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76] <누아르 어바니즘> 5. 저런, 도쿄가 무너지네: 전후 일본 대중문화에서 나타나는 오락성 아포칼립스와 도시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은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챕터, 챕터 5를 다룹니다. 챕터 필자는 윌리엄 M. 츠츠이님이고요, 그는 유머 감각이 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종류의 유머 감각입니다. 이를테면, 챕터 제목부터가 이렇습니다. “챕터 5. 저런, 도쿄가 무너지네: 전후 일본 대중문화에서 나타나는 오락성 아포칼립스와 도시.” 저런, 도쿄가 무너지네. 어머나 세상에, 도쿄가 무너지네. 또 무너지네? 어제도 무너졌는데 다시 태어나더니 오늘은 다시 또 무너지네? 요 갬성이 이 챕터에 퍼져 있고, 그것이 내용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도대체가 도쿄라는 도시는 너무나 멸망과 재건을 반복한 나머지, 슈퍼파워 같은 걸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멸망이 더는 멸망 아니게 하며, 재건이 더는 재건 아니게 한다. 

그럼 오늘의 수다, 바로 시작할게요.


이 챕터가 너무나 재밌고, 이 필자의 유머 감각을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아까 언급한, 멸망과 재건의 반복으로 인한 멸망도 멸망 아니고 재건도 재건 아닌 상태에 대한 프라이드가 이 저자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재밌는 프라이드가 있어요. 무슨 막 진짜 찐 자부심, 이런 거 말고, 유머 감각이 넘치는 프라이드. 

챕터가 처음부터 그 프라이드로 시작을 합니다. 첫 문단이 그 프라이드며, 이 챕터 내용 전반을 잘 요약해 주고 있기 때문에, 문단 전체를 읽어볼게요.

책 왈. “『공포의 생태학』에서 저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우주의 재앙 수도,” “요한계시록의 테마파크,” 그리고, 간단히 말해, “파멸 도시”로서 로스앤젤레스의 명성을 쌓고자 한다. 데이비스는 1909년부터 1996년 사이에 나온 138개의 문학적·영화적 아마겟돈을 나열하면서, “놀랍고도 다양하며, 심지어 난폭한 방식으로 로스앤젤레스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 풍부한 전통의 소설 및 영화를 연대순으로 기록한다. 데이비스는 이렇게 장담한다. “천사의 도시는 그 허구적 파괴가 일어나는 빈도 때문에 독특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종말이 독자와 관객에게 제공하는 즐거움 측면에서도 독특하다. 세계는 로스앤젤레스가 태평양으로 침몰하거나 샌안드레아스 단층에 삼켜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또한, 뉴욕시 역시 비교적 많은 몫의 상상적 절멸을 담당하고 있으며, 숱한 관객들이 그 도시의 종말을 환호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데이비스는 LA만큼이나 “어두운 황홀경을 일으킨 도시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마이크 데이비스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 온 것 같고, 일본 영화, TV 시리즈 및 애니메이션을 보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을 쓰지 않은 것 같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기간 동안, 가상의 아포칼립스가 지구상의 다른 어떤 장소보다 도쿄를 더 자주 (그리고 훨씬 더 철저하게) 방문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 관찰자가 일본 대중문화의 “파멸이 가득한 꿈”이라고 불렀듯, 도쿄는 지진, 해일, 화재, 홍수, 사이클론 바람, 화산, 외계인 침공, 초자연적 저주, 바이러스, 독성 오염, 온갖 거대 괴물, 로봇, 그리고 질척이는 덩어리, 또한 말할 필요도 없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핵폭발에 희생양이 되어 왔다. 국내외 관객들은 엄청나게 다양한 미디어와 장르를 통해 “짓밟히고 불살라진 도쿄의 무수한 복제물”에 노출되었다. 여기에는 1923년 관동대지진을 묘사한 무성 영화며 냉전 시대 SF와 특수 효과 영화, 또한 실사 촬영 어린이 TV쇼며 애니메이션 TV 시리즈 및 영화, 거기다 블록버스터 재난 및 액션 영화며 만화책 및 비디오 게임이 전부 포함된다. 전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리고 특히나 1960년대 중반 이후로, 일본 미디어 소비자들은 그들의 수도가 가상의 소멸을 겪는 모습을 TV나 근처의 영화관에서 적어도 매주, 그리고 때로는 매일 볼 수 있었다.”

이 문단은 도쿄가 겪는 파괴의 사이클을 잘 요약해주고 있으면서도, 이런 문장 있잖아요. “그러나 마이크 데이비스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 온 것 같고, 일본 영화, TV 시리즈 및 애니메이션을 보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을 쓰지 않은 것 같다.” 이런 게. 이것이 어… 이게 비꼬는 느낌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어로 들으면 좀 더 가벼운 느낌이 드는데, 아무래도 한국어에서 이런 어투의 유머를 던지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만, 하여간에 비꼬는 느낌이 아니라, 이것은 재밌는 프라이드다. 윌리엄 츠츠이사마가 보기에는, 도쿄가 세계 최고 파멸 도시인데 마이크 데이비스 사마, 그대는 왜 때문에, 어떻게 때문에 엘에이를 거기다 들이댑니까? 저조차, 엘에이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 엘에이를 파멸 도시라고 부르는 건 좀… 좀 그것은… 그것은 유머 감각이 있어서 웃긴 게 아니라, 정말, 어… 윌리엄 츠츠이사마 말이 맞아요. 미디어를 좀 너무 덜 본 것 같아요, 마이크 데이비스 사마가.

어… 갑자기… 봉준호 감독님인가요? 그분이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라는 취지에서 하신 말씀이 있었대요. 영어 사용자들 중에서는, 특히나 영어만 사용하는 사용자, 그것도 그중에서도 특히나 날 때부터 영어만 썼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 영어만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영어 매체가 아니면 세상에 존재 하는 게 없는 듯한 뉘앙스를 풍길 때가 있습니다. 마이크 데이비스 님은 1946년에 태어나셨고 2022년에 돌아가신, 캘리포니아에서 나고 자란 분이시고요. “공포의 생태학”은 1998년의 책인데, 물론 이때 당시에, 1998년 혹은 그 이전에, 미국에서 일본의 미디어든, 다른 나라의 미디어든, 그런 것들을 대량 소비하는 건 어려웠겠죠. 그러나. 그래도. 너무 모르고 쓴 것이 아닌가? 

