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69] 폭주하는 반복, “돔비발리 패스트(Dombivli Fast)”

수정: “돔비발리 패스트”는 2006년이 아니라 2005년 영화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예고 드렸듯이, 이제부터 인도로 갑니다. 인도 영화를 볼 건데, 그 기준이 무엇인가?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서 언급된 인도 영화 중에서 골라서 볼 겁니다. 책 제목에 ‘누아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만큼, 언급된 영화들도 누아르누아르한데요, 완전히 전형적인 클래식 누아르라기보다는, 어두운 요소가 들어 있는, 우리에게는 어쩌면 ‘스릴러’라는 장르로 더 익숙할, 그러한 영화들이 인도에 대한 챕터에서 언급이 됩니다.

인도에서 발리우드 시네마가 가장 큰 영화 산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러한 시네마의 스타일이 아닌, 아마도 한국어 사용자 관객들에게 좀 더 익숙할 스타일의 스토리텔링이 등장합니다. 오늘 다룰 “돔비발리 패스트”라는 영화도 전개가 빠르고 분명해서 저는 재밌게 봤습니다. 헷갈릴 게 하나도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플롯도 연출도 메시지도 극명합니다. 알면서도, 오히려 알기에 보는 그러한 플롯인 것 같습니다.

어… 스포일러 있어요. 제가 스포일러 예고를 한동안 까먹은 것 같아요. 동시에 스포일러 예고를 하면서도, 어… 이것이… 이것을 예고를 해야 할까? 예고 하는 게 이상한가? 그런 생각도 있어요.

아임 드리밍에 언제나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소개 팟캐스트가 아니고요,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도 스포일러가 다량 있습니다. 이걸…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요? 이것은 뭔가… 제가 하는 게 영화 비평은 아닌데… 왜냐하면 비평이라기엔 너무 얕잖아요, 아임 드리밍 내용이. 그렇지 않습니까? ‘수다’라고 제가 포괄적으로 명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아무튼 영화 소개가 목적인 팟캐스트가 아니고, 그러한 에피소드는 없고요. 제가 번역하는 책의 내용이나 제가 수다떠는 내용이 엔딩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시작을 못 하는 경우가 많기에, 그래서 스포일러는 항상 있는 편입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에. 대개 영화의 의미와 상징은 끝에 가서 싹 정리가 되잖아요?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런 것 같아요. 네.

아무튼 그럼 오늘의 수다, 시작할게요.


“돔비발리 패스트.” 영화는 출퇴근길의 빡침으로 시작합니다. 하. 퇴근해서 1초 지나면 다시 다음날 자명종이 울리는, 그러한 극화된, 강조된, 그러나 이렇게 살아보면 그것이 진실임을 알 수 있는, 그러한 시퀀스로 시작해요.

반복에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시퀀스고요. 인물들이 별다른 대사를 치지 않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직접 이렇게 살아봤거나, 간접적으로라도 이러한 이야기를 이미 접해봤을 것이기에, 알고 있다.

이러한 반복적인 삶이 안정적이라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화의 편집은 주인공인 남자 직장인, 압테를 통해 극명히 말해줍니다. This is hell.

사람 미치는 거야. 아무리 안정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지경으로 반복되면, 사람 미치는 것이다. 인간은 같은 걸 계속하게끔 만들어지지 않았다. 큰 틀에서 보면 같아 보이지만 그 안에서 다름을 느낄 수 있어야 미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같은 직장을 40년 다녀도, 그 안에서 좀 버라이어티가 있을 수 있잖아요. 가장 표면적인 상징으로는 승진이라는 변화가 있겠고, 상사가 바뀔 수도 있고, 동료가 바뀔 수도 있고, 부서가 바뀔 수도 있고, 같은 부서라도 기술이 바뀌고 시장이 바뀌고 세상이 바뀔 수 있는데, 압테는 그런 변화를 지각할 여유가 없어 보입니다.

이게 참 아이러니죠. 엄청나게 여유가 많아야 표면적으로는 정상이거든요. 시간이 많아요. 시간이 없으면서도 많아요.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그 반복적 패턴에 갇힌 경우인지라, 시간의 흐름이 너무나 예측 가능하고, 뜨는 시간이 많아요. 출퇴근길이란 게 그런 거잖아요. 내가 걷고자 해서, 운전하고자 해서, 대중교통을 타고자 해서 타는 게 아니라, 피할 수 있으면 피했을 텐데 직장과 집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게 출퇴근길이란 말이죠. 그러니 그 뜨는 시간이 존재하고, 압테의 경우에는 심지어 그 시간이 꽤 긴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유로 표현되진 않습니다. 게다가 심지어 영화에서 표현되는 출퇴근길이 서울의 지옥철에 비하면야 훨씬 공간이 많은데도 그렇습니다.

