 나 할 거 하고 있는데 웬 놈들이 와가지고 ‘너는 이 그룹에 속해. 너한테 이 레이블을 붙일 테니, 너의 다른 특징은 다 무시하고 그 레이블에 따라 너는 앞으로 분류가 될 거야. 너는 그 레이블의 떼에 속해.’ 이러는 거. 그러니까, 예를 들어 누군가가 머리가 검고, 그 검은 머리가 길고, 뭐… 눈이 두 개고 코가 하나고 입이 하나예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웬 놈들이 와가지고, ‘너는 마침 검은 머리가 기니까, 그 검은 머리가 긴 사람들의 떼에 속하는 거야. 너한테 다른 특징들이 많다는 건 아무 상관이 없어. 네가 만두를 좋아하고 ‘무럭이’라는 식물을 키우고 ‘아임 드리밍’이라는 팟캐스트를 하는 건 아무 상관이 없고, 그냥 단지 너는 검은 머리가 기니까 그 떼에 속하는 거라고.’ 이러는 게 아주 그냥 공포라는 거죠.

제가 예전에 ‘교집합’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어요. 제가 그 개념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교집합의 교집합의 교집합의 교집합에는 나 하나밖에 있을 수가 없거든요.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모오오오오든 특성을 다 겹친 그 교집합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여러분 한 개인밖에 있을 수가 없다는 거죠. 그 다른 누구도 없어요. 아무도 경쟁할 자가 없어요. 그 교집합은 여러분 말고 아무도 들어올 수 자체가 없는 블루오션이에요.

그런데 누가 내 모든 교집합들을 무시하고, ‘검은 머리가 긴 사람’이라는 거대 집단에 나를 넣는 순간 어떻게 되나요? 나는 갑자기 검은 머리가 긴 다른 사람들하고 경쟁해야 하고, 내 다른 특징들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된다고요.

그것이 ‘철서구’에 나오는 노동자들의 모습 같습니다.

정말. 제가 “모두가 잘 살도록 하자”를 “소수만 잘 살도록 하자”보다 안 믿는 이유는, 모두가 잘 살려면 모두를 잘 살게 하려고 해선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누군가가,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처들어와가지고 모두를 잘 살게 하려고 하면, 반드시 당연히 패망해요. 이걸 왜 해봐야지만 알았는지를 모르겠을 정도로.

그리고 여기서 패망한다는 건 다 함께 망한다는 게 아니에요. 차라리 다 함께, 정말 다 함께 망했으면 오히려 다행이에요. 그런데 대개 어떻습니까? 모두를 잘 살게 해주겠다고 주장하던 그 개인 혹은 집단은 잘 살고요, 나머지는 희생양이 됩니다. 이건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자본주의든 무슨 다른 주의든, 마찬가지예요. 즉, 모두가 잘 살려고 하는 거야말로 소수만 잘 사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두가 각자 살게 알아서 놔두는 거예요. 절대 누가 모두를 잘 살도록 일부러 만들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정말로, 극소수만 잘 살려고 그 극소수가 노력을 하면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잘 된다고 봅니다. 뭐냐 하면요, 제 교집합이 있잖아요? 거기에 저 하나밖에 없다고 했잖아요. 저 말고 누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저는 제가 잘 살면 돼요. 그러면 제가 잘 살면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 당연히 잘 살게 돼요. 그런데 그건 제가 제 주변의 모두를 잘 살도록 하려고 해서가 아니고, 제가 잘 살아서 그 사람들한테도 넘쳐흘러서 그 사람들이 잘 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전부 다 자신들의 교집합이 있잖아요? 여러분도 여러분 하나만 들어 있는 교집합이 각각 있잖아요? 그 안에서 여러분이 가장 자연스럽게 잘 사는 것이 여러분 주변의 모두가 잘 사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뭔가 그대로 두면 인간이 망할 것이다, 그래서 관리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상도 있는데, 저는 그런 쪽 사상이 아닙니다. 제가 저번 에피소드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저 자신을 믿지 못해서 정말 잡아 죽일듯이, 아주 족치고 조져버릴 듯이 그렇게 저한테 했을 때도 다른 사람들을, 그 사람들이 가만히 두면 그 사람들이 일을 안 하고 해야 할 일을 안 할까 봐, 망할까 봐 그 사람들을 관리해야 한다고 여기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가만히 두면 대부분 해결돼요, 갖가지 문제가. 관리해야지만 안 망하고 일을 하는 거면, 관리해도 어차피 망해요. 관리하지 않으면 안 할 일을 사람한테 시켜봤자라고요.

