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73] <누아르 어바니즘> 2. 지옥 같은 소리: 디스토피아적 소리를 넘어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은 책 <누아르 어바니즘>의 두 번째 챕터를 다룹니다. 제목: 2. 지옥 같은 소리: 디스토피아적 소리를 넘어. 챕터의 필자는 제임스 도널드입니다. 이 챕터는 시작 부분부터 웃겨요.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의 인용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마침 소리 내지는 소음에 대한 챕터를 다루는 오늘, 여기 남부 캘리포니아에는 비가 옵니다. 예전에 한 번 비가 많이 와서 비 소리가 녹음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오늘도 그러합니다. 왜냐하면요 여러분, 제가 사는 곳이 지붕이 많아요. 집의 지붕 그 자체도 있고요, 온갖 창문에 다 미니지붕이 달려 있어요. 그래서 비가 오면 저는 와우, 정말이지 드럼 안에 앉아 있는 그런 기분이 듭니다. 집의 그 어떤 방에서도 소리가 안 들리는 곳이 없어요. 지하부터 윗층까지. 일반 방부터 화장실에서 골방이라고 부를 만한 창문도 없는 방까지 비소리가 다 들립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에 가기 전에 최대한 녹음을 미리 해두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늘 빗소리가 좀 들리실 수도 있습니다.

예. 그럼 쇼펜하우어 및 다른 여러 사람들의 소음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것에 대한 오늘의 수다, 시작할게요.


여러분? 쇼펜하우어가 얼마나 웃긴지 아십니까? 쇼펜하우어는 유머 감각이 엄청나요. 철학자라는 카테고리에 제가 별로 흥미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웃기다.

참… 철학자라는 카테고리는, 특히나 21세기 초반까지 압도적으로 그 수가 훨씬 많은 남성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여성 혐오를 하는 와중에, 집구석에 처박혀서 어차피 여자를 만나지도 못한 게 너무나 명백한데 뭘 보고 혐오한다는 건지, 키스를 책으로 배우듯이 혐오를 책으로 배운 건지, 심지어 그게 아니라면 자기 주변에 여자를 엄청 만나는 남자인 친구라도 있었던 건가? 싶다가도 그런 친구조차 있었을 것 같지도 않을 정도로 방에만 앉아 있는 모양새인 게 뻔한데, 무슨 자신감으로 심지어 논리인 척하면서 인구의 50%를 혐오하나? 싶은, 참 기가 찬 경향이 강합니다. 굉장히 비이성적인 걸 이성인 줄 알고 굉장히 비논리적인 걸 논리인 줄 아는 경향도 강하고요. 근데 그것을 그냥 그 시대에 마침 철학할 수 있는 그 인구의 카테고리로 태어나서 철학을 한 것뿐인 것 같은 철학자들이 너무 많아요. 논리 이성 같은 거 안 따지는 웬만한 예술가보다 더 얕은 생각인 경우도 꽤 있고. 그냥 철학자다, 해서 철학자인 것 같은? 별로 그닥.

그런 경우, 옛날에 그들이 얼마나 잘나갔는지 모르겠는데, 옛날의 그 영광에 기대어 언급해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요즘 것도 얼마나 좋은 게 많은데 굳이?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특히나 옛날에 그 사람들이 생각을 대신 해주지 않았으면 요즘 사람들은 새로이 비슷한 생각을 못 했을 거라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주장에 심히 매우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건 마치, 학교에서 옛날 철학을 안 배운 뭐… 예를 들어 글을 모르는 어떤 사람. 학자가 아닌 상인이라든지 농부라든지 공장 노동자라든지 하는 사람들은 새로이 자신만의 삶의 철학을 터득할 수 없을 거라는, 그런 의미이기 때문에, 매우 동의하지 않아요.

어떤 친구가 저한테 예전에 했던 말이 있는데, 그 친구는 제법 가방끈이 길어요. 그 친구가 말하기를, 그… 철학 한다고 모인 사람들을 보면, 소위 말하는 배운 자들이 얼마나 못 배웠는지를 알 수 있다고. 이게… 어… 저는 그 무리에 직접 있어본 적은 없고, 철학을 하려고 모인 사람들이 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서도, 지금까지 제가 접한 철학자란 사람들의 글을 보면, 어떤 경우에는 아, 정말 그렇다 싶어요. 이 친구 본인도 철학 관련된 걸 하려고 가방끈이 긴 친구였는데 그렇게 말을 할 정도로. 한마디로 정말, 이 친구도 말했듯이 “철학을 한답시고” 모인 자들이 가장 비철학적이었단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임 드리밍에서 구구절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이유 중 하나도… 그런 겁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은 무슨 학자여야지 하는 생각이 아니고. 심지어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 생각도 아닙니다. 글을 읽을 수 있으면 도움은 될 거예요 아마. 왜냐하면 나의 생각을 남한테 알리고 남의 생각을 훑어보는 데에 시각적으로 후루룩 살피는 게 효율적이라서요. 지금 이 팟캐스트 형식 같은 경우, 소리로 듣다보니까 다량의 정보를 훑기에는 좀 부적합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글자로 된 형태의 정보는 훑는 데에 참 유리해요. 그래서 글을 알면 참 좋긴 한데, 그렇지 않더라도 뭐. 아니 그러면 문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생각을 안 했는가. 그럴 리가. 생각 다 했죠. 무슨. 문자는 문자고 생각은 생각이지.

