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72] <누아르 어바니즘> 인트로덕션 + 1. 아포칼립스의 환영: <메트로폴리스>와 바이마르의 모더니티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 드디어, 범고래출판사의 이혜원 대표와 제가 같이 번역한 책, <누아르 어바니즘>, 그 책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 시작합니다. 인트로덕션과 챕터 1을 오늘 다룰 거고요, 앞으로 한 에피소드당 한 챕터씩, 그렇게 진행을 하겠습니다.

이 책의 제목부터 볼게요. <누아르 어바니즘>. 누아르가 형용사로 쓰이고 있고 어바니즘이 명사로 쓰이고 있으니, 어바니즘이 무엇인가부터 얘기해 볼게요.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이즘은 대개 ‘무슨무슨 주의’로 쓰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어바니즘의 사전 번역을 보면 도시성, 도시 생활, 도시화 등등으로 다양하게 나옵니다. 그리고 실제로 어감상 느끼기에, 꼭 반드시 도시가 더 좋아서 도시를 추구한다, 이런 뉘앙스는 아니에요. 영어 사전상 정의는 대략 “도시의 생활 방식” 혹은 “도시의 개발과 계획” 등으로 나와 있어요. 이렇게 도시에 얽힌 전반적인 담론? 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포괄적인 단어라서 어바니즘이라고 발음 그대로 옮겨 오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아르는 뭔가? 누아르도, 뜻을 그대로 번역하려면야 프랑스어로 ‘검다’라는 뜻을 써야 할 거예요. 그러나 이 책 제목의 경우에, 그리고 이 책 내용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검다는 뜻으로 쓰인 건 아닙니다. ‘필름 누아르’라는, 프랑스의 영화 평론가들이 만들어낸 어떤 장르에서 따 온 ‘누아르’라는 단어고요, 그렇기 때문에 마냥 검다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누아르 장르의 어두움, 그… 황량함. 그… 아무도 믿을 수 없음. 그리고 부패, 폭력, 등등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의 여러 필자들의 에세이를 한데 모아 엮고 인트로덕션을 쓴 기안 프라카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의 제목은 현대적 삶의 경험에 시각적인 요소를 삽입하는 데에 영화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점을 나타낸다. 물론, 필름 누아르는 특정한 형식이다. 그러나 밝거나 어두운 공간을 고전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 광범위하게 유포되면서, ‘누아르’라는 용어는 더 넓고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영화학자들은 이 용어를 특정 영화적 기법을 식별하는 데 사용하지만, 다른 분야의 작업자들은 암울하고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을 나타내는 데에 은유적으로 사용한다.”

그리하여 책의 제목이 <누아르 어바니즘>이 되었다.


이렇게 <누아르 어바니즘> 제목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듯이, 프라카시는 도시를 어떤 식으로 볼지를 명확하게 결정을 하고 본 내용에 들어갑니다. 도시가 실제로 누아르하기에 누아르 어바니즘을 다룬다기보다는, 어바니즘의 누아르적 측면을 보기로 결정을 하고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실제의 도시는 누아르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겠죠. 이 점 중요한 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재현을 볼 때, 어… 사람이 관심 분야와 취향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진짜로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 말이에요. 그리고 이 책도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저는 여겨집니다. 도시를 누아르하게 표현한 각종 재현에 관심이 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세상을 밝게 보더라도 이러한 책을 읽을 만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 기안 프라카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를 비난하는 상상의 미래로 우리를 안내하는 유토피아적 텍스트와 달리, 디스토피아적 상상은 우리가 현재의 증상을 인식하지 못할 경우 미래에 닥칠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우리를 직접 공포스러운 세계로 데려간다.” 즉, 언뜻 보기에는 유토피아적 텍스트는 밝은 이상에 대한 묘사인 것 같고, 디스토피아적 텍스트는 굳이 뭐 하러 저런 어두운 세상을 그려놨나, 싶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마냥 그런 건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유토피아적 텍스트가 현재를 비난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있는 이곳이 모자라니까, 이것보다 더 좋은 뭔가를 선보여주겠다며. 한편, 디스토피아적 상상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공간이, 뭐, 완벽하다는 건 아니지만, 이것이 망가질 수 있으니, 망가진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겠다, 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나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유토피아적인 세상을 만들려다가 얼마나 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시나리오. 이것은 아임 드리밍 팟캐스트에서 꽤 자주 언급되는 아이디어죠. 떼. 한아임이 줭말 무서워하는 떼. 자기 혼자 잘 살지도 못하면서 남의 인생까지 자기가 좋게 하겠다고 획일적으로 뭘 갖다 붙이려다가 말아먹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에서 전반적으로 자주 나옵니다. 완벽한 유토피아. 환상 속의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사람을 획일화된 기계 취급하고, 원래 있던 건물을 밀어버리고, 그러한 시도들이 언급이 돼요.

또한 책에 이렇게 나옵니다. “기술과 계획된 미래가 제공하는 약속은 끔찍했다. 모더니즘이 이러한 공포를 표현한 한 가지 방식은 도시적 디스토피아의 이미지를 통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기술이 만들어 낸 대중사회에 대한 어두운 비전은 꼭 현대 대도시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토피아적 약속의 배반에 대한 비판을 의미했다. 디스토피아적 형식은 도시적 모더니티를 거부하기보다는 수용하는 비판적 담론으로 기능했다.”

그래서 좋다, 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마냥 다 좋은 것은 아니고, 나쁘다, 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마냥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그… 음양 상징 있죠? 이렇게 태극 무늬로 검은색 흰색이 물결치고 있는 동그라미가 있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음양 상징이 있고요, 검은 물결 안에 흰색 동그라미가 또 있고, 흰색 물결 안에 검은색 동그라미가 또 있는, 그리고 또 그 동그라미들 안에 더 작은 동그라미와 물결들, 이런 식으로 해서 무한히 무한히 들어가는 그런 묘사를 한 경우들이 있어요. 마치 그것과 같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또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나도 좋다고 여기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쁘다고 여기는 것을 나도 나쁘다고 여기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과 좀 관련된 이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비판이 있습니다. 어… ‘다른 곳,’ 그러니까 그 챕터의 저자 및, 뭐랄까, 이러한 여러 담론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참여하고 있는 서구의 관찰차가 보기에 저 먼 다른 곳에 있는 어떤 디스토피아를 비판하면서 내가 사는 이곳은 되게 좋은데 저기 저 나쁜 곳은 남 일인? 약간 그런 뉘앙스를 비판한다고 할까?

