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77] <누아르 어바니즘> 6. 포스트사회주의적 도시 디스토피아?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은 <누아르 어바니즘>의 여섯 번째 챕터를 다루는 날입니다. 중국에 대한 챕터고요, 제목은 이것입니다. “챕터 6. 포스트사회주의적 도시 디스토피아?” 챕터 제목 끝에 물음표가 있어요. 챕터 필자는 리 장이고, 챕터 제목 끝에 물음표가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서구식 디스토피아가 과연 중국의 상황에도 적용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이 챕터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네. 그럼 오늘의 수다, 바로 시작할게요.


책 왈, “유토피아와 대립을 이루는 것으로서, 혹은 잘못된 유토피아로서의 디스토피아는 현대 서구 사회에서 독특하며 대중적인 문학 및 영화 장르이다. 대개 상상적 형태로 억압적이고 부패한 정부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는 미래 사회의 모습으로, 또는 기술을 설계한 인간들의 원래 의도를 벗어나 버린 기술의 힘으로 나타난다. (예: <다크 시티> 및 <블레이드 러너>.) 때때로 이 장르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 세계를 배경으로 하며, 정욕, 탐욕, 범죄 및 폭력의 형태로 자본주의 도시성의 악덕을 과장한다. (예: <LA 컨피덴셜>.) 도시는 누아르의 문학적·영화적 재현의 중심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탈산업화 사회에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악몽 같은 삶으로 나타난다.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로서, 도시적 디스토피아의 이미지들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역사적·문화적 상황에서 생산된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는 데에 사용된다. <블레이드 러너>에 대한 분석에서, 윌리엄스는 “장르 전체가 동시대 이데올로기의 고갈을 명확하게 반영한다. 또한, 헨리 헤르메스의 적절한 표현에 의하면, 우리 세기의 많은 부분을 지배해 온 ‘재앙의 상상’으로부터 그 이데올로기들이 탈출할 능력이 없음도 명확하게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1988: 384).

이러한 누아르식 묘사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고유한 재현 장르로서 잘 언급되거나 인정받지 않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주류 미디어와 문화적 생산이 당국가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마오주의 국가는 “혁명적 낭만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장려함으로써 사회를 더 밝게 묘사하는 것을 선호했다. 마오주의 이후의 시대에는 훨씬 더 복잡한 시네마 제작이 여러 스타일들을 만들어냈다.(Lu and Yeh 2005) 그러나 미디어 재현에서 사회생활의 “어두운” 측면을 탐구하는 것은 여전히 당국에 의해 잠재적으로 전복적인 것으로 간주되므로, 공식 검열에 의해 많은 부분 걸러진다.”

즉, 중국에서는 어두운 묘사 자체가 정부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에, 누아르한 분위기 자체가 픽션에서 재현되는 경향이 다른 국가에서보다 덜하다. 특히 서구에서보다 덜하다. 지금 이 챕터에서, 필자는 디스토피아 장르를 유럽 및 아메리카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럽·아메리카적인 문화적 형식”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나와요. 일반적으로 알려진 디스토피아 장르라는 것도 있다고 보고 있으며, 그것을 서구의 것으로 보고 있고, 그것을 중국의 것, 혹은 중국에 없는 것과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서구식 디스토피아, 즉, 이 저자에 따르면 기술이 잘못되어 디스토피아가 도래하는 형태의 디스토피아가 중국에서 잘 묘사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중국적 형태의 누아르 어바니즘이 만약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하더라도, 허구의 근미래 혹은 미래를 그리기보다는 네오리얼리즘의 스타일을 택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책 왈. “동시대 중국 독립 영화들이 만들어내는 어두운 이미지들은 서구의 SF 영화들이 제공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상상의 미래 사회 또는 기술적 악몽의 묘사는 중국에서 거의 통하지 않는다. 대신 중국적 재현은 대개 리얼리즘이나 네오리얼리즘의 영역에 머무르며, 무자비하고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시장 중심 사회가 생산하는 일상생활의 음울한 요소에 초점을 맞춘다.”

<누아르 어바니즘> 책에 여러 번 나오고, 그 바깥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프레임이, 서구 대 서구 아닌 것들입니다. 저도 자주 쓰는데, 쓰면서 용이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또한 쓰면서도 이것이 완전히 딱 들어맞는 것이 아님은 알고 있습니다. 이 챕터의 저자인 리 장 님도, 그것이 완전히 딱 들어맞진 않는다는 걸 몰라서 쓰는 건 아닐 거라고 저는 추측을 해봅니다.