하여간에 그래서 저는 철학자, 특히 옛날 철학자, 심지어 근대 철학자도 별로… 굳이 찾아 보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일부러 안 읽진 않지만 일부러 찾아보진 않고. 특히나 이미 예전에 본 철학자이고 이미 별로이면, 뭐, 철학자라고 특별 우대를 해줄 필요는 없으니, 다른 모든 소설책, 영화, 유튜브 채널 등등과 마찬가지로, 읽다가 재미 없으면 안 읽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봤는데 별로였으면… 그냥 안 읽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좋았고 지금도 좋은, 제가 조금 관심 있고 조금 실제로 글이 좋아서 보이면 때때로 읽은 철학자가 세 명이 있었으니, 그것은 비트겐슈타인, 바슐라르, 그리고 쇼펜하우어입니다. 그리고 그 셋 중 쇼펜하우어가 제일 웃겨요. 우스운 게 아니고요, 유머 감각이 있어서 웃깁니다. 풍자적인, 비꼬면서, 과장되게 웃긴. 저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에세이라든지 소설을 읽어도 그런 강한 목소리가 있는 경우를 좋아합니다.

그런 쇼펜하우어가 <누아르 어바니즘>의 이 챕터 제목에 알맞게 ‘지옥 같은 소리’에 대해 보인 반응에 대한 인용문이 책에 등장하는데, 일단 바로 그 전에, 챕터의 필자인 도널드가 이렇게 말합니다.

“1844년,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 지옥이란 뉘른베르크 거리에서 채찍이 찰싹대는 소리였다.”

그러고서 이제 쇼펜하우어가 한 말이 나옵니다.

“폭이 좁고 소리가 울리는 도시의 거리에서 채찍을 찰싹대는 지옥 같은 소리야말로 소음 중에서 가장 불온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그것은 삶의 모든 평화와 감성을 빼앗는다. 채찍이 찰싹대는 것을 용인하는 것만큼 인류의 우둔함과 무분별함을 명확히 하는 것도 없다. 이 갑작스럽고 날카로운 찰싹임은 뇌를 마비시키고, 모든 명상을 파괴하며, 생각을 살해한다. 머릿속에 생각이란 게 있는 자라면 이 소리에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모든 찰싹임이 어떤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방해하는 게 분명하다. 그 활동이 제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그렇다. 또한 사상가의 명상을 교란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마치 머리를 몸으로부터 절단하는 사형 집행인의 도끼와 같다. …… 망치질, 개 짖는 소리, 아이들의 비명 소리는 가히 끔찍하다. 그러나 생각의 진정한 살인자는 채찍의 찰싹임, ‘단 하나뿐’이다. 때때로 찾아오는 사색을 하기 좋은 모든 순간을 파괴하는 것이 그것의 목적이다.”

정말 이… 정말로다가 쇼펜하우어가 얼마나다가 소음을 경멸하는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거 너무 좋아해요. 아뉘 정말 쇼펜하우어한테는 너무 지옥 같았다고요. 어떤 철학자들은 자기가 그냥 막 싫어하는 걸 갖다가 되게 막 그걸 이성적인 것처럼 막 그러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그런 경우를 싫어하고, 차라리 쇼펜하우어처럼 하는 게 낫다고 여깁니다.

도널드가 쇼펜하우어의 이 말에 대하여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렇게나 과하고 통렬한 비판을 논리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쇼펜하우어가 한 말을 ‘화풀이’라고 불러요. 마치 화풀이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다는 듯이.