이것도 제가 몇 번 팟캐스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언급을 했는데요. 근대에 서구의 국가들이 다른 나라에 가서 전쟁을 하고 점령을 했기 때문에 망가지지 않은 서구의 도시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어떤 대도시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다른 곳,’ 서구 아닌 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자라다는 뉘앙스를 풍길 때가 있는데, 그것을 직간접적으로 한다고 생각되는 학자들의 생각에 좀 반대되는 생각을 제안하는 측면이 <누아르 어바니즘>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서. ‘다른 곳’으로 디스토피아를 밀어버리는 현상은 서구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가 주목할 만한 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것도 약간. 이… 요 경향이 있어요. 이… 서구의 학자들 중 개인이 그렇든 시대상이 그랬든, 디스토피아나 어떤 안 좋은 것들을 저쪽으로 밀어버리려는 현상이 있었던 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또한 서구의 학자들 중 다른 개인들과 다른 시대에는 그러했던 서구의 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서구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고 또 뭉뚱그리는 현상도 있다고 보입니다, 저는.

그러니까 뭐냐면 약간. 이 책에 나오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제가 아주 어렸을 때, 10살도 안 됐을 때 독일에서 살 때는, 정말 아시안 하면 일본인하고 중국인밖에 없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독일에 사니까, 유럽을 여행하기가 용이하다보니 유럽의 여러 나라를 가잖아요? 그러면 압도적으로 그러는 경우가 많았다고요. 그런데 그러는 와중에 제가 사는 독일 동네는 정말 참… 정말 운이 좋았어요. 저는 인종차별에 대한 트라우마는 없거든요. 저랑 제 동생이랑, 정말 손에 꼽는, 막… 두 명? 딱 두 명. 딱 두 명의 다른 한국애들, 우리 네 명이 아시안 전부였어요, 우리 초등학교에서. 근데도 인종차별 트라우마가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참 이상할 정도로, 지금 생각해보면, 그 동네 독일인들은 진짜 막… 거의 역트라우마처럼. 독일 국가도 안 부르던 때거든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독일 국가도 안 부르고. 저는 초등학교 내내 독일 국기를 그려본 적이 없어요. 국기가 어떻게 생긴진 알죠. 축구 경기 하고 그러니까. 근데 학교에서 독일에 대한 아무… 독일 국가의 자랑, 이런 게 없고. 독일의 땅. 정말 그 흙으로 된 땅 있죠? 숲, 땅, 나무, 그런 것의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얘기했지만, 독일 국가나 독일인의 자랑, 이런 걸 한 번도 들어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마치 역트라우마처럼, 그 동네 독일인들은 그… 자신들의 역사적인 과거를 굉장히 조심하고. 굉장히 그거 때문에 오해받을까봐 미리 잘해주고 미안해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그랬던 거 같아요. 어렸을 때야, 아 당연히 뭐 내가 쟤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싶었던 거 같은데, 지금 커서 보면, 와 정말 제가 만약에 정말 일이 꼬일려면 이상한 놈 걸려가지고 괴롭힘을 당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냥 대단히 편했던 건 아니지만요.

아무튼 커서 보니. 독일도 그렇고. 미국도. 특히나 학계에. 어… 실제 사람들은 다 각양각색일 텐데, 학계의 유행 트렌드들이 있을 거잖아요. 거기에 약간. 역고발? 이라고 해야 하나. 서양 사람들이 서양 위주로 생각했던 것에 대한 극심한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 있는 것도 같아요.

그러나. 아임 드리밍 팟캐스트는 매우 글로벌하게 들어주고 계십니다만, 일단 한국어 사용자분들이 듣고 계실 거잖아요. 그래서, 이것이 마냥 서구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으로 생각할 게 아닙니다. ‘다른 곳’으로 디스토피아를 밀어버리려는 현상도 그렇고, 그렇게 밀어버리는 현상 이후에 역으로 과하게 자책하거나 한탄하는 현상, 이런 것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게 지금 ‘서양놈들 꼴 좋다’ 이럴 게 아니고요. 예를 들어 제가 한국으로 다시 이사를 왔을 때 충격받았던 건 한국의 단일민족 사상을 한국에서 가르친다는 거였어요. 이건 뭐… 정치적으로 여러분이 지금 현재 어떤 포지션이시든지 간에, 이게 좋을 리가 없습니다. 단일인 때도 있는 거고 별로 안 단일일 때도 있는 건데, 이것을 학교에서 주입으로 가르쳤다는 게 장기적인 측면에서 좋을 리가 없다고요.

왜냐하면. 학교에서 “한국은 이런 나라야”라고 가르치면 단합심 생기고 좋을 것 같겠지만, 한국이 더는 그렇지 않게 되면 그 한국이라는 개념은 붕괴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건 국가도 그렇고 개인도 똑같아요. 나한테 반드시 이게 있어야만 그래야만 나야, 라고 생각했을 때 나의 존재는 극도로 불리해집니다. 그것이 없으면 나는 나가 아닌 게 되고, 그래서 나는 붕괴하거든요. 나라는 개념이. 국가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면 그 요소요소들로 다시 재정의하느라, 계속 사건 이후에 따라잡기만 하게 됩니다. 불리해요. 아무래도 학교에서 나라에 대해 뭔가를 가르친다는 건 유리하려고 가르치는 것일 텐데, 불리하다고요.