허구의 근미래 혹은 미래에 기술이 잘못되어 펼쳐지는 디스토피아라는 장르를 “유럽·아메리카적인 문화적 형식”이라고 보고 있긴 하지만, 우리가 바로 요 앞전 챕터인 일본 챕터에서 봤듯이, 이것을 “유럽·아메리카적인 문화적 형식”이라고 부르기엔, 일본에 엄청 강력한 디스토피아 장르가 있습니다. 일본은 분명 유럽도 아니고 아메리카도 아니죠. 그런데 일본은 참 아시아에서 유일무이한 위치이지 않습니까? 중국은 그 땅이 크긴 하지만 제국주의는 아니었잖아요. 중국은 영토 확장을 해도 어딜 멀리 가서 저 나라를 내가 점령해서 식민지를 만드는 구조랑은 좀 다르잖아요. 세력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중국의 생각은 오히려 묘하게 미국적인 데가 있어요. 일본하고 유럽이 비슷한 측면이 있고요. 일본과 유럽 같은 식민제국주의 나라들 특유의 “저 나라에 가서 내가 깃발 꽂아야지”의 멘탈리티가 있고, 중국 미국은 물론 세력을 확장하고 다른 나라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합니다만, 그 결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중국 미국은 메인랜드가 있고, 좀 거기서부터 뻗어나가는 데에 프로파간다가 집중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나라들이 딱 이러이러한 특성이 있다’라는 게 핵심이라기보다는, 결을 나누려면 이렇게도 나눌 수 있고 저렇게도 나눌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서구 대 서구 아닌 것이라고 나누기에는, 별로 그렇게 지리적으로 딱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서구 대 서구 아닌 것이라는 프레임을 쓸 때, 사실은 세상이 서구 대 서구로 갈리지 않는다는 걸 몰라서 그러한 프레임을 쓴다기보다는, 어떤 주장을 할 때 편리한 도구로서 쓰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여담으로, 우리가 디스토피아 장르를 많이 얘기하고 있으니 말인데, 전에도 몇 번 언급했던 스팀펑크 장르 있잖아요. 요 장르는 디스토피아는 아닌데, 지브리에서 잘 쓰는 스팀펑크 분위기 있죠? 뭔가 그 산업사회 공장이 있는데, 그리고 대형 공장들의 굴뚝들이 보인다면 이상하진 않을 텐데, 그 가운데 장인들의 길드도 있고, 뭔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집합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런 배경의 장르. 이것이 또한 매우 영국적이지 않습니까? 뭔가 그… 일본이 제국주의 시대 때 본따려고 했던 영국적 제국주의의 향취가 있어요. 현대화가 됐지만 여자는 드레스 입고 남자는 중절모에 양복 빼 입고, 그 와중에 평민들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 특유의 신체 언어와 옷도 있고, 신분 제도가 어느 정도 있는 듯한, 그러니까 공주도 있고 왕자도 있고 귀족도 있고, 군인은 군인이고 상인은 상인인 그런 느낌. 이렇게, 서구와 서구 아닌 것을 나누기가 애매한 경우가 참 많다. 게다가 서양과 동양을 논할 때는 유럽 및 아메리카 대 아시아를 논하는 것이라고 대개 여져지지 않나요? 그러면 마치 세상의 다른 부분은 없어진 것 같이 느껴집니다. 심지어 유럽 및 아메리카라고 하기도 애매한 것이, 여기서 아마 아메리카는 아메리카 대륙을 말한다기보다는 북아메리카를 말하는 거겠죠? 그러니까, 북아메리카도 대륙이죠. 대륙을 나누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더라고요. 영어로는 그러니까, 이것도 말이 많아요. 왜 America하면 미국이냐고. 그거에 대한 제가 들은 제일 좋은 설명은 United States of America니까, 그거 말하기 힘드니까 US라고 하든지 아니면 America라고 한다. 그게 제가 들은 제일 그럴싸한 설명이었고, 그래서 대륙을 부를 때는 North America라고 하든 South America라고 하든, 아니면 The America’s’라고 해야 한다, 뭐 그런 말들이 있더라고요. 아무튼, 유럽 및 아메리카라고 할 때는 그런데 보통 북아메리카만을 말하는 것 같아요. 동양 서양을 나눌 때도 거의 뭐, 남아메리카 없는 것처럼. 동서를 나눈다면 남아메리카는 북아메리카보다 남쪽에 있으니까 북아메리카랑 똑같이 서쪽에 있는 건데, 마치 남아메리카는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프리카도 없고. 중동도 없고. 오스트레일리아 이런 데는 막… 아무 학자들도 언급을 안 하는 느낌. 하여간에 이러한 이유로, 어디까지나 이런 서구 대 서구 아닌 것의 프레임은 어떤 특정 주장을 할 때 편의상 사용하는 도구인 듯하다.


이 챕터는, 챕터에서 언급되는 영화들을 다루는 앞선 에피소드들에서 언급했듯이, 참 울적합니다. 너무 울적해요 참. 이것이 아마 필자가 말하는, 유럽이나 아메리카의 허구적 디스토피아 형식과 다른 중국의 네오리얼리즘적 디스토피아의 효과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헝거 게임”을 읽으면서 디스토피아라고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 누아르함에 침체되진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런데 이 중국 챕터를 읽으면서, 그리고 거기서 묘사되는 영화들을 보거나 그것들에 대해 읽으면서는, 너무 침체돼요. 너무 우울해요. 그리고 그 이유는, 저와 같은 차원에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이 디스토피아에 갇혀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반면에, “헝거 게임” 같은 픽션을 읽으면, 저는 픽션에서 아무리 힘겨운 일이 일어나도 대개는 그 끝에 카타르시스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이유가, 기승전결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결국에는 캐트니스 언니가 승리하는 게 “헝거 게임”의 끝일 거라고요. 

