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78] <누아르 어바니즘> 7. 마찰, 충돌, 그리고 그로테스크: 봄베이 시네마의 디스토피아적 단편들

안녕하십니까? 이야기하는 자, 한아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특이 취향 불면자들을 위한 약간 이상한 꿈자리 수다,’ 아임 드리밍을 듣고 계십니다.

오늘은, <누아르 어바니즘>을 작업하면서 저에게 매우 큰 수확이었던 챕터, 챕터 7에 대해 얘기합니다. 제목: 7. 마찰, 충돌, 그리고 그로테스크: 봄베이 시네마의 디스토피아적 단편들. 챕터 필자는 란자니 마줌다르 님입니다. 한아임이 너무나 좋아했던 인도 영화 세 편이 이 챕터에 등장합니다. 그 세 편은 <돔비발리 패스트>, <노 스모킹>, 그리고 <빙 사이러스>였고요, 각각 에피소드 69, 70, 71에서 다뤘었습니다. 챕터 7에서 이 영화들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나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것과 또 다릅니다. 챕터도 재밌고, 영화도 재밌습니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재밌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혹시 책을 읽으시더라도 영화도 보셨으면 좋겠고, 영화를 보시더라도 책도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수다, 바로 시작할게요.


특히나 이 챕터에서 제가 좋았던 점은, ‘그렇게 보인다’는 점을 저자가 매우 자주 언급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첫 문장부터가 이렇습니다. 책 왈, “전쟁, 갈등, 그리고 가속하는 폭력이라는 20세기의 유산은 윤리적 의무와 도덕적 안정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상상의 세계를 탄생시켰다.”

즉, 윤리적 의무와 도덕적 안정이 진짜로 무너진 게 아니고, 그렇게 보이는 상상의 세계라는 겁니다. 만약 이 현실 세계에서, 지금 제가 존재하는 이 차원과 동일한 차원에서 누가 ‘윤리적 의무와 도덕적 안정이 무너졌어’라고 말을 하고, 그 사람한테 그게 진짜 정말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다른 누군가의 진실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다 각자의 우주에서 살고 있어요. 저는 이 자각이 <누아르 어바니즘>에서 다루는 종류의 해석에서 아주 핵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살면서는 “아 진짜 세상 살기 너무 좋다” 아니면 “세상 진짜 살기 별로다”라고 하더라도, 학자면은, 이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면은, 아무리 논픽션 타이틀을 달고 있더라도 그 논픽션 자체가 해석이라서 픽션임을 자각해야 그것을 전달할 때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겁니다. 이것은 그러니까, 어… 우리가 살면서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건, 우리 자유고, 믿든 안 믿든, 그것이 단일 현실이라고 믿든 안 믿든, 별로 상관이 없어요. 무슨 상관이겠어요, 남이사. 게다가 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당연해서, 그것이 안 당연한 것을 모를 수가 있습니다. 이건 저도 그렇고 누구나 그래요.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당연히 그 당연함이 없는 무언가를 상상하기가 어렵죠. 아주 간단하게, 내가 평생 쇠젓가락으로 젓가락질을 해가지고, 완두콩 정도 쇠젓가락으로 집는 건 일도 아니면, 젓가락질을 못하는 삶이라는 건, 여러분 이것을 상상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아마 여러분 중 대부분은 젓가락질을 하실 텐데, 잘 모르실걸요? 젓가락질 못함의 현실을. 미국에서 라멘 가게 배달을 시키면 포크가 오는 그 사태를. 그 현실을. 젓가락질하는 사람이 굉장히 없는 지역에서 라멘을 시키면 세상에나 만상에나, 포크가 온대요, 배달 포장에.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라멘은 당연히 젓가락으로 먹는 건데 안 당연한 사람들이 존재한단 말이죠. 심지어 쇠젓가락 나무젓가락도 또 나뉘어요. 쇠젓가락질 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스킬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면 먹는 것도 이럴진대. 그나마 젓가락질이란 것은 외부로 드러났기 때문에, 아주 정확하고 표면적이게 눈으로 볼 수 있으니까, ‘아, 젓가락질이 없는 삶이란 건 이런 삶이겠구나’라고 상상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의 진짜 많은 것들은, 우리가 있는 상황이 너무 당연하니까 그 바깥의 안 당연한 것은 당연히, 일부러 그걸 고려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리고 몰라도 돼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몰라도 됩니다.

근데 내가 학자라면은, 그것이 업이라면은, 그때는 좀, 업계인이 아닌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자유로운 사치가 약간은 줄어든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학자면은, 이 문화권에서 재현이 이러이러하다고 말을 할 때에는, 이 문화권 아닌 저 문화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약간이라도 알아야 이 문화권이 이러하다고 말을 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겁니다. 저 문화권이 저러한 걸 모르는데 이 문화권이 이러한지를 어떻게 알겠어요. 무엇이 이러하고 저러한 것은 다른 것이 저러하고 이러한 것 때문에 알 수 있는 겁니다.