“돔비발리 패스트”가 2006년 영화라는데, 저는 인도의 실제 출퇴근길 상황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고요. 다만, 이렇게 반복에 반복에 반복을 강조한 시퀀스에서 만약에 인도에 지옥철이라는 개념이 있었더라면 감독이 그것 역시 강조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봅니다. 그 정도 지옥철이 없기에 영화에 안 나오는 게 아닐까? 합니다. 적어도 압테가 사는 이 지역이라는 배경에는 지옥철이 없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표면적으로는 여유가 있을 수가 있긴 하거든요. 이 주인공인 압테의 몸이 사방으로 다른 몸들 사이에 낑긴 형태의 출퇴근길이 아니며, 너무나 예측 가능한 패턴을 따르고 있기에 만약 압테에게 어떤 동기가 있었더라면, 어떤 열망이 있었더라면, 출퇴근길에 무언가를 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하다못해 잠이라도 잤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압테는 이 멍한 상태에 중독된 것처럼 보이고, 한아임은 십분 이해가 가는 바이다. 이…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아무리 표면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반복된다는 그 자체 안에서 마비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내가 그것을 스스로 깰 수 있음을 표면적으로 알아도, 이 마비 상태에 있으면 그것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특히나, 생산적인 방향으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더 특히나, 이 아바타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면 정말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왜냐? 지금 당장 내 앞에 보이는 게 전부인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겠어요. 새로운 상황을 만들려면 새로운 상황을 생각해 내야 하는데, 마비가 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완전히 덫에 걸린 거죠.

아임 드리밍 초창기 때 제가 로드 레이지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고속도로에서 13마일인가? 그거 킬로미터로 하면 21킬로미터밖에 안 되거든요 여러분? 그거 가는데 90분 간다고 상상해 보세요. 근데 그거를 하루에 두 번 해요. 그러면 3시간이잖아요? 아무리 운 좋은 날이어도 왕복으로 2시간이 넘어요. 출퇴근 시간에 맞춰서 가려면 그 이하로는 안 돼요. 그러면요 정말로. 여러분도 많이들 아실 겁니다. 죽고 싶어요. 근데 이게 뭔가 자의로 인한 죽고 싶음이 아니에요. 이것도 많이들 아실 겁니다.

제가 자의로 죽고 싶음도 겪어본바, 이 로드 레이지 형태의 죽고 싶음, 이 출퇴근 지옥철의 죽고 싶음은 어떤 그런 정말로 자살하고 싶은 죽고 싶음과 달라요. 마비 상태의 죽고 싶음이에요. 분노가. 말 그대로 로드 레이지인 거죠? 네.

압테가 그 상태입니다.

그나마 이 주인공의 집에 애들이 둘 있습니다. 그래서 걔네가 저절로 크는 걸 보면 좀 나으려나 싶었습니다만, 영화에는 그게 안 나오고, 미칠 듯한 광기의 반복만이 나옵니다. 정말 그 컷컷컷들이 미친 속도로 반복돼요 점점 더 빨라지면서.

그리고 애들이 크는 거에서 보람을 느낄 수야 있지만, 결국엔 애들이 크는 거지, 그 애들을 낳은 사람들이 크는 건 아닙니다. 그걸 이 주인공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나 봅니다. 그래서 20년쯤 후, 애들이 더는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으로 크지 않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그제서야 뒤늦게 현타를 느낄 일은 없지만, 지금 당장에 현타를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약간… 호러의 분위기가 풍깁니다. 광란의 반복적 컷 편집 이후에 갑자기 속도가 느려지는데, 거기에서 호러 영화 특유의 슬픔이 느껴져요. 호러는 참 특이하죠. 개그랑 호러를 섞어도 잘 맞는데, 멜랑콜리와 호러를 섞어도 잘 맞습니다.

“돔비발리 패스트”에는 밤이라서 아무도 타지 않았으며 어두운 기차 칸이 나오는데, 그것의 손잡이들이 마치 무슨 쇠고랑 같아요. 음악은 구슬프고 말이죠.

아무튼 압테네 집에는 애들이 둘인데, 큰애는 아들이고, 이미 청소년이에요. 얘는 이미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요. 일어나고 싶겠습니까? 일어나고 싶은 게 이상해요. 이미 이 나이 때부터 삶이 반복적이라고요. 뭐 재밌을 게 있어야지 일어나고 싶죠. 엄마는 잔소리하죠. 엄마가 엄청 시끄러워요. 잔소리를 할 거라도 할 말만 하면 되지 왜 그렇게 시끄러워.

그 와중에 둘째 애기는 아직 너무 어려서 웃어요. 이제 막 초등학교 갈 나이인가 본데, 아무것도 몰라요, 얘는. 근데 다 흡수하고 있겠죠. 이러한 상태가 정상이라는 흡수를 하고 있겠죠.

이렇게 엄마는 앵앵앵거리면서 잔소리하고, 오빠는 청소년의 초반기에 있는 나이인데 이미 일어나기 싫어하고, 엄마랑 아빠가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닌데 별로 그렇게… 솔직히 별로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거 같진 않아요. 살아지니까 삽니다. 죽고 싶은 거랑은 또 다르죠, 이러한 상태는. 마비 상태인 거예요. 이것이 이 집의 정상 상태다.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 지금껏 폭발 안 한 게 신기한 상태.