어… 마이크 데이비스 님이 유명하신 만큼, 챕터 5의 이 초반 부분에서도 그렇고, 나중에, 남아공을 다루는 챕터 9에서 특히나, 그 한계에 대해 많이 지적을 받으십니다. 이건 뭐, 학계라는 곳에 있을 것이면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저는 학계에 있지 않은데. 학계란 곳은 정말 뭐랄까,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자기 생각을 말하면서도 자기 생각이 자기 생각일 뿐이 아니라는 것이 깔려 있는. 그러니까, 내 우주라서 이러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생각이 아니잖아요. 하드 사이언스뿐만 아니라, 소프트 사이언스라고 부르기도 애매한데 언젠가부터 과학이라는 단어를 이름에 달고 나타난 정치과학이라든지 사회과학이라든지 이런 분야에서는, 이게 언제부터 생겨난 트렌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자기 생각을 말한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자기 생각일 뿐만 아니라, ‘과학’이라고 부르잖아요. 어느 정도 실제로 세상이 이렇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만약 마이크 데이비스 님이 “나는 엘에이에 사는데, 엘에이의 파멸이 너무나 자주 빈번하게 매체에 그려지는 것 같아. 너무, 그냥 내 느낌적 느낌으로, 특히나 내가 인생의 대부분을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보냈기 때문에, 특히나 엘에이의 파멸이 나한테 너무 진짜 같고, 너무 와닿아.” 이렇게 주장하셨다면, 이건 뭐… 이건 마이크 데이비스 님 느낌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 세상의 누구도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말 못 합니다. 마이크 데이비스 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예요.

그런데 시회과학, 정치과학, 그리고 과학이 안 붙더라도 예를 들어 역사학인데 그것이 뭔가… 이것이 진짜의 역사 버전이다, 이런 식의 뉘앙스가 학계에 있던데, 저는 이게 굉장히 신기해요. 절대 학계에 있을 사람이 아닌 거죠, 제가. 그래서 누가 이래저래 써놨는데 그걸 또 아니라고 하는 것도 신기해요, 사실은. 아, 그 자체가 이상하다기보다는, 그것이 왜 ‘학계’라고 이름붙이면 되게 의미로운 게 되고, 그냥 아무 다른 사람들이 살면서 말하면 그냥 아무 말이 되는지, 그걸 모르겠어요. ‘학계’라는 말 자체가 되게 신기하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이라는 믿음 체계 내에서 학계가 있는 건 이해가 가요. 왜냐하면 과학이라는 믿음 체계는 딱 나. 너. 외부. 내부. 다 떨어져 있고. 관찰. 관찰 못 함. 이게 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니까. 그런데 완전 그런 것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그 완전 과학도 아닌 분야들의 학계가 있는데, 매우 혼란스럽고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런 학계에서는 마치 의견 같으면서도 의견이 맞는데 또 완전 의견도 아닌, 진짜가 있을 것처럼 하는 뉘앙스가 있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런 거라면은 마이크 데이비스 님의 주장, 로스앤젤레스가 약간 뭐랄까… 세계 최고 파멸 도시? 라는 그런 생각은 정말… 정말 너무 외부의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닌가? 챕터 9에서도 그 챕터 필자가 지적하는 부분이 비슷하거든요. 너무 서구 관점에서 외부로 디스토피아를 민다고. 그런데 챕터 5에서는 서구 관점에서 로스앤젤레스가 최고 파멸 도시라고 여긴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겁니다. 챕터 5에서는 그 지적이 챕터의 주 내용은 아닙니다만, 그리고 챕터 5와 챕터 9의 필자들이 언뜻 보면 상반되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같은 말이에요. 외부로 디스토피아를 밀든, 로스앤젤레스 및 뉴욕으로 디스토피아를 가져오든, 서구밖에 모르는 관점이라고 챕터 5와 챕터 9의 필자들이 둘 다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챕터 9의 필자는 좀 진지한 글 스타일을 지니셨고요, 챕터 5의 필자, 우리 츠츠이 사마. 츠츠이 사마는 진짜 웃겨요. 저는 이분 스타일이 좋습니다. 제일 재밌게 읽은 챕터고 정말. 그리고 다만 츠츠이 님의 스타일이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서가 아니라. 실제로. 로스앤젤레스의 파멸이 도쿄의 파멸에 비빌 레벨이 아니지 않나. 너무. 진짜 마이크 데이비스 님. 어… 마이크 데이비스 님 저서를 다 읽어본 건 아니지만. 로스앤젤레스는 파멸의 어떤 작은 부분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은데? 너무 남부 캘리포니아에만 살면서 남부 캘리포니아적이고 미국적인 미디어를 주로 소비하신 것이 아닌가? 일본은 특히나, 실사 영화로 파멸하지 않잖아요. 일본은 망가와 애니의 강국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파멸을 하면, 이것은 정말, 차원이 다른 파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챕터 5에, 지진이라는 지리적 특성이 생성하는 일본인의, 뭐랄까, 디폴트 감정 상태 같은 것에 대해 짧게 언급이 나옵니다. 

책 왈, “도널드 리치가 관찰한 것처럼 “일본인은 스트레스의 순간에, 그리고 심지어 습관적으로도, 삶을 완전한 불안의 기간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관찰의 진실성은 그 국토가 매해 태풍으로 황폐해지며, 그 땅 자체가 매일 흔들린다는 점에서 생생하게 표현된다.”

만약에 일본에 아무 전쟁도 없었고, 아무 핵폭발도 없었고, 하여간에 아무 인간 사회의 폭력과 죽음이 없었어도, 지진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일본은… 이것도 캘리포니아랑 비할 수가 없이 훨씬 자주 일어나잖아요. 저희 가족은 남부 캘리포니아에 이제 거의 20년을 살았고, 저도 그중 많은 기간을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살았는데, 지진이 나도, 여기는… 도쿄 같은 대도시에서의 지진과 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챕터 4에서 얘기했죠. 로스앤젤레스의 지리적 특성이, 다 널리널리 퍼져 있는 거라고. 물론 지진이 나면 그것은 재앙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도쿄의 그 빽빽한 도심에서 혹시나 만약에 고층 빌딩이 무너진다면 벌어질 재앙에는 비할 바가 아니죠. 

이런 이유에서, 챕터 5, 시작부터 재밌었다. 이… 파멸 하면 도쿄가 최고지, 하는, 어떤, 언뜻 생각하면 저런 분야에서 1등 하고 싶진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진짜 너무 말도 안 되는, 엘에이를 경쟁 상대로 제안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 약간 발끈하는 심정이 좀 이해도 가는, 그런 챕터고, 그런 글 스타일입니다.


