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75] <누아르 어바니즘> 4. 필름 누아르의 지역적 지리: 온스크린 및 오프스크린에 나타난 도시적 디스토피아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은 “누아르 어바니즘” 챕터 중에서 가장 “누아르”라는 단어 그 자체에 긴밀하게 연결된 챕터를 다룹니다. 어두운 분위기 측면에서라기보다는, 필름 누아르 영화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챕터이기 때문입니다.

챕터 4. 제목: 필름 누아르의 지역적 지리: 온스크린 및 오프스크린에 나타난 도시적 디스토피아. 챕터 필자는 마크 쉴입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의 필름 누아르 영화 수백 편의 경향을 분석한, 흥미로운 챕터입니다. 특히나 이 시대가, 할리우드가 참 다방면으로 여기저기서 비유적으로, 또한 말 그대로 얻어맞고 다니던 시절이라서 흥미롭습니다.

그럼 오늘의 수다, 바로 시작할게요.


1950년 4월 9일 『뉴욕 타임스』에 도어 섀리라는 비평가가 할리우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책 왈. “우리는 돈에만 관심이 있는 반동적인 동네라고 비난받기도 하고,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가운데 공산주의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뭔가 전달하지 않는다고 공격받고, 우리가 선동가이며 스크린을 ‘메시지’로 채운다고 비난받는다. 우리는 노동 갈등으로 고통받는 동네로 비춰지고, 우리가 노동 지도자들을 뇌물을 주고 매수했기 때문에 할리우드에서는 ‘당연히’ 노동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고립됐으며 단절되어 세상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뿌리를 내리지 못한 일시적인 공동체로 간주된다.”

한마디로, 어쩌란 말이냐. 이래도 욕먹어, 저래도 욕먹어, 할리우드에게는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었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할리우드에 대한 이런 양가적인 이미지는 지금도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꿈과 낭만이 가득한 것도 모자라서, 소위 말하는 ‘현실 감각’이라는 것이 없는 사람들의 집합체로 할리우드가 그려지기도 하고, 동시에 온갖 마약이며 성범죄라든지, 돈에 미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이미지는 지금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여러분? 단 하나의 실제라는 건 없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건, 이 챕터에서 다루는 1940년대와 1950년대뿐만 아니라, 21세기 초반까지도 할리우드에 관한 양가적인 재현은 넘쳐난다.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시골 마을에서 살던 사람이 할리우드에 가겠다고 하면 “너는 그런 데서 살아남을 능력이 없어”를 시전하는 동시에, “거기는 악이 가득한 곳이라서 거기 가면 너는 오염될 거야”라는 등, 뭐랄까, 너는 거기에 가기엔 불충분한데 또한 동시에 거기에 가기엔 네가 너무 고결해서 거기 가면 안 돼, 라는 식의 이미지가 할리우드에 대해서 공존한단 말이죠.

그런데 뭐, 어딘들 안 그런가. 그렇지 않습니까? 어딘들 안 그래요? 그 어떤 시공간도 딱 하나의 실제 현실이란 걸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당장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시공간 있죠? 서울이면 서울, 베를린이라면 베를린, 캘커타면 캘커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다 ‘우리는 이러한 곳에 살고 있다’고 동의를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같은 시공간이라는 게 아주 물질세계적인, 아주 표면적인 수준에서 봐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관찰 가능합니다. 그렇죠? 오히려 ‘나’라는 개체가 물질 몸에 들어 있는 개체라면, ‘나’는 절대 다른 물질 몸 개체들과 같은 시공간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의 눈과 타인의 눈은 물질적으로 겹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물질적으로 겹칠 수 없어요.

그러니 지금이든 옛날이든 할리우드든 다른 곳이든, 이렇게 온갖 방향에서 공격하려면 공격할 수 있고, 공격받으려면 공격받을 수 있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그런데 좀 특이한 점, 이 챕터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할리우드가 로스앤젤레스와 뭉뚱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할리우드는 로스앤젤레스 내부에 있는 동네입니다. 그런데도 할리우드가 로스앤젤레스와 뭉뚱그려지지 않았다.

책 왈, “할리우드는 적대적인 목소리들에 포위된 듯 보였는데, 이는 로스앤젤레스가 갖는 위상의 지속적이고 막을 수 없는 상승과는 대조적이었다. 할리우드가 기반을 두었지만 언제나 양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도시가 로스앤젤레스였다. 할리우드와 마찬가지로 로스앤젤레스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강력하게 부상했지만, 할리우드와 달리 그곳은 뒤이은 20년간 앞으로, 그리고 위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나 정치적으로, 로스앤젤레스가 아니라 할리우드가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고 해요. 할리우드가 공산주의 사령부처럼 비춰졌다는 말이 나옵니다. 한편 로스앤젤레스는, 책 왈, “보수적이고, 풍요롭고, 화창하고, 건강하고, 어떤 특정한 미국적 안락함의 믿을 만한 보루로 그 공적 이미지를 강화했다. 이는 풍부한 국산품, 쇼핑몰, 고속도로, 텔레비전 및 디즈니랜드로 인해 점점 더 강화되던 안락함이었다.”