근데 이 상태가 그리 특이한 케이스는 아니라는 게 영화가 주장하는 바인 것 같습니다. 어… 앞서 말했듯이,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직장을 다니면서도 얼마든지 변화를 지각하고, 그것을 만끽하고, 재밌게 살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특이한 케이스는 아니잖아요? 그것이 뭐, 무의식적으로 남들도 다 그렇게 사니까 나도 불만족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고, 그런 생각조차 안 하고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아서 그럴 수도 있고, 정말 갖가지 옵션을 다 고려해봤는데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이유야 다양할 테지만, 어찌 됐든, 안정적인 규칙의 반복 속에서 마비 상태의 분노를 느끼는 건 그리 특이한 건 아닌 것 같다. 꼭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특이한 것은 아니다.


아무튼, 우리의 주인공 압테는 잘 좀 살아보려고 하는데 되는 일이 없습니다. 자꾸만 일이 꼬여요.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지옥처럼 반복되던 그 일상이 깨지긴 깨집니다. 그런데 재밌고 즐거운 쪽으로 깨지는 게 아니라, 꼬이는 쪽으로 깨진다. 그래서 가뜩이나 맨날 똑같아서 돌아버릴 것 같았던 주인공은 빡이 쳐서 폭주합니다. 진짜 말 그대로. 빡이 쳐서 폭주를 한다.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서 이 폭주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자세히 나와가지고, 저는 매우 기대하면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자꾸만 이 주인공한테 사람들이 진정하라고 하는데, 더 빡치는 거 있잖아요. 그게 막 눈에 보이니까, 이게 슬픈데 웃겨요. 이것이 웃픔이다. 저 사람 이제 폭주한다 폭주한다. 막 기대하면서 봤어요.

그러다가 완전히 폭주하기 전에 길에 사는 소년인 듯한 애가 자꾸만 기침 하는 모습을 보고 주인공이 도와줍니다. 뭔가 그러니까 이 사람이 아주 사는 게 막 표면적인 수준에서 빠듯하고 돈이 없고 시간이 없고 그런 게 문제인 게 아닌 거예요. 그렇죠? 이 사람이 물리적인 시간이 없고, 통장에 잔고가 아예 없고, 그런 게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람이 주위를 돌아볼 표면적인 여유가 있긴 있어요. 다만 마음의 여유가, 와 마음의 여유가 정말 없다. 아주… 이 주인공이 생각하기에 정말 도움이 필요한 소년이 기침을 하지 않는 한 잠깐 멈춰서 그 반복에서 빠져나올 마음의 여유는 없다.

이… 반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저항하는 상태. 마비되었는데 저항하는 상태. 그런 상태 같아요.

이게 신기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비 상태일 때 정말로 아무것도 안 느껴지면 그게 사실 안 피곤할 거잖아요. 그렇죠? 정말로 내가 아무것도 안 느껴지면, 피곤할 게 없어요. 마치 우리가 푹 잘 때처럼, 피곤할 게 없어요. 그런데 이러한 마비 상태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실은 우리는 되게 분주한 거예요. 그렇죠? 우리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는 엄청 분주해요. 그래서 이 마비 상태가 피곤한 겁니다.

사실 그냥 표면적으로 따져 보면, 제가 로드 레이지를 겪었을 때 그렇게 분노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렇잖아요. 근데 그러니까 13마일이 90분이 걸린다는 자체보다, 내가 거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그 생각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마비되면서 빡이 치되 그것이 폭발을 아예 하진 않은 그 상태가 계속 지속되는 거예요. 한마디로 그냥 어… 진짜 병 걸리는 상태. 저는 그때 탄수화물 중독이었어가지고, 파스타를 한 대접씩 먹었어요. 몸무게는 그것 치고는 많이 안 나갔는데, 그 이유는, 아마 근육량이 부족해서였을 거예요.

아무튼 이… 반복. 반복 그 자체가 문제이면서도 문제가 아니다. 뭐랄까, 그 … 반복을 너무 싫어하면서 내가 반복의 일부가 된 상태. 이게 항상, 문제입니다 여러분.

이… 예를 들어, 수치를 너무 싫어하면서 수치가 곧 내가 된 상태. 혹은 슬픔을 너무 싫어하면서 슬픔이 곧 내가 된 상태.

근데 그러면서 이… 저항한다고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곧 내가 되었다는 것은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압테도 그런 상태입니다. 자기가 무엇과 하나가 되었는지, 자기가 싫어하는 무엇과 다름없는 그 상태가 되었는지를 잘 몰라요. 그저 아주 깊은 분노를 마비 상태에서 느끼고 있는데, 그 때문에 반복되는 일상 와중에 변화가 생기면 꼭 분노를 치밀게 하는 패턴으로 변화가 생깁니다. 심지어는 그 분노를 치밀게 하는 변화조차 반복의 패턴으로 서서히 편입되는 것만 같습니다. 미칠 노릇이죠?

반복이 있는데 거기에 빡치는 변화가 있어요.

그런데 그 빡치는 변화가 반복돼요.