어… 얼마 전 에피소드에서 도대체 학계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아임은 혼돈의 카오스로 느껴지고, 알 수 없다, 이런 말을 했었는데, 만약 학계의 기준이란 게 있다면, 바로 이것이 기준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업에서 제공하는 해석이 절대 현실이 아님을 매우 자각하고, 그것을 계속 사람들한테 일러주는 것.

그래서, 란자니 마줌다르 님이 현실에서의 절대성 부재라는 것을 막 일부러 강조하는 것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각이 문장마다 드러납니다. 이 챕터의 핵심 주제 중 하나가 그거예요. 필자가 ‘어반 프린지’라고 부르는 장르의 프린지, 즉, 주변부에 있는 비주류의 영화들이, 마치 단일 현실처럼 보일 수도 있는, 가장 인기 있는 종류의 현실 재현에 반대되는 다른 무언가를 제시했다고. 


이 챕터에, 봄베이에 대한 프라이드도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봄베이의 다각성에 대하여. 아까 언급한 세 편의 영화가 펼쳐지는 배경으로서의 봄베이를 설명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책 왈, “세 편의 영화의 중심에는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다국어 도시인 봄베이가 있다. 그곳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뺨을 맞대고 사는 두 세계의 도시다. 빽빽한 인파와 매일매일 계속되는 이주민들의 진입은 내부로부터 빠르게 무너져 내리는 공간에 엄청난 압력을 가한다. 수케투 메타의 책 『맥시멈 시티』는 자세한 설명과 함께 도시 생활에 대한 독특하며 양식화된 감각주의를 결합함으로써 봄베이에서 펼쳐지는 삶을 정교하게 표현하려고 한다. 메타의 설명에 따르면, 봄베이는 이미지즘적이며, 과도하고 모험심이 강하며, 잔인하고, 매력적이지만, 그곳에는 구원적인 방식으로는 극복될 수 없는 악덕도 존재한다. 봄베이는 도시의 범세계주의, 그리고 지역적 차이와 경제적 격차를 수용하는 능력에서 드러나는 모더니티를 인정받아야 하는 ‘진정한’ 대도시다.”

요 부분. ‘진정한’ 대도시. 이것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기는 참 어렵고, 어차피 정의란 계속해서 바뀌겠지만, 그냥 대도시가 있고 ‘진정한’ 대도시가 있다는 느낌에 매우 동의하는 바입니다.

제가 맨날 서울서울 하는 이유가. 미국에서 도시라고 이름 붙은 곳들은 대부분 진정한 도시가 아니에요, 제가 생각했을 때는. 대도시는커녕 그냥 도시 축에도 못 낀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많지도 않고. 교통이 많지도 않고. 문화가 많지도 않고. 역사가 많지도 않고. 그냥 시골 마을보다 다만 사이즈가 커서 도시라고 불리는 것 같은데, 크기로만 도시를 도시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도시가 아니라는 게, 어… 전혀 현실과 상관없는, 그냥 제가 느끼는 기준입니다. 그런데 서울은 진정한 대도시예요.

그리고 이번 챕터에서 묘사되는 봄베이도, 저는 가본 적이 없습니다만, 이 저자의 묘사를 보면, ‘아 이 사람이 생각하는 대도시의 기준이 나의 것과 흡사한 것 같다’는 점은 느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다, 봄베이에. 그리고 그러한 봄베이에 대한 재현에도, 역시나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다.

책에 이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요, 그 설명에 대한 인용도 나옵니다.

책 왈, “대부분의 서구 관객에게는 ‘인기 있는 봄베이 시네마’라고 하면 색채, 로맨스, 음악 및 춤의 폭풍이 펼쳐지는 멜로드라마틱하고 과도한 분위기가 단번에 떠오른다. 이것이 지금껏 세계에 알려진 인도 시네마의 압도적인 특징이었으며, 널리 퍼진 인식이다. 힌디어 영화의 독창성을 포착하기 위해, 『힌디어 시네마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힌디어 시네마 같은 것은 세상에 없다. 그것은 독특하며 흉내 낼 수 없는 브랜드의 시네마로, 가장 전형적으로는, 잘생기고 정의로운 남자 주인공, 하늘에서 내려온 듯 아름다우며 고결한 여자 주인공, 부패하고 사악한 악당에 더해, 어머니 역할의 인물, 가부장, 형제, 친구, 심복, 갈팡질팡하는 바보 등이 등장하는 허구이며 유혹적인 세계관이다. 이 인물들은 극한의 극단으로 표현되는, 현실에서는 절대 있을 리 없는 곳에 존재한다. 이들은 갑자기 노래하고, 춤추고, 웃음을 터뜨리며, 그만큼 쉽게 울고, 울부짖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이들은 도덕적 지혜의 보배를 뽐내고 평화와 인간 연대의 미덕을 주장하는 만큼이나 자주 분노를 표출하고 폭력에 의존한다. 또한 이들은 사랑과 열정을 일편단심으로 추구하는 것만큼이나 광기와 정서적 과잉의 발작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이런 부분도 나옵니다.