그런데 네오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중국적 스타일의 누아르 서사를 보다 보면, 못 빠져나온다는 게 핵심입니다. 못 빠져나온다는 거. 그러니까 침체되지 않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침체되는 것 자체가 목적인 다큐멘터리성 서사도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특히나 중국적 맥락에서, 이런 말이 나오거든요. 책 왈. “동시대 중국 도시 생활의 “어두운” 재현으로 인해 대부분의 6세대 영화들과 뉴 다큐멘터리들은 중국 본토 영화관에서 공개적으로 상영되지 못한다.”

이렇게 아예 말을 못 하게 하니까. 어… 제가 어떤 다른 맥락에서는, 침체 그 자체를 다루는 매체를 아예 안 봅니다. 그거 봐서 뭐 하게. 그거 뭐 어떡하라고.

그렇다고 제가 무슨 막 “저 먼 곳의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진짜로 힘든데 너는 힘든 척도 하지 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 모두 다, 예를 들어 내가 감기에 걸려서 코 막히고 기침해서 서러울 권리가 물론 있습니다. 저쪽에서 다른 사람은 뭐, 트럭에 치여가지고 온몸의 뼈가 박살이 났어도, 나는 나 감기 걸려서 코 막히고 기침하는 거 서러울 수 있어요. 그런데 암만 그래도, 엄마가 해주는 따신 밥 먹으면서, 전기 다 나오고 수돗물 나오고 난방 다 나오는 데에 살면서, 유튜브며 인스타그램이며 뭐 다른 어떤 경로로든지 간에 “나 진짜 불쌍해. 세상은 원래 엿 같아. 세상은 진짜 개 같은 곳이다?”라고 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걸 파는 경우에, 저는 그런 걸 실제로 돈 주고 사고 그것을 아예 라이프스타일로 삼는 니치에 있는 호구이기 싫어서, 그런 걸 안 봅니다.

그런데 챕터 6에서 다루는 경우는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아무리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못 하게 할 수가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아무리 네오리얼리즘이 침체적이든 말든, 그것을 담았다는 거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래서 우리가 예전에 다뤘던 <철서구> 같은, 와 정말 9시간 동안 침체되는 그런 다큐멘터리를 만든 감독이 있고, 그것을 제가 봤습니다. 

<철서구>에서는 진짜로 엄마가 해주는 따신 밥이 잘 없을뿐더러, 수도도 안 나와. 난방도 안 나와.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이나 이런, 내 삶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정부 제도 바깥에 있는 시스템하고 연결될 길이 없어. 이러면 이건 진짜로 막막한 거죠. 그냥 막막한. 어… 여기서도 뭐 밝은 점을 찾아라, 이렇게 하면 어… 그 사람들한테 좋은 점도 있긴 합니다. 왜냐하면, 지난 에피소드에서 언급했듯이, 불쌍한 존재라는 건 없으니까, 좋은 점도 있겠지만, 저는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제가 만약 챕터 6에 나오는 경우에 있었으면, 과연 내가 막 여러 가지를 했을까? 뭘 했을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밝은 점 찾으라고 할 수가 없고요. 그들의 힘든 삶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뭐, 그런 거… 하고 싶지 않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만약 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이 상황에 있는 사람들한테서 할 수 있음을 박탈하는 행위니까요. 그렇지만 만약 제가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 저는 저를 나무라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 정말. 이게 그러니까, 겹겹이에요. 지금 제가 사는 시공간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 자체를 나무라는 게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가장 좋을 수도 있어요. 그거야 개개인의 상황을 저는 모릅니다. 단,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혹은 뭔가를 하는 것을 외부에다가 던져서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 압니다.

아무튼, 책에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주변 주택들이 철거된 후에도 오랫동안 집을 떠나기를 거부하는 가구들은 “못 가구”로 분류된다.”

여기서 ‘못 가구’란 말 그대로, nail household. 망치로 박는 못. 그것처럼 박혀 있는 가구를 뜻합니다.

책 왈, ” 어떤 이들은 더 나은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자살 위협—“약한 자의 무기”(Scott 1985)—을 하기도 한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개발업자와 철거업체는 종종 이주민에 대한 보상금을 임의로 줄이거나 보류한다. 때때로 그들은 집에서 주저하는 거주자들을 위협하고 물리적으로 내쫓는다. 영화에는 두 노동자가 무심하게 나누는 대화가 나오는데, 집을 떠나기를 거부한 한 남자가 개발업자들이 고용한 폭력배들에게 구타당했다는 것이 여기서 드러난다. 영화에 등장하는 몇몇 가구들은 더 나은 보상을 흥정하기 위해 집을 떠나기를 거부하지만, 수도와 전기 공급이 끊겨 혹독한 겨울에 생존하기가 매우 어려움을 알게 되자 결국 떠난다.