그러면 빡치는 변화는 변화입니까, 반복입니까?

화가 나죠. 하. 화가 난다. 근데 그게 웃겨요, 영화에서.


그리고 압테가 매우 이해가 간다.

이게… 어떤 일이 짜증 나게 일어난다는 그 자체보다, 그 짜증 나는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다들 동의하는 척하면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게 더 짜증 나지 않나요? 예를 들어, 누가 횡령을 하는 그 자체보다, 횡령은 나쁘다고 믿는 척하면서 횡령을 한다든지. 그 외에도 어떤 비리가 일어난다는 그 자체보다, 비리를 저지르는 게 비상식적이고 비리를 안 저지르는 게 상식적이라고 동의하는 척하면서 비리를 저지르는 게 빡치지 않느냐는 말이죠.

역시나. 착한 척은 필패한다. 착함. 긍정. 뭐… 다른 여러 가지 좋다고들 하는 특성들. 선. 옳음. 존중. 공정. 이런 것들이 그 자체로 나쁜 건 아닌데, 그거를 좋다고, 지향한다고 가장 시끄럽게 구는 자들이 꼭, 반드시, 사실은 그것들을 시궁창으로 처박고 있고, 그리하여 나쁜 것이 되며, 그리하여 압테는 빡이 친다.

하. 그리고. 개개인은 상식과 비상식에 대해 동의를 안 하더라도, 국가라든지 회사라든지 하는 어떤 틀 내에서 관리 감독을 하라고 권력, 돈, 사회적 인정 등을 더 쥐여주는 역할들이 있잖아요? 각종 정치인, 공무원, 아니면 회사 내의 좀 높은 직책들. 이런 자들이 관리 감독을 안 하면 줭말… 아, 줭말 빡이 치죠. 네가 관리 감독을 안 할 거면 너는 돈을 왜 더 받는 거야? 왜 날더러 널 강제 존중하래, 다만 네 지위가 그것이라고 해서? 이 주인공도 그런 측면에서 폭주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그러한 폭주할 만한 것에 주의가 쏠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미 주의가 거기에 맞춰져 있지 않았더라면 빡칠 거리가 아니었을 것에도 막 분노가, 대격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게 좀 슬픈 것이, 내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면 화가 안 나거나 덜 나요. 그렇죠? 아무리 부정부패가 일어나도 내가 여기를 뜰 수 있으면 그래도 괜찮아요. 근데 반복 속에서 짜증 나는 일이 일어나니까 이 주인공이 막 폭주하게 되는 겁니다. 급기야는 거스름돈 좀 받으려고 노점 같은 것을 막 부숴버립니다. 사람들이 막 모여들고, 유리병은 깨져 있고… 난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이 ‘나는 벗어날 수 없다’는 우리가 흔히 빠지게 되는 망상 같은데, 이 중 얼만큼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얼만큼이 사실은 벗어나고 싶지 않음일까? 일단 적어도 이 주인공은 폭주를 했기에, 벗어나고 싶지 않으면서도 벗어나고 싶다고 주장하는 경우라고 완전히 볼 순 없으나, 동시에, 이 화를 어마어마하게 붙잡고 있습니다. 십분 이해가 가는 바이긴 하나, 하, 정말. 이게 정말. 정말 이해가 가면서도 압테의 폭주가 별로 쓸모가 없다는 걸 우리가 알 뿐만 아니라 압테도 아는 것 같아요. 압테의 폭주는 어떤 정말 현실을 개선해서 자기가 부정부패와 비리와 미칠 듯한 반복에서 벗어나겠다는 희망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으니 마지막으로 발광, 어… 두 가지의 다른 한자의 뜻의 발광을 하고 떠나겠다는 그런 느낌입니다. 화를 끝까지 붙잡고 있는 거죠.

발광의 두 가지 뜻. 두 개의 한자가 달라요.

하나는 “미친병의 증세가 밖으로 드러나 비정상적이고 격하게 행동함. 또는 그런 행동.”

또 하나는 “빛을 냄.”

네. 압테가 미친병의 증세가 밖으로 드러나 비정상적이고 격하게 행동하면서 빛을 내요.

그리고 제가 여기서 압테의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미친병이라고 하는 이유는요, 어떤 그 미침을, 그 광기를 깔보는 의미에서의 미쳤다고 하는 건 아닙니다. 미쳤다가 곧 깔보는 의미가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한데,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여러분, 두 개의 전혀 관련 없는 특성들을 자동으로 잇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돈이 없다를 비참하다와 자동으로 연결한다든지.

얼굴이 예쁘다를 인기 많다와 자동으로 연결한다든지.

꼭 그렇지 않죠? 돈이 많아도 비참할 수 있고, 돈이 없어도 잘만 살 수 있습니다. 얼굴이 예뻐도 인기 없을 수 있고 얼굴이 못생겨도 인기 많을 수 있습니다.