그런데 제 말은 이거죠. 쇼펜하우어는 논리인 척한 적이 없다고. 게다가, 화풀이가 오히려 나아요, 제 생각에는. 화풀이가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다른 인용문의 경우에는 뭐가 해결됐는가? 아니 별로… 별로 안 그런 거 같은데. 적어도 쇼펜하우어는 솔직합니다. 그냥, 그냥 소리가 싫었던 거야 쇼펜하우어 형님은. 여러분 쇼펜하우어 형님 어떻게 생겼는지 아십니까? 한번 사진을 찾아 보시면요, 와우, 그의 헤어스타일은 정말, 어… 이 헤어스타일은 제가 예전에 철권인가? 제목이 철권이었나?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철권에서 봤던 어떤 도사의 헤어스타일로, 어… 저는 지금 쇼펜하우어 형님을 놀리는 게 아니고요, 정말로 철학자 중에서 그나마 좋아해요. 왜냐하면 너무나 강력하고. 너무나 분명하고. 쇼펜하우어는, 어… 제가 읽었던 쇼펜하우어 중에서 쇼펜하우어가 고귀한 척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어요. 빡쳐한다는 느낌은 자주 강하게 받는데, 저는 그것을 좋아해요. 왜냐하면 고귀한 척하는 가운데에 고귀하는 데에 실패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제가 몇 번 언급한 말 중에 이게 있지 않습니까? “착한 척은 필패한다.” 그냥 싫으면 싫은거고 나쁘면 나쁘다고 하지 그거를 어떻게든 점잖은 척 말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그냥 일상생활에서 저 사람이 속으로 욕하는 거 다 티나. 그런데 뭘 고귀한 척을 하는 건가. 도대체 그게 누구한테 통한다고 여기는 건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저렇게 숨기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데 쇼펜하우어를 제가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압도적으로, 정말로, 이 아저씨의 말은 그의 헤어스타일만큼 명료합니다. 아저씨의 헤어스타일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데 가운데가 비어 있어요. 그의 헤어스타일은 마치 그의 삶을 대변하는 듯한, 정말이지 명확한. 모 아니면 도. 이거 아니면 저거. 쌈빡 그 자체라서. 저는 정말로 쇼펜하우어를 좋아합니다. 쇼펜하우어의 글 중에 좀 말랑말랑한 글들도 있거든요? 그리고 막 딱 철학 서적이라고 나온 경우에도 서문이 웃긴 경우. 이런 경우가 있어요. 아저씨가 아주. 목소리가 있다. 심지어 쇼펜하우어는 지금 태어났어도 틱톡 같은 도구를 잘 사용했을 것 같아요. 욕하면서 썼을 것 같아요. 근데 잘 썼을 것 같아요.

아무튼 지금 이 챕터에서 쇼펜하우어는, 아까 그 인용문에서 말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논리를 들이대는 게 아닙니다. 그냥 소리가 싫었나 보죠. 되게 시끄러웠나보죠. 생각해야되는데. 하는 일이 생각인데 이노무시키들이 채찍을 찰싹거리니까 쇼펜하우어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아무튼 그리고 챕터 저자인 도널드는 이렇게 묻습니다. “지옥이 타인의 소음이라면, 도시적 유토피아는 어떤 소리를 낼까?”


소음이라고 하면, 아파트가 많은 한국에서는 층간 소음이 자주 논의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러면 아파트가 없는 데는 소음이 없는가? 아닙니다. 물론 층간 소음은 정말 지옥 같지만, 소음은 층간에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국에서는 ‘층간 소음’이라는 말이 아예 굳어질 정도로 층간에 소음이 있다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편인데, 놀랍게도, 소음을 소음으로 안 치는 경우가 있어요. 저의 추측으로는 아까 언급한 쇼펜하우어는 그 사실에 더 심히 빡친 게 아닌가. 즉, 뭐냐 하면, 소음 그 자체의 어떤 크고 작음보다도, 소음이 분명한데 그걸 소음 아닌 척하는 행태에 심히 빡이 친 게 아닌가.

층간소음도 그렇지 않습니까? 층간에 소음이 발생해서 분노가 치미는 측면이 있는데, 거기에 얹어서, 분명 층간 소음인데 소음 아니라고 그러면 그게 정말 진짜 혈압이 솟구치는 분노의 지점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것이 어… 직접 겪을 때는 정말 지옥이고 슈방구이지만, 이 책은 일단, 책이란 글로 된 매체니까,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참 소음에 대하여 나름대로 이 분노 및 흥미를 잘 정리해서 표현하려고 애쓴, 그러한 인용문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그것이 이 챕터가 주는 재미의 포인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입니다.

책 왈. ““문화는 침묵을 향한 진화다!”라고 문화 철학자이자 사회 비평가인 시어도어 레싱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1908년 책인 『소음: 우리 삶의 소리에 저항하는 장광설』에서 선언했다.”

책 제목 자체가 재밌잖아요. 『소음: 우리 삶의 소리에 저항하는 장광설』. 이… 여기서부터 느껴지는 분노. 아주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분노가 있다고요.

레싱은 이렇게 말했대요. ““나는 거리 상인들과 신문팔이들의 외침을 경멸한다. 나는 교회 종소리를 경멸하고, 공장 사이렌의 무의미한 소음을 경멸하고, 무엇보다 가장 경멸하는 것은 악취 나는 자동차들이다.” … “세련되고 교육받은 사람은 항상 침묵을 통해, 그리고 시끄러우며 규율이 없는 생활 방식에 대한 적대감을 통해 빼어남을 나타낸다.” … “광고와 굴뚝, 그리고 전선으로 가득한 풍경에서 ‘문화의 상징들’을 추방하라. 그러면 적어도 한 장소라도 거룩하며 때 묻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회중시계를 훔치기로 결심했다. 체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감옥에서라면 최소한 양탄자 치는 소리, 피아노 연주, 자동차 경적, 축음기, 그리고 전화기로부터 평화를 누릴 것 아닌가.””