아무튼, 민주주의, 자본주의가 더 자유로워 보이지만, 별로 자유롭지도 않아요. 별로 민주도 아니고 자본도 아닌 경우도 많아서.

그렇다고 그럼 민주랑 자본이 되게 좋다는 얘기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민주여야 하고 자본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무슨무슨 주의라는 말 자체가 내가 일면식도 없는 전체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그나마 그중에서 “난 이거 싫으니까 안 사기라도 할래.” “난 이자 싫으니까 안 뽑기라도 할래.”가 가능한 게 민주랑 자본인 것 같긴 하다, 딱 요 정도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 그냥 민주주의랑 자본주의가 좋다고 주장하는 민주와 자본이 있는 게 그나마 낫겠거니, 한다는 겁니다. 민주주의가 되게 선하다? 자본주의가 되게 선하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특히 자본주의보다도 민주주의가 엄청 옳고 선하다는 이미지메이킹을 잘했는데, 별로 딱히… 민주주의를 유지 운영하기 위한 엄청난 자원이 듭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별다른 대안이 있는 게 아니라서 그냥 민주주의가 그나마 낫다, 라고 여기고 있긴 합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그럼 엄청 진짜 좋은가? 그건 아니라는 거죠.

저는 여기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대통령 주지사만 뽑는 게 아니라, 무슨 우리 동네 반장급? 그런 직책까지 뽑아요. 매번 선거나 무슨 법안 투표를 할 때마다, 수십 가지를 물어봐요. 그런데 그러면 제가 그걸 다 조사해서 투표하느냐? 아닙니다. 불가해요. 제가 풀타임으로 누굴 뽑고 뭘 뽑는 게 좋을지 조사만 하고 다녀도 제가 뽑아야만 한다고 민주주의가 주장하는 그것들을 뽑기에 빠듯합니다. 그래서 또 선거 정보 사이트들 생기죠? 그걸 둘러싼 엄청난 광고 마켓과 로비잉이 생기죠.

법이랑 똑같아요. 미국의 법 시스템. 법이 안 좋다는 게 아니에요. 이 경우에도, 법 말고 별로 제가 대안이 없어요. 그러니 아 법이 있구나, 이러고 사는 거지, 법이 엄청 선한가? 좋은가?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 법을 둘러싼 어마어마한 자원이 들어간다고요. 배심원 제도만 해도 그렇고요. 신상 털리죠. 일하는 곳에서 은근히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죠. 뭐만 하면 툭하면 소송 걸죠. 변호사들은 돈 벌겠죠. 거기서 또 격차가 벌어집니다. 얼마나 비싼 변호사를 쓸 수 있는가. 그러면 법이 평등한 거냔 말이죠. 안 평등해요. 그런데 평등해야 한다고 그러면 한아임은 주장하는 건가? 그것도 아닙니다. 저는 사실 불가하다고 생각해요. 이 모든 것들을 평등하게 만드는 건 불가합니다. 근데 제가 마땅히 대안이 없어서 제시를 안 하는 겁니다. 근데 대안이 없다고 해서 지금 있는 게 엄청나게 좋은 건 아니잖아요. 완전히 별개죠. 내가 사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다른 과일 뭐 먹어야 할지 모르겠고 그냥 사과가 있길래 먹는 것과 그런 상황에서 사과를 엄청 좋아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건 별개라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 상황에서 사과를 엄청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긍정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역시, 저는,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사과는 그냥 사과인 거지 사과가 엄청 좋고 선하고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건 오히려 반긍정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여간에, 어떤 레이블의 이즘이든지 간에, 아마 저 말고 다른 사람들도 별로 대안이 없나 봐요. 그래서 그냥 그 이즘들이 존속을 하고 있고, 그러한 이즘이 사람을 얼마나 부자연스럽게, 따라서 무용하게 만들 수 있는지가 ‘철서구’에 담겨 있다는 것이 저의 해석입니다.