미친병도 그러하다. 미쳤다고 해서 꼭 뭔가 깔보는 건 아니다. 압테의 경우에는… 어… 정말 미쳤어요. 왜냐하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하여 어떤 얻을 게 별로 없거든요. 그냥 너무나 분노해서 이걸 터뜨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으니까 터뜨리는 거고요, 실제로 끝에 가서 죽습니다. 그리고 저는 압테가 죽을 걸 알고 이랬다고 생각해요. 점점 더 설명을 할 텐데, 들어보시면 아마 여러분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으실까 합니다. 왜냐하면 압테의 행동이 점점 더 격해지기 때문에.

압테는 화를 붙잡고 있다. 그리고 화를 그만 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한아임은 매우 이해한다.

이거 진짜 그렇거든요. 어떤 경우에는, 벗어날 수 있는 법을 대놓고 일러줘도, 못 한다고 합니다.

화의 경우에 예를 들자면, 벗어날 수 있는 법을 일러줘도 화를 내요. 아니면 슬퍼하거나. 아니면 하여간에 화를 벗어나는 것 외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데 결과적으로 화를 벗어나진 않는다.

슬픔의 경우에도, 벗어날 수 있는 법을 일러줘도 화를 내거나 불쌍한 척을 하거나 하여간에 슬픔을 벗어나는 것 말고 다른 걸 전부 다 합니다.

이것은 일부 그 방법을 일러주는 사람도 별로 화가 안 나고 안 슬픈 인생을 사는 것 같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죠?

예를 들어 내가 돈이 없어서 화가 나는데, 나랑 똑같이 돈 못 버는 친구가 나한테 돈을 이렇게 저렇게 쓰라고 하면 어이가 없고 화만 더 날 수 있죠. 그런데 문제는 나보다 돈을 100배 더 버는 사람이 ‘이렇게 하면 돈 벌 수 있다’고 일러줘도 안 하는 경우가 있어요.

압테의 경우는 어떤가? 일단 영화에는 압테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아예 안 나와요.

압테의 가족은 압테랑 사니까 비슷비슷하게 살고요, 압테의 이웃들도 그냥 비슷비슷하게 살고요, 동료들도 다 비슷비슷하게 삽니다. 큰 문제들은 없습니다. 뭐 누가 아파서 죽거나, 폭행을 당하거나, 그런 건 없는데, 다들 이 미칠 듯한 반복 속에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심지어 그 반복 속에 비리, 부패, 불공정, 이런 것들이 크고 작게 들어 있어요.

그러니 이 중 그 누가 압테한테 와서 ‘이렇게 한번 살아보면 인생이 더 나아질 거야’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압테가 더 빡만 쳤을 것 같아요. 실제로 약간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해요. 압테한테 좀 그냥 넘어가라는 뉘앙스로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인생이 더 나아질 거라고. 근데 그 사람 말을 압테가 듣겠냐고요. 그리고 그 압테의 그 말 안 들음이 다만 뭔가 압테가 화를 붙잡고 있어서 때문만이라기에는 저 같아도 저 사람 말은 안 들었을 것 같아요. 화를 참아서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워 보일 수 있지만, 압테한테 그렇게 빡치지 말고 좀 참으라는 식으로 말하는 그 사람들의 인생이 압테 입장에서 제가 생각해도… 그게 뭐 좀 부러워야지 그 말을 듣지, 뭐 하나 해결된 것도 없고 더 좋은 것도 없는데 그렇게 살으라고 하면 딱 그 예시예요. 내가 돈 없어서 화 났는데 나랑 똑같이 돈 못 버는 친구가 조언이랍시고 말을 하면 그걸 듣겠냐고. 안 듣습니다. 압테도 주변인의 말을 안 듣는 거죠.

그래서 영화가 좀 시원한 측면이 있습니다. 별달리 어… 지금까지 제가 말한 내용들을 생각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냥 압테에게 몰입해서, 와, 진짜 빡치겠다. 나 같아도 빡치겠다. 하면서 봐도 신나게 시원하게 볼 수 있는 그런 플롯입니다. 아주 극명해요. 압테의 상황은 답답하지만 영화는 답답하지 않다.

요거 우리가 이번 시즌에 특히나 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인 것 같아요. 인물이 처한 상황이 이러저러하다고 해서 영화가 똑같이 이러저러해지는 않는다. 인물에게 막장 요소가 있어도 영화가 막장 영화가 아닐 수도 있고, 인물이 아무리 불쌍한 척을 해도 영화가 불쌍하진 않을 수도 있고. 그리고 여러분, 약간 충격적일 수도 있는데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킹 유용한 게 뭔지 아십니까? 이것은 우리 삶에도 적용 가능합니다.

우리가 어떤 한 상황에서 비참하거나 불쌍하거나 하더라도, 우리의 삶의 이야기가 비참하거나 불쌍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비참하거나 불쌍한 걸 계속 붙잡고 있잖아요? 그러면 이야기 자체가 비참하고 불쌍해집니다.