저는 어… 아 쇼펜하우어도 그렇고 레싱도 그렇고. 그들의 절절한 사연이 너무나 느껴집니다. 이 정도의 솔직함은 소설에서도 어떤 때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심지어 레싱은 하노버에서 “독일 소음 방지 협회”를 창립했대요. 진짜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챕터 2의 저자인 도널드는 쇼펜하우어와 레싱을 비꼬는 듯한데, 저는 전혀. 하나도 비꼼직하다고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레싱을 비꼬는 다른 누군가의 말을 인용했는데, 그 부분이 재밌어요.

책 왈.

“이때쯤 레싱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럽 지역에서 최고의 소음 반대 운동가로 정체성을 확립한 상태였다. 가령, 1911년에 그는 빈에서 두 차례의 강의를 해서 호평을 받았는데, 이 강의들에서 금관악기, 아기 딸랑이, 그리고 종을 (또한 아마도 호루라기까지) 사용하여 과도한 소음의 폐해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한 목격자는 이렇게 비꼬기도 했다. “배움이 빨랐던 청중은 강사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내는 대신 손수건을 흔들었다.””

이게 너무 웃긴 거예요. 어… 이 아주 그냥 지옥 같은 것을 지옥 같다고 하는 걸 또 지옥 같다고 하는, 정말이지 전형적인, 내 유토피아는 누구의 디스토피아고 그 반대 경우도 가능하다는 것을 책에서 상세히 보여줍니다. 소음이 나쁘지 않은 것이며, 심지어 필요하고 좋은 것이라고까지 하는 경우에 대한 인용문도 있습니다.

책 왈.

“다음은 1911년 <디 차이트>에 에드문드 벤그라프가 쓴 글이다. “솔직해지자. 우리 같은 도시인들은 실은 거리의 소음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 낮의 정신적 자극이자 밤의 자장가이다. 익숙해졌기 때문에 없이 살 수 없는 환경의 일부다.””

네. 실제로 이런 측면도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거 같아요. 도시가 소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시골의 고요함이 무겁고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항상 도시 혹은 소도시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연의 소리만 나는 시골이 무섭습니다. 아주 큰 도시나 소도시에서 산 기간은 짧았지만, 그래도 나름 도시 혹은 소도시라서 그렇게 조용한 환경이었던 적은 없었거든요. 그래서 시골, 정말 시골, 사람 없고 차 없는 시골의 그 침묵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시골은 소음에 대한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오히려 같은 크기의 소음이어도 시골에서 그 소음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일례로, 제가 4년 반 전에 한국에 갔었을 때 신사동에서 지냈거든요. 그런데 제가 지내던 건물 바로 옆 옆 골목? 거기서 공사를 하고 있었어요. 근데 그 공사를 하는 형태가, 뭐 한… 5층 빌딩? 그 정도 되는 빌딩을 아예 뭔가 그… 제가 정확한 용어를 모르는데, 어떤 무거운 천 같은 것으로 덮어서, 먼지가 안 날리고 방음이 좀 되게 덮어 놨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제가 직접 그 옆 옆 골목을 우연히 걸을 일이 생기기 전까지, 저는 거기서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지도 몰랐어요. 심지어 직접 그 옆을 걸어가는데도, 그 방음 천을 걷고 어떤 일하시는 분이 걸어 나오시는 그 순간까지, 그 안에서 소음이 꽤 나고 있다는 걸 아예 몰랐어요.

그 정도로, 물론 도시의 소음이 시골의 소음보다 절대적인 크기로 재자면 크겠고, 지속적이겠지만, 도시는 소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고, 거기서 오는 어떤… 안도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벤그라프가 말했듯이, 자장가 같을 때가 있어요. 버스를 탔는데 귀로 들릴 뿐만 아니라 몸으로 느껴지는 엔진의 진동이라든지, 반복되는 지하철역의 안내 멘트라든지 하는 것들이.

책 왈.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저자인 소설가 알프레드 되블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시 전체가 강렬한 영감과 활기를 불어넣는 힘이 있다. 이 거리, 상점, 차량의 소란은 내가 일하는 데 필요한 열을 늘 제공한다. 내 모터를 작동시키는 연료다.””

실제로 제 경우에도, 한국에 갈 때마다, 그리고 저는 한국에 가면 항상 서울에서 지내서 한국에 간다 함은 곧 저한테는 서울에 가는 것과 같은데, 그럴 때마다, 제가 딱 ‘아 이제 서울이다’ 하는 그 소음의 레벨이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도록 서울을 떠나 있었어도 그 서울 고유의 소리가 있다고 어떤… 실제일 수도 있고 실제는 아니되 어떤 인상으로서 제 안에 존재하는 그 특징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 환경에 있을 때의 저는 다른 환경에 있을 때의 저와 완전히 같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만 가능한 것들이 있고 그 도시의 소음이 에너지로 느껴져요.