한국에서 한국이니까 우린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게 얼마나 많은지, 이건 무슨 정당이나 정책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상식으로 접근해야 할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이 당해서. 한국의 역사가 그래서 다른 어떤 국가의 사람들이 저런 말을 했으면 세상에 만상에 어마어마하게 미쳤다고 했을 그런 언행을 일부 한국에서 하는 측면이 있다고요. 이걸 아임 드리밍 듣는 분들은 인지를 하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누아르 어바니즘>을 읽으면서 단순하게 “이 서양 녀석들. 남의 나라 약탈해가지고 팔자 편하게 살면서 남의 나라를 얕보면서 디스토피아를 거기로 밀었겠다. 괘씸하군.” 여기서 끝날 게 아니란 거죠. 괘씸한 건 괘씸한 거죠. 뭐 별 괘씸한 얘기 다 해요. 학계에서 트렌드가 뭐든지 간에. 제가 들었던 제일 기 막히는 얘기 중 하나가 미국놈이 인도 사람더러 너네 나라 영국이 침략 안 해줬으면 망했을 거라고 한 얘기였어요. 이게 한국인한테 일본이 너네 나라 침략 안 해줬으면 망했을 거라고 하는 거랑 뭐가 달라요. 개 괘씸하죠.

그러나. 그 녀석이 그런 녀석인 건 그 녀석 사정이고. 우리는 걔처럼 안 살면 되잖아요.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한국이 지금 약국입니까? 심지어 약국이라 하더라도 약국이다 약국이다라고 스스로 자꾸만 되뇌이는 게 좋을 게 없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게다가 약국도 아니라고요. 한국 같은 나라가 어딨습니까? 세상에 그런 전쟁과 침략을 겪고도 지금 대도시 하면 서울 같은 도시가 어디 또 몇 개 안 됩니다. 이 정도 사이즈. 이 정도 인프라. 이 정도 인구. 그리고 대도시가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문화 강국이 이미 그 자체로 거의 대도시가 있으면 디폴트로 서울과 그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대한 문화가 있다는 뜻이에요.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물론 어떤 국가나 어떤 도시가 완전하게 강하고 완전하게 약하고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가를 건 아니지만, 적어도 <누아르 어바니즘>을 읽으면서 한국어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은 “이 서양놈들, 참 바보 같았군” 이럴 게 아니란 거죠. 서양에서만 나고 자란 사람들이야 그들의 입장에서 뭐… 과거를 뼈저리게 뉘우치든 뭘 하든 하겠지만, 그보다 더 글로벌한 아임 드리밍의 청취자들은 거기서 끝나지 말자는 겁니다.

아무튼 그래서… 뭐 하다가 이 얘기를 했지? 아… 책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고 해도. 아임 드리밍은 수다 팟캐스트인지라 이렇게 또. 뭔 얘기를 하려고 했냐.

어… 디스토피아를 논하고 그로부터 지금 현재의 유토피아적 측면을 본다든지 하는 것에는 꼭 이러한 좋고 나쁨의 결론이 나지 않아도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특히나 저 사람이 뭘 ‘다른 곳’이라고 부르면서 거기로 디스토피아를 밀든 말든, 나는 그거에 일반화해서 동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실제로 읽어보시면, 어… 저자가 디스토피아라고 묘사하는 것이 나한테는 디스토피아가 아닌 경우들이 있어요. 제가 앞선 에피소드 언젠가에서도 잠깐 언급을 한 것 같은데. 무지막지한 도시. 막 사람을 집어삼키는 도시. 이런 것들의 묘사가 나올 때, 그 저자가 그렇게 느낀 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저는 하나도 그렇게 여기지 않은 경우들이 있거든요. 당연히 그런 요소요소들이 있죠. 제가 저자들과 동일 인물들이 아니니까요. 이런 경우, 제가 디스토피아가 나쁘다, 혹은 뭔가 바람직하지 않다, 라고 여기지 않더라도,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를 봄으로써 제가 있는 여기와 비교 체험을 하는 건 가능하거든요. 뭐냐 하면, 좋고 나쁘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다라는 그 자체로 가치 판단이 들어 있는 체험만이 아니라, 그냥 단지 내가 있는 여기와 달라서, 마치 차가운 거랑 뜨거운 걸 비교 체험하듯이 체험할 수 있는 측면에서도 음양 상징과 통하는 겁니다. 차가운 거 뜨거운 거에는 좋고 나쁜 거 없잖아요, 일반적으로. 그런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러한 책을 굳이 읽는 이유는 세상을 아주 그냥 비관적이고 디스토피아적이고 세상은 망할 것이고 막 그냥 우리는 이제 다 포기해야 하고, 그런 이유에서 이런 책을 읽는 것이 아니고요. 오히려 지금 내가 사는 이 시공간에서 자각하지 못한 빛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를 알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수도 있고, 혹은 꼭 빛과 어둠이 아니라 빛을 구성한다고 하는 요소들, 또한 어둠을 구성한다고 하는 요소들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그리고 어떤 사람이 빛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나한테는 어둠이라는 것, 혹은 그 반대라는 것, 더 나아가 그 빛과 어둠이 하도 뒤섞여 있어서, 어차피 그것은 획일화되게 딱 반으로 가를 수 없으며, 특히나 그 요소요소들은 사실 다… 그것은 좋고 나쁜 것도 아닌 거라는 것. 원래가. 그러한 것을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빽빽한 건물들이 그 자체로 나쁜가? 아닙니다. 시골 풍경은 그 자체로 유토피아인가? 아니죠. 그런 겁니다. 어떤 특정 요소가 뭔가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로 만드는 게 아니에요. 나한테 디스토피아인 걸 저쪽에서는 누가 유토피아라고 밀고 있어요.

그리고 또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그냥 재밌습니다. 왜냐하면, 참 정말 재밌는 것이, 누아르 정서가 없는 곳이 없는 모양이에요. 이 책에서 참 다양한 국가와 시대와 분야가 그 누아르 정서로 연결이 되거든요. 독일, 멕시코, 일본, 인도, 남아프리카 공화국, 중국이 등장하고요. 영화, 소리, 건축 등 다양한 분야가 주인공이 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영화가 압도적으로 두드러집니다. 그러한 이유에서 이번 시즌에 참으로 다양한 영화들을 다룰 수 있었습니다.


이제 챕터 1 들어가 볼게요. 제목. 1. 아포칼립스의 환영: <메트로폴리스>와 바이마르의 모더니티. 챕터 저자는 안톤 카에스입니다. 제목에 나온 <메트로폴리스>는 영화 <메트로폴리스>를 말합니다. 에피소드 49에서 다뤘던 영화입니다. 그리고 아포칼립스는 종말, 특히나 성서에 묘사된 종말을 뜻하는데, 디스토피아라는 단어나 누아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아포칼립스라는 단어는 장르를 묘사하는 단어이기도 하기 때문에, 아포칼립스라고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알맞다고 여겨집니다.