파트 1이 처음에 눈 쌓인 풍경을 가르는 기차의 시점으로 시작했다가, 노동자들이 시간을 때우는 공장으로 옮겨 갔었는데, 파트 1의 중간에 다시 눈이 나오자 눈이 어찌나 반갑던지.

와. 여기 나오는 것 중 눈이 제일 희망차구나. 처음에는 을씨년스러워 보이던 그 눈이 어찌나 희망차던지. 적어도 눈은 내릴 땐 자연스럽게 내렸구나. 그 눈이 매연에 검은색을 띨지언정, 그조차도 자연스러움의 일부고, 특히나 처음에 눈이 내릴 때는 그것이 내린다고 하는 걸 아무도 막지 못했고, 안 내리는 눈을 내리게끔 하지도 못했구나. 아름답다.

그런데 그러한 안도감이 오래 가진 않습니다. 아 정말… 음악도. 여러분. 음악만큼 2024년 현재 취향이 다양한 매체가 있나 싶어요. 장르가 엄청 많죠, 음악은. 그리고 음악의 한 곡을 듣는 것은 소설책 한 권을 읽는 것이나 영화 하나를 보는 것, 혹은 예술품 여럿을 보러 미술관에 가는 것보다 훨씬 자원이 적게 듭니다. 시간도 덜 들고, 스트리밍 서비스가 생겨나면서 돈도 덜 들고, 노력도 덜 들어요. 그래서인지 음악이야말로 하나의 개인의 취향차가 두드러지면서도, 그 한 개인 내에서 엄청나게 여러 스타일을 듣게 되는 매체 같아요. 이러한 이유로 제가 ‘고막사람’ 뉴스레터를 쓰면서도 그렇게나 재밌는 것인데.

그런데 이러한 음악을. 하. 이 다큐에서는 음악이 확성기로 내보내지는 바람에 사람들이 강제 청취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참 공산주의, 사회주의 특유의 풍경 같네요. 확성기로 음악이 나오는 건 다른 배경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인데, 단 하나의 확성기로만 음악이 나오는 건 좀 공산주의, 사회주의 특유의 풍경 같아요. 자기가 듣고 싶은 음악을 못 듣고, 심지어 다른 음악의 소음으로 듣기 싫은 음악을 막아버릴 수도 없고, 들으라는 걸 들어야 한다.

그 와중에 공장에서는 급여를 줄 수 없다고 하고, 심지어 돈을 준다면서 거스름돈을 달래요. 와 진짜. 때릴까? 내가 급여를 받으려면 그 급여를 거슬러줄 돈이 필요하다고? 그러면 나는 진짜, 와, 이거야말로. 이거야말로 부익부 빈익빈이지. 제가 웬만해서는 그 말을 적용을 안 하는데, 와, 이 경우는 정말,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받아야 하는데 그 돈을 받으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미친 건가? 미친 건가요?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큰 의문 중 하나가… 이 공장 노동자들이 공장 내부에 있는 목욕탕에서 씻는 장면이 나오는데, 흐르는 물도 아니고, 탕이 있어요. 과연 저 물이 깨끗한 물인가? 저 물에서 씻느니 그냥 안 씻는 게 낫지 않나? 가뜩이나 계절이 겨울이라 추운 거 같은데, 그냥 몸에 때가 끼는 게 낫지, 저 물에서 씻다가 죽는 거 아닌가? 그런 걱정이 들었습니다. 이 경우에도 옵션이 없어서인가? 다른 곳에서 씻을 수가 없어서?

아, 정말이지, 이 사람들한테는 옵션이 없습니다. 노력 좀 하라는 말은, 그걸 하면 어디 다른 데로 갈 수 있는 사람들한테나 하라고 할 수 있지, 노력해봤자 또 누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게 뻔한 사람들한테 노력하라고 하는 건 너무한 것 같아요.