그러니까, 할리우드는 로스앤젤레스 안에 있는 동네인데도 불구하고, 각종 정치적 격동이 어느 정도는 할리우드에만 특징지어졌고, 특히나 좌파적 경향이 할리우드에 특징지어졌고, 로스앤젤레스는 보수성과 연관 지어지며 정부의 혜택을 받고, 번창하던 시절이었다. 이건, 와, 정말 편의주의적인 이미지 생성이었다, 라는 측면에서 좀 신기한 것 같습니다. 할리우드는 그저 동네인데, 그 동네를 둘러싸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와 단절된 이미지로 보여질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자체로서 할리우드는 섬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 섬이 좋게 보이든 나쁘게 보이든.

그럼 그렇다고 할리우드는 손해만 보고 있었는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여기저기서 욕을 먹은 건가? 아닙니다. 이 시기에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책 왈, “로스앤젤레스의 상승을 약화시켰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위기 상황에 맞춰, 이 영화들은 로스앤젤레스를 별 특징 없는 상업 거리 풍경의 일관성 없는 네트워크, 아름답지만 도덕적으로 부패한 교외, 그리고 점점 더 황폐해져가는 도심으로 이루어진 도시 정글로 표현했다.”


네. 이 챕터에서 우파 좌파 간의 싸움 때문에 할리우드가 불안정해진 것에 대해서 특히나 많은 언급이 나옵니다. 보수적으로 여겨진 로스앤젤레스에 둘러싸인 섬 같은 동네인 할리우드가 공산주의 헤드쿼터처럼 비춰지는 경향이 있었다고요. 그런데 할리우드가 대변하는 것들이 ‘실제로’ 매우 좌파였다거나 우파였다고 하기에는, 아까 맨 처음에 언급한 도어 섀리의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뭘 해도 욕을 먹었던 모양이에요. 그리고 이번 에피소드에서 계속 얘기하겠지만, ‘실제’를 굳이 논하자면, ‘실제’로 단일 할리우드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할리우드를 좌파로 그리거나 우파로 그리는 것이 참… 다시 말하지만, 너무나 편의주의적이었다. 때때로 달랐다. 그때그때 시시각각 달랐다.

그런데 이러나저러나 할리우드가 사방팔방으로 공격받은 큰 이유 중 하나는, 이 점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잘나가는 로스앤젤레스를 감히 누아르하게 표현해서. 즉, 제가 생각하기에, 하필이면 누아르 영화를 많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욕먹은 게 아니냐는 겁니다. 너무 어둡고, 너무, 소위 말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로스앤젤레스에다가 주입한다고 여겨졌기에.

그러나 이 챕터에서 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아르를 분석함에 있어서, ‘누아르’, ‘밤,’ ‘어두운’ 같은 분위기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경향성이 있어 왔다고. 그리고 그것이 누아르의 배경이 되는 각 도시의 특정성을 너무 뭉뚱그리는 측면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누아르적 분위기에 집중하는 것을 “현대 미국 도시를 일반화하는 … 경향”의 일부로 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 반대의 길에 관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책 왈, “이 글에서 나의 관심은 로스앤젤레스와 필름 누아르 사이에서 나타나는 지리적으로 특정한 관계를 정교화함으로써, 최근 연구에서 제시한 방향으로 더 나아가는 데 있다. 나는 필름 누아르가 배경으로 가장 자주 활용하는 특정 장소들을 살펴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름 누아르의 배경 활용에서 명백한 어떤 패턴이 (만약 있다면) 분명해지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이를 달성하려 한다. 특히 필름 누아르는 도시 환경의 재현과 특별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나는 어느 정도로 필름 누아르가 특정 도시를 배경으로 만들어지는지, 어떤 도시가 배경으로 주로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이유를 찾는 데 관심이 있다.”

제가 그런데 궁금한 건. 뭐. 우리는 이제는 알 수 없습니다만. 평행 현실이 존재했다면.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이 시기에 만들던 영화가 이 누아르적, 밤스러운, 어두운 영화들이 아니었더라면, 혹은, 할리우드가 그런 영화를 만들든 만들지 않든, 즉, 실제가 어떠했든지 간에, 할리우드가 그런 영화를 만드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 않았다면, 할리우드가 이렇게까지나 여기저기서 욕을 먹었을까? 특히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힘이 있는 세력으로부터? 왠지 그러지 않았을 것 같단 말이죠. 할리우드에서 무슨 영화를 만들든, 자기네를 좋게 보여주기만 하면 별로 상관을 안 했을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아르 영화가 담고 있는 “불길한 예감, 위협 및 위험”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저자가 관심을 갖는 할리우드의 정치적 어려움과도 관련이 많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할리우드가 로스앤젤레스를 재현한 방식이 하필이면 누아르였다는 것이 가장 지역 특정적이지 않은가, 하는 겁니다. 이 측면들이 별개가 아니지 않느냐는 겁니다. 할리우드 및 로스앤젤레스의 지역 특정성을 논하려면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 중 다수가 하필이면 로스앤젤레스를 샤방샤방한 도시가 아닌 어두운 범죄의 도시로 그린 영화였다는 점이 어떤 정치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하지 않은가.