2008년, 충칭시의 거대한 건설 현장 한가운데의 취약한 진흙 섬에 있는 “못 가구”의 놀라운 사진이 인터넷과 국제 미디어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에 살면서 식당을 운영하던 소유주들은 공정한 보상을 위해 개발업자와 2년 동안 협상했다. 이에 관한 보고서가 처음 공개된 지 일주일 후, 부분적으로는 언론의 강력한 압박의 결과로 소유주들이 만족스러운 보상을 받는 계약이 체결됐고, 집은 철거되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비교적 해피엔딩이었지만, 도시 재개발을 위해 길을 비켜야만 했던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악몽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인용의 요 부분을 다시 한번 봅시다. ‘못 가구’의 놀라운 사진이 인터넷과 국제 미디어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대요. 이 인터넷과 국제 미디어에 접속 가능하다는 점이 얼마나, 세상에, 얼마나 기똥차게 놀라운 일인지를 우리는 인지를 하면 할수록 유리합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이걸 듣고 계시다면, 아마 우리는 이 상황에 있지 않을 거예요. 아마 우리는 인터넷을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시공간에 살고 있을 거예요. 그러면 내가 굳이 남들한테 디스토피아를 밀려고 일부러 하질 않아도, 내가 있는 여기가 유토피아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걸 꼭 내 정체성과 연관 짓는다기보다는, 그냥 지금 이 상황을, 순간을 인지할 순 있습니다. 마치 디스토피아적 존재라는 게 없듯이 유토피아적 존재도 없습니다. 내가 디스토피아적 상황에 있다고 여긴다고 해서 내 존재가 디스토피아일 필요는 없고, 내가 유토피아적 상황에 있다고 여긴다고 해서 내 존재가 유토피아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다고 해서 무슨 내가 저기 저 인터넷 접속 안 되는 사람보다 우월하고 행복해야 하고 그런 게 아니고요, 다만 지금 이 현실에서 저 사람은 인터넷 접속이 없는데 나는 인터넷 접속이 되는 게 사실이라면, 나는 그걸 갖고 내 상황에 감사할 수는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걸로 내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아서가 아니고, 그냥 다만 나는 지금 액션을 취하고 싶다면 취할 수 있으니까. 

 항상, 여러분. 유리한 거 믿읍시다. 내가 잠깐 감기 걸려서 코 막히고 목 아파서 나 스스로가 서러워도, 그거랑 내 정체성 자체가 ‘절대 일은 잘 풀릴 수 없다’랑 동일시되어 있는 건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잠깐 내가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나는 절대 우월자다’라는 류의 동일시가 되어 있는 것도 완전히 다릅니다. 

근데 일단 <철서구>는 아무래도 전자 쪽과 더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누아르 어바니즘> 전체가. 일이 잘 풀리는 경우보다는 잘 안 풀리는 경우. 그런데 우리가 <철서구>처럼 매우 침체된 상황을 그리는 다큐멘터리를 보더라도,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감독이 사람들을 슬픈 삶의 늪에 끌어들이려고 그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고 여겨지진 않거든요. 그렇기에는 다큐멘터리가 너무 드라이해요. 막 눈물을 짜내려고 하는 다큐가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냥 그 감독은 자기가 관찰한 걸 담은 거고요. 그걸 보는 사람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걸 찾으면 됩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여겨지면 안 해도 되고요. 근데 뭘 하든 안 하든, 우월한 존재나 열등한 존재라는 건 없습니다. 이건 여러분이 사색이든 일기 쓰기든 뭔가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해보시면, 진짜 그 끝까지 가보시면 몸으로 겪어보실 수 있는 경험입니다. 그 끝에 그냥 ‘나’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아니라서 모든 것인 ‘나’밖에 없고, 그 너머에도 뭐가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는데, 그것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에 제가 간 끝부분까지 가보면 거기에 우월하지도 않고 열등하지도 않은 나가 있고, 거기다가 그냥 갖가지 경험이 벌어지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누아르 어바니즘> 같은 책을 읽을 때, 특히나 참, 픽션으로서 우리의 차원과 좀 거리가 있는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차원과 같은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챕터 6 같은 부분을 읽을 때, 우리가 이들의 상황을 안타까워하거나 나의 상황을 감사히 여길 수는 있는데, 그렇게 느낄 때 이들을 막 불쌍한 존재로 만들거나 우리를 우월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면서 느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픽션이라고 이름 붙은 것이든 논픽션이라고 이름 붙은 것이든, 어떤 이야기를 내가 소비할 때, 그게 내가 엄청 기쁘거나 스트레스받거나 하면, 그러니까, 그 이야기 안에 있을 때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에게 그 이야기가 영향을 주면, 그것이 경험으로서 소비된 게 아니라 내 정체성을 건드렸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원하는 쪽으로 건드렸을 때보다는 원하지 않는 쪽으로 건드렸을 때 좀 신경이 쓰이죠. 그러면 그거 들여다보면 됩니다. 그래서 그 지점에서도 이러한 누아르한 묘사들이 그 자체로 유용합니다.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묘사 자체가 드라이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혹은 다른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디스토피아로 보내진 않으면서도 아 저기에 디스토피아 현상이 벌어지고 있네, 를 인지할 수 있단 뜻입니다. 