게다가 여기에 자기가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여럿 나와요. 글도 제대로 못 읽는다고. 그리하여 지금 이 망해가는 공장 외의 다른 곳에서 일거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이 사람들이 이 공장에서 일을 하는 사이에 다른 곳의 취업 기준이 상향화됐나 봐요. 여기 나오는 사람 하나의 말로는, 자기가 학교 다닐 때는 글을 못 읽어도 그냥 졸업장을 줬대요. 그러니 이 사람, 그리고 이 사람과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은 자기가 아바타 몸으로 존재하는 그 반경 십 미터 정도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 주지 않으면 책을 통해서 정보를 습득하고 “내가 저기로 가야겠다”고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인터넷이 자유로웠다고 하더라도 이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아무리 새로운 기술이 생겨도 그것을 글로 읽고 배울 수 없다는 건 정말… 정말 크게 불리한 일입니다.

아무튼 파산해서 공장이 문을 닫는데, 나중에 또 엽니다. 그런데 열면 일을 재개하면 될 것 같잖아요? 원래 그 공장이 세워진 이유인 그 일. 근데, 아니에요.

공장이 문 닫은 동안 파이프가 얼어서 터져가지고, 공장을 열었을 때 먼저 하는 일이 그 뒤처리입니다. 아주 그냥 무용에 무용에 무용이, 유용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더라.


파트 2, ‘잔해’에는 “Rainbow Row”라는 이름의 동네가 나와요. 그런데 가장 첫 시퀀스의 내용이 로또입니다. 로또 또한 노력의 한 종류라고 선전하는 사회자가 나옵니다. 로또 주최 측에서 아주 거대한 행사를 해요. 수백 명의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어요. 약간 경마장스러운 분위기에 지역 축제 같은 느낌입니다.

로또는 매우 경제적이라며. 성공으로 향하는 길이라며. 그런데 이게, 파트 1을 보고 나면, 진짜처럼 느껴져요. 이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글도 맘대로 못 쓰잖아요. 글 맘대로 써서 출판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제가 자주 말하듯이, 글 쓰는 거만큼 자원 안 들어가는 것도 없다고 얘기하는데, 지금 이 다큐에서 다루는 중국의 시공간에서는 그게 아닙니다. 글 쓰는 거야말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특히나 글을 쓰고 출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심지어 글을 배우지도 못한 사람들도 많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정말이지 복권을 사는 게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일 수도 있지 않느냔 말이죠. 공장에서 일해봤자, 파트 1에서 나왔듯이 자기들 맘대로 파산하고, 수당도 제대로 안 주는데.

아무튼 로또 시퀀스 다음에 주인공 격? 약간 주인공스러운? 좀 인물로서 조명을 받는 남자가 나오는데, 어린 남자예요. 젊은이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랑 어떻게 잘 해보겠다는 둥, 그런 얘기를 하고, 또 다른 사람들 나와서 연애 얘기를 하는데, 어찌나… 왜 이렇게 울적하던지. 파트 1보다 더 울적해. 공장에서 쫓겨나고 수당 못 받는 것보다도 더 울적해요. 발렌타인데이며 그런 얘기를 하는데, 너무나 참… 울적하다.

파트 2의 제목이 Remnant인데 이 애들이 Remnant인 건지. 잔해. 나머지들. 약간 뭔가 부산물들? 파트 1보다 압도적으로 어린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더 씁쓸해요.

애들이 아무것도 안 해요. 그냥 놀아요. 근데 그 노는 애들이 열 살 이하인 애들은 그렇다 치고, 십 대 후반인 애들도 그래요. 노는 건 좋으나, 노는 이유가, 그리고 노는 방식이, 두서가 없어요. 아무 미래가 없어요. 노래가 좋아서 노래를 하고 운동이 좋아서 운동을 하고 이런 게 아니고, 그냥 시간을 때워요. 아 정말 끔찍한 표현이죠. 시간을 때운다. Killing time. 선형 구조의 시간이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킬링타임이 무엇을 뜻합니까? 내 목숨 죽이고 있는 거라고요. 웃으면서 천천히 자살하고 있어요. 제가 여러 번 말했듯이 자살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정말이지 저는 죽음이 나쁘다고 여기지 않아요. 그런데 죽는다는 것도 모르면서 죽고 있어요. 이건 무슨 어떤… 사회적 기준에서의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이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고요, 이 개개인들이, 이 타임을 킬링하고 있는 개개인들이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게 무서워요.