그런데 이것은 만약에 제가 계속 서울 혹은 그 정도 크기의 대도시에, 그리고 그 대도시 내에서도 소음이 큰 곳에서 살았더라면 느끼지 않았을 에너지일 수도 있습니다. 뭐냐 하면, 소리 그 자체보다는 그저 환경 변화에서 오는 에너지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 점은 제가 아예 대도시 환경에 정착해서 살기 전까지는 확인할 수 없는 점입니다.


이 챕터의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이 대개 ‘침묵’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하나도 침묵이 아님을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베르거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대요. “도시 거주자가 침묵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익숙해진 모든 종류의 소리가 혼합된 것이다. 더 이상 그 소리들을 듣지 않으므로, 그것들은 그에게 침묵을 나타낸다.”

즉, 실제로 조용해서 침묵인 것이 아니라, 내게 익숙해서 그것이 당연시되기에 침묵시된다는 겁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층간 소음이든 다른 종류의 소음이든, 분노가 치미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뭐냐 하면, 절대적인 소음의 크기와 거의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가 공장 단지에 가서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고 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특히나 사람 사는 곳에서 소음이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용납이 되는지 등등은 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서 충돌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챕터를 제가 재밌게 읽은 주된 이유 중 하나는요, 소설 인용이 비소설 인용과 크게 구분되지 않은 채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소설 속 소리에 대한 묘사가 실제 시공간의 소리에 대한 묘사와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따라서 소설의 묘사가 어떤… 역사학적 발자취 같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도널드가 명확히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소설이 완전 허구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임 드리밍을 지금껏 들어오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한아임의 생각은 반대라는 것이. 특히나 아예 지명과 시대를 언급하면서 소설을 쓴 경우에는, 당연히 소설가가 생각하는 그 시공간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도널드가 말합니다. “소설 및 기타 문화적 형식의 증거는 역사적 사운드스케이프를 이해하는 데 특히 적절하다. 그것들은 지각하는 방식의 변화를 추적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시에 새로웠던 듣기 방식을 설명하고 모형화하는 교육적 기능이 있었다. 이로써, 소리에 대한 의미 생성 문화의 일부였다. “

인용되는 소설 중 하나는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입니다. 빈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에요.

소설 왈, “자동차들이 깊고 좁은 거리에서 밝은 광장들의 얕은 곳을 향해 불쑥 튀어나왔다. 어두운 보행자 무리들이 구름 같은 끈을 형성했다. 더 강력한 속도의 선들이 그들의 태평한 서두름을 가로지르는 곳에서 그들은 엉겼다가 빠르게 흘러 나아갔고, 몇 번의 진동 후에 안정된 리듬을 되찾았다. 수백 개의 소음은 미늘이 여기저기 튀어나온 쇳소리 같은 소리 질감으로 엮였고, 따끔거리는 날들이 그것을 죽 따르다 다시 가라앉아, 선명한 음표가 쪼개지고 흩어졌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이 소음만으로도, 몇 년 만에 이곳에 돌아온 사람은 눈을 감고도 자신이 왕조의 수도이자 왕의 도시인 빈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눈을 뜨면, 그는 어떤 특징적인 부분을 포착하기 훨씬 전에 거리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의 리듬으로 이 장소를 알아챘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고 상상만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여기 나오는 이 이야기, “몇 년 만에 이곳에 돌아온 사람은 눈을 감고도 자신이 왕조의 수도이자 왕의 도시인 빈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부분, 이것이 제가 앞서 언급한 정서와 통하죠. 서울에 4, 5년 만에 돌아와도 서울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그 소리가, 눈을 감고도 있듯이, 빈도 그랬다고 무질의 소설 속 화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도널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사회적 변화와 관련된 새로운 소리는 점점 더 모든 도시에 공통적으로 생겨나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의 사운드스케이프는 필연적으로 점점 더 비슷해졌다.”

그리고 결국 무질도 소설 속에서 이렇게 말해요. “…도시 이름에 특별한 가치를 두지 말자. 모든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이따금 불가해한 침묵에 의해 끊기는 불규칙성, 변화, 갑작스러운 전진, 발걸음을 맞추지 못함, 대상과 이해관계의 충돌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경로와 가보지 않은 길, 하나의 위대한 리듬 비트는 물론이고 만성적인 불협화음과 서로 경쟁하는 리듬의 상호 변위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체로 그것은 건물, 법률, 규정 및 역사적 전통이라는 지속 가능한 재료로 만든 냄비 안에서 끓는 거품 같았다.”