아포칼립스. 그것의 환영. 그것을 다룬 <메트로폴리스>. 이에 대한 챕터다. <메트로폴리스>라는 영화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양하듯이 이 챕터에 접근하는 방법도 다양할 텐데요,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챕터의 가장 첫 부분부터 딱 나오는 인용문으로 시작을 해보겠습니다.

“새로이 창조하려는 자는 파괴해야 한다.”라고 요제프 괴벨스가 자신의 소설인 ‘미하엘’에 썼다고 합니다. 괴벨스는 나치당의 프로파간다, 선전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창조에는 파괴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최초로 한 사람이 그인가? 아닙니다.

카에스 왈, “도시적 디스토피아와 파괴에 대한 매료는 (바벨탑이 파괴되는) 창세기와 (바빌론성이 전멸되는) 요한계시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을 지녔다. 1927년 1월 베를린에서 개봉한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는 창세기와 계시록에서 아포칼립스적인 이미지를 가져왔다…. <메트로폴리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포칼립스 영화는 고장 난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restart’하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재앙 뒤에는 새로운 시작, 즉 디스토피아의 대안을 약속하는 짧은 맛보기가 뒤따른다.”

또한 영화 <메트로폴리스>에는 마리아라는 인간 캐릭터가 나오는데, 이 마리아를 기계로 재현한 로봇 마리아도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로봇 마리아와 인간 마리아가 겉보기에 딱 똑같이 생긴 바람에 인간 마리아가 파멸될 위기에 놓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암시하는 측면이 있는가? 기계가 등장하면서 인간은 파괴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비단 마리아뿐만이 아니라, 이 영화 전체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은 기계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느라 말 그대로 죽어 나갑니다. 공장에서 폭발이 일어나서 대거 사망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메트로폴리스>가 매혹적인 이유는, “기계는 다 나빠. 기계가 있으면 사람은 사망함.” 이렇게 아주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카에스가 말하듯이, 기계에 매료되어 있는 아우라를 풍기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시각적으로 기계에 매료되어 있으면서도 플롯적으로는 기계의 위험성에 대한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그 만나는 지점에서 펼쳐지는 충돌이 아름답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실제로 책에 나오기를, 이렇게 나옵니다. “1960년대에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질문을 받자, 랑은 자신이 흥미를 가졌던 점은 동화 같은 결말이 아니라 기계들이었다고 답했다.”

네. 에피소드 49에서 영화에 대해 다뤘을 때는 이 “동화 같은 결말”에 대해 좀 더 직접적으로 다루는 측면이 있었어요. 그 시각으로 영화를 봐도 재밌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여러 번 볼 경우, 그리고 관객이 아니라 심지어 만드는 입장이면, 아무래도 기계에 더 매혹되었을 것이고, 랑도 실제로 그렇게 인터뷰를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정답이 없으니까. 영화의 플롯은, 아주 명료한 측면이 있고요. 정말 동화 같아요. 머리와 손이 심장으로 만나는, 그런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그 플롯을 펼쳐주는 시각 요소인 기계들은 정답이 없습니다. 그러니, 만드는 입장에서는 이 영화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생각했겠어요? 영화라는 것은 수년에 걸쳐서 만들어지잖아요. 그래서 명확한 플롯은 플롯으로서 두고, 보다 정답이 없는 이… 인간과 기계의 관계. 인간이 죽어 나가게 만드는 무서운 기계이면서도 너무나 장대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결국엔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기계. 여기에 매혹되었던 것이 어… 그럴 만도 하다.

이러한 상황이니. 과연 창조는 파괴의 결과로서 나오는 것인가? 파괴해서 창조를 한다고 하면, 그 창조는 창조가 아니라 파괴인가? 그리고 그 파괴는 파괴가 아니라 창조인가? 애초에 파괴와 창조는 한 끗 차이 아닌가?


나치당이었던 괴벨스의 말을 저자가 인용한 것도 의미심장한 것 같아요. 아까 초반에 독일 얘기도 잠깐 했었는데. 참. 나치라고 하면은 정말… 역사상 파괴로 치면 최고봉이었던 그룹들에 속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치의 그런 파괴적인 측면은 파괴적인 측면이지만, 동시에 그럼 나치가 파괴만 했는가? 아니에요. 그게 진짜 무서운 점입니다. 나치가 마냥 파괴만 했으면 그렇게 세력을 쥐었을 수가 없거든요. 파괴하는 와중에 창조를 했어요. 심지어는 창조를 하려고 파괴를 한다고 대놓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잖아요. 새 시대를 열 거라고. 새 인류를 열 거라고. 그리고 그 뒤틀린 창조성에 매료된 시공간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것이 무서운 것이며, 그것이 <메트로폴리스>에도 담겨 있습니다.