책 왈, “광범위하게 정의하자면, 인도의 맥락에서의 멜로드라마는 극도의 감정, 악몽 같은 상황 및 비극을 통해 가슴이 찢어지는 갈등을 보여주기 위해 사회적 세계를 가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형식이다. 한 개인을 가혹한 현대 세계 속의 인물로 배치하는 멜로드라마는 서로 다른 도덕적 집합들의 대립을 만들고, 이러한 갈등을 시적인 정의의 힘으로 구원함으로써 세상의 불의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는 모더니티의 불안을 표현하고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신화를 통해 세계의 혼돈과 위기를 해결하고자 하는 형식이다. 현실에서는 늘 가능하지는 않은 것이 감정적으로 포화된 과잉 연기로 연출된다. 봄베이의 멜로드라마에서는 비극과 상실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걷잡을 수 없는 원초적 에너지의 어둠은 일반적으로 윤리적인 갈등을 통해 억제되거나 해결된다. 멜로드라마의 압도적인 존재감은 관객과 인기 있는 영화의 서사 사이에 습관적인 관계를 구성한다. 영화라는 장치는 연기, 노래의 영화화, 도덕적인 재담(대화) 및 멜로드라마와 관련지어지는 미장센의 공연적 언어를 반복적으로 투사하며, 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관객에게 친숙하며 잘 알려진 트로프를 대거 생성했다.”

하지만 이렇게나 유서 깊고, 인기도 많고, 그 자체로 정당성이 있는 멜로드라마틱한 시네마 재현 외에도, 다른 재현도 있다는 것이 이 챕터의 핵심입니다.

이 챕터에서 논의되는 세 편의 영화들은, 책 왈, “멜로드라마와 거리를 두고, 멜로드라마 형식을 준거 대상으로 삼되, 기존의 논리를 뒤집는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새롭고, 멜랑콜리하며, 때로는 불길한 상상은 봄베이시를 탐험하고, 관객에게 낯선 모습들을 보여준다.”


주류와 비주류의 대조 개념이 이번 챕터에서 두드러집니다.

책 왈, “<돔비발리 패스트>, <빙 사이러스>, 그리고 <노 스모킹> 같은 영화들은 세계화의 밝은 시각 문화를 적극적으로 훼방 놓고 괴롭히는 형식적 혁신을 도입하여, 어둡고, 멜랑콜리하고, 디스토피아적이며, 대안적인 공간 언어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봄베이가 지닌 영화적 과잉의 주변부에 존재하는 영화로서, ‘본다’는 행위에 얽힌 습관적인 시각 문화에 의해 생성된 ‘맹목’을 재배치하며, 이를 통해 관객은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된다. 이 영화들의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세계들은 멜로드라마의 세계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미학을 형성한다.”

대중적인 것의 주변에 존재하는 시네마이기 때문에 ‘어반 프린지’라고 이름을 붙여서, 이러한 비주류 영화들을 묶어서 저자가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임 드리밍에서 많이 얘기하듯이, 주류와 비주류는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반대되는 것 혹은 상대적인 것이긴 하면서도, 사실 딱 붙어 있습니다.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이 반대되고 상대적인 것이면서도 딱 붙어 있듯이. 차가운 게 뭔지 모르면 뜨겁지도 않고, 뜨거운 게 뭔지 모르면 차갑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류가 뭔지 모르면 비주류도 존재하질 않고, 비주류가 있으니까 주류가 주류로서 인지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류 비주류에 대한 논의는 참 늘 재밌어요. 그리고 이번 챕터에서 다루는 세 편의 영화가 모두 ‘나는 비주류다’는 자각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인지, 특히나 서사 내에서 주인공이 행동하는 방식에서도 ‘나는 비주류다’는 자각이 들어 있습니다. <돔비발리 패스트>는 장르 자체가 자경물입니다. 공권력이 일을 못 하니까 내가 처벌을 하겠다, 라며 도시를 누비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노 스모킹>은 장르가 자경물은 아니고, 여러분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주인공인 K 이 녀석이 정의를 따지는 인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정의 때문에 움직이진 않는데, 어떤 그…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고, 나를 지켜보는 시스템은 내 편이 아니다, 라는 마인드가 서사에 깔려 있습니다. 또한 <빙 사이러스>에 나오는 사이러스도, 고아원에서 학대당하고, 경찰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게끔 스스로가 범죄를 저지른, 그것도 살해를 저지른 인물입니다. 그래서 ‘어반 프린지’라는 비주류 장르 중에서도, 세 편의 영화 모두가, 그중에서도 특히나 비주류 서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반 프린지’이면서 러브 스토리라든지, ‘어반 프린지’면서 가족이 서로 가까워지는 방식을 다룬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 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어… 원하지 않아요. 주류에 속하길 원하지 않아요. 원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겉으로는 보일 수 있는데, 사실은 원하지 않습니다.