한편, 이 챕터에서도 지적하듯이, 로스앤젤레스시뿐만 아니라 남부 캘리포니아 전반의 자동차 중심적 문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지역 특정적인 게 맞죠. 우리가 또 다른 평행 현실로 가서, 만약에 남부 캘리포니아가 서부 개척 시대에 사람이 몰리기 시작한 지역이 아니라, 뉴욕과 비슷한 시기에 사람이 몰리던 곳이라고 가정한다면, 할리우드와 로스앤젤레스는 서로 매우 다른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할리우드와 로스앤젤레스를 이렇게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서초구랑 서울시를 분리해서 생각하진 않잖아요. 중구랑 서울이 분리되어 있지 않단 말이죠. 그런데 왜 할리우드랑 로스앤젤레스는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논해지는가?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어떤 도심 지역이 한 개인 게 아니라, 전부 다 퍼져 있고, 차 없이는 어차피 어디 가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아마 더했을 것 같아요. 이 때문에 아무리 행정적으로는 할리우드가 로스앤젤레스 안에 있어도 할리우드를 로스앤젤레스와 동떨어지게 보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고, 지금도… 엘에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가려면 꽤 걸리거든요. 그리고 그 체감 거리가… 어… 건물과 건물 사이의 거리. 그리고 예전에 유현준 교수님이 어디서 말씀하셨는데, 사람이 걸어 다니면서 꺾어 들어갈 수 있는 골목의 개수였던가? 그것에 따라 체감하는 도시 경험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말씀하셨는데, 엘에이는 예나 지금이나, 꺾어 들어간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엘에이에서 골목이라고 해봤자, 사람 다니는 골목은… 저는 직접 들어가 본 적은 없어요. 정말로. 한 번도. 가장 작은 골목도 차 한 대는 들어갈 수 있는 골목만 들어가 봤고. 그런데 서울의 골목, 다른 더 오래된 대도시들의 골목은 어떤가요? 사람 하나도 들어가기 어려운 골목도 있잖아요. 그러한 골목들을 형성하는 건물이 엄청 촘촘하게 있는데, 엘에이는, 어차피 이 건물이랑 저 건물이 바로 옆에 있다고 여겨져도, 그 ‘바로 옆’이라는 것이 매우 잦은 빈도로 차 한 대는 들어가는 ‘바로 옆’이며, 그래서 도시 전체가, 할리우드도 그렇고, 도시인데도… 도심인데도… 멀어요. 그러니까 할리우드를 섬을 만들려면 충분히 섬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지금도 어느 정도 계속되고 있다.


아무튼, 그러면 저자는 로스앤젤레스와 누아르의 지역적으로 특정한 관계를 어떻게 분석하는가. 영화 수백 편을 보고서 분석을 합니다. 마크 쉴님. 광적인 분석가. 영화 수백 편을 분석했다. 이 챕터에 그래프가 많습니다. 일곱 개인데요, 그 그래프들의 제목이 이런 식입니다.

1. 미국 필름 누아르의 수, 1940–59년, 그리고 미국 및 미국 외 설정의 수.

2. 미국의 도시, 소도시 및 시골을 배경으로 한 필름 누아르의 수.

3. 북동부 및 남서부를 배경으로 한 필름 누아르의 수.

4. 북동부와 남서부를 배경으로 한 필름 누아르의 비율.

5.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한 필름 누아르의 비율.

6.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한 필름 누아르의 수.

7.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한 필름 누아르의 비율.

전반적인 경향성에 이 챕터의 저자는 관심이 있었다. 이번 챕터에서 언급된 영화만 다뤄도, 2주에 한 번씩 에피소드를 하면 몇 년은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영화가 언급됩니다.

한편, 저자는 주석에서 이런 말도 합니다. “물론, 이 분석의 지리적 특수성에는 몇 가지 방법론적 한계가 있다. 각 영화의 주요한 배경은 식별할 수 있지만, 영화가 한 곳 이상의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 각 장소에서 소요된 시간의 양 혹은 비율은 식별하지 못하며, 특정 영화에서 그 장소를 다른 곳과 비교했을 때 드러나는 극적인 중요성도 식별하지 못한다. 그리고 배경이 스튜디오에서 재창조된 것인지 혹은 현지 로케이션으로 촬영된 것인지(로케이션으로 촬영되었다면, 그 장소는 어디인지)도 특정하지 못한다. 또한 시각적 단서, 캡션, 대사 또는 기타 영화 내 ― 또는 영화 외 ― 정보를 통해 영화에서 배경이 구체적으로 식별되는 정도를 나타내지도 못하게 한다. 비록 내가 정리한 표에는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도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 ― 가령, 존 휴스턴의 <아스팔트 정글> (1950) 같은― 카테고리를 특별히 포함시켰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들이 이 글에서 내가 제공하는 해석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네.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시도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제가 이제껏 몰랐으며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점은, 은근히, 대도시가 아닌 소도시 혹은 시골을 배경으로 한 필름 누아르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은 정말 누가 모든 필름 누아르 영화들을 다 나열하고 그것들을 다 보고 어떤 기준을 세워서 그래프를 만들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점 같습니다. 압도적으로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을 배경으로 한 필름 누아르가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도시 혹은 시골을 배경으로 한 누아르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래프와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뉴욕을 배경으로 한 누아르가 줄어들수록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한 누아르는 많아졌다는 점입니다.