<메트로폴리스>에 나오는 발명가 로트왕이 그 예입니다. 로트왕이 로봇 마리아를 만든 사람이거든요. 인간 마리아가 어떻게 되든, 그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보다 완벽한 로봇 마리아를 만드는 데에만 주력을 합니다. 그런데 또 플롯상 흥미로운 점은 이겁니다. 그 로트왕이 끝에 가서는 인간 마리아를 쫓아댕기다가 죽어요. 그러니 이… 창조와 파괴의 얽히고설킨, 참 답 없는 주고받음 안에서, 그 자체 안에서 매혹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 매혹은 자각을 해야지 계속 매혹되든지 빠져나오든지 할 수 있습니다. 빠져나오고 싶을 수도 있죠. 그런데 그게 있다는 걸 알아야 빠져나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요. 예를 들어 기계는 너무 나빠. 인간들이 기계에 대체됨으로써 죽어 나가잖아. 하는 그런 어떤 러다이트적인 시각으로는 실제로 내가 죽습니다. 실제로 러다이트들은 망했잖아요. 큰 역사에서 보면, 러다이트들은,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졌습니다. 기계는 계속해서 번창했거든요. 왜냐? 기계가 인류에게 주는 혜택이 너무나 많고 아름다웠으니까. 그런데 그걸 하나도 인정 안 하고, 기계 나빠! 이렇게 그냥 해서는… 그래서는 나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나쁜 걸 좋게 생각하라는 건 아닙니다. 그건 별개예요. 나쁜 게 나쁜 건 나쁜 거로 둬야 돼요. 지금 긍정병 주장하는 게 아니에요. 기계의 템포에 인간을 끼워 맞추느라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건 <메트로폴리스>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현실이라고 불리우는 것에서도 벌어지는 일이잖아요. 그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바람직한 걸로 생각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퍼져나가고 있는지, 매혹 지점이 뭔지, 그걸 내가 알아야 같이 매혹이 되든지 말든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비슷하게, 나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제가 예전에 보고서 좀 와, 이 사람 용기 있다 했던 유튜브 영상이 있었는데, 제목이 이거예요. “Why Were The Nazis So Stylish? // Secret History Revealed.” 전에 언급한 적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치들은 왜 그렇게 스타일리시 했을까? 숨겨진 역사를 알려주마.” 뭐 요런 제목인데. 채널 제목이 “Real Men Real Style”로, “진짜 남자, 진짜 스타일”이라는, 어, 남성 패션에 대한 채널이죠. 그런데 딱 이 영상, 나치 유니폼에 대한 영상이 뷰가 10million이에요. 천만 뷰. 천만 맞죠? 천만. 이것이 놀랍지 않은 것이. 어…. 저는 정말 이분이 용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치가 아주 죽일노무시키들인 건 맞잖아요. 그런데 이것을 그냥 2024년의 관점에서 그 당시 시공간에 있었던 사람들더러 호로새끼라고, 그냥 그렇게 넘기기는 정말 쉽습니다. 좀 더 어렵고 좀 더 유용한 건 이거죠. 그렇게 죽일노무시키들인 게 분명했으면, 그때 그곳의 사람들은 왜 넘어간 건지 질문해보는 거. 그리고 그 답 중 하나가, 이 유튜버의 생각에는, 나치 유니폼의 세련됨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영상을 한번 보시면, 유니폼이 정말 아름다워요. 21세기에 나온 영화들에도 나치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때 그 캐릭터들이 입는 유니폼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 어떤 다른 군복보다 더 알아볼 수 있는, 어떤 브랜드적인 세련된 특징이 있다고요. 이게 정말 무서운 게 아니냐는 거죠.

댓글도 한번 읽어 보시면, 뭐… 자기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나치 시대에 거기 살았는데, 그때 그 청년들이 얼마나 친절했는지에 대해 얘기해 줬다. 이런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합니다. 그렇잖아요. 이것이 “괴물성” 책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와도 통합니다. 대개 연쇄살인마나 그런 어떤… 끔찍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굴에 “나 끔찍” 이렇게 쓰고 다니지 않아요. 그래서 끔찍한 일을 하기도 전에 끔찍하다고 사람들이 피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안 끔찍한 측면이 있어서 오히려 끔찍해질 수 있으며, 정말 그렇게 대놓고 끔찍하다면 사실은 그렇게 끔찍할 수가 없다는, 언뜻 들으면 모순 같은데 사실은 그렇게 양상이 펼쳐지는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싫어하는 걸 좋게 생각하라는 뜻 아닙니다. 내가 싫어하는데도 그게 남들한테 통하는 거 같으면, 진짜 너무 짜증 나도 그게 왜 통하는지 알아내서, 그걸 무기로 쓰는 게 유리합니다. 물론 짜증 나죠. 어… 저도 굉장히 싫어하는 어떤 이 세상의 그런 것들이 있는데, 지금 현재에 있는 것들 중, 그것들이 왜 성행하는지 저는 몰라요. 이해가 안 가. 그냥 100% 쓰레기 같아. 그런데 뭐가 있어서 통하는 것일 거잖아요. 그걸 내가 알고서는 피하든지, 이용하든지, 나한테 통합해서 쓰든지. 할 수 있는 거죠.


창조와 파괴의 얽히고설킨 고리 측면에서 <메트로폴리스>에 등장하는 다른 한 쌍의 요소들은 기술과 흑마법입니다. 그러니까, 기술과 인간이라는 어떤, 서로 적대적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적대적이지 않은 관계가 있는 동시에, 또 기술과 흑마법이 있어요. 흑마법과 인간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진 않는 것 같은데, 기계를 통해서 흑마법과 인간도 연결됩니다. 인간-기술-흑마법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기술은 파괴적이고 무서운 것인데, 인간을 통해 창조되었고, 심지어 미친 과학자 로트왕이 작업하는 방식을 보면 흑마법으로도 창조되는, 정말 어… 과학과 마법 사이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장면들이 영화에 나옵니다.

게다가 몰로흐라는 고대 신이 공장의 폭발 장면에 등장하면서, 기계와 마법은 애초에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인상까지 심어줍니다.

이러한 모든 장면들을 보다 보면. 그러니까 어… 메트로폴리스는 큰 틀의 서사가 아주 명확해요. 머리와 손이 심장을 통해 만나서 하나 되는 이야기고, 러브 스토리예요. 이것이 굉장히 강점인 것 같아요. 이 명확성 덕분에 아무 별다른 분석 없이도 영화를 재밌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면 장면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파고 들어가자면 또 재밌게 파고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게 그러니까… 이것도. 명확성과 모호함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고, 명확해서 모호하고 모호해서 명확한 게 있어요, 이 영화에.

기계와 인간은 과연 대립적인가.

기술과 마법은 과연 대립적인가.

머리와 손은 과연 대립적인가.

책에 <메트로폴리스>에 대해서 이렇게 나옵니다.

“도시 경관의 로앵글 파노라마 숏은 위아래로 움직이는 피스톤 세 개의 클로즈업에 중첩된다. 피스톤의 축과 삼각형 상단은 도시를 채운 피라미드형 고층 빌딩들의 모양을 반전시키고, 순전히 영화적 수준에서 매끄러운 건물과 금속 기계 사이의 숭고한 친연성을 강조한다. 피스톤의 리드미컬하고 수직적인 움직임은 높은 구조물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런 식으로 영화가 기계의 표현에 엄청난 공을 들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넋 놓고 바라볼 만한 광경인지. 그런데 또 동시에 이런 장면도 나와요.