시간을 흘려보낼 여유가 있는 것과, 결핍적 킬링은 완전히 다릅니다. 여유가 없어서 시간을 때우는… 때우는 것도 아니에요. 시간이 때워지고 있어요. 시간을 킬링하는 것도 아니란 거죠. Killing time이 아니네요. Time is being killed. 시간은 스스로가 죽여지고 있고 이 젊은이들은 무엇을 하는 건지, 무엇을 한다는 건 아는 건지, 모르겠어요. 파트 1에서 공장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싶어도 못 해서 허망하게 놀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러한데… 이 다큐에 대한 해석들도 여느 작품에 대한 해석과 마찬가지로 다양합니다. 그중 어떤 해석은, 약간… 이런 뉘앙스예요. ‘저렇게 사는 게 힘든데도 사는 게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런데 저는 그러한 해석에서 뭔가… 오히려 더 깔보는 뉘앙스가 느껴져요. 이 사람들이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파트 1도 그렇고 파트 2도 그렇고. 파트 1 내내 사람들 먹고살기 힘들다고, 일을 했는데도 돈을 못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파트 2에서도 이 젊은이들이 미래를 그릴 수 있었으면 이러고 있지 않아요. 불만이 있대요. 싫대요. 그런데 그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고 외부인이 와서 해석하는 게 저는 너무 이상해요. 내가 내 인생에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는 그것을 당신의 아름다움거리로 삼는다니. 지금 이 사람들은 말 그대로 굶어 죽게 생겼는데. 영양실조 걸리고.

그런데 여기서 뉘앙스 차이가 있을 순 있긴 해요. 뭐냐 하면… 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살이 아름답다고 얘기한다든지, 뭐, 다양하게 있을 수 있겠죠, 아름다운 것들이.

파트 1보다 파트 2가 압도적으로 밝긴 해요. 어린애들이 웃으면서 놀거든요. 그런데 관객이 금붕어도 아니고, 파트 1과 파트 2가 파트 3와 함께 ‘철서구’라는 이름으로 엮인 이유는 얘네가 세트라는 얘기죠. 파트 1을 보고서 파트 2를 보는데 전 너무 더 울적하더라고요, 파트 2가. 파트 1에 나오는 노동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할 게 없이 태어났겠습니까? 아니겠죠. 저는 정말, 아, 얼마 전부터 계속 말하듯이, 정말 모든 사람이 날 때부터 호기심과 하고 싶은 것을 갖고 태어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호기심이 없고 하고 싶은 게 없는 어린애를 본 적이 없어요. 파트 2에 나오는 어린애들도 그래요. 열 살이 안 된 것 같아 보이는 어린애들. 얘네는 바빠요. 즐거워요. 근데 젊은이 나이만 되어도 뱅뱅 돌기 시작하는 게 보입니다. 어디 다른 갈 곳이 없어요. 시각적으로 실제로 이 동네 골목을 뱅뱅 돌아요. 아주 어린 애들이 노느라 어디로 뛰는지도 모르고 최선을 다해 뛰는 거랑 다릅니다, 이 젊은이들의 움직임은.

파트 3에 가면, 기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이야기가 좀 나옵니다. 보는 입장에서는 움직임이 있어서 덜 답답한데, 여기서도 이 사람 중 하나가 딱 정확하게 말해줍니다. 자기는 기차 안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거 싫다고. 네. 이 사람이 스스로가 말해요. 자기는 싫다고. 자기가 싫은 일 하는 거예요.