책 왈, “1940년부터 1948년까지 매년, 뉴욕과 로스앤젤레스가 똑같이 그 수가 많았던 1944년을 제외하고는, 뉴욕이 더 널리 사용된 배경이었다. 이 기간 동안 뉴욕은 모든 영화의 약 4분의 1에서 3분의 1에 등장한 반면, 로스앤젤레스는 1944년까지는 아주 적은 수의 영화에 등장하더니, 그 이후로 1949년까지 점차 더 널리 활용됐다. 1949년과 그 이후 모든 해에는 뉴욕이 잠시 되살아났던 1952년을 제외하고는 로스앤젤레스가 가장 널리 활용되는 배경이었으며,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말까지 모든 필름 누아르 영화들의 적어도 4분의 1에 등장하거나, 때로는 거의 절반에 등장하기도 했다.”

저자가 “뉴욕의 쇠퇴와 로스앤젤레스의 부상”이라는 소제목의 소챕터를 다뤘을 정도로, 뉴욕에 압도적으로 집중되어 있던 사회경제문화적 자원이 로스앤젤레스로도 분산되면서, 그 경향이 누아르에도 반영됐나 봅니다. 책 왈, “19세기 말에 영화가 처음 등장한 때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는 뉴욕이 미국 시네마에서 가장 탁월하며 가장 미국적인 도시였는데, 1960년대에 로스앤젤레스는 인구 측면에서, 또한 경제·정치·문화 측면에서 뉴욕을 희생시켰듯 영화적 배경으로도 새로운 명성을 얻었다.”

저자의 이러한 분석이 흥미로운 가장 큰 이유는, 저자가 어느 정도는 제로섬적인 물질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책 왈, “일반적으로 어떤 형태의 유토피아적 열망에 의해 주도되는 한 도시의 성장은 다른 곳에서 유토피아적 열망이 견제되거나 뒤집히는 것을 필요로 한다. 한 도시의 유토피아는 다른 도시의 디스토피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저자의 말에 따르면, 어느 정도는, 로스앤젤레스랑 뉴욕이 같이 유토피아적으로 성장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도시를 비교를 한다면 어느 정도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서도, 절대적인 수치로는 로스앤젤레스든 뉴욕이든 더 성장을 했는데. 그래서 이러한 주장이 저는 좀 신기합니다. 저는 대부분의 경우에 물질 세계에서조차 제로섬 혹은 제로섬 비슷한 것도 믿지 않거든요. 예를 들어 그러면, 디트로이트가 망한 게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이 잘되서인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지금 21세기 초반에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에서 인구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간다, 이런 얘기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첫째로, 별로 빠져나가지도 않을뿐더러, 둘째로, 빠져나가면 대단한 실패인가? 아니, 오히려 인구가 다른 데로 감으로써 로스앤젤레스나 뉴욕도 더 좋아질 수 있겠죠. 딱 인구 사이즈, 아니면 땅 사이즈, 이런 단일 수치만 보면 도시들을 경쟁 구도에 놓고 승자와 패자를 나눌 수 있겠지만, 빅픽처에서 보면, 다 같이 살려고 변화가 일어나는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더 나아가 저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압도적으로 적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뭐… 수치로 증명할 수 없을 거예요. 내지는 수치로 증명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믿습니까?”라는 인구통계학 조사자의 질문에 “뭔 소리 하는 거야?”라는 혼란 어린 답변으로 응대하는 사람들의 비율을 통해서 증명될 것 같아요. 사람들이 별로… 거대 유토피아나 거대 디스토피아의 환상에 반응을 하면서 살고 싶어 하지 않거나, 반응을 할 여력이 안 되거나, 반응을 할 여력이 안 된다고 스스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기에, 이쪽 도시가 유토피아든 저쪽 도시가 유토피아든, 다른 데가 디스토피아든, 혹은 그렇게 여겨지든, 그것이 실질적인 제로섬 게임이 될 정도로 한쪽이 망해야 다른 쪽이 잘 되거나 한쪽이 잘 되면 다른 쪽이 망하는 현실이 펼쳐지지 않는다는 게 제 경험입니다.

그리고 이 챕터에서도 로스앤젤레스든 뉴욕이든 어디든, 그곳들이 단일 유토피아나 단일 디스토피아라기에는 누아르 영화라는 전반적으로 어두운 장르에서조차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장소들로 그려졌다는 점이 나옵니다. 그래서… 한 도시의 유토피아가 다른 도시의 디스토피아를 필요로 한다? 그런 현실이 있는가? 심지어 그런 현실이 있다고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가장 미묘한 점은, 어차피 단일 유토피아 단일 디스토피아가 없듯, 다시 한번 말하건대, 단일 로스앤젤레스도 없었고, 단일 할리우드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특히나 할리우드에 대해서 이 챕터에서 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할리우드’라고 부를 수 있는 단일 집단이 애초에 없었다는 점 말입니다. 할리우드 내부에서도 좌파 우파를 두고 갈등이 있었대요. 예를 들어, 개혁 저널리스트인 업튼 싱클레어가 주지사 선거 운동에 나서자, 할리우드 거물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캘리포니아 투표 결과가 이 충격적인 후보자에게 호의적이라면, 영화 산업은 이 나라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심지어, 싱클레어라는 이 후보에게 반대하는 캠페인을 위한 기금을 모으고, 책 왈, “MGM의 경우에는 싱클레어가 당선되면 이주와 급진적 사상이 캘리포니아를 압도할 것이라는 보수적인 두려움을 부추기는 뉴스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싱클레어는 궁극적으로 패배했지만, 그가 대표했던 급진주의는 그를 넘어서 광범위한 노동 소요의 형태로 서부 해안을 휩쓸었다. 여기에는 캘리포니아의 모든 항구를 폐쇄하고 1934년 여름에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에서 4일간의 총파업으로 이어진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과 1937년 4월 30일부터 6월 7일까지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에 심각한 손상을 준 대형 파업이 포함된다.”