“프레더는 랑이 거대한 폭탄 폭발로 연출하는 산업 재해를 목격한다. 폭발의 힘은 한 노동자를 공중으로 던져 올리고, 다른 노동자들은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 프레더는 그들을 향해 달려가지만, 섬광과 극심한 연기에 눈이 멀어 뒤로 튕겨 나간다. 충격을 받은 그는 환각을 보기 시작한다. 기계실은 오리엔탈리즘적·성서적 시나리오로 바뀌는데, 여기서 그는 노동자들이 대대 단위로 고대 신 몰로흐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모습을 본다. 저항하는 노동자들은 계단으로 끌려 올라가 거대한 구멍에 던져진다. “

어떻게 보면 모든 요소가 뒤섞여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정말 이 영화의 너무나 강점인 명확한 러브스토리 덕분에, 영화를 후루룩 보면, 어… 왜 이렇게 <메트로폴리스> 얘기들을 하나 의아할 정도로 명확해요. 한마디로 프레더가 마리아한테 빠져가지고 방방 돌아다니는 얘기거든요. 근데 그 아래로도 파려면 많이 팔 수 있다.


또 하나의 대립 아닌 대립이 있습니다. 특권층과 노동층 사이의 관계입니다. 초반에는 노동층은 창조에 쓰이는 도구 취급을 받는 듯해 보이고, 특권층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면서 파괴를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동시에, 모순적이죠. 창조를 강요하는 것이 특권층이고, 노동층에게는 인위가 없어 보입니다.

한편 프레더라는 우리의 주인공은 특권층인 데다가 완전히 풋내기입니다. 이 청년은 메트로폴리스의 고층 빌딩에 사는데, 도시의 밑바닥 그리고 지하에서 노동자들이 죽어 나가는 걸 하나도 몰랐어요. 이런 이유로, 공장에서 폭발이 일어났을 때 가장 충격받고, 가장 파괴를 파괴로 보는 인물이 프레더입니다. 노동자들은 놀라지 않아요. 노동자들한테는 이 일이 너무 흔해서, 너무 늘상 있는 일이라서, 누가 좀 죽어 나가도 놀라지 않아요. 프레더가 놀랍니다. 그리고 프레더가 아버지한테 달려가서 따집니다. 저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 알았냐고. 아버지도 놀라지 않아요. 아버지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영화의 아주 후반부까지도 노동층이 공장에서 일하니까 창조를 하는 것도 맞지만 그들이 파괴자라는 것도 동시에 등장합니다. 책 왈, “이 영화는 억압받은 익명의 대중이 갑자기 통제할 수 없는 폭도가 되어, 그들이 지금껏 건설하느라 애썼던 모든 것을 어느 한 자기 파괴적인 순간에 파멸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씬에서 나오는 끝에서 두 번째 이미지는 특히 강렬하다. 높이 든 주먹들이 바다를 이루는데, 그 파괴력을 강조하기 위해 낮은 각도에서 촬영되었다.”

노동층도 창조하며 파괴하며 창조하며 파괴하고, 특권층도 창조하며 파괴하며 창조하며 파괴한다.

그러면 대립 구도를 만들어야만 한다면 그 대립은 특권층 대 노동층이 아니고, 메트로폴리스라는 대도시가 돌아가는 구조를 알고 있었던 자들과 몰랐던 프레더 사이의 대립이 아닌가? 하지만 또 프레더가 동떨어져 있는 섬은 아니니까, 특권층인 건 맞고. 그런데 또 프레더가 사랑에 빠진 마리아는 노동층이고. 그러나 또 그러면 마리아는 그냥 노동층인가? 아닙니다. 마리아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말 그대로 마리아, 성스러운 대우를 받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리아는 프레더처럼 뭐가 뭔지 몰랐던 풋내기보다 더 특권층이에요. 마리아는 나름대로 빅픽처가 있거든요, 꽤 초반부터.

그리고 프레더가 새 시대를 여는 것은 어떠한가? 구시대를 파괴하면서 엽니다. 그러면 정말로 괴벨스의 말이 맞는가? 그 인류 역사에서 가장 파괴적이었던 무리들 중 하나의 일원이었던 자가 한 말이? 창조를 하려면 파괴를 해야 하는가? 뭐 하나가 끝나야 창조를 하는가?

대립 아닌 대립 또 하나 들어볼게요. 끝도 없어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음. 디스토피아와 아포칼립스 장르가 어… 장르로서 정립된 시기 때문인지, 좀 현대에 들어서라고 느낌적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뭔가 SF와 약간이나마 관련이 있는 느낌. 그리고 따라서 기술이 발전하면서 생기는 문제에 대한 경우가 많다는 그런 느낌. 예를 들어 국가가 인구를 감시한다든지 하는. 국가가 인구를 효과적으로 감시하려면 카메라 등 기술이 필요하잖아요. 그런 기술이 나타나고 나서야 디스토피아가 가능해지고, 디스토피아이기에 아포칼립스가 가능해지는 측면이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음… 정말 그냥 어쩌다 보니 장르가 구분 지어지게 된 방향 때문에 생기는 느낌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판타지물에 디스토피아가 등장해도 대개 디스토피아로 분류 안 하거든요? 오크랑 엘프가 등장하면 그 세계가 디스토피아여도 판타지로 분류를 하는 경우가 더 많단 말이죠. 그것이 이야기 소비자들이 기대하는 장르 분류 방식이니까. 아포칼립스도, 오크랑 엘프가 등장하면서 세상이 멸망해도, 그것을 판타지로 분류하지 아포칼립스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잘.

그래서 디스토피아든 아포칼립스든 어떤… 기술로 인하여 근미래 혹은 먼 미래에 망하는 시나리오. 망하거나 망할 위기에 놓인 시나리오. 이런 느낌을 풍기는데. 그렇다면 정말로 그러한가. 정말로 기술이라는 요소가 필요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챕터의 필자인 카에스가 그 연결고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바빌론까지 가거든요. 성서에 나오는 바빌론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카메라나 공장 같은 기술은커녕 인쇄 기술도 보편화되지 않던 시절의 도시 아닙니까? 그 바빌론에 대해 얘기를 합니다.