이 챕터는 얘기할 게 정말 많습니다. <누아르 어바니즘>을 작업하기 전부터도 제가 알고 있었던 것은 제가 일본 애니를 꽤 좋아한다는 것이었고, 이번 챕터를 작업하면서 보게 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그 느낌을 더 강화했습니다. 한아임, 일본 애니 좋아한다. 일본 드라마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고. 정말 애니를 특히나 좋아하는 것 같아요. 도저히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이 애니에서는 벌어지고, 그 ‘말이 안 됨’이라는 정서를 반영하기 위해 창작자들이 쓰는 방법들이 너무 좋습니다. 이것은 한국의 웹툰을 보면서도 느끼는 점이고요. 전반적으로, 실제 인간 배우들이 등장하지 않아서 창작자들이 세상은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는 그려진 서사에서 제가 자주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 크리에이터들은 너무나 신이야. 너무나 신이고. 너무 그게 저는, 그 느낌이 좋아요. 저 신들은 무슨 세계를 펼쳤나 구경하는 것이.

그런데 아무리 신들이 세계를 펼쳐놨어도, 저는 제 서사의 이야기꾼이기 때문에, 그걸 갖고 뭘 느낄지는 물론 당연히 제 마음입니다. 그래서 특히나 에피소드 65에서 다룬 “망상대리인”을 볼 때, ‘내가 하는 생각이 아마 창작자들의 의도와 좀 완전히 반대될 수도 있겠는데?’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망상대리인”은 애니고요, 챕터 5에 언급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음… 챕터 5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수많은 것 중 하나가 “망상대리인” 및 챕터 5에서 언급된 현실 도쿄의 사건들입니다. 대표적인 현실 도쿄의 사건으로, 옴진리교 사건이 있습니다.

책 왈, “1995년 3월 20일, 옴진리교 교인 5명이 도쿄 지하철에서 사린 가스를 방출하여 12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수백만 명의 도시 거주자의 교통망과 일상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했다. 1984년 아사하라 쇼코에 의해 설립된 옴진리교는 불교, 힌두교, 도교 전통과 일본의 풍부한 천년왕국주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며, “파멸에 대한 열망”과 “아마겟돈에 대한 강렬한 굶주림”을 견지한 “종말론적인 컬트 종교”로 흔히 묘사되어 왔다. 옴진리교는 타락한 현재 세계의 파괴가 도쿄에서 시작하며, 그것이 새로운 낙원 문명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천년왕국주의적 환상은 많은 부분 일본의 전후 대중문화에 널리 퍼져 있었던 아포칼립스적 이미지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널리 보도된 바와 같이 옴진리교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인 아사하라는 노스트라다무스, 히로시마, 그리고 핵전쟁 이후를 그리는 미국의 미니시리즈인 <그날 이후>에 집착했을 뿐만 아니라, 디스토피아적이고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미래를 배경으로 한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강박적으로 읽었다. 또한 일본의 운명에 대한 그의 예언은 열도가 핵 황무지가 되며 바다에 삼켜질 거라는 내용을 포함했는데, 이는 <우주전함 야마토>와 <일본 침몰> 같은 작품들과 결을 같이했다. 실제로 옴진리교의 일꾼들은 교단의 본부를 위해 개발 중이던 공기 정화 및 여과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야마토>로부터 “코스모클리너”라는 용어를 차용하기까지 했다. 사린 공격 이후에 진행된 옴진리교 교인들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핵심 “종교 귀의자” 중 상당수는 사실 열렬한 SF 팬이었고, 많은 경우 대중문화에 담긴 단순한 진실(좋은 녀석이 나쁜 녀석을 이긴다)에 대한 이상주의적인 갈망을 품었으며, 아포칼립스의 미학, 기술, 그리고 해방적 가능성에 매력을 느꼈다. 옴진리교가 개종자를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만화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한 관찰자가 말했듯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는 도쿄 통근자들을 독살하면서 순진하게도 자신들과 일본 사회의 구원을 추구했던 옴진리교의 신봉자들은 결국 “고지라의 아이들”일 뿐이었다.”

이 문단 및 챕터의 전반적인 내용에, 현실과 픽션이라는 것의 차이를 구분을 못 하는 듯한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제가 아주 예전부터 아임 드리밍에서 말했던 것, 그리고 “망상대리인” 다룰 때 말했던 것, 그리고 챕터 3에서 마리오 파니 얘기를 하면서 말했던 점은 이겁니다. 현실과 픽션의 차이를 진짜로 구분을 못하면 이러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진짜로 현실과 픽션이 똑같아서, 너무 하나라서, 그걸 갖고 왈가왈부하지 않을 거란 말이죠. 제 이름이 한아임인데, 누가 와서 저한테 “너 한아임 아니지?” 하면 그게 저한테 얼마나 웃기겠어요? 그렇잖아요? 내가 한아임인 게 너무 현실인데. 여러분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중 실제로 그러하지 않은 게 있습니까? 없어요. 이게 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질문인데 닭고 달걀도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습니다. 스스로의 삶에 적용해 보시면 실제로 세상이 그렇게 펼쳐져요.

아무튼 근데 그 부분은 생략하고, 당연하게 생각했으면, 내가 정말 픽션이라고 부르는 걸 현실이라고 생각했으면, 그것은 너무 당연해서 그걸 가져다가 남을 막 설득하려고 할 일이 펼쳐지지도 않고요, 잠깐 펼쳐진다 하더라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냥 넘어가면 그뿐입니다.

아주 작은 예시로. 내가 만약에 나의 외모에 대해 아무 거부 반응이 없는 사람이에요.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내가 그냥 평범하게 생겼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웬 꼬마가 와서 “와 아줌마, 아저씨, 진짜 못생겼다! 와! 진짜 못난이다!” 이러면서 막 손가락질하면서 하하하하 비웃고 갔다고 해볼게요.

이때, 만약에 내가 정말로 내가 그냥 평범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픽션이든 아니든, 한마디로 내가 ‘사실’이라고 불리는 세계에서, ‘현실’에서, 진짜로 못생겼든 말든, ‘저 꼬마 진짜 이상한 꼬마네?’ 하고 넘어가든가, 아니면 그조차도 생각 안 하고 꼬마랑 같이 하하하 웃고 말았을 거예요.

그런데 내가 겉으로는 ‘나는 평범하게 생겼어. 이 정도면 괜찮아.’라고 여기면서 진짜 더 깊은 마음속으로는 ‘나는 되게 못생겼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런 꼬마가 와서 나한테 막 못생겼다고 놀리고 손가락질할 때, 분노가 치밀든, 수치심이 올라오든, 울고 싶어지든, 이런 반응이 올라옵니다.