이 챕터를 읽는 우리가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점은 이 부분입니다.

책 왈, “마오주의 정권은 친구/적의 분열이라는 중요한 트로프를 통해 중국 혁명 정치를 정의한 이념 투쟁에 대해 끊임없는 정치적 열정과 헌신을 끌어내고, 활용할 수 있었다.”

아까 에피소드 초반에 언급했었죠. 서구 대 서구 아닌 것이라는 프레임은 참 애매하다. 은근히 일본하고 영국이 서로 비슷한 점도 있고, 미국하고 중국이 비슷한 점도 있고, 사실 비슷한 점이라는 기준으로 나누려면, 이렇게도 나눌 수 있고, 저렇게도 나눌 수 있습니다.

아임 드리밍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으로 교집합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엄청나게 많은 집합들에 속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아임은 여자고, 이성애자고, 팟캐스터고, 만두를 좋아하고, 고양이를 좋아했는데, 요즘에 희한하게. 눈작업하면서 고양이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어요. 고양이가 싫어진 게 아니고, 고양이에게 부여했던 제 정체성이 좀 없어진 거 같아요. 어이가 없죠. 지금도 고양이를 보면 귀엽습니다.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건 다 느껴지되, 고양이성이 곧 한아임성과 같다고 여기던 게 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집합들이 있는데, 한아임을 구성하는 관념이 천만 가지가 된다고 치면, 그 천만 가지가 전부 다 겹치는 그 교집합에 한아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아임이 친구/적이라는 분열의 트로프를 사용하려 한다면, 천만 가지 방식으로 가를 수 있단 거예요.

그런데 그러면 뭐, 한아임이 되게 특별해서 관념 천만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돌아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어마어마한 개수의 관념의 교집합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교집합을 만드는 집합들 중에 유독 친구/적 분열 프레임에 잘 쓰이는 집합들이 있어요. 이 점들을 우리가 유의해야 합니다. 아예 집합을 나누지 않기에는 좀 어려울 거 같긴 한데, 우리가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지 않는 한 말이에요, 그런데 집합 나누기를 할 때, ‘아, 집합 나누기를 하네? 내 실제 존재, 그러니까 아무 레이블도 붙지 않은 ‘나’랑은 사실은 아무 상관이 없네.’ 이걸 인지하고 있으면 극도로 유리해집니다, 여러분. 이걸 약간만 평소보다 더 인지해도 극도로 유리해지고요, 점점 더 인지할수록 큰 뷰를 갖게 됩니다. 

짜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와 비슷한 느낌으로 세상을 인지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자유를. 짜장면 먹을지 짬뽕 먹을지 상관없잖아요. 짜장면 오늘 먹었으면 내일 짬뽕 먹고, 짬뽕 오늘 먹었으면 다음에는 짜장면 먹으면 되지. 또 어떤 때는 군만두랑 먹고 어떤 때는 탕수육이랑 먹고. 찍먹 할 때는 찍먹 하고 부먹 할 때는 부먹 하는 거지. 

이 정도의 자유도를, 흔히들 편 가르기 하는 프레임에 적용할 수 있으면 얼마나 자유로울지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꼭 양쪽을 왔다 갔다 하라는 거 아닙니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더 좋은 건 아니니까요. 짜장면만 먹고 싶으면 짜장면만 먹어도 되고, 짬뽕만 먹고 싶으면 짬뽕만 먹어도 돼요. 그런데 짜장면파라고 해서 짜장면 못 먹고 짬뽕 먹을 때 막 눈물 나고 서럽고 자괴감 든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어떤 존재일지. 반면 내가 늘 짜장면만 먹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날 짬뽕을 먹었을 때, ‘오 짬뽕도 괜찮네’라고 여기는 삶은 어떨까요? 이 자유가 어떨 것 같나요?