<돔비발리 패스트>의 주인공은 자신이 징벌을 하길 원하고, <노 스모킹>에서 K는 시스템에 스며들면서도 시스템에서 못 하게 한다고 하는 흡연을 하길 원하고, <빙 사이러스>에서 사이러스는 영화의 95% 동안 법률 시스템망을 피해서 범죄를 저지르다가 나중에는 범죄 시스템마저 떠나는 듯한 엔딩을 선사합니다.

묘하게도, 이러한 인물들은 비주류 영화에서는 주류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주류인 것 같은 것도, 다른 데 가면 비주류예요. 저번 에피소드에서 말한 것과도 연결되죠. 주류인 경험이 있고 비주류인 경험이 있는 거지, 주류적 존재이거나 비주류적 존재라는 건 없습니다. 봄베이 멜로드라마에 비해 어반 프린지가 비주류라고 할 수도 있되, 동시에, 어반 프린지가 더 국제적 주류라고 보여집니다. 이것이 제 개인의 느낌일 수도 있되, 객관적인 현실이란 게 있다면, 책에 나왔듯이 마틴 스코세이지, 데이비드 핀처, 데이비드 린치, 왕가위, 그리고 박찬욱이라는 감독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한 프린지 감독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프린지 영화들이 더 국제적 주류인 것도 맞겠죠.

그리고 이번 챕터에 나오는 영화들에서, 합법적인 것과 불법적인 것, 내부와 외부, 가족의 고결함과 불결함, 상상과 현실, 기타 등등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책에서 <돔비발리 패스트>에 대해서 이렇게 나옵니다. 책 왈, “철학자 지그무트 바우만에 따르면, 사회는 질서라는 얇은 필름과 같다. 이는 아래에서 벌어지는 혼돈을 부정하고 억제하기 위한 은폐 작전처럼 기능한다. 바우만에게 혼돈은 “주어진 것의 일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경험이다. 혼돈은 “침입, ‘주어진 것,’ 파열, 웬만해선 단단한 정상성이라는 암석에 존재하는 틈, 매끄럽게 흐르는 존재의 일상에 존재하는 구멍”과 같다. <돔비발리>는 도시의 오물을 풀어헤치기 위해 자경인의 시점을 사용함으로써 “정상성”과 혼돈의 인지된 상태들 사이에 충돌을 생성한다. 혼돈은 <돔비발리>에서 중심 무대를 차지하며, 도시의 주체적인 힘이다. 이는 군중 속 한 남자의 유토피아적 욕망과 그러한 욕망을 형성하는 디스토피아적 현재를 둘 다 그려낸다.”

영화 내 서사에서, 주인공은 법이 제대로 기능을 못 한다는 생각을 갖고, 법을 스스로 집행하는 자경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법을 집행하려는 그의 의도가 곧 누군가에게는 혼돈입니다. 일상을 깨뜨리는 강한 혼돈이에요. 

한편, <빙 사이러스>에 대해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책 왈, “거리에서 일어나는 대중들의 활동에 방해받지 않는, 세속으로부터 격리된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내부 공간에 대한 상상은 강력한 환상으로 남아 있으며, 문학, 디자인 양식 및 건축의 발전에서도 나타난다. 특권, 안락함, 그리고 외부 세계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보호받는 장소로서, 내부 공간은 현대적이고 개인적인 정체성을 구축하는 중요한 현장으로 부상했다.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나타난 문학 장르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내부 공간은 광범위한 곳에서 자리매김해 왔다.

영화에 배치된 흥미로운 장치 중 하나는 가족사진이다. 그것은 어둡고 기묘한 이야기를 담은 용기로서 기능한다. 영화에 처음 등장한 이후, 사이러스는 결혼사진을 활용해 관객에게 딘샤 와차의 대가족을 소개한다. 카메라는 먼저 액자에 든 흑백 사진들이 있는 회색 벽을 훑으며, 마침내 대가족의 전형적인 결혼식 사진에 머문다. 사운드트랙에 포함된 사이러스의 목소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레오 톨스토이가 한때 말했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아 있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행하다고. 이것은 세트나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다음 카메라는 여러 클로즈업으로 줌인 하며 결혼사진을 분할한다.”

내부라고 불리워지면, 그것이 내부에 있어야 내부인데, <빙 사이러스>에서도 그렇고, 가족을 다루는 모든 서사는, 그 자체로서 내부가 더는 내부에 있지 않게 되고, 훤히 드러나 보이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가족사진이라는 개념이 참 특이해요. 가족사진이, 이 영화에서도 그렇고, 영화 밖의 삶에서도 그렇고, 가족끼리 찍는 거긴 한데, 그걸 가족끼리 볼 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한테 보여주잖아요. 심지어는 보여주려고 찍는 경우도 있고요. 결혼사진도. 내가 저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데, 희한하게 그걸 사진을 찍어가지고 남한테 보여줍니다. 결혼 자체가. 나랑 저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데, 그것이 굉장히 사적이면서도, 온갖 사람들을 불러가지고 결혼식이라는 것을 합니다. 결혼식에 대해 어떤 좋은 감정을 갖고 있으면 결혼식을 하는 게 너무 좋고 너무 잘됐지만, 안 그런 경우에도 해요, 결혼식을. 심지어 결혼보다 결혼식을 더 중요시하는 경우가 있고요.