아무튼 “돔비발리 패스트”의 경우에는 압테가 지옥 같은 반복 속에 살아도 관객한테는 그것이 단 몇 분의 압축된 형태로 전달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느끼면서도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인공 압테는요…

제가 압테에게 이입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적어도 표면상으로라도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주인공은 “이 세상에서 나만 불쌍해”랑 “세상은 원래 이렇게 엿 같아”가 통합된 주인공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가 있는데, 압테는 아닙니다만, 이런 경우 세계관 붕괴가 너무 분명하잖아요.

이 세상에서 나만 불쌍하려면 이 세상이 원래 이렇게 엿 같을 순 없어요. 나만 불쌍한 거고 세상은 원래 안 엿 같아야 말이 되죠.

또한, 이 세상이 원래 엿 같으려면, 이 세상에서 나만 불쌍할 순 없습니다. 모두가 다 불쌍한 거예요. 세상은 원래 엿 같으니까.

그래서 이 두 개, ‘이 세상에서 나만 불쌍해’랑 ‘세상은 원래 이렇게 엿 같아’가 통합된 주인공이 나오면, 세계관 붕괴 그 자체가 이야기의 메시지이지 않은 한, 보면서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 “돔비발리 패스트”의 주인공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압테는 자신의 분노를 붙잡으면서도 표면상으로나마 “세상은 원래 이렇게 엿 같을 리가 없다”는 아주 굳은 신념이 있고요, 이 세상에서 나만 불쌍한 게 아니라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래서 너무나 흥미로워요. 이 주인공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 측면이 많고요, 너무나 이… 참 알면서도 보는 이야기다. 알쥐알쥐. 빡치지 빡치지.

그래서 압테가 어떻게 폭주하느냐?

사람을 패고. 칼로 공격하고. 무기까지 쓰고. 난리도 아닙니다. 이래서 제가, 이 정도면 죽임당할 걸 알고 폭주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결론에 도달한 겁니다. 이것은 어… 이것은 죽음을 불사한 자경 행위다.

음… 아내와 애 둘을 집에 두고 어떻게 저렇게 사람을 패고 다니고 칼로 공격하고 다니고 그러한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의의 미명하에 자기가 저질러 놓은 일을 책임지지 않는 것은 압테가 아닌가? 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특히나 끝에 가서, 길에서 만난 노숙자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아니, 자기 자식도 아닌 애 챙길 정신 있으면 자기 때문에 미래가 불투명해진 자기 애들 걱정해야 하지 않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것도 맞는데, 한편으로는, 자기 애 둘을 낳았기에 주인공이 저럴 수도 있다고 여겨졌어요. 왜냐하면, 이 상태로는, 그 자기가 존재하게 한 그 애 둘이 살 세상도 사람들이 비리 안 하는 척하면서 비리 저지르고 다니는 세상일 테니까. 그리고 비리가 없다 하더라도, 마비될 것 같은 반복 속에서 뇌세포가 죽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삶을 사는 게 전부일 테니까. 나 하나 살다 갈 거면 그냥 그러려니 하다 가면 되는데, 애를 낳아놨으니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주인공의 특성을 고려해 보면, 바로 그래서 자경 행위를 하고 다니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노숙자 소년을 돕는 것도, 노숙자 소년을 돕기 위한 그 자체의 의미도 있지만, 그 맥락이 뭐냐면요, 노숙자 소년을 병원에 데려갔는데 병원에서 일을 제대로 안 하는 거예요. 굉장히 병원의 도움이 격하게 필요한 그 소년조차도 병원에서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 세상에다가 자기가 자기 애를 둘이나 낳아 놨으니까 더욱 자경 행위의 필요성을 느낄 법한 주인공 같다는 말이죠.

병원에서도 우리의 주인공은 싸웁니다. 심지어 하필이면 주인공이 거기에 있을 때 병원 측에서 자기네 시설 좋다고 자랑질을 하면서 티비 제작진을 부른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또 빡치죠. 이 온 세상이 마치 주인공을 빡치도록 하기 위하여 돌아가는 것 같아요.


아무튼, 영화 내내 압테는 싸웁니다. 그러다가 유치장에 갇히고, 집에서 아내는 걱정하면서 기다립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확실히 알 수가 없으니까.

그러고서 압테는 유치장에서 새벽에 풀려나는데, 집 근처로 오자마자 또 빡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는 또 훼까닥 돕니다. 마을 사람들이 물을 구하러 아침마다 나와요. 이것이 이 동네의 일반적인 풍습인가 봐요. 물을 배달하는 사람이 아침에 동네로 오면, 주민들이 물을 받으러 나와요. 그런데 물을 나눠주는 사람이 양아치 짓을 하자, 주인공은 그 사람을 무력으로 밀치고, 멱살을 잡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을 아내와 큰아들이 목격하고요.

이 영화가 그래서 여러분. 굉장히, 저는 시원했어요. 뭐 감추는 게 없어요. 카메라로 뭔가 막 화려하게 뭘 보여주려고 오바하는 것도 없고요, 사운드도 아주 명료해요. 슬픈 장면에 슬픈 음악. 폭주 직전에 폭주 직전 효과음. 이런 식으로. 그래서 제가 추측하기에, 저처럼 인도 문화나 인도 영화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도 수월하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온 세계 다양한 21세기 사람들이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와 연출이다.