요거. 이것은 어… 이것을 진짜 가장 끝까지 갖고 가면 아마 정말로 도 닦는 데에 삶을 바치기로 한 사람이 되겠지만, 그렇게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가고 싶으면 가는 건데, 안 가도, 되게 유리해요. 마치 짜장면과 짬뽕이 상대적이듯이, 이 자유도도 상대적인 스펙트럼에 있기 때문에, 약간만 내가 이 자유도를 남들보다 더 지니고 있어도, 뭐, 이게 경쟁은 아니지만, 솔직히… 유리해집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맨날 짬뽕파였다고 해서 짬뽕 못 먹는 날에는 막 우는데, 나는 짬뽕파였다가도 짜장면도 먹고 군만두도 먹고 그래도 행복하고 잘 살고 내 존재에 아무 영향을 안 미치니까. 얼마나 유리하겠어요. 유리 불리가 꼭 저 사람이랑 비교를 하든 안 하든, 그냥 나는 내 삶을 사는 데에 너무 유용합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책에 나오는 부분이 또 있습니다. 책 왈. “2006년 10월, 정부는 향후 10년 동안의 목표로 (단순한 경제 성장 촉진이 아닌) “사회주의적인 조화사회 건설”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사회주의 조화의 몇 가지 기본 특징을 설명했는데, 민주주의와 법치, 평등과 정의, 신뢰와 사랑, 활기차면서도 안정적이고 질서 있는 사회,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로운 공존이 그것이었다. 그는 또한 조화사회는 사회경제적 차이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만, 그 차이는 허용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 갈등을 수용하면서도 평화롭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는 사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화’는 공식 언론과 지역 정치에 편재하는 유행어가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조화사회 만들기’에 대한 집착은 다른 지역에서 도래한 포스트사회주의적 디스토피아의 질서가 가진 가능성에 맞서 현 개혁 정권이 구상한 새로운 유토피아적 세계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당은 조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열쇠가 바로 치솟는 불평등 및 불공평한 부의 분배와 씨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원자바오 총리와 후 주석은 빈곤층과 서민의 복지와 생활을 개선하고, 소득 양극화를 억제하겠다는 약속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자원을 이동시키고 일반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이러한 노력에 지방 정부 관리들과 유력한 기업 그룹들은 크게 저항한다. 조화라는 수사는 사회적 긴장을 피하고 심각한 사회적 비판을 억압하려는 당국에 의해 편리하게 이용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생활의 어두운 측면을 강조하거나, 심지어 디스토피아의 개념을 암시하기라도 하는 모든 창작물은 특히나 부조화스러운 것으로 취급된다.”

친구/적 프레임은 여전히 있고, 이건 꼭 중국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친구/적 프레임의 특징 중 하나가, 집합 기준 하나로 일단 가른 다음에, 우리 쪽에 있는 애들, 그러니까, 친구들끼리는 사이가 좋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해요. 그래야 친구/적 프레임이 유지되니까. 이를 위하여 책에 나온 경우에는 ‘조화사회’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어… 현실은 안 조화스럽다는 거죠.

즉, 짬뽕파와 짜장면파로만 세상을 가르면 되게 단순해 보이는데, 실질적으로 짬뽕파 내부에서, 혹은 짜장면파 내부에서 마냥 조화로운가? 아니죠. 사람이 어떻게 짬뽕하고 짜장으로만 나뉩니까? 그런 챗GPT만도 못한 인간 존재가 어딨어요? 짬뽕 먹는 사람 중에서 누군가는 새우 알레르기가 있고 누군가는 없으면, 해산물짬뽕 같이 못 먹는 거예요. 그런데 마냥 조화로운 척하다가는 새우 알레르기 있는 사람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식의 프레임이 쓰인단 말이죠. 조화롭지 않음을 인지하는 것이 조화로 향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짬뽕파가 진짜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새우 알레르기 있는 사람이 해산물 짬뽕 억지로 먹다가 죽은 그날, 나는 갑자기 짜장면파로 옮겨가고 싶은 충동이 들거나, 아니면 적어도 짜장면파가 마냥 그렇게 적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짬뽕 짜장면 예시는, 제가 생각했을 때 좀 진짜… 진짜 별거 아닌 예시라서 이용한 건데, 이걸 만약에 다른 어떤 기준에 적용했을 때 내가 되게 내 존재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가 있어요. 내가 저 레이블을 붙이고 있지 않으면 내가 더는 내가 아니게 될 거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 거죠. 이 경우에 어, 꼭 없애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관념을. 그런 관념을 다 없애면 우리는 진짜 정말 그… 아무 레이블도 없는 ‘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 아바타 세상에서 아무것도 경험 못 하고 그냥 갈 거예요. 그 자체가 목표인 이야기를 내가 쓸 게 아니면은,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다 관념을 제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진짜 나한테 별로 필요가 없는 친구/적 프레임인데도 붙잡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심지어 나한테 압도적으로 해가 되는 경우.

그 대표적인 예시가 돈입니다. 내가 돈을 원한다고 주장하면서 돈이 있는 사람들을 나의 적으로 볼 때 그것이 과연 나한테 유리한지 불리한지. 돈이 꼭 많아야 하는 건 전혀 아니지만, ‘돈 없는 나’가 내 정체성의 매우 중요한 요소일 때, 그게 정말 누구 때문인지. 요거 들여다보시면 유용할 겁니다. 저도 요거 관련된 거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 챕터 저자의 스타일에서 제가 흥미롭게 관찰했던 것은, 상업성 내지는 오락성이 메시지와 공존할 수 없다고 여기는 듯한 저자의 생각이었습니다. 저자는 주류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상업성 내지는 오락성을 대표하며, 주류가 아닌 것은 상업적으로 혹은 오락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중국에서 대체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 점이 특히나 두드러진 이유는, 요 다음 챕터, 인도 영화에 대한 챕터에서는 약간 반대되는 생각이 언급이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단 지금 이 챕터, 중국 챕터, 챕터 6에서는 리 장 님이 중국의 리얼리즘 혹은 네오리얼리즘 스타일의 영화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책 왈, “이러한 영화들은 진짜인 것과 날것을 되찾는 영화적 재현에 기대는 동시에 포스트사회주의적 도시 공간과 삶의 황량하고, 실망스럽고, 불쾌한 부분들을 강조하는데, 이는 주류 영화 창·제작자는 기피하는 요소들이다.”