즉,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파업을 했다는 거잖아요, 싱클레어가 대표했던 급진주의에 동조하여. 그러는 와중에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오너’들은 그 스튜디오를 이용해서 싱클레어가 대표했던 급진주의에 반대하는 영화를 만들고. 이러니 할리우드는 애초에 하나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이렇게 정치적으로 갈라진 스튜디오들은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보수성으로 대변되던 로스앤젤레스를 덜 좋아 보이게, 덜 밝고 희망차 보이게 만드는 누아르 영화였다. 이러니까 돈만 밝힌다고 욕을 먹은 측면이 있었나 봐요. 급진주의는 싫은데, 보수성으로 국가에서 많은 지원을 받는 로스앤젤레스를 누아르스럽게 비추는 스튜디오 거물들. 이 영화들을 왜 굳이 만들었을까? 돈이 되니까 만들었겠죠?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미국에서 생산되는 영화를 보는 대중이 누아르 영화를 어느 정도 좋아했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뉴욕이 쇠퇴하는 듯한 이미지가 있었다고 해서 로스앤젤레스가 마냥 부상하는 듯한 이미지였을까? 그랬을 것 같지 않고요. 그 와중에 실제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노동조합에서 활동을 하니까, 할리우드는 좌파로 가득하다고 욕하는 게 수치적으로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사람의 수는 노동자 측이 오너 측보다 더 많을 테니까요. 이러니 할리우드는 다방면으로 갈래갈래 찢어져서 여기저기서 욕을 먹었다.

더 신기한 건, 할리우드에서 세력을 쥐고 있었던 사람들이, 즉, 스튜디오 오너라든지 투자자라든지 했던 사람들이, 뉴욕으로 사업을 이전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가, 이들이 유대인 기업가이거나 대부분 이민자 또는 2세대 이민자였기 때문이래요. 책에 따르면, 이 이유 때문에 동부 해안의 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 엘리트들이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뉴욕으로 가고 싶지 않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실 이 할리우드 거물이라는 사람들도 뉴욕에 가면 좌파스럽게 비춰질 수 있다는 거지 않습니까? 그런데 로스앤젤레스라는 비교적 신생 환경에서는 자기네가 기득권층으로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영화를 누아르로 만들었든 만들지 않았든, 이 스튜디오 거물들은 어떻게든 로스앤젤레스라는 비교적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사실은 그들도 다른 데에 가면 취약층이라고 비춰질 수 있을 텐데, 스스로를 애국 보수 프레임으로 포지셔닝을 했다.

더 특이하게, 책에서 언급하는 누아르 영화 테마 중 하나가, 뉴욕이 별로여서 엘에이로 이주하는데 엘에이로 와봤더니 엘에이도 별로인 스토리라인이래요. 그러면 이건 뭐. 영화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거기다 대고 그런 영화 만들지 말라고 욕하는 건 시장 경제의 탈을 쓴 이상은 정말 미개한 행위지만, 할리우드가, 아니 그보다는 할리우드의 기득권층이 보수파와 뜻을 함께하는 것으로 비춰지고 싶다면, 이왕이면 자기들이 자금줄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좀 더 자기들한테 정치적으로 유리한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는 건, 정말 돈을 가장 밝혔다는 뜻 아닌가? 이런 영화를 만들고서 정치적으로, 간접적으로나마 불리해질 거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던 걸까? 싶습니다.

특히나, 아까 나왔던 말처럼 “한 도시의 유토피아가 다른 도시의 디스토피아로서”만 가능하다면, 이 스튜디오 거물들은 자기네가 사는 로스앤젤레스를 디스토피아적으로 스크린에 말 그대로 비춤으로써 로스앤젤레스를 상당히 불리하게 만들었단 것인데, 그렇다면 우파 좌파 논란은 차치하고, 누아르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들의 피해자 코스프레를 너무나 명확하게 만들지 않나요? 돈은 벌고 싶어. 미국 동부에서 이민자나 유태인이라고 무시당하기는 싫어. 미국 서부에서 기득권층 행세도 하고 싶어. 그래서 영화 제작 결정권을 쥐고 있는 건 본인들이지만 교묘하게 노동자들을 탓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게 애국하고 싶으면 나라에서 밀어주는 로스앤젤레스를 누아르하게 비추는 영화를 이렇게 많이 만들면 안 되지. 로스앤젤레스든 뉴욕이든 다른 어디든. 이 챕터 저자가 수백 편의 영화를 분석했다니까요, 여러분. 이렇게 많이 만들었다고요 미국의 도시들을 범죄 가득한 장소들로 그리는 영화를. 그래 놓고서는 스튜디오 오너로서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을 어찌하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인 척을 했다.