네.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건가? 빈이든 서울이든, 도시이기에 나는 소리도 있고, 빈이라서 나는 소리와 서울이라서 나는 소리도 따로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뭔가… 언어 때문에 생겨나는 소리 차이가 아니고, 그 리듬이 있어요. 그렇죠? 마치 각국 영화의 편집에 리듬이 있는 것처럼.

편집의 내용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음. 리듬과 내용을 아예 동떨어지게끔 분리하긴 어려운 것 같아요.

일례로, 제가 “대박부동산”이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데요. 장나라 님과 정용화 님이 주연배우로 나오시는 드라마였습니다. 아마 그 드라마가 맞을 거예요. 아무튼 그 드라마에서 어… 정용화 님 어머니? 역할로 나오시는 분? 이었던가? 가물가물한데, 어머니라는 그 점이 딱 중요하다기보다는, 어떤 어머니스러운, 보호자 역할을 하는 인물이 정용화 님이었나, 하여간에 보호받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 자신을 오랜만에 방문하러 오자, 닭을 삶아주려는 장면이었어요.

그런데 그 시퀀스의 편집이 어땠냐면. 지금 제가 그냥 기억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여러분. 딱 이 부분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 닭을. 닭의 깃털이 이미 다 뽑힌 상태였어요. 그리고 그 닭이 어떤 대야? 이런 데에 담겨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정용화 님 캐릭터가 흘끗 보는, 그런 장면이었어요. 그러니까 대략, 정용화 님과 보호자가 얘기를 좀 투닥투닥 쌀쌀맞은? 약간 그렇게 하다가. 보호자님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대야에 덩그러니 닭이 있고. 정용화 님이 그걸 보고. 그냥 떠나는. 그런 시퀀스였어요.

그런데 이걸 보면 한국 문화권의 사람은 알잖아요. 정용화 님 캐릭터가 온다고 해서 닭을 잡아서 주려고 했구나. 이 그… 닭을 잡아주다는 것의 어떤 상징이 있잖아요. 아무리 보호자 캐릭터와 정용화 님 캐릭터가 투닥투닥 말을 했어도, 대야에 덩그러니 깃털 뽑힌 닭이 있었다고요. 근데 제가 그 장면을 보면서, 그 장면 자체는 하나도 웃긴 게 아닌데, 웃었어요. 왜냐하면 그 장면의 상징을 만약에 그냥 일반 미국 사람. 완전 한국 문화 몰라. 언니 오빠 무슨 말인지 몰라. 그런 미국 사람이 보면. 너무너무 혼란스러울 거 같은 거예요. 한국 문화권에서는 저 닭이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뭔가를 표현한다는 게 포인트인데, 그걸 모르면, “저게 무슨… 저… 저 닭 저건 뭐시기여?” 이럴 거 같은 거예요.

그런데 그거랑 비슷하게 약간. 소리에도. 언어 때문에 생기는 차이가 아니라, 그 시공간에서 특정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생기는 소리들이 있는 거 같거든요. 해당 시공간에만 있는 어떤 리듬과 그에 따른 내용이 있어요.

어… 그리고 시공간에 특정한 소리가 아니고, 특정한 소리라서 시공간이 떠올려지는 경우도 있었으니, 그것의 한 예는, LG 세탁기의 노랫소리입니다. 전에도 언급을 했던가요? 제가 사는 동네에 산책을 할 만한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여러 집들의 차고가 열려 있습니다. 차고에 세탁기가 있어요, 보통. 그러면 그 열린 차고로 온갖 집들에서 LG 세탁기의 노랫소리가 납니다. 그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LG는 글로벌 기업이로구나.

스브스뉴스 채널에 이 세탁기 노래에 대한 영상이 있더라고요. 요거 링크하겠습니다. 2023년 7월 28일 영상입니다. 올라온 지 얼마 안 됐네요.

이 영상의 댓글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유저네임 @jeenylykken8164 왈: “이 효과음이 진짜 대단한게… 해외 유튜버 방송하는데 이 효과음 나오니까 채팅창에서 죄다 빨래 다 됐다는 말을 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이 영상에 심지어 이 노래를 디자인하신 분이 직접 출연하십니다. 전명훈 님. 네, 여러분? 전명훈 님이 그 유명한 LG 세탁기 멜로디를 디자인하셨다더라. 이것은 거의 뭐.

여러분. 한때 로다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님, 우리의 아이언맨. 그분의 트위터인지 인스타그램 소개 문구가 “You know who I am”이었나? 그거였어요. 뭐 더 설명할 필요 없지 너 나 어차피 알잖아 하는 그런, 아주 자신감 넘치는 소개 아닌 소개 문구를 쓰셨는데. LG 세탁기 멜로디를 디자인한 사람이면. 이거 거의 뭐… 그 어떤 소셜 미디어를 써도. “그게 나다. 당신이 쓰는 그 세탁기. 아마도 당신이 90% 확률로 쓸 그 세탁기. 그것이 내는 소리. 그거 만든 사람, 그게 나다.” 이것은 정말 아무나 쓸 수 있는 소셜 미디어 소개문이 아니다. LG 세탁기 멜로디를 만들었다는 것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그리고 조세프 휴버투스 필라테스 외에 가장 강력한 소셜 미디어 소개 멘트를 쓸 수 있는 경력이 아닌가.