이게 제가 말하는 겁니다. 정말로 픽션과 현실을 구분을 안 해서 정말 남들이 픽션이라고 말하는 게 내 현실이 된 것과, 사실은 내 깊은 마음속에서 ‘나는 괜찮게 생겼어’라는 픽션이 얼마나 현실과 다른지를 알고 있는 것은 천지 차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 절대 미모라는 기준이 있다면, 아주아주 못생긴 사람이 ‘나는 괜찮게 생겼어’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 겉보기에는 픽션과 현실을 구분을 못 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사실은, 이 사람은 알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못생기게 여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이러한 현실과 허구에 대한 진정한 깊은 믿음이 <누아르 어바니즘>에서 언급되는 각종 케이스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챕터 3에서 언급된 마리오 파니는 건축가인데, 멕시코시티에서 자신의 버전의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이미 있던 건물들을 밀어버린 데다가, 거기서 유적이 나왔는데도 기어이 거기다 짓겠다고 해서 거기다 대형 아파트 단지를 지었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대거 죽어나갔는데도 자기는 잘못이 없고 그런 유토피아 단지를 더 지었어야 했다고 한탄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러한 단지들이 지진에 취약한 멕시코시티라는 곳에는 적합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는데도 건축가로서 자괴감을 느끼지는 못할망정 관리감독 소홀에 대해서도 약간만 잘못을 인정한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그때도 말했듯이, 사실은 자기가 유토피아를 가져올 거라고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밖에다 대고 나는 유토피아 만든다 만든다 해도 소용 없습니다. 이 사람이 유토피아 만든다고 한 곳에 <누아르 어바니즘> 책 전체를 통틀어서 아마 최악의 디스토피아가 나타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시공간의 사람들도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특히나 챕터 3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파니의 이 어마어마한 망상 때문입니다.

뭐냐면요, 예를 들어 중국 챕터. 중국 챕터에서 정부의 막무가내 정책으로 인해 망가진 노동자들의 삶이 나오는데, 물론 그것도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만은, 챕터 3의 마리오 파니가 특히나 두드러지는 이유는, 이 사람은 진짜로 자기가 얼마나 유토피아를 못 가져오는지를 표면적으로 너무 부인하는 거야. 알면서도 모른다고 하는 거야. 오히려 제가 느끼기에는, 중국 챕터의 정부 사람들은, 알아요. 자기네가 사실은 유토피아 가져오는 거랑 아무 상관없이 산다는 걸. 노동자들도 알아요. 공장주들이 부패했고, 뇌물을 받고 있고, 노동자들의 삶에 아무 관심이 없고, 그냥 뭐 경제발전이네 부흥이네 조화네 뭐네 떠뜰고 있다는 걸. 그걸 압니다. 아는 것처럼 저는 느껴졌어요. 노동자들이 한때 정부의 약속을 믿었고 그 약속이 어겨졌을지언정, 그래서 그것이 사기일지언정, 일이 심히 잘못됐다는 걸 노동자들이 아주 잘 알고 있고, 공장주들도 압니다.

그런데 마리오 파니는 진짜 무서운 이유가, 진짜 이 사람은 진짜로 몰라. 잘 알면서도 몰라. 그러니까 이…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이게 그러니까 표면과 진짜 깊은 내면의 차이예요. 자기가 얼마나 유토피아를 못 가져오는지 그걸 모르는데, 그것을 어떻게 보면 현실과 픽션을 구분을 못해서라고 할 수도 있지만, 더 깊게 들어가 보면 사실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거예요. 마치 속으로는 자기 스스로를 못생겼다고 여기는 사람이, 자기를 놀리는 꼬마가 왔을 때 “아니야! 난 되게 잘생겼어!”라고 소리치듯이, 파니는 계속, 계속, 계속 나는 유토피아 만들 거야. 유토피아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은 나야. 나는 사람들을 구원할 거야. 이러고 있는 거예요.

구원 얘기가 나왔으니. 챕터 5로 다시 돌아가자면. 옴진리교도 똑같습니다.

옴진리교인들은, 방금 전 인용한 문단에 나왔듯이, 각종 픽션에서 여러 개념들을 가져와서는 종교를 만들더니, 그 종교에서 주장하는 유토피아를 얼른 빨리 구현하려고 한 건지, 도쿄 지하철에서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죽였죠. 이 옴진리교 사람들은 현실과 픽션을 구분을 못 하는 게 아니고, 되게 잘 알고 있는 거예요. 자기네가 주장하는 유토피아가 여기 없다는 걸. 그리고 자기들이 그걸 구현을 못 할까 봐 되게 전전긍긍하는 겁니다. 정말로 자기네가 옳으면, 이건 옴진리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그런데, 정말 자기가 옳다고 여기면, 이렇게 투쟁 안 해요. 정말로 내 신이 옳다고 여기면, 나는 다른 종교랑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 정말로 다른 종교 믿는 사람들이 지옥 간다고 여기더라도, 그래도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지옥 가게 두면 되지. 특히나, 내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지옥이 필요하다는 아주 간단한, 정말 표면 논리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을 인지를 하고 있으면, 싸울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지금 옴진리교든, 신의 이름으로 전쟁해대는 다른 종교든, 신은 없다고 하면서도 깨달음의 탈을 쓰고 개개인을 학대하는 종교든, 어때요? 실제로는 안 믿어요, 이 사람들. 신도 안 믿고, 구원도 안 믿습니다. 구원 안 올까 봐 구원 빨리 오게 하려고, 혹시나 나 이거 타이밍 놓쳐서 망할까 봐, 다른 사람들 공격하고, 신 믿으라고 떠들어대고, 그러고 있잖아요. 참고로, 내 신 최고라는 말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내 신 최고라고 여길 수도 있고, 그러한 내 마음 상태가 너무나 행복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좋은 거 나눠주고 싶을 수 있죠. 그런데 정말로 내가 갖고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그걸 거부해도 그걸 막 억지로 나눠주는 경우는 없단 얘깁니다.