가족사진으로 잠깐 돌아가자면, 책 왈, “메리앤 허시는 이렇게 말했다. “가족사진은 20세기 말에 많은 문화와 하위문화에서 가족 스스로의 자기표현 매체로 널리 쓰였다. 가족사진은 상상 속의 결속을 유지함으로써 가족생활의 긴장을 줄이는 역할을 할 수 있는데, 가족사진이 현실의 가족은 부응할 수 없는 가족의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써 실제로는 그러한 긴장이 악화됨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그러니까, 가족사진 자체가 좀… 이건 가짜라는 겁니다. 현실의 가족은 부응할 수 없는 가족의 이미지인데, 그걸 찍음으로 해서, 내부를 외부에 드러내기도 하고, 전혀 외부의 기준에 맞출 수 없는 내부에 긴장감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노 스모킹>에 대해서는 책에 나오기를, 이 서사가 픽션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현실 세계에 대한 은유일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면서,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또한, 서사 내에서도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노 스모킹>이라는 영화가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이 차원에 대한 은유라서, 그 측면에서도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데, <노 스모킹>이라는 영화 내에서 영화 내의 현실이라는 게 있고 영화 내의 상상이라는 게 있되, 그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무너지기 때문에 이중적으로 현실/허구 경계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노 스모킹>의 감독 이름이 카시압이고, 영화 내에서 절대 권력에 가까운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바바 벵갈리인데, 책 왈, “규칙에 얽매인 이 사회는 파시스트적인데, 한 사람이 모든 권위를 갖고 자신만의 규칙을 만든다. 바바 벵갈리의 페르소나는 다수의 강력한 인물을 참고하여 구성되었다. 카시압 자신이 인정했듯이, 바바는 2002년 구자라트 폭동에 연루됐던, 구자라트주의 수석장관 나렌드라 모디일 수도 있고, 영화 속 흡연을 금지한 보건부 장관인 라마도스 씨일 수도 있다. 바바는 정치인, 강력한 영화 제작자, 또는 인도 심의 위원회에 속한 누구든 나타낼 수 있다. 도움을 받으러 오는 의뢰인들은 바바의 무시무시한 요구에 강제로 복종해야 하고,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똑같은 공포의 세계로 보내야 한다. 그래야만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다.”

네. 카시압 감독님은 이 챕터에서 언급되는 여러 감독님들 중 특히나, 창작을 갖고 이래라저래라하는 정치인들에게 강한 반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화 내 현실과 영화 내 상상의 붕괴에 관해서는, 카프카와 흡사하다는 분석과 함께,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책 왈, “권위와 영화 문화에 대한 카시압의 비판은 그가 사용하는 형식에 포함되었으며, 이를 위해 그는 카프카의 실험적인 서사적 상상력을 참고했다. 카프카의 소설은 일반적으로 현실 같기도 하며 꿈 같기도 한 상황을 동시에 표현한다. 독자는 현실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하고 양립할 수 없는 해석이 제시될 때 불안을 경험한다. 비현실적인 사건을 허구로 확인해줄 단서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있지만, 그러한 이분법은 카프카의 소설에서 결코 제공되지 않는다.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에 대한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할 때 독자는 충격을 받는다. 친숙한 대상의 반복적인 사용을 통해 현실의 다양한 해석적 질서가 흐려진다. 펼쳐지고 있는 사건들이 꿈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에 도달할 때, 점점 쌓여가는 충격적인 세부 사항들은 독자에게 더 큰 불안을 주입시킨다.”

네. 어반 프린지. 각종 경계 붕괴가 드러나는 장르다.