또한 도시 경관을 구경하는 맛도 있었습니다. 제게 익숙하지 않은 나무들의 조합이 길에 자라고 있어서 신기했다. 사람들이 쉬는 시간에 나와서 음료를 사 마시는 풍경이라든지. 한밤중에 길거리 음식을 먹는 모습이라든지. 한밤중, 또 다른 장소로 가면, 텅 빈 차도들이라든지.

그리고 유치장의 연출이 아주 흥미로워요. 다른 공간들은 전부 사실적인데, 유치장은 유독 누아르 특유의 분위기가 납니다. 왜 그, 어두운 가운데에 창이나 천장 조명 한두 개에서 빛이 들어와서 그림자와 밝음이 매우 명확하게 대조되는 특성. 그리고 공기가 아주 맑은 게 아니라 입자가 떠 있는 듯해서, 빛이 비출 때 마치 안개처럼 흐릿한 부분부분이 있는 특성. 이런 점이 주인공의 마음 상태를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영화에 추가적인 보는 맛을 선사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어느 시점에서는 주인공이 방망이를 들고 다니는데, 쇼넨 밧또가 생각났습니다. 에피소드 65에서 다뤘던 “망상대리인”에 등장하는 쇼넨 밧또 같은데, 다만 “돔비발리 패스트”의 압테는 소년이 아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방망이를 들지만 나중에는 칼도 든다. 그러니까 여러분. 압테는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보통 상태가 아니에요. 그냥 좀 화나가지고 싸우고 그런 게 아니에요. 막 칼로 사람을 공격해가지고 뉴스에 나오고, 이 정도입니다. 그것도 속보로.

급기야는 방화까지 저지릅니다. 이게 아까 제가 언급한 발광입니다. 압테에게 빛이 나요. 어마어마한 빛. 엄청나요. 막 그, 뒤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 인물은 슬로우모션으로 카메라를 향해 걸어오는 구도 있죠? 2024년 현재, 영화라는 매체가 있은 지 꽤나 시간이 흐른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이제는 익숙한 구도, 잘 알기에 더 신나는 구도. 그 구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제 방화까지 나왔으니 또 뭐가 나올 수 있으랴 싶을 때쯤, 아까 말한 그 노숙자 아이를 도와주려고 병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분노가 치민 주인공은 드디어 총을 들이밉니다. 네. 방망이로부터 칼, 그리고 방화를 거쳐, 총이 등장합니다.

재밌습니다. 영화 길이도 딱 100분 정도여가지고, 정말이지 정석적인 길이. 정말, 짧아서 섭섭하지도 않고 길어서 찌뿌둥하지도 않은 길이.

그리고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이, 끝부분에 리포터들이 시민들에게 주인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터뷰를 해요. 그는 착하다 나쁘다 위인이다 미친 놈이다 기타 등등.

이번 시즌에 아임 드리밍에서 다룬 영화 중 제가 기억하기로는 유일하게 대놓고 관객에게 “이 영화의 주인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돔비발리 패스트”입니다. 질문을 대놓고 던지든 안 던지든 우리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하지만, “돔비발리 패스트”에서는 아주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한아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앞서서 조금 언급했죠. 압테가 십분 이해가 가는 바이나, 그는 분노를 붙잡고 있다. 분노를 떨칠 생각이 없다. 이… 어쩌면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기에 그렇겠죠. 처음부터 분노를 했으면 이렇게 폭주하지 않았을 텐데, 아마도, 어, 영화에 안 나왔으니까 제가 추측만 하건대, 아마도 자식도 있고, 아내도 있고, 뭐, 그냥 잘 살고 싶으니까, 평화롭게, ‘나는 화를 내면 안 돼’의 상태로 분노를 꾹 누르고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누가 봐도 화가 난 상태인데 자기는 화가 났다는 걸 오래도록 몰랐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영화에서는 초반부터 압테가 화를 터뜨리는 것이 나오지만, 반복되는 몽타주로 표현된 출퇴근길에서 얼마나 오래도록 그가 화를 억누르고 있었을지 자세히 알지 않아도 짐작은 가능하다.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인도 영화 좀 재밌다. 신난다. 다음 에피소드에서도 인도 영화 볼 거예요. “노 스모킹.” 무척 재밌다. 아마 실제 사람 배우가 나오는 영화, 즉 애니가 아닌 이번 시즌의 레퍼런스물 중 제가 제일 재밌게 본 것이 이 “노 스모킹”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다룬 “돔비발리 패스트”도 재밌었고, 전체적으로… 어… 한아임 인도 영화 좋아하나? 좀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러한 장르의 인도 영화가 잘 한국어로 번역이 되고 한국에서 유통되지 않나 보더라고요. 일단 넷플릭스에 없었고, 유튜브에는 있어요. 유튜브에서 돈 내고 보면 되는데, 자막은 영어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좀 아쉽다. 인도 영화 한국에서 통할 것 같은데?