이러합니다. 이 챕터에서 이렇게 로스앤젤레스 및 할리우드의 특징적 정치 얘기가 나오고, 저는 또한 그곳에서 만든 영화들이 하필 누아르였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누아르만 만들지는 않았겠지만, 누아르도 수백 편이나 만들었다.

이런 가운데, 챕터에서 언급되는 또 다른 요소는 로케이션 촬영입니다. 책 왈, “로버트 시오드맥의 1949년 스릴러에 대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평론은 다음과 같이 열광했다. “로스앤젤레스 사람들은 <크리스 크로스>를 보며 특별한 짜릿함을 느낄 것이다. 영화의 많은 부분이 도시의 고속도로와 샛길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리노이주 시카고나 뉴저지주 호보켄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이들도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거라고 장담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실재하는 유명 장소들을 영화 속에서 알아보는 것을 좋아했다는 설명이 이 챕터에 나옵니다.

책 왈, “이러한 보고들은 전후 영화 관객이 그들이 보는 영화들을 더 많이 미심쩍어하고 그것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듯하다는 사실을 자주 언급했다. 관객들은 특히나 로케이션 촬영을 높이 평가하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지닌 사실성과 도덕적 진실 때문이었다. 또한 그 당시가 할리우드 관객의 상당수가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로 구성되던 시기였으며,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의 위상이 전쟁과 그 공포를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로 인해 강화되던 시기였고,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스트들인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1945) 및 비토리오 데 시카의 <움베르토디>(1952)가 국제 시네마의 예술적인 흐름의 주도권을 잡은 시기였던 이유도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스튜디오에서 그림 배경으로 촬영된 영화들이 다수였는데, 로케이션 촬영이 좀 더 인기가 많아졌더라.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림으로 그린 것보다야 실제 촬영이 더 영화 감상의 몰입도를 높여줬겠죠. 여기서는 ‘그것이 지닌 사실성과 도덕적 진실’이라는 게 언급되는데, 이것이… 글쎄요. 필름 누아르를 보던 관객들이 이 책에서 언급하는 ‘국제 시네마의 예술적인 흐름의 주도권’을 신경 썼을지, 모르겠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어떤 의무감 혹은 고양된 예술성 때문이 아니라, 단지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이 대도시이며, 그곳이 자주 스크린에 비춰졌기에, 비춰지면 비춰질수록 더 비춰지는, 즉, 성장의 선순환이 뭐랄까, 점점 팽창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냥 보던 거니까, 아는 데라서 좋은 거란 얘기입니다. 이것이 PPL의 정신이지 않습니까? 한 100번쯤 보여주면, 그저 그것이 익숙해서 좋아하게 돼요. K드라마의 국제 시청자들이, 저 주인공들이 맨날 마시는 저 초록 병에 든 저거 뭐냐고 물어보고, 한국 와서 그거 찾아 마시는 거랑 똑같습니다. 요즘에는 초록 병이 아니라 하늘색 병이 가장 자주 보이던데. 그리고 그 병들에 그려진 두꺼비 캐릭터는 한국의 많은 유명인들에 비해도 뒤지지 않는 대단한 유명 인사라고요. 심지어 여러분, 써브웨이 있잖아요? 제가 지금 이 에피소드를 한국 가기 전에 녹음하고 있는데, 저는 진심 저 한국 가서 써브웨이 갈 겁니다. 드라마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데가 써브웨이야. 써브웨이 제가 사는 미국 지방에서는 그냥 뭐… 안중에도 없어요. 써브웨이 간 적이 없는데, 하도 한국 드라마에서 너무 깔끔하고 친절하고 예쁘고 맛있어 보이게 나오니까, K관광객인 저로서는 한국에서 뭐 육회 잔치국수 왕만두 굴 기타 등등도 먹겠지만, 써브웨이. 와, 한국 드라마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저 써브웨이 나 가야겠다. 이 생각이 진짜로 든다니까요?

그거랑 비슷한 거 아니냐는 뜻입니다. 보던 것이니까 또 나오면 반가운 거예요. 이제는 써브웨이 나오면 반가워요. 두꺼비도 반가워요. 내가 보기로 선택한 이 드라마, 영화 기타 등등이 내가 전에 봤던 그것들과 연관이 있고, 어떤… 내가 사는 물질세계와 연결된 가상세계이되, 심지어 그 가상세계에는 실존한다고 하는 인물들이 실제로 두꺼비 그려진 병에 든 소주를 마시다가 갑자기 난데없이 대화를 끊고 써브웨이를 갈 것만 같은 그 친근함. 그것과 비슷하게, 내가 시카고나 호보켄에 사는 사람이고, 1940년대나 1950년대의 내 시공간에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같은 대량 오디오비주얼 공유 플랫폼이 없는 가운데, 영화라는 매체에 지속적으로 뉴욕이랑 로스앤젤레스라는 데가 나와.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정겹겠어요? 저는 너무나 정겨울 것 같은데.

 챕터 1에 이와 관련해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책 왈, “바빌론부터 뉴욕에 이르기까지, 대도시는 항상 집단적 상상력이 파괴의 이미지를 투사할 수 있는 스크린 역할을 했다. 다른 어떤 도시보다 바빌론은 도시의 소멸을 상상하는 상징이었다.”