하다못해 내가 맛있는 과자를 먹고 있어요. 친구가 와서 친구한테 ‘야 이거 과자 맛있어, 먹어 봐’ 했어요. 그런데 친구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 과자를 너무너무 싫어해요. 그러면 뭐, 한 번쯤은 더 권할 수 있어도, 친구가 이 좋은 거 안 먹겠다는데 뭐, 그냥 둬야지 어떡해요? 그걸 왜 내가 친구한테 꼭 먹게끔 해야 하냐는 겁니다. 만약 내가 친구한테 과자를 억지로 먹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그건 그 과자가 좋은 거라서 친구한테 좋은 걸 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게 있는 거예요. 내가 모르는 다른 뭐가 내 안에 있는 거예요. 과자를 줬는데 거절당해서 수치스럽다든지. 좋은 걸 줬는데도 고마운 줄 모르는 친구가 경멸스럽다든지. 아니면 단순히 거절당해서 슬프다든지. 뭐 기타 등등. 과자가 좋은 거랑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현실과 픽션을 구분을 못해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 고 했을 때, 그것은 어느 정도 선까지는 맞는 일입니다. 마리오 파니가 ‘나는 유토피아를 만들 거야’라는 픽션을 믿었는데, 그게 구현이 안 됐을 때조차 사태 인지를 못 해서 현실과 픽션을 구분을 못 한다고 볼 수 있다. 맞는 말이죠.

그런데 더 깊게 들어가면 사실은 진짜 구분을 잘하고 있는데 인정하기가 싫어서 이러고 있는 거란 말을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망상대리인”에서는 대표적으로 형사 캐릭터가 이런 인물이죠 그 애니에 나오는 그 어떤 다른 캐릭터보다도 이 형사 캐릭터가 망상이 더 심각해요. 다른 캐릭터들은, 사실, 그 정도로 정교하게 자기 자신을 속이려면, 엄청나게 잘 알아야 하거든요, 자기가 만들려는 허구 세계가 현실이라고 불리는 세계와 어떻게 다른지? 그런데 형사 캐릭터는, 무슨 특징을 보이냐면, 용의자를 붙잡고 쥐흔들면서 “네가 범인이지!”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장면도 있고, 자기가 붙잡고 있던 용의자, 그것도 미성년자 용의자가 살해를 당하는데, 전혀… 그 상황에서도 지 불쌍한 척을 하대? 저는 너무 충격받았어요 그 부분에서. 어… 극 중 이러한 용의자들의 상당수가 망상에 빠져 있긴 하기 때문에, 사실은 이 미성년자 용의자가 살해를 당한 게 아니라 자살을 한 거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포인트는 이거예요. 미성년자 용의자가 살해를 당했든 자살을 했든, 걔가 경찰서에 있는 와중에, 그것도 내가 걔한테 막 소리지르고 막 몰아붙이고 이런 다음에 걔가 죽었는데, 살해든 자살이든, 그게 중요해요? 어떻게 이 상황에서 그게 제일 중요해요? 이 형사의 망상은 어마어마하게 심각해요. 자기는 이 망상꾼들로부터 세상을 구해야겠다는 거야. 끔찍하죠. 누가 누굴 구해. 너부터 구해. 넌 세상을 구할 수 없어. 그런데 세상을 구할 수 없는 나라는 진실을 마주하기가 너무 싫어가지고, 그게 너무 수치스럽고 비참하고 무섭고 그래서 그걸 안 보는 상태가 이 형사의 마음 상태입니다. 사건 해결? 그거 중요하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지만, 사실은 이 형사한테 그거 안 중요해요. 용의자가 진짜 범인이든 말든 상관없이 붙잡고 쥐어 흔드면서 네가 범인일 거라고 우기는데 뭐. 


이 모든 게 “고지라”에서도 얽혀서 드러납니다. 영화 “고지라”도 저희가 다뤘었는데, 그때도 얘기했었죠. 고지라에서 세상을 구한다고 하는 인물들이 얼마나 문제를 필요로 하는지. 왜냐하면, 세상을 구하려면 문제가 필요해요. 문제가 없으면, ‘세상을 구하는 나’는 존재할 수가 없거든요. 

책 왈, “아포칼립스에 대한 상상은 비관주의와 허무주의의 반영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잠재적 치료제다. 희망과 공동의 노력에 대한 일종의 대중적인 천년왕국주의적 환상인 것이다. 마이클 바르쿤이 말했듯, “재난은 박탈을 가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이익을 주기도 한다. 재난이 벌어지는 와중에, 희생자들은 강렬한 따뜻함, 공동체 의식, 동지애, 그리고 동질감을 자주 경험하는데, 이는 일상적인 삶에서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늘 이랬으면!’””

무슨 말이냐 하면, 평화 상태라는 때에는 사람들이 막 별것도 아닌 일로 싸우는데, 막상 대단한 재난이 벌어지면 서로 협동하고, 위해주고, 희생하고, 대의를 생각하고, 이렇게 되는 양상이 있단 뜻입니다.

심지어 평화 상태라는 것도, 비평화 상태를 알아야 그게 평화 상태지, 그냥 평화로우면 그게 평화인지 모릅니다. 인지를 할 수가 없어요. 마치 계속 뜨끈미지근한 물에다 손을 담그고 있어서 그게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최적의 상태라는 걸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면 공기. 그냥 공기 맨날 있으니까, 공기 부족하거나 더럽기 전까지는 그 공기가 있다는 것도 인지를 잘 못하잖아요. 그거 계속 인지하다간 우리 다른 거 못하죠.

그래서, 이게 제가 수개월 동안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 눈작업하고도 통하는데, 이…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 마음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경멸스러운 그 마음이, 동전의 양면입니다. 제가 작년 중간 정도까지는 전자의 경향이 더 강했고 이제는 후자로 넘어왔는데 그걸 둘 다 녹여내는 시점이 올 것 같아요. 불쌍함을 못 느끼게 된다는 말이 아니고요, 그게 다 망상이라는 걸 알게 되면 불쌍한 가운데에서도 이 마리오 파니며 옴진리교며 망상대리인 형사처럼 행동하거나 생각조차 할 이유가 없게 된단 뜻입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다 보면요, 그게 언뜻 보면 되게 착한 것 같지만, 실제로 불쌍해할 일들이 계속 옵니다. 저는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증인 콤플렉스가 있었어가지고, 안 보고 싶으면 안 보면 되는데, 그걸 내가 보지 않으면 그걸 피하는 내가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쟤는 저렇게 힘든데 너는 왜 그걸 지켜보는 것도 못 해? 너 되게 비겁하다. 이런 망상을 하는 거예요. 망상인 게 맞는 것이, 그걸 제가 힘들게 지켜본다고 저 사람 삶이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서 그걸 녹이다 보니까, 불쌍한 척하는 게 너무 꼴 보기가 싫은 거야. 왜냐하면,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없어요, 여러분. 불쌍한 상황이 있는 거지, 불쌍한 존재라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불쌍한 존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게, 그 존재를 위해주는 게 아닙니다. 만약 불쌍한 존재라는 게 있다고 한다면, 그 존재는 그냥 계속 불쌍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게 어떻게 그 존재를 위해주는 거겠어요. 그러니까 증인 콤플렉스를 용해하다 보니까 불쌍한 존재도 아니면서 자기 불쌍함에 찌들어가지고 ‘나 불쌍하다 나 너무 불쌍하다’ 이렇게 자기소개 광고하고 다니는 게 너무 꼴 보기가 싫은 거예요. 자기 자신은 불쌍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 불쌍한 건 내가 나 챙겨주면 되는 거예요. 근데 그거를 다른 사람들한테, 바깥에다 던지고 다닌단 말이죠. “나 불쌍하다. 나 불쌍한 거 알아줘라. 제발, 나는 이렇게 불쌍하다.” 이게 언뜻 보면 되게 힘 없고 그런 거 같은데, 아닙니다. 대놓고 폭력적인 거보다 더 폭력적이에요 아주 교묘하게. 차라리 대놓고 폭력적이면 내가 신고를 하든, 따지든, 싸우든 하는데, 이렇게 자기 불쌍해가지고 막 피해자 코스트레를 하면, 정신 안 차리면 진짜 저 불쌍한 사람에게 딸려 들어갑니다. 팽글팽글 돌아가는 날개에 망토가 걸려가지고 딸려 들어가듯이.