이렇게 경계가 허물어지면서도, 그 허물어짐을 보여주기 위하여 분리되어 있기는 한 이 조각조각들이 어반 프린지라는 비주류라고 불리는 이 장르를 더 현실에 가깝게 합니다. 멜로드라마는, 앞서 나온 인용들에서도 인정을 하듯이, 그것이 현실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여기는 경우는 아마 잘 없을 거예요. 물론 그 안에서도 그것이 비현실적이기에 오히려 진실을 담을 수 있다고 하는 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 맞아요. 예를 들어, 내부와 외부가 분리되어 있으니까 그 경계가 붕괴되기도 할 수 있는 거고, 더 나아가, 그것들이 붕괴된 상태로 머물지 않고 다시 또 분리될 수 있으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그 변화를 통해 ‘아, 이 경계가 허물어졌다가 다시 생겼다가 또 허물어졌다가 다시 생기는구나’ 하면서 뭘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서사들에서, ‘진짜’는 없습니다. ‘진짜’는 있을 수가 없어요. ‘진짜’로 내부랑 외부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하나가 되거나 ‘진짜’로 내부랑 외부가 떨어져 있는 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어떤 시공간에서 느끼는 어떤 느낌, 그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짜인데, 그것은 나만 아는 것이고, 나만의 진짜입니다. 그리고 나만의 것인 것이 이 세상 전부예요. 반면 이 세상 전부 내지는 일부의 것이라고만 하더라도, 이미 내 특정한 교집합보다는 더 흐릿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 나한테는 덜 진짜가 되기 때문에 진짜일 수 없습니다. 이 모순적인 것 같은 말을 우리는 대부분 다 몸으로 알고 있다고 저는 경험으로 생각합니다. 말로 설명하기가 복잡해서 그렇지, 다 우리가 알고 있어요. 내가 맛있다고 하는 음식이 유일하게 진짜 맛있는 음식이라는 거,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그게 사랑이지, 다른 그 어떤 외부 증거도 아무 상관 없다는 거,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류나 비주류 논의가 나올 때, 그리고 때로는 주류이고 때로는 비주류인 서사들을 소비할 때, 그게 전부 다 나로 돌아간다는 거, 그리고 그것이 무슨 내가 과대망상증이라서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실제로 나는 나밖에는 알 수가 없다는, 오히려 그래서 남들한테 관심 있는 척하거나 남들을 아는 척하는 것보다 더 겸손한 그 자각이 있으면, 서사를 더 재밌게 볼 수 있습니다. 해석은 나중에, 만약 원한다면, 더 붙이면 되는 거고, 그 경험 안에 있을 때는, 그게 픽션이라고 불리는 서사든, 내 실제 삶이라고 불리는 서사든, 그거를 그냥 충실히 하는 것이 꿀이득인 것 같다.


한편, 이번 챕터에, 재미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리좀. 와우. 어반 프린지 장르가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리좀이라는 단어가 쓰입니다.

책 왈, “어반 프린지는 새로운 영화적 언어를 만들기 위해 지배적인 형식에 맞서 투쟁하며, 이 산업의 주변부에서 나타난다. 주로 젊은 감독들이 만드는 프린지는 정보, 기술 및 금융 흐름의 네트워크 속에서 등장했다. 이는 반계보적이고 리좀적인 형성물로, 분류하기 쉽지 않지만 혁신과 실험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놀라게 한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에게 리좀이란 다양하고 예측할 수 없으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형성물을 구성한다. 나무의 계보적 형태의 반대편에 있다. 리좀은 이질성으로 특징지어지고, 시작도 끝도 없는 형태를 띤다. 이는 통일성이나 위계가 없는 역모형 형성물이다. 리좀은 끊임없는 유동 상태에 있다. 자본주의의 생산, 유통 및 소비 네트워크는 폐쇄 회로처럼 작동하는 게 아니라, 예측할 수 없고 다양한 경로로 움직인다. 오늘날 어반 프린지가 움직이는 경로는 단일 회로를 다른 회로보다 우선시하기 어려운 리좀 형태다. 오히려 프린지의 대형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는 모든 회로의 교차점에서 집합체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프린지를 하나의 닫힌 장르로 분류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런데 이렇게 단일이지도 않고 닫힌 장르도 아닌 리좀형 프린지 장르가 어찌 됐든 간에 프린지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을 정도로는 단일하다는 것도, 요즘에 아임 드리밍에서 계속되는, 모순인 것 같은데 실제 모순은 아닌 그런… 그런 현상입니다. 만약 실제라는 게 있다면 이게 실제 같아요. 둘 다 돼요, 거의 항상. 그러니까 어떤 개념적 특성은 딱 한쪽에 속하는데, 실제의 존재는 개념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거의 항상 여러 가지로서 존재합니다. 차가운 건 차가운 거고 뜨거운 건 뜨거운 건데, 실제의 존재는 어떤 때는 차갑고 어떤 땐 뜨거운 게 실제 같아요. 실제라는 게 있다면. 심지어 그조차도 경험계에서 펼쳐지는 현상일 뿐이고. 

프린지도, 리좀형이라서 단일 무언가로 특징지을 수 없긴 한데, 프린지라고 특징지을 정도로는 단일하다. 프린지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스스로를 재창조하더라도, 프린지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있으니까 그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스스로를 재창조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책 바깥의 픽션물 하나를 언급을 하겠습니다. 이번 챕터에서 다룬 영화 세 편을 좋아하신 분들은 이 픽션물도 아마 좋아하실 겁니다. <살인자ㅇ난감>. 이렇게 읽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살인자, 그리고 난감 사이에 이응이 들어가 있는 형태의 제목입니다. 살인자-ㅇ-난감인데, 살인자이응난감이라고 읽는 건 왠지 이상한 거 같아서, 살인장난감이라고 읽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극 중 인물 중 하나가 이름이 장난감이에요.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인데, 원작자인 꼬마비 님이, 제목을 어떻게 읽으면 되냐는 질문에 대해, 나무위키에 따르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읽고 싶은 대로 읽으면 된다.” 근데 꼬마비님은 “살인자이응난감”이라고 읽으신대요. 이것도 너무 웃겨요. “살인자이응난감”이라니. 그런데 동시에 “읽고 싶은 대로 읽으면 된다”니.