우리 바빌론 가본 적 없잖아요. 그런데 이런 분야의 책을 읽다 보면, 아니면 수많은 SF 및 판타지 계보의 작품들을 보고 듣다 보면, 유사 바빌론이 하도 많이 나와가지고, 바빌론 이제 친해요. 그리고 바빌론으로부터 온 메트로폴리스도 이제 친해요.

그래서 여러분, 어… 흔히 SF에 네오도쿄, 네오서울 이런 식으로 나오잖아요. 얼추 아시아틱한 오리엔탈적인 모호한 누아르 대도시들이 등장합니다. 사실 여기서 이러한 누아르 대도시들이 얼마나 누아르하든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까 그 로스앤젤레스 스튜디오 거물들이 정치적으로 불쌍한 척을 한 경우에는 누아르한 재현이 유의미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애국적인 척하면서 로스앤젤레스를 누아르하게 프레임했으니까 유의미했던 거고, 애국적인 척을 안 할 거면 중요하지 않습니다. 네오서울이 아무리 다크하게 그려져도, 네오서울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앎직해서 네오서울을 픽션에서 이용했다는 것이 첫째로 중요하고요, 둘째로, 그렇게 이용되기 시작함으로써 앞으로 더 많이 이용될 것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순환이에요. 실제 서울이 찬란하게 빛나는 선량한 도시 유토피아여도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요즘에 Cyber Mage라는 오디오북을 듣고 있는데, Saad Z. Hossain님이 쓰신 책이고요, 2089년 방글라데시의 다카를 배경으로 한 SF책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계관이 어떤가 하면, 사람이 살 수 있는 기후를 지구 전반에서 유지하기가 어려워서, 또한 다른 여러 복잡한 이유로, 어마어마한 대도시에서가 아니면 인류가 살 수 없습니다. 부유층들이 기후를 유지하되, 빈곤층이 거기에 끼어서 살아남는 형태로 도시가 유지가 되며, 빈곤층을 왜 살려두는가? 각종 나노기술이 살아 숨 쉬는 주거지로서 인간의 신체가 기능합니다. 그래서 살려두는데, 하여간에 이렇게 대도시가 아닌 곳은 사람을 살릴 만한 시스템을 구축할 수가 없어서 자연으로 돌아간 세계가 펼쳐져요. 그러면서, 정확한 말은 기억이 안 나는데, 미국의 중부 지역,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급의 도시가 없는 지역, 거기가, 뭐라더라? 토끼만 뛰어다니는 벌판이랬던가? 하여간에 사람이 이제 돌아다닐 수 없고, 살아남은 동물 개체들만 아직 머무는 그런 곳으로 묘사가 됩니다. 그리고 북유럽의 국가들은 국가 자체가 전멸한, 그런 세계.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고, 국가가 법인화된 시대. 싱가포르가 가장 처음으로 incorporate를 했다, 이런 말이 나와요.

그런데 이 책에서. 이 세계관에서. 서울이 언급이 됩니다. 주요 무대는 다카지만, 서울이 다른 몇몇 생존한 도시와 함께 언급이 되는데, 이건 진짜… 이게 사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로맨틱한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고요,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제가 관찰한바로는 창작자의 사랑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에 가장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창작물에 있는 모든 요소요소 하나하나는, 그것이 아무리 누아르하든, 빌런이든, 재앙이든 뭐든, 있어야 해서 있는 거니까요. 거기서 언급됐다는 것 자체가, 앞으로 더 많이 언급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모든 창작자가 다 알 거예요. 그런데 서울은 이제 SF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대도시 중의 대도시란 말이죠. 그러면 점점 더, 앞으로 점점 더, 서울이 디스토피아로 그려지든 유토피아로 그려지든, 국제 관객 및 독자 및 청중은 그저 반가운 겁니다. ‘내가 아는 서울이다.’ 재앙을 투사할 수 있는 대도시 중 하나로 그려진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크나큰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디스토피아라는 게… 이게 딱 ‘디스토피아는 살기 안 좋은 곳을 의미하니까 나빠’라고 할 게 아닙니다. 아까 그 스튜디오 오너들이 경멸스러운 이유는, 정치적 계산을 할 거면 제대로 계산했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경멸스러운 건지, 실제로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현장 작업자들은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가 좋으니까 누아르하게든 아니든 스크린에 담았을 겁니다.

이론적으로는 창작자도 자기가 싫어하는 걸 픽션에 담을 수 있긴 한데, 실제로 본 적이 거의 없고, 정말로 싫어하는 걸 픽션에 담았다고 주장하는 경우, 어… 그것이 그 창작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풀린 경우가 있는지 상당히 의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들이 다음 챕터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챕터 5에서. 창작자가 뭘 만든다는 건, 진짜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는 것. 그런 말로 그 챕터에서 설명이 되진 않지만, 그 정신은 드러납니다. 아무리 어두운 그림을 그려도, 창작자가 뭔가를 작품 내에서 언급을 한다는 건, 그 자체가, 그게 사랑입니다. 그 어두운 것을 좋다고 해서, 혹은 그것에 대해 로맨틱함을 느껴서 사랑인 게 아니라, 걔를 그림으로 해서 걔를 존재하게끔 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겁니다. 걔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거라서.