이런 경우가 실제 삶에서 있어요. “안녕? 내 이름은 아무개인데, 난 되게 불쌍한 사람이다?” 특히 온라인에서. 얼굴 안 보인다고 저를 무슨 채팅 상담봇인 줄 아는 건지, 뭔지. 이게 그러니까 제 증인 콤플렉스 때문에 펼쳐진 양상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러한 현상이. 그걸 저는 옛날에는 진짜 막 아, 정말 안타깝다 불쌍하다, 내가 막, 내 일도 아닌데. 근데 그렇게 해서 뭐가 달라지냐고. 안 달라지더라고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불쌍함을 해결하고 싶은 게 아니거든요. 저도 그당시에는 불쌍한 사람을 그만 보고 싶은 게 아니었던 거고. 내가 누굴 불쌍하게 여기는 건 그 사람을 위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 불쌍해 여기는 나랑 사랑에 빠진 망상인 거지. 내가 누굴 도와주려는 것도, 도와주고 싶을 순 있어요. 그게 잘못된 건 아닌데, 그게 다른 누구를 위한 거라는 건 망상입니다. 내가 누굴 도와줬을 때 나한테 드는 그 기분이 있어요, 잦은 빈도로. 정말로 그냥 도와주면, 도와준다는 생각도 안 들어요. 내가 날 위해 그냥 하고 싶은 걸 했다고 생각하지. 근데 남 위해서 도와준다는 망상을 진짜로 믿으면, 이런 사람들 있죠? “다 해줬는데 저 사람은 나한테 아무것도 주지 않았어.” 그게 뭐냐면, 속으로는 다 세고 있었던 거예요. 계산하고 있었던 거예요. 근데 정말로 그냥 도와주면, 잃은 느낌이 안 듭니다. 애초에 도와주는 그 자체가 내가 얻는 행위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도왔다고 볼 수조차 없게 됩니다. 아무튼, 아까 그 특정 경우에, 그 사람은 나 이렇게 불쌍한 걸 다른 사람한테 계속 던진 거고 저는 그걸 받은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불쌍해해줘도, 결국에는 그 불쌍함은 그 사람 안에서 오는 거기 때문에,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실제로 충분하지가 않았어요. 영영 그 사람은 자기가 ‘나는 불쌍한 존재야’라고 하는 이상은 계속 불쌍할 거예요. 누구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안 불쌍하게 못 해줘요. 그러니까 제가 가서 너 불쌍하구나, 네 말이 다 맞네, 너 정말 불쌍하다. 이건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게 아니고, 오히려 계속 그 불쌍함에 가둬두는 거란 말이죠. 만약 제가 정말로 저 사람이 그만 불쌍했으면 좋겠으면, 저 사람을 고칠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불쌍하다고 하는 그 사람을 대하는 나를 바꿔야 합니다. 이게 실제로 됩니다, 여러분.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갖고 있는 망상을 녹이면, 그 사람은 원래의 존재로 돌아가요. 세상에 불쌍한 존재가 어딨어요, 불쌍한 존재 없습니다. 불쌍한 순간이 있을 뿐인 거지. 그러니까 불쌍하다고 스스로 자꾸만 그러는 그 사람을 내가 그만 불쌍하게 보면 원래 그 사람이 존재할 수 있었던 그 온전한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거를 제가 이 특정 경우에는 아직 실천을 못 했는데, 다른 소소한 경우에서는 좀 겪었어요. 

그런데 하여간에 중요한 건, 한아임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저 사람 고치려고 하는 게 아니고, 괴로운 저 사람을 보는 내가 싫고 힘들었다는 걸 인정한 상태여야지 이게 가능해집니다. 계속 저 바깥에 있는 사람 고치려고, 도와주려고, 안 불쌍하게 하려고 하는 건 소용이 없다. 액션을 취할 순 있는데, 마음 상태가 계속 누구를 불쌍함에 가두는 상태면, 액션을 아무리 취해도,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밑 빠진 독에 계속 물 붓는 거예요. 게다가 사실 저 사람이 괜찮기를 바란다는 게 어… 어떻게 보면 가장 불행을 바라는 행위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겉으로만 뭐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거면, 괜찮기를 바라는 게 행운을 바라주는 것과 같을 수 있는데, 정말 저 사람이 스스로 혼자서 ‘아 나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구나’를 믿는 걸 넘어서서 알기를 바라면, 그 과정까지 되게 좀… 과정이 간단하긴 한데, 쉬운 건 아니라서, 힘들 수 있어요. 특히나 이미 이런… 이런 내면작업을 아는 상태에서도 다른 사람들한테 자기 불쌍함을 던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건 진짜… 그 상태에서 저 사람이 행복해지길 바라려면 좀 많이 힘들어야 할 텐데? 밑바닥을 거하게 쳐야 할 텐데? 그러니까 저 사람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저 사람을 위한다고 내가 암만 말해봤자, 사실 그게 아니고 나를 위한 거지. 나 편하려고. 사실은 저 사람이 힘들든 말든, 밑바닥을 얼마나 괴롭게 치든 말든, 그 과정을 거쳤으면 좋겠다고 내가 말한다면, 엄밀히는 나를 위한 거지. 적어도 그 부분은 인정을 해야 한다.