역시. 아. 저는 꼬마비님에 대해서 이 작품 외에는 하나도 모릅니다만, 왜 역시라고 하느냐 하면, 이 드라마를 보시면, “읽고 싶은 대로 읽으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쓸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저는 진짜. 어… 희열을 느끼면서 봤어요. 새벽까지 몸을 혹사하면서 봤습니다. 

아 이게 혹시 이건가? <살인자 ‘이응!’ 난감>. 살인자라니 이응 이응. 이런 이응인가?

아무튼 이 이야기가 히어로와 빌런 사이의 경계의 붕괴라는 측면에서도, 그리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것’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리고 또한 행운과 불운이 한 끗 차이라는 측면에서도, 또 다른 여러 측면에서도 너무나 재미 있어가지고. 그런데 또 그리고 이게 막… 생각을 막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라고 만든 이야기는 유흥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생각을 오히려 안 하게 돼요. 그렇게 그 자체를 생각하고 싶었으면 철학서를 직접 쓰는 게 좋지, 굳이 픽션물 소비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픽션물을 소비하는 가장 큰 첫째 이유는 재밌으니까죠. 재밌으니까 보죠. 재밌으니까 읽죠. 거기서 뭘 배우더라도, 그건 배워지니까 배우는 거지, 일부러 배우려고 쫓아다니면은 그 배우려는 집착 안에 아무것도 못 배우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냥 재밌는 거 보면 된다는 주의가 제 사상입니다. 그 정신을 너무나 충족시킨 <살인장난감>. <돔비발리 패스트>, <노 스모킹>, 그리고 <빙 사이러스>를 재밌게 보셨다면, <살인장난감>도 매우 재밌게 보실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꼬마비님 작품 다른 거 봐야겠다, 계획하고 있어요. <살인장난감>이… 수려해요. 장려해요. 표준국어대사전 왈. 수려하다. “빼어나게 아름답다.” 장려하다. “웅장하고 화려하다.” 네. 이… 아까 제목에 관해서도 “읽고 싶은 대로 읽으면 된다”고 하셨다고 하는데. 이 약간… 이 자신감. 이… 이것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내가 이걸 써서 세상에 내놨으면 그걸로 어느 정도 끝난 거잖아요. 그걸 쫓아다니면서 고치고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나 확인하고,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한 어떤… 약간은 될 대로 되라는 자유도가 없으면 이런 이야기가 안 나왔을 것 같습니다.

너무 시원했어요. 카타르시스가 어마어마했고요. 재미나게도, 내면 작업 관심 있으신 분들이 보시면, 눈에 띄는 지점들이 있으실 수 있습니다. 저는 어… 그 측면에서도 너무 웃겼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극 중 슈퍼히어로라고 봐도 될 만한 인물의 삶이 꼬이는데 안 꼬여. 될놈될인데 안될놈안될이야. 동시에 되고 안 되고를 가르는 게 무의미하기도 하고, 이것이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선택이라고 해야 할지도 난감하고, 제목에 난감이 들어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웹툰 버전을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또한, 현실적이라고 나온 서사들보다 이렇게 명백하게 허구라고 할 만한 요소들이 들어간 서사가 훨씬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근데 그 와중에 <살인장난감>은 슈퍼히어로물이라고 볼 수도 있되 초능력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해요. 타이밍, 신체 반응, 기술의 고장, 이런 요소들로 인하여 운명인지 선택인지가 펼쳐지는데, 그것이 비현실적이라고 한다면 뭐, 어쩔 수 없습니다만, 이것이 현실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 저의 경험입니다. 진짜로,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세상이 펼쳐지는데,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 같이 보이는 이유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내 마음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지난 에피소드에서도 한 사람을 구성하는 관념이 뭐, 천만 가지는 된다, 이런 얘기를 했었는데, 그걸 내가 다 의식적으로 알고 있질 않아서 마음대로 안 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근데 조금만 더 알아도, 진짜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대로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을 하다 보면, 웃겨요. 그러니까 막 뭐 슬픈 게 안 슬프고 아픈 게 안 아프고 그런 좀비 상태가 아니라, 늘 말씀드리듯이, 느끼는 거 다 느끼는데, 그 와중에 이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너무 웃겨져요. 이게 뭐야. 이게 뭐람? 근데 그 정서가 <살인장난감>에 있습니다. 최우식 님이 주인공 슈퍼히어로? 혹은 그냥 히어로?의 역할을 맡으셨는데 그 특유의 표정이 있어요. 이게 뭐람? 이게 뭔 일이람?