그리고 지금 이 챕터, 챕터 4에서 언급되는 로케이션 촬영에 대해 관객들이 반응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비슷한 맥락에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관객이 직접적으로 영화를 만든 건 아니지만, 내가 자꾸만 계속 뭘 봄으로써 나는 그것의 창작에 일조하게 됩니다. 제가 한국에 간 지가 4년 반이 됐어도, 아임 드리밍에서만이 아니라 제가 영어로도 한국 얘기를 할 거 아니겠어요? 두꺼비 소주 얘기, 써브웨이 얘기, 얘기한다고요. 그러면 그게 사랑이란 말입니다. 창작이 무슨 거창한 게 아니고, 내가 인스타그램 사진 하나를 찍어서 그걸로 두꺼비 소주 사진이 이 세상에 하나 더 생기면, 그게 두꺼비 소주에 대한 사랑이에요. 그걸 사진을 잘 찍든 못 찍든 두꺼비 소주를 욕하든 두꺼비 소주를 찬양하든, 그건 다 2차적인 문제입니다.

아마 로케이션 촬영된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을 지켜보던 1900년대 중반의 관객들은 자신들이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이라는 대도시의 선순환에 일조하고 있다는 걸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알았을 겁니다. 드라마나 책이나 뭔가에 내가 아는 장소, 아는 사람, 그런 요소들이 나오면 반갑잖아요? 그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생명을 주는 거예요. 수많은 창작자들이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이유는, 디스토피아가 있어야 유토피아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즉, 디스토피아는 필요하다. 이것은 제로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상대성적인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반대되는 게 있어야 지각을 하니까요. 그리고 지각되는 상대성은 꼭 물질세계에 존재할 필요가 없기에, 여기서 또 픽션이라고 굳이 따로 구분되는 작품들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시 스튜디오 거물들의 비겁함을 좀 더 언급해 보자면, 노동조합들을 억누르려고 마피아를 고용했대요. 대단하다. 그런데 이러한 녀석들을 언급하는 것의 기능 중 하나가 뭐냐 하면요, 우리가 이제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을 대조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당대에 대해 책에 이렇게 나와요. “할리우드 거물들의 성공적인 분할 통치 정책은 각각의 노동자 그룹들이 서로 겨루게끔 했다. 잉여 노동력의 과잉으로 인해, 이 업계에서는 파업 노동자들이 비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충분한 수의 ‘배반자’가 항상 보장되었다. 이런 점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로스앤젤레스의 오래된 적대적 역사와 오픈 숍… 노사관계의 전통을 전형적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로스앤젤레스를 동부의 좀 더 오래된 산업 도시들과 차별화했고, 이것이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선구자들이 1910년대에 처음부터 로스앤젤레스로 이끌린 이유 중 하나였다.”

여기서 오픈 숍 노사관계란 “고용자가 노동조합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근로자를 채용할 수 있고, 근로자 또한 노동조합에 가입이나 탈퇴가 자유로운 제도”를 말합니다.

이러했는데, 지금은. 일단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옛날 같지가 않거니와. 촬영 장비의 비용이 너무나 저렴해졌고. 실무적인 제작과 창작에 참여하는 사람들 간의 네트워크 형성도 너무나 용이하며. 만들어낸 창작 작품을 퍼뜨릴 수 있는 경로도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다. 여러분, 넷플릭스가 제작하는 작품들이 별거 아니게 여겨지던 시절을 기억하십니까? 혹은 유튜브에 줭말 참 귀엽지만 귀여운 것 너머로는 글쎄 뭐 어째야 하나 싶은 고양이 영상만 올라오던 시절을 기억하십니까? 인스타그램에서 돈을 번다는 건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 기억나세요? 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정도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더는 유일하기는커녕 가장 중대한 옵션조차 아니게 된 지 한참이 됐습니다.

스튜디오 거물들의 주요 대표인 미국 영화 제작자 협회의 회장인 에릭 존스턴이 1946년에 이렇게 선언했다고 합니다. “유토피아란 제작이다!”

네. 유토피아가 제작이고 제작이 유토피아라면, 2024년에 이 에피소드를 듣고 계실 여러분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는 그곳이 바로 유토피아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에릭 존스턴 씨가 실존했던 그 어떤 시공간보다도, 우리의 지금 여기가 더 유토피아예요. 대부분의 국가에서, 단군 이래, 이 정도로 표현의 자유가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어차피 단일 유토피아와 단일 디스토피아는 없습니다. 제가 항상 제안하죠. 유리한 거 믿으세요. 필요하다면, 저쪽에 그려진 디스토피아를 이용해서 지금 여기가 유토피아인 걸 확인하세요. 심지어 저쪽에 그려진 디스토피아가 지금 내가 있는 곳이어도, 디스토피아라던 바로 거기가 지금 당장에 여기서 유토피아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디스토피아로 그려질 만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유토피아일 수 있습니다. 아무 시공간이나 디스토피아로 그려지는 건 아닐뿐더러, 만약 절대누아르, 절대환멸, 기타 등등 절대부정 같은 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아무도 몰라줬을 수도 있는데 누군가가 알아줬으니까요.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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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Ofer Koren – My Brand New Car – No Lead Vocals
  • Max Hixon – Let Me Dream – Instrumental Version
  • The Magnetic Buzz – Dont Let the Summer End
  • Randy Sharp – The Queen and the Bird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 2024 한아임

소개

✨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