여기다가 무슨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시네마틱한 비주얼을 즐기려고 보는 장르는 아니잖아요, 이러한 형태의 다큐가. 아니면 플롯이 정교하다든지, 뭔가… 창작자가 자신의 세계관을 그리기 위해서 만든 작품이 아니라고 저는 여기거든요, ‘철서구’가. 뭔가를 담는다는 행위 자체가 담는 자와 별개로 존재할 수 없긴 하지만서도, 그 와중에도 가장 뭔가 보이는 그대로를 담으려고 하기에 다큐라는 장르가 따로 존재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러한 다큐가 아름다운 거하고 다큐 안의 사람들의 인생이 그 사람들 본인들이 엿 같다고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름답다고 하는 건 별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큐가 아름답다고 여길 순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왕빙 감독이 이렇게 긴 시간을 이 노동자들과 함께하면서, 국가에서 무시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기에 다른 누군가가 이에 대해 알 수가 있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혹은, 심지어, 정말 솔직한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봐요. “내가 저렇게 살지 않아서 내 삶이 아름답다.”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러 가지 아름다움이 아니라, 이 안의 사람들의 인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는…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 자체가… 오히려 ‘아 이 노동자가 힘들고 엿 같다고 하니 힘들고 엿 같은가 보다’라고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받아들이는 쪽에서 ‘진짜 힘들고 엿 같은 게 완전히 확실하네’라고 자신이 완전히 동의를 한 느낌이 든다고요.

저는 ‘철서구’에 이 아바타계에 실존한다고 하는 어떤 사람이 본인이 자기가 하루에 8시간인지 몇 시간인지, 자는 시간 말고는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그 일이 싫다는데 거기서 저는 아름다움을 찾고 싶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게 뭐가 더 좋은지 모르겠고요. 싫다고 하면 그냥 싫은 거예요. 싫을 만한가 보다.

아무튼 이러한데, 파트 3에서 ‘철서구’를 통틀어 가장 캐릭터 같은? 좀 가장 인물 같은? 그런 인물이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두’예요. 이 사람은 가장 자기 얘기도 많이 하고, 카메라를 의식합니다. 이전까지 나온 사람들은 카메라를 하나도 의식을 안 했거든요. 나체로 나오는 건 기본이고, 그냥 아예 카메라 없는 것처럼. 아주 숙련된 연예인처럼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았는데, 카메라를 보고 가장 길게 얘기하고 가장 홀로 주목받는 사람이 이 ‘두’라는 사람이에요.

‘두’ 옆에 아들이 있는데, 젊은이거든요? 그런데 아들의 눈빛이 완전히 죽어 있어요. 영양이 부족하대요. 그러니까 이 눈빛이 죽은 상태는 뭔가… 정신 승리를 해서 눈빛에 힘을 넣을 그럴 게 아니고, 진짜 배가 고파서 뭘 할 힘이 없는? 그런 상태인가 봐요. 그래서인지 두는 늙은이이고 아들은 젊은이인데 아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있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어요 여기에. 제가 희망이 없다고 해서 희망이 없는 게 아니고 이 사람들이 느끼기에 그들이 자신이 희망이 없다고 말을 한다고요. 그런데 그래도 세 파트 중 하나를 본다면 파트 3을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다큐이면서, 가장 극 구성이 있어요. 중심인물이 있으니, 몰입하고 상황을 따라가기가 수월합니다.

게다가 강아지도 나와요. 이 강아지 때문에 저는 너무 슬프더라고요. 동물의 신체 언어를 보면 잘 알 수 있잖아요? 주인이 잘해주는지 잘해주지 않는지. 두랑 두의 아들이 엄청 강아지한테 온갖 것을 다 해줄 형편은 아니지만, 강아지가 곧잘 그 사람들 옆에 있고, 카메라를 든 낯선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눈이 똘망똘망하고 깨끗한 걸 보면, 두랑 그 아들이 힘들게 사는 와중에 굳이 개를 데려다가 괴롭히는 그런 말종은 아님이 아주 잘 드러납니다. 동물을 보면 알아요, 정말.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돈이나 영양 상태랑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 정말… 사람이 동물보다 얼마나 우월한 게 하나 없는지를 알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식이, 굳이 동물을 데려다가 막 대하는 놈들을 관찰하는 방식입니다. 네. 동물을 먹는 거랑은 별개라고 저는 생각해요. 동물을 싫어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동물을 데려와가지고 학대하는 건 다른 차원의 머저리성이라는 겁니다. 동물은 인간한테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인간이 그냥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데 저절로 동물이 생겨나는 일은 없다고요. 자기가 굳이굳이 데려와야 동물이 내 집에 들어오게 되는 건데, 그렇게 굳이굳이 데려와가지고 막 대한다? 머저리입니다.