챕터에서 언급되는 또 다른 소설로는 일리야 에렌부르크의 다큐멘터리 소설 <자동차의 삶>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좀 더 본격적으로 디스토피아적인 묘사가 나와요.

소설 왈:

“시트로엥 공장에는 2만 5,000명의 직원이 있었다. 한때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이제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곳에서 왔다는 것이 드러났다. 파리인과 아랍인, 러시아인과 브르타뉴인, 프로방스인과 중국인, 스페인인과 폴란드인, 아프리카인과 안남인이 있었다. 한때 폴란드인들은 땅을 갈았고, 이탈리아인들은 양떼를 방목했고, 돈 코자크인들은 차르를 충실히 섬겼다. 이제 그들은 모두 같은 컨베이어 벨트에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점차 인간의 말을 잊어가고 있었다. 양가죽처럼 따뜻하고 거칠며, 갓 일군 흙덩어리 같은 말을.

그들은 기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각각의 시끄러움이 있었다. 거대한 낙하 망치들이 쾅쾅 소리를 냈다. 제분 기계들이 비명을 질렀다. 착정 기계들이 끼익거렸다. 압착기들은 쾅쾅거렸다. 연삭 선반들이 신음했다. 도르래들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쇠사슬들이 독기 찬 쉿 소리를 냈다.

기계의 포효는 프로방스인들과 중국인들의 귀를 멀게 했다. 그들의 눈은 멀겋고 공허해졌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잊어 버렸다. 하늘의 색과 고향 마을의 이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들은 너트를 계속 조였다. 자동차는 소음이 없어야 했다. 엔지니어들은 앉아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무소음 엔진을 만들 수 있을까? 이 밸브들을 침묵시켜야 했다. 구매자가 소음에 대해 신경이 예민했으니까! 벨트 옆에 있는 남자들에게는 신경이 없었다. 그들은 손만 가지고 있었다. 너트를 조이고 바퀴를 고정하는 손.”

이 묘사에서, 소음 그 자체의 절대적인 크기 역시 해롭습니다만, 그보다 더 진정으로 디스토피아적인 것은 역시나 또 그에 대한 해석 같습니다.

도널드 왈, “에렌부르크의 풍자에서 소음 감소는 시트로엥에 중요한데, 단지 까다로운 부르주아 소비자가 더 조용한 차를 원하는 게 그 이유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 (작업자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생산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럴 수가. 이게 제가 이 에피소드 초반에 언급한, 굉장히 이성적인 척하면서 비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척하면서 비논리적인 행태입니다. 공장 효율성을 증가하기 ‘위해서’ 작업자들의 건강을 챙기는 게 되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 같지만, 가장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에요. 그것이 너무 얕아서.


한편, 소리에는 만질 수 있는 형태의 물질성이 없는데, 이에 대한 공포심을 묘사한 소설의 한 단락도 있습니다. 프루스트가 쓴 『게르망트 쪽』에 대해 도널드가 이렇게 말합니다.

“화자인 마르셀은 사랑하는 할머니와의 첫 번째 전화 통화에서 당황하는데, 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작고” “추상적인” 데다가 그녀의 얼굴과 물리적 존재로부터 분리돼 순수한 신호로 변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마르셀이 이렇게 말해요.

“그녀가 맞다,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녀의 목소리이며, 그것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

이렇게, 멀리서 나에게 말하는 그녀를 보지 않으며 귀 기울일 때,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이로부터 그녀의 목소리가 내게 울부짖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 왜냐하면 그때까지는 항상 할머니가 나에게 말을 걸 때마다, 그녀가 하는 말이 그녀의 얼굴에, 특히나 눈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지켜보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오후에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 그 자체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할머니!” 나는 그녀에게 “할머니!”라고 외쳤고,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내 옆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나를 방문하러 올지도 모를, 만질 수 없는 유령 같은 목소리밖에 없었다. “나에게 말해!” 그런데 갑자기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고, 나는 더욱더 외로워졌다. …… 유령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리도록 내가 내버려둔 것은 이미 사랑하는 유령인 것 같았고, 나는 기계 앞에 홀로 서서 헛되이 “할머니! 할머니!”를 반복했다. 마치 홀로 남겨진 오르페우스가 죽은 아내의 이름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이렇게, 할머니를 직접 봐 오던 마르셀이 할머니를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지 않은 채로 목소리만 들었을 때, 말 그대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게 됩니다. 유령 얘기를 하잖아요.