“랑은 성서의 바벨탑을 도시 파괴 판타지의 가장 오래된 모델로 삼고, 그 전설을 영화 속 영화로서 서사에 포함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판타지는 장르로서의 판타지가 아니라 말 그대로 환상. 환상을 말합니다.

카에스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바빌론부터 뉴욕에 이르기까지, 대도시는 항상 집단적 상상력이 파괴의 이미지를 투사할 수 있는 스크린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어두운 세상의 초상, 특히나 아포칼립스적인 상징은 절대적 기술의 발전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대도시성 때문이 아니냐는 주장인 겁니다. 공장이 20세기에 들어서 생겼기에 그제서야 도시 파괴에 대한 환상이 생겨난 게 아니라, 아주 옛날부터,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그때에도 당시에 가장 대도시였던 바빌론에다가 파괴의 환상을 투사했다.

책에 이렇게 나옵니다. “성서 시대부터, 바벨탑은 자연 질서에 도전하고 인간의 규모를 뛰어넘는 대담하고 저항적인 프로젝트의 원형으로서 기능했다. 신화와 사실, 건축적 환상과 고고학적 현실 사이를 오가는 바벨탑은 가장 오래된 선지자적 건물이기도 하지만, 가장 최신의 것이기도 하다. 그 안하무인인 수직성이 계속해서 현대에 환생한 바벨탑들에 영향을 주며, 더욱더 대담한 고층 빌딩들로 탄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어… 흔히 하는 말들 있잖아요. “요즘 참 살기 힘들다.” 아니면 “세상이 변했다.” 그런 각종 말들. 아니면 뭐 “요즘 애들은 이렇다는 둥 저렇다는 둥.” 그런데 그 얘기를 천 년 전, 2천 년 전에도 하고 있었을 거란 얘기예요. 앞으로도 별다를 바 없을 거고요. 네. 미래에서 멸망을 보는 현상은 과거부터 있었다. 내가 지금 있는 현재가, 과거에 누군가가 ‘이쯤 되면 멸망하겠거니’ 했던 바로 그때다. 그러니 과거랑 현재랑 미래는 대립된 개념이 아니다.

심지어 영화 내부와 외부도 동떨어지지 않았다.

책 왈, “마치 도시의 비인간성에 반응하듯, 영화는 굴뚝으로부터 이제 혼자가 된 저승사자Grim Reaper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카메라를 (그리고 프레더와 우리, 즉 관객을) 향하고 있다. 낫을 높이 든 그는 눈앞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베어버릴 작정이다. 프레더에게로 컷이 돌아가자, 겁에 질린 그의 표정이 드러난다. 그의 몸과 팔은 마치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앞으로 뻗어 있는데, 이때 인터타이틀이 선언한다. “죽음이 도시를 엄습한다Der Tod ist über der Stadt……!” 해골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베는 동작에서 이미지 전체에 거대한 스크래치를 생성한다. 이것은 마치 프레더, 그리고 그와 함께 필름 재료의 기반인 셀룰로이드의 유제 자체를 지우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물질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아방가르드 기법인 이 과격한 마모는 종말론적 시나리오가 도시뿐 아니라 관객을, 심지어 영화라는 매체까지 위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이야기가 영화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 관객인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렇게, <메트로폴리스>. 카에스는 이 챕터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오늘날에는 랑의 <메트로폴리스>가 언급되거나, 각색되거나, 스푸핑된 영화가 100편이 넘는다. 이 영화는 오늘날까지도 도구적 합리성의 높은 대가와 함께 도시 모더니티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엄함의 전형이며, 고층 빌딩들이 간극을 메울 수 없는 계급 분리, 기계에 대한 비합리적인 의존, 소외적이며 착취적인 노동, 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덮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노동자들이 (10년 전의 군인들처럼) 불필요하며, 사실상 로봇으로 대체될 것임을 보여준다. 발명가인 로트왕은 자신의 안드로이드를 공개할 때 “기계는 미래의 노동자”라고 자랑스럽게 밝힌다. <메트로폴리스>는 더 나아가 모더니티의 도구적 이성이 만들어낸 비인간적인 조건에 대한 반대가 그 자체로 종말적 결과를 낳을 것임을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란은 가능하기는 하지만 현명하지 못하고 비효율적이며 심지어 끔찍하기까지 한 것으로 표현된다. 거대한 도시 기계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감싸기 때문에, 저항은 일시적인 오작동에 불과한 듯하다.”

카에스는 <누아르 어바니즘>이라는 이 책의 주제에 적합하게, 좀 더 누아르성에 집중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 같아요.


그러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대도시와 그 기계들은 누아르합니까? 누아르하기도 하고 누아르 안 하기도 합니까? 아니면 누아르하긴 한데 약간만 그러합니까?

저는 음… 제 결론이 모든 게 하나라는 뜻인가? 그런 건 아닙니다. 하나가 아니라서 하나임을 알 수 있다는 게 모순적인 것 같지만 진실이라고 여깁니다. 이러한 모든, 어… 과거 현재 미래가 결국 대립되지 않았고 머리와 손이 대립이 아니고 기계와 인간이 대립이 아니며 기술과 마법도 한 끗 차이라는 그 얘기가, 그 모든 게 그래서 뭉뚱그려져서 하나라는 결론이 아니라, 따로라서 그 안에서 하나라는 얘기입니다. 음양 상징처럼. 얘가 없으면 쟤도 없으니까, 얘랑 쟤가 따로인 게 맞는데 동시에 얘랑 쟤는 같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나뉘어져 있지 않았으면 하나라는 걸 느끼지 못하니까요. 차가운 게 없으면 뜨거운 걸 모르고 뜨거운 게 없으면 차가운 걸 모르는 것처럼.