아무튼 그런데 두랑 두의 아들은 강아지를 잘 보살폈나봐요. 자기들도 배고픈데 얼마나 강아지 예뻐했길래 강아지가 저렇게 얌전히 잘 있나? 개가 아예 힘이 없는 그런 상태라기엔 꽤 똘망똘망하거든요. 그리고 집이 굉장히 좁은데, 도망을 안 가요, 개가. 도망갈 생각이 전혀 없어요. 물론 겨울이라, 밖이 추워서 그런 것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이 집 사람들하고 이 강아지의 신체 언어를 보면, 해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게 아닌가 싶어요. 강아지가 귀여워요 아주.


이러한 다큐였습니다, ‘철서구.’ 굉장히 긴 다큐니까, 좀… 체험적으로 보면 좋은 것 같아요. 이 다큐를 틀어놓고 진짜 그… 이 내용 속의 노동자들, 이 지루해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견뎌보는 겁니다. 나는 9시간도 지루한데 이 사람들은 매일 이걸 한다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세상에 맙소사.

하여간에 이 다큐를 보면서 많이 든 생각: 당사자가 나쁘다는데 굳이 ‘좋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 ‘좋게’라고 말하는 나는 왜 저 사람이 나쁘다는 걸 좋게 만들려고 하는가. 특히나 이 다큐에서처럼 누가 이미 뭘 강제로 좋게 만들려고 하는 바람에 내 자연스러운 유용함을 빼앗긴 사람이 그 상태가 나쁘다고 말을 하는데, 그걸 좋게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나라면, 나는 왜 그러한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좋지 않아요. 좋지 않았다. 다큐는 한 번쯤 9시간을 몸으로 경험할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안에 담긴 이 사람들의 상황은 좋지 않다. 왜? 그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좋지 않다고. 좋지 않다고 아주 그냥 9시간을 계속 다양한 방식으로 말하니까.

다음 에피소드에서도 중국 영화를 다룰 겁니다. 자장커 감독의 “소요에 맡기다” 또는 “임소요”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는 영화입니다. 영어 제목은 “Unknown Pleasures”입니다.

역시나 울적합니다만, “소요에 맡기다”는 픽션이에요. 따라서 “철서구”와 비슷하게 느리고 지루한 어떤… 빠져나갈 수 없음을 담고 있지만, 기승전결이 있고, 인물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입장에서 따라가기가 좀 더 수월하더라고요, 저는.

에피소드 초반에 언급했듯이, 중국은 참으로 제가 참 알 수가 없는 나라라고 느끼는 나라입니다. 아무리 중국 영화를 보거나 중국 단어를 알거나, 중국 사람을 보거나 해도, 참…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이번 기회에, 번역을 하면서 책에 언급된 영화들을 볼 수 있어서, 특히 이렇게 제가 생각지도 못한 영화들을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중국을 정말 모르는 걸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모르는 거 알아서 좋았다는 것은 제 좋음이고요, 모르는 걸 더 몰라진 이 노동자들의 삶은, 그거에 대한 건 그들의 말이 맞겠죠? 그들의 삶은 그들의 것이니까. 그것은 그들이 좋지 않다고 하면 좋지 않은 것으로.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 『누아르 어바니즘: 현대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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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Annie Zhou – Xiang Fei Lei
  • Annie Zhou – Maybe Wondering
  • Annie Zhou – Autumn Thoughts by the Dresser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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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한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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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