하여간에 이 과정에서 한아임은 이제 불쌍한 척이라는 게 아주 진저리가 나서, 그래서 그거 동전의 반대쪽 면 보다가, 불쌍한 척하는 걸 보면 아주 그냥 꼴 보기가 싫은 상태에 도달했다. 그나마 지금 이걸 얘기하는 것도 이게 용해가 좀 돼서 얘기하는 거예요. 제가 떼에 대한 공포도 간간이 용해하면서 얘기했듯이, 이것도 웬만큼 용해가 되어 가니까 이제 빅픽처 로직을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제 경험상, 다른 분야의 경험상, 이걸 막 왔다 갔다 갔다 하다가 약간 평탄한 플러스마이너스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데, 단, 중요한 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좀비 상태가 아니고요, 다 느낄 수 있는데 느끼면서 그게 내 존재랑 아무 상관이 없는 걸 아는 고요한 상태가 찾아옵니다. 그걸 알고 지금 계속 작업하는 거예요. 계속 동전의 이쪽이나 저쪽에 있진 않을 걸 아니까. 

하여간에 음… 아임 드리밍을, 전에도 언급했었던 것 같아요. 이것이 표면상으로 우리는 영화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책에 대해서도 얘기하지만, 사실은 제가 생각했을 때 진짜 유용한 지점은, 이렇게 대놓고 내면 작업에 따른 실질적 펼쳐짐을 얘기하는 기록물이 잘 없어서, 그래서 아임 드리밍이 유용한 것 같다. 아까 그런 예시 있잖아요. ‘못생긴 걸 속으로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경우.’ 이런 예시만 보면, 다 이해가고, 다 논리적이고, 너무 이건 진짜, 단일 과학은 아니지만, 개개인의 경험 세계에서 정말 정교하게 딱 들어맞는 시스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내 삶에 적용해보면, 이것이 딱 잘라지는 무슨 플라스틱 같은 게 아니라, 진흙 같아서, 되게 끈적거려요. 끈적거리고. 이것을 어떤 모양으로든 만들 수 있지만, 명확하게 보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그게 아임 드리밍에 상당 부분 담겨 있어요. 이게 얼마나 끈적거리고 얼마나 딱 안 떨어지는지. 그러는 와중에도 떠 너무 끈적거리고 딱 안 떨어지면, 그거야말로 저 혼자 불쌍한 척하는 게 되기 때문에, 그건 진짜 다른 사람들한테 무용할 것 같고요. 이… 무용해서 유용하고 유용해서 무용한 선을 저 나름대로는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챕터의 균형 자체가 이러한 여러 경험과 정신에 부합하는 것 같아요. 츠츠이 사마의 장난기. 그것이 챕터 전체에 퍼져 있는 데다가, 챕터에서 논하는 작품 자체도 제목이 웃긴 경우가 있습니다.

책 왈. “옴진리교의 테러리즘과 고베 지진 이후에도 일본 대중문화에서 재난이 묘사될 때는 “안전한 공포”가 규범으로 남아 있었고, 놀랍게도 아포칼립스에 대한 영화적 환상에는 계속해서 어떤 장난기가 숨어 있었다. 풍자물인 <일본이외 전부침몰>은 유쾌하게 저급한 코미디인데, 일본의 세계적 야망, 이민 정책에 대한 논쟁, 그리고 재난 영화 장르를 놀림감으로 삼는다. 영화의 경쾌한 결말에서 인종적 긴장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분열된 일본은 그 외 세상과 함께 침몰에 합류한다. <일본이외 전부침몰>의 결말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남긴 정신적 외상과 끈질긴 그림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마겟돈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마지막 웃음거리가 되기에 딱 좋다.”

아니, 제목이 <일본이외 전부침몰>이라니. 너무 어이가 없지 않습니까? 제목 자체가.

책 왈. “타츠미 타카유키는 “원전 재앙은 20세기 중반에 극히 중요한 비극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블랙 코미디에 대한 일종의 문학적 동기로 변모했다”고 관찰했다. 핵과 관련된 고유한 정신적 외상이 있는 일본에서조차 영화적·애니메이션적 아포칼립스란 대중문화의 창작자에게도 소비자에게도 아직 질리지 않는 술책, 편리한 플롯 장치, 혹은 일종의 시각적 스펙터클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아마겟돈 … 은 전후 일본의 상상 속에서 불변했으며, 그 이미지는 액션 영화에 나오는 심장을 뛰게 하는 자동차 추격전이나 로맨스 영화에 나오는 꿈결 같은 일몰처럼 흔했다. 그러나 일본 대중문화의 창작물에서 재앙이 항상 가까이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 의미는 단일하지는 않았으며, 시대정신, 예술적 경향, 시장의 수요 및 관객의 기대를 반영하기 위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했다. 일본의 “파멸이 가득한 꿈”을 어둠과 정신적 외상으로 가득 찼다고 해석하는 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정신적 유산을 과대평가하고 “파괴의 미학”에 담긴 유흥적 성격을 축소한다.”

여기에 저는 매우 동의합니다. 유흥. 음… 아까 언급했듯이, 학계라는 곳에 대해 저는 상당히 혼돈의 카오스적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미지의 큰 원인 중 하나가, 학계가 인간의 전반적인 소비를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막… 일반적으로… 무슨 큰 뜻을 품고 뭘 읽거나 보거나 듣거나 하지 않는데. 거기다가 엄청, 정말 학계적인 좁은 시선을, 마치 별로 확대도 안 되는 망원경으로 멀리서 세상을 관찰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여러분 주변에서, 주변이 학계가 아닌 이상, 넷플릭스 드라마 보는데 그것을 보는 1순위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 나라의 역사나 문화 때문인 경우가 있습니까? 저는 본 적이 없는데 그런 경우를. 그건 나중에 붙이는 해석이고, 진짜 1차적인 이유는 대개 심심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무시하고 싶다. 모른 척하고 싶다. 잠깐 잊어버리고 싶다. 아니면 저 이야기 속에 있는 저 기분을 내가 느끼고 싶다. 아니면 저 배우가 너무 아름다워서 쳐다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얼굴이 개연성이다. 이런 것이지. 소설을 읽어도. 이야기가 흡입력 있다. 페이지를 넘기는 줄도 몰랐다. 수월하게 잘 읽힌다. 캐릭터의 모험이 재밌었다. 이런 경우가 99.9999999% 같은데. 그리고 이러한 이유들이 덜 중요하지 않아요. 더 중요하니까 이러한 이유들로 픽션을 소비한다고 생각합니다. 유흥. 이게 얼마나 중요해요? 무슨 대단히 정리된 방식으로 학계스럽게 그럴싸하게 말해놓으면 그것이 소위 말하는 ‘그냥 사는’ 것보다 뭐 대단히 고귀합니까?