그러니까 우리는 이 분리됨을 이용하면 됩니다. 분리됨이란 게 정말로 분리가 되어서 분리인 것이 아니라, 분리된 요소들이 <메트로폴리스>라는 하나의 이야기로 뭉쳐졌듯이, 그것들이 실제로 떨어져 있는 것임이 아님을 알면 된다는 것 정도가 제 개인 결론이고, <누아르 어바니즘> 책 내에서 챕터 1의 저자인 안톤 카에스는 좀 더 누아르에 집중된 측면에서 <메트로폴리스>를 해석했다. 해석은 때에 따라 무한히 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메트로폴리스>는 워낙 너무나 많이 언급되는 영화라서, 꼭 보시면 좋겠습니다. 한번 보시면 어… 약간 심리 테스트 같아요. 너무 많이 언급되는 영화니까, 이 영화에서 각각의 사람들이 뭘 보는지를 보면 약간 심리 상태를 알 수 있다. 마치 바빌론성이나 뉴욕 같은 대도시,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아는 대도시여야 거기다 파괴의 판타지를 심을 수 있듯이, 심리 테스트용 영화도, 좀 많은 사람들이 봐야지 그게 거울로서 기능을 하잖아요. 그런 느낌이랄까. 게다가 이제는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퍼블릭 도메인에 속해 있는 영화라서, 음… 이 법은 국가마다 좀 다르대요. 아직 퍼블릭 도메인이 아닌 나라도 있을 수 있다는데, 그 설명이 하도 구구절절해서 뭐라는 건지 제가 변호사가 아니라서 그 법적인 세부 사항은 자세히 이해가 안 갑니다만, 점점 더 많은 국가에서 <메트로폴리스>란 영화는 퍼블릭 도메인으로 나올 것이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걸 보고 각기 다른 해석을 할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또 2차적으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저 사람은 <메트로폴리스>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그리고 에피소드 마무리하기 전에 잠깐 덧붙이자면요.

책 전체적으로, 용어의 경우, 영어 그대로 가져온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이혜원 대표와 참 많은 얘기를 했어요. 업계라고 해야 하나? 미학계라고 해야하나? 혹은 미술계, 예술계에서 굳어진 영어 표현들이 많은 데다가, 이 책에 참여한 필자들이 챕터마다 다른데, 각기 살짝씩 다른 상황성을 갖고 단어를 쓰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사전 정의가 있어도, 단어라는 게 모두가 같게 쓰지 않습니다. 이혜원 대표가 이쪽을 전공을 했으니까, 논문에서 영어를 주로 쓴다고 하는 경우에 영어 발음 그대로 따랐고, 저의 번역 취향이 그렇기도 해요. 어… 저는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하는 것도, 주요 단어는 뜻을 번역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그걸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일본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스시. 아니메. 이모지. 게이샤. 본사이. 하이쿠. 미소. 모찌. 사케. 이런 거 그냥 밀고 갔잖아요. 그래서 실제로 영어로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그런데 막걸리 rice wine. 떡 rice cake. 이러지 말아야 한다는 게 저의 취향입니다. 그리고 특히 언니, 오빠 이런 단어 있죠? 다행히 정말, 한국의 문화예술을 가장 전세계적으로 알리는 K팝 스타분들 덕분에 이제 unnie oppa는 그냥 어… 디폴트가 된 거 같아요. 케이팝을 팔로우하는 영어 사용자가 아니더라도 많이들 알게 된 단어 같아요. 이 언니라는 단어를 older sister라고 계속 번역을 할 거냔 말이죠. unnie가 말 그대로 ‘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 형제’라고 할지라도, 언니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그 모든 것은 겨우 고작 ‘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 형제’가 아니잖아요? 누군가를 언니라고 부른다는 건, 여자 형제만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라 길 가다가 어떤 모르는 여자를 언니라고 부르기도 하잖아요? 이런 경우. 그리고 정말…. 떡 같은 경우는요. 떡 케이크, 어떻게 할 건데요? 떡을 rice cake으로 번역하기 시작하면, 떡 케이크는 어떻게 번역할 거냔 말이죠. rice cake cake입니까? 그러면 한국어 사용자는 왜 cake 그대로 쓰나요? 케이크, 그냥 쓰잖아요. 한국어 사용자가 케이크를 케이크라고 쓰듯이, 영어 사용자도 떡이라는 단어, 배우면 됩니다. 배우라고 하면 돼요. 이거 너희 나라에 없는 거니까 배우라고.

한편 공상 과학이라는 단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Science fiction을 가리키는 말로 아예 굳어져 있지만, 잘못된 번역입니다. 애초에 처음부터 잘못된 번역. Fantasy and Science Fiction이라는 잡지의 제목을 일본에서 잘못 번역한 것이 한국에 들어왔다고 저는 들었고요.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Science fiction과 공상 과학은 순서도 잘못됐고 뜻도 잘못됐고 하여간에 SF 쓰는 사람으로서 모욕적이다. 공상이 아니다. 판타지도 공상이 아니지만서도. 판타지와 공상은 완전 어감 자체가 다른. 하. 하여간에 그런데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 장르에 대한 논의도 등장하기 때문에, 단어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네. 그리고 어떤 나라에서 특정 업계가 유독 빨리 번성을 했기에 그 나라의 언어 표현이 국제적으로 굳어진 경우에, 그걸 그대로 쓰는 게 가장 정확하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외국인 친구 있으시면, 막걸리, 떡, 언니, 오빠, 배우라고 하면 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러하다. <누아르 어바니즘>의 인트로덕션과 챕터 1,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창조와 파괴. 기타 등등의 대립.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

그렇지만 결국에 우리는 선형 타임라인에 있는 점으로서만 존재하진 않는다. 나는 항상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는 2024년 몇 월 몇 일이 아니고요 딱 그냥 지금 여기입니다. 나는 내 한평생 지금 여기에밖에 없었다. 그 측면에서 <메트로폴리스>를 봐도 재밌습니다. 사실 모든 것들을 그렇게 보면 인생이 재밌어요. 조금 연습이 필요하지만, 연습하다 보면 되더라. 무엇보다, 유리해지는 것 같다. 나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요소요소들에 얽히지 않게 되니까.

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Kevin Conlon – In the White City
  • David Gives – DuDa – David Gives Cover
  • Steve Poloni – Five to One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 2024 한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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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