제가 최우식 님을 좋아합니다. <거인> 때부터 좋아했어요. 2014년 개봉한 영화, <거인>. 최우식 님 특유의 그… 무슨 역할을 맡아도 다 자연스러울 것 같은 그 느낌이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살인장난감>에서 처음에는 맹한 것처럼 나오더니, 갑자기 서늘해지는데, 역시, 역시 그는 최우식이었던 것이었다. 참 진짜 배우라는 직업은 너무 신기해요. 너무 참… 어떻게 하는 걸까? 특히 이렇게 하나의 작품 안에서 극과 극을 왔다 갔다 하는 거는, 근데 그 와중에 또, 마지막까지, 처음의 그것을 간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처음에 극 중 히어로가 약간 맹한 듯하다가, 서늘해지는 지점이 있는데, 완전 과거를 망각해가지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이 변해가지고 그런다기보다는, 맹한 때도 있고 서늘한 때도 있고, 끝에 가서는 또, 맹하다기보다는… 그… 선한 것도 아니고 그… 솔직하다고 해야 하나. 이 히어로가 처음에 맹해보였다면, 그것도 솔직하게 맹해서고, 서늘했다면 그것도 솔직하게 서늘해서고, 끝에 가서 엉엉 울 때도 그냥 솔직해서 그런 것 같다는 느낌 같은 게 있었습니다.

아… 최우식 님 30년 후에 어떤 연기를 하고 계실지 너무 궁금합니다. 아무튼, 상반되는 듯한 개념들 사이의 경계의 붕괴를 경험해보고 싶으신 분들, <살인장난감>, 살인자이응장난감, 강력 추천합니다. 꼭 보세요.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이 방법, 가끔 시도해보면 좋은 것 같아요, 여러분. 책이나, 어떤 그런 목록을 골라서, 거기에 있는 것 중 내가 구해서 볼 수 있는 건 거의 다 한번 봐보는 거. 그게 좋든 싫든 일단 그냥 좀 봐보는 거. 좋을 것 같든, 싫을 것 같든. 이 책에 나온 인도 영화들은, 어… 처음부터 좋을 것 같긴 했습니다. 박찬욱 감독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영화라는데 싫어도 크게 싫을 순 없지 않나 싶었고, 아니나 다를까, 전혀 싫지 않고, 심지어 매우 좋았다. 근데 <누아르 어바니즘>이라는 어떤 목록의 기준이 있지 않았더라면 이 영화들의 존재를 몰랐을 것 같고, 그 측면에서 정말, 어… 잘한 것 같다. 챕터 4에 나온 영화들 중에서는, 아마 더 찾아볼 수 있었을 텐데 안 본 영화들도 많습니다. 그 챕터에는 영화가 정말 너무 많이 나와가지고. 그런데 다른 챕터들에서는 볼 수 있는 건 상당 부분 많이 찾아본 것 같고. 재밌었다.

앞으로 남은 챕터는 8, 9, 10인데, 영화 얘기가 주를 이루지 않는 챕터들입니다. 그래서 책에서 다뤄지는 매체들을 직접 경험하는 데에 좀 어려움이 있는데, 그게 좀 아쉽습니다. 이러한 아쉬운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 중 일부는 창작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기술이 당대에 부재했거나 여전히 부재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요즘에 제가 기술 얘기는 잘 안 하는데, 기술에 여전히 관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한, 새로운 기술이 계속 나올 겁니다. 저는 기술 그 자체가 제 표현 분야가 아니라고 여기는데, 그래도 좋은 기술이 나왔을 때 그걸 쓸 의향은 언제나 있고, 지금도 희망적입니다. 결국에는 우리가 ‘나’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각자가 ‘나’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저절로 펼쳐질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여기서 ‘저절로’란, 어차피 나 좋아서 할 일을 해서 남도 좋아지는 그러한 저절로를 말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나를 위하는 일이 곧 남을 위하는 일이다. 남 위하려다가 나도 못 위하고 남은 더더욱 못 위한다. 그래서 한아임은 한아임 할 일이나 하고 있어야겠다, 그런 교훈을 주는, 참 구하기 어려운 챕터 8, 9, 10의 작품들이 있었다. 그러합니다. 네.

오늘 에피소드에서 언급된 각종 토픽들 중 링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전부 쇼노츠에 올려놓을 거고요, 제 홈페이지에 가시면 녹취록을 보실 수 있는데, 그 링크 역시 쇼노츠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특이 취향 친구가 있으시면, 이 팟캐스트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그럼, 아직 깨어 계신 분들도, 잠드신 분들도,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아임이었습니다.


모든 링크

🌃🤖👁‍🗨 『누아르 어바니즘: 현대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들』

모든 음악

Opening

  • The Play – Instrumental Version – Eli Benacot

Within episode

  • Rooted in Him – Escape Artist
  • Sharabina – Jaan – Instrumental Version
  • Mahesh Vinayakram – Shivoham – Instrumental Version

Closing

  • St. Charles – Mark Yencheske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기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 2024 한아임

소개

✨ 한아임입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있습니다.