한편 챕터 7, 인도 영화에 대한 챕터에서는 챕터 필자 란자니 마줌다르 님이 인도 시네마의 발전 및 변화 요소들을 여럿 언급하시는데, 그중 세 번째 요소가 이 부분입니다. 책 왈, “세 번째 변화의 영역은 색다르며 새로운 종류의 시네마가 재정적 손실을 겪지 않는다는, 영화 업계에서 널리 퍼진 믿음에서 나타난다. 투기 붐이 일고 있는 현시점에서, 저예산 영화가 더 이상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다. 영화 제작자들이 멀티플렉스 개봉을 하고, 텔레비전, 음악 및 DVD 판권을 계약하면서, 제작비는 회수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유통을 위한 이 새로운 네트워크는 갑자기 제작 경제를 변화시켰다. 현재 많은 저예산 영화가 비주류적 주제를 다루는 영화로 제작되고 있는 것이다. ‘무손실’이라는 허구는 일상적인 담론의 일부이며, 적은 예산으로 높은 제작 가치의 영화를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감독들이 진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즉, 인도 영화의 경우에는 ‘무손실’이라는 이미지가 허구라고 말을 하긴 하면서도, 그 ‘무손실’이라는 이미지가 있긴 있다고 언급이 되는 겁니다. 비주류인 영화가 ‘무손실’이라는 이미지가.

그렇다면 손실이든 무손실이든, 결국엔 이미지가 좌지우지하는 것인가? 중국에서는 비주류 영화들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정말 현실이 그러해서 그런가, 아닌가?

그리고 중국에서 비주류 영화라고 할 때, 그것이 정말로 비주류인지 알기가 어렵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국가에서 너무 이래라저래라를 하니까, 실제로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서 비주류인 건지, 아니면 낯설어서 비주류인 건지, 아니면 정부가 무서워서 비주류인 건지, 그것이 훨씬 더 자유로운 자본주의에 의해 굴러가는 인도 같은 시장에서보다 알기가 어렵지 않은가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면 또 인도는 마냥 자유로운가? 그건 아닌 모양이에요. 인도 챕터에서도 정부에서 이래라저래라하는 점이 언급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과연 중국 정도일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한국에서 성공하는 영화들이 꽤 특이하다는 점입니다. 한국은 메인스트림 영화가 상당히 다크해요. 저는 박찬욱 감독님 너무 좋아하는데, 박찬욱 감독님 영화가 정말 너무너무 아름답지만, 상당히 고어스러운 측면도 있고, 섹스도 많이 나오고, 그것도 그냥 살 나오는 섹스, 미국인이 좋아하는 섹스,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상한 섹스도 나오고, 참 그렇단 말이죠. 그런데 한국에서 박찬욱 감독님 다 알잖아요. 그것이 박찬욱 감독님이 작품성을 인정받아서뿐만이 아니라, 한국 관객들은 실제로 그 정도로 다크한 내용에 대한 거부감이 다른 나라들보다 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특히나 한국에서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아니라 실제 사람 배우들이 나와서 피가 낭자하게 죽고 죽이는 영화들이 나오는데, 그조차, 어… 폭력에 대해서 좀 관대한 측면이 있는 건 맞는 것 같아요. 전반적으로. 박찬욱 감독님 영화에 나오는 폭력이 심지어는 그저 폭력이 아니라 아름답고 장려하게 느껴질 정도로, 전혀 하나도 안 아름답고 장려하지도 않고 그저 폭력적이기만 한 폭력도 영화에 너무나 많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도 박찬욱 감독님 영화에 나오는 폭력이 폭력으로서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 사극이 강세인 것도 한국 영화의 특성 같습니다. 사극물이 모든 나라에서 인기가 있진 않아요. 미국에선 진짜 정말 인기 없는 것 같고, 그것은 다만 미국의 역사가 짧아서일 뿐만이 아니라, 뭐랄까, 그 짧은 역사 중에서도 그것을 픽션적으로 그리는 스타일이 부재한달까? 반면 한국은 사극의 결이 많죠. 정통사극도 있고, 판타지 사극도 있고. 남장을 한 여자 주인공이라는 트로프는 그 자체로 장르를 갈라도 될 정도로 많이 나오고. 사극 그 자체가 인기가 많다 보니까 사극이 그 자체로 주목받는 것을 넘어서서 그 시대의 그림이 주가 된다든지, 예를 들어, 영화는 아닌데, “바람의 화원.” 캬. 2008년 드라마입니다. 벌써 이렇게 오래됐네요. 사극인데 그림 그리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렇게 굉장히 세분화되어 있고, 조선시대 사극, 고려시대 사극, 신라 사극, 백제 사극, 뭐, 많죠. 사극인데 과거로 가는 사극. 사극인데 과거에서 누가 현재로 오는 사극. 기타 등등. 