왜냐하면요, 나중에 “누아르 어바니즘” 책 그 자체의 인도 챕터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잠깐 언급을 하자면요, 이 발리우드 영화가 아닌, 오늘 우리가 다룬 “돔비발리 패스트”나 다음 에피소드에서 다룰 “노 스모킹” 같은 장르의 영화를 “어반 프린지”라고 부른대요. 그런데 책에 이런 부분이 나와요. “프린지 감독들이 공개적으로 영향력을 인정한 외국 감독들로는 미국의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 데이비드 핀처David Fincher 및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홍콩의 왕가위Wong-Karwai, 그리고 한국의 박찬욱이 있다.” 네. 요렇게 나옵니다. 박찬욱 감독님 영화들, 우리 꽤 익숙하지 않습니까? 저는 박찬욱 감독님 영화들을 매우 좋아합니다. “박쥐”를 진짜 좋아하고요. “헤어질 결심”도 심히 좋아하고요. 어… 그 두 영화에 나오는 물, 특히 바다의 이미지가 너무 좋고요. 음… 그냥 좋다. “아가씨”에도 바다가 나오죠. “아가씨” 너무 좋아요. 너무나 정교해요. 그런데 어쩌면 답답하지가 않을까. 무슨 막… 유리로 만든 조각상 같아요, 영화가. 유리로 깎은 집 조각상 같아요, 영화가. 얼음인 줄 알고 만졌는데 유리라서 오래 만지고 있으면 온기가 남고, 혹시나 깨져도 다시 맞출 수 있는 퍼즐 같은 조각이 되는 그런 조각상 같아요.

아무튼 이러한데, 박찬욱 감독님 및 우리에게 익숙한 다양한 감독님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도의 프린지 장르 영화 감독님들이 공개적으로 말을 했다더라. 그래서 그런지 좀… 이 풍이 저한테도 익숙한 것 같고요. 다음 에피소드의 “노 스모킹” 매우 재밌고, 이번 에피소드의 “돔비발리 패스트” 너무 재밌었다. 하. 압테 불쌍하다. 압테가 불쌍하고 안타깝다. 대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경우에, 목격자의 입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복의 덫에 갇혀 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까, “압테는 예외의 경우다”라고 결론을 내려야 할까?

우리 많이 얘기했죠 이번 시즌에. 선하려고 하는 와중에 악을 만드는, “고지라”에서와 같은 현상이 있다고. 그러니까 뭐랄까, 누군가가 안타까운 상황에 있는 것은 나의 판단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자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곧 저자의 안타까움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압테는 안타까운가 안타깝지 않은가? 혹은 안타까워야 하는가, 안타깝지 않아야 하는가?

이것은 압테를 위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하는 질문입니다. 영화 끝에 시민들에게 인터뷰를 하면서 압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는 것도, 그들의 대답이 실제로 압테가 어떠한지를 알려줄 수 있어서가 아닐 겁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시점밖에는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도 제한적이지 않고요, 오히려 그래서 무한합니다. 나는 내 시점만 궁금해하고, 내 시점만 귀히 여기면 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하나도 이기적인 게 아니고요, 모두가 잘 사는 길입니다. 에피소드 67에서 얘기했었죠. 저는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내가 잘 살아야 내 주변의 남도 잘 사는 거지, 내가 여유가 안 되는데 엄하게 남한테 뭘 잘해주려고 해봤자, 내가 뭘 줄 형편이 안 되면, 거기다가 내 결핍만 담아서 주게 돼요.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여유가 안 된다 함은 어떤 표면적 절대적 외부적 기준이 아니고요, 내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아까 말했잖아요, 압테는 표면적으로 보면 여유가 없는 게 아니라고. 그 상황 자체보다, “내가 이 짓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고?” 내지는 “내 최상의 시나리오가 겨우 고작 저 상사처럼 사는 거라고?”라는 생각이 분노를 치밀게 하는 겁니다. 내 상사가 부러우면 지금 사는 그대로 살면 되죠, 최선을 다해서. 혹시 승진이 안 되거나 하더라도, 어쨌든 그 길로 계속 가면 되잖아요. 너무 좋죠. 아주 잘됐죠. 그런데 회사를 다니는데 상사가 안 부러우면, 혹은 상사 위 상사도 안 부러우면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안 부러운 정도가 아니라 저렇게 되는 게 무서울 지경이면 나는 그 회사에서 소위 말하는 ‘잘되는 현상’이 계속될수록 더욱 불행해집니다.

아무튼. 압테는 어떤 경우인가? 그는 불행한 자신으로서 노숙자 소년을 도와준다고 여김으로써 실제로 그 소년을 도와줬는가? 누구를 도와줬는가? 대체 무엇을 바꿨는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결론인 듯한데, 영화 줄거리상의 결론은.

아무튼 그러하다. 압테를 위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질문이다. 나는, 우리 개개인은 나의 시점을 알고 있는가?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 『누아르 어바니즘: 현대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들』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Mahesh Vinayakram – Guruvea SHARANAM – Instrumental Version
  • Sharabina – Tere Bina Sathi – Instrumental Version
  • Risian – Mind and Matter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 2024 한아임

소개

✨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