그러나 2024년 현재에 우리가 느끼기엔 이와 같은 현상이 똑같게 느껴지지 않죠? 우리는 지금 전화 통화, 그리고 화상 통화에도 익숙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도널드는 전화 통화를 ‘게르망트 쪽’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율리시스』에서 레오폴드 블룸은 축음기를 사용하여 시간을 상대로 승리하고, 고인에 대한 듣는 형태의 기록을 유지하는 가능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모든 무덤에 축음기를 두거나 그것을 집에 보관하면 된다. 일요일 저녁 식사 후에 말이다. 불쌍한 증조할아버지에게 연결해 보자. … 목소리를 생각나게 할 테다, 사진이 얼굴을 생각나게 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으면, 15년쯤이 지난 후에는 얼굴을 기억할 수 없지 않은가.””

즉, ‘게르망트 쪽’의 화자는 전화 통화를 하면서 죽음의 공포를 느꼈는데, ‘율리시스’의 화자는 전화 통화를 죽음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는 도구로 생각한 겁니다.


이렇게, 현상에 대한 해석은 참말로 주관적이다. 이것은 <누아르 어바니즘> 책의 모든 챕터에서 언급되는 것 같아요. 누아르라는 것 자체가 주관적이고, 디스토피아도 주관적이다.

그리고 소리에 관한 이 챕터의 끝자락에 언급되는, 참으로 주관적으로 해석되는 음악 장르가 있었으니, 재즈입니다. <바벨>이라는 소설에서 재즈가 이렇게 묘사된대요.

“이상한 일이었다. 문명사회의 스펙터클, 단정한 남자들과 아름다우며 세련된 발목을 지닌 섬세하게 차려입은 여자들이 예술의 가장 원시적인 본질들, 즉 부족 음악, 그리고 섹스를 노골적으로 상징하는 발동작과 움직임에 반응하는 것이. …… 또한 이상한 것은 콩고가 미국을 정복하고 있다는 점이었고, 미국은 또 그것대로 유럽을 정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새로운 음악은 곧 샌프란시스코부터 모스크바까지 들릴 터였다.”

음악이 그 자체로 소음이라는 의견도 간혹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같은 음악이라도 어떤 시공간에서는 감상함 직하지만, 다른 시공간에서는 그 자체로 소음이라는 의견도 있고요. 더 나아가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참으로 주관적이죠.

그런데 음악이든 교통의 소리든, 쇼펜하우어가 싫어하던 채찍 소리든, 여기 이 챕터에서 논해지는 모든 소설과 비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해석은, 그것이 디스토피아적이든 유토피아적이든 무엇을 전제하고 있느냐 하면, 담론이 가능하긴 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 제가 중국 다큐 다룰 때, 에피소드 67에서 잠깐 언급했던 소리에 대한 담론의 부재? 혹은 담론이 존재하더라도 무시됨?과 대조됩니다. 거기서 제가 잠깐 언급했던 것이 확성기를 통해 나오는 노랫소리였어요. 공장 지구 같은 데에서, 그 공장 지구 자체가 망해가고 사람도 별로 없고 휑한 가운데, 온 지구 전체가 울리도록 들리는 확성기의 노랫소리. 그것이 공산주의의 호러적 측면인 것 같은데, 챕터2의 필자도, 필자가 논하는 레퍼런스물에서도, 그런 종류의 획일화된 소음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쇼펜하우어도, 그가 싫어한 건 온 사방팔방에서 제각각 나는 소리였지, 획일화된 거대한 확성기 소음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어찌 보면… 이 자체가. 쇼펜하우어가 자기 주변의 그 시끄러웠던 슈방구들을 슈방구라고 할 수 있었으며, 그 슈방구들은 그들 대로 맘대로 계속 슈방구스러울 수 있었던 그 자체가, 그것이 바로 쇼펜하우어가 있었던 공간이 디스토피아는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토피아도 아니었지만 디스토피아도 아니었다.

그런데, 맨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제가 보기에 애초에 쇼펜하우어가 주장하는 바는 세상이 디스토피아라는 게 아니었어요. 그냥 슈방구 같다 이 주장이었지. 주장도 아니고, 그냥 쇼펜하우어 형님은 분노가 치밀었던 것이고, 말을 했을 뿐이라고요. 정말이지 여러분? 철학 너무 따분해. 노잼. 이렇게 여기셨던 분들 중에 쇼펜하우어 아직 안 읽어보셨으면, 한번 읽어보세요. 안 따분해요. 형님은 재밌다. 형님은 정말로 재밌어요.

아무튼 그런데 이러나저러나 이렇게 소리에 대해서 이렇다저렇다 이야기가 나오고, 누구는 반대하고 누구는 찬성하고, 누구는 천국이라고 하고 누구는 지옥이라고 하고, 기타 등등이 나올 수 있다는 자체가, 이번에도 역시나, 누아르는 완전 누아르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반증인 것 같다. 그러합니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Ty Simon – Midnight in Vienna.
  • Yehezkel Raz – Milestone
  • Tommy Jervidal – Wine Women and Dance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 2024 한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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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