천만 관객 돌파 영화 순위를 보니까, 일단 1위가 ‘명량’이에요. 1762만 관객이 봤다고 합니다. 이것은 명량의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사극 자체가 인기가 많은 국가라서 가능한 것 같아요. 미국에서 미국적 애국심 불러일으키는 영화가 나와도 미국 내 박스오피스 1위 아마 못 할 거예요. 내지는 슈퍼히어로 영화가 가장 미국적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초능력의 탈을 쓰고 나오죠.

아무튼 한국에서의 사극 강세. “광해, 왕이 된 남자”가 2012년에 나왔는데 지금까지도 16위고요.

바로 그다음이 “왕의 남자”이고, 2005년에 나왔는데 지금까지도 17위입니다.

이러니까. 주류 비주류는 실제로 그 작품의 내용으로 갈리는 게 아니지 않나 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되게 비주류인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굉장히 인기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중국 미디어 시장이 만약 비교적 정부 개입 없이 알아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 주류가 되고 비주류가 되는 것은 무엇일지? 그것이 주류 혹은 비주류가 된다 하더라도 어떤 이미지로 남을지? 집계가 가능한 형태로 주류 비주류가 될지? 그것은 미래에, 아니면 평행 현실로 가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이번 챕터에서 참말로 집단에 얽힌 다양한 양상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편 가르기. 그것은 얼마나 아무 의미 없는가. 결국 우리는 혼자입니다. 근데 혼자라서 전부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집단에 속해 있는 게 진짜라고 믿으면, 그거에 따라서 계속 휘둘립니다. 그나마 내가 정말 좋아하는 집단인 경우, 내가 그런 것들을 감수하고 속해 있을 수 있는데, 그게 아닌데도 그냥 어떤 정황상 당연히 내가 저 집단에 충성해야 한다고 나도 믿고 주변도 믿어서, 다만 내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얼떨결에 집단에 속해 있는 경우가 있어요.

이런 경우에 당장 집단을 나오진 못하더라도, 정신적으로라도 거리를 두면 훨씬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단, 참 진짜, <철서구>에 나오는 경우 같은 때에는, 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참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철서구>가 문제라고 여기는 내가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그 다큐에 나오는 실존 인물들 본인들도 자신들의 상황을 문제로 인식하고 있긴 한데, 그 역시 그들도 ‘내 삶이 이래야 한다’고 여겨서인가? 

이런 생각을 왜 하느냐 하면요, 뒷챕터들에 진짜 좀 제가 느끼기엔 혁신적인 생각들이 나와요. 저는 지금껏 당연히 뭐, 도로도 깨끗해야 하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야 하고, 이런 것들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뒤에 가면, 그것이 좋은 거라고 여기는 그 자체가 그런 요소들이 존재하는 서구 내지는 서구로 인하여 어느 정도는 억지로 개발된, 너무 빠르게 개발된 국가들의 잣대를 들이대는 거라는 그런 생각이 나옵니다. 저는 그 부분을 읽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부분을 읽고 나니까, ‘아 진짜 그런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나 개인으로서 꼭 이래야 하는 게 없듯이, 저 도시나 국가도 도시나 국가로서 꼭 저래야 하는 게 없는데, 도시나 국가는 왜 어떤 기준에 맞아야지 살기 좋은 곳이 된다고 생각이 되며, 그러한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서구가 정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 뒷챕터들에 나오는데, 어… 신기하고 흥미롭습니다. 특히 서울이라는 곳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참 특히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 될 것 같습니다. 서울은 진짜 신기한 데예요.

서울특별시 홈페이지에 이렇게 나와 있더라고요.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과거 백제, 조선의 수도로 시대에 따라 위례성, 한산, 한성, 한양, 양주, 남경, 경성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암사동 선사주거지를 통해 알 수 있듯 서울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고, 삼국시대, 고려, 조선을 거쳐 약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곳입니다.” 서울에 삼국의 문화유적이 다 있다는 말도 나옵니다.

그런데 2024년 현재 서울의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도시의 기준은 당연히 위례성 기준도 아니고 한산 기준도 아니고 경성 기준도 아니고, 서울의 기준이라고 여겨지는데, 서울이 개발된 어마어마한 속도 때문에 이 기준은 완전히 서구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심지어 별로 안 받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동시에, 매우 독특하게 서울에만 적용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디의 영향을 받았든, 언제의 영향을 받았든, 그 기준이, 매체에 보여지기에는, 마치 하나 혹은 몇 개 안 되는 것으로 비치는 듯하다는 것도 특징입니다. 매우 신기한 도시다. 기준이란 게 뭔가에 대해 생각해볼 때 고려함 직한 도시다.

아무튼.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 『누아르 어바니즘: 현대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들』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Ikoliks – Technological Revolution
  • Ofer Koren – Revolution Colors
  • Rewind Kid – Rhythm Revolution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 2024 한아임

소개

✨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