아… 이것도 제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 중 하나예요. 이게 무슨 소용인가. 저야 제가 재밌어서 하는 건데. 이 재미도. 사실 재밌는 게 세상에 많거든요. 재밌는 것 중에 약간 재밌는 거랑 진짜 왕킹 재밌는 게 있으면, 나는 이왕이면 왕킹 재밌는 걸 하고 싶은데. 그리고 이것은 음… 왕킹 재밌는 것’만’ 꼭 해야지, 라고 붙잡는 거랑 또 다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봐서는 잘 볼 수가 없는데, 개개인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내가 왜 하는지. 뭘 피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정말 이게 좋아서 하는지, 기타 등등. 

그리고, 사람한테 기억이라는 게 있어서 좋은 점 중 하나가 이거예요. 왕킹 재밌는 걸 인지하기 위해 왕킹 재미 없는 걸 동시에 할 필요가 없고, 예전에 내가 왕킹 재미 없는 걸 한 기억이 있거나, 주변에 왕킹 재미 없는 걸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거나, 심지어 그냥 개념적으로, 내 상상속에서 왕킹 재미 없는 것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기만 해도, 나는 내 것을 왕킹 재밌는 걸로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한테 딱 맞는, 지금 내 상태에서는 나한테 딱 맞다고 여겨지는 게 뭔지를 아는데, 나 그러면… 그거 하고 살면 안 되나? 점차 더? 실제로 점차 더 그렇게 되고 있기도 한데, 더 그랬으면 좋겠다.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이번 챕터, 츠츠이 님의 챕터 5가 한아임이 <누아르 어바니즘>에서 가장 좋아하는 챕터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실제로 삶에 적용이 됐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에피소드에서 드러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챕터에서 언급되는 영화와 애니 중에 실제로 본 것들도 다 정말, 일단 재밌었고요, 일단 그 유흥의 측면에서 너무나 즐거웠고, 유흥이면서도 동시에, 실용적이었다. 유흥적이지 않았으면 실용적이지 않았을 거예요. 연애 어떻게 하는지를 연구하는 것보다, 재밌는 러브 스토리를 소비하는 게 훨씬 실용적이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아임 드리밍은 제 유흥 경험 이후에 만들어지니까, 마치 제가 이야기를 소비하면서 생각을 되게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실제로 별로… 실제로 그러한가 하면, 별로 그런 거 같진 않아요. 재밌는 것만 봅니다. 아… 지금보다 훨씬 더, 재밌는 거만 하고 싶은데. 요거 제가 앞으로 펼치고 싶은 세상입니다. 재미없는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있는 한, 이것이 가능하다는 걸, 작은 범위에서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진짜 더 큰 범위에서, 인생에서 점점 더 이렇게 하고 싶다. 과연 될까. 눈작업을 계속 할 예정입니다.

츠츠이 님의 챕터 5를 읽으니까 더 그렇게 살고 싶어지네요. 그저 저의 느낌인데, 츠츠이님이 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시는 것 같아요. 제가 이 챕터가 너무 좋아가지고 츠츠이님 검색을 해봤더니 홈페이지가 있으시더라고요. 사진도 많아요. 여러분도 한번 들어가 보세요. 츠츠이님 되게 소년 같으십니다. 구글 검색에 들어가보셔도 사진이 많이 나오고요. 고지라 피규어 같은 거랑 찍은 사진이 여러 장 있는데, 어떤 피규어는 책상에 올려놓는 사이즈고, 어떤 건 츠츠이 님보다 더 커요. 사람만 한 사이즈의 고지라 상하고 찍은 사진도 있고. 이 사진들을 보면서, 역시 이렇게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니까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책에다가도 글을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썼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고. 그의 표정은 마치 성공한 덕후랄까. 얼마나 좋아요?

제가 진짜 좋아하는 어떤 분이 계신데, 그분 콘텐츠 관련 제가 작업을 좀 하면서, 이번에 한국에 가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래서 저는 와 정말. 나는 성공한 덕후다. 나는 진짜… 제가 하는 일 중 여러 일을 좋아하지만, 일단 저는 모르는 사람한테 이렇게 연락한 게 처음이었거든요? 그럴 필요성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뭐에 씌였는지 정말, 이분한테 한참 전에, 2023년 7월 말에 연락을 해가지고, 그때부터 작업을 좀 하면서, 이제 2024년 봄에 한국에 가서 만나기로 한 거예요. 아마 이 에피소드 나왔을 때는 이미 만난 시점일 거예요. 지금은 아직 안 만난 상태로 녹음을 하고 있는데, 세상에나. 나는 성공한 덕후다. 다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내가 덕질하는 사람한테 연락해서 그 사람이 밥을 사줄 테니, 한국에 오는 김에 만나자고 하는 그런 시나리오는, 저는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고요. 진짜 기분이 좋더라고요. 아니 저분이 나한테 밥을 사준다고? 세상에? 어쩌다 이런 일이? 만나면 얼마나 더 좋겠어요? 만나고 나서도 좋겠죠? 막 그… 입사 지원서 같은 거 쓰거나 뭐 웹사이트에 이력 이런 거 쓸 때, 나 이러이런 거 했다 이런 거 쓰잖아요. 그런 거 쓸 때 저는 별로 아무 기분이 안 드는데, 이분이랑 연결되면서 문득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내가 지금까지 한 여러 가지 일, 내가 갖고 있는 스킬 세트, 나의 지금의 삶의 세팅, 뭐, 위치라든지, 가족 유무라든지, 반려동물 유무라든지, 여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든지, 이 모든 것이, 완벽하다. 완벽하다.”

이러한데, 츠츠이님은 사진마다, 거의 막 매 사진마다 다 고지라야. 나 고지라 좋아하는데 고지라 연구하면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세상은 덕후들로 인하여 돌아간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제가 이 챕터의 글에서나 이 홈페이지에서나 츠츠이 님 표정에서 느끼기로는, 책상머리 연구로 끝나는 고지라가 아닌 것 같아요. 그는 진심이다. 그는 파멸에 진심이다. 이렇게 진심이니 그는 앞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아포칼립스를 그릴까. 츠츠이사마. 응원합니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 『누아르 어바니즘: 현대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들』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Dr. Paranoid – 1989 – The Prequel
  • Amit Weiner – Mount Everest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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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한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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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